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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72)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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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72)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4

이만유의 문경사랑 72

  • 특집부
  • 등록 2023.05.27 07:30
  • 조회수 3,492

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오랜 세월 우리의 삶과 함께했던 장승은 지명이나 속담, 수수께끼, 전설, 설화는 물론이고, 문화재, 문학작품 속에서도 남아 있다. 장승과 관련된 지명으로 장승배기, 장승거리, 장승방, 장승리, 장생포, 미륵리, 법수리, 법수배기, 벅수재 같은 지명은 예전에 장승이 서 있던 곳이기에 붙은 이름이고 우리 지역에도 옛 영남대로변에 있는 공평동 장승백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장승 관련 지명은 전국에 771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승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그날그날 날삯을 받고 일을 할 때는 시간만 보내려고 장승처럼 서 있고 도급(돗내기)에는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로날 일에 장승이고 도급 일에는 귀신이다.’, 주되는 목적과는 상관없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가짐을 비꼬아서 하는 말로 벅수 이빨을 세면 벅수가 된다.’, 억지로 자신의 어떤 이익이나 이권을 위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면 장승 입에다 밀가루 발라 놓고 국숫값 내라고 한다.’거나 장승 얼굴에다 분가루 발라 놓고 분 값 내라고 한다.’하고, 멋모르고 함부로 나대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개가 장승 무서운 줄 알면 오줌 눌까?’, 키가 멋없이 큰 사람을 두고 구 척 장승 같다.’라고 놀리는 말도 있다. 또 어떤 일을 하다가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않고 대책도 없이 그만두면 벅수같이 자빠진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을 벅수같이 멍하니 서 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벅수를 넘든가 뱅뱅이를 돌든가 무슨 상관이냐?’ 하는 등 많은 속담이 있다. 그리고 수수께끼로는 밤낮으로 눈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입이 크되 말 못 하는 것이 무엇이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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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에 관한 설화로는 장승을 치죄(治罪)하여 도둑을 잡은 명관치장승설화(名官治長丞說話)’가 있고,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고, 문화재로는 통도사의 국장생석표가 보물 제74호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장승은 충무시 문화동 벅수(7)’, ‘통영 삼덕리 벅수(9)’, ‘나주 불회사 석장승(11)’, ‘남원 실상사 석장승(15)’, ‘부안 서문안 장승(18)’동문안 장승(19)’, ‘남원 서천리 석장승(20)’, ‘순창 충신리 장승(101)’, ‘순창 남계리 장승(102)’ 등이 있다. 1970년까지 조사된 장승 유적지로는 200여 개소 있었다.

 

장승은 또 힘없는 민초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무엇이든 이루어 주는 해결사였다.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장승에게 빌면 아이를 잉태시켜 주고, 반대로 어쩌다 부정한 아이를 가졌을 때는 장승의 코나 눈을 갉아서 감초와 섞어 삶아 먹으면 낙태한다는 비방약이 되는 양면성을 가지기도 하며 풍년, 풍어, 건강 등 소원성취를 해 주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경남 함양군 마천을 지리적 배경으로 한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다. 일명 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하는데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이다. 함양군청 자료에 의하면,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얼굴은 춘이월 반쯤 핀 복숭아꽃이었다. 옥빈(玉鬢)에 보조개, 초생(初生)에 지는 달빛이 눈썹 사이에 어리었다. 앵두처럼 고운 입술은 당채(唐彩) 주홍필로 찍은 듯하고 버드나무같이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하늘하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것이 서시(西施)와 포사(褒姒)라도 따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사주에 청상살이 겹겹이 쌓인 까닭에 상부(喪夫)를 한 것이 징글징글하게 많아 팔자가 센 여자였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은 첫날밤 잠자리에서 급상한(急傷寒)에 죽었고 열여섯 살에 얻은 서방은 당창병(매독)에 죽었다. 열일곱과 열여덟에 얻은 남편은 용천병과 벼락으로 각각 죽었다. 열아홉, 스무 살에 얻은 서방도 급살로 죽었다. 뿐만 아니었다. 간부, 애부, 새흘유기, 입 한번 맞춘 놈, 젖 한번 만진 놈, 눈 흘레한 놈, 손 만져본 놈, 그리고 심지어는 옹녀의 치마귀 상처자락 얼른 대한 놈까지 모두 죽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명씩 남자들이 옹녀 때문에 죽자,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다 쓸어버리고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집을 지으니 황해도, 평안도 양 도민이 공론하기를 이년을 그냥 두었다간 남자 놈은 한 명도 없는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아내자고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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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양 도민이 합세하여 그녀를 서도에서 쫓아내었다. 옹녀는 남쪽으로 가다가 청석관에서 홀아비 변강쇠와 만났다. 그들은 서로 만나 말 몇 마디에 뜻이 맞아 바위 위에 올라가서 대사(大事)를 치렀는데 대낮에 연놈이 벌거벗고 익숙한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양골(陽骨)인 강쇠놈이 옹녀의 두 다리를 번쩍 들고 옥문관을 들여다보며 노래를 읊었다.

