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國際演劇學會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9월 독일에 갔을 때, 西베를린에서 무세중씨를 만났다. 5년전 블루진 차림으로 특색을 짊어지고 독일 간다고 德成女大 내 研究室을 찾아왔을 때 나 는 그가 왜 떠나며,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순간까지 그가 깊은 몸 암동에 있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길에 그의 집에 자주 들렀고, 들을 때마다 술잔을 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집이 그때 정릉이요, 그의 집이 돈 나누며 허물없이 무엇이든 의논하고, 서로간에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多血質 성격과 비타 협적인 정신과 옹고집 때문에 그는 언제나 울분에 가득차 있었다. 그 울분은 우리 演劇이 改革 되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황때문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한극회」를 만들어 演劇改革 심포 지움을 개최했을 때 그는 몸을 던져 일을 했다.
演劇學會를 창립할 때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일이 우리 연극을 새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부터 연극에 미쳤고, 탈에 심취했고, 탈춤에 빠졌으며, 周易공부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은 그가 무엇에 얼마나 미쳐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演劇博物館이었다. 공부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수집했다. 경청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메모해 두고 녹음해 두었다. 불만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집어다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경지였다. 앞으로 얼마나 살려고, 또 얼마나 큰일을 하려고 이토록 법석을 떨며 수집하고, 카드를 작성하고, 노트에 열을 올리는지 나는 언제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왔느냐 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며 살았는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의욕과 정열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는 그의 生과 예술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歐美演 劇을 배우고, 歐美演劇의 최첨단과 부딪쳐 보자는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했다. 꽃이 만발한 德成女大 캠퍼스에서 나와 작별의 굳은 악수를 나누고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을 때, 내 말문이 막힌 것은 그가 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한 길인가를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했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호주머니는 비어 있었지만 우리의 巫俗과 民俗의 귀중한 봇짐을 힘껏 짊어지고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맨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東洋의 하늘을 담고 가는 것이었다. 나의 불안을 해소해 준 유일한 위로는 이것뿐이었다.
그와 헤어진지 일년 쯤 지났을 때 나는 學會일로 서독 뮌헨에 갈 일이 생겼다. 그에게 연락해서 뮌헨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바람처럼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예상한 대로 얼굴은 헬쓱하고 창백해져 있었고, 과로와 영양실조로 고생한 흔적이 역연해 보였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며 특히 허리에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탄산수를 사 마실 돈이 없어서, 마셔서는 안 되는 물을 마구 퍼마셨기 때문에 생긴 腸結石이 원인이었는데 치료비도 없고 해서 맥주를 마시며 結石을 씻어내렸다는 것이다.)그는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유럽 땅을 방랑하고 있었다. 오갈데가 없으면 무조건 전위극단을 찾아가서 탈춤을 가르쳐 주고 며칠씩 신세지곤 했다. 유럽 땅에 황혼이 깃들면 극심한 고독과 가난 때문에 매일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뮌헨을 떠나갔다.
귀국 후, 그로부터 간간이 편지가 날아왔다. 미국에도 가고, 유럽 땅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탈춤을 보여주고 가르치면서 생활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말끝마다 자기를 잊지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편지를 받아들면 언제나 눈물이 글썽해졌다. "죽일놈 돌아올 것이지." 그가 떠난 후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탈춤 붐이 일기 시작해서 이 곳에도 그가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어서 와서 그 일을 할 것이지.
나는 혼잣말로 중얼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버티어 나갔다.
3년이 지난 후, 그는 유랑생활에 매듭을 짓고 西베를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은 前衛藝術의 중심지이고, 그와 같은 유랑 藝術家들이 집결해 있는 곳이어서 그가 활동하기에는 이상적인 도시였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그곳에서도 유명한 연극연구소(춤 중심의)에서 그가 새 로 연구한 '타이치'라는 춤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춤을 출수있는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들 제자들을 거느리고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묵살당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그는 작품 발표회를 연달아 가졌다. 몰이해와 무관심으로 뒤범벅 된 1년간의 시련의 세월이 흐르자 베를린 前衛藝術界는 그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 다. 신문, 잡지와 텔리비젼에서 그의 공연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의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프-베를린의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그의 공연 예고는 신문, 잡지의 톱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의 공연을 격찬하는 비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작년 9월 베를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첫째로 놀란 것은 빨간 小型自動車를 직접 몰고 왔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그가 安住하는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으며, 셋째로 놀란 점은 전속극단과 전용 소극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도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이 나의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몸은 군살이 빠져 단단해 보였고, 머리는 새둥지 같은 산발이었으며, 복장은 히피를 뺨칠 정도였으나, 눈동자만은 狂氣에 빛나고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李兄, 아르또를 읽고 있소?"였다. 그의 모습도 아르또와 비슷해서 놀랐지만, 나의 진정한 놀라움은 그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집으로 가서 그가 성취한 50여 편의 공연기록 스크랩북을 뒤적이면서 나는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감격의 순간을 되씹고 있었다. 그는 詩를 쓰고 있었다. 그 詩를 그의 공연파트너인 구순이씨(이 극단의 유일한 한국인 여자 연기자이다. 이번 '통·막·살'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韓했다)가 독일어로 번역한다.
그 詩를 옮고 감상하는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그의 공연연습은 시작된다. 그 속에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져 있다. 그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채 힘이 담겨져 있다. 그 詩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정감이 깃들어 있다. 무대의 긴 마루 바닥에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있는 꽃들은 그의 詩를 통해 무대적 창조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격렬한 연습의 시간으로 뛰어든다. 무세중씨가 50%를 던지고, 풀가 나머지 50%를 추가해서 한편의 공연이 완성된다. 이같은 集團創作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충돌과 대화와 토론이 벌어진다.
공연장 무대는 긴 구형의 마루바닥이다. 양쪽 끝에 천정까지 와 닿는 커튼이 쳐져 있어 호리존트 구실을 하고 있다. 관객들은 공연장 무대 속 어느 곳에 앉아도 된다. 양쪽 흐리존트에 추상화를 방불케 하는 슬라이드가 비친다. 등신대의 人形이 그 앞에 놓여있다. 배우들은 알몸이 되어 출연한다. 그들의 동작과 춤은 하리만큼 충격적이면서도 무한히 아름답다. 북소리, 징소리, 기타 소리, 강석희의 음악소리, 피에르의 노래소리, 신음소리, 고함소리, 이 모든 소리와 빛과 움직임이 한가지 主題속에 調和를 이루어 관객을 자극시켜 무대속으로 끌어들인다. 소회에 관한 토론을 벌인다.
무세중씨는 民族分斷의 아픔을 그 곳에서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소원하는 작업은 과거의 베틀린 역-현재는 역이 된 채 버려져 있는 이 공간에서 통일을 주제로 한 일대 野外 해프닝劇을 시도하는 일이었으며, 故國에 돌아가 똑같은 발상으로 섬진강변에서 統一을 기원하는 살풀이를 한마당 펼쳐보는 일이었다. 이 같은 구상이 변용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금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공연된 '友, 그리고 통·막·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198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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