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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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 꿈꾼 안중근 의사 2월 14일 사형선고이강연/前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처장 오늘로부터 114년 전인 1910년 2월 14일,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일제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은 날이다. 이후 감옥에 수감된다.안중근 의사는 지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침략을 주도한 인물인 일본 총리대신이자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처단해 살인혐의 피고인 신분으로 일제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았다.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형장에서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아직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계기로 항일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다.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위안스카이(1859 -1916)는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만방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 살이 없는 건데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라고 영웅의 길을 추앙했다. 중국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1866~1925)은 안 의사를 위해 발문을 썼고, 당시 중국의 저망한 지식인 장타이옌(1869~1936)은 안 의사를 "아시아 최고의 의로운 협객(亞洲第一義俠)”이라고 불렀다.중화인민국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1898~1976) 역시 "중·일 갑오전쟁(청·일전쟁) 이후 20세기 초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척결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두 나라 인민의 공동 투쟁이 시작됐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민당 장제스(1887~1975) 총통 또한 안 의사를 기려 "장렬한 뜻이 천년 길이 빛나리(壯烈千秋)”라는 글을 남겼다. 안 의사는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체를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 장사를 지냄)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1910년 안의사는 일제의 억압과 폭거에 맞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민족의 적 이토히로 부미 척살하면서 "꼬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당당히 그들앞에 눈을 부릅뜨고 섰다. 안 의사는 이토를 처단하고 이후 수감 기간 동안 당당했고 빛나는 유훈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집필했던 ‘동양평화론’의 가치와 세계 평화를 꿈꾸던 안중근 의사의 정신이 시대정신이 되어 우리에게 울림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옥중에 갇힌 약 한 달 반 기간 동안 200여 점의 유묵을 남겼다. 안중근의사가 남겨준 군인정신의 지표인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이 대표적 유묵이다.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행한 일이라 선언한 것이다. 국제사회 이목이 집중되자 안 의사가 재판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알렸다. "첫번째 죄는 남의 나라 왕비를 시해한 죄"다. 일주일 만에 6차례의 비공개 공판을 몰아치고 안 의사에게 곧장 사형을 언도했다. 정당성과 절차는 모두 무시된 사형 집행 후 안 의사의 유해조차 숨겼다. 무덤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디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최근 110년 만에 현해탄을 건너 고국의 품에 돌아온 안의사 유묵은 경매에서 19억5000만원에 낙찰이 됐다. 이어서 또 하나의 유묵이 경매를 통해 귀환될 예정이다. 오늘은 대한민국 국군정신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을 통해, 안의사의 애국정신을 한번 되돌아 볼 날이다. 조국으로 돌아온 안의사의 유묵 소식과 함께 언젠가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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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파, 조선의 마지막 소리""소리의 영과 한이 오롯이 살아나 한 편의 아름다운 가사가 되었다. 소리 하나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다시 한번 소리를 위해 미련 없이 무대 밖으로 나온 허금파의 기구한 생을 따라가며 나는 새삼 놀랐다. 원하는 삶을 위해 세상에서 잊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금파가 우리 안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염원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금파의 애절한 소리가 슬픔을 타고 올라 힘이 되어주니, 음악인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가운 작품이다. 