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목)

[김연갑의 애국가] (6)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내용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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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6)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내용 불신

김연갑(전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분과위원장)

  • 특집부
  • 등록 2023.05.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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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소설 ‘도산 안창호’는 1947년 초판 1만 부를 2년 만에 판매하고, 재판을 발행했다. 해방공간에서의 베스트셀러임이 분명하다. 이런 만큼 이 책에서 언급된 애국가 관련 기록들은 작사자를 안창호로 오해하게 한 배경이다. 어디에서도 윤치호를 언급하지는 않고, 설이 있다는 것조차 언급하지 않고 오직 안창호 작사만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회에서 살핀 이 책의 ‘상해시대’편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라는 대목은 이후 안창호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나, 부정하는 쪽에서나 모두 편의적으로 인용, 해석하게 하였다. 그 결과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하기까지 혼란을 야기한 원인이었다. 1955년 4월 ‘서울신문’의 안창호 작사자 제기 기사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번 제6회에서는 상해 임시정부 초기, 이광수가 근무했던 시기에 나왔다는 ‘안창호 작사설’을 창작, 유포시킨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명의 ‘도산 안창호’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 보기로 한다.

 

김구선생이 위원장을 맡은 한구독립당당의해석 첫 면에 수록된 애국가

 

해방 후 이광수는 ‘백범일지’를 자청해서 일기가성(一氣呵成), 단숨에 매끄럽게 번역해 냈다. 이로써 선풍을 일으키자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가 ‘도산 안창호’를 써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백범일지’의 성가를 보고 이광수를 저자로 택한 것이다.


그런데 초판 1만 부는 물론 3판까지도 저자 이광수가 아닌 ‘편집 겸 발행인’이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 박현환이었다. 이어서 ‘흥사단’ 명의로, 그리고 30여 년 후에야 이광수를 저자로 표기하였다. 이에 대한 이유는 이미 필자가 통신사 ‘뉴시스’ 2015년 12월 31일 자 ‘윤치호 애국가 작사 확정, 조직적 방해세력 누’에서 밝힌 바 있다. 먼저 그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저자 이광수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원고에 기념사업회가 많은 부분 가필을 한 것을 보고 문제가 있어 빼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념사업회가 의도적으로 가필을 하기 위해 아예 이름을 빼겠다고 했을 것이다. 또 아니면 이광수의 친일행적이 부담되어 요청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이광수가 쓴 것이 아니거나 쓴 것을 삭제한 부분을 살펴야 한다. 필자가 거칠게나마 확인한 결과로는 끼워 넣은 곳이 5곳 정도이고, 삭제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한 곳이 확인되었다. 우선 눈에 띄는 부분이 초판에서 3판까지 있던 책 머리말인 ‘서언’이다. 이 난에는 애국가가 안창호 작이라고 한 부분이 있다.


 "선생은 또 많은 노래를 지어 청년학도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그 가사 착상과 표현이 폐부를 찌르는 것은 선생의 인격의 그리함일 것이다. 저 유명한 거국가를 위시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도 선생의 작이요 그밖에 흥사단 입단가, 점진학교가, 모란봉가 등도 선생 작 중의 일부다.”


이 문장이 들어있는 ‘서언’은 제4판 발행부터 전체가 삭제되었다. 이렇게 삭제를 했다는 것은 원래 이광수의 초고가 아니고 편집 과정에서 첨부한 것임을 알게 한다. 이렇게 출판 상황을 바꿔 발행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일부인 안창호 설 역시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다음의 경우는 안창호 작사설을 억지로 끼워 넣은 예이다. 탈 맥락적이라는 데서 이광수의 초고가 아닌 가필로 보는 대목이다.


