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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점점 조절되고 길이 들어 달리 마음 쉬어지고, 물 건너고 구름 뚫어 걸음걸음 따라오나, 손에 고삐 잡아 조금도 늦추지 않고, 목동이 종일토록 피곤함을 잊어라." 명언 같은데 알쏭달쏭하고 오래된 시어 같은데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연초 배냇소와 더불어 소개했던 십우도(十牛圖)의 한 장면이다. 본성을 찾는 것을 소에 비유한 선화(禪畵)이기에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한다. 종교적 깊은 뜻을 두루 알 수는 없지만, 쇠고삐 틀어쥐고 소를 이끄는 것 정도는 이해하겠다. SNS에 걸어둔 내 표제어, '깔 비고 소 띠끼고'의 의미라고나 할까. 항간에 회자 되는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언설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산으로 들로 나가 소에게 풀을 뜯기고, 꼴(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베어 망태기에 담아오던 것이 소싯적 일상이었던 이들에게는 너무도 선명한 풍경, 이를 남도에서는 '소뜯긴다'고 했다. 시골에서 자란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어린 시절 날마다 산으로 들로 나가 소에게 풀 뜯기는 일이 일상이지 않았는가. 이를 불교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깨달음에 비유했으니 그윽한 은유, 나아가 지극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소 부리는' 일이 그렇게 심도 있는 일일까? '부리다'는 기계나 기구 따위를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뜻이다. 소나 말(馬)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켜 일하게 하는 데도 사용하는 말이다. 소를 키워보지 않은 이들은 궁금해할지 모른다. 그렇게 덩치 큰 소를 어린이가 어떻게 다룰 수 있나? 하지만 소는 간단한 명령어를 잘 알아듣고 행동한다. '이랴!'하고 고삐를 당기면 오른쪽으로 가라는 뜻이고 '자라!'하고 고삐를 찰싹거리면 왼쪽으로 가라는 뜻이다. '워워!'하고 고삐를 잡아당기면 정지하라는 뜻이다. 본래 소의 성품이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어린이에게도 순종하는 이유는 고삐 때문이고 고삐에 연결된 코뚜레 때문이다.쇠코뚜레(牛鼻环) 매어 길들이는 법언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쇠코뚜레의 역사는 매우 깊다. 쇠코뚜레라는 뜻의 한자 권(桊)이 있으니 적어도 한자 발명 이전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소를 가축으로 다루기 시작한 기점인지도 모른다. 사전에서는 '소를 순조롭게 잘 다루기 위해 소의 코를 뚫어 끼우는 둥근 나무테'라고 코뚜레를 정의한다. 본래 소는 힘이 세고 고집이 세어 말을 잘 듣지 않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해 코뚜레를 꿰어 잡아당기면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코꾼지', '코빼이', '군들레' 등으로 부른다. 노간주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다래나무, 소태나무, 이게 모두 쇠코뚜레 재료들이다. 이 나무들은 껍질을 벗길 때 물기가 적당하여 잘 벗겨진다. 껍질을 벗겨낸 표면이 매끈하여야 소의 콧구멍을 뚫을 때 고통이 적다. 또 나무가 잘 휘어져야 한다. 박달나무는 견고하기에 아예 삶아서 사용하기도 한다. 코뚜레를 언제 하는가? 출생 후 5~6개월 정도다. 계절로는 여름철이 좋고 적어도 1년 안에 해야 한다. 1년이 넘어가면 소가 새끼를 밸 정도로 성장하기 때문에 제압하기 힘들다. 대개 오월 단오에 쇠코뚜레 뚫기를 한다. 상처는 일주일쯤 지나 아물게 된다. 코뚜레를 뚫은 소는 길들이기를 해야 한다. 멍에를 지우고 무거운 돌을 달아 끌게 한다. 장차 소달구지나 쟁기를 끌게 하기 위해서다. 이때 간단한 명령어를 습득하면서 점차 사람에게 순응하게 된다. 이 소 길들이기가 단순하지 않다. 선종의 심우도에 깃든 과정들이 난해하긴 하지만 소 길들이기 과정,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들이 지극한 은유로 설정되어 있지 않은가.씨압소의 코뚜레와 깨달음연초, 소의 해를 맞는 의지를 씨압소 전통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코뚜레와 관련된 행간만 요약해둔다. 씨압소는 씨앗이소 즉, 씨를 잉태하는 소라는 뜻이다. 그래서 배냇소라고 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입히는 옷을 배내옷이라고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열네 살이 되면 씨압소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입학생부터다. 무상으로 분배받은 송아지가 생후 6개월이 되면 '목매기' 즉 목에 고삐걸이를 한다. 이후 뿔이 나오고 생후 1년이 지나기 전에 코뚜레를 뚫어 채운다. 생후 13달 정도 되면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이 280일로 사람과 거의 같다. 생후 2년이면 새끼를 분만하게 된다. 통상 이 새끼를 씨압소 받은 소년이 갖고 어미소를 씨압소 준 이에게 갚는 것이 씨압소 전통이다. 소년은 16세가 되어 자기의 소를 갖게 된다. 혼인할 수 있는 자격도 얻게 된다. 성년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소를 생구(生口)라고 했다. 왜 그리 불렀을까. 사전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 소, 말, 돼지, 닭, 개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지금의 반려동물에 비추어보면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것에 견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와 개, 고양이 따위는 가축보다 반려동물로서의 의미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지난번 개의 목줄 혹은 개목걸이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제압이나 복종만을 위한 매개인지 재삼 질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의 코뚜레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벽사진경의 한 상징으로 활용되었던 사례를 보면 더 명료해진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교의 지극한 깨달음의 과정에 잃어버린 소를 찾고 길들이며 종국에는 흰소 타고 피리 불며 들어오는 동자를 상정했겠는가. 물론 코뚜레를 깨달음의 과정에 중요한 제재로 등장시키는 온전한 이유를 다 알기는 어렵다. 단순히 짐작할 뿐이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길들이고 종국에는 미련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 심우도라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곽암의 심우도와는 다르게 보명의 심우도에서는 수제(受制)로써 규칙을 따르는 것을 세 번째 단계로 설정한다. 보명의 다섯 번째 단계인 목우(牧牛)가 바로 그것이다. 소싯적 일상으로 돌아가 소 풀 뜯기던 일과 견주어 본다. '깔비고 소띠끼고' 이것을 한자로 바꾸면 목우(牧牛)다. 농담조로 말하자면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어린 시절부터 깨달음의 도(道)를 닦기라도 했던 것일까? 비유를 달리해보면 이 생각이 좀 더 명료해진다. 키우라는 소는 키우지 않고 헛짓만 해대는 이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묵묵히 자신의 영역에서 꼴 베어 소 키우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의 과정을 걷는 이들 아닐까.쇠코뚜레와 반려동물 목줄의 행간구례 운조루 대문 한 가운데에 소의 코뚜레가 걸려 있다. 남도뿐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풍속이다. 입춘첩을 붙이고 소코뚜레를 걸어놓거나, 정초에 엄나무, 복조리와 함께 코뚜레를 벽에 거는 풍속이 모두 그렇다. 성질이 고약한 소를 길들이는 것이기에 사악한 귀신도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의 발로일지 모른다. 나쁜 것을 물리친다는 생각은 벽사진경 즉, 나쁜 것은 몰아내고 좋은 것을 불러들인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쇠코뚜레와 고삐를 포함해 목줄의 사전적 의미는 개나 고양이 등의 동물 목에 둘러매는 줄을 말한다. 하지만 영혼의 끝을 지키는 체로키족의 개로부터 이집트 신전을 지키는 개, 민화로 그려져 대문을 지키는 문배도의 개까지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었다. 쇠코뚜레가 갖는 벽사진경의 의미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각자의 전공으로 묵묵하게 소 키우는 일이야말로 벽사진경의 진정한 부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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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싸구려 어허허 굵은 엿이란다 정말 싸다 파는 엿/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석달 열흘 백일삼제/ 화초가리 더덕가리 동삼가리가 다 들어간 엿/ 열아홉살 먹은 크내기가 동삼물로 제조를 했다 지름이 찍찍 흐른다~" 2009년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졸업식 발표회 장면 중 하나, 객석의 뒷자리에서 갑자기 엿판을 든 엿장수가 등장하더니 관객들을 훑으며 무대로 올라온다. 엿가위로 리듬을 맞추며 해학적인 엿타령을 구수하게 뽑아낸다. 저자에 흘러 다니는 말은 '엿장시 맘대로'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격조 있고 운율 있는 노래이니 '엿장수 가락'이라고나 할까. 무대에 오르자 걸쭉한 입담이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이어진다. "에, 이 엿장시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멀리 진도에서 올라온 엿장시인디, 오늘 엿을 쪼깐 많이 폴아서 진도 갈 여비를 해야 쓰거쏘!" 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자그마한 키에 귄 있는 몸짓, 엿타령을 한 주인공은 졸업생 조유아다. 엿타령 하며 객석을 돌았는데 엿판에 수북이 돈이 쌓였다. 자그마치 진도를 십수 번 다니고도 남을 금액이었다나. 그뿐 아니다. 당시까지는 이름이 조은심이었던 송가인이 씻김굿으로 졸업 공연을 준비했으니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이 어쨌을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후 조유아는 전공 판소리보다 엿타령 가수로 더 많이 알려져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송가인은 트롯트 가수로 전향하여 이미 국민가수가 되었다. 박색구, 조오환, 조유아로 이어진 삼대 엿타령 국립창극단 정단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유아가 엿타령을 잘하는 데는 그만한 내력이 있다. 아버지 조오환이 엿타령의 명인이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 닻배노래(전남도지정 제40호) 보유자이기도 한 조오환은 엿타령 뿐만 아니라 만년필타령, 뱀장수타령, 비손소리 등 못하는 소리가 없다. 일찍이 고향 민속문화의 보전 전승에 눈을 떠, 진도북놀이며 사물놀이, 상여소리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해왔다. 조오환의 엿타령은 어머니 박색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MBC민요대전(한국민요대전)에 고 박색구의 엿타령과 민요가 여러 곡 실려있다. 명실상부한 삼대의 엿타령이다. 뿌리를 추적하면 아득한 조상으로 연원을 좇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 엿타령이 현장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 남편을 여읜 박색구는 좁쌀 등으로 엿을 만들어 오일장인 진도군 의신면 돈지장이나 읍장에 내다 팔았다. 친척이나 이웃들의 비웃는 소리를 감수하며 목포, 무안 등 서남해 일대를 유랑하며 엿을 팔기도 했다. 그 현장에서 엿을 팔면서 불렀던 노래가 지금의 조유아 엿타령이다. 조오환은 이 현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진도민속예술단'이라는 연희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진도읍에서 실제 엿을 만들어 팔면서 엿타령 공연도 하고 전수도 한다. 무쇠솥에 장작을 지피는 등 엿 만드는 과정도 전통방식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다. 농업이나 어업의 맥락이 사라져 노래만 남은 문화재들에 비하면 컨텍스트까지 보존하고 전승하는 명실상부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장시(場市)와 엿타령 엿타령은 엿판을 지고 엿을 팔면서 부르던 노래다. 엿장수타령, 엿파는 소리 등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통칭하여 엿타령이라 한다. 어떤 시점 이후에 유흥을 위한 노래나 현장 맥락이 소거된 민요로 정착했다. 근대 이후 무대화되어 유희 민요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북한 민요집이나 전국 각지의 민요자료에도 엿타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진 정보 중 하나는 김홍도의 씨름 그림이다. 엿판을 지고 엿을 파는 엿장수가 그림의 포인트다. 당대 풍속을 소상하게 알려준다. 엿판 지고 엿을 팔기에 통상 시장을 배경 삼는 상업풍속으로 해석한다. 상업민요니 상업노동요니 하는 이름이 그래서 나왔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5년(1520) 3월 21일자 기사를 참고한다. "신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철저하게 금지했는데도 지금은 전일보다 심하여 시장에 나오는 자가 몇만 명에 이르니 (중략) 장시(場市)는 근년부터 생기기 시작하여 시장이 열리는 날에는 남녀간에 주육(酒肉, 술과 고기)을 마련하여 시장에서 팔아 그 이(利益)를 취하고 있으니..." 이 행간에 엿장수가 있다. 엿의 문화사를 추적해보면 명절떡과 조청엿에 닿고 장시의 엿장수에 닿는다. 16세기 이후 서울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장시(오일장)가 엿장수의 배경이라는 점 명백해 보인다. 엿파는 행위만 있는게 아니다. 예컨대 농사를 지어 좁쌀을 생산하고 무쇠솥과 장작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엿을 만들며 또 오일장에 내다 팔면서 엿타령을 연행하는 것은 명백한 종합장르다. 개별단위가 아닌 종합장르를 무형문화재 지정 등의 방식을 빌어 보존 전승할 필요가 있다. 장시의 맥락을 전제하면 장타령, 각설이타령까지 포괄한다. 생산, 유희, 소비까지 포섭한다. 더구나 김치, 식혜, 주류 등 우리 발효문화의 중요한 키워드라는 점에서 엿타령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조유아(들)의 활동을 응원한다. 어뜬 엿장시/이윤선 우리집 모방에 총각 엿장시가 한 분 살았습니다. 쌀엿 좁쌀엿 호박엿 감자엿 통째로 엿 한 통을 솥에 곱고는 손뿌닥 철석철썩 때래감시로 가락엿을 맹글았습니다. 양짝에서 질게 엿을 느래 잡고 고운 가루 무채 찰싹찰싹 때래 니리믄 크내기 허벅지만하던 것이 쫑쫑한 가락들이 됩니다. 귀갱삼아 문을 빼꼼이 열믄 어서 들온나. 어서 문 다채라. 바람 따라올라 조막만한 나를 다그채며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가락엿 맹글 때 바람 들어오면 안 된담시로요. 어짜다 한골목에서 총각 엿장시 만나믄 가락엿을 냉큼 집어 고사리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쥔집 귀한 아들래미라 그러했을 것입니다. 버짐한놈 코흘린놈 종기난놈 내 동무들 앨곤하니 쳐다보믄 어찌 나 혼자 먹을 수 있겄습니까. 대가리 큰놈부터 척척 나놔주고 엿치기를 합니다. 딱 부러띠래갖고 끊어진 자리 훅! 불고서는 모도 벌어터진 손꾸락 사이 삐죽삐죽 엿가락들을 대봅니다. 어뜬 날은 똘똘말이 몰아주어 한 입 못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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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개의 친밀감에 대하여개가 얼마나 친밀한 존재이고 심성적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몇 차례 장그르니에를 인용해 소개한 적이 있다(장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민음사, 1997).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개의 부류는 '친밀감'을 속성으로 한다. 인간의 친구인 개, 인간이 얻은 가장 고상한 피정복물 아니 지금은 동맹관계로 바뀌어버린 말(馬), 흔히 무고한 희생물의 대명사로 사용되기까지 하는 비둘기, 이 동물들만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없다. 토끼를 비롯한 다른 몇 동물들도 이 부류에 포함 시킬 수 있을까. 인간은 친밀감을 열망한다. 이는 친구로서의 남자, 어머니로서의 여자,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친밀감이라는 것이 대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한 이들 사이에서도 반목은 일어날 수 있다. 이 부류의 동물들이 지닌 특성은, 인간이 함부로 인간만의 속성으로 분류해놓은 '인간미'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온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개(犬)적인 온정'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럴까? 그르니에가 말하는 '개적인 온정'이라는 것이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개 같은~'이라는 비하적 언설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개(犬)적인 온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인간적인 본연의 온정을 찾는 길이라는 둥 피상적인 심리 정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질문해보면 문제 제기가 좀 더 명료하다. 이 온정을 붙들어두기 위해 고안한 것이 개목걸이일까? 고양이의 거리감으로부터개에 비해 고양이의 부류는 '거리감'을 속성으로 한다. 장그르니를 다시 인용한다. "이 고양이의 부류에는 원숭이와 앵무새도 포함된다. (때때로) 우리의 찬탄을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이 동물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게다가 뷔퐁의 생각처럼, 이 부류의 대표격인 고양이가 우리에게 애정의 몸짓을 보이기는커녕 우리를 이용해 제 몸을 쓰다듬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도저히 이 녀석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사람의 흉내를 내도 (그 거리감은) 좁혀질 수 없다. 앵무새는 목소리를, 원숭이는 몸짓을 흉내 내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녀석들은 우리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식물이 우리와 가깝다. 결국 생활 방식은 친밀감과 거리감이라는 양극으로 특징 지어진다. 결합을 도모하는 것과 결별을 꾀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심성'과 '지성'이라는 양극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성'과 '지성'의 경계를 확연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단지 애착으로 결합하는 것들과 냉담하게 이탈하는 것들을 대립시킬 뿐이다. 로마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처럼, 지평선 위로 수직선을 그리며 홀로 자라는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처럼 모여 조화를 이루는 나무들도 있다. 뾰로통하고 새침한 고양이, 그 이지적 지성에 비해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영혼 모두를 우리에게 의탁하는 개의 무구한 심성이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인류가 태고이래 고안하고 재구성하며 천착해왔던 신(神)에 이르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엠비로스 비어스는 우리 누구보다 먼저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괄호는 가독(可讀)의 편의를 위해 내가 추가한 것이다. 지면상 인용한 컨텍스트를 일일이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대체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개는 심성적이고 고양이는 지성적이라고. 재차 질문해둔다. 반려견 혹은 반려동물에게 채우는 목걸이는 이 거리감 혹은 친밀함과 관련된 것인가? 혹은 사람들의 (주로 여성들이 거는) 목걸이조차도 이 친밀함이나 거리감과 관련된 장식들인가? 