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목)

[Pick리뷰] 사방지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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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리뷰

[Pick리뷰] 사방지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신작’
김수인이 사방지, 유태평양 화쟁선비 역
“대놓고 주제를 강요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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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쌀한 가을의 공기가 몸을 휘감기 시작한 10월, 과천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내 이름은 사방지’ 공연이 펼쳐졌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중 최고의 문제작으로 꼽혀온 창극 ‘내 이름은 사방지’는 ‘양성구유 어지자지’라 모멸 받던 인간, 사내인 동시에 계집이었던 조선시대 실존 인물 사방지의 파란만장하고 처절했던 비극적 인생을 풀어낸 작품으로,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산실 '올해의 신작'을 시작으로 2022∼2023년 방방곡곡 문화 공감 민간예술단체 우수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탄탄한 현장 연출 경력과 이론으로 한국 국악계를 이끌 재목으로 기대를 받았던 故주호종 연출가의 연출작으로, 이번 공연에서는 김영봉 연출자가 협력, 연출을 맡아 진행했다. 

 

 이 작품은 특히 국악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소리꾼들이 한데 모여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 김수인이 사방지 역을, 유태평양이 화쟁선비 역을, 박애리가 남성적 아우라를 내뿜는 홍백가 역을, 전영랑이 관능적인 기생 매란 역을 맡아 각각의 에너지를 발산하였다. 또 소리꾼 한승석이 음악감독을 맡아 전체적인 음악과 작창을 담당했다. 그는 텍스트의 속뜻을 담되 말맛을 살리면서 새롭고 신선한 조합으로 작창 작업을 해 나가는 소리꾼이다. 평소 그의 소리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번 무대의 음악적인 부분에 더욱 집중하며 감상해 볼 수 있었다.

 

 푸르스름한 무대의 중앙에는 붉은 꽃 소품과 네모난 의자 세 개가, 우측엔 악사들의 국악기가 놓여있었다. 악사들이 먼저 나와 연주를 시작했다. 생황과 거문고의 높고 낮은 몽환적 조화 속에 단소의 바람 소리가 곁들여져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야기는 네 명의 소리꾼이 한 명씩 등장하여 사방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개하는 대사로 시작되었다. 배경 음악으로 생황과 거문고가 사용된 조합이 특히 좋았는데, 중후하고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거문고와 고음의 날카롭고 아름다운 생황의 조화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물 사방지를 잘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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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는 ‘내 이름은 사방지. 나 사방지는 거기에 있었다고 이른다.’는 사방지의 대사로 열렸다. ‘있었다고 이른다.’라는 표현을 통해 사방지는 본인을 화자 겸 서술의 대상으로 삼다가도, 다른 소리꾼이 사방지와 이야기의 배경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사방지를 연기하며 표현하였다. 이렇게 사방지와 소리꾼들은 주인공과 화자를 넘나들며 함께 무대를 꾸려나갔다.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시점의 변화는 빠른 전개를 끌어냈고, 강한 연극적 요소를 드러냈다. 이 공연의 또 다른 특징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일 수 있는 대사가 지속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민망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쓴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사방지를 향한 세상의 차별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위해서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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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사방지가 들었던 말, 그가 겪는 조롱, 비난의 시선을 필터링 없이 들으며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편함과 동시에 그가 겪는 마음을 더 들여다보게 되고, 나는 과연 사방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사방지가 겪는 차별과 이 시대에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이 짝을 이루며 언짢지만 꼭 필요한 무언가의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불편한 대사들은, 어쩌면 이 공연의 주제를 생각할 때 필수 불가결한 연출이었다.

 

 무대에는 소품이 많이 차 있지 않아 조금은 비어 보이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막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동양적인 배경은 선과 글씨로 이루어져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이 작품의 주제와 잘 어울렸다. 특히 사방지가 본인을 투영해 내는 코끼리 고상이의 모습을 그려낸 러프한 선의 이미지가 참 아름다웠다. 사방지는 ‘기이한 물건/정상적이 아닌 다른 물질’을 뜻하는 이물(異物) 짐승이라 불린 병든 코끼리 고상이에게 본인을 투영한다. 사방지는 코끼리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코끼리를 아껴주다가도 채찍으로 힘껏 때리기도 한다. 이는 본인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사방지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과연 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방지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사방지처럼 몸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물론이요,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배척하고 힐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인이 아닌 단체, 다수의 힘, 그리고 권력이 차별을 조장한다. 사방지가 억울하게 잡혀 들어가 무릎 꿇고 판결받는 장면에서 사방지는 파란 조명으로, 세 명의 판결자는 붉은 조명으로 연출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사가 흘러나왔다. ‘이들은 사방지에게 죄를 묻고, 깔깔 웃었다 이른다.’ 사방지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오로지 보이는 것과 다수의 판단을 통해 사방지를 죄인으로 몰아가며, 소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웃어넘겼던 자들. 이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쉽게 변화하지 못하는 참담한 굴레를 반복하고 있다.

 

 또 이 작품에서는 신념의 무서움을 경고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오랜 기간 차별을 겪어온 홍백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왜 침을 뱉고 욕하는지 알아?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어야 본인들이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야.” 그리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종교에게서 버림받은 사방지에게 종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린 신념을 버릴 수 없어요.” 사방지를 차별하고 비난한 다수에게는 그들만의 강한 신념이 존재한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이전에, 깨뜨릴 수 없는 것. 가장 단단한 무언가다. 그것이 바로 차별이 횡행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신념’이다. 무대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떤 신념을 가져야 할까?

 

 아쉬웠던 점은, 모호한 대사 설정과 늘어지던 극의 진행, 그리고 음악이다. 사방지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연출은 돋보였으나, 대놓고 주제를 강요하는 듯한 대사나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몇몇 감정 과잉 장면은 아쉬웠다. 또 사방지가 겪은 일들을 늘어놓으며 흘러가는 스토리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지루함을 자아내 자연스러운 기승전결을 담아내지 못했다. 음악은 대체로 자연스럽게 흘러갔지만, 특별할 것 없는 소리와 반주가 반복되었다. 소리꾼들이 대사를 하다가 판소리를 하는 부분은 90% 이상이 전통 계면조로 진행됐다.

 

악기 반주는 기존의 계면조 선법과 시김새를 활용한 특이점 없는 반주였고, 소리는 꺾고, 흘러내리고, 질러내는 세 가지의 창법만을 반복하며 그 안에 가사를 얹어낼 뿐이었다. 혹여 무대가 전환되며 다른 뉘앙스의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무대가 끝날 때까지 거의 계면조로 이루어진 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계면조는 단조로 이루어져 있고, 우는 듯한 느낌이 강하여 보통 슬픈 장면에 많이 활용되는데, 이 공연에서도 그러한 효과가 두드러지게 사용되어 웬만한 장면이 전부 슬프고 격한 감정으로만 가득 차 음악으로 감정을 강요받는 느낌을 받아 아쉬웠다. 또 거의 모든 소리와 연주가 비슷한 결로만 반복되어 무대의 흐름이 깨지고 지루함이 더해졌다. 더욱 다양한 창법, 음악적 효과와 뻔하지 않은 장르를 활용했다면 더 다채로운 무대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불편하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느낀 감정이다. 자극적인 단어의 사용, 부담스러운 대사와 피하고 싶은 사회의 현실이 계속해서 마음을 두드려 착잡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됐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 사회의 차별을, 다수의 견고하고 단단한 신념을 떠올리며 내가 지금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떠올렸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한 건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여 더 이상의 사방지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게 하는 것.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 사방지는 무대 끝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이름은 사방지. 나 사방지는,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 바로 거기에 사방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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