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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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인생을 발견 못 한다면 연극이 무슨 소용인가"(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어느 한 곳에 빠져드는 미치광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낸다. 패러다임을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세운다. 연극계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20세기 러시아 연극계를 대표했던 연출가 겸 배우 스타니슬랍스키가 대표적이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미친 광인들처럼 연기라는 예술에 탐닉했다. 연극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예를 들면 이랬다. 첫 공연 막이 오르기 몇 시간 전, 배우 한 명이 쪽지 한장을 받는다. 쪽지에는 세 살배기 딸이 죽었다고 적혀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아내를 혼자 둘 수 없다며 그는 황급히 떠난다. 도중하차한 그 남자의 역할을 대신 맡은 볼레슬랍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그 배우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 배우도) 스스로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미국 연극 연출가이자 평론가 아이작 버틀러가 쓴 '메소드'(원제: The Method)는 미치광이 연기 광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자신의 감정을 모두 캐릭터에 쏟아부은 배우들의 서사이자, 그들을 연기라는 깊은 우물로 데려간 악마의 연기술 '메소드'의 흥망을 차분히 톺아본 연구서이기도 하다. 메소드 연기를 확립한 러시아의 스타니슬랍스키와 그의 제자 볼레슬랍스키에서 시작하는 책은 미국에 이 연기법을 안착시킨 리 스트라스버그와 해럴드 클러먼, 그들을 계승한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등 무수히 많은 배우와 연출가를 조명하며 20세기 할리우드 주류 연기법으로 자리매김한 메소드의 비밀을 파헤친다. 이런 페레지바니예를 무대에서 구현하기 위해 스타니슬랍스키는 '시스템'이란 테크닉을 고안했다. 기억력처럼 정서적 인상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끄집어낼 수 있는 '정서기억', 배우가 실제 현실의 차원에서 자신이 창조하고 상상한 다른 삶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급진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감정 상태인 '매직 이프' 등 다양한 방법 등으로 이뤄진 연기 체계였다. '시스템'에 기반한 스타니슬랍스키와 동료들의 연기는 혁명적이었다. 읊조리는 듯한 배우들의 연기는 뛰어난 무대장치, 기이한 리듬과 절제된 연출 스타일을 통해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들의 연기 속에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는 망작에서 걸작으로 변모했고, 체호프는 러시아 최고의 극작가로 등극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명성은 세계로 뻗어갔지만, 시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이 잇달아 일어났다. 스타니슬랍스키 제자 중 일부는 미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은 미국에서 '메소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메소드를 고안한 주인공은 리 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등 뉴욕 연극인이었다. 그들은 '그룹 씨어터'를 설립, 러시아의 '시스템'에 미국적인 뉘앙스를 접목해 '메소드'를 고안했다. 이 연기법은 할리우드로 건너가 말런 브랜도, 몽고메리 클리프트 등이 선보였고, 곧 할리우드를 장악해갔다. 특히 스텔라 애들러의 제자 로버트 드니로가 메소드를 각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캐릭터와 관련된 인물을 사전에 인터뷰했고, 역할에 필요한 습관을 익혔다. 대본을 세밀하게 분석해 대사를 직접 쓰는 경우도 많았다. 근육을 키워 권투선수 몸을 만들었다가 은퇴 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27㎏이나 체중을 불렸다. 드니로 이후 연기파 배우라면 모름지기 메소드 연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과장이 덧붙여지고, 메소드에 대한 다양한 조롱과 가십이 생성되며 메소드의 위상은 점차 추락했다. 배우의 일상을 침범하는 정서기억도 문제였다. 연기를 하며 배우들은 감정이 피폐해져 갔다. "경험과 감정으로 가득 찬 아주 깊은 우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우물을 확실하게 꽉 닫아둘 뚜껑이 있어야 해요. 필요할 때 뚜껑을 열고 우물 밑으로 내려갈 수 있어야 하지만, 뚜껑이 열린 채로 계속 둬서는 안 돼요. 그랬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우물 안에서 얻은 트라우마 때문에."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 힘겹고 부작용이 큰 메소드는 블록버스터 시대를 맞아 더는 각광받지 않는 한물간 연기법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시대를 관통한 연기자들의 질문과 고통이 메소드 안에 배어 있다. 특히 예술에 대한 끝없는 집착, 인생 경험을 정화한 다음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변환시켜 관객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마음, 무엇보다 삶을 무대에 올리려는 메소드 배우들의 집념은 여전한 울림을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극장에서 인생을 발견할 수 없다면 연극을 만드는 일이 다 무슨 소용일까?" 윤철희 옮김. 7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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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스승을 기리는 진도북놀이 합동 추모공연지난 9일 진도군북놀이보존회(회장 이희춘) 주최 주관으로 진도북놀이 합동 추모공연이 진도군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개최되었다. 진도북놀이 3개류 합동 추모공연은 다음 5분 스승에 대한 추모제이다. 고 장성천 선생님 30주기 고 양태옥 선생님 20주기 고 박관용 선생님 15주기 고 김관우 선생님 10주기 고 김길선 선생님 9주기 다섯 분의 예능보유자 스승님을 모신 합동추모행사는 처음이다. 그간에 고 박관용선생님 보존회에서 14주기 동안 매년 추모행사를 개최해 왔다. 올해는 문화진흥기금 사업으로 합동추모제 및 공연을 갖게 되어 더욱 뜻깊은 날이다 많은 지인과 문하생 특히 장성천 스승님 유가족과 원로 제자분들이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무형문화재 제19호 '만가' 예능보유자 김기선.오주창 두분께서 잔을 올려 생전에 나누었던 두터운 정을 보내는 순간이다. 초헌은 김병천 보유자와 보존회원이, 아헌은 박강열 보유자와 보존회원이, 종헌은 이희춘 보유자와 보존회원이 헌작을 올렸다. 