"흥사단가는 이러하다. 조상나라 빛 내라고 충의 남녀 일어나서 무실역행 깃발 밑에 늠름하게 모여드네 부모국아 걱정 마라 무실역행 정신으로 굳게 뭉친 흥사단이 네 영광을 빛내리라(일설에 따르면 애국가는 도산이 처음 지은 것이 아니요 본래 부르던 ‘聖子神孫 五百年은’이라는 봉건적인 가사를 도산이 고치었다고 한다)”


살폈듯이 특별히 괄호를 하여 안창호가 ‘무궁화가’를 개작한 것이 애국가라는 대목을 넣었다. 앞의 문장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바로 가필로 보는 부분이다. 이렇게 탈 맥락적인 경우는 또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은 다음의 세 단락이다. 목차에서 ‘상해시대’라고 한 제목의 내용 일부이다. 청사에서의 근무를 시작하는 상황을 그린 부분이다.


"정청(政廳)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애국가 끝 절에,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하는 것은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정청을 정제(整齊)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운동 거두(巨頭)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일이었다.”


첫 단락과 세 번째 단락을 연결하면 자연스러운 ‘정청’의 사무개시 사항이 된다. 그런데 중간에 애국가 작사자 문제를 제기한 것은 부적절하고 탈맥락적이다. 첫 단락에서 애국가를 부른 것은 그 자체를 거론한 것이 아니라 사무 개시의 한 의례로서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이에 이어 애국가 작사 여부를 묻고 답하는 대목을 넣은 것은 매우 엉뚱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단락은 애국가와 안창호의 관계를 곳곳에 끼워 넣기를 한 실례를 보여준 것이다.

 

1978년 이광수저 도산 안창호

 

다음은 초고에 있던 내용을 삭제했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목차에는 있는데 정작 내용에는 관련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목차와 내용의 제목에는 "미주활동 시대(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에 관한 내용은 빠졌다. 이것은 분명히 이광수가 태극기와 애국가의 상황을 서술했을 것인데, 애국가 작사한 이가 윤치호이고 애국가를 미주지역에 확산, 보급한 이가 안창호라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광수는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알고 있었기에 원고에서 사실대로 기술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기념사업회에서는 편집 과정에서 이를 삭제하였을 것으로 보게 된다.


이제 마지막 문제를 풀기로 한다. 이광수가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이미 알고 있었는가의 여부이다. 이를 입증해야 이 책의 윤치호 작사 기술 부분을 삭제하고 안창호 작사 언급 부분을 끼워 넣은 것으로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9년 2월 28일 KBS 일요스페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 최서면(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이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서 확인한 자료가 공개되었다. 1910년 일본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실태를 조사한 ‘요시찰 외국인 거동관계 잡록’(명치43년 일본 외무성 정무국 접수)의 내용이다.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 國歌를 폐하고 윤치호 저작(著作)의 國歌를 대신하자는 것에 이의가 없는 듯하다”


1910년에 일본 내 조선인 유학생들이 경술국치로 에케르트(F․ Eckert)가 1902년 작곡한 ‘대한제국애국가’를 폐하고, 윤치호 작사의 국가(애국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보고 내용이다. 이 시기 이광수는 1905년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세이(大成) 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학원에 편입하여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5년에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1919년에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갔다.


한편 윤치호는 1906년 5월 대한제국 정부 일본유학생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어 유학생들과 인연이 깊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유학생 대표 격인 이광수는 윤치호를 알게 되었고, 애국가 상황까지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상해에 도착한 이광수는 신한청년단과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각종 의식을 함께 했고, 국제사회에 보내는 독립운동 상황을 정리한 ‘한일관계사료집’을 작성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당연히 애국가가 ‘윤치호 작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정리하면 이렇다. ‘도산 안창호’의 실재 저자 이광수는 일본 유학생 시절과 상해 임정 초기 상황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알았다. 이런 배경에서 지은 ‘도산 안창호’는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는 내용을 기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곳의 안창호 작사 기술 부분은 편집과정에서 원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가필이 된 결과이다. 특히 ‘상해시대편’에 기술된 답하지 않았다는 대목도 전후 맥락상 탈맥락적이어서 가필할 것으로 보게 된다. 이에 따라 결론은 이렇다.


"안창호 작사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1947년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와 흥사단이 가필하여 유포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창호작사설의 증거력은 적어도 1947년 ‘도산 안창호’ 발행 이전에 산출된 자료에 한정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