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동양평화론 내세운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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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 내세운 안중근 의사

  • 특집부
  • 등록 2023.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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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1909년에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주범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 중국 · 일본 세 나라가 서로 도와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9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천주교와 함께 개화 사상을 받아들인 집안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신학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독립 정신을 키웠다. 청년 시절에는 교육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 등에 참여했다.

1907년에 일제가 한일 신협약을 통해 사실상 대한 제국의 주권을 빼앗자, 안중근은 러시아로 건너가 의병대를 만든 뒤 항일 운동에 들어갔다. 의병대의 참모중장에 임명된 그는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두만강 근처에서 국내 진입을 위한 군사 작전을 벌였다. 이때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매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시 대림사에서 마을사람들이 안중근의사추모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