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1 (수)

[Pick리뷰] “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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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리뷰

[Pick리뷰] “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요?”

2023년 공연장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 선정작,
‘상자루’, 강렬한 주제 음악과 두 명의 주연 배우 주도
“음악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A2_04704-사진제공 상자루 ©페이톤플래닛.jpg


11월의 초입, 점점 깊어져 가는 가을의 주말, 금나래아트홀에서 ‘고고와 도도’ 공연이 펼쳐졌다. 부조리극의 대명사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2023년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 선정작으로, 국내외에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선보이며 예술단체로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상자루’(상자와 자루)의 신작이다.

 

발레, 음악극, 오페라, 총체극 등을 그만의 환상극으로 재탄생시키는 임선경 연출과 쉬운 언어로 여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조정일 작가가 함께 제작한 이 작품은, ‘새롭게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주제로 우리의 삶과 그 이면의 모든 것을 다시금 조망해 볼 색다른 기회를 전해준다고 하여 더욱 기대를 모았다. 로비에는 ‘고고와 도도는 고도를 기다립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나요?’라는 문구와 함께 각자가 기다리는 무언가를 적을 수 있게끔 포스트잇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저마다 기다리는 것에 대해 소중하게 적어 내려갔고, 과연 고고와 도도가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일지, 궁금증을 안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무대 중앙엔 상자루가 연주할 악기들이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었다. 장구와 아쟁, 거문고와 건반, 기타 등 공연에서 사용될 다양한 악기들이 푸른 조명을 받으며 관객들을 반겼다. 이윽고 시작된 무대.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영어로 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문장은 늘어나고 줄어드는 변화를 거듭하며 하나의 사운드가 되었고, 그 샘플링 음원을 토대로 장구의 장단이, 그리고 아쟁과 거문고의 빠른 패시지가 얹혀 연주되었다. 그리고 상자루의 매력이 특히 도드라지는 강렬한 주제 음악과 함께 두 명의 주연 배우가 등장했다.

 

중절모를 쓰고 정장을 입은 배우들은 각각 무대의 좌측과 우측에 서서 급박하게 뛰는 동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명이 멈추면 한 명이 달리고, 그 한 명이 멈추면 또 다른 한 명이 달렸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달리던 그들은, 음악이 끝나자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고고와 도도였다.

 

★A2_04304-사진제공 상자루 ©페이톤플래닛.jpg

 

고고와 도도는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는 ‘고도’를 함께 기다린다. 이전부터 그들은 쭉 고도를 기다려 왔다.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무얼 하지?” 두 사람은 재치 있고 유쾌하게 극을 끌어나갔다. 배고프다며 식사하자는 고고의 눈을 가리고, 도도는 당근을 주며 ‘당근을 곁들인 파스타’라든지 ‘당근을 곁들인’ 어떤 고급 음식을 먹여주는 양 행동했다. 해학적으로 표현된 장면이지만, 이 장면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착각과 희망을 넘겨볼 수 있었다. 분명 당근임이 분명한데, 당근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 당연히 당근이 아닐 거라 믿고 희망을 품는 것. 그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도’가 바로 당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하는 장면이었고, 이는 앞으로의 극이 어떻게 흘러갈지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 고고와 도도는 고도를 기다렸다.

 

고고와 도도의 연기와 더불어 극과 잘 어울리는 상자루의 음악이 중간중간 장면과 걸맞게 흘러나왔다. 고도를 영원히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추측되는, ‘Forever’라는 대사가 끝나자마자 등장한 음악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빛나는 음악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고,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듯, 밝은 척 연기하며 현실에서 도피하지만, 실상은 불안에 휩싸여 있는 느낌. 밝음의 모순이었다.

 

★A2_03120-사진제공 상자루 ©페이톤플래닛.jpg

 

고고는 하고 싶은 게 많다. 맛있는 걸 먹고 싶고, 좋은 집에 살며 편하게 자고도 싶다. 하지만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려야 하기에 그 모든 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고고는 고도를 왜 기다려야 하는지 계속해서 의심을 품는다. 하지만 도도는 그렇지 않다. 의심을 품는 고고에게 화를 내기도, 그를 달래기도 하며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들은 나무 앞에서 고도를 기다리는데, 이 나무가 고도가 오기로 한 나무 앞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맞을 거라 확신하며, 묵묵히 나무 앞을 함께 지켜낸다.