반려동물 목걸이의 문화사이주은이 지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파피에, 2019)를 통해 고대풍속의 편린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기원전 1401년부터 기원전 1391년의 이집트, 왕실 부채 관리인 마이헐프리라는 사람이 24세쯤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에서 유리잔, 도자기, 화살통 2개, 화살 75개, 고기, 빵과 더불어 개목걸이 2개가 출토되었다. 선인장 꽃과 말들이 그려진 개목걸이에는 황동 단추가 장식되어 있었다. 다른 목걸이에는 아이벡스(커다란 뿔이 있는 야생 염소의 근연종)와 가젤을 사냥하는 개들이 그려져 있고, 개의 이름 '탄타누트'가 새겨져 있었다." 탄타누트는 이집트에서 일반적으로 여성 이름이었다. 평자들이 이 개목걸이의 주인을 암컷 사냥개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왜 개의 목걸이에 황동단추가 장식되었으며 여성의 이름을 새겨 넣게 되었을까? 애완견 혹은 반려견의 역사적 맥락들을 살펴보면 여성 비하와 동물 비하의 행간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제기하는 질문이다. 애완견이 너무도 사랑스러웠기에 지어준 명예로운 이름이었을까 하는 점 말이다. 이주은은 이렇게 설명한다. "목줄이나 목걸이가 제재용만이 아니라 오히려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사례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에서는 세베리누스라는 소년의 개였던 델타가 특별한 목걸이를 차고 다녔다. 용암과 화산재가 쏟아지던 마지막 순간까지 꼬마 주인을 보호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 목걸이에는 바다에 빠질 뻔한 주인을 구해준 일, 강도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 일, 다이애나 여신의 땅에서 늑대에게 공격당한 주인을 살린 일이 새겨져 있었다. " 켄돌란 델 베치오는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에서 또 이렇게 소개한다. "왕족들도 그러했지만 프랑스의 샤를 5세의 개는 진주와 루비가 장식된 벨벳 목걸이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개에게 진주목걸이와 금목걸이라니! 표현의 결이 달라서 그렇지 반려대상으로 삼은 이들에게 '개목줄'이라는 평상의 비하적 언설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쯤 해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짐작할 것이다. 왜 반려동물 목줄을 목걸이에 비유하는지를. 이 이야기는 올 초, 소의 해 씨압소 전통을 말하면서 언급했던 쇠코뚜레와 수많은 고분에서 산견되는 목걸이로 상고해 오른다. 오늘은 지면이 다하였으니 차차 소개해나가기로 한다.반려동물 목줄에 대한 명상목줄이나 목걸이도 소의 코뚜레처럼 상징적이거나 민속신앙적인 것일까? 이를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관념들 아니면 해명되지 않는 무의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밝혀질지도 모른다. 마치 쇠코뚜레를 벽에 걸어두고 벽사진경(辟邪進慶), 즉 악한 것을 막아내고 좋은 것을 불러들이는 금기나 풍속으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개를 길러 문지기 삼고 개그림을 그려 대문에 걸었던 것처럼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 자체가 무의식적 어떤 관념이나 신앙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개가 집안의 지킴이 특히 여성 등 위약자의 지킴이를 넘어 죽은자의 영혼을 지키는 신앙물로 나타나겠는가 말이다. 켄돌란 델 베치오는 이렇게 말한다. "낸시와 저는 많은 성인 남녀들로부터 떠나보낸 반려동물의 봉제 인형이나 목줄, 목걸이가 있어야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고백을 들었어요." 그래서다. 나는 이 목걸이를 보다 더 근원적인 무의식까지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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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한 깊은 시인의 숨결에 묻어나는 삶의 성찰과 인문학적 상상력", "남도 문화의 숨결과 고전 계승을 담은 토속적 시편들", 이번에 펴낸 졸저 에 붙인 출판사와 서점들의 카피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 선생은 이런 표사(表辭)를 써주셨다. "이윤선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자칫 글자를 놓치고는 하였다. 일자무식으로 평생을 살아낸 늙은 아버지와 일찍이 홀어미가 되어 세 남매를 거느리고 선창의 주모 노릇을 하다가 씨받이까지 된 어머니, 그 씨를 받아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길러낸 큰어머니, 배다른 누이들이며 뼈 다른 형들까지, 시에 나오는 이들 모두가, 나에게는 하늘에서 쫓겨온 적선(謫仙)들이며 그이들이 만든 신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작은 눈의 눈물샘을 건든 것은 다름 아닌 시인이며, 시인이 살을 에어 빚은 시였다. 요즘처럼 시가 추악한 기형이 되어버린 흉한 시단에, 아직도 이런 아름답고 고귀한 시인이며 시가 한 송이 꽃으로 야생화 들판에 숨어 피다니...." 땔나무꾼에게는 과도한 헌사라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목포대학교 김선태 시인 또한 장문의 시평을 붙여주셨다. 그저 고개 숙여 감사드릴 뿐이다. 민망하게도 이 귀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것은 내 자랑을 하기 위함이 전혀 아니다. 오로지 남도인문학이라는 컨텍스트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라는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이를 변명할 수 있으려나. 다른 것은 내버려 두더라도 왜 남도라는 공간에서 남도의 말과 남도의 몸짓으로 시를 쓰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지, 남도인문학이라는 표제를 걸어 글을 쓰는지, 에둘러 그 내력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여러분들의 해량을 구하며 김선태 시인의 시평 일부를 옮겨둔다.흰그늘과 곰삭음팁에 부기한 시, "'콩대를 태우며'는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을 육화시킨 명편이다. 1연과 2연에서는 타들어 가는 콩대에서 나는 소리를 판소리의 '계면조(界面調) 선율'로 연결시킨다. 판소리가 몸에 배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감각적 발견이다(이윤선은 고수이자 소리꾼이다. 참고로 필자는 발견이 있는 시를 높게 친다). '따닥따닥' 소리가 마치 고수의 북장단 같다. 2연의 '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선율이 '그윽'할 수 있는 것은 '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과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임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수많은 신산고초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그늘'(한)이 있는 소리를 얻을 수 있다는 판소리 득음의 과정을 의미한다. 3연도 '봄가뭄 여름장마'를 겪은 '콩알'이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라도 사투리 중에 표준어로도 등재된 '게미'라는 독특한 말이 있다. 이 말은 판소리로 치면 앞에서 말한 '그늘'과 맞먹는다. 이는 오랜 발효(숙성)의 과정을 거쳐야만 '게미'(깊은 맛)가 있는 남도음식이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반성'(발효) 없는 소리는 그냥 '떡목'에 불과할 것이다. 4연은 콩대가 마지막까지 '한 몸 불살라' 나온 '콩재'와 '니람'(천연 쪽 염료)을 섞어 '쪽물'을 들여야만 숭고한 '남빛'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을 '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하늘)이 내려왔다'라고 표현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듯 이윤선은 소리나 음식이나 색깔이 모두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곧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는 시에서처럼 아버지이기도 하고,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랑, 열정, 그리움 따위의 그 무엇이기도 하고, 남도인문학의 본질, 어쩌면 우주에 충만한 신령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소개를 대신한다."'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모국어라는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는 반만년 이어져온 인간과 자연의 모습, 전통, 역사, 문화, 예술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모국어'는 방언(전북 사투리)을 가리킨다. 방언은 그 지역 공간에 사는 가족과 친구와 동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 토착어인 방언을 통하여 서로 연대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살아간다. 특정 지역의 정서를 드러내기 위한 문학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방언의 활용은 어쩌면 필수적이다. 방언이 아닌 표준어로 그 지역의 독특한 정서나 문학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전라남도 방언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남도 정서와 문화적 숨결을 잘 드러낸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전라도 사투리의 경연장이라고 할 만하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는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가 엿보이는 시 63편이 실려 있다. 시인이라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사의 기억에서 출발해 지금껏 살아온 삶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남도의 정서적 숨결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성찰을 고스란히 담았다. 가족사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전의 차용 혹은 인유이다. 고전 민속을 전공한 그답게 고전 시가의 율격과 말투를 충실하게 따르며 탄탄한 기본기를 드러낸다. 이윤선이 시로 풀어내고 있는 남도의 설화는 주로 '섬'에 집중돼 있다.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는 고향 진도의 부속 섬들의 탄생 설화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자신도 마지막엔 그 근원으로 돌아가 섬이 되고 싶은 소망을 드러낸다."따닥따닥 타들어간다고저장단 그윽하니 계면조(界面調)의 선율이다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 때문일 것이다아버지 헛기침하시던 불규칙 리듬때때로 밑둥거리 타다가 튀어 오르는 리듬대삼소삼 장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필시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일 것이다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봄가뭄 여름장마 한 몸에 겪고도반성 한 되 콩알 만들어낸 것이 가상하다콩알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된다껍질은 모여 외양간 쇠죽솥으로 간다마지막 남은 콩대 모아 태운다니람에 콩재 섞고 무명배 풀어 쪽물 들였더니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이 내려왔다한 몸 불살라 만드신 그윽함 때문일 것이다-「콩대를 태우며」 전문.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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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말라카 황징항(皇京港)에서 마조해협까지 오래전 중국 복건성 천주시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 있다. 신라여관, 신라 주유소, 신라 다리 등 신라라는 수식을 건 간판이나 이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적화원이라는 절을 복원하여 관광지가 된 산둥반도 석도진을 포함해 신라관,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의 거점이 천주시를 위시한 복건성 지역이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3년여 오가며 현장조사를 했던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 앞에는 심지어 '신라초'라는 이름의 암초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의 배들이 이곳에 부딪혔으면 신라초(新羅礁)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라 사공(선장)들이 배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녔으면 이같은 이름을 붙였겠는가. 물론 신라초에는 신라로 싣고 오려던 관음불과 관련된 몇 가지 설화들이 있다. 보타도의 조음동(潮音洞)은 낙산사 홍련암과 설화 맥락이 거의 동일하다. 아쉽게도 일본에서 먼저 이곳에 사찰을 세우기는 했지만, 관음보살을 넘어서는 고대로부터의 아시아적 네트워크 흔적임에는 틀림없다. 이곳 복건성과 절강성을 횡단하는 마조(媽祖)해협으로부터 말레이시아 말라카해협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다. 시진핑이 정화(鄭)의 원정 내력을 들어 일로(一路)의 비전을 세운 것도 이 해양실크로드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심지어 주산군도에서 시작한 어민화(어민들이 그리는 민화)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이 투자해 짓고 있는 말레이시아 말라카 황징항(皇京港)도 맥락이 같다. 나는 오래전 말라카해협의 정화박물관에 들러 이곳을 오고 갔을 고대의 한반도인들을 떠올리곤 했다. 신라초니 신라방이니 하는 거점의 신라인들이 필경 정화 못지않은 선박운영을 하였을 것이고 종교적인 맥락으로만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음 네트워크를 넘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혹은 더 이전의 브라만교나 시바교에까지 닿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가야 방면의 여러 사찰에서 산견되는 요니와 링가 등의 힌두교 흔적들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 전설을 넘어서는 상상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변산반도 죽막동 출토 유적들이 오키노시마와 양자강 하류의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을 비롯해 해남 등 서남해에 출토되는 중국발 유물들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신라인이라는 호명은 백제로 마한으로 아니 더 이전의 한반도인들로 거슬러 오른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중국의 해양실크로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철학적 아젠다를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 중국에 비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해경표(海經表)의 새로운 구상 해경표란 무엇인가? 내가 오랫동안 제안해온 갱번론(gengbone theory)의 하나다. 해항도시니 강항도시니 하는 사람 중심의 지정학을 넘어선 생태학적 포지셔닝이기도 하다. 지난주 이미 갯벌이 'Getbol'이라는 우리 고유명칭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Gengbone'(본 칼럼에서 수차례 제안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한다)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다. 신경준(1712~1781)이 썼던 <산수고(山水攷)>와 <강계고(疆界考)> 등을 토대로 우리 국토를 산맥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이른바 <산경표(山經表)>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을 대간(大幹)으로 읽고 거기에 12지류를 정맥과 정간으로 읽으며 그 안의 도시와 강과 섬들을 배치하는 국토 인식론이다. 설정해둔 산이나 도시들을 보면 중앙중심, 수도 중심의 사고와 12지라는 철학적 사고가 직조해낸 철학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 설정한 한양이나 개성 등은 백두산에 이르고 심지어 마고산에 이른다. 실증을 중시하는 주류사학계든, 일종의 관념을 투사하여 인식의 범주를 넓히려는 비주류 사학계든 이 산맥 중심의 사고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이들의 관념에는 단군신화의 동굴도 백두산에 있고 환웅이 천부인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단수와 신시도 백두산에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전제하는 이 지정학적 지향임에도, 급기야 백두산을 넘어 히말리야에 이르고 마고여신과 마고산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경표의 인식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다. 나는 거꾸로 해경표(海經表)를 제안한다. 지면상 짧게만 언급하면, 적도 상간의 흑조(黑潮, 크로시오해류)로부터 한반도를 향해 거슬러 올라오는 물골(해류와 조류 포함)론이다. 흑조의 본류는 일본의 동쪽을 거슬러 올라 태평양을 횡단한다. 여러 개의 지류 중 황해난류(한국연난류)가 한해륙 서해로 올라오는데 그 정점 혹은 기점에 흑산도(黑山島)가 있다. 흑조의 끝이어서 흑산도다. 이 지류는 내륙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 좇아 큰골과 작은골들을 만들고 갯벌 먼 끝에서 내륙 깊은 곳에 이르러 회합한다. 갱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향나무 묻어 천년 후 오실 메시아를 기원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이 권역을 통칭해 조간대(潮間帶) 이른바 갯벌이라고 한다. 불교의 관음과 미륵이 그렇고 기독교의 메시아가 그러하며 1900년 어간 900여 개에 달하던 신종교의 몸부림들이 그러하다.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의 범람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보다 더한 시대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 생활 태도의 변화, 마음의 변화, 아니 모든 것을 통째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처럼 일대일로의 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섬과 바다와 해양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거기에 시대적 비전도 있고 희망도 있으며 심지어 먹거리도 있다. 해경표에 주목하기를 권유한다. 한해륙 4대 물골론(中灣, Middle Bay)과 6대 작은물골론(小灣, Small Bay) 갯벌의 철학적 인유(引喩)이자 해정학(海政學)적 포지셔닝이다. 남도인들의 인식 범주, 바다를 강으로 생각하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대대적(對待的) 사고의 형상화다. 출처는 강변(江邊, reverside)이되 조하대의 보이지 않은 물길까지 포괄하는 갱번이다. 강항(江港)이나 해항(海港)보다 강포(江浦)라는 용어를 채용하는 것은 개(갱번)의 어귀라는 생태적 입지 때문이다. 한해륙을 4대 물골로 설정하고 6대 작은물골로 구성한다. 첫째는 무안만(務安灣)이다. 지금의 영산강이 본래 바다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의 바다, 삼대 중사(中祀)였던 영암 남포로, 광주와 담양으로 오르는 물골과 법성포 고창으로 오르는 물골을 포괄하는 만(灣)이다. 기점에는 흑산도가 있고 정점에는 마한 문화권이 있다. 둘째는 금강만이다. 부여, 공주, 논산으로 오르는 금강, 백강 물골과 김제, 전주 물골을 포괄한다. 기점에는 위도와 고군산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부여, 공주 백제 등이 있다셋째는 경기만이다. 예성강, 임진강으로 북한강, 남한강으로 흐르는 한해륙 가장 중요한 물골이다. 기점에는 덕적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고구려, 신라를 포괄하는 개성 고려, 한양 조선 등이 있다. 넷째는 발해만이다. 