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7 (금)
이규진(편고재 주인)
부안 유천리는 강진과 더불어 청자 가마터들이 대규모로 몰려 있는 곳이다. 그렇게 운집해 있는 유천리 청자 가마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12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곳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8년 노모리 켄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명종 지릉의 청자여지넝쿨무늬발과 같은 도편이 출토되어 유천리 청자 가마터 성격에 대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적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 못 미처 좌측 외딴 민가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는데 전에는 이곳 일대가 과수원이었고 12호는 이곳에 위치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화여대 박물관은 유천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많은 양의 명품 청자편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곳 12호와 인근의 가마터 출토품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12호 인근의 외딴 민가에서 건너다보면 논과 밭을 오른쪽으로 휘돌아 흐르는 둔덕이 보이는데 큰길에서 유천리 마을로 들어가는 마차길이 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건너편 끝자락에 좌측으로 흘러내린 야산이 보이는데 여기에 면한 비탈진 밭이 하나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로 기억이 되는데 농부가 밭갈이를 하고 있었고 뒤집힌 흙더미 속에서 발견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의문점이 많아 아직도 혼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안쪽을 보면 물레자국이 선명하다. 거기다 기물 자체가 휘어져 있어 매병의 일부였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해 볼 수 있다. 문제는 강진보다도 더 큰 기물들을 제작했다고 전하는 곳이 유천리 청자 가마터인데 이 청자상감매병편 또한 그런 추세에 힘입어 대형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증거로는 완만하게 휘어져 돌아간 곡선율을 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편의 두께라고 할 수 있는데 무려 1.5Cm가 넘는 것이다. 말하자면 휘어진 곡선의 비율이나 도편이 두께로 보아 전후좌우가 잘려나갔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은 대형의 기물이었음을 짐작하기에는 조금도 부복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청자가 대형이라고 해서 무조건 명품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매병편의 무늬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흑백상감으로 전체를 빼꼭하게 채우고 있는 문양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잘려나간 부분에 비해 남은 것이 너무도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상감의 국화문과 연판문에다 알 수 없는 무늬는 물론 능화창에 역상감의 흔적도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완전했더라면 화려하기가 짝이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궁금증을 해결키 위해 유천리 청자 가마터 도록과 책자는 물론이거니와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도편들도 꼼꼼이 챙겨 보았지만 이처럼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문양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특이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양을 지닌 명품의 매병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상자나 박스에 넣어두는 등 내 시야에서 벗어나 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거실에 있는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어 수시로 꺼내 보고는 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문양의 실체도 알 수 없는 도편에 대해 이처럼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일까. 그 것은 보기만 해도 황홀해 지는 문양의 모습이 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쏱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의 유천리 청자 가마터의 추억 속으로 나를 늘 인도하며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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