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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최고령 사할린 동포가족이 맞이하는 임인년한국에 영주귀국한 사할란 동포 중 현존하는 최고령 사할린 동포 김새이꼬(김정호. 1922년생) 김기와(1932년생) 부부가 이번 '사할린특별법'으로 사할린에서 남겨둔 딸이 영주귀국하여 오늘 인천에서 임인년 설날을 함께 맞이하였다. 1월 1일부터 2박 3일 동안 이번 인천에 영주귀국한 동포들 5분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준비했다. 오늘 1일 첫번째 만나게 되는 김세이꼬 옹(100세)이 사는 남동구 달맞이마을 5단지를 찾았다. 함께 동행을 해준 공노원 선생은 설빔떡과 동치미를 준비해서 찾아갔다. 예전과 다르게 사할린에서 온 딸이 현관문을 열어주어서 마음이 편했다. 그동안 필자는 2017년 1월부터 매년 3번 정도 방문을 했다. 어버이날, 추석과 설날같은 날에 가면 사할린에 남겨 두고 온 자식들을 그리워 하셨다. 울산이 고향인 김정호 옹은 1942년 3월 1일 만 20세에 장가를 간 형님 대신 사할인에 강제동원으로 끌려왔다. 당시 마을에서 80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함께 끌려왔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을 거쳐 사할린 땅을 밟자마자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김옹은 샤흐초르스크 탄광에 배치가 되어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때까지 하루에 콩밥 500g 배급으로 버텨야만 하고 새벽부터 나가서 하루 15시간씩 캄캄한 막장에 내려가서 갱도를 파야만 했다. 고된 노동을 하느라 건장한 육체라도 너무나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일제는 살이 쪄서 배가 나오면 갱도를 다니기 힘들다며 부족한 배급을 주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물을 채우고 나서야 잠을 잤다고 한다. 함께 온 조선인이 탈출에 실패하여 잡혀 온 탈주자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주검이 되었다. 이후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으로 위장 70%를 잘라내는 수술을 한 이후 합병증으로 11번이나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하고 살아 남았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귀향선을 기다렸지만 사할린에는 4만 3000여명이 억류되어 남겨진다. 홀로 남겨진 김옹은 1951년 지금 조강치처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둔다. 그러나 무국적으로 살다가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을 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소련 국적을 받게 된다. 누구나 그 당시에는 공산국가인 소련 국적을 받게 되면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버티다가 일부는 북한 국적이나 소련 국적을 받는다. 불편한 몸으로 벌목일과 협동농장 건축공으로 4명의 자식들을 다 키워내고 출가를 시킨다. 지난 2007년 조국행을 택한다. 김옹의 마지막 소원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4명의 자식과 손주들을 남겨두고 조국으로 영주귀국을 했다. 처음에 자식들이 말렸지만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작년 5월 어버이날만해도 건강이 좋으셨다. 올 설날에는 긴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에 방문을 하게 되었다. 공노원 회장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고, 따님이 이번에 같이 살게 되어서 좋으시죠. 더구나 올해 할아버지 100세가 되시는데, 잔치를 해야 하는데......이 코로나가 힘들게 하네요."라고 위로했다. 김기와 할머니는 "네. 아들 3명에 이 딸 하나인데, 두 아들은 저 세상으로 가서 사할린에 묻고 왔는데,... 이 딸이 이번에 오게 되어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모두 부모자식들이 서로 보고 싶어서...... 오고 싶으면 와야 하는데. 이번에 오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라고 동포들 걱정을 먼저 했다. 이번에 영주귀국한 외동딸 최양자씨는 "그동안 러시아 생활이 바뻐서 연로한 부모님을 자주 뵈러 오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 곁에서 아버지 100세 생신을 차려 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라고 전했다. 서울 중구 정동1928 아트센터에서 열린 '사할린 동포법 제정 및 영주귀국 기념식'의 기념사에서 김부겸 국무총리는 23일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에게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진 역사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정부가 온 마음을 다해 국가의 책무를 다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밝혔다. 정부는 지난 1월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는 지원 대상을 기존 동포 본인과 배우자, 장애자녀에서 직계비속 1인과 그 배우자까지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국가 책무로 규정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사할린동포와 그 가족 91명은 지난달 27일 이 법에 근거해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동포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감을 굳건히 갖고 문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사할린 동포들만을 위한 특별한 기본 매뉴얼이 시급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그들이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어 배우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활동을 어떻게 시작 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전개가 되어야 한다. 우선 교육을 받은 자원 봉사자들이 나서서 도와 주어야 한다. 당장 필요한 부분부터 면담을 통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정부는 영주귀국을 원하는 사할린동포들을 순차적으로 모두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오신 동포들이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세심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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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서 설을 맞이한 영주귀국 사할린 2세새해 아침 인천 남동구 달맞이 마을 사할린에서 신체가 불편한 어머니(주고분, 1936년생)를 모시려고 지난 달 4일 영주귀국한 사할린 2세인 딸(김기자, 1957년생)과 사위(김정호 1958년생)을 만났다. 지난해 1월 사할린동포지원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사할린 영주귀국 대상이 직계비속까지 확대되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안내와 러시아어 통역은 사할린 동포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선생이 맡아 주었다. 12년 전 대한민국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1세인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2세가 영주귀국을 선택하고 조국에 들어온 것이다. 두 무릎관절 수술 후 혼자 바퀴가 달린 의료기에 의지하고 거동하시는어머니는 "조국에서 그리운 우리 막내딸을 이렇게 오게 해주어서 감사하다. 매일 기도를 했다. 같이 살게 해달라고...사할린에서 남편을 여의고 한국에 혼자 나와서 살다가 오늘 아침 설날에는 떡국을 같이 먹게 되다니...꿈만 같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미안하다. 1200명이나 신청했는데. 350명만 오게 되었다. 아직 오지 못한 분들께 미안하다."면서 딸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나 때문에 잘 다니던 직장과 정든 집과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들어왔다. 이 근처가 아닌 멀리 시흥에 아파트를 배정 받았다. 인천에 자리가 나면 가까운 데로 오게 해주면 좋겠다. 아직 한국말도 서툴어서 고생을 한다."면서 눈물을 짓는다.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에서 주립 도서관에서 근무를 하다가 이주한 김기자씨는 "가장 시급한 것은 정착 프로그램과 메뉴얼이다. 아직 준비가 안된 것으로 안다. 한국말이 서툴어서 동네 마트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힘들다. 시흥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3번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 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받기 힘들다. 아직 한국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이 안된다. 우리가 한국말이 잘 안나오니까. 우선 한국말부터 배우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리고 빠른 정착을 위한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필요하다." 라고 말했다. 사할린에서 오기전 사할린주한인협회(박순옥)가 주관한 설명회에서는 지자체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가 일정 기간 동안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제는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을 회유와 강제로 사할린으로 끌고 가서 탄광과 산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해방 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억류되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식민백성이라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부는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이란 표식을 받고 어려운 삶 속에서 살아왔다. 1990년 한러수교가 시작되면서 영주귀국 사업으로 사할린 동포들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여 전국 25개 지역에서 지자체의 보살핌을 받고 살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월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시행했다. 이 법에는 지원 대상을 기존 동포 본인과 배우자, 장애자녀에서 직계비속 1인과 그 배우자까지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국가 책무로 규정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사할린동포와 그 가족 91명은 지난달 27일 이 법에 근거해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동포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존감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정착을 위한 사할린 동포들만을 위한 특별한 기본 매뉴얼이 시급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그들이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어 배우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활동을 어떻게 시작 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전개가 되어야 한다. 우선 교육을 받은 자원 봉사자들이 나서서 도와 주어야 한다. 당장 필요한 부분부터 면담을 통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정부는 영주귀국을 원하는 사할린동포들을 순차적으로 모두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오신 동포들이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세심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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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2022 신년음악회···양방언·라비던스 협연국립국악관현악단은 임인년 첫번째 달 14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2022 신년음악회'를 개최한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음악회에서는 품격 있는 국악 관현악 명곡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양방언, 크로스오버 그룹 라비던스와의 장르를 넘나드는 신선한 선율을 선보이는 협연도 선보인다. 신년음악회는 임인년 희망찬 호랑이의 기운을 전할 '하나의 노래, 애국가'(작·편곡 손다혜)로 시작한다. 2020년 신년음악회에서 초연한 '애국가 환상곡'을 확장한 작품이다. 역사 속에서 불려진 여러 애국가 중 '대한제국 애국가', '임시정부 애국가', 현재의 '애국가' 세 곡을 엮어 재구성했다. 지휘는 국립국악관현악단 김성진 예술감독이 맡는다. 2018년 위촉 초연한 '메나리토리에 의한 국악관현악-감정의 집'(작곡 최지혜)도 선보인다. 강원도 및 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는 음악 어법인 메나리토리를 사용해 한국의 크고 작은 강(江)의 샘명력과 정화의 기운이 담긴 이미지를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장르의 확산과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적 크로스오버 뮤직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양방언은 자신의 주요 레파토리의 하나인 '정선 아리랑'과 'Flowers of K & Frontier' 등을 협연하고, 2018년 위촉 초연한 국악관현악 교향곡 '아리랑 로드-디아스포라' 중 일부 악장을 피아노 협연곡으로 재편곡해 선보인다. 국립국악관현악단과 처음 악상을 맞추는 그룹 '라비던스'는 베이스 김바울, 테너 존노, 소리꾼 고영열, 뮤지컬 배우 황건하로 구성된다. 라비던스는 대표곡 '고맙습니다', '몽금포 타령', '아이 캔 프루브'(I can prove) 등이 국악관현악 편곡으로 선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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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2022 신년 음악회>..티켓 5분 만에 전석 매진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국악관현악단은 내년 1월14일 서울 중구 해오름극장에서 '2022 신년 음악회'를 공연한다. 국립극장의 새해 첫 공연이기도 한 <2022 신년 음악회>는 희망찬 기운을 전할 ‘하나의 노래, 애국가’(작‧편곡 손다혜)로 포문을 연다. ‘하나의 노래, 애국가’는 지난 ‘2020 신년 음악회’에서 초연한 ‘애국가 환상곡’을 확장시킨 작품으로, 역사에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애국가 중 ‘대한제국 애국가’, ‘임시정부 애국가’, 현재의 ‘애국가’ 세 곡을 엮어 재구성한 곡이다. 많은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지켜낸 대한민국의 의미를 되새긴다. 2018년 위촉 초연 이래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국악관현악 명곡, 메나리토리에 의한 국악관현악 ‘감정의 집’(작곡 최지혜)도 선보인다. 한국의 크고 작은 강을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집으로 상상하며 작곡한 이 곡은, 동부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는 음악 어법인 메나리토리를 사용해 강의 생명력과 정화의 이미지를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크로스오버 음악의 대표 아티스트로 꼽히는 피아니스트 양방언과 남성 사중창 그룹 라비던스와의 협연도 기대를 모은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프로듀서로 활동 중인 양방언은 그의 대표곡 ‘정선 아리랑’ ‘Flowers of K & Frontier’ 등을 협연한다. 또한 <2022 신년 음악회>를 위하여 2018년 위촉 초연했던 국악관현악 교향곡 ‘아리랑 로드 – 디아스포라’ 중 일부 악장을 피아노 협연곡으로 재편곡한 특별한 레퍼토리도 마련했다. 이번 무대를 통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처음 호흡을 맞추는 그룹 ‘라비던스’는 JTBC ‘팬텀싱어 3’의 준우승 팀이다. 베이스 김바울, 테너 존 노, 소리꾼 고영열, 뮤지컬 배우 황건하로 구성된 크로스오버 그룹으로 대표곡인 ‘고맙습니다’ ‘몽금포 타령’ ‘I can prove’ 등을 국악관현악 편곡으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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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읽다 출판, ‘아리랑민족의 디아스포라’나의 책 ‘아리랑민족의 디아스포라’(2021년 6월 글을읽다 출판)는 1904년 미국의 유명 작가 잭 런던 (Jack London)이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San Francisco Examiner)’지의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대한제국에 5개월간 파견되어 쓴 신문기사와 여행기 그리고 많은 사진에 관해서 2016년에 쓴 영어 논문, ‘History of Early-modern Korea Through the Eyes and Pen of Jack London, 1904’에 기반하여 썼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인으로서 태평양전쟁에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던 수십만 명의 조선인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논문과 단행본 출판물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필자는 기존의 연구에서 등한시되었던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훨씬 전인 1904년에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러-일전쟁에 조선인들이 참전하였을 것이라는 실마리를 잭 런던의 신문기사와 여행기 속에서 찾아냈다. 이 책은 일본과 미국의 내셔널 아카이브, 러시아와 한국의 일차 자료뿐만 아니라, 미국 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많은 기록과 출판물을 추적하여 발췌한 역사적 사실들을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1930-45년으로 알려져 있는 조선인의 일본군 참전이 그보다 30-40년 전인 1904년으로 소급되어야 할 것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식민지배 이전인 1904-05년에 조선인들이 왜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한·미·러·일 4개국의 일차 자료를 찾아본 결과, 일본군뿐만 아니라, 러시아군에도 많은 조선인이 참전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1860년대부터 대규모로 발생한 조선인의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로의 이주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헤게모니 전쟁 속에 양편으로 갈라져서 싸워야 했던 조선인의 비극이 그때 이미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나 미국에 건너와 교육받고 오랫동안 생활한 필자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조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난 160여 년 동안 한반도를 떠나 세계 각국에 흩어져 다민족 디아스포라를 형성해 살아오고 있는 한국인들과 그 후세들에게 한국의 근대사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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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언, 솔로활동 25주년 기념음반…'라이트 & 섀도우'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양방언(61)이 솔로활동 25주년을 기념하는 음반을 발매한다.29일 소속사 엔돌프뮤직에 따르면, 양방언은 오는 30일 오후 12시 지니뮤직을 통해 새 앨범 '라이트 & 섀도우(Light & Shadow)'를 공개한다.1996년 '더 게이트 오브 드림스(The Gate of Dreams)'로 데뷔한 양방언은 이번에 2017년부터 올해까지 라이브 음원을 모은 '라이트(Light)'와 미발표곡을 포함한 영상작품 음원에 오리지널 신작을 더한 '섀도우'를 합한 2장짜리 앨범을 내놓는다.'