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1 (수)

[Pick리뷰] 희망을 부르는 이 시대 우리의 ‘나례儺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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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리뷰

[Pick리뷰] 희망을 부르는 이 시대 우리의 ‘나례儺禮’

국립국악원 송년공연 ‘나례’
창작민요 ‘훠이 훠이 물렀가라’ 선물
깔끔하고 소통 지향적인 연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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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송년공연 ‘나례’가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펼쳐졌다. (사진=국립국악원). 2023.12 29.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송년공연 ‘나례’가 펼쳐졌다. ‘나례’는 고려부터 조선까지 700여 년간 궁중과 관아, 민간에서 행해 온 섣달 그믐밤의 벽사진경 의식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태평한 새해를 맞이하기 행해져 온 축제다. 궁중 예인을 비롯해 민간의 최고 광대들까지 함께 어우러진 계급 간, 계층 간 벽을 허문 왕실의 연말 문화이자 새해맞이 의식이었던 ‘나례’는 이번 무대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관객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로비는 전통 음악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모인 관객들로 꽉 들어찼다. 국립국악원에서는 관객들에게 작은 방향제를 하나씩 선물해 주었고,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로 불린 창작민요 ‘훠이 훠이 물렀가라’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와 경쾌한 분위기를 더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횃불이 일렁이는 창덕궁 영상의 막이 오르며, 나례의 시작을 천지에 고하는 1장 고천지(告天地)가 펼쳐졌다. 섣달 그믐밤 창덕궁에 어둠이 내리고, 횃불이 켜지며 ‘고취타’가 연주되었다. ‘고취타’는 대취타를 재구성한 작품으로, 짧지만 강렬한 관악기와 타악기가 힘차고 웅장한 연주로 무대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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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송년공연 ‘나례’가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펼쳐졌다. (사진=국립국악원). 2023.12 29.

 

그리고 짙은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사방지신이 강한 존재감을 뽐내며 객석에서 등장했다. 북 현무, 남 주작, 동 청룡, 서 백호의 모습을 한 사방지신이 창덕궁 인정전 마당에 들어와 나례를 허락하는 춤을 추었는데, 고구려 고분 사신총 벽화에 나온 모습을 바탕으로 제작한 생동감 있는 의상과 소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위엄있고 한국적인 사방지신의 모습에 관객들은 모두 탄성과 호기심을 금치 못했다. 사방지신이 등장할 때는 관악기의 바람 소리와 아쟁, 그리고 대고와 어가 어우러지며 기묘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신들이 춤을 출 때는 단소 위주의 연주로 문묘제례악이 연상되는 끌어올리는 표현을 활용하여 어딘가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동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집중도를 끌어냈다.

 

곧이어 역신을 달래는 세역신(設疫神)이 시작되었다. ‘나례’는 궁중 뿐 아닌 민간의 연희패도 어우러져 함께 한 축제다. 길놀이를 시작으로 어릿광대와 풍물패가 궁궐로 들어왔다. 두 명의 어릿광대는 재치 있는 재담을 서로 주고받으며 유쾌한 무대를 만들어 냈다. 신명 나는 사자춤과 함께 사회비판적인 내용이 섞인 현시대의 역신을 비판할 땐 관객들 모두 통쾌하게 웃고 즐기며 하나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곧이어 무당이 나와 서도소리 재담인 ‘파경’을 부르고, 관객들과 함께 ‘훠이 훠이 물러가라’는 후렴구를 부르며 본격적인 무대를 열었다.

 

연희패가 물러나고, 정악단의 ‘해령’이 연주되었다. 어두운 무대 위 편종, 편경 등의 큰 타악기에는 빛이 강하게 쏘여 배경과 대비를 준 고급스러운 느낌의 무대가 만들어졌다. 고상하고 깔끔한 해령 연주와 무대 소품, 조명의 어우러짐은 아름답고 정갈한 이미지를 주었고, 특히 편종, 편경, 방향은 각 두 대씩 편성되어 더욱 깊은 울림과 풍성한 사운드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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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송년공연 ‘나례’가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펼쳐졌다. (사진=국립국악원). 2023.12 29.

 

곧이어 생명의 탄생과 무병장수를 비는 ‘학연화대무’가 펼쳐졌다. 네 마리의 희고 검은 학의 의상을 입고 나온 무용수들은 양금과 장구, 단소의 세악 편성 반주에 맞추어 우아하고 아름다운 학의 몸짓을 표현하였다. 신비롭고 고상한 학들이 부리로 바닥을 쪼고, 날개를 뒤로 모으는 등의 표현은 실제 학이 눈앞에 있는 듯했고, 단정하고 한국적인 느낌을 물씬 자아냈다. 이어 막이 걷히며 등장한 빛나는 연꽃을 학들이 쪼아내자, 그 속에서 두 여자아이가 나와 무용수들과 함께 연화대를 연행하며 멋진 장관을 이루어 냈다. 학들이 연꽃을 깨워 낼 때는 음악이 세악편성에서 관악편성으로 바뀌어 연주되며 자연스럽고 멋스러운 전환을 이루어냈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무용수들의 몸짓에는, 생명의 탄생과 무병장수를 비는 우리 조상들의 바람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었다.

