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인천시 무형문화재 제23호 판소리 고법 지정 <시각장애인 조경곤씨>

김지연
기사입력 2013.05.02 10:54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시각장애인 조경곤씨 고법 무형문화재 지정

    시각장애인 고수 조경곤(46 김제 출생)씨가 인천 최초의 시각장애인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판소리고수’ 부문 ‘인천시무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된 조경곤씨는 인천은 물론, 장애인으로는 최초로 고법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조 명인은 고등학교 때 운동을 하다 눈을 다친 후 20대 중반부터 피나는 노력 끝에 고수가 됐다.

    “김제에서 태어나 저는 어릴적부터 아버님과 큰 아버님이 판소리도 하시고, 좋아하셔서 유명 국악 명창 선생님들이 집으로 찾아오셔서 소리하시는 모습에 판소리와 북치는 장단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명창선생님들이 부르는 판소리를 들으며 푹 빠져들었던 경험이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배고픈 직업이 국악이라는 말이 있었기에 국악인으로서 살고 싶었던 꿈을 접었습니다. 청소년기에 즐겨하고 잘하던 운동 중 격투기, 합기도, 무술 등을 겨루다가 눈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여 망막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 오랜 기일에 걸쳐 10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현대의학의 답은 없었습니다. 서서히 시력이 약해져 20대 후반에 완전 실명, 불행과 좌절, 절망의 끝에서 인생을 마치고 싶은 생각이 여러번 들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눈이 나빠지는데 정말 끔찍했습니다. 점점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눈과 같이 목표도 꿈도 사라졌지요. 하지만 이렇게 인생을 마감하는 건 더 속상했습니다. 희미하게 무엇이라도 볼 수 있을 때 뭔가 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찾은게 어린 시절의 꿈인 고수였습니다. 소리판에서 흥을 돋우고 명창의 소리를 빛내는 북 치는 고수. 25세때 만오천원을 들고 전북 김제의 고향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상경 명고로 유명하신 김창만을 선생님을 찾아 뵙게 되면서 고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법은 판소리를 부르는 창자의 입 모양과 숨결을 눈으로 보고 느겨야하는데 눈(시력)이 없는 저로써는 치명적인 불가능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손바닥의 피가 흐르도록 양무릎에 검은 멍자국과 가시지 않도록 엉덩이가 딱딱하게 굳도록 눈물나게 연습에 또 연습... 판소리 5마당을 모두 달달 외워 버렸습니다. 외운다고해서 되는것은 아닙니다. 판소리를 부르시는 창자의 장단과 흐름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감각으로 두드리곤 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박수소리에는 저의 젖었던 땀이 흘러 있음을 느끼곤 하지요 이번 인천시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저의 갈길은 아직도 멀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남도문화의 불모지였던 인천에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을 꽃피우고, 우리 국악의 전도사가 되어 전세계로 확대,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전력을 다하여 달려 나가겠습니다.”

    “당신은 안돼요, 힘들어요, 할 수 없어요….”

    그가 젊은 시절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시각장애를 안고 있는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면 사람들로부터 이런 염려를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 하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 그는 ‘하면 된다’라는 말의 의미를 세상에 보여줬다.

    조 명인은 지난 2004년 서울전국국악경연대회 명고부에 입상하며 당당히 ‘고수’란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어 16회 팔마고수 전국경연대회 명고부 입상, 2009년 목포국악경연대회 명고부에 입상하면서 고수의 입지를 굳혔다.

    그는 “앞으로 명고수가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하겠다”며 “인천시민의 세금으로 혜택을 받는 만큼 후학들을 길러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문의 : 010-2392-0606

    경연대회

    경연대회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