라이트 & 섀도우'는 2016년 베스트 앨범 '더 베스트(The Best)'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앨범이다. 양방언의 첫 라이브 앨범이자, 지난 몇 년간의 주요 결과물들을 모은 것이다.이번 앨범의 '라이트'는 햇살이 비치는 음악을 뜻한다. 라이브는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 속에서 관객과 함께 공유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섀도우'는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음악들을 의미한다. 햇볕이 드는 장소(스테이지)가 아닌 주로 산에 위치한 자택의 스튜디오에서 만든 음악들이다.양방언은 수많은 라이브 음원 중에서 '라이트'에 실을 음원을 발굴하는 과정을 회상하며 "코로나 19로 인해 공연장에서 자유롭게 연주할 수 없는 지금 돌아보니, 그때 그 시간이 더 새롭고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수록한 라이브 음원들은 앨범에 담기 위해 새롭게 믹싱과정을 거쳐 ‘견고한 라이브 음원’으로 재탄생했다. 서울, 제주를 비롯 일본 도쿄 등에서 양방언(Pf&Key)을 필두로 사쿠라이 테츠오(Bass), 가와구치 센리(Drs), 후루카와 노조미(Gt), 스즈키 히데토시(Gt), 크리스토퍼 하디(Perc) 등이 참여했다.양방언의 대표곡 '프론티어(Frontier)'를 재즈풍의 밴드음악으로 발표한 '네오 프론티어', 정선아리랑을 녹여낸 '에코스 포 평창', 제주의 바다를 보고 느낀 감정을 담은 '프린스 오브 제주' 등이 실렸다.'섀도우'에는 게임, 영상 등 다양한 음악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양방언의 미발표 음원을 모아서 담았다. 모바일 게임 '명일방주'와 협업한 음원인 '불굴(Fortitude)', 누적 발행부수 3700만부를 돌파한 인기 만화 '일곱 개의 대죄'로 만든 게임의 음원인 '애로우스 오브 더 레인보우(Arrows of the Rainbow)' 등이다.국립중앙박물관 디지털 실감 영상관의 미디어파사드 전시를 위한 '경천사 십층석탑', 중국 온라인 게임음악으로 아시아 색채를 담은 '산해이문록', 양방언이 직접 출연과 음악감독을 맡았던 KBS 다큐멘터리 '아리랑 로드 디아스포라', 일본 방송국 WOWOW가 IPC(패럴림픽협회)와 공동제작한 패럴림픽 다큐멘터리 '후 아이 엠(WHO I AM)'의 OST 등을 한 데 모았다.이번 앨범의 신곡이자 타이틀곡은 유성이라는 뜻의 '미티어~ 노라(Meteor ~ Nora)'다. 힘겨운 시기 사람들의 염원이 유성에 담겨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곡이다. '위윌 비 시잉 유(We'll be Seeing You)'와 함께 두 곡에는 밴드 호피폴라 멤버이자 첼리스트 홍진호가 첼로 연주로 참여해 양방언의 피아노와 함께 아름답고 희망적인 선율을 드러냈다.'불굴'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강이채와 일본 '요시다 우주 오케스트라' 등이 힘을 보탰다.양방언은 재일 한국인 2세다.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고 일본에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다. 1996년 일본 음악계에 처음 데뷔한 이후 200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한국와 일본 양쪽에서 록, 재즈, 클래식, 국악,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를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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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사할린’은 ‘동행’이다아리랑은 민중들의 공시매체이다. 간결한 선율에 두 줄의 사설로 개인적인, 또는 집단적인 심사를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의 기쁨과 슬픔을 자연스럽게 반영하여 노래로 주고받아 소통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이러한 매체성은 적어도 1930년대 해외 동포들에게는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체화된 문화였다. 그래서 1930년대 말부터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동포들도 아리랑을 통해 참상을 드러냈다. 그 아리랑은 너무나 늦게 우리에게 전해진 ‘사할린아리랑’이다. ‘사할린아리랑’은 ‘동토(凍土)의 눈물’이었다. "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우리님 따라서 내여기 왔지"(사할린아리랑) 나의 사할린 동포에 대한 이해는 이렇게 아리랑이란 프리즘을 통해서였다. 2010년대 들어 접하게 된 사할린 동포사회가 왜 아리랑을 부르는지를 알게 된다. 아리랑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10년이 지나서 였다. 이 부끄러움으로 사할린 동포를 만나고 공부하였다. 결국 ‘사할린아리랑제’라는 이름으로 가서 함께하게 되었다. 남사할린 곳곳의 흔적은 모두 위령제의 대상이었다. 세상에 이런 지역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가서 부른 조국의 아리랑은 장송곡이며 위령가가 되었다. ‘사할린아리랑’에 밴 눈물은 1, 2세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법령이란 또는 제도란 이름의 한계로 눈물을 흘리는 동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런 사정들을 들으며 10여 년을 오가는 동안 세상을 뜨신 분들도 있다. 그때마다 그분들의 한결같은 마지막 눈길은 조국을 향하였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것은 곧 "조국이여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라는 한스러운 호소였다. 내가 미약하지만 사할린 동포들과의 ‘동행’을 마음으로 약속한 계기는 이런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이 ‘동행’ 약속의 실천은 우선 동포들이 남긴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국내에 알리는 일과 기회가 되는대로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전자는 수십 편의 문학작품을 남긴 춘계 류시욱 선생 기록을 찾아 문경에 ‘디아스포라문화원’을 설립하게 한 것이고, 후자는 국내 언론에 동포들의 사연들을 보도하게 한 일이다. 특히 후자에 주력을 하고 있다. 이 중 하나가 KBS한민족방송의 뜻깊은 사업에 연계시키는 일이다. 이를 기록들을 통해 후세에게 ‘사할린의 눈물’뿐만 아니라 조국과의 동행 과정을 전해주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나의 이런 작은 동포들과의 ‘동행’ 실천을 이해해 준 KBS 한민족방송으로부터 영예의 공로상을 받았다.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상임을 안다. 지금 사할린 현지와는 코로나19로 거의 단절 상태이다. 대신 SNS통신을 통한 온라인 소통과 국내 영주귀국 동포들을 통해 작은 동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정도의 단절에도 전전긍긍하는데, 80년 동안 단절은 오죽했겠는가. 이런 생각하면 동행을 통한 소통의 계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알게 된다. 더 많은 이들과 더 많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제는 양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에 살고 있는 박영자 단장의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대상 수상을 자축하는 짧은 모임을 가졌다. KBS 한민족 방송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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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러시아를 이어주는 '고려인·한국인 이중언어 말하기대회''너머 인천고려인문화원'은 지난 10월 16일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고려인문화원에서 고려인과 함께하는 이중언어 말하기대회를 실시간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이 주최하는 금번 말하기대회는 2020년에 이어 올해 2회째 진행되는 행사이다. 행사범위와 대상을 확대하여 좀 더 많은 고려인들이 참여하고 한국 정착 및 원활한 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본 행사는 예선과 본선으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예선에서 신청 자료와 대본, 영상을 제출한 후 내부 심사를 통해서 본선 참여자를 선정하였다. 코로나 단계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준수와 타 지역 도시에 거주하는 지원자들의 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고자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6일 본선은 온라인으로 실시간 진행되어 참여자들 간 서로의 실력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본선 심사는 내·외부 심사위원 4명으로 한국인과 고려인 심사위원을 각 2명씩으로 구성하여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대한 평가 및 기준에 대한 균형을 맞추었다. 본선 참여자는 초중고 학생 10명과 성인 6명을 대상으로 심사가 진행되었으며 당일 불참자를 제외한 12명 참여자 모두에게 개별 심사평 및 총평과 함께 상장과 부상이 제공되었다. 부상은 함박마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 교환권이 지급되어 고려인과 한국인 식당 및 상점 등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성인 참여자들은 주로 60세 이상 여성 참여자인데. 온라인 방식 참여가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본선에서는 대면 심사로 진행되었다. 최우수상에 서 다니엘(문남초3), 김 미하일(선학초6), 조 이고리(연수고), 우수상에 조 이고리(연수고), 고 크리스티나(문학정보고). 싸 프로노브 안드레이(청학중1)이 수상했다. 장려상에는 한 알렉스(청학초6), 판 로만(문남초5), 허 미엘라(글로리아8세)가 수상했다. 모스크바에 이주한 김 미하일(선학초6)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발표 내용은 한국에 온지 3년이 되어서 이제 한국어를 잘 하게 되어 저는 행복한 남자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경찰이 되어 사회에 기여를 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발표했다. 싸 프로노브 안드레이(청학중1)는 카자흐스탄에서 이주 해 온지 2년 만에 한국어 말하기 첫 도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부모님이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아들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 한국에 와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가슴 아퍼한 사연을 가슴 절절하게 발표해서 심사위원의 마음을 훈훈하게 적셨다. 55년간 러시아와 한국에서 교육을 해 온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인 공노원(사할린 2세, 소망학교 교사) 선생은 " 제가 가르치는 어린 학생들이 2명이나 최우수상을 받게 되고 안드레이가 우수상을 받게 되어 기쁘다. 한국에 온지 1-2년 밖에 안된 고려인 학생들의 한국어 말하기 수업은 체계적으로 받아야 한다. 오늘 본선에 참여하여 수상을 받은 힉생들은 한국에 온지 이제 24개월 남짓한데도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이다.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말하는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 시대의 지적 재산이다. 고려인 학생들은 이러한 자부심을 잊지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양국을 이어주는 나라의 인재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격려했다. 행사 주최 관계자는 "이번 말하기대회가 고려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개성 있는 글과 내용으로 진심을 담아 듣는 이들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앞으로 ’매년 지속적인 행사 개최를 통해 많은 고려인들의 참여를 확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으로 문의하면 된다.( 032)816-9002 2021 고려인·한국인 말하기대회 본선 참여자 및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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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고려인 마을이 한마음으로 부르는 ‘제5회 고려아리랑’전국 고려인 마을과 이웃들이 함께 부르는 ‘제5회 고려 아리랑’ 행사가 이달 9일부터 10월18일까지 40일간 온라인으로 열린다. 행사는 고려인지원단체 (사)너머와 국내 거주 고려인권익단체 대한고려인협회, 안산시 고려인문화센터, 너머 인천 고려인문화원이 주최한다. 이 행사는 2017년 강제 이주 80주년을 맞아 전국의 고려인 동포들이 모여 ‘함께 부르는 고려 아리랑’ 행사를 개최한 이후 2018년 ‘미래 세대와 함께 부르는 고려 아리랑’, 2019년 ‘굴복하지 않는 고려인의 용기’, 2020년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등 매년 다른 슬로건으로 진행하고 있다. 올해로 다 섯번째를 맞는 고려 아리랑은 전국의 고려인 마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이 함께 부르는 희망의 아리랑을 슬로건으로 삼았다. 신은철 (사)너머 이사장은 개회사를 통해 "현재 꿈을 안고 역사적 모국으로 돌아온 고려인 동포들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과거 강제 이주라는 역사적 시련을 이겨낸 것처럼 전국 고려인 마을과 커뮤니티, 그리고 이웃들이 함께 고려 아리랑을 통해 서로 응원하고 희망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되는 행사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10년전 인천에 영주귀국하여 정착한 사할린 동포 공노원씨(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는 "우리 사할린 동포들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 2세 3세들에게는 아리랑은 애국가로 부른다."라고 하며 이 행사에서 불려지는 아리랑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한편 이번 행사 기간에는 전용 홈페이지(http://jamir150.modoo.at)를 운영하며, 홈페이지를 통해 고려 아리랑 행사에 대한 정보와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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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석 "디아스포라, 다양·다름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능력""'디아스포라'는 고착화된 나, 정체된 현실에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의지예요. 사회적으로는 다양성, 다름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죠. 점점 다양해지는 세상 속에서 디아스포라는 좋은 다리 역할을 할 겁니다."다큐 영화 '헤로니모' 감독이자 첫 자전적 에세이 '당신의 수식어'를 펴낸 전후석 감독을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에서 만났다.'당신의 수식어'는 30대 청년, 변호사, 영화감독, 재미 한인, 디아스포라 등 여러 개의 수식어를 가진 전 감독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미국 코트라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전 감독은 휴가차 떠난 쿠바에서 우연히 '헤로니모'라는 인물을 알게 되고 그 길로 영화의 세계로 뛰어든다."공항에 마중나온 사람이 쿠바 한인 3세, 파트리시아였죠.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를 통해 '헤로니모'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헤로니모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고, 처음엔 영화가 아니라 유튜브 영상 정도로 계획했었는데 일이 점점 커졌죠."'헤로니모'는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쿠바 혁명의 주역이자 쿠바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 헤로니모 임, 한국 이름 임은조와 그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 임천택의 흔적을 쫓는 다큐 영화다. 전 감독은 "만약 헤로니모가 쿠바 혁명에 참석하지 않고, 쿠바 한인 공동체 복원을 위해 여생을 희생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반응하진 않았을 것 같다"며 "헤로니모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특출난 캐릭터였다. 나를 흡입하는 힘이 강했다"고 회고했다.변호사였던 전 감독은 영화 '헤로니모'를 통해 본격적인 스토리텔링의 세계에 뛰어든다. 그는 "보통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안정, 성공 이런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 같다"며 "그런 내가 '헤로니모'와 만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미국에서 태어나 3살 때 한국으로 와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가 영화와 법을 공부한 재미 한인이다. 대한민국에서 절대 다수의 일원으로 살다 미국에서 소수가 되는 경험을 한 뒤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그림자처럼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자신의 수식어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하던 그는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만난다. 본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일컫는 말이지만 전 감독은 누구나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다고 했다."디아스포라는 이민자, 소수자, 이방인으로서 늘 편견과 싸우게 되죠. 그렇지만 다른 말로는 이중, 다중 정체성을 갖고 다른 문화권과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우리나라가 과거 단일민족 국가라고 했지만 이제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죠. 