스승에게 잔을 올리며 마주 본다. 그리운 마음이 바다처럼 밀려온다. 제자들이 준비한 추모공연에서 3개류 진도북놀이는 그 어느때 북소리보다 마음을 크게 울린다. 북에 힘이 실리고, 마음이 실려 울려 퍼지는 공명에는 온 천지가 울린다. 이 아름다운 북소리로 꽃을 피웠으니 어찌 다섯 분의 영가께서 기뻐하지 않으셨겠는가? 스승님들도 어느새 나비가 되어 북과 채를 들으셨다. 사뿐사뿐한 발사위 총총걸음으로 팔을 하늘을 향해 들었다 내려 놓는다. 오늘은 이렇게 먼저 가신 스승과 진도북춤의 신명과 흥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날이다. 그리고 스승님의 왕생극락과 명복을 올리는 날이다. 무형문화유산 진도북춤이 다음 세대에서도 온전히 계승할 수 있도록 천지신명께 비옵니다. 반주에는 김영순(쇠),최미령(징), 노준영(장고),정창조(태평소), 진도북춤은 신필순,박연희,류은경,정은아 회원이 추모 공연을 올렸다. (진도군북놀이보존회 이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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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2편)가라후토에 맺은 의형제 박득수는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화태에 들어가셔서 산중에 사는 누나 집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기로 결심한다. 누님이 그저 밥은 먹여 주지만 옷도 안 사주고 돈도 안 주고 하니까 더욱 눌러 앉을 수가 없게 된다. 박득수는 누님 집에서 3년 있다가 돌린스크 시내로 내려 왔다. 일본사람의 꼬임에 모집으로 들어온 조선사람들을 만나 같이 잡일을 하게 된다. 어른들과 같이 살면서 숙소도 함께 하면서, 모두 정이 들어서 형님 아우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내게 되는데 박득수는 가장 막내였다. 5년후 가장 나이 어린 박득수는 글도 아는 정직한 청년이어서 형님들에게 많은 사랑과 희망을 받게 된다. 장가를 갈 나이가 들자 가장 맏형 고 오지상이 당장 장가를 가야한다고 한다. ”수!, 너 여기 있지 말고 한국에 나가 가주고 장개 들라. 여기서는 여자들이 없다 보니께 일본 여자한테 장개 가지 말고 한국 가서 장개 들어 가지고 오라! 우리는 조선에 처도 있고 자슥도 두고 와서 이렇지만은, 너, 다까하라, 너는 이렇게 해서 나이 어린게 안된다. 고향에 가서 장가를 들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어라" 그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사람들과 누이 내외가 조선행 배삯을 거둬주어서 박근수는 24살에 고향에 나가게 됐다. 8년 만에 나간 조선에서 집안 어른 중신으로 아내(강순예)와 결혼하게 됐다. 가라후토 강제모집과 이산 박득수는 결혼 후 조선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박한 희망은 허사가 되어 버렸다. 안성면 사무소에서 모집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6년, 1937년에 흉년이 들었지. 2년 동안에 흉년이 들어서 농민들은 먹고 살기가 매우 바빴어. 마침 그럴 때 일본이 지나사변으로 중국과 싸우다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돼 노무자가 부족했어. 흉년이 든 상황에서 일본은 모집을 시작했단다. 어느 탄산이 모집한다는 광고가 여기저기 붙었었지.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생활이 바쁘고 먹고 살기가 바쁜데 모집을 한다니께, "아! 일할 데 있으면 어디든지 가야지!” 라고 하니 일본 놈들이 그저 막 강제오 데려 간거야. 1938년에 네 둘째 박기남 삼춘이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모집가서 탄산에서 사고를 당하고 불귀가 됐어." 아버지가 나에게 그 당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처음에는 모집 광고로 해서 많은 조선인들을 데려갔는데 점점 모집을 광고 없이 하고 다음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강제연행으로 바꿨다. 일본회사가 모집을 하면 조선총독부를 통했는데, 총독부에서 어느 면에서 몇 명을 보내야 한다면 조선 앞잡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영장을 전달했다. 박득수는 이미 가라후토에서 살다 왔으니까 모집영장이 잘못 나왔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토리우치보(헌팅캡)를 쓰고 당꼬바지를 착용한 형사가 새살림을 시작한 신접 살림집으로 들이닥쳤다. ”너, 다까하라, 이리 오라! 너 영장 받았니? 왜 면사무소에 안 왔니?" "나는 벌써 화태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영장을 내게 잘못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빠가야로! 너는 무조건 가야해! 빨리 준비해서 나와" 이렇게 새신랑 박득수는 강제모집으로 결혼 일년반 만에 가라후토로 끌려가게 됐다. 면사무소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백 여명의 모집을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 니무라와 마쪼까 두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는 동네 경찰서에서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 앞잡이들이 와서 "우리는 내선일체다 천황의 명령이다”라고 하면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지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달았다. 이제 결승전이다 보니까 1년간 가라후토로 가서 일해라”고 윽박지르고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노예 취급을 했다. 25살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운명과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우리가 나가면 집에 일할 사람이 없고 어머니는 굶어 죽는다”고 애원을 하니까 앞잡이들은 ”집에 여자들이 있으니 1년간 살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고 달랬다가 발로 차고 때렸다. 앞잡이는 총독부 명령에 따라서 국민들은 꼭 가야만 한다고 했다. 아니면 니네 가족은 배급을 못 탄다. 아니면 아직 어린 여동생이나 딸을 위안부(정신대)로 내놓으라고 칼을 휘두르며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무주군 안성면에서는 가라후토에서 온 일본인 사무소장과 김수문이라는 함바(飯場, 현장 근처 노동자 숙박소)사장을 맞이했다. 가라후토에 가면 얼마의 돈을 번다든가 어떻게 산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도 없이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그 때 안성면에서 모인 사람들이 열둘인가? 열넷인가? 그 정도 모였다. 함바 사장인 김수문은 다른 지역으로 사람을 모우러 나가고, 일본인 사무장은 남아서 징용을 가는 조선인들을 감시했다. 그날 밤은 여관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기차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일본인들은 그 당시 공습 때문에 무서우니 밤에 다녔다. 부산에 도착하니까 소독소로 보내서 모든 일행을 소독하고 목욕도 시켰다. 밤 아홉시 쯤 되어서 부두에서 연락선 공고마루에 승선했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부산항에서 출발하여 일본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으로 갔다. 