국악신문TV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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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중국 조선족의 '농악무'농악무(상모춤)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선정된 무용류 세계문화유산 종목이다 중국 조선족 농악무(상모춤)의 발원지인 왕청현은 조선족 농악무의 전승, 보호, 발전에 전념해 왔다. 조선족의 농악무,상모춤이 2009년 9월 ‘2009 인류 무형 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된다. 동북의 조선족 사회가 등록한 국가급 무형 문화유산 가운데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선정된 '농악무'는 상모 돌리기가 나오는 한민족의 '농악놀이'에서 변모된 것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을 두른 한국의 상모와 달리, 중국 조선족의 상모는 중국 사회에서 경사와 축복의 색깔인 붉은색 바탕에 테두리는 노란색이다. 상모를 돌리는 물채 또한 갈고리를 만들어 필요에 따라 길이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물채에 꽂는 구슬도 단조로운 색상에서 칠색 구슬로, 머리에 둘러매는 수건은 흰색에서 진달래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상모를 돌리는 길이도 12m에서 28m로 늘어난 것이 중국 조선족의 상모이다. 김명춘 전승인은 이러한 중국 조선족 상모를 직접 만들고, 평행 돌리기·좌우 돌리기 등 단조롭던 돌림법에서 뛰면서 돌리기·돌면서 돌리기 등 새로운 돌림법을 창작했으며, 농악무를 공연하면서 장고를 메고 상모를 돌리는 사이를 꿰뚫고 지나가는 방법도 창작했다. 그는 32m나 되는 상모를 돌려 ‘상모 대왕’이 되었다. 농악무가 처음으로 중국의 국가급 무형 문화재에 등록된 것이 2006년이다. 농악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2007년 왕청현상모춤예술단이 왕청현 문화관에 간판을 걸고 농악무 초청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돌과 2008년 중국 북방 관광 교역회 경축 행사에서는 천 여 명이 연출한 상모 놀이로 장관을 이루었으며 중국 조선족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예전에는 대부분 퇴직한 노인들이 노년 생활을 즐기고자 상모를 돌리며 농악무를 추던 것에서 오늘날에는 유치원·소학교·중학교의 정규 교과 과정으로, 나아가 기업 단체에도 양성 센터가 세워져 농악무가 널리 보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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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농악의 '동고리받기'태백산맥이 가로막혀 있어 영동 특유의 향토적 특색을 지닌 강릉농악은 강릉농악은 여러 마을이 모인 연합팀의 성격을 갖고 있다. 강원 지역의 농악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농악과 영동농악으로 구분된다. 영동농악은 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강릉, 삼척, 울진, 정선, 평창, 동해, 양양, 고성 등지에서 성행하는데, 강릉농악은 바로 영동 지역 농악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알려져 있다. 강릉농악은 지신밟기에서 사설이 다른 지방에 비해 길고 다양하며, 당굿이 없는 대신 다른 지역의 농악에는 없는 두레풍물, 즉 김매기농악과 질먹기, 마당굿이 짜여진 것이 특색이다. 특히 달맞이굿(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 횃불놀이, 놋다리밟기(젊은 여자들이 1명을 뽑아 자신들의 허리 위로 걸어가게 하는 놀이)가 있어 주목된다. 강릉농악은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사)국가무형문화재 강릉농악보존회가 보존과 전승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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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동래고무는 고려초기 여악(女樂)을 관장했던 교방청(敎坊廳) 여기(女妓)들에 의해 연행되었던 향악정재(鄕樂呈才)인 무고(舞鼓)가 동래관아(東萊官衙)의 교방으로 전래되면서 관아에 예속된 기녀들에 의해 동래고무라 칭하여 연례무로 연행되었던 북춤의 한 유형이다. 이 춤은 궁중정재가 동래관아로 전래된 춤이기 때문에 교방청 계열의 법춤으로 엄격한 춤의 규범이 선행되어야 하며, 궁중정재의 영향을 받아 품위를 중시하며 우아함과 화려함 그리고 섬세한 춤사위가 특징이다. 중앙에 큰 북을 놓고 원무 4인이 나란히 등장하여 북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이어 협무 4인이 나오면서 지화자를 가창하면 원무는 그 지화자에 맞추어 북을 치면서 북 주위를 돌며 북춤을 춘다. 손을 여미는 사위, 단아하고 섬세한 디딤법, 나비가 하늘거리는 것 같은 아리따운 팔사위, 북을 치는 활달한 북춤사위 등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려한 신체의 움직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주음악은 영산회상곡으로 동래에서는 정악 또는 풍류라 일컫고 잔영산(세령산)·염불·도드리·지화자(창사)·자진타령·타령·군악의 순으로 연행된다. 복식은 원무가 녹의홍상·녹색원산·색한삼·족도리를, 협무가 녹의홍상·색한삼을 착용하며 8인의 무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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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 지영희지영희 전통음악가로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이다. 본명은 지천만(池千萬),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1909년 9월, 경기도 평택군 포스연 만호리 소재의 경기 세습무 지용득 명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 김기덕이 평택군 포승면 일대에서 알아주는 세습무 집안을 이어가는 무속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독학으로 피리, 호적 해금, 장고 등 여러 악기를 섭렵했고, 전통음악과 관련된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항련에게 호적을, 정태신에게 양금을, 지용구에게 해금을, 양경원에게 피리를, 김계선에게 대금풍류를, 방용현에게 대금산조와 풍류를, 최군선에게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 장고를, 박춘재에게 경기소리와 서도소리를, 신쾌동에게 거문고산조를, 김상기에게 거문고풍류를 배웠다. 