갑자기 다른 문화권 사람을 수용하라고 하면 어렵지만 디아스포라가 좋은 다리,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난민' 문제가 나오자 우리나라의 경우 '숙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통일'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한반도 내에는 2500만명의 다른 종류의 한국인들이 있는 것"이라며 "통일이 되면 그들과 공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누구나 난민과 같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전 감독은 "미국 트럼프 현상을 보면 주류였던 백인, 기독교인, 중산층들이 그간 유지한 권력을 공고히 하려다 보니 희생자들이 발생한 것"이라며 "우리도 언제든 이방인이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디아스포라를 통해 다양성, 혼합성을 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종착역은 '세계 시민'"이라며 "결국 어떤 정체성이건 고립이 아닌 확장해야 한다"고 밝혔다.코로나 사태 속 미국에서 아시아계가 혐오 범죄 대상이 되는 걸 보면서도 디아스포라적 사유를 적용하게 됐다."코로나와 디아스포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타자의 존재 정당성을 의심하는 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코로나 근원지라며 아시안이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됐죠.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우리의 정당성을 의심받을 때 우리 존재를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전 감독은 "국내로 들어오는 다른 나라의 디아스포라들, 다문화 가정들을 보면서 지나치게 한국화를 강요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며 "그들 고유의 정체성이 수용될 수 있는 대인배 사회가 되면 좋지 않을까, 그 안에서 디아스포라적 사유가 유용하게 하나의 담론으로 떠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현재 'CHOSEN'이라는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연방 하원직에 도전한 재미 한인 후보자 5명에 관한 이야기로, 미주 한인사와 한인 정치인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다큐 영화다."'초선'이라고 읽지만 사실 '조선'이라고도 읽을 수 있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죠. 다소 불편한 영화가 될 수도 있어요. 한국에 좌우 대립이 있듯 미국 한인사회에도 이념적 갈등이 있어요. 단순히 '국뽕'적 느낌 이면의 다양한 부분을 보고 더 많은 질문을 던져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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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디아스포라 콘서트 '연해주 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신청방법 : 9월 8일까지 구글폼 신청서 작성 (https://bit.ly/3n0gt9I) 문의 : 사단법인 너머 031-493-7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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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방송, 중·CIS·러시아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중국 동북 3성을 비롯해 CIS 지역과 러시아 사할린 등에 사는 북방 동포를 대상으로 한민족 체험수기를 공모한다고 1일 밝혔다. 올해로 23회째를 맞는 이번 공모는 생활 속에서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체험담, 한류와 한글 생각을 담은 글과 영상이 대상이다. 글은 청소년과 성인 부문으로 나뉘며 영상은 별도로 한민족상으로 구분해 진행된다. 9월 24일까지 수기를 A4 용지 3∼10장 내외로, 영상 콘텐츠를 5∼10분 내외로 만들어 9월 24일까지 제출하면 된다. 청소년 부문에서는 대상 1명·우수상 2명·장려상 3명, 성인 부문에서는 대상 1명·우수상 9명·지도교원상 2명, 한민족상에서 우수상 2명을 시상한다. 한민족의 문화와 우리말 보급에 앞장선 학교·기관에 단체상을 시상한다. 수상작은 10월 9일 발표되며 자세한 사항을 알려면 KBS라디오 홈페이지(radio.kbs.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한민족 체험수기" KBS한민족상에서는 사할린동포가 수상을 했다. 한국에 영주귀국해서 살고 있는 박승의(前 사할린 국립대 교수)씨의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원협회 부회장) 씨의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가 받았다. 러시아 사할린 홈스크시 주 코스탸 학생의 '저는 주 코스탸입니다'가 청소년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KBS 사회방송부 황형선 부장은 "지난해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한민족상'을 신설했는데 사할린동포들이 수상해 의미가 있었으며 사할린동포 4세인 주 코스탸 학생이 장려상까지 받아 뜻깊었다. 올해는 더 많은 사할린동포들이 참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처] 2021년 6월11일( 음력 5월2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 작성자 bplu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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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교육자 공로원 부회장 팔순잔치, 이혜솔 회장 등 축하5월 23일 토요일 오후 1시 안산 스마크 레스토랑에서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의 팔순잔치가 진행되어 인천 양주 김포에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펜데믹으로 인해 러시아에 살고 있는 혈육들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서천에 영주 귀국한 여동생 부부, 양주에 사는 정옥녀 부부, 인천소망학교 (카자흐스탄 고려인) 학생 가족, 전 김포 영주귀국협회 회장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공 부회장은 사할린 아리랑사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일제강점기 충청도 논산에서 갓 장가를 든 새신랑 아버지가 1939년 강제동원 되어 17살이 된 어린 신부를 데리고 사할린에 강제이주 되었다. 공 부회장은 2년 후 5월 23일 코르샤코프 항구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에서는 8남매를 이끄는 장녀로서, 밖에서는 조선인 교육자로 재직했다. 영주 귀국한 지금도 한국어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적으로 작년 첫 번째 ‘KBS한민족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공적은 2017년 사할린아리랑축제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현지 동포사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 낸 사실이다. 이로부터 아리랑연합회와 인연을 맺어왔다. 특히 아리랑학회가 운영하는 사할린아리랑학교 발전을 위해 사할린 현지 동포들과 힘써왔다. 특히 두 손녀는 제2회 사할린아리랑제(2017년)와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2018년)에서 각각 사할린아리랑과 문경아리랑을 독창하여 주목을 끌었다. 작은 손녀 신아리나는 만4세에 러시아 일본 중국 북한출신 예술가도 참여한 5개국이 향유하는 아리랑을 애창하는 동포들로 구성된 단체들이 참여한 '디아스포라 아리랑' 무대를 여는 무대에서 무반주로 사할린아리랑을 불러서 감동을 자아낸 바 있다. 이번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도 정태식 작사의 사할린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두 손녀는 손수 써온 편지를 낭독했다. "우리는 할머니가 자랑스럽습니다. 평생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치시는 할머니 사랑합니다"라고 존경을 표했다. 공 부회장은 지금도 인천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다문화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현직 교사이다. 또한 인천 소망학교 부설 한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축하객으로 참석한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은 인사말에서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사할린에 다녀온 후 사할린의 역사를 알리는 방법은 사할린아리랑을 국내에 널리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녹음이 끝난 '이혜솔의 아리랑' 음반 트랙에 사할린아리랑을 넣기로 했습니다. 사할린아리랑이 3세에서도 널리 불러지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이 회장은 양주에 영주 귀국한 사할린동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고 있다. 이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아리랑 전승자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손녀 신아리나와 이혜솔 회장의 '사할린아리랑' 공연이 시작되자 모두아리랑 후렴은 함께 부르게 되었다. 이어서 김알라씨의 '홀로아리랑' 선율에 맞춘 아리랑춤으로 이어졌다. 공 부회장의 팔순잔치는 초졸하지만 따뜻한 모임이었다. 동포 대상 국어교육자로서의 생애가 빛났음을 새기는 뜻깊은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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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존중 취향저격’, 문화다양성을 즐기세요문화체육관광부(장관 황희, 이하 문체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박종관, 이하 문예위), 지역문화재단 25곳과 함께 5월 21일(금)부터 27일(목)까지 전국 곳곳에서 ‘2021 문화다양성 주간*’을 개최한다. 올해 7회째를 맞이한 ‘문화다양성 주간’은 ‘취향존중 취향저격’이라는 주제로 문화다양성 특별 강연을 네이버와 함께 진행하고 왓챠(WATCHA) 등 온라인 문화 기반(플랫폼)과 함께 문화다양성 가치가 담긴 콘텐츠 특별전을개최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한다. ‘한국 영화와 다양성’ 등을 주제로 문화다양성 특별 강연 마련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누구나 무료로 ‘네이버 지식라이브 온(ON)*’에서 문화다양성특별 강연을 볼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 전문가 11명이 디지털 환경, 영화, 출판, 언어 4개 분야의 문화다양성 화두를 중심으로 강연을 펼친다. * https://tv.naver.com/liveclasson/playlists 왓챠·지니뮤직 등과 함께하는 문화다양성 추천 온라인 전시 개최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왓챠와 지니뮤직, 네이버 판과 함께하는 ‘문화다양성 큐레이션전(展)’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온라인 전시에서는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가 정세랑과 수필 작가 이석원 등이 문화다양성 가치가 담겨있는 영화, 음악, 책 등 작품 총 97편을 소개한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이 추천하는 작품과 함께 각 분야의 평론가 등 전문필진의 추천사 등도 제공한다. 특히 이번 전시 작품 중 보고 싶은 작품의 이미지를 ‘문화다양성 주간’을 핵심어(해시태그)로 표시해 누리소통망에 공유한 참여자 100명에게는 추첨을 통해 왓챠 1개월 이용권을 증정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다채로운 문화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기반은 문화다양성 확산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릴 계획이다. ‘문화다양성 숲 꾸미기’ 온라인 캠페인 운영 또한 5월 21일부터 5월 27일까지 ‘문화다양성 주간 공식 누리집(diversityweek2021.com)’에서 ‘문화다양성 숲’을 만들 수 있다. ‘문화다양성 숲 꾸미기’온라인 캠페인은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다양성의 가치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했다. 참가자들은 멸종 위기에 놓인 도도새, 바오바브나무 등으로 나만의 꽃밭을 만들고, 꽃밭이 모여 문화다양성숲을 만들면 된다. 누리소통망에 자신이 만든 꽃밭을 공유하면 직접 식물을키울 수 있도록 추첨을 통해 1,000명에게 친환경 화분과 씨앗도 증정한다. 전국 25개 문화재단에서 32개의 다채로운 행사 운영 문화다양성 주간에는 전국 25개 문화재단에서 마련한 32개의 다채로운 온·오프라인 행사도 즐길 수 있다. ▲ 인천에서는 5월 21일부터 5월 23일까지 ‘제9회 디아스포라 영화제’를 개최한다. 러시아 체첸 공화국의 폭력을 피해 벨기에로 탈출한 성소수자 난민의 현실을 담은 레카 발레릭 감독의 ‘침묵의 목소리’를시작으로 전 세계30개국 작품 58편을 소개한다. ▲ 부산에서는 구포역 광장에서 ‘공감, 이음, 공동체, 일상, 광장’ 5개 주제어를 중심으로 ‘문화다양성 매체예술(미디어아트) 축제’를 개최한다. ▲ 서울 구로에서는 ‘감각의 다양성’을 주제로 청각을 중심으로 한 ‘듣는 전시’와 촉각을 중심으로 한 ‘점자 촉각책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충남에서는 천안, 아산, 공주, 서산, 홍성의 도서관에서 문화다양성 도서를 선정하고 배치하는 ‘문화다양성 도서 캠페인’을 진행한다. 지역 프로그램 일정 등 ‘2021 문화다양성 주간’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문화다양성 주간 공식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문체부는 이번 문화다양성 주간에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 제정 이후 처음으로 ’제1차 문화다양성 보호 및 증진 기본계획’을발표할 계획이다. 황희 장관은 5월 21일 문화 다양성의 날 계기 국제연합(UN) 회의에서 문화다양성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연설할 예정이다. 황희 장관은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선도적인 문화창조력이 필요하며, 문화다양성은 문화창조력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중요하다.”라며, "올해 문화다양성 주간을 통해 문화다양성 가치가 더욱 확산해 우리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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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을 말한다] ‘아리랑의 문학 수용과 문화 창출’‘아리랑의 문학 수용과 문화 창출’은 민요 아리랑이 전승, 확산되는 과정에서 시, 소설, 희곡 등 문학문화뿐만 아니라 대중가요 등 다양한 예술문화에 수용되면서 새로운 문학문화와 예술문화를 창출하고 있는 양상을 고찰하면서, 아리랑을 기반으로 새롭게 창출된 문학문화와 예술문화가 갖는 의미와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를 위해 대표적인 향토민요, 즉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등 지역아리랑을 중심으로 이들 아리랑이 민요로서 전승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문학 갈래와 예술문화, 특히 대중음악에 수용되면서 어떻게 창조적인 요소로 작용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변용, 창출된 문학과 문화 텍스트가 가지는 성격과 의미를 구명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아리랑 자체에 대한 연구를 넘어서 ‘아리랑문화’의 현상과 양상을 연구한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는 ‘아리랑의 문학 수용과 문화 창출’ 부분이며, 제2부는 ‘지역 민요의 생태와 문화지리’ 부분이다.제1부에서 1장 「치유(healing)의 노래로 본 아리랑의 전승 맥락」는 아리랑을치유(healing)의 노래라는 측면에서 아리랑의 생성과 전승의 다양한 국면이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아리랑의 옛 노래라 할 수 있는 <청산별곡>이 갖는 성격을 파악하고, 근대계몽기에 황현이 아리랑을 두고 말한 '신성의 염곡'이 갖는 의미와 선교사 헐버트가 들은 아리랑이 갖는 성격을 풀이와 치유의 노래로 재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을 상징하는 노래로 확산되었던 서울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등 향토민요가 갖는 성격을 노랫말을 통해 다양하게 파악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한민족 이주의 역사 속에서 중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떠나 살았던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아리랑을 부르며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민족의 통합에 기여했던 점을 고찰했다. 2장 「밀양아리랑의 문학문화 수용과 문화 창출」은 현대시, 현대소설, 수필 등으로 문학 갈래를 넓혀서 밀양아리랑과의 교섭과 수용 문제를 천착하고자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밀양아리랑을 수용한 현대시 작품들을 소리 권역 출신 시인들과 소리 권역 밖 출신 시인들의 작품으로 구분하여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 파악하고, 홍성원의 소설 <밀양아리랑>과 박규헌의 소설 <불사조>이 밀양아리랑이 어떤 서사화의 관점과 맥락을 보여주는지, 그리고 밀양아리랑 관련 여러 수필들이 어떤 담론적 특성을 보여주는지를 고찰했다. 아울러 밀양아리랑의 대중가요 수용과 관련하여 광복 이후에 불린 대중가요가 갖는 특징과 의의 및 한계를 집중 검토하고, 이어서 밀양아리랑을 기반으로 새로운 음악의 창출을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BTS(방탄소년단)의 <아리랑 연곡> 등을 폭넓게 살피면서 향후 밀양아리랑의 다양한 문화 창출을 위한 과제를 제시했다. 3장 「정선아리랑의 문화 수용과 공감의 시학」은 정선아리랑의 시적 수용이 민요 형식의 단순한 차용으로 성공적인 시를 만드는 것은 아니며, 정선아리랑의 리듬, 정서, 주제의식 등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바탕으로 하되, 오늘날의 삶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 인식과 연결되도록 하면서 시의 미적 근대성을 새롭게 모색하고자 할 때 바람직한 민요의 시적 변용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아울러 정선아리랑의 대중적 확산과 관련하여, 정선아리랑이 김옥심, 하춘화, 조용필, 김영임, 정세훈, 김현성, 이현수, 송소희 등 대중가요 가수와 소리꾼들을 만나면서 활기를 띠고 있는 양상을 고찰하는 가운데 특히 창의적인 대중가요로 재진입한 <보고싶다 정선아!>를 주목해서 논의했다. 4장 「동래아리랑의 전승 맥락과 정체성 문제」는 오케이(OKeh)레코드사에서 1937년 5월에 서영신이 고재덕의 피리 반주로 SP음반에 취입한 동래아리랑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 글은 동래아리랑의 발굴 경위와 가사 복원 과정을 밝히면서, 그동안 동래아리랑의 가사를 잘못 복원하고 해석함에 따라 빚어진 문제점들을 논의했다. 동래아리랑이 동래지역에서 구전되어 온 민요가 아니라, 기존 정선아리랑의 가사 패턴과 작시 원리를 바탕으로 정선아리랑의 곡조로 부른 신민요로서의 아리랑임을 밝혔다. 