아침 해 뜰 무렵에 도착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합쳐져서 열여섯 명이 한 그룹이 되어 함께 다다미(たたみ,타타미)를 배 가장 밑바닥에 있는 하등실 공간에서 모두 다 잠을 잤다. 그 때가 6월, 여름이니까 춥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하관에서 동경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동경에서 또 하루 자고 기차를 갈아타고 아오모리까지 가서 다시 하루 자고 거기서 북해도 하코다테까지 배로 갔다. 북해도 북부에 위치한 와카나이에 가서 사할린 섬 오도마리항까지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부득이한 여행은 8일 이상 걸렸다. 박득수는 가라후토에서 오치아이(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다. 깊은 산 골짜기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는 일은 힘들었지만 할만했다. 6개월 후 조선에서 아내 강순예가 화태로 왔다. 박득수가 배치된 산판은 오치아이에서 한 630리가 되는데 이미 30명의 모집으로 온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어른들이 새집도 얻어 주고 살림살이도 장만해 주었다. 가족들도 한 여섯, 일곱집이 있어서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큰 고생은 안했다. "개인집에서 그 때는 한달에 2원씩 집세 받고 세 놓고 그랬어요. 방 두 칸짜리 이런데서. 그때는 주로 화롯불, 난롯불 놓고 거기서 밥 해 먹고 그렇게 살고 했어요.” 산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못한 분들이어서 강순예가 편지나 문서를 작성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인한테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남편 박득수도 지식인으로서 브리가지르(бригадир,조장, 팀장)로 일했다. 벌목공들은 2년 동안의 계약을 맺고 왔는데. 기한이 지나도 일본 당국은 조국으로 돌려 보내지 않았다. 월급은 다 주지 않고 조금씩 내주었다. 나머지는 조선에 갈 때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끝까지 지켜지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판에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박득수도 역시 시리도리(현 마카로프) 제지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거기에서 일년 동안 일하고 조선사람들 한 30명을 모아서 니또이 산판에 가서 벌목일을 시작했다. 3년 후 1942년 조선에 살고 있는 친척들한테서 편지가 왔다. 조국에서는 너무나 살기 어려우니까 가라후토로 불러 달라고. 그래서 증명서를 보내 홀로 계신 어머니와 큰 형 식구 5명이 니또이 촌으로 오게 했다. 몇년 후 고모 가족도 우리가 사는 니또이에 이주하여 가까운 곳에서 함께 등 부비고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사람들은 기르던 앵무새와 개까지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조선인들은 영영 귀환하지 못했다. 남의 나라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강제동원 되어 잠시 있다가 돌아가는 줄만 알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4만3천 여명의 이산가족이 해방된 사할린에 나타난 것이다. 언제가 조국과의 상봉을 꿈꾸며 이국 만리에서 낯선 민족들과 뒤섞여 살아야만 했다. 러시아 180여개 민족 중 식민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힌채.......소련은 일본이 버리고 간 탄광과 산판. 펄프공장에 투입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불안정한 조국은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다. 남화태에 남겨진 30여 지역 탄광에서 돌아가는 기계는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이 작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양인의 몸 사이즈에 맞춘 탄광 지하 갱도는 서양인의 체구에 전혀 맞지 않았다. 남겨진 조선인을 관리하기 위해서 소련 정부는 큰땅(대륙)에 사는 고려인 지식인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완장을 채우고 우리를 감시하고 체계적 시스템을 조직하여 노동력을 착취해 나갔다. 배급을 받아야 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져 가고 일본말과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소련 정부에 적응하는 동화정책을 실시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조선말과 조선 이름 대신 러시아 이름으로 바꾸어야 불이익을 안 받게 된다. 사할린 한인 국적도 조선, 일본, 소련, 북한, 러시아 등으로 5번 변경되면서 국적에 따라서 이름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2세부터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젖줄같은 고향땅 논밭전지와 집문서를 맡겨놓고 온 사람,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를 친척집에 맡겨놓은 사람, 어여쁜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사람 등등 사연도 많고 많다. 조선인들은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미쳐서 죽고 얼어죽어 나갔다. 장가도 못간 청년들은 남편 잃고 여러 명의 아이가 딸린 여자와 살아야 하고, 두고 온 가족을 그리다가 평생 재혼도 하지 않고 홀아비로 살다간 사람, 산판과 탄부에서 죽도록 일하다가 지병을 얻어 일찍 죽거나 나이를 먹어서 죽은 사람들은 결국 고향으로 못가고 가라후토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특히 정신대로 끌려와서 버려진 어린 여성들을 평생 껴안고 남편으로 아들 딸로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노래 고향을 그리던 박득수는 1977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 공동묘지에 영원히 안치했다. 매년 8월 15일 추석날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묘옆에 묵묵히 서 있다. 3명의 아들과 2명의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그리운 아버지를 소환해 본다. 오늘은 아버지를 위한 시를 준비했다. 세월을 잘못 만나서 낯선 땅에서 억울하게 살다가신 아버지의 이산과 억류, 미귀환에 대한 아픔을 시로 지어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두 손으로 바쳤다. 나는 천천히 낭송을 해 드렸다. <아버지의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년에 청춘만 늙고 추석밤 청명한 보름달 바라보며 철새따라 가고팠던 아버지의 노래! 