이처럼 여러 무악 명인들에게 장단 등을 배웠으며 가야금과 아쟁은 자득했고 해금산조, 피리산조 연주자로 유명하다. 1937년 조선음악연구소에 입소하여 악사가 된 이후, 1938년에는 한성준무용단(韓成俊舞踊團)의 반주악사로 활약하였으며, 1946년에는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가 되었다.1960년에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서 유망한 신인들을 많이 길러냈다.1962년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프랑스 파리 세계민속예술대제전에서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것은 매스컴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다. 1963년 한국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하였으며,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 지휘자 취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67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197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76년 미국 하와이에 한국민속예술원을 창설하고 활동하였으나 1980년 작고하여 우리 국악계에 평생을 헌신한 고귀한 삶을 마감하였다. 부인은 국가무형문화재 23호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성금연(成錦鳶) 명인이다. 자녀로는 지수남, 지수복, 지성자, 지미자, 지순자, 지윤자, 지명자, 지재현이있다. 손자 강봉천이 국악 작곡으로 활약을 하고 김귀자, 최희연 등이 대를 잇고 있다. 이철희, 이상윤이도 미국에서 대를 잇고 있다. 지영희(池瑛熙, 1909~1980)약력 1909년 경기도 평택 출생 1938년 한성준무용단 반주악사 1946년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 1960년 국악예술학교 교사 1963년 한국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조직 1966년 제1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1967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기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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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 내세운 안중근 의사1909년에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주범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 중국 · 일본 세 나라가 서로 도와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9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천주교와 함께 개화 사상을 받아들인 집안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신학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독립 정신을 키웠다. 청년 시절에는 교육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등에 참여했다. 1907년에 일제가 한일 신협약을 통해 사실상 대한 제국의 주권을 빼앗자, 안중근은 러시아로 건너가 의병대를 만든 뒤 항일 운동에 들어갔다. 의병대의 참모중장에 임명된 그는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두만강 근처에서 국내 진입을 위한 군사 작전을 벌였다. 이때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매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 대림사에서 마을사람들이 안중근의사추모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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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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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독립운동가 최재형한말의 독립운동가.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듬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최재형의 집안은 극심한 가난으로 당시 하산에 있는 한인학교에도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해서 러시아학교에 다녔다. 11세 때 집에서 가출하여 상선의 선원이 되었고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페테르부르크까지 항해했고 이때 많은 견문을 넓혔다. 7년간의 선원생활로 러시아 뿐만아니라 세계문물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일했으며 이때문에 러시아 군관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한인들의 자녀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졌으며 러시아어와 문물을 공부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리고 고등소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한인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다. 