그리고 동래아리랑이 정선아리랑의 곡조로 부른 것이기 때문에 음악적 측면에서 지역적 정체성을 갖지 못한 아리랑이지만, 문학적 측면에서 동래온천, 현해탄 같은 지역 명칭이 동래지역과 연관된 문화적 기억을 떠올리는 중요한 지리적 장소를 환기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가진 노래로 보았다. 5장 「부산지역 아리랑의 전승 양상과 아리랑문화의 생성 국면」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늘날까지 진행된 일련의 민요 조사의 성과를 살피면서, 아리랑으로 채록된 자료의 성격과 의미를 밝힌 후, 부산지역에서 불린 민요의 가창 현황과 그 판도를 살피는 한편, 부산지역에서 아리랑을 수용한 현대시, 시조 작품들과 대중가요들이 갖는 성격과 의의를 검토했다. 나아가서 국립부산국악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국악뮤지컬 <자갈치아리랑> 등 다양한 창작, 공연을 포함하여 소리꾼 김희은과 최윤영이 부산지역에서 아리랑의 새로운 가창 판도를 만들고자 한 노력들을 살폈다. 6장 「해외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 시의 아리랑 수용과 담론 양상」은 재중 한인 디아스포라의 시 작품들에서 필자가 찾은 아리랑 시(44편)을 대상으로 고찰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윤해영의 「아리랑 만주」와 같이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선전하는 친일적인 작품도 있었지만, 많은 아리랑 시는 민족사의 현실을 형상화하거나 민족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작품들로 탈식민주의를 구현하는 작품들이었다. 민요 아리랑이 재중 동포시인들의 시를 복고적 세계로 귀환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시세계를 모색하는 데 자극과 기회를 제공하고, 민요 아리랑이 시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도 다양한 시적 변용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음을 확인했다. 제2부의 1장 「<모심기 노래>에 나타난 생태학적 사유와 상상력」은 부산지역에서 채록된 <모심기 노래>를 대상으로, 이들 민요에 나타나는 생태학적 특성을 ‘자연 본위의 사유와 상상력’, ‘순환론적 생태관과 상상력’, ‘자연과의 교감과 공존 지향’이란 세 가지 범주적 특성에 따라 고찰한 것이다. 2장 「<범벅타령>의 전승 양상과 담론 특징」은 <범벅타령>의 전승 과정과 전승 양상을 밝힌 후, 특히 서사민요로 불리는 <범벅타령>의 담론 특징을 구명한 것이다. <범벅타령>은 1930년대부터 여러 기녀 출신 소리꾼들이 취입한 유성기 음반과 방송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파되면서 민요화되는 과정을 겪었음을 밝혔다. 아울러 잡가 <범벅타령>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전승되었음을 파악하는 한편, <범벅타령>은 주로 남성들이 가창하지만 남성 가창자의 노래가 여성의 불륜에 대해 남성에 의한 징벌과 훈계가 이루어짐으로써 윤리적 단죄를 보여주는 반면, 여성 가창자의 노래는 남성의 횡포와 성적 억압에 대한 저항과 성 해방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주목해서 살폈다. 3장 「함양지역 <범벅타령>의 문화지리학적 조명」은 함양지역에서 채록된 <범벅타령>이 다른 지역에서 채록된 <범벅타령>과 달리 ‘바람난 부인’을 춘향으로 설정하고, 춘향의 불륜 행위를 초점화한 서사민요임을 주목한 글이다. 함양지역에서 왜 이런 <범벅타령>이 불리게 되었는지를 문화지리학적 관점에서 함양지역의 ‘장소성’ 등 문화지리학적 특성에 따라 파악하고자 했다. *민속원, 2021, 33,000원 *저자 박경수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문학석사), 부산대학교대학원(문학박사)졸업. 현 부산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한국문학회장, 한국민요학회장 역임, 이주홍문학상(2005), 부산시문화상(2017) 수상.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문학의 정신사론』(1993), 『한국 근대 민요시 연구』(1998), 『한국 민요의 유형과 성격』(1998),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 탐구』(2000), 『아동문학의 도전과 지역 맥락』(2010), 『현대시의 고전텍스트 수용과 변용』(2011), 『현대시의 문화 읽기』(2020) 외 여럿과 편저로 『부산민요집성』(2002),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16~18-경상남도 함양군 편』,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20~22-부산광역시 편』,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24~26-경상남도 남해군 편』, 『증편 한국구비문학대계 8-27~28-경상남도 산청군 편』(2014~19) 외 여럿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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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사할린 동포들과 훈훈한 동포애를 나누다오늘 어버이날 오후 2시, 의정부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지윤주 이사는 양주 옥정동 7단지 아파트에 정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협회(회장:강상용)를 찾아가서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다. 지난 해 3월부터 세계 여성의 날, 추석, 성탄절, 설날 등 절기마다 양주, 인천에 정주한 사할린 동포들을 찾아가서 자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다양한 베이커리를 전 직원들과 함께 나눔하고 있다. 지윤주 이사는 "코로나로 인하여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과 오랫동안 해후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잠시마나 위로가 되셨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방문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경제적 여유는 넉넉하지는 않지만, 올 때마다 무언가 더 해드리고 싶다. 예전에는 동포애라는 것이 막연하게 느꼈지만 이제는 눈으로 바라만봐도 충분히 느낀다. 강상용 회장님이 여름에 우리가 가족을 만나러 사할린에 3개월 동안 가있는 동안 언제든지 놀러오라는 말을 들으니 가족이 된 것 같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이번 여름에 초행길인 사할린에 한번 가서 한인들을 만나고 싶다."라고 미소를 환하게 머금었다. 강상용 회장은 "우리 사할린 동포를 잊지않고 기념일마다 찾아와 주시는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사장님과 전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셔서 잘 먹겠습니다."라고 치하했다. 최미분 부회장은 " 매 절기마다 찾아와 주는 것도 고마운데,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빵까지 우리들 100명 전원에게 골고루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천 검단 나눔성형외과의원 노승만 원장님 보내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최단장은 "오늘은 어버이날이라서 사할린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길이 막혀서 못 나오다가 1990년 하늘길이 열려서 조국과 조금씩 왕래가 시작되었지만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는 부모님 대신 조국으로 귀환한 사할린 2세입니다. 그러나 조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하고는 교류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찾아와 주기만해도 반갑고 그래요. 그런데 올 때마다 차도 한잔 못 나누고 바삐 헤어져야 하는 코로나가 갑갑합니다."라고 하며 아쉬워하며, 어제 모두 들에 나가서 쑥을 캐가지고 와서 만들어서 나누었다는 쑥떡 한접시를 지윤주 이사의 손에 안겨주었다. 사할린에서는 봄이 되면 쑥을 캐서 쑥떡을 해서 나누어 먹고, 여름이 되면 산에 올라가 버섯과 고사리, 머위. 블루베리도 채취하여 먹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강제이주 시켜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광산이나 산판에 모여서 집을 짓고 카레이스키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서 여느 국외 동포들보다 공동체 생활이 자연스럽다. 특히 양주 율정마을은 가장 늦게 한국에 정주한 세대이니만큼 가장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화기애애하고 늘 활기차다. 특히 사할린 동포 2세 중 러시아 음악을 전공한 세르게이김 작곡가와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미분)이 살고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강상용 회장은 사할린 씨름협회 가족이다. 한편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는 매달 고려인 사할린 청소년에게 정기적으로 베이커리를 보내고 있다. 지난 5일 어린이날에도 인천에 거주하는 러시아 청소년들에게 베이커리 선물을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에게 전달했다. 지윤주 이사는 가족들과 함께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매달 정기후원을 하고 있다. 최근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수업 참관 시찰을 위해 사할린에 20일 동안 다녀온 공노원 부회장은 "우리를 잊지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매달 러시아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서 진정한 동포애를 어린 학생들과 나누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라고 전했다. 양주에 사는 한 주민(정정숙. 81세)은 "90년대 KBS이산가족찾기에서 사할린 동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양주에 사할린 동포가 같이 살고 있는지 몰랐다. 양주에 같이 살고 있는데도 10년 동안 우리는 모르고 살았다. 앞으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본다. 일제에 의한 강제징용으로 혹한의 섬 사할린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이제서야 일부 왔는데, 우리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최근 '사할린 동포지원 특별법'이 통과되었지만 사할린 2세까지만 동포법이 적용되어 이산을 대물림하고 있다. 우리가 우선 마음으로 위로하고 도와야 한다."고 전했다.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측은 코로나 확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선물만 전달하고 기념촬영 후 바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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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무용단김채원 약력현재: <아리&랑>무용단 단장 (www.arirang21.net) -(고)임이조선생께 전통문화예술공연장(승무)이매방류의 살풀이, 승무,교방살풀이,삼북,장고 춤등 사사-(고)송화영선생께 무산향,춘앵전,부채춤,검무등 사사-유영희 선생께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사사- 한양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원광대학교 이학박사 김채원(김은선), 한국전통춤의 시대 변화에 따른 사회적 위상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육대학원, 1998 김채원(김은선), 한국무용수련이 중년여성의 혈중지질 및 호르몬 반응의 미치는 영향, 원광대학박사논문, 2009.-전)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무용학과 교사-동국대학교,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원 강사역임-아리랑학회 공연예술분과 편집위원-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자문위원 - (사)보훈무용예술협회 상임이사(현재) 1999년 <한민족아리랑제전>(정선) 예술감독 2000년 <진도아리랑축제>(진도) 예술감독 2001년 <북한아리랑축전>(서울) 예술감독 2016년 <2016사할린아리랑제>(러시아 사할린) 예술감독 2017년 <2017사할린동포와 함께 아리랑>예술감독 2018년 <디아스포라 아리랑>제11회문경새재아리랑제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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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국어 교육자, 박승의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인터뷰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전 사할린국립대학 한국학과 박승의 (1941년 생)교수를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박승의 교수는 한국어교육에 힘쓰고. 사할린 한인 연구에 진작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가 담긴 3대에 걸친 가족사가 자서전으로 출판되어서 관심을 받고 있다. 며칠을 밤새어서 들어도 끝나지 않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박승의 교수의 사할린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다음 2편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이번 1편에서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자 한다. 기미양-안녕하세요. 사할린에서 2010년 파주로 영주귀국하신지 올해가 11년이 되시네요.이번에 국외동포 체험수기공모전에 '사할린에 팔려간 이쁜고모'로 첫번째 KBS한민족상 수상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재외동포뉴스와 연합뉴스 및 국악신문 등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주요 뉴스로 나갔습니다. 수상소감 부탁드립니다. 박승의-안녕하세요? 심사위원님들께 저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동원, 강제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과 산판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기존 기록에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역사적 측면에서 주로 남자들이 강제동원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사할린)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여성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잊어서는 안되는 뼈아픈 역사를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에 살지만 뿌리를 잊지말자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단 이 수상 소식이 여러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가 주목을 받고 이슈화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KBS방송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Q:박승의 교수님은 사할린2세로서 1945년 이전에 태어나셔서 사할린1세의 자격으로 한국에 영구귀국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는지요? 처음에 어느 지역으로 배치되었나요? A; 밀양 박씨 아버지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 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이후에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임신 상태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오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되셨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파묻혔습니다. 한국에 와서 조상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고향에는 2번 방문했습니다. 자세한 가족사는 최근 출판한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에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Q:보내주신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저자: 박승의)는 잘 읽었습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단숨에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세지는 ’조선인 박승의‘, 다까하라 가쯔요시, 보꾸 다까하라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대한민국 박승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다는 부분입니다. 구체적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일제강점기 당시 저는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 출생을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가라후토에 억류된 조선인으로 아버지의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무국적 조선인으로 살다 소련 국적을 받게 되고. 다시 러시아 국적을 받게 되고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78년을 살면서 6번이나 국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일제시대에 태어나서 3년동안 일본 국민으로, 1945년 해방 후 무국적자로, 1958년에 북한 공민으로, 1970년대 소련 국적자로, 1990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 국민으로, 그리고 2010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는 일본 아이들과 놀면서 일본말과 더불어 일제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1948년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 받았으며, 2009년부터 대한민국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이름도 변해야 했습니다. 다카하라 가쯔요시에서 박승의로, 박승의에서 박유라로. 의사소통도 세 민족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로. 그래서 나 스스로"나는 누구냐?”란 질문에 답할 때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타 지방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부모들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은 대다수 결혼도 같은 동포끼리 했으며 현재 러시아에 남아있는 자녀들도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강한 학구열을 가지고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이기도 합니다. 평생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국 음식을 고집해 먹는가 하면 다른 민족들에게 한국요리 조리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Q: 지난 신문방송에서 ”한글을 알아야 한민족 정신을 지킨다" ‘사할린 한국어 운동가 박승의’ 라는 짧은 다큐를 보았습니다. 사할린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서로 동질감을 느껴 힘을 나누면서 하나로 뭉칩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조국이 아닌 해외에 살며 한민족 정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서로 힘이 되어주고 한민족의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야 하므로 이 측면에서 한국어 교육 및 민족교육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이 발전하며 잘 사는 것이 국외 동포들에게는 무한한 힘이 되고 자부심을 갖게하는것임은두말할나위없습니다.