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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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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8

  • 특집부
  • 등록 2021.03.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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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의 길을 걸으며

 

조선시대에 서점은 서사(書肆책사(冊肆)라 불렸고,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서포(書僩책포(冊僩서점(書店)이라고도 불렸다. 해방 이후 서점이라 통용되기 시작하면서 현재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책방(冊房),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기구였으며, 특히 세종 때는 궁중의 인쇄를 맡아보던 출판기관의 명칭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점은 1908년 고유상(高裕相)이 설립한 회동 서관(匯東書館)이다. 회동 서관은 1897년에 세워진 고제홍 서사(高濟弘書肆)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해조(李海朝)가 번역한 화성 돈전(華盛頓傳)을 비롯해 한용운(韓龍雲)님의 침묵이광수(李光洙)단종애사(端宗哀史)등 이백여 종이 넘는 책을 출판하면서 1950년대 중반까지 우리 근대 출판문화를 이끌어 온 주역이다.(도판 55-56) 회동 서관은 출판사와 서점을 겸했을 뿐만 아니라 문방구류의 물품도 판매했다. 우리나라 초창기 고서점의 역사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1부에서 언급한 쿠랑의 기록으로 미루어 회동서관 같은 서점에서 고서도 함께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오늘날의 고서점은 고서를 사고파는 곳이다. 따라서 일반 서점과는 그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선 서점을 찾는 고객들은 대개 연구자나 고서 수집가들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고객의 수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또 고서점을 운영하려면 고서에 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유럽에는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서점이 수두룩하다. 고서점 주인 중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나 서지학 관련의 저서를 낸 사람도 많다. 그러다 보니 고서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특별하다. 이들 서점들 중에는 여러 방면의 고서를 두루 다루는 곳도 있지만, 문학·역사 등 한 방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서점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서점 주인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 서점 경영도 고객 중심이다. 잘 만들어진 도서목록은 학술자료로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고서점의 운영 방식은 대부분 주먹구구식이다. 동화책에서부터 한적까지 두루 취급하는 백화점식이다. 또 대부분의 고서점이 헌책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서 목록을 제작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대부분의 서점 주인에게서는, 고서를 취급한다는 자긍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십 대 때는 도예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었다한때 도예 학원을 운영하는 등 이십 대 시절의 모든 정열을 도자기에 바쳤지만아무런 성과를 이룰 수가 없었다그래도 도자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서른이 다 되도록 방황만 했다그 시절 내게 유일한 낙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그리고 서울의 여러 고서점을 드나드는 일이었다덕분에 나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고미술 전반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고서도 마찬가지였다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봤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서와 고미술품에 관한 약간의 지식이것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그래서 생각한 것이 고서점이다궁리 끝에 독립문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보증금 없이 월세만 주고 책상 하나만 달랑 있는 사무실이었다전화도 월세로 빌렸다지금은 전화가 흔하지만그때만 해도 백색전화니 청색전화니 해서 전화 놓기도 어려웠고가설비도 무척 비싼 시절이었다그리고 몇 달 후 장안평 고미술상가에 고서점 호산방(壺山房)을 열었다이때가 1983내 나이 서른한 살 때였다.


사진 77.JPG
     [사진 77] 인사동 호산방 전경

 

호산방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조선 말기 서화가 중에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이 있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호를 호산(壺山)이라고도 했다. 나는 일찍이 그의 서화에 매료되어 그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자기에 깊이 빠져들면서, 장차 도자기 가마를 갖게 되면 당호를 호산방으로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는 항아리를 뜻하니 도자기 가마의 이름으로는 썩 어울릴 듯했다. 결국 도자기 가마가 아니라 고서점을 차리게 됐지만 고서점하고도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막상 가게를 차렸으나 고서화 몇 점에 약간의 책이 전부였다. 다행히 그동안 모아 둔 고서가 커다란 힘이 되었다. 한 권을 팔아 두 권을 사고, 두 권을 팔아 다시 네 권을 사는 식으로 사업을 꾸려 나갔다. 처음에는 아주 힘들고 어려웠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갔다. 그동안 작은 아파트도 하나 장만하고 세 들어 있던 가게도 인수할 수 있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진 분야는 필사본과 간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의 역사와 문학 관련 양장본이었다.