 

그러다 고고와 도도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도가 오늘이 아닌 내일 온다고 전하러 온 목소리다. 특이했던 건, 이 목소리는 밖에서 들린 것이 아닌, 고고와 도도의 목소리로 전한 말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고도가 올지 오지 않을지 결정하고 믿는 것은 고고와 도도 본인들이었고, 고도는 그들이 만들어 낸 존재이자 희망하는 그 무언가였다.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목소리를 들은 후, 고고와 도도의 마음을 대변하듯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치카토를 활용한 아쟁의 매력적인 선율이 루프스테이션을 통해 쌓이고, 점점 발전됐다. 고고와 도도의 아픔, 슬픔, 간절함과 그 모든 걸 덤덤하게 눌러내는 감정이 음악에 온전히 묻어났다.

 

50년 동안이나 함께 했다는 고고와 도도는, 고도를 기다리다 지쳐 ‘이제 그만 가자’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나무 밑을 떠나지 못한다. 특히 도도는 고도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는 고고에게 ‘고도를 기다려야지.’하고 달래듯 말한다. 극을 보다 보니, 고고와 도도가 실은 같은 인물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는 걸 그만두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심’이고, 도도는 어떻게든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인내’, 그리고 ‘신념’이었던 것이다.

 

의심과 인내와 신념의 모순이 공존하는 한 사람은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상자루의 음악은 혼란스러운 고고와 도도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약음기를 끼고 연주하는 sordino 주법처럼, 거문고는 한 손으로는 현을 막고 한 손으로는 술대로 강하게 장단의 리듬을 연주하며 답답하면서도 강렬한 연주를 선보였다. 아쟁 또한 계면조 등 한국적 어법을 활용하면서도 그 표현에만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대중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고고가 ‘우리가 고도에게 꽁꽁 묶여있는 게 아닐까?’라고 한 장면에서는, 아쟁의 기묘하고 음산하면서도 강한 연주가 다양한 음정을 넘나들고 선이 농현이 되며 고음과 저음이 공존하는 음악을 연출해 냈다. 고도에게 묶여있는 고고와 도도를 그 어떤 것보다 잘 표현한, 그리고 다양하게 회오리치는 생각을 음악을 통해 정리해 준, 극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A2_03059-사진제공 상자루 ©페이톤플래닛.jpg

 

고도를 기다리며 점점 초조해지는 고고와 도도는 괴로움과 노여움이 폭발하여 앞에 서 있던 나무를 부러뜨린다. 수많은 풍선을 들고나와 행복하게 바라보다가 모두 짓밟아 터뜨리고, 소품을 내던지며 화를 분출한다. 이때 미니멀한 전자 사운드의 리프가 반복되고, 장구와 아쟁, 거문고가 저음 악기의 매력을 발산하며 강하게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고고와 도도가 화를 내는 동안, 연주자들은 한 명씩 각자 다른 연주자들의 악기 앞에 ‘거꾸로’ 앉아 ‘거꾸로’ 연주를 시작했다. 반대되고 모순되는 마음, 그리고 뒤집혀 버린 것 같은 세상을 거꾸로 연주하는 연출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이 장면을 보며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2004)’이 떠올랐다. 반복적인 전자 사운드, 그리고 비디오 아트 예술가였던 백남준의 작품처럼 홀리듯 빨려 들어가는 현란한 영상 디자인이 특히 그 영화를 더욱 떠올리게 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소중했던 추억을 붙잡으려 애쓰며 고군분투하던 두 주인공이 그려지며, 극을 통한 영화적 연출이 색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연기와 음악, 조명, 영상 모든 것이 하나로 합치된, 온전한 종합예술 무대였다.

 

그 난리를 치고도, 고고와 도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고도를 기다려야지’라는 말과 함께 다시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통 ‘비나리’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과 함께 무대는 끝이 났다. 그들을 그렇게 기다리게 한 고도가 무엇인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이 작품의 원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 또한, 본인도 고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개개인의 사람이 다르듯, 개개인의 고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무대를 보는 내내 내가 기다리고, 만나길 희망하는 고도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하며 의심했다는 것이다.

   

아마 많은 관객들도 고민하고, 생각했으리라. 놓고 싶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희망, 그리고 신념이라 불리는 무언가. 우리는 모두 우리의 고도를 기다리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얼마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욘 포세(Jon Fosse)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닌, 수수께끼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이 길에서 어떤 고도를 어떻게 마주하며,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A2_08560-사진제공 상자루 ©페이톤플래닛.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