저도 1988서울올림픽 이후 사할린에서 '한국 붐'이 일어 났을 때 한국어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89년에 여러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며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협회설립 초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에 6개월간 서울 연세대 어학당을 마치고 사할린대학교 한영과에 취직하여 전임 교수로 거의 20년 동안 자라나는 4세대의 교육과 교양에 모든 정성과 힘을 바쳤습니다. Q: 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할린한국어교사협의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1992년에 사할린주 한국어 교사 협의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 협의회(회장으로 이옥자, 공노원, 김순희, 박승의, 코르네예바 이브)에서 한국어 지도에 필요한 교재 구입과 공급 그리고 한국어교사 연수회를 주관하고 일반 학교 학생들의 한국어 경시 대회를 매년 조직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인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민국 교육부에 건의하여 사할린에 교육원을 설립하도록 힘썼습니다. 한국어 교육 활성화를 교사협회는 사할린한국교육원과도 밀접히 사업하고 있으며, 한국교육원은 한국측에서, 협회는 러시아측에서 사할린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국어교육을 위해 사할린 동포사회는 어떤 일을 해오고 있나요? A; 사할린 한인 사회의 언어 문제는 역사적 여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언어의 간섭과 접촉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특이합니다. 일제때 사용하던 일본어가 한국어와 러시아 어 사이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한인1세는 모국어인 한국어, 생활어였던 일본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구사합니다. 이들의 한국어 읽기 쓰기 능력은 떨어지며, 러시아어도 정확한 구사는 어려운 듯합니다. 한인 2세 가운데 1935년 이전 출생자는 부모에게서 배우고 들은 한국어를 구사하며, 학창 시절을 일본어로 보냈고, 러시아어를 정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한 세대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략 1941년 이후 출생자는 공식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한 세대입니다. 가정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쓰기도 하였고 투철한 민족 의식을 갖지 않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생활하지 않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조선학교가 있었던 1946년부터 1964년 사이에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합니다. 그러나 1964년부터 25년 간 한국어 공백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낸 30, 40대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가 없지만, 능숙해진 사람이 많이 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인 3세는 공식적인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하여 모든 생활이나 사고 방식이 러시아인과 같습니다. 한국어를 잘 쓰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은 당연히 한국어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은 외국인(러시아 인)에게 하는 한국어 교육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Q: 사할린에 강제동원으로 끌려온 경북 의성 출신이고, 당시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춘계 '류시욱' 선생님이 남기신 한글 일기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셨는데, 어떤 작품인가요? A; 나는 춘계 류시욱의 '산중 반월기 (山中半月記)'를 여러번 읽고 러시아어로 번역했습니다.춘계 류시욱은 1920년 5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동 고실촌 류성룡 선생 집안에서 13대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류시욱은 젊은 시절에 문예 창작과 사상활동을 벌이다가 서대문형무소와 사상범 교화보호소에서 옥중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사상범으로 출옥한 조선인들에게 강요된 징병을 피하기 위해 류시욱은 가라후토(현 사할린)로의 동원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산업보국대원으로 찍혀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사할린으로 끌려가게 되어 가라후토 나이부치 탄광에 도착한 때가 1941년 2월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조선학교의 교사로 류춘계 선생은 돌린스크 구역에서와 돌린스크시에서 교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조선어 문법” 및 "조선 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조선학교 폐교 후 '세월은 흘러가고 과거의 꿈은 사나운 폭풍에 갈가리 찢겨 쓸쓸한 유폐의 암흑' 속에서 류시욱의 시절은 무의미하게 지나갔습니다. 희망도 기대도 없이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이국 땅의 노동자로 살다가 1962년에 노동 현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춘계 류시욱이 1957년 9월 1일부터 15일까지 15일간 사할린 "크라스노고르스크 임산 사업소 직속인 임동화(林東樺) 브리가다가 새풀치러 가는 곳에 식모(食母, 밥을 해주는 사람)로 따라가 쓴 일기다”(저자의 자서에서). 저자가 1957년 9월의 보름을 지낸 사할린 크라스노고로스크의 산속은 외부와 100리 고립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단절된 허술한 풍막은 고향과 수천 리 떨어진 사할린 섬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갇힌 삶과 닮아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하루살이하는 매일 매일의 끝없는 외로움 때문에 그는 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이 새풀을 치러 나간 후 혼자가 되면 구멍 뚫린 천막 앞으로 나와 소통에 대한 소원을 페이지마다 채워 나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토의하며 일제의 강압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생이별하게 된 가족과 이른바 내적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던 그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고향의 ‘한오리 신작로’가 뻗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사할린으로 끌려가 소련 체제에 갇혀버린 평범한 조선인들이 수없이 우물거렸을 속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일기는 개인적 회고를 넘어 자신이 동원되었을 시기를 전후한 시대와 인물들에 대해 날카롭고도 풍부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가치있는 사료가 되었습니다. Q: 춘계 선생 외 사할린의 한인문학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사할린 한인의 문학은 CIS 한인들의 문학과 같이 상당히 오래되고 견고한 전통을 자랑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거주 기간이 겨우 70년이이고,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도, 그리고 사할린의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일본 당국에 의해 남한의 시골에서 사할린으로 동원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다는 사실로도 설명됩니다. 이것은 특히 전후 첫 시기에 사할린에서의 지식인 집단 형성에서도 나타남을 의미합니다.'사할린의 한인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증손과 아나톨리 김이 사할린에 거주하며 사할린에 대한 글을 썼던 작가들이지만,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고려인)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CIS의 모든 한인 디아스포라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할린 한인들 중에서 우리는 장윤기와 허로만의 작품을 알고 있으며, 사할린의 문학 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주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유명한 일부 다른 저자들(양 세르게이)을 알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사할린한국문화원과 교육부에 요청을 하고 싶은 것은? A; 사할린의 한국어 교육은 사할린 한인 1세의 영주귀국으로 인한 한인동포수의 감소, 한국어교사 부족 및 고령화 현상 등으로 점차 악화되는 추세입니다. 말을 잊어버리면 다음에는 고유의 문화를 잊게되고 결국에 가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할린 한국교육원에서는 한인동포 청소년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어 교사를 대상으로 교원 연수를 한국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모국연수 기회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국연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사관, 교육원, 한인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한민족 전통문화를 동포들과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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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러수교30주년기념 러시아 청소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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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KBS 다큐 [KBS Documentary]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2014.08.29 방송)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은 러시아공영방송 RTR의 여자 앵커 고려인 5세 마리나 김의 1인칭 시각으로 강제이주 이후 현재까지의 고려인들의 역사를 살펴본다. 러시아 공영방송 RTR의 고려인 앵커우먼 마리나 김 -마리나 김은 고려인 5세다 올해 33세인 그녀는 러시아 공영방송 RTR의 기자이자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 중이다. 취재능력과 빼어난 미모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저널리스트로 성장중이다. -마리나 김은 2차세계대전 참전 베테랑들을 취재하던 중 우연히 1918년생인 고려인 2세 정상진을 만났다. 정상진은 소련 태평양한대 소속 해병대원으로 1945년 8월13일 청진항 상륙전에 선봉대로 참전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유일한 한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노병이었다. -마리나 김은 정상진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면서 점차 정상진의 일생을 취재하는 과정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평양과 서울을 취재하는 마리나 김의 분단조국 체험기 -마리나 김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평양과 서울을 차례로 취재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평양에서는 아리랑공연을 보고 유치원과 지하철 백화점 그리고 판문점을 취재하면서 북한의 속살을 살폈다. 서울을 방문하여 임진각을 찾고 세종시를 취재하고 명동과 강남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북을 오가면서 분단된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한없는 연민과 아픔을 느낀다. 3천만 한인들 중 가장 풍요로웠던 1930년대 연해주 고려인들 -1930년대 고려인의 숫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소비에트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고려인의 근면성이 어울려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활기가 넘쳐 흘렸다,300개가 넘는 고려인 학교가 생기고 순한글 신문 '선봉'을 비롯하여 각종 잡지와 신문이 발간되고 한인라디오 방송국, 고려극장 등이 생겨 수준 높은 교육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학살과 강제이주 고려인 사회를 덮치다. -1937년 스탈린은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연달아 침입하자 연해주 고려인들이 일본에 동조할 것이란 판단 하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학살한다. 지금까지 공식 발표된 학살자는 2,000여명이었으나 고려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6,500명이 넘는다. -지도자를 처형한 후 소련 당국은 고려인 18만 명을 전원 중앙아시아 오지로 이주시킨다. 18만 고려인의 강제이주는 엄청난 시행착오를 일으키며 숱한 희생자를 낳았지만 고려인들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었다. 고려인 집단농장 폴리타젤, 시온고, 북극성 등의 눈부신 성장 -맨손으로 중앙아시아에 던져진 고려인들은 척박한 땅을 갈무리해 중앙아시아에 벼농사 재배를성공시킨다. 김병화, 황만금,김만삼 등의 헌신적인 지도와 고려인들의 협동심이 어우러져 마침내 소련 영방에서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민족으로 거듭났다. -소련 최고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고려인 농장을 방문하고 베트남 호치민 수상이 고려인 농장을 방문하여 모내기를 하고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고려인 마을 찾았다. 소련파 고려인- 북한정권을 수립하다. 해방이 되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엘리트 500명을 북한으로 보낸다. 이들 고려인들을 소련파라 부른다. 허가이 박정해 박창옥 남일 등이 대표적인 소련파다. 그러나 이들 소련파들은 1950년 후반 김일성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중앙아시아로 쫓겨 난다. 또 다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질기고 질긴 조국의 뿌리 김치, - 현재 고려인은 50만 명 정도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대륙 20여개 국에 살고 있다. 스탈린의 한국어 교육 금지조치로 인해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밥상에는 여전히 짐치라고 부르는 김치와 밥이 오른다. 고려인들이 있는 곳 어디나 김치 시장이 활기를 띈다. 고려인 한민족의 북방 진출의 파트너 -지난 8월16일 고려인 자동차 랠리 팀이 모스크바를 거쳐 중앙아시아 연해주 그리고 평양에서 8.15 경축행사를 한 후 개성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대장정을 성공리에 마쳤다. 고려인들은 한국말을 모르지만 150 전 조국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남북분단에 대한 한없는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관련 영상 보기 1편 "디아스포라 이산” https://youtu.be/n4iPCVjLR2c 2편 "레지스탕스 항전”https://youtu.be/d8Yy9iSer5w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https://youtu.be/WNCzzVizAMc#카레이스키#고려인#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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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2편 “레지스탕스 항전” (2014.08.28 방송)KBS 다큐 [KBS Documentary]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2편 "레지스탕스 항전” (2014.08.28 방송) 최초 발굴-100년 전 연해주 청소년 공연단 상트 페체르부르크 공연 동영상! -취재진은 러시아국립영상사진 아카이브에서 연해주 고려인 지도자이자 최재형 선생이 사비를 털어 조직한 80여 명의 한인 청소년 공연단이 매스게임을 하는 동영상을 특종 발굴하였다. -이 필름은 상트 페체르부르크에서 1913년 열렸던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탄생 300주년 축하행사에 참가한 고려인 청소년들의 공연 영상이었다. 고려인들이 러시아에 이주한지 50여 년이 되던 이 때 최재형은 고려인의 역량을 러시아 황제 앞에서 선보인 것이다. -고려인 청소년 공연단이 흰색 한복바지, 저고리를 입고 신식 모자를 쓴 채 집단율동을 씩씩하게 선보이는 장면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체코 현지 취재-체코군단과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과의 무기 거래 -오스트리아는 1차세계대전 중에 식민지 체코인들을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낸다. 이들 체코인들이 러시아로 도망쳐 만든 군대가 체코군단인데 그 수가 무려 7만 명이었다. 이들은 태평양을 건너 프랑스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온다. 이때 경비가 필요했던 체코군단과 무기가 필요했던 고려인 독립군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무기구매가 은밀하게 이뤄졌다. -체코군단의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의 은행을 털었던 15만원(현재가치 75억 원)사건은 영화 '나쁜 놈 참한 놈 이상한 놈'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15만원 사건의 주역이었던 애국지사의 후손들을 통해 15만원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짚어본다 -체코 프라하에서 취재진은 체코군단의 지도자였던 가이다 장군이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해서 받았던 선물의 목록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상해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체코군단과 연해주 독립투쟁의 연관성을 인정하는 주요한 자료다. 상해임시정부가 가이다 장군에게 선물한 화병은 막대한 분량의 무기를 우리 독립군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 이범석 장군이 생전에 체코군단과 북로군정서가 은밀하게 대량의 무기를 구매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증언하였다. 특히 체코군으로부터 구매한 무기를 은밀하고 신속하게 운반하기 위해서 동포들로 구성된 운반대가 수백 명 규모로 조직되어 연인원 수천 명이 이어받기로 운송한 사실들을 확인했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군 부대 일본군 7만 대군과 싸우다. -1910년 후반 10만이 넘는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한반도와 잇닿아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연해주를 기반으로 독립투쟁을 벌인다. 