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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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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3

전문지로서의 편집진용 확립(4)

                국악신문 특집부

 

최초의 국악 평론가 정범태

 

정범태 선생을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평론가라고 하면 의아해 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70년대 활동한 원로 국악인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이미 70년대 우리가 꺼내지 못할 말을 대놓고 했던 인물이다. 바로 "권번은 음악천재들이 다니는 줄리아드 음대이고, 당골은 대대로 예능인을 배출하는 예능 패밀리다라는 말을 당연시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이 말에 동의하지만 당시로서는 이를 자신있게 전거를 들어 입증 해낼 사람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귀명창이며 국악역사를 꿰는 이론가라는 사실을 적어도 명무 한영숙선생이나 가야금 명인 성금연선생이나 또한 명창 박귀희 선생은 인정했던 것이다. 이 분들은 정선생이 국악 공연장에 나오면 "운동 나왔어요?‘라고 인사를 하는 처지였다. 이 말은 춘향가 어사출도 대목에서 낌새를 채고 먼저 도망가는 눈치 빠른 인물인데, 명인들 사이에서는 국악전반을 훤히 알고 있는 이를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선생의 평론가적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정선생의 야사적(野史的) 국악계 입문 동기는 이렇다. 1951년부터 지리산 파르티잔 토벌작전에 기록사진을 찍는 문관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종군기자처럼 전투현장을 따라다니며 전과(戰果)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임무였다. 이 때 경찰 지리산 전투사령부가 남원경찰서 자리에 있었고,  육군 백선엽사령부는 남원농업학교 자리에 있었다. 이 두 곳의 파르티쟌 토벌작전 현장에 때마다 오가야 했다. 그래서 일이 없는 날이면 군경 간부들이나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요정출입을 자주 하게 되었다.

 

화면 캡처 2021-03-01 143323.jpg

 

당시 남원 지역에는 남선관, 부산관, 김천관, 춘향각, 방림원 등이 이름난 요정인데 여기에는 전국의 내노라는 명인 명창들이 어려운 전쟁통 말기를 의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소리의 고장답게 풍악이 넘쳐나고 있었다. 정선생은 총각인데다 전쟁통이지만 영관급 군인과 총경급 경찰이나 알만한 지역 유지들과 함께 출입하여 대우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중에 정선생이 자주 출입하는 곳이 요리와 풍류로 이름이 난 남선관(南鮮館)이었다. 남원읍에 있으며 입구에는 큰 소나무가 있고, 전형적인 한옥형태인 자 기와집이었다.

 

그런데 정선생이 말로는 풍류가 마음에 들어 간다고는 하지만, 기실은 이곳 기생인 성향순이란 여인 때문이었다. 전하기로는 미색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단가를 비롯한 소리는 정선생을 유혹할만 했다고 한다. 이 여인이 정선생의 첫사랑으로 다가왔다. 정선생으로서나 성향순으로서나 며칠에 한번씩 기관총 소리와 대포의 포연에 놀라는 상황에서 언제 어떤 일로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필요했고, 그럴만한 청춘의 시절이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통에서도 사랑은 꽃 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몸과 마음을 가까이 해가고 있던 어느날, 연인이 정선생에게 매달려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오빠가 빨갱이에게 부역했다는 죄로 구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빠를 구해달라는 하소연을 해 온것이다. 당시 남원지역에서 이런 혐의로 구속되는 사례는 흔한 일이었다. "밤엔 공산당, 낮엔 자유당이란 말 대로 양쪽에서 공격하는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랑을 피워가는 첫사랑의 가족인지라 이런 처지는 피부에 닿은 일이 되었다. 정선생은 여러 방도를 찾았다. 군경 간부를 통해 사정을 했다. 일이 발생한지 10여일이 지나서야 오빠에 대한 정보가 잡혔다. 다행히 족청계열에서 파악하기로는 누명을 쓴 것이란 것이다. 결국 다리를 놓아 조경위라는 상훈부 경찰의 도움으로 자신이 보증을 서는 것으로 석방을 시켰다. 이 일로 정선생은 여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깊은 환대를 받았다. 순창군 순창읍 인계면 섬진강 상류에 자리잡은 70여호 되는 마을에서 살만큼 사는 집으로 보였다.