범주가 너무 넓어 황하만(베이징, 톈진), 요하만(다렌, 창다오), 압록만(단둥, 신의주), 남포만(대동강, 평양), 해삼위만(블라디보스토크)으로 다시 나눈다. 이외 6대 작은물골(small bay)로 강진만, 여자만, 김해만, 울산만 외 발해만의 중만(middle bay)으로 설정했던 남포만, 압록만을 포함시킨다. 김해만은 가야의 네트워크, 울산만은 경주 신라의 네트워크 물골이다. 6대 작은물골은 다시 작은 강과 하천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연과 삼지연에 이른다. 거꾸로 보면 보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난 1~2세기 동안 현자들이 이구동성 외쳐왔던 후천개벽, 새로운 시대의 기점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그 시작에 적도(赤道)를 둔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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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대나무 장구 소리가 유려하다. 몇 년 전이든가 담양에 들렀다가 들은 소리다. 날렵한 자세로 장구를 두드리는 춤사위가 곰삭았다. 무릎을 구부려 질겅질겅 스탭을 밟으니 소가 무논에서 쟁기질하는 모양이다. 굿거리다. 참새가 마당을 쪼르르 달리는 모양도 나온다. 휘모리다. 오금을 구부렸다가 폈다가 하는 동작들이 그침이 없다. 대삼 소삼이 어울리고 궁편 채편이 어울린다. 굵은 음이 잔 음을 에워싸며 교융(交融)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혼융하고 큰것과 작은 것이 교섭하며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견준다. 결이 다른 음들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낸 음마저도 다시 끌어안는다. 대나무로 만든 장구여서 그럴까? 그렇지 않다. 우리 음악 전반이 그렇다. 음악만 그러할까? 예컨대 활도 굽은 모양에 따라 밭은오금이 있고 한오금이 있으며 먼오금이 있다. 줌통(손잡이)으로 끌어 당긴 짧은 곡선을 밭은오금이라 하고 양무릎을 굽힌 듯 내민 부분을 한오금이라 하며 정강이로 내리는 부분을 먼오금이라 한다. 활의 줌피를 떠난 화살의 향방은 활대의 곡선이 지어내는 춤사위로부터 결정된다. 무릎의 춤사위와 연통하는 용어들이다. 대나무를 자기 땅의 터-무늬로 상정하는 담양이어서 그랬을까. 웅비하는 가락들이 병풍산을 에워싸고 추월산을 넘나든다. 필시 이 가락들이 용소를 지나고 수많은 용자(龍字) 돌림 영산강을 내달려 광활한 남도의 갯벌에 이르렀을 것이다. 궁금해진다. 죽장고의 출처. 요고(腰鼓)에서 청자장구(靑瓷鼓)까지 대나무로 만든 장구(長鼓)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그것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요고나 청자 장구처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확인한 적이 없다. 근자에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도 확답하기 어렵다. 광주시 지정 인간문화재 이복수 명인에 의하면, 오래전 담양에 들렀더니 일부 어르신들이 대나무로 장구를 만들어 사용하더라고 했다. 죽장고의 내력이 근자의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장구뿐 아니라 대나무로 만든 악기의 출처는 다양하다. 젓대(大笒)의 기원으로 삼을 만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짓고 용이 출입할 굴을 뚫어 바닷가에 이견대를 지었더니 하루는 거북이 머리 같은 돌덩이가 동해로 떠밀려 왔다. 그 돌배에는,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가 있었다. 이를 취해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천하가 태평해졌다. 그래서 세상의 시끄러움(萬波)을 잠재우는(息) 악기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이름 붙였다. 효소왕 때까지 이 이적이 거듭 일어나니 만만파파식적이라 고쳐 불렀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만 그러할까?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대나무의 은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악기로 말하면 장구가 대표적이다. 장구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요고(腰鼓)다. 여러 연구자에 의하면 <고려기>, <서량기>, <구차기>등에 요고가 등장한다. 고구려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집안 17호분 등 다양한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이나 평창의 화엄사나 상원사 범종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래시계를 연상하면 쉽다. 허리처럼(腰) 잘록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실제 허리에 차고 연주를 한다. 음양의 철학을 담은 악기 장구 칠머리당굿을 포함한 제주도의 무속음악이나 별신굿을 주축 삼는 동해안 무속음악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요고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사이즈의 장구를 사용한다. 사이즈가 길고 통이 넓은 교방(敎坊) 장구의 음악과는 차이가 있다. 고고학적 유물 유적에서 요고를 확인할 수 있다. 진도 등지에서 출토된 청자 장구는 요고보다 사이즈가 크다. 고려 이후의 일일 것이니 적어도 그 이전 시대의 음악과 차이가 난다는 점 알 수 있다. 크고 긴 장구를 바리톤에 비유한다면 요고류의 악기들은 소프라노에 비유할 수 있다. 신창동 출토 두 개의 고깔북도 나는 장구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중이다. 울림과 공명의 혼융, 세상의 시끄러움을 잠재우는 중용의 소리, 그 조화의 철학을 체화시킨 이들이 이 땅 마한인들이고 한반도 사람들이라는 전제에서 그렇다. 그렇지않고서야 어찌 남도땅에서 판소리나 산조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지난 2014년 진도 명량해협에서 건져 올린 '이형도기', 허리가 잘록한 아령 모양이어서 그릇 받침 정도로 추정하던 유물이다. 이를 이복수 명인이 요고로 해석했다. 근거는 울림통, 울림턱, 자웅성 등 세 가지다. 울림통의 가운데가 잘록한 것이 요고다. 양 주둥이 안쪽에 돌출된 부분은 소리를 넘기는 공명턱이다. 예컨대 궁손에서 출발한 공기의 파장이 채손에 닿고 돌아와 이 턱에 부딪힌다. 반대로 챗손에서 출발한 공기의 파장은 궁손의 공명 턱에 부딪혀 화음을 만든다. 양쪽 주둥이의 크기 또한 다르다. 큰 편이 굵고 낮은 소리를 내며 작은 편이 가늘고 높은 소리를 낸다. 이 자웅(雌雄)의 소리가 혼융하여 장구의 음색과 음악을 만들어낸다. 조화로움이며 균형이며 중용이다. 부부나 연인의 밀접함을 비유할 때 늘 금슬(琴瑟)에 비유한다. 금(琴)은 거문고의 하나이고 슬(瑟)은 기타와 비슷한 비파의 하나다. 두 악기가 서로 음률을 간섭하고 교직하여 천상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장구 또한 음양의 조화를 꾀해 그 미학을 완성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음악의 요체다. 담양의 터-무늬가 대나무라는 점에서 죽장구의 연원을 올려잡아 추정할 수 있다. 얼멍치(어레미)의 대나무 테를 버리지 않고 이른바 법고(벅구, 버꾸라고도 한다)로 만들어 활용했던 조상들의 생활 음악을 전제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만파식적처럼 장구의 울림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운, 세상과 공명하는 에너지를 가졌다. 장구의 리듬, 대삼소삼과 오끔조끔의 미학 엿타령을 잘 부르는 조오환 명인은 '오끔조끔'이라 한다. 오금에서 온 말일텐데 춤사위의 크고 작은 것, 울리는 소리의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융기하고 침강하는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국악계에서는 대삼소삼이라 한다. 대삼은 양(陽)적인 것, 소삼은 음(陰)적인 것이다. <주역>의 계사전에는 남성을 이루는 것이 건도(乾道)요, 여성을 이루는 것이 곤도(坤道)라 한다.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불과 물, 낮과 밤 등 모두 대대성(對待性)의 역리를 주창한 이론들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 남자를 하늘에 비유하고 여자를 땅에 비유한 것이 지위의 우월함이나 격의 고저나 상하를 말함이 아니다. 대칭은 대등한 것을 넘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이치를 말한다. 낮에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만파식적과도 같다.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는 상보의 원리다. 여기에 중용이 있고 조화가 있으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우리 음악의 철학이 있다. 하지만 음악은 변한다. 마치 지금의 가요가 100여 년 전의 판소리나 민요와 다른 것과 같다. 예컨대 6~70년대를 횡단하던 기타(quitar)는 어떠한가. 악기도 바뀌고 음악도 바뀌고 기호 또한 바뀐다. N세대 Z세대가 부모 세대와 향유하는 음악이 다르듯, 이전 시대라고 해서 동일한 기호가 유지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시대를 횡단하는 음악의 근간은 균형의 도모, 장단과 화음의 지향에 있다. 그래서다. 담양의 대나무장구, 그 출처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 만들어지고 향유된다는 점을 오히려 주목한다. 올곧고 청정한 기운 실어 어떤 시대적 공명을 이루어 낼지. 담양 사람들의 지혜가 기대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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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노래 '부용산'이다. 박기동이 노랫말을 쓰고 안성현이 지었다. 안치환과 윤선애가 불러 세간에 알려졌지만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지난해 본 지면을 통해 '산동애가'를 다루면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부용산 가사를 빼닮은 절명(絶命)의 노래라는 카피를 붙였던 이유가 있다. 마디마디 포개진 혹은 다 말하지 못했던 굴절의 역사, 사람들이 전율하는 선율과 장단 행간에 겹겹이 쌓인 질곡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에 월북이란 오명을 달고 있는 안성현이 있고 좌익이라는 딱지를 달고 평생 감시 속에서 살았던 박기동이 있다. 박기동은 천재 문학소녀를 위해 초빙될 만큼 출중한 문학인이었다. 안성현은 가야금산조의 중흥조라고 하는 안기옥의 아들이기도 하다. 훗날 박기동은 <부용산>이라는 책을 냈다. 나주문화원에서는 <안성현 백서>를 출간했다. <백서>에 의하면, 김 종 시인 등 숱한 연구자들에 의해 광폭의 추적과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이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부용산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해방 직후 1948년, 지금의 목포여자고등학교 전신인 항도여중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천부적인 문학소녀였던 모양인데 당시 교장이던 조희관이 이 학생을 위해 박기동을 교사로 초빙한다. 당시 목포는 수많은 문학인, 예술인들의 에너지가 폭발되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근대문학의 시작을 목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만큼 다종의 문학인들이 배출되었고 각종 문예대회가 열렸으며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박기동의 <부용산>(삶과꿈, 2002)에 의하면, 미네르바 다방 등지에서 박화성, 조희관 등 문학인들, 시인들, 평론가들, 음악가, 미술가 등 예술인들이 날이면 날마다 문학을 논하고 시대를 말하며 노래를 불렀다. 각종 다방이며 술집이며 공적 공간들이 르네상스기의 살롱 역할을 한 셈이다. 여기에 <항도여중 예술제>가 큰 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박기동과 함께 안성현도 채용되었다. 가야금의 중흥조 안기옥의 아들이어서인지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부임한지 8개월여 뒤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팔방년 열여섯 나이였다.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곧바로 곡을 붙인다. 아끼는 제자의 죽음을 육자배기 선율에 얹어 절절한 심중을 담아낸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래 <부용산>이다. 물론 이 시는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하기 전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썼던 습작이다. 여수 돌산이 고향인데, 큰누이 박영애가 어린 나이에 벌교로 시집갔다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방년 스물 넷 꽃다운 나이였다. 안성현이 곡을 붙이자 박기동은 마지막 구절을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노래를 제망매가에 견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금순이라는 상급학생에 의해 초연된 이 노래는 항도여중 학생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애틋한 사연들이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빨치산, 월북, 좌익감시 등 파란만장한 분단의 시절들이 눈물과 핏물 속에서 구겨지고 찢겨지며 오늘에 이른 것,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들이다. 누이와 제자의 죽음을 애달파했던 상여소리 제망매가(祭亡妹歌) "죽고 사는 길이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 우리 향가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다. 누이의 죽음을 다룬 노래여서 '위망매영재가'라고도 한다. 양주동이 해석을 하였는데, 연구자들에 따라 약간씩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월명사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제사하였더니),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지전(紙錢)이 서쪽으로 날아가 없어졌다. 하늘을 감응하게 하고 귀신을 감복시켰다는 향가의 주술력을 말하는 것이다. 박기동의 <부용산>에서도 향가의 전통을 승계한 숨결들이 포착된다. 한 가지에서 난 잎들이 가을 낙엽이 되어 떨어지나 우리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누이는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마치 낙엽처럼 날아가 버린다. 월명사는 미타찰(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세계) 곧 종교적 초월을 빌어 누이와의 재회를 염원하는데 박기동은 부용산 봉우리 휘감아 도는 바람결을 통해 누이의 흔적을 좇는다. 안성현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이 심상에 포개어 마치 남도의 만가(輓歌)같은 선율을 직조해 낸다. 어디 이것이 노래에 그치겠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월명사의 낙엽이기도 하고 벌교 부용산 봉우리를 맴도는 바람결 자체이거늘. 금지곡 <부용산>은 오래도록 우리 곁을 떠나있었다. 민족동란 전후기에 월북하거나 이른바 산사람이 된 이들이 많고 그들에 의해 많이 불리었기 때문에 문제 삼았던 것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부용산>을 소환하는 것, 안성현의 월북은 월북대로 냉정하게 평가하되, 향가에서 김소월로 혹은 박기동으로, 고려가요에서 안성현의 선율로 이어지는 얼개는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굴절의 시기를 거치며 쌓은 우리의 내공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부용산>은 보다 널리 불릴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자신감이 교착된 남북의 물꼬를 트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부용산>은 남도의 육자배기다 박기동이 글을 짓고 안성현이 곡을 붙인 <부용산>은 한마디로 말하면 남도의 육자배기다. 육자배기의 전형적인 떨고 밀고 꺾는 선율로 곡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도전통의 시김새들이 새록새록 들어있다는 점도 그렇다. 죽음을 앞둔 빨치산들이 고향에 두고 온 누이며 부모며 형제자매들을 그리며 불렀던 한의 노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정권에서도 남도의 어느 옴팍진(오붓한) 다방에서 이 노래를 숨어 부르던 이들이 있었다. 좌익이라서가 아니라 이 노래 자체가 우리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얼개나 음악적 결은 거슬러 올라 향가에 닿고 굽이쳐 올라 육자배기에 닿는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늘 그렇게 주장한다. 단조 즉 마이너 기반의 계면조가 <부용산>뿐만 <엄마야 누나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스며들어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요 <엄마야 누나야>는 김광수가 작곡한 것인데, 본래 안성현의 곡 <엄마야 누나야>는 전통음악 계면조 기반의 곡으로 사뭇 다르다. 가곡풍의 <부용산>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를 남도창법의 계승으로 풀이하지 않으면 법고창신의 큰 줄기를 놓치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 <엄마야 누나야>뿐만 아니라 김정호의 <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래들, 내가 이름 붙여둔 송가인이나 김태연의 '남도트로트' 창법에 이르기까지 <부용산>류의 법고창신에 대해서는 차차 고를 달리해 다루기로 하겠다. 오늘 막걸리 한잔 마시며 <부용산>을 불러봐야겠다. 1971년경 목포 예술인 공연 장면. 목포예총 제공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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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다도해 어업권의 어구어법(漁具漁法) 다도해 어업권과 득량/여자만 어업권의 고기잡이 도구와 방식에 대해서도 소개해둔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영광지역을 기점으로 서해 위쪽은 어살권으로 서남해 남쪽으로는 대발권으로 나눈 바 있다. <한국의 해양문화>(2002)에서 내가 최초로 시도한 방법이라고 밝혀두었다. 아직 학계의 합의를 얻지 않은 시론이니 본격적인 논의를 거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도 곁들였다. 고군산군도 어업권과 위도칠산어업권을 살펴보면서 목적하는 어류나 방식, 특히 우리말 호명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도해 어업권은 목포를 센터로 신안, 진도 완도를 아우르는 권역으로 설정했다. 우리나라 2/3의 섬이 집중된 지역이니 명실상부한 다도해라 할 만하다. 이 권역은 정치망 어업이 주축이었다. '살(箭)'이라는 용어를 '그물'이나 '발'이라는 용어로 호명한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목그물' 혹은 '명지그물'은 명주실로 만든 그물을 말한다. 일자형 혹은 타원형으로 그물을 세우고 임통을 양쪽 모서리에 설치하는 형태다. 그물의 이름과 고기잡이 방식의 이름을 동일하게 쓴다는 점 확인할 수 있다. '대발'도 동일하다. 이것이 후대에 '면사그물'로 바뀐다. 본래 '죽방렴(竹防廉)'이란 의미인데 명주나 면사로 만든 그물에도 동일한 이름을 붙였다. '큰살거지대발'은 이 형태를 대형으로 구성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ㄱ자로 설치한다는 점, 양쪽에 임통을 설치하지 않고 꼭지점에 해당하는 '북아리'에 '골통'을 설치한다는 점이 여타의 그물과 다르다. 북쪽으로 설치된 날개 그물을 '북아리'라 하고 남쪽으로 설치된 날개 그물을 '남아리'라 한다. '숭어덤장'은 숭어를 잡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ㄱ자인 점은 동일하다. 양쪽 끝에 어취부와 임통을 둔다. '덤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삼각망이나 사각망의 틀에 질그물을 길게 두는 형태다. 고군산군도 어업권이나 위도칠산어업권의 각형이나 타원형 등의 어살 형태와 유사하다. '등그물'과 '송어행'은 소규모로 설치하는 각자형이다. '송어행'은 '큰살거지대발'이 설치된 안쪽의 조간대에 소형으로 설치한다. 일자형이나 갈지자형으로 만든다. '등그물'은 대나무 마장(기둥)을 사용하여 이동이 용이하고 '송어행'은 갈지자형으로 그물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독살/쑤기땀'은 '독장' 혹은 '독발'로 호명되는 등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예컨대 해남지역에서는 '쑤기땀' 즉 '쌓아서 만든 담'이란 뜻으로 이름을 붙인다. 