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수)

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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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

동편제 명창 박녹주.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

  • 편집부
  • 등록 2021.01.10 16:57
  • 조회수 907

 

소설가 김유정이 연모한 여인 

 

단아한 체격으로 명품 동편제를 뽑아내던 박녹주朴綠珠(1905.2.15~1979.5. 26)는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이 꿈에도 잊지 못하며 석달 간 연서를 보낸 주인공이다. 연희전문에 다니던 4살 연하의 강원도 실레마을 출신 엘리트 소설가의 연모가 이미 소리명창의 영예를 얻고 있던 당대 스타 박녹주의 삶에 파고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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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창 박녹주(朴綠珠)

 

경북 선산(현재 구미) 고아에서 1905년 2월 15일(음력 1월 25일)에 태어난 박 녹주의 본명은 명이命伊, 호는 춘미春眉이고, 녹주는 예명이다. 박녹주는 호 적상 박재보朴在普와 박순이의 자녀로 태어난 걸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박중근과 권순이의 3녀로 태어났다. 다소 강한 억척같은 성격에 쟁쟁한 목소리를 내던 박녹주는 12살 되던 해(1916년)에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고 싶다는 아버지 손에 끌려 선산 도리사 사하촌에 머물고 있던 가신歌神 박기홍朴基洪 앞에 섰다. 동편제 「적벽가」에 능한 박기홍은 박녹주에게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이상 소리를 배우도록 했다. 소리하는 자세부터 엄하게 한 박기홍은 무릎을 세우고,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운 자세로 쉼없이 소리를 하 라고 가르쳤다. 점심 때를 제하고는 새벽녘 개밥바라기별이 뜰 때까지 「춘 향가」를 가르쳤다. 박녹주는 불과 두 달만에 「춘향가」전 바탕과 「심청 가」일부를 익혔다. 이때 예명을 녹주로 지었다. 

 

어린 박녹주는 권력으로 위협해도 목숨걸고 이도령과의 순수한 사랑을 이뤄내는 「춘향가」중 옥중가와 몽중가가 맘에 들었다. 천지 삼켜 사랑나고, 사람생겨 글내일제 뜻정자 이별별자를 어이허여 내였든고. 뜻정자를 내였거 든 이별별자를 내지를 말거나 이 두 글자 내던 사람은 날로두고 지였던가. 도 련님이 떠나실 적에 지어주고 가신 가사 한창허니 가성열은 동창의 슬픔이요, 수다에 몽불성은 정부사의 설움이라... 

 

어려운 가사를 외다가 잘못 외면 박기홍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회초리 로 때렸다. 목에서는 피가 났다. 도리사 부근에 머물던 박기홍은 「춘향가」 외에 「심청가」를 조금 더 가르친 뒤 선산을 떠나갔다. 소리를 다 배우기도 전에 박기홍 명창은 떠나고,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녹주가 소리를 한다는 소문이 벌써 꽤 났다. 선산은 물론 김천, 왜관, 상주 등지 에서도 초청이 왔다. 이때 벌써 과연 소리는 녹주야 라는 평가를 들었다. 앳된 박녹주가 우렁찬 소리로 「춘향가」 일절을 부르면, 좌중이 다 놀랐다. 

 

14살 되던 해(1918년)에는 노대가 김창환金昌煥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흥보가」중 제비노정기 를 전수받았다. 제비노정기는 박녹주가 가장 애창하던 대목이다. 어린 소녀가 설움을 받아가며 김창환의 소리를 전수받은 덕에 대부분 소리꾼들이 박녹주의 제비노정기를 이어받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박녹주의 세 번째 선생은 대구 강창호였다. 앞산 절에 머물던 강창호는 예순이 다 된 노인이었으나 소리가 쩡쩡했다. 별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리를 퍽 잘하는 편이었다. 강창호에게 박녹주는 초입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 지는데까지, 「수궁가」중 고고천변을 두 달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심청가」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권번 에서 기생수업을 받게 했다. 소리를 배우는 것조차 꺼려하던 어머니와는 달리 박녹주의 아버지는 3년간 딸을 맡기고 돈 2백원을 받아갔다. 대구 달성공 원 앞 달성권번이었다. 달성권번에서 행수기생 앵모의 양딸이 되었다. 당시 행수기생 앵모라면 우리나라 한량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백명의 기생을 거느리고 있었고, 젊었을 때는 미녀 기생으로 명성을 날렸다. 박녹주가 15 살 되던 해에 행수기생 앵모는 환갑을 맞이했는데 이때 서울 한성권번과 조선 권번 기생을 필두로 부산, 동래, 광주, 원산 강경 기생들이 몰려왔다. 1천여명이 넘는 기생들은 대구 방천 옆에 2개의 가설극장을 세우고 앵모 환갑기념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앵모 밑에서 소리 춤 시조를 배우던 박녹주는 단박에 두각을 드러냈다. 앵모는 녹주, 너는 장래 크게 될 거다 면서 격려를 해주었지만 어린 나이에 기생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 지가 받은 돈 2백원을 갚은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는 1919년으로 한 창 기미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1919년 4 월 서울로 갔다가 소득없이 다시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서 여름을 고향에서 보내고, 박녹주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왔다. 아버지 친구집에 머물면서 권번에 드나들었다. 

