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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1953년 7월 27일, 오늘 70년전 휴전회담으로 발생한 전쟁 고아들의 해외 입양. 이 미국신문에 기록된 이들의 이름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전쟁고아들이 입양아가 가 되는 순간이다. 이들이 ‘수잔부링크양’(1991년 당시 40여년 전 스웨던 입양아)이 되어 아리랑을 불렀다. 사진설명은 다음과 같다. fourteen of the fifteen korean orphans aboard are shown at the airport where an Oregon farmer's "baby lift" ended yesterday. left to right, Panam Stewardesses Eunice Kubota, Nora Dee Williams and Ruth Den Dulk: Nurse Ethel Mae Blasins, Mrs. Gerri Brutschy, wife of Pan Am employe: Miss Ruth Holt, whose father sponsord life, and in rear, john Franco, traffic agent "탑승한 15명의 한국 고아 중 14명이 어제 오리건주 농부의 "아기 리프트"가 끝난 공항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팬암 스튜어디스 유니스 쿠보타, 노라 디 윌리엄스, 루스 덴 덜크: 간호사 에델 메이 블래신스, 팬암 직원의 아내 게리 브루츠키 부인: 아버지가 스폰서 생활을 하고 있는 루스 홀트 양, 그리고 뒤에는 교통 요원 존 프랑코” 홀트(Holt)재단(?)의 주선이고, 팬암기(Pan Am)로 도착하였다는 사실외에 스크랩 상태로 입수하여 게재 지(紙)나 일자 등은 불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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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국전쟁과 아리랑(中)전쟁과 같은 극단적 위기의 순간은 인간 본성의 밑바닥과 고귀함을 치열하게 발현하는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는 갖가지 선언문과 격문으로 표출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함성과 노래로 나타난다. 곧 35년 간의 압박에서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공간과 그 3년 후에 맞은 한국전쟁기가 그것이니, 시민들은 아리랑으로 그 격정을 표출하였다. 오랜 세월 불러오는 아리랑은 저항성과 대동성과 상생정신이 담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뉴욕에서 발행한 한국 안내서 ‘THE KOREANS AND THEIR CULTURE’에는 아리랑을 "··· one of the most famous of all Korean songs"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은 이미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로 알고 있었다. 이는 다음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술통신’ 1946년 7월 25일 자 ‘아리랑 곡이 미국에 대유행’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근착(近着) 미국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목하 미국의 경음악계엔 난데없이 ‘아리랑’이라는 애틋한 동양정서의 신곡이 급작스럽게 유행하고 있는데, 거리나 사교실에서 이 노래의 다정다한한 멜로디는 모든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너도 나도 창화(唱和)하는 지경이라고 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유명한 흑인재즈밴드 B.C.B의 뉴욕 연주엔 이 노래가 가장 인기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아리랑’이 틀림이 없는데 바다 건너 몇 만 리 미국 본토엔 그동안 조선 38선 이남에 주둔하였다가 제대 귀국한 병사들이 돌아와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조미(朝美)문화 교류의 선봉을 차지하게 된 터이라 한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전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일부이지만 아리랑을 알고 오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집입 하기 전 일본 오키나와(沖縄県)기지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리랑 익히게 되었다. 일부 간부에게 한정된 과정이기는 하지만 포로 관리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을 구부하기 위해 아리랑을 부르게 하여 부르지 못하거나 서툴게 부르면 중국군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다. 또한 일반 병사들은 참전 중 통역 등 한국군에 의해 알게 되거나 위문공연 등의 기회를 통해 알게 된다. 한국전쟁기 미 제3사단 15 연대 정찰소대 통역병이었던 전 경안서점 주인 김시한 사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서로 친해졌다. 언어소통도 어느 정도 해결되니 자연히 서로 대화가 쉬워졌다. 한 친구는 나에게 군에 오기 전 무얼 했느냐고 물어서 티쳐(Teacher)라고 했더니 무엇을 가르쳤냐고 물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특히 음악을 많이 가르쳤다'라고 했더니 한국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애국가를 가르쳐 봤더니 어렵다고 해서 아리랑을 불렀더니 아주 흥미를 가지고 따라 부르더니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부르며 미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리랑만 부르면 흥겨워했다. 그리스 군인도 우리와 같이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도 아리랑을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불렀다." 이런 실상이 반영된 것이 영화 '전송가'(Battle Hymn)의 내용이다. 1957년 개봉된 이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록 허드슨이 주연하여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던 미 공군 조종사 딘 헤스(Dean E. Hess) 대령의 6.25 참전 실화를 다룬 것이다. 