일명 돌그물이기에 인류 최초의 고기잡이 방식이라는 수식이 가능한 어법이다. '독다믈'은 '장어얼'과 유사한 형태로 연전 강진만의 장어잡이를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갑오징어 방배질'은 가공하지 않은 싸리나무 다발을 그대로 점심대(漸深帶, 조간대)에 침강하는 함정어법이다. 득량/여자만 어업권의 고기잡이 다도해 어업권의 동편, 경남 어업권의 서편에 해당하는 권역이다. 경상도 일부를 포괄하는 어로권역으로 설정해두었다. 이 권역도 어살의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 크게 다르지 않다. '사각형 맬덤장'과 'V자형 맬덤장'은 사각으로 된 어취부 및 임통과 각각 일자형, V자형의 유인그물을 사용한다는 점이 유사하다. '주벅그물'은 사각 어취부에 일자형의 유인그물을 설치하는 점이 동일하다. 'ㄱ자형 덤장'과 '꼬쟁이발'은 각자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나 ㄱ자형 덤장이 중앙의 모서리에 임통을 설치하는 데 반해 꼬쟁이발은 그물의 날개 양쪽에 '만산이(임통)'을 설치하는 점이 다르다. '대발매기'는 대나무로 엮어서 만들었기에 붙여진 이름일 뿐 위와 유사한 형태다. '뻗거리' 혹은 '뻘거리'는 바다 일부를 막는 '개맥이'를 호명하는 다른 이름이다. '장어담장'은 '장어얼'이나 '장어독다믈'과 동일한 형태이고 '토전발'은 개펄에 흙을 쌓아 올려서 만들 일종의 '토살(土箭)'이다. 뻘흙으로 만든 독살(石箭)인 셈인데 '숨은통'이라고 부르는 임통이 설치되기도 한다. '붕장애구덕' 혹은 '붕장애굴'은 '장어얼'처럼 피라밋 형태로 돌을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뻘 바닥을 파고 돌을 채워 넣는 형식이다. '담'이나 '얼'이 아닌 '구덕' 혹은 '굴'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전래 어구의 재료와 유형에 남은 우리말 재료는 보통 소나무, 참나무, 대나무, 오동나무, 칡덩굴, 싸리나무, 비사리나무, 억새(갈대), 볏짚(새끼줄), 돌, 개펄/흙, 명주, 면사 등으로 나타난다. 소나무, 참나무 등 말목은 그물을 고정시키는 데 쓰였고 나머지 재료들은 발장(어살)을 엮거나 축조하는 데 쓰였다. 참나무나 오동나무는 그물 윗배리(벼리)가 뜨게 하는 '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말목을 지른다는 의미의 '주목', 돌로 쌓는다 해서 '독발', 개펄을 막는다 해서 '개맥이', 크게 막았다 해서 '대맥이', 모양이 꼬쟁이처럼 생겼다 해서 '꼬쟁이발', 굴처럼 개펄을 판다고 해서 '붕장애구덕', 대나무로 엮는다 해서 '대발'이라는 이름들이 붙었다. 특히 서남해지역은 '어살'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어법에 '발' 혹은 '발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특징적이다. 장어를 잡기에 장어얼 혹은 장어독다믈, 멸치를 잡는다 해서 '맬덤장', 숭어를 잡는다 해서 '숭어덤장', 송어를 잡는다 해서 '송어행', 새우를 잡는다 해서 '젓뚝' 등으로 불렀다. 고기를 가두는 임통만 해도 골통, 쑤기통, 쑹생이, 숨은통, 만산이(큰 만산이, 작은 만산이), 그물통 등의 이름이 있다. '후꾸리' 등의 일본말이 남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순 우리말이다. 어구어법의 생태적 지형이나 개펄이 가진 레퓨지움이라는 의미를 넘어, 이 이름들이 가진, 그 이름들에 담긴 남도의 뿌리와 배경과 그리고 사람들의 흔적들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순 우리말의 보고, 개펄해역 고기잡이 이름들 남도의 많은 섬들과 해안에서 이루어지던 어구어법의 이름들을 상기해본다. 자루그물, 주목망, 비사리그물, 덤장, 고개미살, 억새살, 개매기살, 버커리살, 야달매기, 대맥이, 개맥이, 독살, 장어얼, 등그물, 송어행, 숭어덤장, 목그물, 큰살거지대발, 독발, 쑤기땀, 장어독다믈, 싸리나무 방배질, 맬덤장, 대발매기, 꼬쟁이발, 뻗거리(뻘거리), 맬덤장, 토전발, 장어얼, 장어담장, 붕장애구덕, 낙지퉁어리, 윗배리, 아랫배리, 툽, 만산이, 주벅, 북아리, 남아리, 숨은통, 쑹생이, 젓뚝, 골통 등 남도어로권의 고기잡이 도구와 어로방식에 남아 있는 이름들은 그야말로 순 우리말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형태에 따라 ㄱ자니 V자니 W형이니 등의 수식을 내가 붙였을 뿐 그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들이다. 나승만 목포대 명예교수를 도와 내가 조사하고 이름 붙였던 2002년 이래로 20여 년이 지났다. 대부분의 개펄 어로 자체가 사라졌으니 이름 또한 망실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호명하던 남도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떴을 것이다. 이름도 빛도 없던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방식이 뭘까? 생태적인 개펄어업, 맨손어법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이 이름들에 남아 있는 순 우리말의 조어방식들, 그 이면에 들어있는 생태환경의 흔적들, 쓰여지지 않은 행간에 남은 그들의 자취를 기억하는 방식을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존재와 그들이 붙여둔 이름들을 상고하는 의미를 오늘 여기 우리가 존재하는 의미에 견주어 묵상해 본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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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기후위기와 노아의 방주 민주·비민주 담론, 극한투쟁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 성장·개발 담론을 공생·공존 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가 절실하다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도깨비굿 이야기를 다시 소개한다. 무안과 함평 일대의 명산이라는 보평산 아랫마을이다. 보평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봉수대가 있다. 보평산과 감방산 사이에 있는 능성에는 용굴샘이 있어 명산 보평산의 풍수 스토리를 완성해준다. 이 물이 마르거나 마르지 않거나를 가지고 한해의 기후와 운수를 점쳤다. 누군가 몰래 묘를 쓰는 일이 발생하면 이 샘의 물이 말라버린다. 보평산은 명산이고 용굴샘은 그를 보전하는 상징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자라도 이 산에 묘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자손들만의 발복을 위해 몰래 묘를 쓰는 자들이 있다. 도장(盜葬) 혹은 암장(暗葬)이라 한다. 그럴만한 능력과 사회적 부를 거머쥔 자들이다. 이런 경우 마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본 지면에 여러 번 소개했듯이 도깨비굿을 한다. 고을의 여자들이 호미와 낫 등을 들고 보평산을 뒤진다. 결국은 몰래 쓴 묘를 발견하고 파헤친다. 유골들을 흩뿌려 버린다. 그래도 묘지 임자가 되었건 문중이 되었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일종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명산대천은 공동체의 것인데 마을 사람들 몰래 독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뭄이나 기근 특히 역병의 원인을 발복이나 사회적 권력의 독점 때문이라고 진단했음을 알 수 있다. 졸저 (다ᄒᆞᆯ미디어, 2021)에 자세하게 소개하고 분석해두었다. 도깨비굿은 기울어진 운동장, 극단으로 흐른 생태적 위기, 사회적 위기를 전복(顚覆)하는 행동의 은유다. 아니, 불순한 기운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어 균형을 회복하려는 혁명이다. 기후위기와 문명의 상관글로벌 경제전문가 100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을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정상훈이 소개해두었더라. 일부 내용을 여기 인용해둔다. 설문의 요지는 지금 우리 세계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93%가 '기후위기'라고 답했다. 빈곤 84%, 물 부족 79%, 전염병 78% 등으로 이어진다. 경제전문가들이 왜 기후위기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을까? 정상훈은 이렇게 분석했다. "지난 2016년 세계은행은 기후변화를 방치하면 2050년까지 158조 달러(18경 5천 729조 원)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한다고 전망했다. 이는 지난 2020년 우리나라 GDP(1조 6240억 달러)보다 100배 가까운 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도 2021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통해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기후변화 대응 실패 등 기후 관련 문제가 '인류에게 실존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경제 시스템에 영향을 끼쳐 막대한 손실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는 경고다." 그러면서 기후위기 대응 최선책은 재생에너지의 확대라고 진단한다. 경제뿐이겠는가. 문화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엘스워스 헌팅턴의 (민속원, 2013)에 의하면, 기후와 문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며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 대분의 지역들은 인구가 상당히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불리한 경제적 변동이 발생하면 이는 곧 곤궁과 질병, 그리고 높은 사망률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이주를 택하기도 한다. 경제적 곤궁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아마도 날씨 혹은 기후 변화(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흉작을 초래하거나 동물들이 먹고 마실 풀과 물을 부족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곤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소요를 불러오며, 이것은 다시 이주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경제적으로 부득이하게 이주한 사람들은 열악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숫자는 계속 감소하여 오직 특별히 우월한 자질을 지닌 소수의 집단만이 선택적으로 살아남는다." 끔찍하지 않은가? 예컨대 조선후기 경신대기근처럼 말이다. 만약 그러할지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지구별의 어떤 땅이 있어 이주할 수 있단 말인가. 빌게이츠는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매년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510억 톤을 2050년 선진국부터 '순 제로net zero'로 만들자." 여러 가지 정답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이다.가치관의 거대한 전환기, 진보의 끝자락에 서서여성 전유의 문화적 혁명이라는 도깨비굿, 그 문명적 은유를 새삼 반추해본다. 구마 겐고와 미우라 이쓰시는, 대담으로 엮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위대함, 고상함, 고층을 지향하는, 즉 '위에서의 기준'을 들이댄 건축을 선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저층, 저자세, 작음, 저탄소, 낮은 가격 등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 높은 마력을 선호하던 시대에서 속도가 느려도, 크기가 작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보의 끝, 진보의 종말이다. 산업, 기술적인 의미에서 진보의 끝만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형식까지 포함한 진보, 정확히는 진보라고 여겨져 온 모든 것이 막을 내린다는 의미다. 가치관의 근대화가 막다른 곳에 다다른 거대한 전환기다." 명문대학 졸업자, 부유한 집안 출신, 미모가 출중한 자 등을 경외하거나 선호하는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꼴지들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내리달리는 그 가속을 멈춰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철학가들, 사상가들이 이를 진단하고 주문했다. 예컨대 김지하가 내다봤던 문명사적 전환 같은 것이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율려와 동학의 전망 모색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비전의 재구성을 도모할 때가 아닌가 싶다. 비유컨대 개발 지향적이고 성장 우선적인 혹은 남성성으로 비유되는 진보담론의 해체가 답일 수 있다. 민주 비민주의 담론이나 극한투쟁을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이자 필사의 투쟁 아니겠는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물과 불의 심판에 준비했던 노아의 방주 같은 것 말이다. 분명한 것은 방주를 만들 마지막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른바 도깨비굿이다. 성장과 개발 담론을 공생과 공존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 말이다.기후위기시대, 노아의 방주목포산돌교회 김경희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할 때 단 한 사람을 남겨뒀다. 그가 바로 '노아'다. 노아란 이름의 뜻은 '멈춤(Stop)'이다. 아크 노아(오직 노아), 이것이 죄악으로 치달았던 세상을 향해 던진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물 심판뿐이겠는가. 불 심판 또한 마찬가지다. 성장과 개발을 진보로 여긴 인류가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기후위기 시대, 더 이상의 성장과 개발은 안 된다고 'No'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노아'란 뜻이다. 거대한 자본과 반생태적 정치권력의 카르텔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이들이 생각하고 준비하며 실천하는 것들,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방주(方舟)'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 설령 인류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될지라도 '아니오'하며 방주를 만드는 이, 이것이 어쩌면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던 '행동하는 양심'의 현재적 버전일지 모른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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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곧 한여름이 오고 장마가 시작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영화산업이 주눅 들긴 했지만 연례적인 테마들은 변함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무엇일까? 한여름 밤의 영화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 그렇다. 고전적으로는 여고괴담 시리즈다. 영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여성 특히 처녀성을 강조하는 고전적 이미지는 소설 장화홍련전으로 좇아 오른다. 아니, 뱀에게 바친 처녀 이야기로, 백년 묵은 여우 이야기로 갈래를 치며 끊임없이 좇아 오른다. 이들 서사는 아마도 어떤 시대 어떤 의도에 의해 강요되거나 권장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권선징악의 표상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드라마 <도깨비>마저도 성격은 귀신에 가까웠지만 이 전형적인 서사를 파괴한 것 같지는 않다.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 스토리의 얼개는 물론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역사 이래 여성이 억압과 핍박의 중심에 서있었으니까. 도깨비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도깨비는 후덕한 남성상을 그 배경으로 한다. 본래부터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 민속학자 임동권이 보고했던 도깨비들, 1960년대까지 채록된 다종다양하던 도깨비들 속에는 처녀 도깨비, 여성도깨비들이 대거 등장한다. 지면상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남성을 능욕한 여자도깨비 이야기 등이 흥미롭다. 남성의 몸을 가시덩굴로 긁고 개똥을 먹여 보기 좋게 전복시켜버린다. 남성 전유의 섹슈얼리티가 전복되는 순간이랄까. 처녀귀신의 함의를 무너뜨리는 도깨비 본연의 모습이 여기 있지 않을까?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도깨비굿으로 나는 본 지면을 통해 여러 차례 도깨비굿을 소개했다. 여성 전유의 전복(顚覆) 축제 말이다. 왜 여성들만 모여서 해괴한 의례를 치렀을까. 일반적인 기우제가 비내림을 염원하는 것이라면 기우제 도깨비굿은 비 내리지 않은 자연현상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란제의였다. 이 의례의 목적은 기왕의 질서를 뒤엎는다는 데 있다. 부조리한 사회를 뒤집어엎고 난망한 세상을 뒤집어엎는 상징이자 놀이이며 의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내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지만 남근에서 두꺼비로, 불에서 물로, 남깨비에서 여깨비로, 불도깨비에서 물도깨비로의 전화(轉化)다. 일종의 카니발리즘이다. 바흐친은 이 용어를 권위적이며 모순적인 기존의 질서가 폭발적으로 터지는 축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낡은 권위에 대한 비판과 해체는 결국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정격에 대칭되는 비정격, 권위에 대칭되는 비권위편에 있는 것은 여성, 어린이들을 포함한 노약자, 장애인 등이다. 여성성으로 상징되었을 뿐, 도깨비굿의 컨셉 안에 이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 사람 살만한 세상이라고 하고 민주화되었다고도 하지만 이들이 속했던 위치나 위상은 역사 이래 고정되어 왔다. 권력에 대항할 힘이 없거나 무력을 행사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 말이다. 공장의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죽고, 버스타고 가다가 건물이 덮쳐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다. 한여름 밤의 여고괴담 시리즈를 새삼 상고하며 도깨비굿을 소환해본다.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분기마다 절기마다 행해진 뒤집음의 의례적 맥락이 또렷해진다. 프레이저의 명저 <황금가지>에 나오는 왕 살해 매커니즘을 닮았다. 내 책에서 비주류들의 전이지대, 평범한 존재들의 혼불, 가장 낮은 자들의 유쾌한 반란이라고 호명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설적으로 도깨비같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재구성하기 위해 떨쳐 일어난 여성들, 아니 이름도 빛도 없이 충직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들이 도깨비굿의 분장 주체들이다. 처녀귀신과 도깨비의 섹슈얼리티를 넘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섹슈얼리티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산물인 성에 관련된 행위, 태도, 감정, 실천, 정체성 등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개념이다. 도깨비 이야기 중 전형성을 갖고 있는 귀태(鬼胎)의 경우를 사례 삼아본다.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처녀 임신에 대한 대응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여성에게 강요된 정절 관념과 순결에 대한 강박이었고 셩폭행과 음행 누명에 대한 원귀서사를 대량생산함으로써 처녀귀신이라는 기피 담론을 정당화시켜주는 섹슈얼리티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괴담 속의 여귀설화는 어떤가?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담론의 기능은커녕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자극적인 방식으로 유포시킴으로써 억압 기제를 오히려 강화시켜오지 않았는가. 햐얀 소복을 입고 입가에는 피를 흘리는 순결한 처녀상 혹은 여고생의 기괴한 이미지들만을 드러내 불안감과 공포심을 자극해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시각적인 부분을 드러내 파편화시키고 극단화시키는 이유는 물론 기왕의 체제나 담론에 대한 복종과 굴복 혹은 흡수에 있다. 