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이무성 화백의 춤새(60)장금도 명무의 민살풀이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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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0)
장금도 명무의 민살풀이춤

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 민살풀이춤 보유자

  • 특집부
  • 등록 2023.07.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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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도.jpg

 

민살풀이춤

"살풀이춤이 치밀하게 새겨 넣은 청자라면 민살풀이춤은 무심한 맘으로 담담하게 꺼낸 백자였다. 잘 짜인 살풀이춤이 조각보의 화려함이라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은 채색하지 않은 결 고운 한 필 비단이었다. 장금도의 고립과 고독에는 송구하지만 춤에는 축복이었다. 단지 수건을 들지 않음이 아닌 한없이 흐르며 구사하는 즉흥이 그랬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새롭게 다시 맞는 위대한 완성이다." - 진옥섭 저서 '노름마치'에서


장금도의 민살풀이를 담백한 맛이 일품인 전통 백김치에 비유하기도 했다. 민살풀이춤 전승자 장금도는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 출신으로 '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라고 회자된다.


이기권, 김준섭, 민옥행 등에게 판소리 다섯 마당을 김백룡에게 검무, 화관무, 포구락 등을 사사했다. 최창윤에게 '승무'를 '기러기춤' 일인자 도금선에게 '살풀이춤'과 '부채춤'을 전수받는다. 
장금도는 권번 졸업을 앞둔 열다섯 나이에 군산극장에서 초연(初演)을 하게 된다. 그해 열린 '수재민 돕기 예기 연주회'에서 살풀이와 승무를 선보인 것. 이후 군산의 한량들 사이에 '춤은 장금도다!'는 말이 회자되고 시내 요릿집(요정) 앞에는 '장금도' 명패가 내걸리기 시작한다.
장금도는 예기 자젹시험에서 소리와 춤 모두 수석으로 졸업, 가무가 가장 뛰어난 예기로 인정받는다. 검무, 승무는 물론 소리에 능한 장금도는 열여섯에 명월관, 동양관(근화각), 만수장, 동해루, 쌍성루 등으로 놀음을 나가기 시작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하려고 열일곱 살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1945년 상경한다.  금정, 명월관 등으로 놀음을 나가던 그는 전쟁(1950년)이 터지자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꼭 싸쥐고 군산으로 내려온다. '큰 행사에는 임방울의 쑥대머리와 장금도의 민살풀이가 있어야 어울린다'고 한마디씩 하였다. '신이 내린 춤꾼'이란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철없는 아들이 춤추는 것을 반대하자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정범태 사진작가의 집요한 설득으로 80년대초부터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게 된다.  

 

장금도의 춤사위는 즉흥적인 춤이지만, 살풀이장단, 자진모리장단, 동살풀이장단, 살풀이장단으로 단계를 거치는 기승전결의 흐름을 보이는 등 무대공연으로 체계화 되어 있다.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의 특성은 정적이면서 끊어지지 않는 흐름의 춤사위와 장단과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는 즉흥성과 가변성이다. 절제미와 여성미, 여백미와 담백미라는 손색없는 미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장금도((張錦桃1928-2019) 약력

1928년 군산 소화동 출생 (세습무 가계)

1940년 12세 군산 소화권번 입학

1943년 15세 군산극장 초연

1942년  결혼(충청도 부여)

1983년 '한국의 명무'(국립극장) 공연

1990년  '한국인의 넋이 담긴 민족의 춤' 명인전

1998년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명무 초청공연

2002년 내일을 여는 춤-우리 춤 뿌리 찾기

2004년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 

2005년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 특별출연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초청 '전무후무'

2006년 '전무후무' 프랑스 초청공연

2011년 '춤'-이 땅의 숨은 춤-

 

2013년  작별의 춤 해어화 

2016년  군산향토문화유산 제20호 민살풀이춤 선정

2016년 '마지막 예기 장금도의 춤 재발견'사진전 (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