조선인들은 최재형을 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1908년 4월 얀치혜에서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항일의병 활동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은 니항사건을 빌미로 연해주 일대에 출병하여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송 도중 탈주를 시도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헌병대가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서 최재형의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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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소화권번 예기들 단체사진(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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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춤 대가 김진홍 선생이매방 선생을 만나 한국춤의 세계를 알았지만 김 선생은 이매방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만의 춤, '김진홍류'를 만들어 냈다. "안으로 삭일 수 있는 춤, 내면 세계가 깊이 있게 녹아 있는 춤이 바로 이 고장 춤이지." 60년 부산 춤판을 지킨 김 선생이 정의하는 부산 지역 춤사위에 대한 이해이다. 이매방(승무,살풀이), 이춘우(입춤), 문장원(동래한량춤), 김계향(지전춤) 선생 사사했다. 김진홍 약력 1935년 경남 하동 출생1955년 부산 동구 범일동 김진홍 무용학원 개설1983년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무용부문 장원(승무) 제33회 진주개천예술제 특장부문 최우수상1987년 부산광역시 문화상 수상1991년 한국무용협회 이사1993년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상임 안무자1994년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장1996년 부산동아시아 경기대회 및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 문화식전 전문위원2008년 부산시 예술총연합회 부산예술대상 ㈔우리춤협회 고문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 고문 부산민속예술보존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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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두계놀이 향두 오현승과 법륜스님"오늘 비오는 날 소리 참 듣기 좋네요. 사진 한장 찍읍시다"(법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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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파, 진도북춤 타고 맥도날드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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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처럼 살다 간 아리랑 명인 정은하!고 정은하(1956-2023)명인! 영천 출생으로 아리랑 명인이다.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시 혁혁한 기여를 했다. 아리랑 리더로서 전국 아리랑공동체 결속에 기여해 왔다. 영남아리랑보존회장을 맡으면서 지부와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영남지역 25여 지부와 제주도아리랑보존회, 울릉도아리랑보존회 를 탄생시켰다. 특히 영천아리랑 음반(1999년), 대구아리랑(2003년), 영남지역 아리랑 음반(2006년)을 남겼다. 또한 2003년부터 대구아리랑축제와 대구아리랑전국경창대회를 개최해 왔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장으로서 사할린아리랑제에도 함께 해왔다. 사비를 털어 제1회 상주아리랑제(2008년)와 제1회 울릉도아리랑제 첫 막을 여는데 큰 역활을 해주었다. 정은하 선생은 영남지역 민요와 영남아리랑을 전승하고 있는 전승자로서 현장조사시 음악적 분석에 대해서 탁월한 안내를 해주었다. 그만큼 연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음악적 기량과 기억력이 좋아서, 언제나 전화만 해도 궁금해 하는 각 지역 아리랑은 물론 경기민요에서부터 서도민요, 영남민요는 지역의 토리대로 척척 불러주었다. 특히 잘 들리지 않는 일제강점기 SP음반 음원을 녹음해서 보내면 사설을 줄줄 풀어 주었다. 필자가 2009년부터 안동대 민속학연구소에서 수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현장조사사업단 연구원으로 참가하던 시절에 채록한 음원을 들려주면, 서울 사람 귀에는 전혀 채록이 안되는 발음과 사투리 뜻까지 해결해 주었다. 영남지역 향토민요 전승단체들과 학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주었다. 우리 연구자들이 이렇게 빚을 지었다. 17세 되는 1970년대 중반부터 31살까지 서울에서 국악활동을 했지만. 평생 투박하지만 정겨운 경상도 사투리 그대로 말하는 것이 매력이고, 타고난 리더로서 여장부였다. 제자들의 학비도 대주는 등 많은 장학사업을 했다. 결혼도 안하고 평생 함께해 온 국악계 명사와 소리꾼들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전해 주었다. 스승이신 이창배 선생부터 이춘희 선생까지 국악계와 국악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나에게는 30년 동안 함께 협력해 온 아리랑운동 동지였다. 이제는 그 이름처럼 하늘에 별이 되었다. 별이 되어 은하수로 돌어갔다. 정 은 하!!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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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홍보대사 이혜솔 명창, 방한한 고려인에게 칠순기념 한복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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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하는 인간’ ‘2023 여우락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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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줄 