부디 내 소리도 금파의 소리처럼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어주면 좋겠다." (송가인/가수) 1902년, 대한제국 최초의 국립극장에 올라 소리판을 뒤흔든 여성 소리광대 허금파 실화소설."우리 역사소설에서 이제껏 보지 못한 개성적 인물을 강렬하게 창출해 냈다”라는 평을 받으며 제1회 고창신재효문학상을 빛낸 김해숙 소설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 『금파』. 2021년 제정된 이번 공모의 수상작 『금파』는 구한말 격변의 시대에 판소리와 창극 무대에서 독보적 소리꾼으로 활동한 실존 인물 ‘허금파’의 이야기다. 작가는 여성이 무대에 설 수 없던 시대에, 늦은 나이로 소리판에 들어와 최고의 가객이 되기까지 갖은 고초를 이겨냈던 ‘금파’의 생을 소설로 복원해 냈다금파가 오직 소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고창에 온 뒤로 판소리 학당 동리정사에는 소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의 세력가 주 영감은 금파에게 추근대다 망신을 당한 대가로 동리정사에 후원을 끊고, 소리선생 김세종은 빼어난 외모와 재주에 고개 숙일 줄 모르는 금파를 염려한다. 금파는 소리를 인정받겠다는 일념으로, 과거에 관청의 가녀가 된 일도 쪽 찐 머리를 풀어 댕기를 묶게 된 속사정도 모두 가슴속 깊이 묻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세종은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 기념식 무대에 오를 이들을 가리기 위해 소리 경연을 열고, 금파는 단연 제일가는 소리로 관중의 찬사를 받지만 선발 명단에 오르지 못한다. 금파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그와 실력을 견줄 만한 유일한 상대 승윤 역시 결과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이 일에 주 영감이 연결되어 있으리라 직감하는데…….양반가의 자제이나 소리를 위해 집안을 버린 승윤, 그리고 승윤의 스스럼없는 장난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 흔들리는 금파…… 이들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소리를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허금파 (許錦波, 1866~1949)는 여자는 소리를 할 수 없었던 조선 후기, 금기를 깬 최초의 명창 진채선 이후 두 번째로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여성 소리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연희극장 협률사協律司 무대에 올라 창극 춘향전의 월매 역을 맡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예술 활동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서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철종 또는 고종 재위 무렵 김천에서 태어나 고창 동리정사(桐里精舍)에서 소리선생 김세종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20대에 관기였고 후처가 된 후 뒤늦게 동리정사에 들어가 한성으로 올라갔을 무렵이 이미 30대였던 그는 소리에 대한 꿈을 결코 놓지 않는 예인이었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전국의 소리꾼들과 함께 자리를 겨루던 때에도 남성 중심의 소리판에서 주역을 맡아 권력에 승복하지 않으면서 하층민의 삶을 대변하는 월매로 무대에 선다. 진채선의 명성에 힘입지 않고 스스로 최고에 오르고자 했던 그의 소리 인생은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불온한 삶을 살면서도 올곧게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대쪽 같은 소리꾼 금파.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오로지 소리 하나로 인생의 길을 찾고자 했던 금파는 ‘비가비’였던 승윤을 만나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되지만 그녀는 애써 마음을 접는다. 후일, 나비떨잠으로 연결되는 승윤과의 아릿한 풍경은 장터에서 확인되고 이어지는데……. 남녀를 떠나 진정한 소리꾼이 되고 싶었던 금파의 꿈은 시간의 강을 건넌 지금에도 유효하다. 한곳에 뜻을 두고 정진하는 사람들의 표상이 될 것이다. 소리꾼에 대한 작가의 깊은 시선이 ‘빛나는 예인이었던 금파’를 찾아낸 것 같다." (권비영, 『덕혜옹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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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미 의회도서관 서울사진: 네개의 시선' 발간서울역사박물관은 19번째 학술총서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서울 사진: 네 개의 시선'을 발간했다고 12일 밝혔다. 이번 학술총서는 2020년부터 진행된 미국 내 서울학 자료 조사의 세 번째 결과물로, 미 의회도서관 판화·사진 분과가 소장한 조선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의 사진 163점을 선보인다. 총서는 미국 외교관과 여행 저널리스트, 조선총독부, 미국 언론사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의 모습을 분류해 소개한다. 제1장 '조지 C. 포크 컬렉션'은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에 외교 무관으로 파견된 미 해군 장교 포크가 촬영한 조선 말기 서울의 사진을 조명한다.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과 숭례문과 성벽 바깥 민가 사진은 현존하는 숭례문 사진 중 가장 이른 사진들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제2장 '프랭크 G. 카펜터 컬렉션'은 미국의 여행 저널리스트 카펜터의 사진으로 구성된다. 20세기 전반 미국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제3장 '무라카미 텐코 컬렉션'은 의회도서관에서 아직 등록하지 않은 미공개 사진으로 해방 직후 미국이 일본에서 입수한 조선총독부 문건의 일부다. 