일제에 억울하게 땅을 빼앗기고 할아버지 아버지 형님을 여의고 열여섯 젊은 시절 가장이 되어 일제시대 엄동설한 화태로 들어가서 산판에서 만고풍상 겪으셨고 스물다섯살 고향가서 아내를 얻었지만 꿈같은 신행도 얼마 못가고 강제모집 가라후토로 끌려갔네 산판에서 위험한 벌목장에 목숨을 바치시고 소련시대 위태로운 강에서 유송하시고 토끼같은 사남사녀 팔남매 밝게 키우시고 조선민족 풍습과 예의범절을 가르치시네 육년동안 험한 중풍에 시달리셨으나 자식 앞에서 흉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그리운 고향주소 소리없이 불러보시네 매년 팔월십오일 아버지 묘비명에 서있네 살아생전 아버지의 소원을 못 들어드려서 손자손녀들 사할린에 뿌리를 내리지만 밀양박씨 대대손손 영원하리라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 한 구절은 평생 그리워하던 고향집 주소였던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는 아버지의 노래이고 영혼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잊지 않으려고 늘 우리들에게 되새겨 주셨던 것이다. 너라도 반드시 찾아가서 밀양박씨 집안 어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갈 수 있었다. 나는 11년전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땅을 찾았지만 우리 집안을 알던 이웃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빚이 되었는데. 2019년 어느 봄날 다시 무주땅을 찾아가서 안성면 이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이 총 14명이 강제징용으로 차출되었는데, 돌아 온 사람은 단 1명만 부상을 당해서 장애자가 되어 돌아왔는데 후에 그 자식들은 이민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의 이름이 박힌 호적등본 사본을 안성면사무소에서 신청해서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 박득수와 주소가 찍힌 호적등본과 아버지가 살던 집터의 흙을 고이 담아서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사할린에 남겨진 아버지를 뵐 낯이 있게 되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2달후 7월이 되어 사할린에 들어갔다. 사할린 땅에 묻히신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의 묘지를 찾았다. 아버지 혼령 앞에 호적등본을 보여 드리고 고향집 주소를 큰소리로 읽어 드렸다. 이어서 고향집 흙을 뿌려 드리면서 술 한잔을 올리자 나는 아버지가 읊으시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아들에게 손자에게 일러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집 "삼천리 금수강산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12번지” 아버지! 이제나마 편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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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고판사' 연말 발표회를 마치고'고판사'의 2023 연말 발표회와 총회가 10일 오후 3시 동숭동 대학로에 위치한 서울 문화재단 예술인지원센타 5층 프로젝트룸에서 열렸습니다. 비영리민간단체 '고법과 판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판사라는 독특한 명칭과 새로운 운영 방식으로 많은 국악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9일 한글날 강감찬전국국악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하였습니다. 바쁜 한해를 보내 은 고판사는 2024년 더 나는 미래를 위해 사무총장과 감사 그리고 임원들을 보강하여 조직을 강화하고 금년결산과 내년예산을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곧 이어 발표회에서는 1달전 미리 신청한 20여명의 회원들과 관객들의 자유스러운 소리 발표가 있었습니다. 발표는 5분으로 자유스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판소리를 공부한 지 1년도 채 안된 회원들 부터 이미 30년이 넘은 프로 소리꾼까지 회원으로써 부담없이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격식도 그리고 틀려도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다음은 오늘 발표회에서 22명의 회원들이 그동안 닦은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 이승한: 요령은 ~(심청가) 2. 박세순, 노영란: 범피중류~(심청가) 3. 김대현. 가지마오 (흥보가) 4. 구정수. 만첩청산 (춘향가) 5. 정영렬: 싻바느질 (심청가) 6. 배금희: 기가막혀 (심청가) 7. 박선주: 배는 고파 (심청가) 8. 남은진: 일개한퇴 (수궁가) 9. 박애숙: 타루비 (심청가) 10. 김순정: 제비노정기 (흥보가) 11.정진택:쑥대머리 (춘향가) 12. 최미자: 적성가 (춘향가) 13. 한진희: 두손합장 (흥보가) 14. 김기찬: 예 소맹인(심청가) 15. 양정인: 주과포혜(심청가) 16. 박정덕: 흥타령 창밖에(남도잡가) 17. 이여심: 고당상(적벽가) 18. 장주산: 일절통곡(춘향가 ) 19. 김도연: 흥보가 쫒겨나는 대목 20.이규호: 음식타령(흥보가) 21.배명옥: 새타령(적벽가) 22.김정애: 범내려온다 (수궁가) 고판사는 한분의 명창(보유자) 선생님을 중심으로 우리 소리의 어느 계파로 이어지는 하나의 뿌리보다는 변천과 발전으로 여러가지 형식으로 변화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소위 각자 공부하는 단체입니다. 판소리는 각 분류마다 특성이 서로 다르고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판소리는 무대, 창자와 고수, 청중으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수련하고 배운 것들을 표현하는 기술 또한 필요합니다 실제 많은 분들이 군중앞에 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대부분 적지 않게 긴장합니다. 고판사는 여러 분류와 많은 선생들께 배운 소리를 두달에 한번씩 공연장을 마련하고 희망자를 모집하여 각자 발표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스템을 마련하여 추구해 가고 있습니다. 세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지정된 판소리(2003년 11월7일)는 무엇보다 현실비판 의식에 따른 민중성과 판소리 사설에 따른 문학성, 음악적 짜임새에 따른 예술성을 손꼽을 수 있겠습니다. 판소리는 소리(창), 아니리, 발림 등 판소리 3요소를 갖추어야 하고, 여기에 음악적 3요소인 성음(음색), 악조(음계), 장단(리듬)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어야 합니다. 그만큼 연습을 많이 해야하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런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 꽃을 피어나게 하였습니다. 청중을 감동시키고 공감대를 만들어서 국악 향유자들과 함께 판소리 전승단체 고판사 공동체 결속에 기여를 하였습니다. 민속음악의 꽃, 판소리는 이제 세계무대에서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고판사는 작은 나비의 날개짓으로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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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올해 최고의 시집 5권'에 김혜순 시인 번역본 선정영문으로 번역돼 미국에서 출판된 한국 시인 김혜순(68)의 작품이 뉴욕타임스(NYT) '올해 최고의 시집 5권' 중 하나로 선정됐다. NYT는 8일(현지시간) 올해 나온 신작 시집 중 최고의 작품 5권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김 작가의 '날개 환상통(Phantom Pain Wings)을 포함했다. 