 

"이상하게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빨은 없구나. 소나기를 맞았는지 언덕지게 패이었다. 콩밭 농사지었는데 듬북꽃이 비치었구나. 도끼날을 맞았는지 금 바르게 터져 있네, 생수처 온답(溫畓)인지 물이 항상 고이었다. 무슨 말을 할려고 옴질옴질하는 건지 만경창파 조개인지 혀를 빼어 물었으며 곶감을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 물렸고 만첩산중 으름인지 스스로 잘도 벌어졌네 연계탕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이 비치었고 파명당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절로 난다. 제 무엇이 즐거운지 반쯤 웃고 있구나. 곶감 있고 연계 있고 조개 있어 제사상은 걱정 없다

 

옹녀가 반소(半笑)하고 갚음을 하느라고 변강쇠의 기물을 어루만지며 한 가닥 곡조를 빼어 읊었다.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전배사령(前培伺令) 서렸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군노(軍奴)런가 복떠기를 붉게 쓰고 냇물가의 물방인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는지 맑은 코가 웬일인가, 성정(性情)도 혹독하여 화가 나면 눈물 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괴였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장이궁이 그저 있다. 뒷 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구나. 소년인사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있다. 물방아 절구대며 쇠고삐걸랑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두 남녀는 서로 뜻이 맞아 부부로 인연을 맺고 각처를 떠돌며 옹녀는 애를 써서 들병장수 막장사를 할 때 변강쇠는 낫부림 넉장기, 갑사꼬리 여사하기, 미골 지패 퇴기질, 호흥호백 쌍육치기, 장군 멍군 장기 두기, 맞춰 먹기 돈치기와 불러먹기 주먹질 고패 떼기 윷놀이와 안집 뒷집 고누두기, 의복 전당 술 먹기와 남의 싸움 가로막기, 강새암 계집치기, 밤낮으로 싸움질을 일삼았다.

 

이에 옹녀는 변강쇠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하고 동반살이 하다가는 돈 모으기는 고사하고 남의 손에 죽을 테니 깊은 산에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산전이나 파서 먹고 땔나무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 할 터요, 강짜도 않을 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세그리하여 그들이 들어간 산이 지리산이다. 변강쇠는 이곳으로 이사 온 후로는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애끓게 하소연하다 나무라도 해 오라 했다. 변강쇠는 하는 수 없이 아내의 청에 따라 지게를 지고 담뱃대를 물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게으른 강쇠가 산에서 낮잠을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땐 하늘에 별이 총총하였고 이슬이 내리었다. "요새 해가 왜 그리 짧은가, 빈 지게 지고 가면 계집년이 방정 떨리.” 사면을 둘러보니 마천가는 길에 장승이 하나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 "벌목 정정 애 아니 쓰고 좋은 나무 거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불로소득 좋을시고지게를 찾아지고 장승 선 곳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하며 "네 이놈, 누구 앞에 색기하여 눈망울을 부릅뜨냐, 삼남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과거 마천 파시평과 사당놀음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 칠 때 후취덜미 가리딴죽 열두권법 범강장달 허네라도 다들 앞에 떨어지니 수족 없는 네깐 놈이 생심이나 바랄쏘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두름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우댓군 소리하며 제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를 장히 편다. "집안사람 거기 있나? 장작나무 하여 왔네뜰 가운데 턱 부리고 방문 열고 들어가니 강쇠 계집 반기느라 손목 잡고 어깨 주무르며, "어찌하여 그리 저물었나. 평생 처음 나무하러 가서 오죽이나 애썼겠는가, 시장한 데 밥이나 자시오