일제강점기 경성을 비롯한 전국의 '생활상태(生活狀態)', '경제사정(經濟事情)' 등에 대한 방대한 양의 사진으로 다양한 지역과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조선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위해 조사했던 다양한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연구 가치가 큰 사진이다. 마지막 제4장 '뉴욕 월드 텔레그램&선 컬렉션'에선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초반 서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책은 서울책방(store.seoul.go.kr)과 서울역사박물관 내 기념품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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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통의 내밀한 편지들, '어린 왕자'를 꽃피우다"나의 모든 것, 난 당신에게 충실해. 나는 당신을 세계 곳곳으로 데려갈 거고, 우리는 별들을 길들일 거야."(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그의 아내 콘수엘로에게 쓴 편지 중에서)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문학동네)는 '어린 왕자'를 쓴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 실종)와 그의 아내 콘수엘로(1901~1979)가 나눈 격정의 편지 168통을 모은 책이다. 1930년 두 사람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 만난 시점부터 생텍쥐페리가 비행 도중 실종된 1944년까지 15년간 서로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두 사람 간의 오해와 반목, 사랑과 신뢰는 물론 생텍쥐페리라는 위대한 작가의 속마음과 창작의 이면이 생생히 담겼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프랑스 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장에서 처음 만난 앙투안과 콘수엘로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창조적 분신을 발견하고서 금세 매료돼 짧은 동거를 거쳐 1931년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사랑으로 시작한 둘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북아프리카부터 남아메리카까지 세계의 상공을 누비던 앙투안의 불안정한 생활 탓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기질 차이도 한몫했다. 엘살바도르 출신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콘수엘라는 자주 고립감을 느껴 친구들과 자유로운 교류를 원했지만, 긴 비행에 지친 앙투안은 그녀에게서 안정을 원했다. 이런 갈등은 때론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앙투안은 자신의 대표작 '어린 왕자'를 인용하면서 "'꽃은 언제나 어린 왕자 탓을 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떠났다!' 이게 바로 내가 불평하는 이유야"라고 쓰기도 한다. 갈등과 반목, 오해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마지막 유일한 안식처를 자처한다. 특히, 비행으로 평탄치 못한 일상을 보내는 남편에게 콘수엘로는 끊임없이 글쓰기를 독려하고 심정적 지지를 보내는 대목들이 눈길을 끈다. "토니오(앙투안의 애칭), 소설 열심히 써서, 아주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봐. 우리의 이별, 절망, 우리 사랑이 흘린 눈물이 당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물들의 신비를 꿰뚫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49쪽) "난 당신이 그 책을 끝내야 한다고 굳게 믿어. 책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야. 글을 써. 절대 피하지 말고."(316쪽) 과연 아내 콘수엘로의 지지가 없었다면 전쟁 중 비행사로 일하며 글쓰기를 병행했던 작가가 '어린 왕자'나 '야간 비행', '전시 조종사' 같은 후대의 큰 사랑을 받은 작품들을 완성해낼 수 있었을까.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꼽히는 '어린 왕자'가 탄생하게 되는 흥미로운 장면도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어린 왕자'는 1943년 초판이 출간됐지만 앙투안과 콘수엘로가 결혼하기 전인 1930년에 앙투안이 콘수엘로에게 쓴 편지에서도 이미 그 단초가 있다. "옛날 옛적에 한 아이가 보물을 발견했어. 하지만 그 보물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두 팔로 그 아름다움을 안고 있기에는 너무 아름다웠지. 그래서 아이는 우울해졌어." 책에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부터, 작가가 직접 그린 '어린 왕자' 삽화, 육필 원고와 엽서, 화가였던 콘수엘로가 그린 그림 등 풍성한 자료들은 물론, 편지가 쓰인 당대의 맥락을 상세한 각주로 담아 생텍쥐페리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초상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자국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이런 종류의 서간 문학이 잘 발달해있고 독자층도 넓다. 생텍쥐페리나 알베르 카뮈 같은 유명한 작가들은 물론 프랑수아 미테랑 등 정치 거물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가까운 사람과 주고받은 내밀한 편지와 엽서 등을 잘 보전해 연구하고 주석을 붙여 갈리마르 같은 명망 높은 출판사가 펴내는 건 이 나라의 오랜 문학 전통 중 하나다. 