이를 반역하고 전복하는 것이 도깨비굿의 내면이자 속성이었다. 나는 이 여성성을 <삼국유사>와 섬진강을 매개 삼는 두꺼비와 달, 그리고 갯벌과 마을숲의 여성성에서 찾고자 했다. 이것이 처녀귀신으로 표방되는 섹슈얼리티에만 국한되겠는가. 탄소발자국을 너무 많이 낸 반생태적 환경, 여전히 가진자들의 놀음으로 치닫는 정치적 현실, 이 세상은 여전히 빛도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희생과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 나는 올 초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ᄒᆞᆯ미디어, 2021)>를 출판했다. 처녀귀신과 도깨비의 이중성이 아니라 본질적인 우리 욕망의 투사물을 통해 한국사회를 통째로 읽어내고 싶었다. 여고괴담류의 섹슈얼리티를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우리는 구체적인 무엇을 강요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다 선명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얼굴도 예뻐야 하고 하는 짓도 우수해야 한다. 하지만 귀신과 도깨비는 선명하기보다 흐리멍덩하고, 논리적이라기보다 우유부단하며, 합리적이라기보다 불합리한 존재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그런 존재다. 확실한 공간에서 출몰하는 정격의 신성이 아니라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중간한 공간에서 출몰한다. 마을과 숲 사이가 그렇고 바다와 육지 사이 갯벌이 그렇고 땅과 강 사이의 습지가 그렇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다. 제국과 서양으로부터 들어와 이땅의 주인노릇을 하는 이른바 고등종교의 신격들에 치여 행간과 여백으로 숨어들어버린 이 땅 토종의 신격들이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엉뚱한 존재로 살아남아 혹은 시대마다 기발한 모습으로 재창조되어 민중의 욕망들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귀태나 원귀처럼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를 정당화시키기도 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재화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처녀귀신과 도깨비로 나뉜 행간이었다. 치우친 균형, 기울어진 운동장, 편향된 시대감각들을 바로잡는 것 말이다. 다그치고 몰아치는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도깨비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그것을 여백이라고 생각한다. 바다와 강 사이의 갯벌 혹은 습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 기능도 없어 보이는 그 여백 말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무장지대 같은 곳이다. 좀 더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여유다. 일등이지 않아도 꼴찌이지 않아도 회색분자여도 괜찮다. 나는 끊임없이 생태적 본원 레퓨지움으로 돌아올 도깨비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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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마두희(馬頭戱)가 뭘까?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안동대 한양명은 '대보름 무렵에 줄을 당겨 승부를 겨루는 편싸움 형식의 대동놀이'라고 정의했다. 2014년 '비교민속학'에 게재한 「울산 마두희의 전승양상과 지역성」에 보다 자세한 내용을 풀어썼다. 『학성지鶴城誌』(1749),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보유(慶尙道補遺)편 속의 『울산부읍지蔚山府邑誌』(1557∼1765),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속의 『울산부읍지』(1832), 『영남읍지嶺南邑誌』 속의 『울산부읍지』(1895), 『학성잡기鶴城雜記』(1902) 등 관련 기록을 이미 소개하고 분석했다. 말과 관련된 민속놀이나 줄다리기에 대한 문헌들이 희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만큼 마두희가 울산지역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풍속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말(馬)과 관련되었을 가능성 추적, 어떤 특징을 가진 줄다리기인가를 헤아려보는 일, 울산 동대산의 형국이 말머리인데서 비롯되었다 하니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일 등이었다. 남도지역에서도 고을마다 마을마다 행하던 줄다리기가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이 연행의 중심이긴 하지만 2월 1일 '하릿날'에서 추석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여기서 마두희의 맥락을 상고해보는 것은 남도지역을 포함한 우리나라 줄다리기의 종다양성을 포착해보자는 취지이기도 하다. 제주도 약마희(躍馬戱)와 신안 도초도 죽마제(竹馬祭) 다시 읽기 대부분의 줄다리기를 벼농사권의 민속놀이로 해석하는 이유는 줄의 재료 중 볏짚이 가장 많이 활용되고 칡, 억새, 죽피 등이 보조재로로 사용된다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줄다리기는 아니지만 제주도 영등굿에 남아있는 약마희(躍馬戱, 영등신을 치송할 때 행했던 민속놀이)의 사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말(馬)을 이름으로 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2월 초하루 귀덕, 김녕 등지에서는 장대 12개를 세우고 신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애월에 사는 사람들은 말머리 모양의 떼배를 만들어 채색 비단으로 꾸미고 약마희를 해서 신을 즐겁게 한다. 보름이 되어 끝내니 이를 연등이라 한다. 이 달에는 승선을 금한다." 장대는 목간(木竿)이다. 떼(槎) 모양의 말머리(馬頭)처럼 만들어진 떼배다. 왜 이런 배를 만들어서 비단으로 곱게 꾸몄던 것일까? 지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지역 축제에서 매우 화려하게 배를 장식하는 사례를 견주어볼 필요가 있다. 한편 신안군 도초면 고란리에는 당제(堂祭) 말미에 연희하는 죽마놀이가 있었다. 죽마제(竹馬祭)라고 한다. 지금은 간척되어 내안이 농토가 되었지만 본래 해안 마을이다. 제주도의 약마희가 연희되었던 공간과 유사한 배경이라고나 할까. 당산의 신격이 마신(馬神)이다. 대나무로 말의 골격을 만들고 머리는 짚으로 엮어 단단하게 뭉쳐서 한지로 씌우고 먹으로 눈과 코를 그린다. 귀도 대나무로 만들고 목에서부터 큰 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꼬리 부분에 붙인다. 그 위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한다. 양쪽 두 갈래의 대기둥 안에 발을 넣게 한다. 꼬리는 댓잎으로 만든다. 마부가 끌 수 있도록 목에 줄을 걸고 양쪽에 매어둔다. 마을당제의 말미에 이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연희하는 일종의 마을극이다. 물론 농경에 기대어 이 놀이를 해석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지문(地文)에서 해문(海文)으로, 울산 마두희에 길을 물어 울산의 마두희는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을까? 중국의 경우, 마두(馬頭), 즉 말머리는 실제 말(馬)의 머리를 뜻하기도 하지만, 대개 선착장 즉 포구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우리도 전국에 관련 용례들이 남아 있다. 당(堂)머리(堂頭), 닭머리(鷄頭), 용머리(龍頭), 개(바다)머리, 칡(작은 고개)머리 등은 바닷가로 툭 튀어나온 곳 즉 곶의 다른 말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곶은 주로 ~고지, ~구지, ~몰, ~말, 심지어 ~미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국에 분포한 말머리의 용례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현용준이 제주도의 조리지희(照里之戱, 줄다리기)를 이두식 표현으로 해석하여 '조리'를 '줄'로 읽어낸 바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결론만 말한다면 울산의 마두희는 해양문화적 맥락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대개 용(龍)으로 관념되는 울산 내안(內岸)의 어떤 정기를 동해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막는, 아니면 동해의 어떤 기운들을 서쪽편으로 끌어올려 울산부의 기운을 보강한다는 의미들이 들어있다. 풀어 말하면 '동대산 말머리 돌리기 의례'라고나 할까. 동대산에 새겨진 삶의 기록들, 울산에 새겨진 아마도 반구대 암각화까지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의 기억들을 소환하고 거기에 질적인 가치를 담아내는 인문학적 방식이었을 것이다. 대보름이나 추석이 아닌 단오의 행사였다는 점이 그렇고, 비녀목이 아니라 '곳나무(배에서 쓰는 나무)'를 쓰는 것이 그러하며 짚줄이 아니라 칡줄을 사용했던 것이 그렇다. 무엇보다 '말머리(馬頭)'가 마을의 중앙이 아니라 선착장 혹은 '곶'을 함의하는 포구라는 점이 그렇다. 더구나 줄다리기와 씨름을 끝내고 당산목에 감거나 풍요다산을 위해 나누는 것이 아니라 태화강 태화나루에 줄을 내려 배와 관련된 수요를 충족했다는 것 아닌가. 따라서 기왕의 줄다리기들이 땅 특히 벼농사와 관련된 논에 새겨진 삶의 기록들을 소환하는 기억의 장치라면 울산의 마두희는 동해로 횡단하는 물길과 반구대, 장생포, 개운포 등 해양문화적 함의를 포괄하는 줄다리기라고 어찌 아니할 수 있겠는가. 벼농사를 중심 삼는 지문(地文)이 아닌 해문(海文)으로서의 정체를 소환하고 동해의 의미들을 이끌어내는 기제로 울산 마두희의 질적 가치를 다듬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줄다리기 놀이의 근원과 심연 문헌에 나오는 줄다리기 관련 이름들은 발하(拔河), 삭전(索戰), 조리지희(照里之戱), 갈전(葛戰) 등이다. 삭전은 줄(索)을 당기는 놀이라는 뜻이고 갈전은 칡(葛)줄을 당기는 놀이라는 뜻이다. 발하희(拔河戱)로 기록된 것은 이 놀이가 중국의 발하(拔河)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줄을 당기던 놀이였기 때문이다. <한국필리핀축제문화교류협회> 김정환 이사장에 의하면, 필리핀에서도 강을 사이에 두고 줄을 당기는 사례가 현존하고 있다. <기지시줄다리기> 세계 줄다리기 자료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함께 등재된 필리핀에서는 벼를 수확한 후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제사와 축제가 벌어지는데 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가 줄다리기이다. 필리핀 홍두안 지역에서는 넝쿨, 볏짚, 나무묘목을 사용해 줄을 만들어 계곡물에 들어가서 줄을 당긴다." 물론 벼농사와 관련시켜 해석하고 있지만 광의의 줄다리기는 '줄자르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내가 '줄 자르기'에 관한 논문에서 밝혀두었지만 줄다리기의 맥락은 보다 더 근원적인 관념이나 철학 속에서 추적해야 할 놀이이자 의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힌두교 발 '우유바다 휘젓기'나 본 지면을 통해 이론화했던 '테이프컷팅' 이른바 '탯줄 자르기'의 심연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울산 마두희를 해양문화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은 줄다리기의 근원을 보다 깊게 하는 것이자 보다 깊고 넓은 줄다리기의 종다양성을 끄집어내는 의미이기도 하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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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미역이나 톳은 푸른색일까 갈색일까? 푸른색이었는데 갈색의 정기를 입었을까? 살짝 데치면 푸른색이 되니 본래 푸른색일까 아니면 뜨거운 물에 놀라거나 멍들어서일까? '풀'은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텐데 바다의 풀이 마냥 푸르지만은 않은 이유가 광합성에만 있을까. 사전에서는 '푸르다'의 어원이 '풀'에 있다고 말한다. 푸성귀니 푸새니 푸초니 하는 낱말들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풀의 15세기 표현은 '플'이다. 17세기 원순모음화 영향으로 '풀'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풀'의 어원이 '푸르다'에 있다고 생각한다. 항용 인용하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청색과 남색의 비교라고나 할까. 쪽풀에서 뽑아낸 푸른색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니 청색과 남색의 뿌리가 같다. 실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권에서는 초록과 파랑을 크게 구분하지 않았다. 15세기를 전후한 '푸르하다'와 '파라하다'의 분화가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다. 짙푸르고 높푸르며 검푸르고 얕푸른 것이 다르다. 푸르딩딩, 푸르스름, 푸르작작, 희푸르고 얄푸르다. 그래서 뒤꼍의 채소와 깊은 산속의 채소가 색깔이 다르고 얕은 바다와 깊은 바다의 해조류 색깔이 다르다. 뭍과 물의 채소와 해조(海藻)들을 채취하여 삼색나물이니 오색나물이니 의미를 부여하고 각종 의례음식들을 장식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해초류와 해조류가 이루는 바다숲과 바다밭해초(海草)는 바다에 뿌리를 내려서 서식하는 종자식물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바다의 풀이라는 뜻이다. 내 고향에서 '진줄'이라고 하는 '잘피'가 그 중 하나다. 해조(海藻)와 구분하기 위해 초(草, 풀)를 붙인다. 반면에 해조류(海藻類)는 물속에 살면서 엽록소로 동화작용을 하는 은화식물을 말한다. 은화(隱花) 즉 꽃을 숨긴 식물이라는 뜻으로 조류(藻類)를 포함해 선태식물, 양치식물 따위가 해당된다. 뿌리, 줄기, 잎이 구별되지 않는다. 꽃이 피지 않는 것은 물론 포자에 의해 번식한다. 녹조, 갈조, 홍조로 나눈다. 서식하는 깊이를 가지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색을 통해서 분류하기도 한다. 색이 다른 것은 광합성을 통해 영양분을 만드는 정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녹조류는 연안지역 5미터 정도, 수심이 얕은 곳에 산다. 투과력이 약한 적색광을 광합성에 이용한다. 파래나 청각, 매생이 등이다. 홍조류는 수심이 깊은 곳에 산다. 근해지역 15미터 정도, 투과력이 강한 청색광을 광합성에 사용한다. 김, 우뭇가사리 등이다. 갈조류는 녹조류와 홍조류 중간 깊이에서 산다. 원해지역 15미터 정도, 톳, 다시마, 미역, 대황, 모자반 등이다. 지난 2018년 본 지면을 통해 톳을 소개하면서 바닷물 층위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남도바다의 해조류를 언급해드렸다. 수심 가장 위쪽의 바윗돌에는 가사리가 서식한다. 맨 위의 가사리를 불티가사리라 하고 그 아래 수심으로 붙는 것을 세모가사리라 한다. 그 아래 수심으로는 자연산 톳이 서식한다. 톳의 층위에 붙는 해조류로는 모자반(몰 혹은 모자분)과 듬북 등이 있다. 톳 아래 수위로 미역이 붙는다. 가장 아랫자락에는 다시마가 붙는다. 물론 이런저런 양식기술이 발달해 층위가 섞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런 높낮이 속에서 서식한다. 해조류가 가진 부드러움과 질김의 농도가 이 층위에 따라 결정된다. 해초와 해조가 숲을 이룬 곳을 '바다숲'이라 한다. 바다숲에서 물고기들이 서식하니 '바다밭' 혹은 '바다논'이다. '바다숲'은 '바다'와 '숲'을 떼어 써야 맞다. 아직 합성어로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다의 날, 섬의 날, 바다식목일, 심지어는 톳의 날에 이르기까지 기념일들이 제정되고, 갯벌법이 시행되는 등 바다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증진되면, 머잖아 '바다숲'이라 붙여 써야 문법적으로 맞는 날이 올 것이다.보색(補色)의 대칭, 뭍과 물의 연대간조기의 썰물, 남도의 바다에 나가보라. 여섯 시간 전에 물로 가득 찼던 바다가 이내 땅으로 변한다. 땅은 땅이되 뭍과는 다른 땅이다. 실핏줄처럼 물길 가득한 갯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풍경을 늘 거꾸로 자라는 나무라고 말해왔다. 뭍과 마주선 물, 산에 대칭되는 바다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명암을 두어 간조의 갯벌을 관찰하면 시어핀스키 피라미드 같은 미세한 프렉탈 문양이 온 갯벌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미명의 새벽이나 황혼의 저물녘이면 명암은 더 도드라진다. 어떤 조물주 있어 이 황홀한 핏줄들을 직조할 수 있단 말인가. 끝 간 데 모르게 광활한 서남해의 갯벌에는 거꾸로 선 큰 줄기와 잔가지와 미처 털어내지 않은 물비늘들이 좁쌀꽃 같이 빛난다. 잔물결을 이르는 우리말 '윤슬'은 틀림없이 이 갯벌의 반짝임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거꾸로 자라는 나무, 그 숲의 끝이 향하는 곳은 육지다. 풍경만 그러할까. 뭍의 숲과 물의 숲에서 자라는 수목과 해조가 그러하고 그를 기반으로 서식하는 생물 또한 그러하다. 예컨대 해조류에는 한대성 해조류와 난대성 해조류가 있다. 난대성(暖帶性) 해조류는 아열대성 해조류로 주로 제주도와 남쪽바다 중심이다. 한대성(寒帶性) 해조류는 동해, 서해를 포괄하는 중남부 해역이다. 우리나라가 북반부에 속하기 때문에 한대성 해조류가 중심에 있다. 김과 미역이 겨울에 자라고 매생이가 겨울에 자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유리의 매생이 연구에 의하면, 매생이는 9월 이후 자라기 시작하여 한겨울에 채취를 한다. 4월이 이르기 전 생장이 끝난다. 내륙의 식물들이 수확기를 끝내고 생장을 닫을 시간에야 비로소 북반구 한반도의 바다숲은 태양의 빛들을 온몸에 받기 시작한다. 물의 깊이에 따라 많고 적게 받는 햇빛뿐이겠는가. 적도 상간의 거대한 흑조(黑潮, 크로시오)의 흐름들이 머릿물결 돌려세우며 생장하는 해조들을 애무한다. 그러다 다시 뭍의 수목들 햇빛 받아 깊은 땅의 물 끌어올리기 시작할 때 긴 여름잠의 휴면에 이른다. 그래서다. 색이 보색(補色)에 대하여 반전(反轉)을 이루고 물이 뭍에 대하여 반전을 이룬다. 일의 형세가 뒤바뀌어서도 아니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구르기 때문도 아니다. 주역에서는 이를 대대성(對待性)이라 하고 레스트로비스 같은 인류학자들은 이를 대칭성이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서는듯하지만 대적(對敵)이 아니요, 거꾸로 서있지만 서로를 흠모하여 포옹하는 것이다. 6년 전 갯벌이야기로 이 지면을 처음 시작했던 까닭이 여기 있다. 뭍과 물이 햇빛과 바람으로 직조되고 사람과 자연이 공생이라는 이름으로 교직되는 이 땅에서, 물과 뭍을 반복하는 변증법의 공간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남도의 사람들과 꽃들과 풀들과 아! 잃어버린 레퓨지아의 행간과 여백을 좇기 위한 여정들이다. 남도의 바다는 그런 곳이다. 오늘 남도인문학팁은 졸시로 대신한다.갯벌 이윤선낮은 개옹 썰물 갱번에는거대한 나무 한그루 자란다.바다 깊숙이 뿌리 두고달을 향한 연모 키우다사릿발 간조(干潮)때 이르러서야잔가지들 생육한다.지상의 숲을 향해 만개하는뭍의 수목들 잎 피고 꽃피고가지 치던 계절찬바람 불어 지상의 꽃들 열매 맺으면포래, 감태, 모자분, 미역 오만 해조들비로소 심해(深海)의 나무되어잎 내고 꽃 피워 숲을 이룬다.계절 바꾸어 거꾸로 자라는시어핀스키 피라미드 대칭성 기하학지상과 해저의 나무들이 말해준다.나무와 나무가 바꾸어 서고물과 불이 바꾸어 서는 계절대대(對待)의 거대한 우주목 따라비로소 남자와 여자가 바꾸어 선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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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13)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상놈도 없고 양반도 없고 임금도 신하도 없는 세상 백성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 정약전이 말한 이치의 깊은 근원이 여기 있지 않을까"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알지라."(영화 자산어보) 영화에서 장창대가 정약전에게 던지는 말이다. 의미심장하다. "씨만 중하고 밭 귀한 줄은 모르는 거 말이어라. 씨 뿌리는 애비만 중하고 배 아파갖고 낳고 기른 애미는 뒷전인디" 가거댁이 한 술 더 뜬다. 영화 전반을 에두르는 이 말들이 바람이 되었다가 파도가 되었다가 이내 검은 바다 흑산을 가로지른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나는 단연코 이 대사들을 들고 싶다. 드러난 주제라고나 할까. 홍어와 가오리와 혹은 가거댁으로 표상되는 섬사람들의 존재들 말이다. 아니 어쩌면 '홍어'로 비하되곤 하는 남도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정약전을 주인공 삼은 영화였지만 또한 장창대와 가거댁, 그 섬사람들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영화였다. 