특히 1918년 일본군이 러시아혁명에 간섭하며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7만 대군을 파병하자 연해주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혁명군과 손잡고 일본군과 전면전을 선포한다. -일본군에 맞서 연해주 곳곳에서 고려인 무장독립군부대가 생겨나는데 한창걸 부대 최호림 부대, 혈성단, 독립단 부대, 솔밭관 부대, 우리 동무군, 대한의용군, 군비단 등 최대 36개 부대 4천여 명의 고려인 독립군이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주 곳곳에서 5년 동안 일본군과 치열한 무장 투쟁을 벌인다. -올가항 전투, 달레테첸스크 전투, 파르티잔스크 전투, 볼로차예프 전투 등에서 소비에트 혁명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에게 강력한 타격을 준다. 이처럼 지속적이고 강력한 독립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연해주의 10만 고려인 사회의 적극적인 군자금모집과 각종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연해주 고려인 항일무장투쟁의 장엄한 역사는 해방 이후 남북이 나눠지면서 남쪽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에 가려서 지워졌고 북에서는 김일성 중심의 무장투쟁이 강조되면서 사라졌다. 연해주 고려인 독립투쟁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이들의 숭고한 투쟁을 선양해야 할 때다. 러시아 혁명의 주역이 된 고려인 -취재진은 러시아 정치사회역사 도서관에서 1921년 11월 28일 크렘린 궁에서 러시아 혁명의 최고 지도자 레닌과 이동휘 선생을 단장으로 한 고려인 대표단이 조선독립에 관해 깊이 논의한 역사적 자료를 취재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고려인들은 전폭적으로 혁명을 지지한다. 고려인들이 혁명을 열렬히 지지한 이유는 계급타파와 민족차별철폐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일본군과 싸우는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이 조선독립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고려인의 입장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는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그림 '제2차 코민테른 대회 기념축제'라는 그림 속의 태극기를 통해 혁명의 열기와 고려인의 기대를 확인해본다. 또한 고려인 독립군 부대의 깃발과 레닌의 연설장에 태극기를 들고 참석한 고려인 대표단의 필름도 취재했다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관련 영상 보기 1편 "디아스포라 이산” https://youtu.be/n4iPCVjLR2c 2편 "레지스탕스 항전”https://youtu.be/d8Yy9iSer5w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https://youtu.be/WNCzzVizAMc#카레이스키#고려인#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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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1편 “디아스포라 이산”KBS 다큐 [KBS Documentary]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1편 "디아스포라 이산” (2014.08.21 방송) 올해는 1864년 조선인이 최초로 러시아 연해주에 이주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이들은 연해주를 기반으로 조선말부터 한인 사회를 일궈 가다 이주 70여년 만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갖은 역경을 이기고 지금은 러시아 모스크바, 연해주,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대륙 20여 개국에 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을 고려인, 카레이츠, 카레이스키라고 부른다. 취재진은 지난 1년간 러시아 전역과 중앙아시아 5개국 및 폴란드 체코 독일 등의 기밀문서 및 영상 자료들을 집중 발굴하고,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 근현대사의 숨은 주역들을 발굴 취재하였다. 중앙아시아는 갈수록 자원 개발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국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있고 이 지역 출신 카레이스키 3만 명을 포함하여 우즈벡 키르키즈인 수만 명이 한국에 취업하여 고려인 촌을 형성하고 있다. 러시아 푸틴 정부는 연해주 개발과 한반도를 연계하기 위해 2011년부터 연해주 특별 개발을 시작했다. 러시아 이주 1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의 고난기에 디아스포라와 유랑의 고통에 내몰렸던 고려인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한민족의 일원인 이들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를 조망해본다. 1편 디아스포라 - 이산 특종 발굴1-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이르쿠츠크에 나타나다. 김인수는 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이었다. 그는 러시아 국적자이기도 했다. 조선에서 황제의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중 러일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취재진은 이르쿠츠크서 자신들이 김인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 가족을 만났다. 이들은 김인수가 남긴 사진과 친필 편지를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보관하고 있었다. 김인수는 러시아로 탈출한 후 러시아 장교 빅토르 김으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폴란드 바르샤바전선까지 참가했다. 김인수는 러시아군 대령으로 전선을 누비며 러시아 황제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받았다. 김인수의 후손들은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 특종 발굴 2 - 100년 전 폴란드 탄네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된 고려인들 1차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으로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자료가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발견되었다. 그들의 생생한 자필 신상카드, 군복차림의 각종 사진들, 더구나 100년 전 우리의 노래와 수수께기 등을 담은 음반도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노래는 100년 전 우리 노래가락을 생생히 들려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이들 포로들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취재진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이들은 연해주의 짜레찌예 출신의 고려인이며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베테랑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1차세계대전 당시인 1914년 8월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폴란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1916년 3년 째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중 이 기록을 남겼다. 이들 외에도 4,000명의 고려인 1차 세계대전당시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독일전선에 참전한 기록들을 발굴하였다. 의병장의 5대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다 카자흐스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데니스 텐은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남자피겨스케이팅 부문에서 카자흐스탄의 유일한 메달인 동메달을 획득한다. 데니스 텐은 구한말 원주 진위대 장교 출산의 의병장 민긍호의 5세손이다. 의병장의 후손이 어떻게 카자흐스탄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데니스텐이 소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는 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그가 느끼는 할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생각과 그의 동메달이 고려인들에게 주는 자부심을 살펴본다. 또한 카자흐스탄 곳곳에 흩어져 사는 민긍호의 후손들이 고려회관에 모여 데니스 텐의 메달을 응원하는 과정을 통해 고려인들의 끈끈한 친족애를 살펴본다. 동메달을 따자마자 홀로 조용히 원주를 방문하여 할아버지 민긍호의 산소를 참배하는 데니스 텐의 모습을 단독 취재했다. ※"명작다큐 카레이스키150" 관련 영상 보기 1편 "디아스포라 이산” https://youtu.be/n4iPCVjLR2c 2편 "레지스탕스 항전”https://youtu.be/d8Yy9iSer5w 3편 "오딧세이-기나긴 여정”https://youtu.be/WNCzzVizAMc#카레이스키#데니스텐#고려인#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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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대표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인터뷰 인물은 이혜솔 국악인이다. 사할린 동포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나타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은상'을 수상하게 한 국악인이면서 아리랑 전승자이다. 이후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들도 이회장의 활발한 전승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코로나로 세계가 멈추었을 때 지난 3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독도에서 제주까지' 전국 아리랑전승단체를 찾아가서 아리랑코로나를 알리고 현지 답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1952년생) 대표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Q. 올해 코로나로 인해 많은 단체와 공연자들이 무대에 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잘 마치셨습니다. 처음 만나는 무관중 언택트 공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A.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수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금년의 국악계는 어느 분야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의 제1조건이 관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관객 없이 해야 하는 공연을 위해 극히 제한된 출연자와 스탭과 관객으로 치룰 수 밖에 없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무대에 20명만 올라와야 하는 조건에서 극장밖에 있다가 다른 공연팀과 계속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협조를 해주어서 잘 마치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끝나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날을 기원해 봅니다. Q. 매년 정례화 되고 있는 아리랑축제를 올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와 함께 무사히 치루었는데, 올해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행사 주제는 무엇입니까? A. 전 세계가 멈춰어져 있는 이 어려운 "코로나19 고개를 넘어가보자”라는 의미에서 어서어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힘든 고개를 아리랑 고개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가지고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온 국민과 힘을 합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 공연에 담아보았습니다. Q. 이번 행사에서는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코로나 19사태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를 정하셨네요. 회원들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난생 처음 실시된 무관중 공연에서 어려운 점이 었었지만, 이런 새로운 형식의 실험적 무대에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우리는 코로나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는 바로 통했습니다. 올해부터 모든 공연은 코로나 전후로 나누어진다고 봅니다. 그동안 모든 공연은 절대적 관객 대상 공연이었지만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우리 출연자 스스로를 향한 공연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Q. 전체 프로그램은 2부로 나누어져서, 제1부는 대동의 노래, 제2부는 상생의 노래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나요? A. 전국 지역에서는 아리랑의 힘으로 대동단결하여 코로나를 막아내고 우리 모두가 다시 안정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는 상생의 노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지역은 '왕십리에서 제주까지' 불리는 지역 아리랑으로 구성했습니다. 왕십리아리랑을 시작으로 서울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상주아리랑, 밀양아리랑, 제주아리랑 등이 불려졌습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지만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사람은 아라리를 부르고. 경상도 사람은 밀양아리랑, 제주에서 올라온 이는 제주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제주아리랑은 유재희(서귀포아리랑보존회장) 명창이 불렀습니다. Q. 코로나로 처음으로 개최된 무관중 공연이었지만 제10회를 맞이하는 소감은? A.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우리 경기 아리랑 선율인 왕십리아리랑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리극 ‘김소월이 사랑한 왕십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준비 중에 있습니다. Q. 왕십리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작사하고, 통일앙상블 대표 윤은화가 작곡한 새로운 아리랑인데, 어떤 내용이 담긴 사설인지 궁금합니다. 국내외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 반응은 어떤가요? A. 첫 소절은 처음에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라고 시작합니다. 본조아리랑을 선율로 해서인지 일단 경쾌하고 따라서 부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는 왕십리아리랑을 작편곡 한 윤은화 작곡가와 통일앙상블 밴드(9명의 연주자)가 함께 가서 연주 반주에 맞추어서 불러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미 음반 작업을 하면서 함께 연습을 한 팀들이 그대로 갔기 때문에,,,,..그래서인지 현지 동포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고 음악가들이 악보를 달라고 해서 부고 왔습니다. 2019년 봄에 왕십리아리랑제에 관객으로 참가한 사할린동포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 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이 아리랑을 만들게 된 연유는 제가 청년기부터 몸담고 살았던 서울 동부의 중심지인 왕십리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알고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가락에 성동구 지역 역사를 담아 보았습니다. 아리랑의 대동정신으로 지역공동체 결속에 이바지 하려고 합니다. 이 아리랑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미국 순회공연. 일본, 사할린 공연에서 동포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본조아리랑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포들을 만나면서 아리랑은 결속력을 속성으로 하는 노래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롭스크 동포들이 와달라고 했는데 올해 못갔죠. 코로나로......코로나만 종식되면 바로 갈려고, 트렁크 짐은 싸놓은 채 그대로입니다. 작년 2월 초 가려고 비행기표 예약을 했다가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Q. 지난 해 2월초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로 바로 가려고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각해지자 아리랑코로나를 지어서 코로나를 막아내자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카다로그 앞에 나와있는 이 가사가 아리랑코로나인가요? 어떤 계기로 해서 만든 아리랑인가요? A. 지난 5월에 새로 만든 ‘아리랑코로나’가 무대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세는 한풀 꺾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감염이 이어지면서 신규 확진자가 늘어면서 전국 축제와 예술활동이 거의 중단된 현실에서 이번 무대에서 회원들과 함께 불렀습니다. Q. '아리랑코로나'는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나요? A. 일제강점기 1930년대 종두선전가라는 종두아리랑. 마마아리랑이라는 방역아리랑이 불려졌습니다. 아리랑으로 천연두 전염병을 이겨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랑의 힘으로 전세계를 멈추게 하는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입니다. 90년만에 나온 방역아리랑, 특별한 아리랑이지요. 이회장은 주먹을 높이 쳐들면서 이번 코로나19를 막아내자는 방역아리랑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부터 독도 울릉도에서부터 제주까지 찾아가는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추운 나라 러시아 동포들에게 녹음을 해서 전해주고 국내 이주하고 있는 동포들과 공유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고려인 청소년과 하바롭스크 사할린 동포들에게 음원과 동영상을 전해주고 있다. 아리랑코로나 노래가 알려지자 (재)아리랑선풍재단 아리랑체조단도 이 음원을 보내주면 집단체조를 해보이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리랑코로나 작사.