이 책 역시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서 무려 77년이 지나 발견된 편지들이 밑바탕이 됐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나 엽서가 매우 희귀해진 시대에 더 빛을 발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문학동네. 윤진 옮김. 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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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중요한 건 태도…"젊다고 생각하면 장수한다""나이 드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숨은 조금 차지만 풍경은 훨씬 아름답다." 전설적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설 명절 연휴에 노인들은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기 쉽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다는 점에서 반갑지만, 음력 기준으로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점에서다. 더 늙어간다는 느낌은 우울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대만의 신경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류슈즈는 그런 태도는 장수에 좋지 않다고 단언한다. 적어도 젊다고 느끼거나 노년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그는 신간 '나답게 나이 드는 즐거움'(더퀘스트)에서 이를 입증하는 다양한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2015년 미국의사협회지에 실린 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연구진은 영국에 거주하는 평균연령 66세 주민 6천489명을 대상으로 '당신은 자신이 몇 살이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설문을 진행했다. 조사 대상자의 70%는 실제 나이보다 3살 적다고 답했다. 응답자 25%는 실제나이와 비슷하다고 얘기했으며 5%는 실제 나이보다 늙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들에 대해 8년간 추적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사망률이 41% 높았고, 심혈관질환 발병률도 높았다. 노년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심혈관질환 발병률을 낮춘다는 연구도 있다. 미국 국립 노화연구소 연구진이 1968년부터 2007년까지 18~49세 386명을 추적조사한 결과, 노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람보다 심혈관질환 발병률이 12%포인트 높았다. 연구진은 노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일종의 만성 스트레스와 같으며 이는 간접적으로 심혈관질환을 유발했다고 결론 내렸다. 장수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도 책은 소개한다. 2020년 미국의학잡지에 실린 '21세기 장수처방' 논문 저자들은 ▲ 목표를 가질 것 ▲ 적절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것 ▲ 건강한 생활 습관을 지닐 것을 장수의 비법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건강한 생활 습관이란 금연과 적당한 음주, 적극적인 뇌 활동과 신체·여가 활동, 과일·채소 다량 섭취, 충분한 수면 등을 포괄한다. 류슈즈는 59세에 병원에서 퇴직한 후 에세이·소설을 쓰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거듭났다. 그는 대만에서 닮고 싶은 노년 롤모델로 손꼽힌다. 그런 그마저도 노년을 맞이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다고 한다. 그는 허리 수술, 백내장 수술, 유방암 수술을 받으며 노화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낙관적 태도만은 잃지 않았다. 현재 상태를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치료받은 후 꾸준히 관리하다 보니 여러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70대인 저자는 의사로서의 삶은 끝났지만 이제 작가로서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이 설레고 기대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독서, 글쓰기를 꾸준히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놀러 다니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간이 많을 때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도 퍽 만족스럽다." 박주선 옮김.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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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뮤직(Free Music)'프리뮤직'은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즉흥 연주이다. 작곡된 곡을 연주하는 것과 차별화되는 것으로, 미리 준비된 것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 '작곡을 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음악이다. 프리뮤직의 정확한 표기는 Free Improvising Music인데, 이는 전위음악의 요소인 우연성, 불확정성과 재즈의 즉흥성이 결합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재즈에서 발전된 프리재즈(Free Jazz)가 현대음악과 접목되면서 프리뮤 직이라는 형태로 발전해온 것으로, 재즈에서의 즉흥성이 미리 만들어진 아우트라인(outline) 아래에서 이뤄진다면 프리뮤직은 그 조차도 없는 완전한 즉흥이다. 