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향사 박귀희 선생은 가야고 병창의 명인이요 명창으로 일세를 풍미한 분이다. 오태석을 중심으로 싹이 돋던 가야고 병창을 더욱 가꾸고 보듬어서 어엿한 전통음악의 한 장르로 반석 위에 올린 분이 곧 박귀희 선생이다.
헌신적으로 가꿔 온 병창 음악이 튼실하게 자리를 잡아가자 향사 선생은 촌각을 아껴야 할만큼 분주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출연, 혹은 일반 무대공연으로 동분서주하며 독보적인 명창 생활로 쉴 틈이 없었다. 이 같은 치열한 연주 생활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비친 향사의 이미지는 아름다운 한복의 섬섬옥수로 가야고 병창을 하는 순수한 예인의 상으로만 각인되어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향사의 시대적 진면목은 무대예술적인 인기나 인상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분의 국악사적 공적이라면 대중적 외형에 있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본 내면적 역사관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악교육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 향사의 개척자적인 선견지명이 곧 그것이다.
광복 이후에 민족의 앞날과 국가 장래를 생각했던 우국지사나 선지자들이 교육문제에 집착했듯이, 향사 선생은 일찍이 국악교육 문제에 깊은 뜻을 두었다. 서구 문명의 밀물 속에서 국악을 살려내고 민족 고래의 정서를 지켜내는 일은 교육밖에 없다는 투철한 철학을 신조로 삼고 몸소 궁행한 분이 다름 아닌 향사 선생이다.
1950년대 말엽부터 선생은 국악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하는 중심부에 섰다. 내부적으로는 당시 민속악계의 어른이었던 박헌봉 선생, 또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지기였던 김소희 명창으로 팀을 이루고, 외부적으로는 김은호 화백을 비롯한 이병각, 문용희 등 각계 명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 내며 국악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향사 특유의 추진력과 친화력과 결단성은 급기야 국악예술학교의 개창을 이뤄 내는 중심 역할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남산 위 허름한 건물에서 출발한 국악예술학교는 실개천이 흘러서 장강을 이루듯, 이제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더불어 한국 국악교육계의 큰 갈래를 담당해 가는 양대 산맥의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박범훈 교수가 이사장으로 있고, 홍윤식 박사가 교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오늘의 국악예술중고등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향사 박귀희 선생의 역사적 평가는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느 예술가들은 무대 활동과 대중적 인기에 매몰되고 자족한 반면, 향사 선생은 예술 활동과 더불어 교육의 중요성을 선각하고 그 씨앗을 몸소 뿌리고 가꿔 냈다. 향사의 남다른 위대성은 바로 이같이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보다 앞서 시대를 읽고 자신의 비전과 신념을 단호하게 실천해 온 점이라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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