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목)

[Pick리뷰] 노든이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온 이유: 판소리 ‘긴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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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리뷰

[Pick리뷰] 노든이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온 이유: 판소리 ‘긴긴밤’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수상작 '판소리화' 작품
국립정동극장의 2023 시즌 '창작ing' 사업
이상홍 '흰바위코뿔소' 노든 역 연기
“예측 불가능한 대자연의 오묘한 이미지”

[국립정동극장_세실] 판소리 긴긴밤_메인포스터.jpg

 

국립정동극장의 2023 시즌 '창작ing' 사업의 여섯 번째 작품, 판소리 '긴긴밤'이 7월 27일 첫 무대를 올렸다. 


'긴긴밤'은 작가 루리의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동화 ‘긴긴밤’을 새로이 창작한 작품으로, 스스로가 자신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갈 용기를 얻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에 펼쳐지는 드넓은 바다와 긴긴밤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원작 동화는 출간 후 2년 동안 약 30만 부 이상 팔리는 등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창작 판소리 ‘긴긴밤’은 전통 타악기를 기반으로 다채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고수 이향하가 동화의 내용과 더불어 음악을 얹고 새로이 만들어 낸 작품으로, '2022 수림뉴웨이브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국립정동극장_세실] 창작ing 판소리 긴긴밤_공연사진 (2).jpg

 

일반적으로 소리꾼의 시선에서 출발하는 판소리 창작의 방식과 달리, 판소리 ‘긴긴밤’은 숱한 요소들을 모두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형식으로도 충분히 ‘판소리'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그의 경험을 중심에 두고, 고수의 시선에서 쌓아 올린 작품이다. 


‘긴긴밤’에서 주연을 맡은 이승희는 ‘입과손스튜디오’에서 이향하와 함께 꾸준히 함께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소리꾼이다. ‘입과손스튜디오’에서는 소리꾼과 고수, 기획자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결정하고,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모두가 중심이 되어 무대를 꾸려서일까, 그들의 무대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상적인 구간이 곳곳에 드러나고, 풍성하고 색다른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이번 무대 또한 ‘입과손스튜디오’에서 오래도록 호흡을 맞춰온 그들이 함께 무대를 꾸렸기에 더욱 기대되는 공연이었다.


덕수궁 뒤편에 자리한 작은 공연장, 국립정동극장 ‘세실’에는 첫 공연을 관람하러 온 관객들로 북적였다. 동화 ‘긴긴밤’의 내용을 어떻게 연극 형식으로 풀어냈을지 궁금하다는 관객들의 기대에 가득 찬 소소한 대화를 주워듣다 보니, 덩달아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무대의 좌측에는 드럼과 각종 악기가, 우측에는 소리북과 타악기, 사운드를 만들어 내기 위한 맥북과 믹서(mixer)가 함께 놓여있었다. 

 

[국립정동극장_세실] 창작ing 판소리 긴긴밤_공연사진 (3).jpg

 

이 무대는 소리꾼 이승희와 고수 이향하를 비롯하여 이유준의 연주, 배우 이상홍과 최영열의 다인 1역 연기로 꾸려졌으며, 이날은 배우 이상홍의 연기로 감상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지만, 네 명이 보여주는 힘은 대단했다. 배우 이상홍은 흰바위코뿔소 로든 역을 맡아 연기했고, 소리꾼 이승희는 노든이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만났던 할머니 코끼리, 치쿠, 앙가부와 어린 펭귄 역을 맡는 동시에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이야기꾼, 즉 발화자의 역할도 함께 맡았다. 이는 ‘입과손스튜디오’의 공연에서도 자주 볼 수 있던 패턴인데, 소리꾼과 배우, 이야기꾼을 번갈아 가며 자연스럽게 극을 끌어나가 매끄러운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장면마다 가장 효과적이고 특색있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고수가 만드는 판소리’라는 중심 테마로 만들어졌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이상숙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고수의 시선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텍스트와 삽화로 구성된 원작의 구성을 그대로 대사와 이미지(음악과 움직임)로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고, 일반적인 판소리 작품에서라면 소리꾼의 시선으로 소리꾼이 아니리와 소리로 만들어 갈 호흡을 이야기 속 역할(배우)과 소리꾼, 고수가 두루 나눠 가지게 되었다고 전했다. 고수와 연주자가 음악으로 장면을 설명하기도 하고, 소리꾼이 배우의 고수로 작용하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며 장면마다의 소리꾼과 고수가 달라지는 연출을 선보인 것이다. 

 

[국립정동극장_세실] 창작ing 판소리 긴긴밤_공연사진 (4).jpg

 

‘고수’는 그저 소리를 반주하는 반주자 역할만 있는 게 아니다. 판소리에서 고수는 장단의 한배를 조절해서 소리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을 보완하기도 하고, 추임새로 창자와 청중 사이에서 소리판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도 하며, 창자의 상대 역할도 하며 하나의 음악을 함께 만들어 나간다. 이 공연에서 고수가 보는 무대의 연출은 소리꾼이 배우의 연기 흐름을 따라 소리를 하거나 아니리처럼 상황 설명을 해주는 등 고수처럼 중심을 잡아준 것 외에도, 음악을 통한 무대의 전환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났다. 이향하는 고수로서 소리를 반주하는 ‘소리북’을 연주하는 것 외에 극의 분위기를 결정해 내는 다양한 소리와 음악을 들려주며 극의 분위기를 끌어 나갔다.