작창:이혜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코로나 택시는 탈만큼 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어 도망간다 코로나 마마님은 언제 가시려나 구경일랑 그만하고 가시게나 바다 건너 님 보고싶지만 가고 싶어도 갈수없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수로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지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네 Q. 2년동안 아주 특별한 아리랑 전승활동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부모님 고향은 어디인이신가요? 부모님 중 누가 소리를 잘하신 분이 계셨나요? 소리를 하시면서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나요? A. 아버님 고향은 청주이시고, 어머니는 경기도 평택이시지만 어릴때 서울로 이사를 하고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공부보다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판소리 춘향전은 다 외우셔서 사랑방에 손님들 모이면 걸죽하게 뽑아 내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 풍류객이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을 오가며 사셨습니다.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모두 다 소리를 잘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아버지를 쏙 닮아서 통성입니다. 나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풍류를 찾아서 서울을 오가는 멋쟁이 아버지는 살림을 나 몰라라 하셨습니다. 갈수록 식구들 입은 늘고 살길이 막막해지지만 청주 사람들이면 다 아는 양반집 친정에서 곱게 자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친정에서 곡식을 얻어서 우리 식구들 먹이다가.....나중에는 나어린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가 몇번이나 달리는 트럭에 뛰어 들었다가 모진 목숨 건지게 되자, 장남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키겠다고 7남매를 끌고 생면부지 서울로 상경을 하셨습니다.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 용두동에 하꼬방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젖먹이를 업고 어머니는 묵을 쑤어서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큰언니가 촛불을 키고 바느질을 하다가 집에 불이 나서 이불이고 신발이고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창신동으로 이사를 가서 임시 천막을 치고 맨 땅에서 추우나 더우나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마치면 이고 나간 함지박에 매일 벽돌을 한 두개씩 사서 이고 들어오셨습니다. 매일 천막안에 사방에 벽돌이 하나씩 하나씩 쌓아서 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방을 두를만큼 벽돌이 모아져서 그 자리에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묵장사로 목돈을 모우신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비단을 받아서 이고 지고 나가서 비단 보따리 장사로 우리 7남매 자식들을 힘들게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땀으로 우리 형제는 하루 하루 커가는데, 판소리와 경기소리에 미친 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면서 사시느라 어머니는 평생 외롭게 독수공방을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긴긴 세월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 하시느라 여린 여자의 몸으로 사내 대장부처럼 우리 7남매를 굳건히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세딸 중 막내딸로 태어난 저는 어머니 품속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이나 있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제가 가장 많이 닦아 드렸습니다. 두 언니들은 바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집에 남아있는 저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에....어머니는 늘 저에게 "곱게 자라야 시집가서 고운 대접 받는다"고 막내딸만큼은 손에 찬물 안 묻히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가이없는 정성을 자식을 낳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없는 막내딸이지요. 이렇게 우리 7남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매일 바라보며, 우리 7남매는 "중용을 지키고 불손한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습니다. 평생 5시가 되면 일어나서 달이 뜰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졌습니다. 그 덕에 모두 일찌기 자수성가해서 서울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쁜 작은댁을 데리고 사시던 아버지는 칠순을 넘기시고 중풍에 쓰러져서야 집에 돌아와 안주하시게 되었지만..... 몇해 동안 앓다가 결국 조강지처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이때 우리 형제는 불같이 일어나서 반대를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아 들이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수족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의 노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고생하신 슬픈 어머니의 한을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힘들때나 기쁠때 양평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지인들의 어머니만 뵈도 가슴이 떨립니다. 어머니, 어머니 불러도 대답없는 나의 엄니.....그래서 저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국악 입문경위 Q. 풍류를 즐기시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미워하는 아버지의 목을 빼닮아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네요. 유년기에서부터 들어온 사랑방에서 장구 장단에 부르는 노래 소리가 서울에 이사와서도 낯설지는 않았겠죠. 유년기에 무대같은 데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나요? A. 어릴 때부터 고향 청주에서는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소풍을 갈때나 학예발표회 무대에서 늘 일등으로 불려나와서 노래를 불러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소리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스승을 모시고 소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서울에 이주하게 되자 저축을 하여 돈이 생겨서 제일 먼저 산 것이 녹음기입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를 들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음반을 사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민요 가락을 따라 부르는 저를 보고 피는 못속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10대는 소리 공부에 대한 목마름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지세웠습니다. Q. 늦은 나이에 국악에 입문을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A. 언젠가는 반드시 소리를 배워야지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정이 안정되고 어린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비로소 마흔살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운 소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도 녹음을 해가지고 와서 일하면서 반복해서 혼자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당시 단순노동에 불과한 자영업을 하면서 소리는 나에게 많은 위안과 꿈을 주었습니다. 테이프를 틀고 들어보니 이 소리들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신명나게 불렀던 노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몸서리치게 그리 좋아하시던 그 노래를 이제는 제가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더욱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가 늘 부르시던 노래(민요)를 녹음을 안해 놓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지금도 비오는 날 눈을 감으면 정가, 민요에서 판소리까지 즐기시던 아버지의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경기민요를 배우게 되고 무대에 서게 되자 집안(남편)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습 공간을 따로 얻어서 소리 도반들과 같이 매일 모여서 공부를 하는 바람에 점점 소리에 깊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안의 나 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지 심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민요 전수자들에게 지도하는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내공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스승을 찾아서 경기민요부터 서도민요를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은관 선생에게서 서도민요 이수를 받았지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나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샌줄 모른다고..... Q. 늦게 배운 소리에 불구하고 서도민요 이수자까지 했으니 원은 푸셨네요. 경기민요 서도민요는 어떤 스승에게 배우셨나요? 소리 공부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스승이 계시나요? A.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김순자 선생님, 김경배선생님, 이은관 선생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선생님, 전숙희선생님, 김혜란선생님께 사사했습니다. 그 중 이은관 선생님이 무대에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전숙희 선생님과 김혜란 선생에게 혹독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이제는 자산이 되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제자들이 전국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을 타가지고 옵니다. 늘 스승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Q. 경기민요, 서도소리를 이수하고, 강원도 '아라리'도 배우시고, 최근에는 ‘제주민요’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데 어떤 계기가 되어서 제주의 소리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요? A. 오랫동안 같이 공부를 했던 제주도 소리 친구 유재희 선생이 제주민요축제에 초청공연으로 자주 가게 되면서 신비로운 서우제소리에 반했습니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수십년간 불렀지만, 제주민요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서우제소리를 들으면 배를 타고 신비로운 섬으로 끌려가는 듯한 선율에 넋이 나가더라구요. 이어도 소리는 여자들만이 산다는 섬으로 떠나간다는 내용입니다. 고난의 속세를 떠나서 유토피아로 떠나가는 거지요. 한번 간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엿말 하면 나 눈물 난다. 이엿말은 말앙은 가라. 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한다." 어느새 둥둥 배를 타고 상상속의 섬으로 떠나가는 환타지가 느껴지면서 온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거기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주민요를 들으면 어머니가 더욱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아주 특별한 외식을 하는 기분으로 제주민요도 조금씩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레파토리는 사할린아리랑 이회장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출범 이후 첫번째 지도자로,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바롭스크 아리랑지부 회원들이 와서 아리랑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때, 바로 출국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미루어진 상태이다. Q. 지난 해 3월부터 10월까지 지도를 해주신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 지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수상 소감은? 어떤 감동이 들으셨습니까? A. 아리랑학교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를 구하는데 1년동안 책임을 지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양주까지 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2번 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주나 문경 같은 지방에서는 1번만 와주겠다는 겁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바뀌면 일정한 곡을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리랑학회 위촉을 받고 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섹스폰 연주하는 친구들과 제자들까지 데리고 와서 수업시간 중 쉬는 시간 10분 동안 선율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섹스폰 연주까지 들려주며 지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10월 14일 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위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서 단원들 12명의 의상을 새로 마추고 소품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사할린 동포들은 난생 처음 입어보는 한복 무대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대에서 심사위원들도 관객들도 모두 함께 구구절절한 서러운 사할린아리랑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일본놈 무섭어 따라왔지” 강제동원으로 끌려 간 4만명 조선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70년의 한을 가슴에 묵혀두고 있다가 터진 것이지요. 심사위원들이 20여 단체의 경연자 중 2등상인 은상까지 주셔서 그분들의 깊은 한이 그날만큼은 치유가 되셨을겁니다. 왕복 7시간이나 되는 왕십리에서 양주를 다니면서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지만,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아리랑을 배우려고 하시는 열망 때문에 더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수상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환갑 이후 저의 생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 갈겁니다. Q. 전국아리랑전승단체가 지역적으로 55단체가 존재합니다. 경기도에만해도 10여 단체가 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김포, 인천. 가평. 포천, 수원 등등에서 양주끼지 오기는 너무 멀지요. 길이 막혀서 약 왕복 7시간 이상 걸립니다. 드디어 10월 중순 작년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에 이어 올해 사할린 동포들과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두드러진 아리랑 전승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합니다. 올해 계획은? A. "사할린동포분들께 내가 해드릴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분들께 아리랑을 가르치며 보람이 있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그리운 조국 한국 나와서 아리랑을 배우시고 싶다는데. 아무리 멀어도 최선을 다해서 해드리고 싶어요. 우선 사할린아리랑과 아리랑코로나 2곡을 가르쳐드릴겁니다. 양주와 인전 지역 사할린 동포들과 다문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면 러시아 동포을의 요청을 받아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러 갈겁니다. 지금은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Q. 사할린 동포들에게 직접 아리랑을 가르친 첫번째 사례입니다. 아리랑 소리꾼으로써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제가 사할린 동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 KBS특별생방송 '누가 이사람을 아시나요'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형제 찾는 방송을 보고 울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영주귀국 해서 사신다는 것은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벌써 조국에 오신지가 15년이나 되셨다는데..... 4천명이 오셔서 전국 25지역에서 살고 계신다는데,,,,,,,,,작년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을 했던 100여 분의 사할린 동포들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김세르게이 음악가가 살고 계시는 곳에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있고, 인천에 영주 귀국하신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님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아리랑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3월 아리랑학교에서 위촉을 받고 망서림 없이 수락을 하고 사할린아리랑에 이어 올해는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학교 수업을 통해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이주한 동포들이 조국을 그리는 노래로 불리게 되면서부터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전승자라는 이름을 걸고 동포들을 찾아가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할린 동포 중 이번에 제자로 삼은 어린이가 있으시다는데 소개를 해주세요. A. 제가 신아리나를 처음 본 것은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축제 ‘디아스포라 아리랑’ 무대에서 무반주로 사할린아리랑‘을 독창으로 부른 당시 5살 먹은 당차고 씩씩한 신아리나(8세)입니다. 이번에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4세로서 할머니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언니(14세)와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면서 영민한 신아리나 어린이를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회원들과 함께 장학금도 보내 줄려고 합니다. Q. 