고아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인상 깊게 인식한 결과로 아리랑을 주제가로 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 아리랑 사연으로 더 구체적인 실례가 있다. 1951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백퍼센트이다. 아리랑을 전쟁기간 중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된 사례인데,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귀순을 유도하는 선무용으로 쓰였던 것이다. 전쟁 중에 활용 된 것이니 소리로 만들어진 총탄이나 마찬 가지이다. 그래서 기사에는 '음탄(音彈)'말이 나온다. 민족의 비극과 함께했던 아리랑의 슬픈 운명이 보인다.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은 이 기사에 대해 "죽음을 목전에 둔 전쟁터에서 이런 가슴 시린 아리랑은 필시 적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총탄의 기능을 했음직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북한 측에도 적용된 듯하다. 중국이 1953년 발행한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에 실린 중국군 군가 중 '빨지산아리랑'이 있어 확인된다. 이 군가는 밀양아리랑 곡조에 이러한 가사로 되어있다. "백두산봉우리에 공화국깃발 날리고 제주도한라산에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전쟁으로 지치고 아픈 마음을 달래 주는 한편에서는 무기가 된 것이니 아픈 아리랑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의 아픔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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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1)<br>김진홍 명인의 '동래한량춤' 춤사위동래한량무 동래한량춤은 동래의 지역색이 강하고, 독특한 춤가락이 가미된 남성춤이다. 이 춤은 예로부터 소문난 명무들이 많아서 춤의 고장으로 불리우는 동래지역의 한량들이 추었던 춤이다. 전통적 극형식의 한량무는 경망과 기품, 진지함과 해학성을 넘나들며 해학과 풍자를 담아낸다. 능수능란한 자연스런 몸의 흐름에 따라서 흥과 한을 표출하여 춤의 완성도를 극대화 한다. 한국 남성춤만이 가지는 역동성과 멋이 담긴 춤사위가 지역마다 추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다. 경남지역 진주교방 계열의 김덕명류, 서울경기 지역 한성준류, 김인호 계열의 이동안류, 김덕순 계열의 김숙자류를 들 수 있다. '문장원류 한량춤'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김진홍이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동래한량무는 동래야류와 동래학춤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 졌으며, 다른 지역 한량무보다 풍류의 본질인 놀이적 요소와 자연친화력 요소가 내재된 자유로운 유희성을 담보하고 있다. 김진홍의 '동래한량춤'은 경상도 지역 특유의 배김사위를 구사하는 덧뵈기춤이 특징이다. 이매방의 초기 제자인 김진홍은 193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메이지유신의 소산인 신문명·신문화가 꽃피었던 오사카의 도시문화 속에서 서구식 예술장르를 접한다. 1940년대 초반 귀국하여 부산 범일동에 안착, 6.25 전쟁이후 부산을 고향 삼아 정착한다. 이매방과 사승관계를 맺고 전통춤을 사사받는다. 한편 '동래야류'의 예능보유자 문장원 문하에서 '덧뵈기춤'과 '한량무'를 배웠다. 김진홍의 동래한량무는 유장미와 풍류적 의미가 짙게 배인 덧배기 춤사위가 일품이다. 특히 춤사위의 호흡이 맺고 풀리는 원리를 가지면서 그 안에서 자유로운 즉흥성이 조화롭게 순환된다. 무대 형식보다는 마당에서 더욱 돋보이는 춤사위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진홍(1935~ ) 1935년 경남 하동 출생 1951년 (부산)무용콩클대회 '남방춤' 입상(부산 동구 범일동 삼일극장) 이매방에게 승무 사사 이동안에게 태평무,진쇠춤 사사 1987년 승무 이수자 1998년 이매방류 살풀이 이수자 2006년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후보 선정 2010년 부산시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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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엔 참전 22국 전우애 상징 ‘아리랑 스카프’ 70년만에 복원6·25전쟁에서 22개국 유엔 참전용사들과 한국군을 하나로 묶은 연대의 상징인 ‘아리랑 스카프’가 70년 만에 복원됐다.25일 국가보훈부는 25일 "1951년 제작돼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참전용사들이 고국의 어머니와 부인에게 보낸 인기 기념품 아리랑 스카프를 70년 만에 원형으로 복원했다”고 밝혔다. 6·25전쟁 중 여러 나라에서 온 연합군은 우리나라의 아리랑을 들었고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한국군 전우에게서 아리랑을 배웠다. 서로 다른 국적의 유엔연합군은 나라마다 군가(軍歌)가 달라 전장에서 함께 배운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서로 하나가 되어 연대했고 미 7사단은 군가로도 채택하였다. '아리랑 스카프'는 6·25전쟁 당시 참전한 외국 군인들을 위한 기념품으로 제작되어 처음에는 아리랑 가사가 없는 형태였으나 이듬해인 1951년부터 아리랑 악보와 가사가 실리게 되었다. 한국 전통민요 아리랑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유엔연합군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 역할을 했다. 복원한 스카프는 흰 비단에 용 한 마리가 휘감고 있는 한반도 지도와 참전국들 부대 마크 사이에 아리랑 악보와 영어로 번역된 ‘A ARIRANG SONG’ 제목이 새겨 있고 태극기 등 참전국가 국기가 둘러져 있다. 참전용사들이 하나로 뭉쳐 있는 듯한 형상으로 마치 콜라주 작품처럼 보여 미학적 완성도가 높고 1951년 원안 스카프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될 만큼 역사적 가치도 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아리랑 스카프는 동맹국의 위대한 연대를 알리는 상징물로 자유의 가치, 연대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복원했다”고 말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아리랑 스카프는 미국 클라이드 부인의 것이다. 