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0 (월)
고개는 산을 모태로 한다. 산의 허리 부분에 있는 고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거나 가장 편리한 길이다. 마을과 마을을 질러갈 수 있기에 인적자원이나 물자가 넘나들고 군사적 관문 구실도 한다. 그래서 고개 입구에는 소위 수위도시(首位都市)로 발전시키는 복합기능의 관문취락(關門聚落)이 있거나 소도시를 견인하는 수안보와 문경 같은 영하취락(嶺下聚落) 같은 형태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를 ‘산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은 곧 ‘고개의 나라’라고 하는 말과 같다. 우리는 산을 신성시하여 고개마루쯤에 성황당이나 장승을 세워 양편 주민들을 문화적으로 연결시켰다. 당연히 방언·가옥구조·생활양식 등 문화권 설정에 있어 자연적인 경계를 이뤄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시켜왔다.
이 같은 우리의 자연조건 덕에 적어도 어느 자연 마을이라도 고개한 곳은 갖고 있다. 집에 가려면 고개 하나는 넘어가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니 그 이름도 많게 되었다. 고개·재·목·퇴·티 같은 순 우리 말이 있는가 하면 한자어로 고개 령(嶺), 고개 상(峠), 우뚝 솟을 치(峙), 고개 재/점(岾), 고개 현(峴)과 같이 뫼 산(山)을 변으로 쓴 한자어가 있게 되었다. 이 중에 ‘치’는 주로 영남 지방에서 쓰이는데, 울치(蔚峙)·율치(栗峙) 팔량치(八良峙)와 같이 하나의 접미어로 이루어진 지명이다. 이에 비하여 관북지방에서는 치에 ‘령’을 중복으로 썼다. 후치령(厚峙嶺)·주치령(走峙嶺)과 같은 용례가 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을 같이 쓰는 곳도 있다. 문경새재의 경우인데 조령(鳥嶺)과 초점(草岾, 억새풀 고개)과 함께 ‘새재’를 함께 쓴다. ‘조령’은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이고, ‘초점’은 ‘억새풀이 많은 고개’라는 뜻이고, ‘새재’는 죽령과 추풍령 사이의 ‘사이 고개’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고개의 이름이 만들어지는 데는 주목되는 몇 가지 패턴이 있다. 그것은 고개 너머에 있는 지역 이름을 써서 정한다는 사실이다. 의왕시 학동에 있는 ‘오매기 고개’와 ‘의일 고개’의 예인데, 고개 양편의 의일 지역에서는 ‘오매기 고개’로 불리고, 오매기 지역에서는 ‘의일 고개’로 부른다는 점이다. 이는 고개를 넘어오는 곳이기보다는 넘어가는 곳으로 인식한 결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명분을 단 이름이 생기면 그 두 가지를 함께 쓴다는 점이다.
강원도 진부 ‘헌터골 고개’와 ‘전우치 고개’의 예인데, 헌터 고개로 불리던 것이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주인공 전우치가 넘나든 고개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전우치 고개’로 더 많이 불리는 경우다. 이는 자연 지명을 쓰다가도 사연과 명분의 이름이 생기면 이를 더 많이 쓰게 된다는 경우이다. 마지막은 우리말 이름과 한자식 표현을 함께 쓰기도 한다는 점이다. 강원 이북지역 고개 이름 중에 ‘구리 고개’ 또는 ‘동현(銅峴)’이라는 지명이 많은데, 이는 구리 광산 일대의 고개를 우리말과 한자식으로 표현한 예이다. 이는 문헌 기록과 현지의 표현이 공존하는 경우의 예인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고개 이름도 있다. 많고 구구한 고개 이름 중에는 지명이 아닌 노래 이름을 쓴 경우가 있다. 바로 ‘아리랑고개’이다. 어떤 고개보다도 유명한 고개일듯한데, 앞에서 살핀 고개 작명(作名)의 패턴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리랑고개’는 어떻게 해서 탄생한 이름일까? ‘아리랑’의 어원설이 ‘백인백설(白人百說)이듯이, 이 ’아리랑고개‘의 작명 배경도 그럴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배경에 대해 궁금해했다는 점이다. 아리랑 속의 고개, 고개를 노래하는 아리랑으로 다가가 본다.