타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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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신고 훨훨’ 유지숙 명창, 출연 40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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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민요 '상여소리'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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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백중놀이와 예능보유자 박동영'밀양백중놀이'는 매년 음력 7월 보름경에 경상남도 밀양 지방에서 지주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으로 하루를 즐겁게 노는 데서 유래한 성인남녀놀이이다. 박동영은 경남 밀양 출신, 1979년 밀양민속예술보존회 가입하면서 밀양백준놀이 전승활동 전개, 하보경 명인에게 양반춤,범부춤, 북춤 전수, 김타업에게서 쇠가락, 장구가락, 병신춤 전수, 김상용에게 오북춤 전수 받았다. 2002년에 '상쇠'와 '오북춤'으로 밀양백중놀이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99년 제1회 밀양시민대상(예술 부분) 수상, 1989년 제3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부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전승활동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박동영 예능보유자는 보존회장을 겸하면서 밀양 백중놀이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연합회장까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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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경산아리랑제, 경산아리랑으로 첫 막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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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송만갑의 소리제를 이어간 금파 강도근흥보가를 가장 멋들어지게 불렀던 이는 고(故) 강도근 명창이다. 판소리 명창 강도근(姜道根)은 전북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본명은 강맹근(姜孟根)이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가들이 많은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줄타기 명인 강원종의 아들이자, 대금산조 명인 강백천의 사촌동생, 판소리 명창 안숙선의 외삼촌이다. 판소리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산홍과 가야금의 명인 강정열은 당질이며, 가야금산조로 남원과 진주에서 활동했던 강순영 또한 그와 사촌간이다. 10세 때부터 남원의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사사했다.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부른 흥보가는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 1865-1939)-김정문(金正文, 1887-1935)으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수궁가'에도 능했는데, 그가 부른 수궁가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으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동편제의 마지막 명창 강도근은 우직한 농사꾼이기도 하다. 농사꾼 아버지인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돈이나 명예에 초연한 고집스러운 소리꾼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농사꾼임을 자처하며 고향 남원에서 농사를 지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리에서는 검은 흙냄새가 난다. 판소리에서는 이런 소리를 ‘철성(鐵聲)’이라고 한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모습으로 약간 쉰 듯하면서도 청청한 수리성과 가늘고 단단한 상청을 이루는 성음이 특징이다. 생전 고향 남원을 떠난 적이 없어 음반은 적은 편이다. 1990년 흥보가와 수궁가완창 LP레코드 음반을 통해 그의 소리 세계를 접할 수 있다. 강도근 후계자 양성소를 설립, 동편제 소리의 맥을 이어온 판소리 동편제의 마지막 대가이다. 안숙선(국립창극단장)은 초기에 그가 길러낸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17세 되던 해에 동편제 판소리 명창 김정문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강도근은 흥보가 중'제비 후리는 대목'이 특기이다. 20세 때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 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고, 25세 때에 구례로 가서 박봉술의 형 박봉채(朴奉彩)에게 판소리를 지도받았다. 지리산 쌍계사 일대에서 7년여 동안 혼자 공부한 후 하동으로 유성준을 찾아가 판소리 수궁가를 배웠다. 해방을 전후해서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호남창극단 등을 전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목포, 이리, 여수, 순천 등지의 국악원에서 창악 강사를 지냈다. 1973년 이후 남원국악원을 창립하여 강사를 지냈고, 틈만 나면 선유폭포 등 지리산 등지를 다니며 연습을 한 노력파였다. 조선시대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 오던 그는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금파 감도근 약력 남원 출생 (1918-1996) 1928년(10세) 김정문에게 흥보가 사사 1953년 부산 전국판소리경연대회 최우수상 1981년 한국국악협회 국악공로상 1985년 남원시민의 장 문화장 1986년 KBS국악대상 1992년 동리대상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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