 

방안에 불 켜놓고 밥상 차려 드린 후에 장작나무 구경차 불 켜 들고 나와 보니 어떠한 큰 사람이 뜰 가운데 누었는데 조관(朝官)을 지냈는지 사모품대 갖춰 입고 방울눈에 주먹코 채수염이 점잖았다. 여인이 뒤로 팍 주저앉으며, "애고, 이게 웬일인가 나무를 하러 간다더니 장승을 빼어 왔네 그려, 나무가 아무리 귀해도 장승을 빼어 땐단 말을 언문책 잔주에도 없는 말, 만일 패어 땐다면 목신동통 조왕동증 목숨 보존 못 할 테니 어서 지고 가서 제 자리에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오소

 

"가장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을 것이지 계집이 요망하게 그것이 웬 소린고. 나무 깎은 장승 인형을 패어 땐들 무슨 관계있나. 망할 말 다시는 하지 말라.” 강쇠는 밥상을 물린 후에 도끼로 장승을 패서 군불을 놓고 유정부처 홀딱 벗고 사랑가를 불러가며 개폐문(開閉門) 절판례(絶版禮)를 멋지게 하였다.

 

이때 장생목신 무죄하게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나고 부엌 속에 탄 재가 오죽이나 원통할 것인가. 의지할 곳 없이 중천에 떠서 울렴. 나 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 갚겠다. 대방전에 찾아가서 이 원정 하소연하오리다. 노들 선창목에 대방장승 찾아가서 문안을 한 연후에 원정을 아뢰니 대방 크게 놀라 "이 변이 큰 변이라.” 하고는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作破) 화장하였으니 이놈 죄를 물어 벌하고자 하니 금월 초사흘 삼경에 노들선창으로 일제 취회하여 함양 동관 조상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하여 주옵소서.” 하고 팔도 장승에게 통문을 냈다.

 

귀신의 조화라 오죽 빨리 전했겠는가. 조선의 장승 하나도 빠짐없이 기약한 밤에 다 모여 새남터 배게 서서 시흥 읍내까지 빽빽하였다. "통문사를 보았으면 모든 뜻을 알 터이니 변강쇠 지은 죄를 어떻게 다스릴꼬?”"교수형에 처합시다”"불로 태워 죽입시다.”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그놈을 쉬이 죽여서는 설치가 못될 터이니 고생을 실컷 시킨 후에 죽이되 열아흐레 동안 장승 화장한 죄인 줄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될 터이니 우리 식구대로 병 하나씩 가지고서 강쇠의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오장육부 내외 없이 벽에 도배하듯 겹겹이 발랐으면 그 수가 좋을 듯하오

 

대방이 그 말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히 좋소, 그대로 시행하되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전라 경상 차지하고 오장육부 내장일랑 경기 충청 차지하며 팔만사천 털구멍도 빈틈없이 병을 단단히 잘 발라라이렇게 하여 변강쇠는 조선에 있는 모든 장승이 가지고 온 수백 가지의 병에 드러눕게 되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봉사를 데려와 점을 치고 명의를 데리고 오지만 치료가 불가하였다.

 

결국, 변강쇠는 죽고 말았다. 옹녀는 강쇠의 초상을 치러주는 이가 있다면 그와 함께 살고자 하였다. 먼저 중이었다. 그러나 변강쇠의 시체를 만지자마자 그만 죽고 말았다. 초라니 풍각쟁이 마종 떱뜩이들도 옹녀의 새 남편이 되기 위해 변강쇠를 초상 치르려고 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이상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지만, 변강쇠전은 겉으로 보면 남녀 간의 색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외설적인 작품으로 보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하층민들의 비극적 생활상과 종교관, 내세관 등과 결부되어 있으며 전설로서의 이 변강쇠전은 무분별한 성문화를 응징하기 위한 이야기로서 오늘날 문란해진 성 문화에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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