왜 흑백으로 찍었을까. 단연코 그것은 흑산(黑山)의 영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이 검어서 흑산이다. 천길 물속 너무 깊어서다. 강렬한 태양빛마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어 검은색이 되었다. 어느 조물주가 하늘 잡아 구름 베고 바다 잡아 니람(쪽물염료) 풀어 낮밤 없이 베틀을 돌리는 것일 게다. 진청색으로 거듭 직조한 바다빛깔의 행로는 적도 상간의 크로시오로부터 흑산의 내안까지 태평양을 횡단한다. 그 흑조(黑潮)의 지류에 흑산이 있다. 오히려 맑기에 그 끝을 볼 수 없는 것이리라. 정약전은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라는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사람들의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이라고 쓰고 있다. 자(玆)는 흑(黑)과 같다." 그렇다. 유배 초기 정약전에게 흑산도와 우이도의 바다는 무서움 그 자체였다. 흉중에 든 마음을 짐작할 수도 없고 파도에 울렁거려 한 치 앞날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 운명의 사람들을 만난다.신유박해와 손암 정약전의 유배1801년 조선에 피바람이 불었다. 신유박해(辛酉迫害), 이른바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11살 순조가 왕이 된 첫해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었다. 정씨 형제의 자형 이승훈이 최초로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온다. 벽파가 시파와 남인을 탄압하려는 술책이 가동된다.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홍교만 등 남인,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 100여명 사형, 400여명은 유배된다. 정약종도 이때 참수된다. 정씨 형제들은 모두 4형제다. 남씨 모친이 낳은 큰형 정약현이 있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가 있다. 모두 서학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이승훈이 자형(매형)이다. 배 다른 큰형 정약현의 딸 정명련이 황사영에게 시집을 간다.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된다. 신유박해의 내용을 북경에 있는 주교 구베아에게 알리려 비단에 편지를 쓴 사건이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사정을 알리고 조선의 교회 재흥, 개국 촉진을 요청한 내용이다.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죽음을 면하고 유배된다. 당초 정약전은 완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포항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재압송, 정약전은 다시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영화에서도 길게 인용되지만 사실 정약용보다 정약전이 훨씬 서학(천주교)에 밝으니 이른바 요주의 사상범이었던 셈이다. 소흑산도로 불리던 우이도로 유배되었다가 흑산도 본도로 옮기고 1816년 우이도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두 해 뒤 1818년 다산의 유배가 풀린다. 몇 해만 더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역사는 가정이 없다는데, 그래도 아쉬움이 크다. 그 족적이 한량없어서일 것이다.자산바다의 '장창대들'정약전의 호는 손암(巽庵)이지만 자산(玆山)이 더 어울려 보인다. 자산바다의 온갖 생물들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의 저술 기반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다. 이외 문순득의 표류이야기를 받아 적은 섬 지역 소나무정책을 비판한 바 있다는 세계 최초의 어류박물지로 소개될 만큼 유명한 책이다. 섬사람들의 긴밀한 협조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성격의 것들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섬사람들의 환경과 생태, 어류, 해조류 관련 지식 등을 구술 받아 정리한 구술백과사전이라고나 할까. 자산어보의 성격은 서문에 밝히고 있듯이 해양생태인문학적 관점이 명료하다. 내용이 방대하므로 따로 지면을 만들어 소개하겠다. 동생 정약용이 5백 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섬이나 해양이라는 주제적 관점에서는 비교우위가 크다. 아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목포대 최성환 교수는 '해조(海潮)'에 대한 정약전의 관심이 그의 전통적 관념 변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본래 유학 기반이고 서학에 대한 관점도 명료하였지만 자산바다에 와서야 그의 실학적 면모를 완성한 셈이라는 뜻이다. 검은 바다 흑산을 배경삼은 실존 인물 장창대와 문순득, 가거댁으로 묘사되는 현지처와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장창대는 어쩌면 자산어보의 실제 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창대는 흑산 대둔도 사람이다. 임자년(1729)생, 자는 덕보(德保)다. 정약전이 당시 20대였던 장창대를 대상으로 읊은 시가 있다. "사람들은 장창대를 남들보다 뛰어난 선비라 하지 옛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오묘한 도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네 초저녁부터 이야기 나누다보면 어느새 바다 소리가 들려오누나 어찌하면 한낮부터 밤이 다하도록 이치의 근원을 깊이 더듬어볼까." 이 시를 읽으면 최교수의 분석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어디 장창대 뿐이겠는가. 또 하나의 영화 대사가 심중에 꽂힌다. "상놈도 없고 양반도 없고 임금도 신하도 없는 세상, 백성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정약전이 말한 이치의 깊은 근원이 여기 있지 않을까. 삼천삼백 섬의 장창대들이 천대받고 멸시받으며 되뇌었을 그런 대동세상 말이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 '상놈의 자식', 뿌리 깊은 섬사람들에 대한 천시가 배경이다. 그래서다. 아직도 의문이다. 200여년 지난 지금 우리는 그런 세상을 꾸려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꿈만 꾸고 있는 것인가. 흑백영상의 지극한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그 근원의 전모를 훑어봐야겠다. 어쩌면 너무 깊어서 칠흑(漆黑)색일 수밖에 없는, 강한 햇빛마저도 통과되지 않는 자산바다의 심연 어디, 혹여 그 깊은 이치가 있을지 모르겠기에. 서문 중에서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 창대(張德順 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다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못하였으므로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건만 보고 듣는 것은 넓지 못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후세의 선비가 이를 수윤(修潤)하게 되면 이 책은 치병(治病), 이용(利用), 이치(理致)를 따지는 집안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물음에 답하는 자료가 되리라. 시인들도 이들에 의해서 이제까지 미치지 못한 점을 알고 부르게 되는 등 널리 활용되기를 바랄뿐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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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덕적도에 대한 명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니 문헌상 최초의 우리나라 섬 이름 당·신라 연합, 신라 칠 때 징검다리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 역할도 두 사건 모두 역사의 큰 기점 형성 언젠가 코앞 북한으로 왕래하는 배 출항하는 날만 기다릴 뿐이다 서기 660년 6월,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 13만 명이 한반도로 물밀듯 건너온다. 산동반도 성산을 출발한 군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이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전선 100척 군사 오만 명과 태자 김법민을 보내 영접한다. 당군과 합류하니 18만 명, 백제군이 감당하지 못할 위력의 나당연합군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6월 20일 이들이 합류한 곳이 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다. 왜 덕적도였을까? 그것은 서해의 물길과 유사 이래 명멸했던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대립 혹은 네트워크를 전제해야 이해할 수 있다. 갯벌의 노두, 강변의 징검다리라고나 할까. 지금도 인천항을 드나드는 외항선들 길목이 덕적도의 작은섬 소야도와 건너편 소이작도 사이 물길임을 주목할 수 있다면 왜 이 섬인가를 알 수 있다. 예성강과 한강 아니 한 시대의 수도였던 개성과 한양을 오가기 위해서는 대개 이 수로를 건너야 한다. 중국의 여러 해안은 물론 일본과 동남아를 오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덕적도에 도착한 소정방은 법민에게 7월 10일 사비성을 치자고 제안한다. 왜 바로 부여로 내려가지 않고 20여일 덕적도에 머물렀을까? 항간에는 4개월여 머물렀다고도 한다. 20여일 머문 데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대규모 군사로 위협을 해서 싸우지 않고 백제를 주눅 들게 하는 전략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물때와 해류 특히 내안의 조류 흐름을 기다렸다는 해석에 나는 무게를 둔다. 음력 6월이면 지금의 양력 7월 그야말로 삼복더위다.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기에 불리하다. 더군다나 식수와 군량미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을 작은 섬에서 20여일을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 답은 해류와 조류에 있다. 일 년 중 바닷물 수위가 가장 높은 때가 7월 백중사리다. 여름철이면 난류가 한류를 밀어내며 거대한 해류가 북상하고 겨울철이면 한류가 난류를 밀어내며 남하한다. 여기에 조석간만의 조류 흐름을 잘 읽고 조간대의 연안과 강의 갯고랑까지 읽을 수 있어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설화로 남은 소정방과 덕적도 덕적도의 작은섬이 소야도이고 소야도의 큰섬이 덕적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니 문헌상으로 최초의 우리나라 섬 이름이다. 덕적도의 작은 섬 소야도(蘇爺島)는 소정방의 이름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소(蘇)는 소정방의 성씨요 야(爺)는 아비 혹은 신이라는 뜻이다. 소정방이 신라의 아비라도 된다는 뜻일까? 소야도 노인회장의 구술을 들으니 관련 이야기가 한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헐렸지만 소야도초등학교 해변을 '담안'이라고 한다. 흩어진 주춧돌들이 있었다는데 이를 당나라 군대와 연결시켜 해석한다. 소야도 남동쪽 끝 즉, 소이작도를 바라보는 해안 이름이 '진대끝' 혹은 '진대골'이다. 당나라의 군대가 진을 치던 곳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여기에는 마치 실제 사용한 듯한 돌절구 형식의 바위가 있다. '진대끝돌절구'라 한다. 이 또한 당나라의 군대와 연관시켜 해석한다. 소야도 아홉 개의 경치 중 하나로 꼽는 곳이다. 진대끝에서 당나라 군대 본부가 있었다는 곳까지 연결된 긴 모래사장을 '감'이라고 한다. 당나라 군사들이 밟고 이동했기 때문에 갯벌이 굳어져 단단하게 되었다나. 실제 소야도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해안으로 돌지 않고 단단한 '감' 갯벌을 가로질러 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비롯된 소정방의 덕적도 주둔 사실은 날개를 달고 스토리텔링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은혜를 입었다는 점에서 이런 시선들이 생겼을까? 팩트와 픽션을 뒤섞은 팩션의 확장이 어디까지인지 좀 더 들여다봐야겠다. 어쨌든 중국의 황족 전횡을 마을 시조로 여기는 외연도 등 일부 섬이나 서복의 경유지 및 도착지로 알려진 지명들과 더불어 대중국 교류관련 흔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 다시 1950년 9월의 장면 하나, 민족동란으로 한반도가 피로 물들 무렵, 일군의 해병대가 덕적도에 상륙한다. 지금의 '밭지름' 앞 모래사장이다. 밭지름은 참사진이 있던 소재지(지금의 진1리)의 바깥에 있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덕적도사(1985)는 이곳을 당나라군사들이 주둔했던 곳으로 해석하고 있다. 상륙 해병대는 주민들을 공산군 세력으로 오인했던 것인지 민간인 여섯 명을 총살한다. 송은호(진리, 90세)씨는 지금도 열여섯 살 당시의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덕적도와 건너편 영흥도에 진을 친 해병대의 엄호로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이후 서울수복 및 한국전 종료와 삼팔선의 경계 굳히기 등의 역사는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영흥도를 비롯한 덕적도가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상고해보니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가 백제를 칠 때도 이 섬을 징검다리 삼았고 유엔군이 북한을 협공할 때도 이 섬을 교두보 삼았다. 두 사건 모두 우리 역사의 큰 기점을 형성한다. 이 사건뿐이겠는가. 이 항로에 얽히고설킨 하고많은 역사가 있지 않겠는가. 개경과 한양 등 한반도 심장부의 관문 역할을 했던 덕적도에서 중국을 바라보며 망연한 며칠을 보낸다. 소정방과 맥아더를 견주어 명상한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날은 바람 고요하나 물길 드세 뱃길이 막히고 어떤 날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배들이 들고난다. 역사 이래 발해 연안을 돌아 나선 중국의 배들은 천개의 북한 섬들을 지나 이곳 덕적도를 지나갔을 것이다. 이어도, 가거도를 거친 동남아시아의 배들도 또한 서남해 연안 무수한 섬들을 비껴 한반도의 어딘가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제는 어떤 외세들이 혹은 시절들이 덕적도에 머물러 한반도의 미래를 재구성하게 될 것인가. 섬이란 그런 것이다. 국토로 따지자면 나라의 최전선이자 관문이요, 인문으로 따지자면 우리 마음의 이상향이다. 코앞 북한으로 왕래하는 배가 언제 출항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기다릴 뿐이다. 파도 그치고 바람 자는 날 불현듯 어떤 선주 나서 황해도 해주 가는 배편 출발한다고 항구마다 외고 다닐 것이기에.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의 역사 <옹진군의 역사>를 인용해 덕적도 공부 자료로 삼는다. 덕적도는 우리나 섬 가운데 기록상으로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나 '당서' 등에는 신라와 당나라 교통상의 요지로 덕물도(德物島) 혹은 득물도(得物島)라 한다. '고려사' 지리지 당성군 조에는 인물도(仁物島)로 표기되었다. '고려사' 고종 46년 2월조에 덕적도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다(徒西京黃州民于德積島). 덕적도사(1985) 등에는 '덕물'에 가까운 발음이라 하여 '큰물섬'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物)과 수(水)를 발음상 유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서해의 큰물길이라는 뜻이겠다. 본래 고구려 세력권에 들었다가 신라에 편입되었는데 지금은 북한의 옹진과 인천의 옹진으로 나뉘었다. 덕적이라는 지명은 개성과 장연 사이에도 있다. 여기에 덕물산이 있는데 덕적도 국수봉이나 소야도 국사봉과 친연성이 높다. 소정방이 여기 올라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나 왕이 아플 때 이 봉우리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 등은 덕적도의 만신 김매물의 맥락과 함께 차후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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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농대 중심 5·18 열흘전 의기투합 5·18때 시위 선두에 섰던 농악반 불온한 세상 떨쳐 일어난 바람 5·18이후 본격적인 정비 나서 마을로 들어가 화순한천농악 배워 졸업생에 이어 지금가지 명맥이어 징과 꽹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전남대 정문에서 막힌 시위대는 농대 후문으로 탈출하여 유동 삼거리 금남로를 거쳐 오후 세시 경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약 20여 분간 농악놀이를 했다. 1980년 5월 14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 불기소사건 기록편14(2006)" 중 김양래 조서에 나오는 상황들이다. 당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내 4개의 써클이 있었다. 4-H, 밀알, 청봉, 한농 등이다. 대표 6명으로 '농악반설립추진위원회'를 열었다. 호남혼구사에서 구입한 징과 꽹과리 등 20여종의 국악기, 의상 등도 꼼꼼하게 거론된다. '전남대농악반연혁'에는 4월 19일 발기총회, 회칙을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김양래(임학4), 박승환(농학3), 장환(청봉회장), 정성찬(농대문예부장), 최종석(농학4), 김선출(탈반) 등의 발기인 이름이 나온다. 다시 조서 내용이다. "피의자 박관현의 범죄사실 14항 나,의 기재내용과 같은 경위로 '민족민주학생회' 반정부 시국성토 불법시위 후, 동일 18:00부터 19:00까지 가두시위로 귀교시 연일과 같은 방법으로 농악놀이를 하는 등 적극 활동하고, 동년 5. 16. 15:00경 피의자는 농악대를 인솔, 도청앞 광장에 도착 후 동교 및 재광 각 대학 시위학생 14,300여명이 합세한 시위에서 전항과 같은 농악놀이를 공연 후 동일 17:00부터 18:30까지 가두 시위시 동교생의 선두에서 농악놀이를 공연으로 시위학생의 진출을 유도 및 시민을 선동하면서 유동3거리, 중앙여고 앞을 경유 도청앞 광장까지의 가두시위에 적극 활동 하는 등 반정부 불법시위에 농악공연으로 학생 및 시민들을 선동하고 광주 폭동사태를 유발케 하는 등 피의자는 광주 일원의 안전과 평온을 저해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위반한 자 등인 바..." 연이어 검거, 자수, 미 검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주르르 나열된다. 조서는 물론 여러 구술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가장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농악부대였다. 전남대 농대가 그 중심에 있었고, 조선대 등 재광 각 대학 농악대들이 연합해 뒤를 따랐다. 징과 꽹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전남대 정문에서 막힌 시위대는 농대 후문으로 탈출하여 유동 삼거리 금남로를 거쳐 오후 세시 경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약 20여 분간 농악놀이를 했다. 1980년 5월 14일,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 불기소사건 기록편14(2006)" 중 김양래 조서에 나오는 상황들이다. 당시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내 4개의 써클이 있었다. 4-H, 밀알, 청봉, 한농 등이다. 대표 6명으로 '농악반설립추진위원회'를 열었다. 호남혼구사에서 구입한 징과 꽹과리 등 20여종의 국악기, 의상 등도 꼼꼼하게 거론된다. '전남대농악반연혁'에는 4월 19일 발기총회, 회칙을 작성한 것으로 나온다. 김양래(임학4), 박승환(농학3), 장환(청봉회장), 정성찬(농대문예부장), 최종석(농학4), 김선출(탈반) 등의 발기인 이름이 나온다. 다시 조서 내용이다. "피의자 박관현의 범죄사실 14항 나,의 기재내용과 같은 경위로 '민족민주학생회' 반정부 시국성토 불법시위 후, 동일 18:00부터 19:00까지 가두시위로 귀교시 연일과 같은 방법으로 농악놀이를 하는 등 적극 활동하고, 동년 5. 16. 15:00경 피의자는 농악대를 인솔, 도청앞 광장에 도착 후 동교 및 재광 각 대학 시위학생 14,300여명이 합세한 시위에서 전항과 같은 농악놀이를 공연 후 동일 17:00부터 18:30까지 가두 시위시 동교생의 선두에서 농악놀이를 공연으로 시위학생의 진출을 유도 및 시민을 선동하면서 유동3거리, 중앙여고 앞을 경유 도청앞 광장까지의 가두시위에 적극 활동 하는 등 반정부 불법시위에 농악공연으로 학생 및 시민들을 선동하고 광주 폭동사태를 유발케 하는 등 피의자는 광주 일원의 안전과 평온을 저해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위반한 자 등인 바..." 