 

1992, 장안평 호산방을 광화문으로 옮겼다. 교보문고 건너편 광화문 우체국 옆 한일빌딩 아케이드, 지금은 센트럴빌딩으로 이름이 바뀐 건물이다. 호산방이 보다 발전하려면 시내 중심가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주위에서는 다들 광화문으로 옮긴 것을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광화문과 고서점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려와는 달리 광화문 호산방은 유명세를 치루고 사업이 나날이 번창해 갔다.

 

호산방이 점점 안정되어 가면서 고서에 대한 나의 애정과 관심도 훨씬 깊어졌다. 취급하는 고서의 수준도 월등히 차이 났다. 단순히 취미로 고서를 수집할 때는 기껏해야 해방 이전의 문학서적 정도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호산방을 시작하고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고 활자본의 감식은 물론 간찰과 필사본의 내용, 더 나아가 누구의 친필인가를 가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한적과 간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래야 가르쳐 주는 선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필사본과 간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이 호산방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문·호외·육필원고·포스터·광고지·음반·영화필름 따위의 비도서 자료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 자료는 책 박물관 설립을 목적으로 호산방 사업과는 무관하게 수집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말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나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고서점에 딱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고서점 주인은 깎아 줄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가격을 부르고, 수집가는 무조건 반으로 뚝 잘라 깎고 본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다. 사실 고서점에서의 에누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생리적으로 이러한 흥정을 싫어해서 길거리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남들만큼 흥정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단골 고서점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호산방을 운영하면서 처음부터 정찰제를 실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과연 손님들한테 먹혀들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처음 호산방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아 한 손님이 들렀다. 한참 동안 책을 살피더니 십여 권의 책을 골라 놓는다.

 

"이거 다 얼마요?”

"책 뒤에 가격표가 붙어 있습니다.”

 

책 가격을 본 손님의 표정과 말투가 곱지 않다. "얼마면 되겠네한다. 내가 정색을 하고, "우리 서점은 정찰제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골라 놓은 책들을 휙 내팽개치듯 하고는 돌아갔다. A 선생이었다. 고서 수집가로는 꽤나 알려진 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호산방에 몇 차례 더 들르고서야 정가대로 책을 사 갔다. 그때의 표정이 마치 땡감을 씹은 듯했다. 그 후로도 그는 나의 원칙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이렇듯 선생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껄끄러운 사이였다.

 

나는 책을 팔 때는 분명 고서점 주인이지만 다른 고서점에서 책을 살 때는 손님이 된다. 이때 가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물러서곤 했다. 그 책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물론 비싸다는 말도 절대 하지 않는다. 고서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인데 어떻게 내 기준으로 남의 물건을 싸다 비싸다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차이가 날 뿐인 것이다.

 

고서점이란 겉모습으로는 매우 고상하고 문화적으로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어설픈 의상을 입히고 그 의미를 확대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고서 매매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문화적 의미도 없다. 고서를 팔고 사는 것은 말 그대로 비즈니스다. 그런 비즈니스에 굳이 문화적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아마추어의 어설픔일 뿐이다. 나는 당당한 프로를 지향한다. 억지로 의미를 끌어다 붙이기보다는, 고서 매매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지금까지 대다수 고서점에서의 고서 매매 행태는 비문화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님이 몇 권을 주섬주섬 골라 주인 앞에 내놓으면 적당히 흥정하여 팔고 사는 것이 우리 고서점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이라도 이 손님에게 부르는 값과 저 손님에게 부르는 값이 다른 경우도 생긴다. 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상행위인가. 이래 가지고는 결코 고서점의 위상과 신뢰를 높일 수 없다.

 

나는 정찰제만이 공정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또 판매가격을 공개함으로써, 고서 자료의 원활한 순환이라는 측면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판매 가격의 공개는 매입 가격의 암시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매물이 나올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고서점은 좋은 고서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개인 수장가들의 서재에 숨어 있는 자료들을 끌어내 그것을 순환시켜야 고서점도 살고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판매 가격의 공개는 그런 의미에서 매물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