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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송광용(宋光庸)은 1934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그가 만화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일학년 때인 1952년, 학생잡지 『학원』이 창간되던 해였다. 현실은 전쟁통이었지만, 삭막한 와중에서도 산골 소년의 꿈은 피어났다. 송광용은 친구에게 빌려 본 잡지 『학원』에서 김용환의 인기 연재물 「코주부 삼국지」와 김성환의 「빅토리 조절구」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보고 흠뻑 빠지게 된다.
1956년 7월 3일 일기에는 ‘국부적’ 만화가들의 모습을 그려 놓고, 고바우 김성환과 코주부 김용환은 우리나라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사진 46)
그후 1992년 2월까지 그는 사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그의 꿈은 오직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냉혹한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 이 일기에는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한 평범한 남자의 꿈과 현실, 희망과 좌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 만화사에서 하마터면 묻혀 버리고 말았을, 한 불행한 만화가의 삶과 그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송광용의 만화일기는 작가가 직접 갱지를 반으로 접어 A4 크기로 제본한 것으로, 표지에는 일련번호
와 각 권의 제목을 붙이고 권마다 일일이 표지 그림을 그렸다. 원래는 모두 백서른한 권이었으나, 1990년 9월 11일 영월지역 홍수 때 서른 권이 물에 잠겨 현재는 백한 권만 남아 있다. 다른 만화작품의 원고도 상당수 있었으나, 이 역시 홍수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2001년 3월, 나는 송광용 화백에게서 이 일기를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받았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서 그의 한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내 손을 거쳐 간 수많은 책들 중에는 물론 일기도 여러 권 있었다. 그 중에는 십 년 내지 이십 년치의 일기도 여럿 있었지만 그 내용은 대개 메모 수준이었다. 그러나 송광용의 만화일기는 달랐다.
2002년 영월책박물관에서 열린 「옛날은 우습구나—송광용 만화일기 40년」전은 송광용의 한풀이와도 같았다. 나는 전시에 맞춰 이 일기들을 모두 네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기획에서 제작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영월책박물관 대부분의 출판물이 그랬듯이 이 책도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이 편집디자인을 해주었다. 처음 정 선생은 한 열 권 정도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지만, 인쇄비며 제작비 관계로 네 권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정 선생을 설득하긴 했지만, 일련의 작업들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디자인의 식구 일고여덟 명이 모두 참여하여 한 달 이상 걸렸다. 물론 이때의 모든 디자인도 정 선생이 자청하여 무료로 제작해 주었다.(*사진 47~48) 지금 생각하면 그 네 권을 만든 것도 꿈만 같은 일이었다. 정 선생에게 진 마음의 빚이 두고두고 무겁다. 정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 책의 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 책의 제목인 ‘옛날은 우습구나’는 킬리만자로의 고독한 분위기를 가진 한 남자의 초상화를 표지로 한, 송광용의 만화일기 제83호(1956년 7월 30일)의 제목에서 따왔다. 열병에 걸린 듯 만화에 빠진 송광용, 그에게 만화란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였으며 신앙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의 일기를 보면, "세상에는 신도 하나님도 없다”거나 "아, 세상은 쓸쓸하였다”라는 식의 자조 섞인 어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쉬 이루지 못한 좌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몸담았던 우리 현대사의 풍경을 비춰낸 것이기도 했다.
신발이 떨어져 길을 걸을 때면 절벅절벅 흙탕물이 들어차는 가난, 군 제대 후의 상경, 그러나 ‘가난투성이’ 나라에서 일어난 오일륙 쿠데타, 만화 대신 택해야 했던 직장에서의 실직 등, 그의 개인사는, 「또 가려 하느냐」 「이렇게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돈 병」 「가시밭 길」 「서울과 또 나와 실직」 등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대에 부대끼고 이리저리 밀리고 치인 흔적들을 보여준다.(*사진 49)
젊은 시절 송광용에게 만화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오직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햇필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그런 희망을 나는 좋아한다”라고 일기(1956년 7월 11일)에 적은 송광용은, 만화를 공부하듯 일기에 집착했다. 그는 하루 일과 중 두서너 시간을 일기 쓰는 데 할애했고, 어떤 날에는 종일 만화 연습으로 일과를 채웠다.
그는 그 시절 만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용환·김성환·신동헌·김경언·정한기·박기정·백인수 화백의 그림을 똑같이 그릴 만큼 훈련을 거듭했을 뿐 아니라, 월트 디즈니(Walt Disney)와 칙 영(Chic Young)이 그린 미국 만화의 이야기 구조 등을 스스로 연구하고자 했다.
미술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누구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오직 만화가가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마 일기를 쓰지 않는다면, 이미 미쳐서 날뛰는 미치광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중학교 시절 일기에 적고 있으니, 그는 일찍이 만화일기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 같다.
만화가로 등단하기 위해 육십 년대까지 학원사 등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결과는 낭패였다. 만화일기를 보면 그의 좌절은 ‘나는 왜 만화가가 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만화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를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만들겠다”던 송광용의 만화 주인공 ‘곱구나’는 바로 그가 찾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군대 제대 후 암담한 사회생활 속에서도 그는 만화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어법을 만들어 나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만화가, 아니 ‘만화가 지망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만화일기를 통해 발산했다. 그러다 나이 오십 이후에는 만화보다 일기라는 매체에 더 의지했다.
그 역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만화가의 꿈을, "일기 쓰는 것만큼은 계속하면서 찾으려 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게 만화가인가 만화가가 아닌가 하는 것은 처음에는 분명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일기를 모두 불태우려고 여러 차례 마음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용의 만화일기를 읽다 보면 이런 물음이 종국에 가서 그에게는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고 얼마 후인 2002년 10월 5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실은 내게 일기를 기증했을 때 그는 투병 중에 있었다. 병원에서는 이삼 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그후 일 년 반 정도를 더 살았다. 자신의 일기가 활자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