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국악신문] 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세시적 연희 시기와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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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세시적 연희 시기와 장소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 지정

대등 설치 모습 수영야류.jpg
수영야류 공개행사에서 지붕을 이용하여 '봉등'(봉황 등)을 달고 공연을 하고 있다. 

 

한국민속 가면극의 세시적 연희 시기는 지역에 따라서 다르나 음력 정초(正初), 상원(上元-음력 정월보름), 단오, 추석, 4월 초파일 등으로 나눈다.

 

수영, 동래의 야류군()과 경남의 오광대군, 경북의 별신굿군에서는 상원이 태반임에 비해서, 해서(海西)지방의 탈춤군에서는 단오절이 많고, 중부지방의 산대놀이 군에는 단오와 추석에 연희해 왔었다.


이 연희시기는 정초와 상원, 단오, 추석이 명절이라는 세시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각각 지역적 특성을 나타낸다.

 

상원에 연희하는 남부지방은 1년의 풍요를 연초(年初)에 기원함이며 단오에 행함은 파종을 마치고 기원하며, 추석연희는 아직 추수전이지만 수확의 기쁨을 표현한다.


수영야류는 고래로 상원날(음력 정월보름) 아침에 당제를 지내고 그날밤에 들놀음을 현행 했으니 수영 들놀음은 동제와 밀착되어 마을 사람들의 단합을 위한 구실을 했던 것이다.

부산, 경남 동제일는 정월 대보름이 약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야류, 오광대의 연희일시가 상원임은 납득이 될 것이다.


수영야류가 동제와 직결되었음은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집안제사는 씨족적 조상숭배에 의한 결합이라 한다면, 동제는 초씨족적 제례이므로 마을 사람 모두가 참례하는 공동체적 제의로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그리고 각자의 소원성취를 비는 행사이다.


이 동제에 이어서 그날 밤에 연희하는 들놀음도 주인은 동민들이니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수영야류가 1935년 중단되었던 것을 1946년과 1953년에 복원하여 연희할 때에는 음력 12월에 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수시로 놀고 있으니 부락공동의 신앙적 사회적 행사가 아닌 오락적 예능의 경향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보존회나 연희자는 마을 사람들과 유리되고 하나의 공연 예능이 되고 만 실정이다. 이 문제는 연희시기가 상원이 아닐지라도 동민과의 유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수영야류 들놀음 장면

 

연희장소


수영야류의 놀이판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있던 시장터였으나 지금은 번화한 상가로 변했고, 길놀이의 시발점이었던 먼물샘(遠水井)도 변하여 사용하지 않고 주로 수영민속예술관 놀이마당에서 연희하고 있다.


1953년에는 경상좌수영성지 내에 있던 구() 수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1971년에는 경상좌수영성지 밖에 있는 현 수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았었고, 길놀이의 출발점도


1953년까지는 먼물샘이었으나 1971년에는 마을 북쪽에 있는 서답바위였는데 그 이후는 길놀이를 본래대로 하지 않고 간략하게 축약하였다이 판놀이나 길놀이의 장소가 바뀐 이유는 수영의 도시화이다.

 

놀이판의 장치에 있어서도 1971년 연희 때까지는 마당 한 가운데 장간(長竿)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는 깃발을 달고 그 직하(直下)에 크고 화려한 용등, 봉황등, 거북등, 연꽃등 등을 달고 거기서부터 사방으로 새끼줄을 거미줄처럼 많이 치고 그 새끼줄에는 길놀이패의 소등대(小燈隊)가 가지고 온 2~3백개의 등을 달아야 하기 때문에 장간을 축으로 하여 상하로 승강이동이 가능하도록 장치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존회에서 연희할 때에는 낮은 지붕으로 인하여 큰 등인 용등, 봉등, 거북등, 같은 것을 공중에 달거나 청사초롱을 달아서 옛 모습의 자주 볼수은 없으나 년1회 실시하는 공개행사에는 지붕을 이용하여 이러한 등을 달고 공연을 하고 있어 잔형을 볼수 있다.


탈놀음은 원래 밤에 연희하기 때문에 조명은 보름 달 빛 아래서 모닥불, 횃불, 촛불을 켰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