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일)

[연재소설] 흙의 소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소설] 흙의 소리 <74>

  • 특집부
  • 등록 2022.02.03 07:30
  • 조회수 391


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4>

박연은 악서樂書의 자료를 모아서 찬집纂輯하고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樂譜法을 그리고 써서 책으로 만들자고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 그러한 박연의 수본手本에 의하여 계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 27727일자 기사 대로 썼는데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지 그의 나이 74세 문종文宗 원년에 악보를 간행하자는 청인행악보소淸印行樂譜疏를 다시 올리고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아악의 악에는 제향악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향악은 봉상시奉常寺에 구본舊本인 십이궁보十二宮譜와 아울러 20여 악장이 있어 익혀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연향악은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다가 경술년(세종 12, 1430)가을에 임금께서 주문공朱文公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중에서 연향아악 시장詩章 12편과 보법을 얻었으나 보법이 미숙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규례를 살펴 몸소 부연한 뒤에야 보법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따라서 부연한 보법 중에 그 성음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과 양로연養老宴의 음악에 넣었습니다. 또한 보법 전부를 주자소에 명하사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게 한 지 2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인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종 임금의 명을 거슬리는 것 뿐만 아니라 잊어버려 폐기될까 두렵습니다.”

박연은 그렇게 해야 될 근거를 조목 조목 제시하였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어버린다면 이미 금석金石에서 입혀져 나온 소리라도 어디서 나온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융안지보隆安之譜는 어리魚麗 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는 황황자화皇皇者華 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는 남산유대南山有臺 3장에서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은 녹명鹿鳴 1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어리는 사방이 평정되고 만물이 풍성하여 신명神明에게 고하며 칭송하는 내용이다. 황황자화는 임금이 여러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신을 송영하는데 쓰인 음악이고 남산유대는 어진 사람을 얻음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며 녹명은 어리와 같으나 그 뒤 연례宴禮와 향음주鄕飮酒에서 쓰였다. 시경소아小雅 6편 중의 한 곡이다.

"원컨대 전하께서 인행印行을 하도록 명을 내려 지체하지 말고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문종 임금은 이를 허락하여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우찬성 정분鄭芬 등에게 아악보를 주자소에서 간행하도록 하였다.

참으로 집요하였다. 박연의 집념은 식을 줄을 몰랐다.

 

20211231070256_5e1004e4a94d486db25f19b23ae4e4a5_q90v.jpg

 

박연은 그러한 일련의 상소 청원과는 달리 앞에서도 말한 대로 조하의절 같은 글을 써서 예악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먼저 왕세자 조하의절을 보자.

임금이 원정元正과 동지에 왕세자의 조하를 받는데 그 전날 예조에서는 내외관에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행할 것을 선포하여 각각 그 직분을 다 하게 한다. 충호위忠扈衛에서는 왕세자 위차位次를 근정문勤政門 밖의 길 동쪽, 북쪽에 가까운 서향으로 설치하고 동궁문東宮門 밖에 궁관宮官의 위차를 규칙대로 설치한다.

말 그대로 왕세자의 조하를 행하는 의례의 절차 규범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세종 12(1430) 예조에서 아뢴 것으로 박연이 지은 것인지 정리한 것인지 난계선생유고에 가훈家訓과 함께 잡저雜著 편에 수록되어 있다. 충호위는 종친의 자제로 조직하여 호위와 제사 때에 제관의 자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날 유사有司가 임금의 자리를 근정전 북벽 남향으로 설치하고 향로 두 개를 앞 기둥 밖의 좌우에 놓아 두며, 전악典樂은 헌현軒縣을 전정에 베풀되 남쪽에 가까운 북향으로 진열하고, 협률랑協律郎의 지휘하는 자리를 전상 서계의 서쪽으로 동향하는 자리에 마련하며, 사복司僕은 여연輿輦과 말을 뜰에 진열한다.

전악은 조선조 악관직의 하나로 정5, 협률랑은 음악을 지휘하던 악관으로 정7품이다. 사복은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어연은 임금이 타는 수레이고.

전의典儀는 왕세자 자리를 전정의 길 동쪽으로 북향하게 마련하고 전의 치사관致詞官의 자리를 헌(헌현) 동북쪽에 마련하되 통찬通贊 한 사람은 남쪽에서 약간 뒤로 모두 서향하고 또 통찬 한 사람은 헌현 서북쪽에 동향을 하게 한다. 궁관이나 익위翊衛는 그 시각에 모두 제 자리에 모이되 각기 기복器服을 입고 의장과 호위는 평상시와 같이 베풀어 놓는다.

전의는 나라의 큰 의식이 있을 때 모든 절차를 도맡아 진행시키던 집사관이고 치사관은 경사가 있을 때 임금께 올릴 송덕의 글을 맡은 관리이며 통찬은 전의의 명을 받아 의식의 절차를 큰소리로 외쳐 진행시키는 관리, 익위사翊衛司는 세자의 호위를 맡은 관청이었다.

예와 악의 절차를 치밀하게 연출하여 그 전범을 적어 놓은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기록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