①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고나 (진도아리랑)
②아리랑 고개는 왠 고갠가
넘어갈적 넘어올적 눈물이 난다 (해주아리랑)
③문경새재 넘어갈 적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문경새재아리랑)
④아리랑 고개는 열두나 고개
넘어갈적 넘어올적 눈물이 나네 (서도아리랑)
⑤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북간도아리랑)
⑥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고개
한번 가면 다시 못올 탄식의 고개 (기쁨의 아리랑)
⑦아리랑 고개는 혁명의 고개 (김산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⑧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서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 (영일아리랑)
①~③은 문경새재와 아리랑고개가 어떤 고개인가라고 묻는다. 세 고개는 같다고 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고개’라고 한다. ④에서 아리랑고개는 구비가 많은 ‘열두 구비의 고개’라고 한다. 곡절(曲折)이 서리고 서렸다고 한다. ⑤와 ⑧은 살길을 찾아 남부여대하여 북간도로 가는 국경이 아리랑고개라고 한다. ⑦은 혁명의 고개가 바로 아리랑고개라고 단언한다.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란 기치가 어른거린다.
이렇게 볼 때 아리랑 스스로가 묻고 답한 아리랑고개는 일단 ‘눈물’(피눈물), ‘탄식’, ‘쓰라림’이 수식하는 고개로, ‘쓰라린 가슴으로 울며 넘는 고개’인 것이다. 결국 ‘아리랑의 고개’ 또는 ‘고개에 서린 아리랑’은 이별과 만남의 정한(情恨)이 서린 우리들의 정서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하게 되는 것은 위의 아리랑에서 구체적인 지명을 들어 아리랑고개라고 한 것이 ①과 ③이다. 그 구체적인 지명이란 경상북도 문경과 충주 사이를 잇는 ‘문경새재’로서 이 고개가 아리랑고개라고 한 것이다. 비록 은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민중의 사심 없는 소리’라는 민요의 진정성에서 이런 정도의 표현은 사실에 부합될 것이다. 곧,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에서 비롯된 것이다”로 이해하게 한다. 이에 1896년 미국 선교사 H. B.헐버트가 채록한 대표 사설은 다음과 같다.
"On SaiJai’s slope in Mun-gyung town/ We hew the paktal namu down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이 기록은 후렴과 곡조를 부기(附記) 한 아리랑 기록으로는 현존하는 문헌 중 최초라는 점에서 신빙(信憑) 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확인한 이 같은 결론에 대해 사실은 이미 1955년 승려 시인 유엽(柳葉,1902~1975)이 1955년 이미 ‘민요 아리랑에 대한 私考’라는 글을 통해 제시했다. 오히려 단정적인 표현이 아니기에 더욱 동의하게 된다.
"고개라는 말이 공교히 곡조(曲調)의 곡자(曲字)를 ‘구비’라고 해서 고개를 연상하게 하고, 또 자연계의 ‘재’(嶺)라는 말과 통할 뿐만 아니라, 구비와 재는 돌거나 넘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경험적 기억회상작용(記憶回想作用)에서 이별의 한(恨)을 또 한 번 연상하게 함으로써 ‘문경새재’ 같은 험준하고 불상사가 많던 이야기를 빚어낸 자연계의 지리적 고개를 끌어다가 아리랑 고개인 한과 정의 정신적 고개와 결부시킨 것은 작시기교(作詩技巧)로써 있을 수 있는 ‘멋’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에서 비롯된 시어(詩語)이다. 만일 이 ‘아리랑고개’라는 시어가 없다면, 과연 우리는 아리랑을 이처럼 가까이 불러왔을까?
온갖 상상을 허용하는 이 ‘고개’, ‘아리랑고개’를 창출한 우리 조상들은 대단한 창조적 시심(詩心)을 소유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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