악보도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연주하여 무대에서의 매우 빠른 계산이 요구되는 음악이기에 상당히 지성에 기반한 작업이기도 하다. 프리뮤직은 정해진 프로그램 없이 공연 당일 연주자의 즉흥, 즉 리듬, 음계, 화성의 고정된 제약을 거부한 상황성에 기초하여 음악이 만들어진다. 이는 청중과 연주인 간의 교감, 공연 장소의 분위기, 연주인에게 축적된 삶의 경 험과 생각, 연주 스타일, 단련된 기교가 한데 어우러지는 음악이고, 생동하는 기(氣)의 음악이며 그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연주자의 내면 세계를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표현하여 연주하는 이의 마음과 음악성이 매우 확실하게 전해지는 프리뮤직은 함께하는 연주자에 따라 현대음악, 민속음악,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도 융합할 수 있는 폭넓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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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으로 간 최순이"조선시대 진주 최고의 예인 칼춤으로 고종 앞에 선 열세 살 소녀, 궁중 관기에서부터 근대 신여성, 기생의 삶까지 논픽션과 픽션을 넘나드는 한 여성의 인생 이야기"가무 그것은 예술이며, 우리는 예술가로소이다.”-『장한』 기생들이 창간한 잡지 중에서이 책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현대를 거치며 관기의 삶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대서사다. 또한 훗날, 궁중의 검무를 국가무형문화재 ‘진주검무’로 전승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최순이에 대한 ‘헌사’이자 조선시대 전문 예술인이었던 기생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집필되었다. 자주적이며 예술에 헌신적이기까지 했던 조선의 ‘관기’. 남성을 위해 살았던 ‘도구’로서가 아닌, 높은 수준의 가무를 익혔던 전문가로서의 그녀의 인생을 다시 정의한다. 책의 전반부는 최순이의 궁중 생활기다. 그녀가 진주에서 상경하여 궁중의 관기가 되고, 일제강점기, 더 이상 연회가 열리지 않자 낙향하여 진주 권번의 스승이 되기까지의 그녀의 인생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말과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궁중 연향(연회) 모습도 묘사한다. 일제강점기, 연회 담당 인원을 줄이면서 궁중 악사가 무동의 역할까지 하는 과정, 프랑스 왕실 못지않은 조선 왕실 연향의 격식과 예에 맞춘 초호화 궁중음식 코스, 화려한 꽃장식, 그리고 연회에 참가했던 모든 여령이 왕과 같은 종류의 음식을 대접받았던 사실까지, 그 사료를 찾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책은 '의궤'와 진찬도병(그림) 등의 기록을 고증하여 궁중의 무희들이 어떤 종류의 춤을 추었고, 몇 명이 추었는지 어떤 복식을 했는지 흥미롭게 서술한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마치 궁중의 연향에 참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후반부는 조선의 왕실에서 더 이상 연향을 하지 않자, 설 자리가 없어진 관기들이 궁에서 나와 요릿집에 취업하거나, ‘기생조합’을 만들어 직접 운영하고 경제 활동을 한 이야기다. 조선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는 기생들의 일생을 좇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폐허가 된 1950년의 진주성까지 마주하게 된다.' 최순이를 비롯한 진주 기생들은 모의당이라는 공간에서 의기창렬회를 조직하여 다시금 논개의 제를 지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6.25전쟁 가운데서 개최된 예술제인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의 전신)에서 국립국악단원과 함께 다시금 무용을 선보인다. 시, 서, 화와 인문교육을 받았던 궁중의 관기 출신 기생들은 자주적이며 능동적이었다. 그들은 노동 환경을 개선해 줄 것과 매출을 공개해 줄 것을 사용자 측에 요구하면서 파업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경제 활동을 하는 노동자였으며,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했던 신여성이었다.최순이는 평양이나 서울의 요릿집 대신 낙향하여 진주의 기생조합에서 궁중에서 배운 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로 마음먹는다. 최순이가 스승의 길을 걸으면서, 최순이 인생 2막이 시작되었으며, 훗날, 이 결정은 진주검무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교방문화라는 꽃을 피워내는 데 씨앗이 된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 이수자인 저자는 최순이에 대한 자료와 궁중 교방 문화에 대한 방대한 학식으로 최순이의 인생을 복원해 내는 데 성공했다. 저자는 최순이가 직접 가르쳤던 권번 제자들과 김천흥이라는 궁중 악사가 최순이가 진주검무를 전승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해준다.올해 2023년은 진주에서 천한 신분인 백정이 형평운동을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백정은 형평운동을 통해 그 신분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천민 신분인 백정과 기생, 그들은 여전히 신분에 따른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유독 기생은 아직 단순히 성(性)을 팔고 술을 따르는 이미지로만 소비된다. 이 책은 기생의 예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고자 했다. 