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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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5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2)

  • 특집부
  • 등록 2021.01.04 07:30
  • 조회수 192,001

                   국악신문 특집부  

 

제43호 20면 판소리 명창 임방울 (1).jpg

 

 

제13회에서 밝힌대로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 수립은 국악신문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1996년 신년호 1월 23일자 제33호에 발표한 ‘96국악신문 기회사업에 의하면 제1사업이 예능보유자 인물사진 및 전통문화사진 자료 학교 보급이다사업 반향이 교육에 방점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물론 공식화 한 것은 96년 들어 시작된 사업이지만 사실은 국악신문의 기조이기도 했다이 사업의 기본은 역대 국악인들그 중에서도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正位)시키는 일과 그 위상을 현장의 교육과 공연을 통해 재정립시키는 일이다이를 위해 국악신문은 세 방향을 취했다하나는 민속놀이에 민속음악을 위치시키고 이를 국악으로 일반화 하는 논리이고둘은 기사를 통해 민속음악의 역사와 가치를 제고시키고셋은 민속음악 명인의 추모와 기념사업 추동(推動)이다이는 창간호로부터 유지시켜온 기본 방향이다이번 회에서는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시키는 일을 주목하기로 한다.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것은 역대 명인들의 존재를 사진과 해설을 통해 국악의 기둥임을 제시하였다지면 기사로는 <명인>을 게재하고명인들의 기록(사진)을 수집하고자료를 교육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창구 역할을 했다

 

제47호 16면 가야금병창 박귀희.jpg

 

이 중에 <명인>은 표3 전면을 통해 연재를 했다. 사진의 작품성(Quality)로나 해설의 내용면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사진과 해설을 정범태 선생이 맡았는데, 최고 명성의 기록 사진가로서 1세대 명인들을 직접 촬영한 원로라는 점에서 특징이며 강점이었다.

 

<명인>은 씨리즈 넘버링(Numbering)이 되어있지 않고 결호(缺號)가 있어 정확하진 않지만 현재로서는 제40호부터 연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40호를 전후하여 신문사는 종로구 와룡동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이전하고, 편집은 당시 연세대학교 박사과장에 있던 우실하 선생이 편집국장으로 함께 활동했던 시기이다. 신문사의 이런 변화 중에서도 단영 지면의 개선이고 그 중에서도 <명인> 면은 연재는 돋보인다. 소위 와이드 기사로 전면 통이다. 우선 사진이 내용의 보완재가 아니라 주제로 처리되어 시원하여 가독성을 높여 준다. 사진과 해설 집필은 편집고문 정범태이다.


제51호 24면 북춤 박병천.jpg



40호의 16면 <명인>은 "민초의 한 안고 유랑 예인 생활 60년 김재원이다명인은 중요무형문화제 제3호 남사당놀이이다사진은 김재원 선생이 담배대를 물고 두 번째 과장인 버나 접시를 돌리는 장면을 게재했다41호는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김병섭은 우도농악의 꽂깔설장고의 명인으로 김호규 대표의 부친이다. 9년 전의 생전활동 사진을 수록하고 정읍 고향에서 11살부터 농악의 길을 걷고 30여년을 우도농악 2세대 명인으로 산 역정을 기술했다42호는 "진도씻김굿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김대례이다42호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다이후로 가야금 병창 박귀희호남농악 채상소고 백남윤진도북춤 박병천 명인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재확인이 되는 것은 <명인>의 대상은 정악 보다는 민속악에 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이고,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여부를 떠나 실질적인 세평(世評)의 명인까지 포괄 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제도권적 시각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을 알 수 있다. 해설 내용은 필자 자신이 직접 만난 명인들에 대해서는 이력보다는 종목의 고유 가치나 유사 종목과의 변별성을 중심으로 기술했고, 선대 명인의 경우는 기존 이력과 사승(師承)관계, 당대 평가 등을 저널리즘적인 토픽 위주로 기술했다.

 

1997316일자 제50호에서 "판소리 흥보가 명창 장월중선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명인> 코너는 장기 기획물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역대로부터 현역의 명인 명창을 주목한 기사는 이후 다양한 코너와 특집형식으로 계속 기사화 되었다. 주요 편집 방향이기 때문이다. <명인> 기획 기사는 당시 다른 매체 기획 기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의미있는 기사이고, 오늘의 빅데이터 시대에도 주목되는 텍스트이다.

 

결국 이 <명인> 코너는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이면서 국악신문의 독보적인 기획기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