이 시집은 김 시인의 등단 40주년이던 2019년 문학과지성에서 출간됐다. 영문판 번역은 김 시인의 전작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와 '죽음의 자서전'의 번역을 담당한 번역가 최돈미 씨가 맡았다. NYT는 이 시집에 대해 "영적이고, 기괴하고, 미래가 없는 상황 등 다양한 종류의 공포가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시집이 거시적인 측면과 미시적인 측면에서 미학적인 힘을 전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시인은 지난 7월 하버드대 도서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T. S. 엘리엇 메모리얼 리더'(T.S. Eliot Memorial Reader)로 선정돼 낭송회를 여는 등 미국 문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앞서 김 시인은 지난 2019년 영문판으로 나온 '죽음의 자서전'으로 번역 시집에 수여되는 영미권 최고의 상으로 꼽히는 캐나다 그리핀시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한편 NYT는 한국계 미국 시인인 모니카 연의 시집 '프롬 프롬'도 올해 최고의 시집 5권 명단에 포함했다. 연 시인은 텍사스주(州) 휴스턴에서 성장할 때 아시아계 이민 2세로서 겪은 경험을 담은 연작도 이번 시집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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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라이어 케리 "음악이 곧 삶이자 계획…나에 대한 믿음이 중요"(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나에게는 음악이 곧 삶이었다. 늘 음악만이 유일한 계획이었다." 팝 디바 머라이어 케리가 자신의 이름을 딴 첫 회고록을 출간했다. 케리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1990∼2000년대 '러브 테이크스 타임'(Love Takes Time), '히어로'(Hero), '이모션스'(Emotions), '원 스위트 데이'(One Sweet Day), '위 빌롱 투게더'(We Belong Together) 등의 메가 히트곡을 남긴 팝스타다. 그는 셀린 디옹, 휘트니 휴스턴과 함께 이른바 세계 3대 디바로 불리며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곡을 19개나 배출했다. 특히 역사상 가장 성공한 캐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불러 '크리스마스의 여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곡은 케리가 직접 작사·작곡에 참여한 곡으로, 발매 이후 30년 가까이 됐어도 연말만 되면 세계 주요 차트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명곡으로 자리매김했다. 케리는 회고록에서 이 같은 찬란한 커리어 이면에 있던 음울했던 과거를 숨김 없이 드러냈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케리는 '혼혈'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고민을 거듭했고, 이에 따른 차별을 겪어야 했다. 케리는 "'너 검둥이지!'(라는 말이) 내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자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며 "나에게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나의 비밀, 나의 치욕이었다. 나는 얼어붙었다"고 되돌아봤다. 그를 둘러싼 가족 또한 그에게 큰 상처가 됐다. 회고록에는 사랑과 지지보다는 정서적 학대와 일탈을 거듭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가감 없이 묘사됐다. 케리는 "나는 우리 가족에게 내가 '가발을 쓴 ATM(현금인출기)'이었음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며 "나는 가족에게, 특히 어머니에게 무척 많은 돈을 주었지만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다. 가족은 나를 무너뜨려 완전히 통제하려고 했다"고 적었다. 또 "우리 가족은 내가 불안정한 상태임을 입증할 수 있으면 나의 대리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상담사는 나에게 가족을 객관적으로 보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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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K-pop축제' 성료지난 1일(금) 6시 제10회 '사할린 K-Pop축제'가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대강당에서 열렸다. 행사는 사할린국립대 어문‧역사‧동양학 대학, 사할린주 한인협회, 사할린주 한인청년회의 주최로 청소년들의 환호 속에 진행되었다. 행사장은 이미 6시 이전부터 케이팝 팬들로 가득차 있었다. 사할린국립대 어문‧역사‧동양학 대학 임 엘비라 학장은 환영사에 이어 '사할린 K-Pop축제'의 역사적 배경을 밝히고, 행사 주최측와 심사위원들을 소개했다. 주최 측에 따르면, "예선에서 60개(개인 및 단체팀) 신청자들의 영상심사를 비롯한 심사가 있었고, 최종 예선을 통과한 댄스 부문 15개 팀, 노래 부문 8개팀의 경연이 있었다"라고 전했다. 올해 10번째를 맞이하는 축제 분위기는 더욱 뜨거웠다. 관객들은 각 공연을 큰 박수와 환호로 맞이했고 노래와 댄스 – 케이팝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청소년들은 이날 퀴즈대회와 추첨에 참여하고, 상품권 또는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출처] 2023년 12월8일(음력 10월26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 작성자 bplus7 또한 모든 희망자들은 이날 댄스마스터클라스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 활동교실은 모든 10회 동안 '사할린 k-pop'축제에 참가한 알렉산드라 드료모와 '슬로우 모션'댄스학교(유즈노사할린스크) 강사가 담당했다. 심사위원들은 "모든 공연이 높은 수준이었고, 수상자 선정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라고 전했다. 노래 부문에서 1위는 오스트로브스카야 예바에게 주어졌고, 댄스부문에서는 "No next(노넥스트)"팀이 우승했다. 많은 관심과 뜨거운 환호 속에 진행된 제10회 '사할린 케이팝 2023'축제가 막을 내렸다. 다음 축제가 기대된다. (취재: 글/드미트리 포구다예브, 사진/새고려신문 이예식 기자) [출처] 2023년 12월8일(음력 10월26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 작성자 bplu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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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를 잡아먹지 말라"…신간 '포스터로 본 일제강점기 전체사'(서울=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한 그림 속에 수염을 기르고 상투를 튼 한 남성이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이 남성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이고, 먹는 것은 살아있는 게다. 