 

이미 대구에서 김초향 다음가는 소녀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열다섯살 박녹주는 달성권번에서 알려진 김점룡, 음준옥, 조진영 등으로 부터 육자배기를 배웠다. 육자배기는 판소리와 똑같은 소리이나 명창들은 천 박하다고 부르기를 꺼려했다. 조진영에게 배운「화초사거리」는 민요 중에 서도 가장 어려운 것으로 박녹주의 마음에 쏙 들었다. 1920년, 16살이 된 박녹주는 키도 훌쑥 자라 156cm가 되었다. 하룻밤 초청되 어가면 그때 돈 10원을 받던 박녹주는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동기童妓였다. 당시 풍습으로는 기생이라면 화초머리를 얹어야 더 인기를 끌었다. 화초머리 란 낭군을 맞지는 않고, 그저 머리만 얹는 풍습이다. 머리를 얹어주는 사람은 명사이거나 부자양반이었다. 서로 바라는 것 없이 동기가 커서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보답을 하는 식이었다. 박녹주에게 화초머리를 얹은 사람은 변씨라는 충청도 부자였다. 박녹주가 16살 되던 가을에 댕기를 가져간 변씨는 그때 풍습대로 세간 등 모든 것을 그저 사주었다.

 

 변덕스럽던 박녹주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초머리를 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변씨로부터 얻은 세간을 모두 팔아서 딸을 고향으로 데려갔다. 설을 쇠고, 다시 대구로 딸을 데리고 나간 박녹주의 아버지는 이번에는 강릉 에서 대구 부자 박참봉의 돈으로 권번을 차리자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까지 걸어가며 마을마다 명창대회를 열어 많은 돈을 벌었다. 

 

국창이 될 사람

 

국창이 될 사람 원산 명창대회는 박녹주의 창에 반한 앙콜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명창대회 라고 해서 지금의 명창 대회같은 공인받은 것은 아니고, 조금 규모가 큰 감상 회 정도였다. 공연 다음날, 박녹주는 원산 부자인 남백우로부터 초청을 받고 소리를 했다. 여기에서 22살 연상 남백우를 만났다. 보성전문을 졸업한 남백 우는 한창 때라 풍채도 좋고 인자한 편이었다. 남백우는 반세기를 소리로 물 들일 명창을 대번에 알아봤다. 녹주, 자네는 우리나라 국창이 될 사람이야. 내가 소홀히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원하는가? 고 물었다. 박녹주는 늘 고생하던 어머니가 이곳 선산에 살지 말고, 멀리 이사가서 사는 게 내 소원이야 하던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원산에 모셔다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박녹주의 바램대로 남백우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원산 중리의 큰 기와집을 세 얻어주고 이사비용을 댔다. 남백우는 박녹주의 첫 남편이다. 

 

18살 되던 1922년에는 서울에서 송만갑宋萬甲(1865~1939)을 만났다. 송만갑은 우미관優美館 명창대회에 출연하고 있었다. 송만갑은 단가 「진국명산」 을 불렀다. 앞이마와 뒷머리가 툭 튀어나와 재주가 넘쳐 흐르는 송만갑은 천생 예술가였다. 몸집이 작아서 성량은 크지 않았으나 높고 강한 철성鐵聲이어서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였다. 당시 한성권번에 선생으로 다니던 송만갑을 따라 한성권번에 가서 1923년부터 「진국명산」과 「춘향가」를 배웠다. 

 

헌종 때 가왕으로 불렸던 국창 송흥록이 큰할아버지인 송만갑은 이미 10살에 명창의 칭호를 들었다. 박녹주는 송만갑으로부터 「춘향가」 중 사랑가로부터 십장가까지 배웠다. 24살 되던 1928년에는 조선극장에서 팔도명창대회가 열렸다. 지금 종로세무서 위편에 있던 조선극장은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3대 극장으로 손꼽혔다. 전국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다시피한 이 공연에서 재창 삼창 앙콜을 받은 박녹주에게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사람은 고려대 설립자이자 전 부통령인 인촌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또 한 사람은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대학생 김유정金裕貞이었다. 