부인은 1952년 아들 클라이드 상병이 어머니 건강을 염려하며 편지와 함께 보낸 이 스카프를 결국 돌아오지 못한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손에 쥐고 아리랑 가사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2023년 아리랑 스카프’는 기존 원안에 70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2023년 대한민국 현재 모습과 22개국 참전국가 국기를 모두 담아 그 의미를 더했다.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부산에 모인 22개국 참전국 대표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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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국전쟁과 아리랑(上)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 소련의 지령과 중국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다. 약 5년간의 체제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냉전 속의 이 체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후자는 수립이 되자마자 군사력을 확충하며 소련과는 ‘조소군사비밀협정’을, 중국공산당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 2만5천명이 북한군에 인도됨으로서, 13만명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우월한 전세를 갖춘 북한은 통일을 내세워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남침을 했다. 이렇게 전 38선상에 남침함으로서 촉발된 전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UN 결의에 따라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되었고, 미7사단 주력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서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 9일만에 평양을 점령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교착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 때부터 UN군 등에서 제한전쟁으로 휴전이 제기 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으로 한민족은 너무나 큰 손실을 보았다. 정신적 피해는 제처 두고라도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많은 이산가족 발생 같은 고통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인적 손실은 어느 전쟁보다 컸는데, 국군은 140여만 명, 북한은 약 329만 명, 유엔군은 약 15만 명의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남북은 무려 520만 명의 희생을 낸 것이다. 전쟁 피해, 희생은 이뿐만이 아니다. UN 참전군들의 희생도 크다. 참전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룩셈부르크 16개국이 유엔군으로서 약 190만 명의 전투병을 파병했으며,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가 야전병원, 병원선 등의 의료지원을 통해 참전했다. 이들의 인명 희생도 막중했다. 또한 많은 포로들의 발생도 그 처리로 갈등을 겪었다. 한민족이 남북군과 중공군에 동족임에도 편입되었고, 16개국 UN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로 교환 문제는 휴전회담 기간 내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강제로 징집되어 많은 투항병이 발생하였고, 한국군 포로가 재 강제 징집 되어 북한군이 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중공군 포로 중에는 송환을 거부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UN '포로교환문제소위원회'와 '국제적십자조사위원회'는 곤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세 가지 문제로 급진전하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 지역에 전염병의 발발한 사실이고, 둘은 1952년 12월 유엔총회에서 120일간 설득하여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 4개국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하게 하자는 합의를 하였다. 마지막은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이런 경과로 휴전은 급진하였다. 드디어 1951년 7월 미국의 릿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김일성과 평더화이 중공군사령관이 개성에서 회담이 시작되어, 군사분계선 설정, 세부사항 일괄타결, 전쟁포로 문제 합의와 협정 체결이 된 것이다.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협정을 맺어 전쟁은 중지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대(對) UN군 측의 미국이 대표하여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휴전이 되었다. 3년 1개월 2일의 전쟁은 휴전 체제로 들어 간 것이다. 이로서 포로교환 등의 여진이 남았지만, UN군은 해체되어 참전 군인들은 각국으로 귀국하였다. 남북한은 전선에서 군인들과 무기를 철수하였다. 그리고 전쟁 복구에 들어갔다. 처참한 동족상잔 한국전쟁은 귀국 참전 군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로 ‘한국은 전쟁의 나라’, ‘한국은 고아의 나라’, ‘한국은 아리랑의 나라’ 같은 인상비평적(印象批評的) 표현들이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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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70주년 기념…경기도청 '용치 사진전' 개최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24일 경기도청을 시작으로 '용치 사진전'을 개최한다.