연이어 검거, 자수, 미 검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주르르 나열된다. 조서는 물론 여러 구술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가장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농악부대였다. 전남대 농대가 그 중심에 있었고, 조선대 등 재광 각 대학 농악대들이 연합해 뒤를 따랐다. '전남대농악반'에서 '오월농악(오월굿)'까지 몇 주 전 전일빌딩에서 '전남대농악반창립과 오월에 대한 구술좌담회'가 열렸다. 발기인이었던 최종석, 김선출이 구술해주었다. 전남대학교농악연구회(회장 우남일)가 주최한 자리였다. 기왕의 보고서나 조서 내용에 없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에 담아뒀던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5.18에 대한 많은 담론들 중 농악 이야기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농악이 의미가 없어서였을까? 80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정작 시위대를 견인했던 주력부대였는데 말이다. 그래서 주목하는 것이 전남대농악반이다. 증언들이 많다.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주문하였다는 얘기도 있고, 그 이전부터 '탈반'을 꾸려 활동하던 김선출이 농대 한농회에 와서 제안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농대 중심으로 약 30여명 정도가 의기투합을 한 때가 5.18 약 열흘 전이었다. 광주역 앞 서울여관을 통째로 빌렸다. 30여명이 4박5일 동안 농악연습을 했다. 전남대 정문과 동문으로 시위대들이 출발할 때 선두에 섰다. 도청앞 광장에서도 누군가의 연설 시작 전에 십여 분 농악놀이로 분위기를 북돋우기도 했다. 농악 가락은 어떠했을까? 최종석의 증언에 의하면 이채, 삼채, 오방진 등 가벼운 가락들이 주류였다. 용이한 가락들로만 보면 5월 시위를 위해 급조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일촉즉발 사회분위기가 이를 추동한 것은 맞지만 5.18 이후 농악놀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그 이전 꾸준하게 농악놀이를 배우고 전승했던 내력이 이를 말해준다. 시위의 선두에 섰던 농악반은 5.18 이후 본격적인 정비를 하면서 화순한천농악을 배우기 시작한다. 마을로 들어가 한두 달 같이 일하면서 배우는 현장학습이었다. 이후 단과대, 심지어는 작은 학과까지 농악반이 만들어져, 캠퍼스 빈 곳에는 여지없이 농악 동아리들의 북장고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월농악(오월굿)'이란 이름으로 5.18의 본격적인 시작이 5월 14일이라는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여기에 있다. 김선출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시위가 있던 풍경이었고 그 시위의 선두에 농악반이 있었다. 어쩌면 이들의 북장고 울림이 광주와 남도의 시공을 울리는 공명(共鳴)이었고 불온한 세상 떨쳐 일어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공명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농악하는 것을 '울린다'고 한다. 남도천지 들에서 바다에서 아니 역사 이래 한반도의 시공을 가르며 쇠와 가죽을 울리고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세상과 공명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도모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나이 40을 불혹이라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엉거주춤 40주년을 보내버린 지금 다시 오월을 맞는다. 불혹이라니 대체 무엇에 혹하지 말며 무엇을 흔들림 없이 지켜가야 할 것인가. 40년이 넘은 지금, 재학생들의 동아리는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농대를 중심 삼았던 전대농악반은 졸업생들에 의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 대학의 이른바 풍물패들도 사라졌지만 오월풍물단, 4.19풍물단, 굿스쿨 등 여러 단체들과 문화재로 지정된 각양의 농악들이 전승 재구성되고 있다. 감히 '오월농악' 아니 '오월굿'이란 이름을 붙이는 이유랄까. 고대로부터의 사회사적 뿌리를 갖는 농악일진대, 그것이 세상과 공명하여 5.18의 아름다운 울림을 낳았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 본질과 확장에 대해, 그리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어떤 변화와 비전으로 우리사회의 공명을 준비하거나 펼쳐가고 있는 것인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불혹이란 오로지 세상과 더불어 공명하는 것을 이르는 언설일 뿐이다. 고목 스러진 자리, 씨앗들 뿌려져 새로이 나무 자라고 더 울창한 숲이 된다. 오월농악(오월굿)이란 이름을 붙이며, 가신님들 영전에 다시 옷깃 여민다. 비로소 남도 산하 아름답게 울리던 굿 소환하니 어찌 기쁘니 아니한가. 남도인문학팁-전남대농악반의 사회사적 뿌리 1960년부터 1973년까지 광주농고와 전남대 농대에서 농악을 가르쳤던 이주완(1910~1973)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이끄는 전남농악대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1964년) 했다. 관련 정보는 표인주 외 공저, <이주완의 풍물굿과 이경화의 예술세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농업 관련 써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농대라 오래 전부터 농악에 큰 비중을 두었던 것. 그뿐일까. 혼란스럽던 유신 전후, 남도에는 많은 민주인사들이 내려와 사회운동을 했다. 예컨대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이후 해남에 내려와 있던 작가 황석영, 시인 김남주는 물론 이대출신 탈춤반 '한두레', 전남대와 조선대의 탈반 출신들이 만든 '광대', 야학 등 무수한 운동가들과 모임들 말이다. 이들에 의해 민요, 연극, 열사가 등의 판소리, 마당극, 특히 풍물로 호칭되는 농악이 연희되었다. 전후 맥락을 보아하니 이 풍경은 동학농민전쟁에 가 닿는다. 그들 또한 징과 꽹과리를 울리면서 압제와 부조리한 세상을 징치하고자 했다. 그뿐일까? 설령 이름은 다르고 형태나 구성은 달랐겠지만, 연말연시의 의례에서부터 농업과 어업의 각종 두레, 혹은 임진왜란, 삼국전쟁 등으로 거슬러 오른다. 아니 어쩌면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울리던 북소리와 쇠소리로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감히 이름붙이는 오월농악(오월굿)은 그렇게 장구한 뿌리를 가지고 탄생하였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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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사람은 사람을 배반해도 개는 사람(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물론 목숨을 내놓고 주인을 지키는 동물은 개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성(人性) 없는 사람을 일컬어 개만도 못하다 했다. 개성(犬性)조차 없다는 뜻이다. 나는 개의 본질을 사랑과 지킴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의 개가 문을 지킨다. 터키의 캉갈은 양을 지키는 개다. 심지어 곰이나 늑대, 자칼에게서 양을 지켜내기에 신장이 1미터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고대 이집트의 개(석상)는 성문을 지킨다. 변형된 개들도 지킴이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개는 각종 동물과 섞이거나 창조적으로 변형된다. 사자개와 계견(鷄犬, 닭개)과 고마이누(狛犬)도 각기 그들이 지켜야 할 것들, 예컨대 성문과 신격과 온갖 내밀한 사연들을 지킨다. 참고로 일본 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고마이누는 고구려에서 일본에 전해진 횡적(橫笛, 혹은 高麗笛)과 이름이 같다. 이누이트족의 개는 달을 지키며 북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족의 개는 무려 영혼의 끝을 지킨다. 우리 민화의 개는 심지어 귀신도 잡고 도깨비도 물리친다. 문을 지키니 문배도(門排圖)다. 문배도에 관해서는 지난 호에 소개했으니 오늘은 개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민화에 그려지는 개들은 전형적인 토종개의 모습인 듯한데 목에 검은 방울을 달고 있다. 벽사용 신구, 즉 귀신 잡는 개다. 하지홍씨는 민화 문배도 중 사자개의 모델이 청삽살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많이 보고 널리 들어야하기에 눈이 네 개, 귀가 네 개가 되기도 한다. 19세기의 용호문배도에는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리는 호작도(虎鵲圖) 외에 해태 모양의 사자나 개를 그리기도 하고 삼재가 든 해에는 매그림을 대문에 붙이기도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문배도의 개그림은 사실 개가 오줌을 눔으로써 영역을 표시하듯 '우리'라는 영역의 표시, 그래서 안과 밖을 경계 짓는 영토화와 관련되어 있다. 문배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가 반려인의 영토이고 위해하는 적들은 물론 갖은 귀신들마저 침범하지 못하는 안전한 영토인 셈이다. 한 동물을 사랑하기 전까지 우리 영혼은 잠들어 있다. 아나톨 프랑스가 한 말이다. 아마 인류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시공을 초월하였던 모든 영성들이 그리고 촉수가 문을 닫아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세워져 있는 발토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1925년 겨울, 거친 얼음과 북극의 매서운 바람을 뚫고 네만(Neman)강에서 알래스카 서부의 놈(Nome)까지 1천 킬로미터를 달려 치료제를 전달한 불굴의 개들을 기리며, 그 인내와 충성, 그리고 지혜를 찬양하노라." 전염병 디프테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동토의 땅 알래스카의 한 도시에 치료제를 전달한 개들을 위한 비문이다. 리처드 토레그로사가 쓴 '개와 고양이에 관한 우습고도 놀라운 진실'(푸른숲)에서 인용했다. 인류를 구한 개들이라고나 할까. 개는 개별 사례에서 민속신앙까지 혹은 병들고 상처받은 마음까지 지켜내는 신장(神將)이요 사천왕이며 게이트키퍼다. 특히 흐트러진 마음, 잃어버린 마음, 상처받은 마음들을 치유하는 등 마음 지키기에 있어서는 반려견 만큼 탁월한 게 없는 듯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원영은 '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문학과 지성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개와 고양이와 함께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쓰다듬다 보면, 고달픈 세상살이로 뒤틀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하게는 즐거운 시간을 갖는 데서부터 정서적 불안이 해소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장 질환이 호전되기도 한다. 나아가 그들과 삿됨 없이 온 정성을 다해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성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개들이 사기성이 없고 분열적이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있고, 그 순간 우리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한없는 행복을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점 조절의 기회가 된다. 맞다. 도대체 인류가 개발해둔 그 어떤 무엇이 차마 지상에서 숨 쉬고 있을 여력이 없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아무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소확행의 화평을 가져다줄 수 있단 말인가.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하며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한다.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 즉 심우도(尋牛圖)에서 빌려온다, 선불교에서는 십우도를 소와 목동에 비유한 선의 수행단계로 설계해두었다. 열 개의 그림이니 십우도이고 깊이 성찰하여 찾으니 심우도(尋牛圖)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보명 십우도와 곽암의 십우도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주요한 사찰 법당의 벽화로 주로 묘사된다. 십우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는 소 대신에 말을 그린 십마도(十馬圖)가 있고 티베트에는 코끼리가 소재로 등장하는 십상도(十象圖)가 있다. 이에 비유하면 심견도(尋犬圖)는 개를 주인공 삼아 그린 일정한 서사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선불교의 심우도가 깨달음의 내력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내가 제안하는 심견도는 늘 깨어있을 수 있는 내력을, 나아가 오로지 사랑과 화평의 내력을 도설한 그림일 수 있다.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하는 이유다. 하지만 개의 특성에 따라 그 설계를 달리한다. 깨달음이라기보다 무엇인가에 대한 지극한 염원이라고 해두는 게 낫겠다. 지극한 소망을 다루고 있으니 일명 '천견도(千犬圖)'다. 천 마리의 개를 그린다는 뜻이 아니다. 천개의 개는 천 마리의 개와 다르다. 천년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은유다. 천수천안관음을 손바닥의 단 한 개 눈으로 표현하듯, 천년이라는 메타포는 그 아우라가 깊고도 넓다. 내가 제안하는 심견도는 천견도와 같은 말이다.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음동의어로 사용한다. 심우도처럼 열 개의 그림을 특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특별한 어떤 계단을 마련한다든가 무려 수십 개의 계단을 마련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십우도의 예를 따를 뿐이니 그것이 다섯 계단이면 어떻고 두 계단이면 어쩌랴. 다만 상실에서 치유로 아니면 혼란이나 슬픔에서 안정과 평화로 가는 과정을 에둘러 설계할 따름이다. 심견도를 그리는 과정은 선불교의 십우도를 따라 깨달음의 과정으로 이해해도 좋고 예수의 행로를 따라 기독교 구원의 과정으로 이해해도 좋다. 완성된 그림이어도 좋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 혹은 과정을 뜻해도 좋다. 아니면 자신이 믿는 종교나 신념이나 학설에 따라 과정을 설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겐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삼아도 좋다. 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재구성하는 단계로 설정해도 좋다. 평정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마음을 지켜내는 과정으로 삼아도 좋다. 아니면 서사 구성의 일반적인 예를 참조해도 좋다. 사건과 행위와 사건들의 연속인 스토리와 재현의 서사담화들이 그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반려견과의 교신처럼 무언의 영감이 상호서사(게임서사)로 구성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예컨대 국악의 선율과 장단의 서사라면 기, 경, 결, 해의 단계들을 거쳐 오로지 창작되는 선율과 드러나지 않은 리듬으로 교섭할 수 있을 것이다. 혜능선사가 '육조단경'에서 말했던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과 '평화'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이 서사의 과정들을 더하면 천견도(千犬圖)가 된다. 반려동물 천만의 시대, 지금 누군가는 심견도를 그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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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여린 풀 위로 솔솔바람 부는 기슭 높은 돛배 안에 홀로 잠 못 이루네 넓게 트인 들판엔 별빛 드리우고 달빛에 일렁일렁 양자강 흐르네 어찌 문장으로 이름을 드러내리 늙고 병들면 물러나야 하는 것을 이리 저리 바람에 정처 없이 날리니 천지간을 떠도는 난 한 마리 갈매기" 시의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두보(杜甫)의 '여야서회(旅夜書懷)'다.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고생하면서 결국 유랑하다 병사했다. 훗날 시성(詩聖)으로 추앙받게 되었지만 정작 고독하기만 했던 생전의 심사를 한 마리 갈매기로 드러냈다. 어디 두보뿐이겠는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양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갈매기를 노래하거나 그렸다. "백구야 펄펄 나지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성상이 바리시니 너를 좇아 여기 왔다"로 시작하는 <백구사(白鷗詞)>를 대표격으로 거론해도 좋으리라. 백구(白鷗)는 문자 그대로 흰 갈매기다. <백구가(白鷗歌)>라고도 하는 이 노래는 가곡 언락이나 12가사의 하나로도 불리고 창부타령 등의 민요로도 불린다. 가사는 '청구영언', '가곡원류', '남훈태평가' 등에 실려 있다. 판소리 단가 <강상 풍월>에도 이 가사를 활용한다. 노래뿐일까. 사립을 쓴 선비가 바다나 강의 어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풍경에는 여지없이 갈매기가 등장한다. 그림 속의 화자들은 왜 하나같이 빈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일까. 작자나 연대 미상으로 이토록 광범위하게 갈매기를 형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독, 고립, 외로움, 쓸쓸함, 대개 이런 정조(情調)로 읽힌다. 하지만 행간은 다르다. 오히려 기다림이나 어떤 꿈들이 빼곡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가난과 질병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던 두보가 그렇고, 셀 수도 없는 여러 섬 지역 유배자들이 그렇다. 조희룡의 만구음관(萬鷗唫館), 만 마리의 갈매기가 노래하는 집 지금의 신안군 임자도에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는 집이라는 뜻의 만구음관 간판을 걸고 유배생활을 했던 우봉 조희룡(1789~1866)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궁중의 도서를 관장하는 낮은 벼슬아치이자 서민계열이었기 때문일까. 여항(閭巷)의 묵객으로 불린다. 일반 백성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중인, 서얼, 서리, 평민들을 아우르며 양반네들도 포섭하는 개념이다. 위항문학이니 중인문학이니 여항화가니 하는 언설이 그것이다. 1851년 그의 나이 63세 되던 해, 추사 김정희의 심복이라는 죄목으로 임자도에 유배된다. 이선옥은 그의 글 '조희룡의 감성과 작품에 표현된 미감'(호남문화연구)에서 오히려 서화를 통해 교류했던 사이로 해석한다. 추사로부터 난초 그리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들이 제자라기보다는 교분의 관계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추사의 제자 중 남종문인화의 대를 이은 소치 허련과 대조적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김정희가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초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그의 가슴 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을까? 그림뿐 아니라 숱하게 거둔 우봉의 문학적 성과는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중국의 대치에 견주어 소치라는 호를 허련에게 주었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폄하의 풍경이다. 임자도에서의 억울한 귀양살이보다는 이런 신분에 대한 하대나 폄하가 슬펐을 수도 있겠다. 유배초기에는 심한 울분에 쌓였던 듯하다. 그의 그림들 중 상당수가 횟수로 3년밖에 되지 않는 임자도 유배기간에 그려졌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그만큼 그림에 진솔한 속내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항인으로서의 울분과 섬 유배의 절대고독이 예술과 문학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갈매기 세계 약 86종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붉은부리갈매기, 재갈매기, 괭이갈매기, 검은머리갈매기, 목테갈매기, 세가락갈매기 등 갈매기속 8종과 흰죽지갈매기, 쇠제비갈매기 등 제비갈매기속 3종이 알려져 있다. 