전문 예술인이었던 관기가 아니었다면 궁중의 춤과 노래는 다음 세대에 전승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권번 문화가 들어오면서 일제는 기생을 풍기문란한 존재로 편견을 조장한다. 1941년 일본이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기생’이라는 이름이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접대부’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생=접대부’라는 등식이 생겼다. 1910년 이전의 관기, 선상기, 여령과 같이 전문예술인에 해당하는 한국 기생의 참 의미는 사라졌다. 기생이라는 단어의 오염은 일제에 의해 주도되었다.진주검무, 국가무형문화재로 재탄생하다오늘날 관기를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조선의 연향 문화를 습득한 예술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조선의 체계적인 학습 시스템을 통해 궁중 연향에서 행해지는 모든 퍼포먼스를 익혔으며, 가·무·악과 시·서·화 심지어 예절 교육까지 받았다. 이는 관기 개개인에게는 혹독하고도 힘든 과정이었으나, 아름답고도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최순이가 평생 제자를 가르친 이유도 이 궁중의 춤이 후대에 널리 전승되기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1969년, 최순이는 숨을 거둔다. 그녀의 곁에는 몇몇 기생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갑 안 서랍장 안에는 몇 장의 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 그 유품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자신들이 그동안 해왔던 일이 결코 자랑스럽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순이는 쓸쓸하게 마지막을 맞이했다. 진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진주검무’라는 꽃을 피우고 흙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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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광대, 문진수의 연희창작 ‘뫼비우스’정형호(전 한국민속학회 회장) 공감과 소통이 멀어지는 이 시대에 전통 연희를 바탕으로 어떻게 새롭게 창작해낼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아시아1인극제-거창2023에서 문진수가 보여준 ‘뫼비우스’는 하나의 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당시 거창문화회관에서 처음 선을 보인 ‘뫼비우스’라는 창작 연희극 '일명 흑사 위에 백사' 를 선보이며, 이 시대의 진정한 광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전통 사회에서 광대인 우인(優人)들은 ‘우희(優戱), 일명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통해 양반관료층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소극을 보여주었다. 1505년 연산군 시절에 우인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놀이(老儒戲)에서 논어를 인용하면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君君臣臣父父子子 君不君臣不臣 雖有粟 吾得而食諸)라고 풍자한다. 왕은 그 말이 불경스럽다고 하여 공길이를 곤장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이 거슬렸을 것이다. 이미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 광대들은 권신 염흥방과 시종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자 광대놀이로 이를 비판한 일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때에 어느 광대는 어전에서 정평부사 구세장의 안장 구입 관련 비리를 폭로했으며, 광대 귀석(貴石)은 궁중에서 고관들의 매관매직을 풍자한 일도 있었다. 또한 광대들이며 대장장이인 고룡(高龍)은 술취한 장님 흉내를 잘 냈다고 한다. 따라서 광대의 ‘우희’는 부패한 양반관리를 비판하거나, 현실의 비정상적 인물을 우스광스럽게 흉내 내는 것 등을 두루 포함한다.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는 광대들의 비판 정신은 20세기 후반의 군사독재 시대에 마당극이나 창작 판소리를 통한 문화운동에서 다양하게 선보였다. 문진수의 ‘뫼비우스’를 보면서, 김지하의 창작판소리 ‘똥바다’와 ‘오적’, 또한 1세대 마당극 출신들의 치열한 시대 비판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21세기에 새롭게 깨어난 통렬한 말뚝이의 모습도 연상시킨다. 문진수는 21세기에 이런 시대비판적 광대의 모습을 이어받고 있다. 그는 남사당놀이 이수자 출신으로 춤, 농악, 소리, 재담 등을 두루 익힌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가무악의 가량을 단순히 익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광대의 시대정신을 고민하고 이를 예술혼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뫼비우스’의 작품 내용은 단순하다. 부제인 ‘흑사 위에 백사’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권력을 휘두르는 흑사의 횡포에 맞선 백사가 등장해서 응징한다는 단순한 설정이지만, 그는 다양한 연행요소와 뛰어난 춤과 재담으로 판을 이끌어 가고 있다. 30여분간 진행된 작품에서 관객들은 때로는 그의 멋진 춤에 감탄을 하고, 재담의 시대비판에 추임새로 적극 호응하면서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근래에 이렇게 관객과 소통하면서 뜨거운 호응을 받은 작품이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흑사는 권력만을 쫓는 인물로서, 남에게 엄격하고 스스로 관대하며, 힘없는 자에게 온갖 횡포를 부리는 특권층이다. 그는 검은색 법복에 검은색 상모 모자를 쓰고 등장한다. 