전국55단체 아리랑전승단체 중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후발주자이지만, 작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55개 지역 아리랑워크샾, 경복궁아리랑고,사할린아리랑제 등 국가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느낀점은? A.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각 지역 아리랑보존단체 50여개 지역단체가 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현장에서 국악인으로서 아리랑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각각의 지명을 달고 창출된 **아리랑은 충격이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60여종 아리랑이 전국에서 불려진다는 것.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가 연대한다는 것은 전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에 자부심이 앞섭니다. 거기에는 책임같은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일년 전에 일본 땅에서 개최된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가슴이 벅찼어요. 처음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연락을 받고 출발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간거지요. 추모제를 준비하는 주관단체가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 구름같이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어려웠던 시절 일본 농촌이나 오지로 시집을 간 한국 여성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고 도라지타령과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서로 손 잡자마자 바로 눈물이 앞섰습니다. 저는 안중근의사의 의병활동을 추모하는 '아무르아리랑'을 헌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아리랑은 동포사회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아리랑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 국악인으로 살면서 ’노래의 힘‘을 느끼신 적 있으신가요. A. 아리랑을 통해 노래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애국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노래를 불렸고, 강제이주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른 디아스포라 아리랑인 사할린아리랑은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고 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통해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러시아 동포 3세 4세들도 아리랑을 부르고 알더군요. Q. 그렇다면 가장 자극을 받은 아리랑축제는? A.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무대에서 러일남북중 5개국에서 향유하는 아리랑이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부른 양상을 보고, 아리랑의 다양성에 대해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흥얼거리는 민요가 아닌 바로 애국가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만의 아리랑을 만들어야겠다. 나의 소리길를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결성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간 것입니다. Q. 30여 년 국악인생을 살면서 오롯이 담아낸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 음반은 녹음을 마친 걸로 아는데 언제 발매가 됩니까? A. 처음에는 왕십리아리랑(작편곡:윤은화)을 중심으로 4년전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을 녹음을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사할린을 다녀오고 나서 사할린아리랑을 편곡하여서 넣으려고 합니다, 추가로 아리랑코로나도 넣고 싶고, 그래서 4년이나 끌었습니다. 이제는 아리랑에 욕심이 납니다. 내년에는 나올겁니다. Q. 최근 3박 4일 동안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함께 제주도아리랑답사에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A. 서귀포아리랑보존회 회원들과 서귀포 역사 유적지를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아리랑 역사에서 사할린과 제주도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본조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본조아리랑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1940년 전후 제주에서도 사할린이나 일본, 오키나와에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본조아리랑을 불렀지요. 문헌에 있는 제주아리랑 선율은 본조아리랑입니다. 어업에 종사하거나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가지고 간 아리랑이라고 봅니다. 출가 해녀들이 대마도나 홋가이도로 동원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부른 아리랑도 본조아리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부쳐준 아리랑고개가 존재한다는 것, 이번 답사에서 민족 고난이 있는 곳에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Q. 앞으로 계획은? A. 내년에는 왕십리아리랑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올해 준비를 했다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사회적 거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부득불 취소를 했습니다. 국내외 이주한 다문화 어린이들과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아리랑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아리랑학교 아리랑 지도자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면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수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어 러시아 아리랑학교가 성사되어 아리랑배우기 수업이 완수되기를 기원합니다. 연혁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2016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결성 2018년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설립/이혜솔 이사장 취임 안중근의사추모제(주관:일본 미야기현 대림사) 초청명창 위촉 제8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2019년 아리랑학교 지도자 위촉(아리랑학회)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 위촉 (공동주관:아리랑학회)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 (양주사할린동포협회, 율정마을) 제9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제7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및 아리랑퍼레이드 참가 전국아리랑전승단체(55개 지역단체) 워크샾 참가(주관:문화재청) 경복궁 아리랑고유제(45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참가 제3회사할린아리랑제 아리랑명창 초청공연(이혜솔의 아리랑) 2020년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주관(주최:성동구청) 전국아리랑전승단체협의회 가입단체 아리랑코로나 발표회 독도에서 제주까지 ‘아리랑코로나 부르기’성료 (공동주관:아리랑학회) www.arirang129.com 아리랑은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다. 기관과 학계에서는 50여 종의 아리랑 곡명을 누구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함의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제시한 수는 명목상의 수이지 자체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셀 수가 없다’는 의미다. 사실 최근의 한 연구논문에는 음반에서 정리한 곡명 수를 192종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사 기관과 목적에 따라 그 수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자기 복제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이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여지를 표현한 것이란 점이다. 어쩌면 이 세 번째를 함의한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가치 향유를 목적으로 한 아리랑 전승단체가 더 형성될 것이고, 그 범위가 세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결성과 창작 활동은 이 세 번째의 함의를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래되는 전통민요만 알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1926년 9월 창작되었고, 그해 10월엔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에 등장한 ‘본조아리랑’이 탄생되었으며, 1934년엔 ‘진도아리랑’, 1936년에는 대구아리랑, 1972년엔 ‘상주아리랑’이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아리랑은 댓구 형식이라서 기억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2줄의 사설, 2줄의 후렴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서, 외국인들도 한번 들으면 누구나 기억하기 쉬어서 각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지어 부르기도 쉬운 노래다. 이는 아리랑이 가진 창작과 개사의 속성을 지닌 '노가바' 형식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속성에 맞게 ‘왕십리아리랑’도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아리랑코로나 가사를 받고서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를 이기자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알리고, 사할린 동포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치는 아리랑동지! 다시 한번 우리는 이혜솔 회장의 자발적 전승활동에 박수를 보낸다"라고 반겼다.(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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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나눔성형외과, 나블리 베이커리, 성탄절 맞아 사할린동포들에게 연말선물 전달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은 "절기마다 사할린 동포들을 잊지않고 기억해 주시는 국악신문 전직원. 성형외과 노승만원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른 새벽부터 빵 만드시느라 고생하신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전직원에게 감사하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시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에도 감사하다"고 전했다. 작년 제주도아리랑보존회 강소빈회장에 이어 올해에도 양주.인천 파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에게 제주 귤을 보내준 유재희 서귀포아리랑보존회장님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전 사할린씨름협회 정용범 회장은 "여지껏 살면서 크리스마스 캐롤도 못 들어본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그래서 예년과 달리 코로나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연말에 집콕 하는 중 이렇게 훈훈한 선물을 받게 되어 감사하다. 사할린과 하바롭스크에 있는 친지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국악신문(사장:김지연) 전 직원은 사할린 청소년들에게 추석부터 연말까지 방한 구두와 마스크를 전달해 주고 있다. 코로나가 끝나게 되면 사할린 현지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회장:임태식)가 운영하는 한국어교실 어린이에게 겨울 방한부스와 학용품을 전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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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날 팥죽은 왜 먹는지 아시나요동지날 아침 러시아 동포들에게서 손수 만든 팥죽 사진과 팥죽 카드가 SNS를 타고 날아왔다. 고려인 이주는 150년이 넘지만 세대를 거쳐서 절기마다 절기음식을 잊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먹고 싶으면 죽집에서 사먹거나 배달을 시키는데...그들은 어려웠던 시절 부모님이 해주신 음식을 기억하고 있다. 타국으로 강제이주를 당해서 살다가 해방을 맞이했지만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꿈에도 그리운 고향의 음식인 것이다. "집에선 오늘아침 형제들이 하인을 시켜 두죽(豆粥)을 끓이겠지. 채색 옷 입고 부모님께 헌수하니 세상에 그런 즐거움 또 어디 어디 있으랴.” 고려시대 이제현이 중국에서 동짓날을 맞아 고향을 그리며 지은 ‘동지(冬至)’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집을 떠난 이들에게는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그리는 음식이다. 민간에서는 동지를 흔히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였다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 것'이라고도 했다. 다음날부터 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기에 경사스러운 날이라고 인식해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긴다. 우리 속담에 ‘동지가 지나면 푸성귀도 새 마음 든다’ 하였는데, 이날 팥죽을 먹지 않으면 새로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에도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라는 말처럼 동지첨치(冬至添齒)의 풍속으로 전하고 있다. <예기>에서도 "동짓달에 우물물이 일렁이기 시작한다”는 말로 거대한 우주 기운의 태동을 표현하였다. 동서고금을 통해 동지가 새해의 시작이었고, 동짓달이면 태양의 재생을 축하하는 동지축제가 성행했다. 이처럼 동짓달을 한 해의 출발로 본 것이다. 동지에는 자신의 나이 수만큼 찹쌀로 만든 새알심 '옹심'을 넣어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절에서도 동지팥죽을 끓여 나누어 먹는 보시음식이다. 고려후기 이곡(李穀)은 영원사 주지를 역임한 의선(義旋)스님과 동지팥죽을 먹었다는 시의 제목이 ‘순암(順菴)의 동지팥죽에 감사하며 아울러 박경헌에게도 증정하다’라 했다. 궁중에서도 원단(元旦)과 동지를 가장 으뜸 이 되는 축일로 여겨서 동짓날 군신과 왕세자가 모여 잔치를 하는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다. 이 날은 민간에서부터 절과 궁중에서 팥죽을 쑤어서 나누어 먹는 날인 것이다. 천민에서부터 임금님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한날 아침상에 다 먹었다고 보여진다.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一陽)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隣里)와 즐기리라. 새 책력 반포하니 내년 절후 어떠한고. 해 짧아 덧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농가월령가> 11월령에 나오는 동지관련 구절이다. 밤도 길고 추운 날 밤이 길어 잠이 안오니 이 날은 술을 걸러서 술을 먹어야 하는 날인 것 같다. 또한 날씨가 춥고 일년 중 가장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한다고 하여 ‘호랑이 장가가는날’이라고도 부른다. 팥죽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니 어두운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어서 다양하게 활용되는 벽사(辟邪)의 음식이다. 해가 짧아서 차거운 동짓날 음기가 성하니 양기 충만한 뜨겁고 붉은 팥죽으로 대응했다. 이웃집이 초상이 났을 때 팥죽을 쑤어 부조하고, 이사 할때나 개업 때 팥죽이나 시루팥떡을 이웃들에게 돌린다. 전염병이 퍼질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는 것도 모두 팥이 지닌 벽사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동짓날에는 며느리가 시부모님께 버선을 지어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성호사설>에 동짓날 버선을 드리는 것은 ‘장지(長至)를 밟고 다니라는 뜻’에서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 한다. 동지에는 해가 극남에 머물러 일년 중 정오의 그림자가 가장 길어서 긴 그림자를 밟으면 장수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버선이 지닌 풍요다산의 상징성과 함께 동짓날 어른에게 버선을 손수 지어 바치는 풍습은 장수를 바라는 의미가 담겼다. (필자가 동짓날을 얼마 남기지 않은 러시아 축제의 마당에서 경로당 한인 어른들과 러시아인들에게 양말세트를 선물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불만의 말을 전해 들었다. 러시아인들에게 양말 선물은 매우 불쾌한 것이라는 것이다. 한인협회에서는 한복과 양말을 선물로 보내달라고 해서 준비한 것이었는데....) 특히 동지날 며느리는 미리 술을 담아서 시부모님께 '귀밝기 술'을 올려야 했다. 귀가 잘 들리시라고 해서 귀밝기 술이다. 이날 술을 올리지 않으면 두고 두고 서운해 하신다. 이렇게 동지날 팥죽 먹는 날은 다음 세대에게 가족의 위계 질서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그만큼 가족공동체 결속에도 기여한다. 동포사회에서 팥죽은 우리에게는 절기음식 중 하나이지만 "나에게도 두고 온 그리운 고향과 언젠가 돌아가야 할 조국이 있다"는 정체성을 입증하고,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한 고향을 그리는 디아스포라(Diaspira)의 음식이다. 동지날 아침에는 3세대 가족들이 다 모여서 아침상에서 핕죽을 먹는다고 한다. 그날 하루는 모든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에서 마을공동체 형성에 기여한 음식이다. 위 팥죽 사진은 오늘 아침 러시아 동포들이 SNS로 보낸 사진 중 손수 지은 팥죽 사진 3장을 골라서 실어 보았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아가는 절기음식 팥죽을 그들은 기억하고 잊지 않고 있다. 앞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조사하려면 현지 동포사회를 방문해야 될지도 모른다. 스파시바! (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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