보기에도 야만스럽게 묘사되고 있다. 1924년 8월 매일신보에 보도된 이 그림은 일제가 제작한 포스터다. 포스터에는 가재와 게의 그림, 조선인들이 이런 것들을 잡는 모습과 잡아먹지 말라는 경고문도 들어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토질', 즉 기생충 감염으로 목숨까지 잃는 폐디스토마가 확산하자 조사를 벌였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이 가재와 동남참게를 날로 먹어 생긴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러한 포스터를 만들었다. 이 포스터는 일제가 우리를 식민 통치하던 1915년부터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제작하고 배포한 포스터 중 하나다. 저자인 청암대 최규진 교수는 신간 '포스터로 본 일제강점기 전체사'에서 식민 권력이 포스터를 활용해 어떻게 대중을 장악하려 했고, 일상생활을 재조직하려 했는지를 탐구한다. 최 교수는 책을 '전체사'(total history), 즉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분리된 틀을 뛰어넘는 역사 서술이라고 설명한다. 포스터에 담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사회적 맥락을 탐색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나열한 자료집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일제는 이른바 계몽 프로젝트, 즉 '문명화 기획'이라는 미명으로 식민지인들에게 열등감을 주어 저절로 순응하게 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위생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워 피식민자의 저항 에너지를 누그러뜨리고 포섭을 강화하는 것도 그러한 사례다. 최교수는 "일제의 지배 수단은 총칼과 억압뿐이 아니다. 공중위생을 위하는 척 계몽하고, 유인하고, 설득하면서 생활 속으로 촘촘하게 파고들었다"면서 "포스터는 일상을 규율하는 강력한 선전 효과를 지닌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신문 방송 등 일반 매체에 비해 포스터는 비용도 적게 드는 데다가 직접 눈에 간단하게 호소하는 효과가 있어 일제의 선전 도구로 자주 이용됐다. 일제는 1932년 무렵, 피폐한 농가경제를 되살려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농촌진흥운동을 벌였다. 농민은 게으르고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나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떠들었다. 이는 착취 메커니즘을 철저히 숨긴 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세뇌정책이었다고 최교수는 분석한다. 일제는 모든 예술을 포함한 매체 등을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활용했다. 문학, 영화, 연극, 광고, 미술 사진 등을 활용해 선전을 퍼부었다. 선전전을 전투 수단의 최고봉이라고 여겼고, 라디오와 확성기가 '소리의 탄환'이라면 인쇄 선전물은 '종이 탄환'이라고 지칭했다. 공장, 집회소 등 대중이 많은 곳의 벽을 이용해 시사적인 내용의 글이 많이 들어간 포스터도 붙였는데 이는 '벽신문'이라고 불렸다. 당시 우리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계열에서도 벽신문을 활용하려 했으나 일제는 이를 금지했다. 최 교수는 10년이 넘는 기간 일제 강점기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와 문헌, 일본의 기록물에 실린 포스터를 샅샅이 훑어 모았다. 일제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포스터 외에도 식민지 역사를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역사'들의 소재가 담긴 포스터도 많이 찾아냈다. 민중 포스터와 저항 포스터 등 알려지지 않았던 식민지 시대 미세한 생활사의 영역도 담겼다. 최 교수는 "당시 인쇄술이 발전해 모든 포스터는 컬러였다. 일제는 많은 문맹인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심어주기 위해 이러한 포스터의 시각적 효과가 큰 점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서해문집.7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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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과 영화의 길시인이자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로 평생을 살아온 국헌 김종원의 회고록이다. 1937년 제주에서 태어난 김종원은 1957년 《문학예술》과 1959년 《사상계》로 추천을 완료한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이다. 학생 시절 소년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제주의 대표적인 학생문예지 《별무리》의 편집을 맡았으며 제주 최초의 시전문지 《시작업》의 발간을 주도하는 등 전후 제주의 문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1959년 영화평론을 시작하여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 현역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영화평론계의 산증인이자 『우리영화100년』과 같은 저서를 쓴 한국영화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은 권위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김종원의 삶에 새겨진 흔적과 그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이다. 제주 출신 첫 등단 시인 김종원 전쟁을 피해 제주로 온 계용묵 등 저명 문학, 예술인들의 영향으로 4.3으로 피폐해진 제주 문화계에 새로운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52년 12월 《학원》잡지를 통해 그 이름을 전국에 알린 학생문사 김종원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수학하며 《문학예술》(1957.5.)과 《사상계》(1959.2.)를 통해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였다.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이라는 영예를 지닌 그는 중학시절 제주 최초의 학생잡지《별무리》(1953.12.)를 편집하였고, 제주 최초의 시전문지 《시작업》(1959)의 발간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제주 문화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이뿐만 아니라 엔솔로지 시집 『신풍토』(1959) 동인 및 "60년대사회집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강냉이사설』(1970)과 『광화문행』(1988), 『시네마천국』(2023) 등 세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이 책은 제주 출신 시인 김종원의 문학 인생을 살펴 볼 수 있다. 1950~60년대 명동 시대의 주역 1950-60년대 명동은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문화의 거리였다. 