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4 (토)
임시정부 시절 김구나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를 비난하거나 매도하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려했다는 점을 지난 회에서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더 강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필자는 2015년 12월 31자 통신사 뉴시스 ‘윤치호 애국가 작사 확정 조직적 방해세력 누구’에서 1947년 발행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저자 표기 문제나 내용상의 가필 흔적 등을 들어 애국가 언급 부분의 신뢰성을 지적한 바가 있다. 특히 ‘상해시대편’의 수정 문제와 작사자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아예 편집 과정에서 가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그리고 진난 4회에서 대답하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유로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제시했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 문제는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 이번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50년 전 한 대한 애국지사’라고 표현하였다. 안창호는 당신이 지었지요라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의 표현에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배어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고 윤치호다라고 답하게 되면 묻는 이의 의도대로 어떤 형태로든 윤치호의 부정적인 행적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행적은 당연히 개인뿐만 아니라 애국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즉, 1948년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 1949년 월북)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애국가考’에서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구구함을 피하기 위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니, 분명 배려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배려의 배경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이광수와 윤치호 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이광수가 안창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영숙과 임정을 떠나 귀국하여 쓴 글 중에 1927년 대중잡지‘동광(東光)’ 제10호에 쓴 ‘規模의 人-尹致昊 氏’가 주목을 끈다. 여기서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와 깊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밝혔다.
"안창호 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둘째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1911년 105인 사건 전후 안창호와 뜻을 같이하는 사이라는 것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이어갔다.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명망과 재능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서도 일신의 안락(安樂)에만 탐(耽)하여 세사를 잊어버린 사람이라 씨를 비난하였다.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가 기미년 간에 내가 상해에 유랑을 할 때 씨의 예전 동지이던 안 씨(안창호-필자)를 만나 ‘윤 씨는 전전긍긍(戰戰兢兢)한 수성(守成)의 인물일지언정 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지(志)와 성(誠)을 나는 굳게 믿노라’라고 누누이 역설(力說)함을 듣고 나와 및 나와 같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씨에 대하여 존경과 정중(鄭重)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광수가 윤치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임시정부 초기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해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라고 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고 본다. 또한 적어도 1920년부터 이 글을 쓴 1927년까지는 이광수가 견지한 윤치호관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으로서도 이광수와 상호 배려의 관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치호 일기’에는 이 시기 이후의 관계에서도 유지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기 1932년 4월 30일조를 보면, 29일 상해에서 안창호가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코 연루되었다고 믿지 않는다.”고 애통하였다. 그리고 서울 송치 19일 후인 6월 22일 수요일 밤 9시 30분에 경무국 경시(警視) 미와(二輪; 안창호 취조 담당 형사)가 자신을 찾아와 유치장에서 한 사람을 치과 치료차 병원에 데려갔다 함께 왔다고 했다. 함께 온 이가 바로 안창호였다고 썼다. "유치장 생활로 너무 변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오랜만의 만남이 있은 10일 후의 일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7월 11일 이광수가 찾아와 안창호가 사법 당국에 인계되면 상당 기간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여 건강이 크게 우려된다는 것으로 책임자인 다나카 경무과장을 만나 달라는 부탁에 약속을 했다. 7월 12일 화요일 아침 8시, 다나카 경무국장을 만났다. 친지를 대표하여 조건부 석방이 가능한지 물었다. 7월 15일 4시 반 이광수의 요청으로 안창호를 면회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39일간 취조를 받고, 1932년 7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는 상황이다. 이 기록에서 이광수의 역할이 확인되는데, 윤치호에 대한 신뢰가 묻어있다. 그런데 윤치호의 이러한 안창호에 대한 배려는 이광수와 말도 하지 않는 유억겸․신흥우․김활란 등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내가 안창호와 이광수 같은 서북파 지도자들과 진솔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대해 기분이 상한 것 같다. 그러나 사적인 우정과 정치적 당파심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후에 밝혀졌지만 이 사건의 안창호 보석금은 윤치호가 댔다. 그리고 1938년 전후의 치료비도 여러 차례 내주었다. 이런 사실은 흥사단 기관지 ‘기러기’에 마지막 병상을 지킨 이갑(李甲)의 딸 이정희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인사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안창호가 윤치호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는 증언 등에서 확인된다. 결국 안창호의 말년까지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은 이렇다. 이상과 같은 도움이 있었다고 해서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가 양보했거나 이 때문에 윤치호가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둘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적인 신뢰가 굳건하였으므로 그 과정에서 상호 배려가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애국가와 그 작사자에 대한 경의(敬意)가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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