이중 텃새는 괭이갈매기뿐이다. 소리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동북아시아에 국한된 종으로 우리나라 연안 무인도서에 집단 번식한다. 나머지 6종은 겨울새, 1종은 여름새, 10종은 나그네새, 2종은 길 잃은 철새(迷鳥)다. 내가 수십일 여에 걸쳐 세 번의 무인도답사를 하면서 참관했던 곳 중에서는 격렬비열도, 직도, 십이동파도 등지가 기억에 남는다. 우는 새와 노래하는 새, 리처드바크의 갈매기의 꿈처럼 이제는 세월호, 못다 꾼 그들의 꿈을 기억하고 재구성하고 실천하는 과제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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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만 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한성준,1941년) 1941년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이(爾)>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이(爾)>의 지은이 김태웅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圓覺社)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년 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월 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명창들이 백칠십 여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다.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시기와 관련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띤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즉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동·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가 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무안출신 강용환 국악명가 일명 강윤학 3대 국악명가라고 한다. 강윤학은 친척 강백천과 교우하며 남원 운봉 박만순에게 소리를 배운다. 아들 강용환(강용안이라고도 함, 1866~1938)은 정정열, 이동백과 교유했다. 어전광대(왕 앞에서 판소리하는 이)다. 의친왕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창극의 창시자로도 불린다. 강용환의 아들 강태홍(1891~1957)은 경주권번, 달성권번 등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를 창시했다. 부산지역 제자로 원옥화, 강남원, 박차경, 김춘지(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신명숙(부산시 무형문화재) 등이 있다. 강남중(1900~1972)은 숙부 강용환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오태석, 송만갑, 정정열 등을 사사했다. 일본에서 창극을 할 때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하여 고문을 당해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범 김구에게 오현(悟峴)이라는 호를 받는 등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이외에도 강준안, 강태종 등 명인이 있다. 아쉽게도 강용환 사진자료 등이 전무하다.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에서 관련 창극 '명인의 봄'을 초연한 바 있다. 강윤학 집안의 3대 명인들을 모태로 출발 한 것이 무안 군립국악원이다. 현재는 3명의 상임단원과 6명의 비상임 단원뿐이지만 더 큰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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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섬을 이르는 우스개 중 하나, '서 있다'고 해서 '섬'이라 한다. 농담으로 하는 말일까? 제주도 비양도에 흥미로운 설화가 있다. 임신한 해녀가 흘러 내려오는 섬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한림 앞바다에 서게 되었다. 아마도 이 섬에 올라 소변을 보던 해녀 아니었으면 우주 어느 한 별까지 흘러가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늘에 날아오른다는 뉘앙스의 비양(飛揚)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그래서인지 북쪽 해안의 파식대에 발달한 호니토를 애기 업은 돌, 부아석(負兒石)이라 한다. 호니토(hornito)는 용암이 공중에 튀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면서 굳어버린 바위덩어리다. 2004년 천년기념물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염습지 펄랑못 중앙에 정초 개의 날 제의를 하는 술일당(戌日堂)이 있는 이유도 이런 설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비양도 뿐일까. 이 이야기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물에 떠내려가다가 "저기 섬이 떠내려가네"라고 소리쳐서 멈춰 선 것이 섬이라는 것이다. 소리치는 주인공은 주로 소녀, 임신한 여자나 출산과 관련된다. 비양도의 해녀가 오줌을 누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시작, 출산 행위와 결부 짓는 것은 이 설화를 통해 섬이 가지는 땅의 탄생 아니 어쩌면 우주의 탄생, 모든 생명의 기원을 말하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삼십삼천 도솔천일까 삼천삼백의 섬 우리나라에 섬이 몇 개나 있을까? 무엇을 섬이라 하는가에 따라 개수는 달라질 수 있다. 도(島)는 관념상 큰 섬을 말하고 아주 작은 섬들은 서(嶼)라 한다. 크고 작은 온갖 섬이라는 뜻의 도서(島嶼)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새(鳥)가 앉아 쉬는 산(山)이라는 합성어로 해석한다.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나타났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암초나 '여'를 섬으로 볼 것인가도 흥미롭다. 우리나라 최남단 '이어도', 마라도로부터 149Km 떨어진 수중 암초인데 2003년 6월에 이어도종합해양 과학기지가 설치되었다. 수심 50미터를 기준으로 약 2㎢인 작은 암초지만 전략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지점이다. 이어도라는 이름은 남도 사람들의 설화와 제주도의 민요에서 왔다. 정부 기관의 통계에서도 섬의 개수가 통일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여를 섬에 포섭한다면 밀물(滿潮)에는 몇 개 썰물(干潮)에는 몇 개 등으로 구분하여 셈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개펄을 포함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 해역이 가지는 특성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섬이 가장 많은 행정구역은 신안군이다. 자료에 따라 800여개에서 천 개 혹은 더 이상의 개수로 표현한다. 하지만 1004개를 통설처럼 얘기한다. 일명 '천사의 섬'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정한 숫자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나는 우리나라 섬의 개수를 삼천삼백 개라고 부른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발표한 섬의 개수가 유인도 472개, 무인도 2,876개로 3,348개라는 점을 참조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지랖 넓게도 인문학자의 시선은 바로 삼천삼백이라는 숫자가 표상하는 불교관념, 아니 동양 고전의 관념과 철학에 닿는다. 불교의 우주론에 삼십삼천의 중심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의 정상에 수미산이 있다. 해녀가 오줌을 누지 않고 가만 놔뒀더라면 한림의 앞바다 비양도는 어쩌면 삼십삼천 도솔천까지 흘렀을지도 모른다. 해맥론(海脈論), 교역과 전쟁, 갈등과 화합의 징검다리 우리는 오랫동안 북방으로부터의 정치, 외교, 역사, 문화의 이입과 습합을 모토삼아 왔다. 그 근간에 광활한 만주와 대륙, 산과 산맥을 중심에 두는 이론이 있다. 정맥이니 정간이니 하는 이론들, 산을 중심에 두는 풍수적 관념들, 오악삼해(五嶽三海)에 왕이 제사하는 의례들에 이르기까지 그 생각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 우리의 역사를 관통해 온 이 관념들은 히말라야나 북방의 광활한 산맥으로부터 백두산 금강산을 거쳐 지리산 등으로 이어져 국토의 실핏줄까지 씨줄날줄로 횡단한다. 이 생각들은 고대로부터의 신화와 관념과 철학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의 내외면을 포괄하는 심리적 지형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멀리는 대해양시대 가깝게는 근대 제국주의의 팽창과 2차 대전, 크고 작은 전쟁과 교섭 속에서 해양의 중요성이 부각되어왔다. 그래서다. 해류와 조류 특히 중국과 한반도의 매개공간인 황해를 거꾸로 보는 해맥론(海脈論)이 중요하다. 산맥의 맥(脈)이 사실은 혈맥이나 수로를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말로 표현하면 '물길론'이다. 그간의 내륙적 사관을 뒤집어보는 방식이다. 산맥을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적도 상간, 지구 자전의 영향을 받아 회전하는 흑조(黑潮, 쿠로시오 해류)가 있고 이 해류가 갈래를 치는 지류들이 있다. 특히 우리에게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개펄의 특성이 있기에 조류의 해맥론이 중요하다. 나는 이를 토대로 낙동강, 영산강에서 압록강, 두만강에 이르는 강항(江港)문명을 설명하곤 한다. 섬이 해맥의 주요 지점들을 형성한다. 바다를 통한 국가간 협력이나 상존하는 섬 분쟁 등도 포함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도가 바뀔 만큼 섬을 매개로 하는 혹은 섬을 중심으로 삼는 공간 관념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연안의 모든 섬들을 연결해버리겠다는 다리도 그런 풍경 중 하나다. 향후 이어질 교량까지 포함하여 선을 그은다면 우리의 지도는 획기적으로 바뀐다. 다리의 안쪽은 일종의 호수가 되는 셈이다. 더부살이하던 교군(僑郡) 혹은 교현(僑縣)에서 오히려 중심이 되는 교군(橋郡)으로 섬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 남도지역 특성이던 부잔교(浮棧橋)가 비행기의 Air birdge로 바뀌지 않았던가. 곧 설립될 국립섬진흥원도 이런 흐름들을 반영하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역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교량(橋梁) 말이다. 땔나무꾼이 어찌 노파심을 말할 수 있겠는가만 바라건대 공간 혁명에 준하는 아니 통념을 통째로 뒤집어 국가개조에 나서는 동아시아적 비전과 포부들을 펼쳐주시기 바란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나라 성장동력의 견인차, 섬사람들의 디테일이 있다. 20여년 가까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작은섬 프로젝트에 참여해오면서 생각해둔 것이 있다. 북한의 섬들을 모두 조사정리하고 위화도에서 회군 아니 회향하는 것 말이다. 시절이 어찌 흐를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새로운 국가의 개조, 희망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이 있다. 오늘 남도인문학팁은 졸시 '섬'으로 대신한다. 섬 - 이 윤 선 거슬러 오르는 게 어디 연어뿐이랴 조금 무시 지나고 사릿발 물살 억세도 칼날 같은 바람 모가지 아래 비늘 세우고 갱물 거스른 섬들 웅성이며 오르네 곰할머니 동굴에서 쑥마늘 드시던 때였을까 애기 업은 어떤 처녀 소스라치며 외쳤지 저기 섬이 떠내려가네! 저기 섬이 떠내려가네! 외던 소리에 심약한 섬들 그 자리 서버렸는데 달 정기 받으시온 어떤 섬들 외쳤지. 우리 어찌 서있기만 할 것인가 우리 어찌 흐르기만 할 것인가 만년 천년 물 한 가운데 있었어도 흐르는 바람 탓한 적 없고 역류하는 간만(干滿)의 물 원망한 적 없네 대저 갱물은 들고 나는 것이어니 거슬러 오르는 게 어디 연어뿐이랴 남녘 겨울바람 백설 되어 쏟아져 내린 갱번 옷깃 세운 물비늘 길베 삼아 가르며 새떼 같은 섬들 갱물 거슬러 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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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저 유명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이미자는 1964년 이 노래를 불러 일약 국민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한다. 한산도(한종명) 작사, 백영호 작곡, 하지만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이게 된다.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가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붉은색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전문 연구자들에 의하면 왜색이나 빨갱이라는 배경 보다는 박정희정권의 '한일국교정상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한다. 한일수교 반대, 저자세 외교논란을 미연에 차단했다고나 할까. 이 노래는 우여곡절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된다. 왜색의 혐의를 입었던 것은 트로트 자체에 대한 이율배반이랄까, 뽕짝은 무조건 요나누키 음계이고 일본의 것이라고 폄하했던 시대적 풍조가 한몫을 했다. 민요 등 전통음악의 쇠잔, 트로트와 가요의 병존, 급속한 산업화, 농촌인구의 와해 등 상황들이 얽히고설킨 시대이기도 했다. 이즈음 트렌드이기도 한 트로트 열풍을 보면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트로트에 대한 시선 자체가 염세나 비관, 저급이나 신파의 정조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동박새가 꿀물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 '동백아가씨'는 남해안 혹은 섬지역을 중심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동백꽃을 아가씨에 대입한 것이다. 하지만 동백에 대한 전통적 시선은 비관과 좌절, 애수와 연민 보다는 오히려 고결과 숭고, 절개와 지조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민화(民畵)나 묵화(墨畫) 특히 화조도(花鳥圖)의 소재 중 하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춘수가 그랬다. 이름을 불러주어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아무리 아름다운 대상일지라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극한 고백 아닌가. 한걸음 나아가 동백은 새가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이다. 그래서 조매화(鳥媒花)다. 북한에서는 '새나름꽃'이라 한다. 새에 의해 꽃가루가 매개되는 꽃이라는 뜻이다.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는 동박새가 꽃가루 옮겨주는 기능을 한다. 동박새는 동백꽃의 꿀을 먹고 살고 동백꽃은 동박새가 꿀을 옮겨주어야 수정을 한다. 그래서 '동백새'라고도 한다. 동박새는 한국, 일본 등지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분포하는 텃새이다. 섬이나 연안 등지 동백숲에서 살기에 울릉도나 제주도, 서남해 섬지역에서 볼 수 있다. 몸의 길이는 11cm정도, 등은 연한 녹색인데 날개와 꽁지는 녹갈색이다. 배는 흰색이고 눈 가장자리가 은색의 흰고리 모양이다.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여 식물성 꿀과 열매를 먹는다. 또 에벌레나 거미, 곤충류 등의 동물성 먹이를 먹고 산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가 공생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동백꽃과 동박새의 관계는 명실상부한 공생이다. 옆구리에 붉은색을 띠고 있는 동박새를 김치자국이라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애수와 비련에서 휴머니즘과 고결까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살았다. 자식이 없어 자리를 물려줄 수 없었기에 동생의 두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욕심 많은 왕은 그것이 싫어서 조카들을 죽일 궁리를 하였다. 동생이 이를 알고 아들들을 멀리 피신시켰지만 이내 들켜버리고 말았다. 왕은 동생에게 두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동생은 죽어 동백나무가 되었고 아이들은 동박새가 되었다. 동박새가 동백나무에 둥지를 틀고 동백꿀을 따먹으면서 사는 내력이다. 울릉도나 대청도 등지 섬에는 육지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섬의 아내가 죽어 꽃이 되었다는 설화들이 전해온다. 설백의 배경에 마치 핏덩이처럼 새빨갛게 핀 동백이 사람들의 심성을 그렇게 움직였을 것이다. 섬지역에 깃든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이런 이야기로 창조되었을 터인데 기왕이면 좀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싶다. 동백을 한편에서는 산다화(山茶花, 산의 차꽃)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기동백꽃(춘백)이다. 동백꽃차의 애용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 역사가 꽤 깊은 모양이다. 겨울에 피면 동백(冬柏), 봄에 피면 춘백(春栢)이라 하니 바람 속에 피면 풍백(風柏)이요, 눈 속에 피면 설백(雪柏), 마음속에 피면 심백(沈柏)이랄까. 어쩌면 심중의 꽃 심백(心柏)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남도지역 특히 섬지역에서 긴요하게 쓰인다.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 마주하는 교배례의 경우, 신부집에서 마당에 초례청을 세우고 갖가지 장식을 한다. 대개 꽃병에 송죽(松竹)이나 사철나무를 꼽는데 남도지역에서는 동백꽃을 사용한다. 굳은 절개의 의미로 해석한다. 사철 푸르다는 것 외에, 시들지도 않고 꼭지 채 떨어져 내리는 낙화의 이미지도 한몫 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달기 때문에 다산의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엉덩이를 치면 남아를 잉태할 수 있다는 등 임신을 돕는다는 속설이 그래서 나왔다. 이런 심미안은 그림으로도 나타난다. 묵화(墨畫)가 사군자를 그리는 것이라면 민화(民畵)는 초충(草蟲, 풀과 벌레)을 그린다. 민화라고 사군자의 소재를 그리지 않겠는가만 고고하고 절절한 기풍보다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성을 강조했다고나 할까. 그 중 매화, 수선화 등과 함께 즐겨 그렸던 것이 동백꽃이다. 문자 그대로 겨울(冬)에 피는 꽃이기에 정절이나 고결의 의미를 내포한다. 뜻으로 보면 사군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조와 절개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동백아가씨와 동백꽃 그림을 넘어 해안마다 지천인 동백숲이 그립다. 동백꽃 모가지 채 뚝뚝 떨어져 내리는, 마침내 바뀔 계절 기다리며 다음 졸시 한편으로 대신한다. 섬동백(島冬柏) 이윤선 너 어쩌자고 꽃술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송이송이 꼭지 채 떨어지느냐 순백의 한겨울 무슨 곡절 그리 깊어 홑꽃잎마다 검붉은 멍들 우그린 채로 왕의 명을 받을 수 없어 스스로 자결하고선 동생은 동백나무 되고 그 아들들 동박새 되었다지. 육지나간 남편 무슨 일로 늦게 돌아와 동백으로 변한 아내 찾는 동박새 되었다지. 비로소 이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 하더라만 동박새 꿀물 날라주어야 피는 동백꽃만 하겠느냐 겨울마다 계절마다 순백의 풍경으로 스며들어 세상 모든 가슴앓이 감아 안는 설백(雪柏)만 하겠느냐 계절 가면 간단없던 북풍한설 지나고 세월 가면 생채기 난 나이테도 아물어지는데 당산 남쪽 조산숲으로 서고 갯골 동편 우실로 서서 바람 눈비 맞서고 물결마저 헤쳐 왔는데 너 어쩌자고 홑잎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야속하단 한 마디 없이 댕강댕강 떨어지느냐 사철 푸른 잎가지 가없는 백설 풍경으로 두고 붉은 입술 붉은 심장 그저 초연히 떨어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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