 

그리고 여유롭던 학연화대무과 대비되는 무대 ‘역신무’가 펼쳐졌다. 서민의 삶을 괴롭히는 모든 악의적 존재들을 대표하는 역신들이 붉은 의상과 붉은 지전을 들고나와 강렬하게 춤을 추었다. 무대는 붉게 변했고, 그들은 위협적으로 뭉쳐졌다 흩어지는 동작을 취하며 힘을 과시했다. 이때 타악기의 빠른 리듬 패시지와 더불어 대금과 아쟁의 음산한 사운드가 무대의 양옆을 이동하며 음향적으로 특이한 연출을 선보였다.

 

4장, 역신을 쫓는 놀이로 구성된 구나희(驅儺戱)가 시작되었다. 전통 나례의 가장 오래된 역할 중 하나인 방상시가 등장했다. 이들은 귀신을 보는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창과 방패를 들고 역귀를 몰아내는 신으로, 커다란 탈을 쓰고 나와 낙궁 장단에 맞추어 역신을 몰아내듯 춤추었다. 붉은 조명 아래 민속악적 색채가 물씬 나는 연주와 함께 네 명의 방상시는 힘 있는 춤으로 세상을 위협하는 역신을 강하게 물리쳐 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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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송년공연 ‘나례’가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펼쳐졌다. (사진=국립국악원). 2023.12 29.

 

바로 이어 ‘처용무’가 추어졌다. 신라시대부터 축역의 일을 대표하여 온 ‘처용’은 신라 처용설화에 기원을 둔 궁중무용으로, 오방색 의상을 입고 처용탈을 쓴 다섯 명의 무용수가 단순하지만 당당하게 역신을 물리치는 장면을 연출해 냈다. 수제천, 염양춘 반주에 맞추어 호탕한 몸짓으로 걸어 나와 사방을 지켜내는 처용무를 보고 있자니, 방상시무와 마찬가지로 역신, 즉 어려움과 고통에 굴하지 않으려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열두 명의 십이지신 형상을 한 무용수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등장할 때부터 굉장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특히 화려하고 견고한 가면과 무기가 흥미로웠는데, 이 소품은 경주 김유신장군묘의 둘레돌에 조각된 십이지신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눈을 뗄 수 없던 현란하고 힘 있는 몸짓은 도드리로 시작하여 점점 빨라지는 장단에 맞추어 역동적인 무대를 펼쳐냈다. 무용수들은 각자 맡은 동물들의 특징을 몸으로 흉내 내거나 각을 맞추어 군무를 추기도 했다. 장단이 점점 빨라져 휘모리장단이 연주되자, 붉은 역신들이 무대로 나와 십이지신과 공방을 벌이기 시작했다. 타악기의 화려하고 빠른 장단과 함께 서로 얽히고 설키며 푸르고 붉은 역신과 십이지신이 싸우는 모습과 함께, 무대는 절정으로 향해갔다.

 

십이지신과의 일진일퇴 공방전에도 역신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십이지신이 물러간 후 단정한 흰옷을 입은 열두 명의 어린아이들이 복숭아나무 가지를 들고 들어와 땅따먹기 놀이하듯 진자무를 추어 놀이로 역신들을 쫓아냈다. 이때 춤을 추며 창작동요 ‘훠이 훠이 물렀가라’를 불렀는데, 민속적이고 친근한 느낌의 선율은 앞서 역신들과 십이지신의 숨 막히던 무대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새로운 희망이 묵은 귀신을 쫓아내다.’라는 주제와 함께,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순간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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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송년공연 ‘나례’가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펼쳐졌다. (사진=국립국악원). 2023.12 29.

 

 

태평 신년을 기원하는 기태평(期太平)의 첫 무대는 영상을 통한 불꽃놀이였다. 앞서 등장했던 어릿광대들이 나와 관객들의 무사태평을 비는 축원을 하고, 관객들도 미소 지으며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전통 나례에서도 군기시에서 주관하는 불꽃놀이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그 모습을 영상으로 선보인 이 무대는 화려한 불꽃 영상을 수놓으며 잠잠히 그 벅찬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해 주었다. 불꽃놀이 이후 나례의 끝을 알리는 ‘대취타’의 호탕하고 시원한 연주와, ‘향발무’와 ‘아박무’, ‘무고’ 세 정재를 하나로 엮어 구성한 ‘향아무락’의 밝고 여유로운 춤은 태평 신년을 기원하며 평온하게 마무리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신년공연 ‘나례’의 모든 무대는 국립국악원 정악단, 민속악단, 무용단이 함께 어우러져 악가무 일체와 장르의 화합을 이루어 더욱 즐거운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선사했다. 이는 국립국악원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화합임이 분명했다. 각 악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들어 낸 연주와 춤은 전통 예술의 다양한 면모를 직관적이고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깔끔하고 소통 지향적인 연출은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감탄을 자아내던 아름다운 조명, 영상 미디어 아트 또한 공연의 수준을 한층 높여주었다. 귀신이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아 태평한 시간을 맞이하고 싶은 나례처럼, 묵은 액이 아닌 희망찬 신년으로, 우리 모두 더욱 안녕히, 그리고 평온히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