전후의 피폐한 거리에 들어선 수많은 다방과 음악감상실에는 저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 서울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 젊음을 꽃피웠다. 이곳 명동은 전후 우리 문화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원고청탁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연극, 영화가 기획되었고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 시기 명동을 거쳐 간 수많은 인물 중에 김종원도 있었다.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청동문학”의 중심인물로 오상순 선생의 추천으로 잡지《녹원》(1957)을 편집하였으며, 동성영화사에서 일을 하며 영화를 기획했다. 이 책에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인물들을 김종원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 격동의 현장을 몸으로 겪다 : 4.19 혁명과 조선투위 참여 김종원은 1947년 제주 3.1절 행사를 비롯해 6.25전쟁, 4.19혁명, 유신과 80년 서울의 봄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으로 겪었다. 이 책에서는 제주 4.3 당시 제주민전 위원장 안세훈을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목포에서 겪은 6.25 당시 상황, 시위대의 한복판에서 활약했던 4.19혁명 전후의 이야기,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부르짖다 해직된 "조선투위” 활동, 1980년 태창문화사에 근무하던 당시 재야의 거두 김대중의 자서전을 출판하려던 일 등 우리 현대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영원한 현역”이고 싶은 영화평론가 1959년 종합잡지 《자유공론》에 실은 "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를 시작으로 60여 년의 세월을 영화평론가로 활약한 그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1965)를 조직하여 3대 회장(1981)을 역임하였으며 《씨나리오문예》, 《씨네팬》, 《실버스크린》, 《영화예술》 등 여러 영화 관련 잡지의 발간에 관여하였으며 1964년에는 시인 김규동이 발행하던 《영화잡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86년 손석희와 공동으로 진행했던 《퀴즈,명화여행》을 비롯해 영화평론가로서 다수의 방송매체에 출연하여 영화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이 책에는 영화평론가로 영화잡지 발간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영화평론가협회의 운영에 관한 이야기, 영화의 등급을 매기는 심의 활동에 관한 사항 등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영화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영화사가에서 이제는 한국영화사의 증언자로 1990년 무렵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영화사 연구의 길에 들어선 김종원은 『우리영화 100년』 등 저명한 영화사 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영화사 연구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영화 도래에 관한 사항, 한국영화의 기점에 관한 사항, 춘사 나운규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이끌면서 한국영화사 연구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이뿐 아니라 이제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제작현장과 평론계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가 후학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제공하는 등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영화사의 재료이며 그의 글은 중요한 참고문헌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그가 겪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관한 디테일한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저자 김종원 1937년 제주 출생. 시인. 영화평론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문학예술》, 1959년 《사상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1959년 영화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65년 창립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기인이자 3대 회장을 역임했다.(1981.02.01.~1982.01.31.) 학원사와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했으며 1975년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조선투위에 참여하여 강제 해직 당했다. 이후 공연윤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역임했으며 인하대, 동국대, 청주대, 한국예술종합대학 영상원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청룡영화상 제1회 정영일영화평론상,(1994.12), 제주도 문화상(예술부문)(2000.12.), 한국예술발전협회 주최 제1회 ‘한국예술발전상’(2001.12.),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특별 공로예술가상(영화평론)(2007.12.), 영평상 영화인 공로상(2020.11.) 등을 수상했다.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영화연구소는 남북한 영화 및 동아시아 영화 자료의 체계적 수집과 전시, 연구를 위해 2018년 4월 설립한 학술연구기관이다. 현재 본 연구소에는 북한에서 발행된 단행본과 잡지 등, 총 5,000여점이 넘는 문헌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북한에서 발행한 문학예술 도서 250점을 전시하는 <평양책방>을 2018년 서울도서관에서 개최하여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았다. 또한 2020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박물관과 함께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해방공간의 영화인들>이라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기념전시를 개최했다. 