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1 (수)

[Pick리뷰] 나는 누구인가?-1인 창작 판소리극 ‘더 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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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리뷰

[Pick리뷰] 나는 누구인가?-1인 창작 판소리극 ‘더 리어’

김수진 연출, 홍정 음악감독, 이연주 소리
리어왕’을 판소리극으로, 힘차고 섬세
“과연 우리는 리어와 다를까?”

‘리어왕’은 인간, 그리고 인생 전반에 대한 문제의 광범위한 주제를 한 작품 속에 집약시킨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다. 비가 내려 흐릿하던 12월 14일, ‘리어왕’을 판소리극으로 재탄생시킨 ‘더 리어’ 무대를 보기 위해 남산국악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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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인 창작 판소리극 ‘더 리어’는 2012년 10월 국립극장 초연 이후 2018년 국립국악원 금요공감 프로그램을 통해 발표되었던 판소리와 성악의 콜라보 무대 ‘맥베스 부인’에 이어 김수진 연출, 홍정의 음악감독이 함께한 작업으로, 이연주 소리꾼의 힘차고 섬세한 소리로 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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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는 끊임없이 자신의 음악 세계에 도전해 나가는 소리꾼이다. 다수의 작품에 소리꾼 외 작창가로도 활동했으며,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맥베스 부인’의 맥베스 부인 역을 시작으로 이번 ‘더 리어’에서 소리와 작창을 맡았다. 그는 향후 ‘햄릿’, ‘오델로’ 작품도 순차적으로 무대에 올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모두를 판소리 무대로 완성해 ‘4대 비극’을 완판 판소리로 완성한 유일한 소리꾼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혀 이번 공연뿐 아닌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었다.

 

무대 배경에는 이연주 소리꾼의 얼굴이 좌우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이는 한 명의 화자, 한 명의 주인공이 내면의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서는 여정처럼 보였다. 나무 의자와 테이블로 이루어진 아늑한 연극 무대 분위기 속에서 가야금의 오묘하며 신비로운 소리가 무대를 감쌌다. 곧이어 이연주 소리꾼이 나와 순수하고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여기는 어디예요?”라며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무대의 영상에 글자가 띄워지며 상대 목소리 배역이 되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연주 소리꾼은 ‘나’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했고, 상대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어딘가 기묘한 느낌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을 암시하며, "비극의 씨앗 되는 질문이 터져 나온다”라는 대사와 함께, 소리꾼은 이내 왕 리어로 변신하며 극이 시작되었다.

 

리어는 "너희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라는 말을 통해 딸들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크기를 묻는다. 권력과 재물을 위해 과장된 말로 사랑을 고백한 두 딸, 거너릴과 리건의 번지르르한 대답에 리어는 만족하여 재산과 지위를 모두 넘기고, 욕심으로 거짓말할 수는 없다고 대답한 막내딸 코딜리어는 추방하고 만다. 하지만 결국 리어는 욕심으로 거짓말한 두 딸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광야를 떠돌게 된다. 그는 사랑을 갈구하고,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찬, 외로운 사람이었다. 사랑을 받고 싶지만 주는 법은 모르는, 고독하고 어리석으며 외로운 사람. 우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과연 우리의 모습은 리어와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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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그런 리어를 위해 목 놓아 울어준 사람은 리어에게서 쫓겨난 막내딸, 코딜리어였다. 아쟁의 진계면 연주와 더불어 코딜리어가 리어를 위해 ‘아이고 아버지’ 하며 소리하는 부분은 마치 심청가의 한 대목 같았다. ‘더 리어’에서 가장 특출나게 드러났던 것은 외국 원작 소설을 한국적인 정서로 자연스럽게 변환시켜 표현하였다는 건데, 심봉사와 심청이 연상되던 이 장면을 통해 부녀의 정을 한국적이고 민속적인 색채로 감상해 볼 수 있었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가야금과 타악기, 아쟁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사용되었는데, 대체로 격하거나 힘 있는 부분이 많지 않고 노래를 받쳐주며 분위기를 조성하는 정도의 음악적 연출을 사용했다. 특히 반음계 선법이나 오묘한 악기 기법을 사용하여 음악을 효과음처럼 활용하여 진지하면서도 높은 몰입도를 선사했다.

 

아쉬웠던 것은 극의 흐름이 다소 지루하게 지속됐다는 것이다. 원작 리어왕의 줄거리를 압축하여 대사로 풀어내고, 여러 인물의 이름을 이야기하다 보니 다소 산만하게 풀어져 혼란스러웠다. 이 작품은 리어와 세 딸의 이야기로 방향을 좁혀 각색했다고 한다. 워낙 등장인물이나 내용이 많아 1인극으로 풀어 나가기에는 큰 작품이기에 그 방향이 좋은 선택이었을 수 있겠으나, 그로 인해 극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였다. 특히 ‘에드워드’라는 주요 인물의 이름은 계속 등장하는 반면 등장인물로 등장하진 않아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등장인물이나 이야기의 중심을 확실히 잡고 집중도 있게 극을 가져갔더라면 더욱 깔끔한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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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 소리꾼은 같은 소리 안에서 음색이나 표정, 표현 등에 확실한 차이를 두어 인물들의 특징을 잘 잡아냈다. 리어가 죽은 코딜리어를 추억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울부짖는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한 눈빛 연기가 돋보였고, 사람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아쟁의 낮은 연주와 함께 흐느끼다 구음으로 변화시키는 장면은 한국적인 슬픔을 잘 표현하였다. 통성으로 질러내는 울음소리와 속소리의 조화에 서려 있던 한(恨)과 그의 진심 어린 연기에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무대는 리어의 죽음으로 끝나는 듯하다가, 무대가 붉게 변하며 징과 북의 연주와 함께 상여소리를 연상시키는 노래로 전환되었다. ‘죽었네, 죽었어, 가네 가 황천길로’라는 가사로 민속적인 색채를 드러내더니, 곧 이 무대의 메인 넘버로 넘어갔다. 어리석고 달콤한 말에 휘둘린, 죄 많은 미천한 자 리어를 그려낸, 미치고 병들어버린 세상을 노래한 그 곡은 이연주 소리꾼의 힘 있고 절절한 소리가 서정적이고 귀에 맴도는 악기 반주와 함께 어우러져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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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초반부에 영상을 통해 나왔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등장했다. 목소리는 "그래서 당신이 누구냐”고 리어에게 물음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했고, 리어가 죽어 삼도천을 건너기 직전, 또다시 ‘당신은 누구요?’라고 질문한 그에게 목소리는 ‘나는 너의 그림자’라고 답했다. 죽은자는 그림자가 없다. 리어가 살아있었기에 그림자가 있었고, 계속해서 ‘나’를 찾아가는 질문이 있던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나’의 그림자와 더불어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아가고, 결국 삼도천에 이르러 삶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더 리어’는 우리에게 어떻게 삶을 대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 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