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일)

[Pick리뷰] 창극‘정년이’, 새로운 왕자들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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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리뷰

[Pick리뷰] 창극‘정년이’, 새로운 왕자들의 합창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전석 매진
목포소녀 '정년이'와 국극 단원들의 성장기
이자람 음악감독의 성가 거둔 작품
관객들 환호, “무대 집중도와 흥미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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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2019~2022년 네이버 웹툰을 통해 연재된 정년이’(글 서이레·그림 나몬)317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29일까지의 모든 공연은 빠른 속도 전석 매진되며 대중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매번 창극단 작품이 화제가 되긴 했었으나 두 달 전에 전석 매진이 된 경우는 드물기에, ‘정년이의 파급력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서울의 여성국극단을 배경으로 국극 배우가 되고 싶은 목포 소녀 '정년이'와 국극 단원들의 성장기를 그린 이 작품은, 여성 국극(國劇)을 배경으로 그 당시 여성 소리꾼들의 성장과 우정, 꿈 등에 초점을 맞춰 '진정한 여성 서사 웹툰', '성 고정관념을 탈피한 웹툰'이라는 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누려왔다.

 

여성 국극은 창극의 한 갈래로서 1948년 국악원에서 여성들만이 떨어져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라는 것을 조직한 것이 그 뿌리다고전적 표현 방식으로 소리를 사용하였고 여성들만이 단원이었기 때문에 여성국악인들이 남장(男裝)을 하고 공연한 점이 특징이다사랑과 이별권선징악인과응보의 이야기를 다루며 큰 인기를 끌었지만 영화의 발달과 텔레비전의 보급그리고 여성들로만 구성된 이 장르가 창극의 제 모습을 잃는다며 차별받고 배제폄하되며 1950년대 말부터 급격히 쇠퇴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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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정년이는 소리와 춤, 연기가 어우러진 창극 자체를 소재로 하는 만큼 국립창극단만이 할 수 있는 공연이라는 기대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전통예술 속 연극적 원형을 꾸준히 탐구해온 남인우가 연출을, ‘패왕별희’ ‘나무, 물고기, 등에서 창극 음악의 다채로움을 보여준 이자람이 작창을 맡았기에 어떤 방향으로 무대가 만들어질지 더욱 기대되었다.

 

공연 둘째 날이었던 토요일 오후, 달오름극장은 공연 30분 전부터 정년이공연을 보기 위해 온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객석은 놀랄 정도로 가득 찼다. 현대의 창극으로 재현하는 70년 전 국극은 어떤 모습일지, 판소리를 중심에 두고 현대적인 음악을 보여주는 작창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원작 웹툰의 주제를 얼마나 뚜렷하고 명확하게 나타낼지, 마지막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소리’, ‘전통이 나아갈 방향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초점을 두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첫 곡 이 시대의 왕자들이 온다합창으로 막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환호성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악기 반주는 타악기와 아쟁, 피리, 거문고, 대금, 가야금, 그리고 건반으로 구성되었다. 이자람 음악감독에 의하면, 기악부의 수성가락(정해진 악보 없이 노랫소리를 따라 반주하는 가락)이 중심을 튼튼히 잡고, 음악적 사운드의 질감은 피아노와 신디사이저가 담당하였다고 한다. 작품의 내용상 합창 외에도 소리꾼 한 명이 전통 혹은 작창된 소리를 부르는 장면이 많았는데, 이때 북 반주와 거문고나 대금의 수성가락이 덧붙여지며 무대의 풍성함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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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하지만 웬만한 곡의 수성가락을 대부분 거문고가 맡은 것은 아쉬웠다. 물론 전통적으로 거문고가 수성가락을 많이 담당하고, 음색이 소리와 잘 어우러지는 것은 맞으나, 다른 국악기를 활용하여 수성가락을 연주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어도 신선하고 현대적인 색깔을 내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악기 반주는 무대를 관통하며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소리를 적절하게 받쳐주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며 훌륭한 연주를 선보였다. 특히 195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는 엔카(메이지 시대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일본 대중음악 장르의 하나로일본인 특유의 감각이나 정서에 기초한 장르)풍의 연주에 반도네온 소리를 입히고, 엔카 선법인 요나누키 음계를 활용한 음악을 창작하여 적절한 분위기를 자아낸 부분은 무대의 집중도와 흥미를 높이는데 효과적이었다.