원작이 그림책이어서일까, 무대를 보는 내내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선명한 색감과 그림자를 활용한 조명 연출과 더불어 대중성과 다양성, 이색적인 사운드가 무대를 풍성하게 채워 나갔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신디 사운드가 기반이 되어 분위기를 잡아주었고, 그 위에 몽환적인 벨(bell) 계열의 소리가 자주 등장했다. 축축하고 몽롱한 사운드는 ‘자연’을 자연스럽게 드러냈고, 그에 더해 이국적인 음색을 가진 리드나 한국 전통 악기 소리북이 조화롭게 연주되는 구간은 독특한 느낌을 물씬 자아냈다. 

 

[국립정동극장_세실] 창작ing 판소리 긴긴밤_공연사진 (5).jpg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흰바위코뿔소와 어린 펭귄이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 넓게 펼쳐진 초원과 호수, 그리고 바다가 그려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상되지 않는 선율과 박의 진행이었다. 드럼이나 북이 연주하는 리듬의 첫 박에 가사를 맞추어 노래하는 일반적인 형식 대신,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첫 박을 틀어 연주하고 노래한 구간은 오히려 더욱 무대에 집중하게 해주었다. 음악은 대부분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코드와 베이스 진행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위에 얹어진 선율은 기대를 벗어나는 음으로 튀어 나가기도 했는데, 그러한 진행은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대자연의 신비롭고 오묘한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음원으로도 발매된 ‘리듬 인 뉴웨이브(Rhythm in Newwave)’는 특히 그 느낌을 잘 드러냈다. 사랑스러운 벨 사운드와 양금이 고음으로 조화롭고 아름답게 연주되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서로 부딪히는 음정을 연주하며 어딘가 어긋난 듯한 느낌을 연출해 냈다. 조화로움 속 부조화의 매력으로 가득한 이 곡은, 흰바위코뿔소와 코끼리, 흰바위코뿔소와 펭귄처럼 함께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이야기의 주제와 상응한다.

 

[국립정동극장_세실] 창작ing 판소리 긴긴밤_공연사진 (1).jpg

 

이승희는 연기를 하다가도 발화자가 되어 아니리처럼 극을 진행하고, 소리꾼이 되어 작창된 소리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작창해내는 소리는 기존에 듣던 창작판소리와는 어딘가 다르다고 늘 생각했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 대중성과 전통이 조화롭게 녹여져 있기에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현재 작창 되어지는 창작 판소리는 대부분 새로운 가사에도 ‘조’와 판소리의 어법이 주가 된 소리가 많다. 계면조를 예로 들자면, 전통 판소리에 자주 등장하는 소리의 길을 그대로 차용해 와 떠는 구간과 꺾는 구간을 동일시한 채로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식이다. 하지만 이승희의 소리는 떠는 음과 꺾는 음 등 판소리의 어법은 고수한 채, ‘선율’과 ‘가사’에 더욱 집중한다. 

 

선율은 ‘미-라-도시’의 계면조를 구성하는 음뿐 아닌,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서양 음계의 음들을 자유롭게 사용하되 판소리의 색채를 짙게 녹여낸다. 그렇게 완성되는 소리는 한국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느낌을 동시에 전해준다.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모호한 음악이 될 수도 있는데, 이승희의 소리는 조화롭게 그 모든 걸 잘 녹여내어 극이 더욱 다채롭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국립정동극장_세실] 판소리 긴긴밤_공연사진_고수 이향하.jpg

 

이승희에 따르면,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 곁을 머물다 떠나간 동물들 저마다의 사연과 캐릭터를 생각하며 이 공연을 위한 작창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극의 특성을 고려하여 노든의 장면을 좀 더 대중적으로, 그 외 캐릭터들은 역할에 따라 판소리와 정가, 경기와 서도 민요의 특징을 살려 그렸다고 하는데,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펭귄 치쿠가 노래하는 구간에는 경서도의 민요를 활용한 떠는 음과 선율진행이 자연스럽게 묻어나 특색있는 한국적이면서도 색다른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노든은 태어날 때부터 코뿔소가 아닌 코끼리 무리에서 자라나고, 이후 그들 곁을 떠나 코뿔소 무리에서 가정을 이루지만 인간에 의해 가족을 잃고, 동물원에서 만난 친구도 인간 손에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 후에 만난 소중한 친구 펭귄 차코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노든의 마음은 어땠을까. 계속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는 노든은 아마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슬픔에 그는 모든걸 포기하고 싶었을거다. 하지만 노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결국 어린 펭귄을 바다로 보내는 길잡이의 역할을 해낸 후 그의 바다에 잠잠히 머물게 된다. 

 

[국립정동극장_세실] 판소리 긴긴밤_공연사진_출연진.jpg

 

만일 노든이 코끼리 무리를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동물원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펭귄과 함께 바다로 떠나지 않았다면 어린 펭귄은 바다에 갈 수 있었을까? 그저 안정적으로 머물고 싶은 세계에서 발을 뗀 덕분에 노든은 슬픔과 좌절을 겪는 동시에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고 누군가에게 큰 바다가 되어주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수많은 마음과 물음표를 안겨준 이 작품은, 몽환적인 음악과 더불어 진심 어린 배우의 연기와 전통의 멋이 가미된 소리가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많은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호수에서 처음 수영을 배우던 어린 펭귄은, 노든의 도움으로 수영을 연습하다가 용기를 내어 홀로 물속으로 들어간다. 노든과 함께 수영할 때는 안정적인 초록빛의 조명과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어린 펭귄이 처음 혼자 물에 들어가자, 무대는 어둡게 전환되고 두려운 분위기가 엄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과 따뜻한 배경이 어린 펭귄의 헤엄을 응원해 준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게 아닐까. 첫발을 떼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다. 하지만, 미약한 우리 한 명 한 명의 가치는 너무나도 강인한 힘을 갖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큰 바다가 되어줄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