 

전쟁통에 만나 '기생살림'을 하게 된 남원 요정 남선관 기생 성향순. 1951년 함께 찍은 사진 .jpg
[국악신문] 전쟁통에 만나 '기생살림'을 하게 된 남원 요정 남선관 기생 성향순과 1951년 함께 찍은 사진

 

 

그런데 방에 들어서니 가야금이 세워져 있고 징 장고 북이 놓여있었다. 이름난 당골집안이었던 것이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근동에서는 외삼촌 등과 함께 삼재비 음악으로 소문이 난 집안이었다. 여인은 이를 굳이 내색하지 않았으나 정선생은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 일대 당골네가 음악적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계보나 조직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 날 출소한 오빠도 만나고 음식도 후하게 대접을 받았다.

 

이 일이 있고나서 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곧바로 소위 기생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관례대로라면 금은으로 된 장신구는 물론 집안 가구며 살림살이를 해 주어야 하는데, 전쟁통에 객지살이 문관이 그렇게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정선생은 명분상으로는 국악인을 애인으로 둔 당골집안 동간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민족음악이 태동하는 국악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 덕에 정선생은 누구 못지 않는 당골네들의 변(은어)에 능통했고, 춤 음악을 알게 되고, 동작과 행위에 리듬과 절도와 멋이 스며야 제대로 된 풍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국악인들의 모습을 사진기로 찍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쉴 틈만 나면 전북 일대의 굿판이며 소리판이며 춤판을 물어물어 찾아 다녔다. 그래서 누구 보다 먼저 박초월 명창 모친이 유명한 봉안지무임을 알게 되었고, 지무의 무가가 판소리요, 무악이 민속악의 본향임은 물론, 이를 잘하는 세습무는 동간이라야만 뛰어난 패밀리가 된다는 사실도 깨우쳤다. 그러다보니 "팔도 동간(同間) 따지고 보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계보는 세습당골로 연결되는 구조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동간이란 말은 같은 세습무 사이라는 말이고, 이에 대비되는 말이 비가비(非甲)로 갑(세습무)이 아니면서 갑인 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동간의 세계를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를 정선생은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정선생의 구술에 기반하여 문화인류학자 박정진 교수가 엮은 전기 발가벗고 춤추는 기자(화당, 1998)에 한 대목이 그것인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간은 혼인을 할 때 여자 집에 청혼이 들어오면 남편 될 사람이 무얼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남편이 소리광대면 청혼 말이 오가고 거의 혼사를 정할 무렵에는 바느질과 음식을 잘 가르친다. 한편 남편이 될 사람이 무업에 종사하면 필연코 아내가 될 사람은 굿음악(굿 바라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굿(어정) 학습을 가르친다. 특히 남편이 될 남자가 큰아들인 경우는 대다수가 시어머니가 하는 무업을 물려받기 때문에, 부인이 될 여자의 친정에서는 일년 후 혼사를 하기로 결정하면 친정 어머니나 혹은 일가 친척의 숙모나 친척 중에서 굿을 잘하는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어정학습을 가르친다."

 

"새며느리를 들인 신랑집은 식구들이 다 모여서 새아기의 어정학습을 방안놀음에 붙여 들이면서 오디션을 본다. 여기서 시아주버니는 피리를 불고, 시동생이 젓대를 불고, 시당숙이나 친척 중에 장고를 치며 시어머니가 징을 친다. 가족놀음을 통해 새아기의 어정학습을 평가한다. 열두거리 굿 중에 가장 친정에서 자신있게 하던 대목을 한 두 거리를 해보라고 시켜 본다.

 

첫째 청(목소리의 키)을 듣는다. 상청이냐, 중청이냐, 하청이냐를 판별한 후 대개 중청으로 굿을 시작한다.

둘째 발림을 본다. 굿을 하면서 지전든 신칼을 흔들면서 가벼운 춤을 추는 것을 발림(제스처)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모여 새 식구의 굿을 듣고 덕담을 나누며 칭찬을 한 후-청 좋고 발림 좋고 태도 좋고 나무랄데가 없네. 다음 어정 때는 바로 어정판에 서게-라고 합격을 시킨다.”

 

정선생은 이미 70년대 우리나라 국악계의 계보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한 인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선생을 우리나라 제1호 국악평론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정선생이 국악신문에 연재하며 기록한 명인 명창들의 혈연적이고 정서적 접근한 계보와 에피소드는 소중한 '국악의 역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