 

김경중은 일국의 명창이 관철동 전셋집이 웬말이냐며 수운동에 3천원 짜리 집을 사주었다. 뿐만 아니라 박녹주가 1929년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 金正文에게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주고, 매달 1백원이나 되는 비용도 대주었다. 소리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었다. 박녹주가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까지 배웠기에 오늘날까지 동편제 「흥보가」가 온전히 전승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데 는 박녹주가 즐겨 부른 대목이고, 심청가 전 바탕도 김정문으로부터 전수받았다. 박녹주의 홍보가는 김소희를 통해 소리판의 맥을 잇고 있다.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는 「수궁가」일부를 배웠다. 「봄봄」, 「동백꽃」 의 작가 김유정金裕貞은 뛰어난 예술성의 박녹주에게서 어릴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만 짝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는 조선극장서 선생이 소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기를 끄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당신을 연모합니다. 나는 22살의 연전 학생이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오. 그로부터 김유정은 석달 동안 매일 편지를 보냈다. 정말 밤에 본 당신은 아름답더이다. , 나는 그 길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연상의 남편 있는 명창 박녹주를 사랑하는 김유 정의 연모는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혈서로 때로는 납치극으로 변했다. 한번 만이라도 사랑을 받아달라고 애원하던 김유정은 피묻은 편지도 보냈다. 애끓는 마음을 혈서에 담아보냈지만, 박녹주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김유정의 사랑고백은 온 천지로 퍼져나가 원산의 남편 남백우나 김경중까지 다 알게 되었다. 때로는 박녹주에게 너무 매정하다는 비난이 되돌아오기도 했다. 

 

1929년 김유정은 「소낙비」란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 로 중앙일보에 동시에 당선됐다.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은 지 금도 강원도 실레마을에 있는 김유정문학관의 유품으로 남아있다. 결국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제어하기 힘든 일방적인 사랑으로 박녹주 바보가 되어버린 김유정은 1937년 늑막염에 폐결핵이 더해져서 유명을 달리했다. 소설가로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나 30살, 젊음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타계한 것이다. 과한 연모가 엘리트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김유정의 생명까지 앗아간 것일까? 너무 짧고 그래서 더 애틋한 김유정의 삶은 서른 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때 박녹주는 33살이었다. 김유정은 바로 네가 죽였지!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박녹주가 연희전문 학생 신분이던 젊은 소설가의 열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김유정의 죽음을 그렇게 안타까워했다. 

 

12살부터 소리길을 닦아온 박녹주는 20대에 벌써 대명창들과 교제하였고, 여류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28년에는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심청가」를 취입했고, 연이어 빅터 태평양 레코드에서 판소리 네 바탕을 모두 출반하여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1930년에는 관훈동 '성악연구회'에 자주 나가며 평탄하게 지나갔다. 이 성악연구회란 당시 우리나라의 명창인 송 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이 주동이 된 국악인 모임이었다. 1931년 봄, 박녹주는 두 번째 남편 우석友石 김종익金鐘翊을 만났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 갑을 위해 익선동에 성악연구회 사무실로 9천 5백원짜리 집을 사줬다. 그럴듯한 집을 가진 성악연구회는 정식 총회를 갖고 이동백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다. 마음이 넓은 둘째 남편 김종익은 늘 너의 몸은 네 것이지만 소리는 세상 사람들 것이니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방송에 나가는 것, 레코드 취입하는 것, 성악연구회에서 창극하는 것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소리는 세상사람들에게 돌려줘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박녹주는 1935년 동양극 장에서 처음 공연을 가진 「춘향가」(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정정렬 연출)에 서 춘향역을 맡았다. 인물이 곱거나 연극을 잘해서가 아니라 소리 하나만으로 춘향역을 맡은 것이다. 그해 봄 동양극장을 1주일간 인파로 가득 메운 「춘향 가」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장장 5시간에 걸친 긴 창극으로 명사 치고 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국창은 모두 출연했던 이 공연은 아침 10시에서 오후 3시, 오후 7 시에서 자정까지 두 차례 열렸다. 서로 떠밀고 들어오느라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이 부서지는 대소동 가운데도 「춘향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 도령 역은 정남희(6·25때 납북), 방자 역은 오태석, 변사또 역은 5대 명창으로 손꼽히는 김창룡, 곡성 원님 역은 송만갑, 임실 현감 역은 정정렬이 했다. 

 

당대 60대 대명창이 조연을 맡을 정도였으니 「춘향가」는 공전의 히트를 쳤 다. 명창들은 요샛말로 애드립도 잘했다. 대사에 없는 말로 관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한 예로 잔치 도중 운봉역을 맡은 이동백이 송만갑을 보고 여보게 곡성영감. 당신은 어디가서 못 크고 그렇게 작은가 하곤 농을 거는 게 대표적이다. 원래 키가 작은 송만갑을 놀린 것이다. 그러면 송만갑은 운 봉영감은 뭘 먹고 그리 컸소. 좀 알려주소 하고 응수를 했다. 박녹주는 성악 연구회의 창극에서 늘 주연을 했는데 34세부터 춘향역을 내놓았다. 그러나 몸 이 작고 제격이라고 해서 심청역은 39세까지 했다. 성악연구회에서의 창극생 활은 39세까지 계속됐다. 

