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목)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4) 안창호가 답하지 않은 이유, 윤치호가 작사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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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4) 안창호가 답하지 않은 이유, 윤치호가 작사자이기에

김연갑(전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분과위원장)

  • 특집부
  • 등록 2023.05.2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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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임시정부의 입장과 요인들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첫 회에서 임시정부공보 애국가 수정안’, ‘김구선생제 한국애국가악보, 그리고 김구의 발언 등을 살폈다. 이번 회에서는 안창호의 발언으로 알려진 1947년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명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작사자가 누구이냐고 물었더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안창호3.jpg
도산 안창호

 

도산 안창호는 초판부터 3판까지는 저자가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 되어있으나 실제는 이광수 저작으로 알려졌다. 이광수의 해방 후 첫 번역서 백범일지가 선풍을 이르키자 기념사업회가 의뢰하여 썼다고 하는데, 1949년 재판 발행, 1953년 한글 3판 발행, 1978년부터는 흥사단명의로 발행, 이후 춘원 이광수명의로 발행되었다. 이 책 제6상해시대 편’(3판 기준) 중 다음의 세 단락이 논란의 대상이다.


"정청(政廳)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애국가 끝 절에,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하는 것은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정청을 정제(整齊)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운동 거두(巨頭)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일이었다.”


첫 단락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아침 업무개시 상황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전원이 국민의례를 마치고 업무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단락은 안창호가 애국가 2임금을 섬기며충성을 다하여로 고쳤다는 것과 누가 지은 것인가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안창호의 주 업무가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이 두 번째 단락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춘원 이광수

 

이 대목은 전거(典據)가 없다. 단지 임시정부의 상해시대라고만 했는데, 일반적인 기산으로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를 말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광수라면 그가 상해에 있던 1919년부터 1921년 사이를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이후 몇 개의 버전으로 확산되어 유포되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사이 전개된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상해 계실 때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지요 물으시면 肯定不定도아니 하시고~”(1950, 강제환, 安昌浩 雄辯全集, 143)


"愛國歌를 안 先生님께서 창작하였습니까?仰問함에 대하여 선생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다.(채필근, 신앙생활, 1955, 합병호)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하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주요한, 1971, 安島山 全書, 993)


모두 네 가지에서 공통되는 것은 안창호에게"선생이 지었지요라고 물었다는 것과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구조다. 이 상황은 주어가 생략된 형태이지만 지난 3회에서 살핀 김구의 발언과 같은 취지다. , 김구가 상해 임정시절 愛國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 때 태극기와 愛國歌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한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취지와 구조가 같다는 말이다.


이상을 통해 볼 때 1920년 전후 임시정부에서 딱히 설()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작사자를 안창호인줄로 알았는데 실제는 윤치호라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전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하게 답을 안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구조상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윤치호 작사를 전제로 안창호에게 이를 부인하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다. 그래서 대답이 없음은, 또는 대답하지 않았음은 곧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긍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에 기대하고 묻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은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말하면 부르지 않겠다는 반발을 우려해서이다. 그리고 사족을 단다면 다른 길을 걷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의 뜻도 담았다고 보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상술한다.)


그런데도 굳이 이를 안창호가 자신이 작사라는 사실을 내 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표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이유가 없다면 이런 해석을 할 수고 있다. 그러나 굳이 겸손을 표할 이유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일부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었다. 바로 대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하여 교장 안창호를 잘 알고 있는 채필근(1885~1973) 목사가 신앙생활’ 1955년 합병호에 비판을 한 바가 있다.


"만일 안 선생이 創作하셨다면 直言하셨을 것이다. 誠一貫의 안 선생이 歷史大 文字에 대하여 謙讓沈黙이 있을 수 없다.”

 

사사롭지 않은 애국가 문제에 겸양(謙讓)을 표한다는 것은 안창호 답지 않다고 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의 분석이니 더욱 그렇다. 이는 안창호와 함께한 이들이나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상황을 아는 이들은 결코 작사자를 안창호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 있는 문제의 대목에 대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 인가, 아니면 안창호 당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안창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음을 밝혀 실망을 줄 필요가 없었고, 윤치호라고 사실대로 말하여 반발을 살 필요도 없었다. 또한 다른 길로 가지만 105인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윤치호를 배려를 한 결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