처음에 흑사가 되어 긴 상모의 한쪽만을 쥐고 흔드는데 마치 검을 휘두르는 권력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무대 가운데에 앉아서 상모를 천천히 돌리면서 관객을 향해 거만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는 나중에 백사로 변신해서 이번에는 정의의 사도로서 흑사를 응징한 다음에 다시 긴 상모를 돌린다. 이때 돌리는 상모의 큰 원은 포용과 화합을 상징한다. 그는 다양한 연희요소를 바탕으로 판에 변화를 주고 시대풍자의 다양한 장치로 이용한다. 상모 줄은 짧거나 길게 사용하면서, 어떤 때는 사람을 해치는 검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거대한 원을 그리며 사람들을 감싸기도 한다. 심지어 줄넘기 줄로 사용하는 재치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갑자기 뱀을 파는 약장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뱀이 지닌 정력을 통해 온갖 ‘사’자가 들어가는 목사, 박사, 변호사 판사, 검사 등의 비행과 무기력을 폭로하면서, 사회 특권층을 비판한다. 그는 다양한 고품격의 춤을 선보이며, 보는 이들의 넋을 빼앗는다. 탈춤 춤사위를 응용한 덧뵈기춤, 신칼대신무를 바탕으로 한 넋풀이춤, 상모를 이용한 다양한 상모춤 등의 높은 예술적 완성도의 춤을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냥 그의 다양한 춤만을 보아도 손색없는 한 마당의 공연이 된다. 중간에 '아시아1인극제-거창2023 '주제가인 ‘난리버꾸통’에 맞추어 춤을 추고, 익살스런 현대춤이나 어린이의 춤동작까지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무거운 주제를 다양한 연행요소를 섞어 가볍게 풀어가는 재주를 지녔다. 시대풍자의 무거움을 뱀장사로 변신해서 즐거움을 주고, 현대의 "따르릉 전화왔어요”라는 메시지로 세상이 바뀌었음을 알리기도 한다. 이렇게 관객의 한 사람으로 웃거나 분노하다가, 뒤에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임진택이 김지하의 '똥바다'나 '오적'을 창과 사설 중심의 창작판소리로 풀어갔다면, 문진수는 ‘뫼비우스’에서 춤, 재담, 소리, 몸짓의 전통적 연행요소를 혼합해 새롭게 풀어간다. 그는 1인극의 새로운 도전과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혼자서 사물 반주에 맞추어 풀어가는데, 복색은 기본적으로 법복에, 흑사는 벙거지가 검은색, 백사는 흰색으로 구분하고, 상모를 소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근래에 전통 연희의 현대화에 여러 방식의 시도가 이루어진다. 기존에 ‘더광대’, ‘천하제일탈공작소’ 등은 전통연희를 바탕으로 시대 비판의식을 담아내거나, 아니면 무의미한 일상의 인물을 해학적으로 표현한다. 근래에는 외국 고전작품을 한국화하는 작업도 하며 여러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문진수는 시종일관 전통 연행요소를 바탕으로 통렬한 시대비판 의식을 담아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통연희의 현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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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날은 9월29일, "악학궤범을 편찬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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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부산 출신 '동백아가씨' 작곡가 백영호 평전 북콘서트부산근현대역사관은 오는 28일 오후 2시 인문학 복합문화공간 별관에서 '작곡가 백영호 평전 북콘서트'를 한다고 22일 밝혔다. 고 백영호 선생(1920~2003년)은 부산 서구 출신으로, 국민가요인 '동백아가씨'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대중가요 작곡가다. 이번 북콘서트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발전을 견인해온 백영호 선생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장남인 백경권씨가 아버지의 일대기를 직접 기록한 책이다. 내과 의사인 그는 음악과 부산을 사랑한 선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낮에는 환자를 돌보고 밤에는 방대한 자료를 분류·정리하며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2018년 12월부터 시작된 기록 작업은 5년여 끝에 360페이지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책에는 백영호 선생이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배경, 국내 최초 음반 판매 100만장 시대를 연 '동백아가씨'의 탄생에 얽힌 사연, 작곡자로서 전성기 시절 이야기 등 한국 현대 대중음악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백영호 선생은 부산에서 추억의 소야곡(1955), 해운대엘레지(1958)를 히트시킨 후 서울로 상경한 지 1년 만에 국민가요 동백아가씨(1964)를 작곡해 국내 최고 작곡가 반열에 오른 후 100여 곡을 히트시켰다. 울어라 열풍아(1965), 동숙의 노래(1966), 여자의 일생(1968) 등 200여 편의 영화 주제가와 아씨(1970), 여로(1972) 등 50여 편의 TV 드라마 주제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비롯해 수많은 작곡상을 받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북콘서트는 백영호 선생이 한국 대중가요계의 정상급 작곡가가 되기까지 과정을 저자가 직접 소개하는 1부와 소리꾼 장사익 선생이 특별공연하는 2부로 나눠 진행된다. 김기용 부산근현대역사관 관장은 "이번 행사는 대한민국 현대 대중가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고 백영호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고 대중가요의 메카 역할을 해온 부산의 역할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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