연구소의 주요 출판물로는 『평양책방』(2018), 『월북영화인 시리즈 1~3권』(『문예봉 전』, 『강홍식 전』, 『김태진 전』)(2019), 『멜랑콜리 연남동』(이효인 저), 『영화운동의 최전선』(2022), 『스탈린거리의 평양책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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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이윤선, '남도를 품은 이야기'민속학자 이윤선 작가가 최남단 도서 해안의 민속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책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를 펴냈다. "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서 의미를 톺아내는 것이 시대정신”이라고 믿는 민속학자 이윤선. 이름도 빛도 없는 변방과 소외된 이들, 여성을 포함한 민중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바로세우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한국학’의 길을 모색하는 이다. 저자는 남도 특히 도서 해안 지역에 전하는 구전과 설화, 소리와 춤, 인물과 역사 등을 망라한 ‘남도 인문학’을 통해 한국 정신문화의 요체를 발견하고 나아가 세계를 다시 만난다. 이 책은 남도 문화의 숨결이 살아있는 구수하고도 아름다운 산문을 통해 웅숭깊은 남도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남도 인문학, 낮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다전남북 지역을 이르는 통칭 ‘호남’과 ‘남도’. 지역학에서 ‘호남학’은 흔히 역사 중심의 용례가 많고 ‘남도학’은 문화 중심의 용례가 많다. 즉 호남학이 역사적 입장이나 호국 정신사적 맥락을 드러낸다면, 남도학은 서민문화, 민중문화 혹은 평민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학적 맥락이 강하다는 것이다. 호남학보다는 남도학이 호남을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더 넓은 의미의 ‘한국학’을 포섭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 이윤선은 남도의 역사와 민속 등 무형 유산 전체를 아우르며 이 땅의 풍속과 정서를 규명, ‘남도 인문학’을 주창하고 있는 민속학자이다. 그 자신이 전라남도 진안 출신으로, 판소리와 무가 등 소리에도 밝아 ‘남도의 문화적 자산’이라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도 문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학자이기 이전에 스스로가 생래적 자질을 타고났거나 진도라는 특수한 지역 환경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그 문화적 자질을 습득한 사람”이라는 평(김선태 목포대 교수)을 듣는다. 남도 인문학을 표방한 이 책에서 저자는 특히 도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민속과 예술을 포함한 남도 문화 전반을 소개하는데, 이는 "소외되고 낮은 이들, 이 땅의 민중과 그 후세들이 이어가는 생활문화를 주목하는 것이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서 의미를 톺아내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시대는 서민의 인권과 역량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경향만 보더라도 선거권의 쟁취, 여권의 신장, 지배세력에 대한 항거 등 피지배 계급의 역량이 강화돼왔다. 이것을 시대정신이라 부른다면 오늘날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단연코 서민의 문화다. 한국 정신문화의 요체를 서민의 말과 몸짓, 풍속에서 길어 올려야 시대정신에 부합한다. 남도는 여성을 포함한 민중들의 삶을 토대로 삼는 생활문화의 수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말하는 남도 정신문화의 요체이다.” 남도에서 세계로 가는 인문 여정이 책에는 역사와 인물, 풍속과 전통, 구전과 설화, 소리와 춤 등 남도의 풍요로운 문화유산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적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나주 유배지에서 국가 통치철학을 가다듬고 떠난 정도전과 같은 역사적 인물부터 공옥진, 장월중선 등 남도가 낳은 걸출한 예술가들의 생애와 그들이 꽃피운 문화 이야기, 남도 특유의 식도락과 옹기배 등의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토속적이고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그중에서도 매향이나 우실의 발달, 노두, 독다믈, 물때, 바닷가의 신앙과 무속 등 독특한 도서 해안 문화가 생생히 드러나는 이야기 등은 해양 문화권 비교 연구로 내공을 쌓은 저자의 깊이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심은 아시아 이웃 국가들을 지나 남태평양으로까지 뻗어 나간다. 미크로네시아에서 남도의 ‘진놀이’와 닮은 원무 놀이를 하는 현지 아이들을 만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자바국(인도네시아)과의 교류 흔적을 찾고, 젓갈이 발달한 베트남을 우리와 함께 ‘발효 문화권’으로 묶으며 공동 연구를 제안한 것은 우리 향토를 이해하는 눈을 통해 세계를 만나는 경험이다. 여성과 서민 일반 풍속을 다룬 부분들도 흥미롭다.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문집을 낸 담양 출신 송덕봉은 16세기 양반 사대부 부부관계의 전형과 달리 첩실을 둔 남편 유희춘을 꾸짖기도 할 만큼 굴종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으며, 곡을 하고 삼년상을 치르기는커녕 조문객들과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죽음도 축제로 승화시키는 남도의 상례는 권위적인 기층 질서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다. ‘소외되고 낮은 이들의 삶에서 한국 정신문화의 요체를 찾는다’는 저자의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 편 한 편 읽을수록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빠져들게 되는 이 책은 「전남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에 실린 글편을 엮은 것이다. 단편소설 「바람의 집」으로 등단(2020년 목포문학상), 시집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를 출간하는 등 문인으로도 발돋움하고 있는 저자의 미려한 문장과 진한 장맛 같은 구수한 산문을 맛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과 전남도문화재전문위원인 저자는 '나를 성찰하는 민속학 연구'’를 표방하는 민속학자이자 판소리와 무가 등 남도 소리에 밝은 예인이다. 특히 남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문화와 아시아 도서해양 문화권을 비교하는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20년 단편 '바람의 집'으로 목포문학상을 받고 데뷔한 저자는 시집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를 펴내기도 했다.이 책은 남도의 풍속과 정서를 탐미하는 저자의 인문 에세이로 저자가 '전남일보'에 연재하는 칼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에 실린 글들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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