 

이 공연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첫 번째 장면은, 처음으로 팬이 생겨 설레고 기뻐하는 정년이와,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무대에 서지만 결국 엄마가 무대를 보러 오지 않았음을 알고 슬퍼하는 영서의 대비되는 감정을 노래한 장면이다. 행복해하는 정년의 마음을 장조(Major), 영서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단조(Minor)로 하여 두 조를 조화롭게 섞인 하나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같은 선율을 노래하지만 정년이는 높게, 영서는 한 옥타브 낮게 부름으로 감정의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주었다. 이 부분은 주인공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가사와 연출, 음악까지 완전히 어우러지며 큰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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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다음으로 정년의 엄마인 채공선과 정년이가 바다에서 함께 대화하고 소리 하는 장면은 무대의 꽃처럼 빛났다. 더 이상 소리를 하지 못한다고 좌절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정년에게, 정년의 엄마이자 유명 국극 배우였던 채공선은 온몸으로 노래하라며 정년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다. 그리고 조용히 추월만정(판소리 심청가의 한 대목으로, 황후가 된 심청이 부친을 생각하며 부르는 대목)’을 부른다. 이때 그 어떤 악기 반주도 연주되지 않았고, 그저 바다의 파도 소리만이 무대를 감쌌다. 소리를 사랑하는 모녀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녹여진 그 장면은,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커다란 마음에 대한 경외와, 두 여성의 고뇌와 삶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눈물을 자아냈다.

 

정년이는 계속하여 나는 소리 하는 게 좋을 뿐이라며 소리에 대한 사랑을 계속하여 내보인다. 그 마음은 정년이의 대사와 창작된 음악에도 온전히 드러났는데, 이는 작창을 맡은 음악감독이자 소리꾼인 이자람의 마음과도 동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작품뿐 아니라 수많은 작품의 작창을 담당해 온 이자람의 이번 작품에는 더욱 깊이 있는 감성이 묻어났다. 오랜 시간 소리와 함께해 왔고 소리를 통해 다양한 작업을 해 왔던 그였기에, 더더욱 이 무대에서 소리를 향한 그 마음을 작창에 아낌없이 쏟아부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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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소리는 내 바닥, 내 하늘, 나의 전부라는 가사는 정년이와 이자람 음악감독의 공통된 마음이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 무대에 서는 것을 염원하고 소리와 전통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매란국극단 단원들의 모습은 전통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온 우리 선조들에 대한 숙연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외압과 전쟁 상황에서도 우리 음악을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과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창극 '정년이'를 무대에서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창극 작창 작업에서는 전통 판소리의 음악적 어법을 따르는 수많은 선율적 실험을 비롯하여 팝(Pop) 음악의 코드 진행 위에서 우평조 악조를 사용한 선율 만들기, 엔카의 코드 진행을 따르며 계면조 선율 만들기, 전통적 악조를 사용하지 않는 선율에서 판소리를 특징짓는 시김새를 잃지 않기 등의 시도를 구현했다고 한다. 그 모든 시도는 우리의 전통을 다루는 이 무대에 잘 어울렸으며, 이게 바로 창극이 보여줄 수 있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트로이의 여인들’, ‘오르페오전등 국립창극단에서 선보였던, 해외 극을 배경으로 한 무대는 참신하고 매력적이었으나 우리 문화와는 다른 부분이 있었기에 이질적이고 어딘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소리와 전통,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 무대에서 국립창극단은 우리 정서와 우리 음악을 아낌없이 펼쳐낼 수 있었고, 바로 이런 한국적인 문화가 가득 담긴 무대야말로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멋진 우리 예술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벅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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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모습. (사진=국립극장)

 

매란국극단 단원들이 각자의 꿈을 향하는 모습, 소리와 무대를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연습하는 모습, 그리고 가부장적인 세상에서 차별받고 억압 당하던 여성들의 아픔과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결국 모두가 평등하고 하나의 꿈을 좇는 새로운 시각의 자명고무대를 올린 마지막 장면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듯하였다. 남자 됨과 여자 됨이라는 가소로운 잣대의 역할에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리고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왕자들은 오늘도 함께, 당당히 걸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