 

1938년 가을에는 「숙영낭자전」을 동양극장서 초연初演했다. 전통적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같이 깊고 해학이 짙은 맛은 없었지만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박녹주는 숙영낭 자역도 맡았다. 「숙영낭자전」은 현진이란 백白진사의 외동아들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녀 숙영낭 자와 사랑 끝에 결혼한다는 줄거리이다. 숙영낭자역을 맡은 박녹 주는 극 중 남편 백현진의 어머니 역을 맡은 임소향林小香에게 절을 해야했다. 임소향은 박녹주보다 열 살 넘게 어렸다. 큰언니로 모시던 박녹주의 절을 받는 게 미안해서 임소향은 어쩔줄 몰라했 다. 그러면 박녹주는 작은 소리로 때려 죽일 년, 절 받아라 하면서 절을 했다고 전한다. 대부분 창극에서 주역을 했으나 37세가 된 1941년에 공연한 「수궁가水宮歌」에서는 단역인 자라 어머니 역을 맡았다. 

 

그런데 창극중에서는 이 「수궁가」가 가장 히트를 했다. 그러나 소도구가 하도 많아 지방공연을 갖지 못했다. 「수궁가」의 주역인 자라 는 임방울이, 토끼는 김연수가 맡았고 수궁용왕은 조상선이 분했다. 천생의 뛰어난 목소리를 가진 임방울은 허풍좋고 우직한 자라역을 잘도 해냈는데, 사실 임방울과 어머니역을 맡은 박녹주는 고생을 엄청했다. 딱딱한 자라옷을 등에 쓰고 엉금엉금 기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공연한 때가 여름이면 땀이 온 몸을 적셨다. 

 

둘째 남편인 김종익이 1941년 봄, 이질로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타계하기 전, 박녹주는 이화중선李花中仙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김종익은 이달에 벌면 다음달에 저축을 하라고 했으나 한귀로 흘렸다. 만년에 생활고를 겪으면서 박녹주는 남편 김종익의 충고를 고깝게 여기고 이재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해방을 맞고 처음 한 일이 여성국악동호회 결성이다. 그때 까지 국극사 조선 창극단 등 남자들이 이끄는 예술단체가 있었지만 모든게 남성 위주였다. 여성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1945년 봄 박귀희, 김소희, 임춘앵, 정유색, 임유앵, 김경희 등 30여 명의 여성으로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본격적인 여성국 악운동의 시작을 예고한 것이다. 한국전쟁시 정남희 등이 월북을 강요했으나 잘 모면했으며 명창 30여명과 함께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1952년까지 군을 돌며 「열녀화」를 공연하였다. 

 

1952년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였고, 대구에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하였다. 1960년부터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64년 12 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귀희는 송만갑, 김창환,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등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다 남자 명창들의 맥이 거의 끊어져버린 인간문화재 시대에 김여란과 함께 쇠퇴하는 소리판을 굳건히 지켜낸 국악계의 어머니이다. 대구의 국악인 박기환씨는 박녹주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국악인이었다며 국립국악원을 만들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1971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활약 하였고, 그의 소리는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등이 이어받았다. 

 

늑대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여성국악인으로서 다소 거칠다 싶은 목소리를 지녀 단단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 명창 박녹주는 대구·경북보다 중앙무대에서 더 큰 활동을 펼쳤다. 타계 일년전인 1978년 고향 선산에서 열린 제자들과 마지막 고별공연에서 백발가를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박녹주는 동편제 창법의 국보적 존재로「흥보가」명창이 자 판소리계에 우먼파워를 심은 인간 문화재이다. 평생을 소리로 보낸 박녹주에게 이 이상의 영광은 없을 것이다. 박녹주에게 소리를 배운 사람은 상당히 많다. 박녹주는 박귀희에게 송만갑제가 그대로 살아 있는 「흥보가」를, 정의진에게 박녹주제 「흥보가」를 전수했다. 판소리 기본인 다섯마당 말고도 정정렬이 유일하게 부른 「숙영낭자전」 을 배웠다. 「숙영낭자전」은 김여란과 이기권이 같이 배웠으나 이기권은 일찍 죽고 김여란은 많이 잊어버려 유일하게 박녹주만 알던 것을 박초선, 한농선, 조상현, 조순애, 박송 희 등에게 전수했다. 서편제가 호남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동편제는 영남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고 그 중심에 박녹주가 있다.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명창 박녹주 노래비는 경북 구미 노상동에 세워져 있다

 

 

 

 

[경북여성 인물사] 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 (저자:최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