이번 사진전은 지난해부터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전쟁과 분단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 진행한 비지정 근대문화유산 실태조사 중 '용치' 조사 결과와 성과를 도민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웅장한 자태를 선보이는 용치는 연구원이 조사한 32곳 중 21곳을 선보인다.이날 경기도청사를 시작으로 전쟁기념관(서울), 한반도 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파주 임진각), 도라전망대(파주)를 순회하며 올해 12월까지 진행한다.'용치(龍齒·Dragon Teeth)'는 '용의 이빨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적군이 침입하기 쉬운 하천이나 교통로에 설치한 콘크리트 구조물이다.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처음 만들어 낸 것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사이에 많이 설치됐고, 영국의 해안가와 스위스에도 확인된다. 최근 러시아군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에 설치한 용치는 '러시아 방어선의 상징'으로 언론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우리나라의 경우 1·21사태(1968년 김신조 침투사건)를 계기로 1970년대 주로 설치됐으며,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설치됐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다.최근에는 흉물스럽다거나 홍수의 원인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철거 민원이 제기되고 있어 국방부의 군사 전략에 따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용치는 세계 유일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며, 군사적 기능과 유산적 가치가 모두 부합되는 군사유산"이라며 "사진전을 계기로 용치가 철거 대상이 아닌 전쟁과 분단이 남긴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돼야 하는 대상이라는 인식이 널리 공유되길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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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예산군, 윤봉길체육관에서 정전 70주년 기념 호국음악회충남 예산군은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위대한 헌신, 영웅의 자부심'을 주제로 15일 오후 5시부터 윤봉길체육관에서 호국음악회를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이번 음악회는 충남서부호훈지청 주관으로 우리 고장의 호국영웅인 정긍모 제독, 김풍익 중령, 이장원 중위를 비롯한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마련됐다.또한 군민에게 보훈 정신을 알리고자 공연, 제복의 영웅들 퍼포먼스, 판문점 입체퍼즐만들기, DMZ 소원종 등의 다채로운 체험이 진행될 예정이다.군 관계자는 "6·25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을 앞두고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 호국보훈의 정신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군민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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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참전용사들 정전 70주년 맞아 한국 온다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정전 70주년 계기, 오는 24일(월)부터 29일(토)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유엔참전용사와 가족 등 200명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재방한 행사를 진행한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재방한 행사는 정전 70주년 계기, 70년 전 대한민국을 지킨 유엔참전용사에게 정부 차원의 예우와 감사를 전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영웅들을 모십니다” 주제로 추진된다. 방한하는 참전용사와 유가족은 덴마크를 제외한 21개 참전국 200명으로 유엔군 참전의날이자 정전협정 70주년인 7월 27일(목)을 앞두고 24일(월)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다. 재방한 참전용사 중 최고령자는 미국의 해럴드 트롬(미국, 95세) 참전용사로, 1950년 미 육군 이병(PFC)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및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였다. 해롤드 씨와 함께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패트릭 핀 (미국, 92세)씨와 고든 페인 (영국, 92세)씨도 함께 방한한다.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꼽히는 후크고지 전투에 참전한 로널드 워커(89세), 렉스 맥콜(92세), 버나드 휴즈(92세), 마이클 제프리즈(90세, 이상 호주), 빈센트 커트니(캐나다, 89세), 피터 마시(영국, 90세) 참전용사도 방문단으로 내한하며 특히, 빈센트 커트니 씨는 11월 11일 ‘턴 투워드 부산’ 행사를 최초로 제안한 참전용사이다. 또한 4형제가 함께 6·25전쟁에 참전한 아서 로티(캐나다, 91세)씨와 그의 아들도 함께 재방한한다. 아서 로티씨 4형제는 6·25전쟁 정전 후 캐나다로 무사히 돌아갔고 다른 형제 3명은 현재 모두 별세하였다. 방문단에는 전쟁 당시 한국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고 아직까지 찾고자 하는 참전용사도 있다.이번 초청을 통해 처음 방한하는 윌리엄 워드(91세, 미국) 참전용사는 전쟁 당시 부산 캠프에서 매일 자신의 빨래를 해주겠다던 12세 소년 창(Chang)을 찾고 있으며 에드워드 버커너(캐나다, 91세) 참전용사 역시 전쟁 당시 초소(Large Squad) 청소를 했던 ‘Cho Chock Song’이란 한국 소년을 만나고 싶어 두 사람 모두, 당시 찍은 사진을 국가보훈부로 보내왔다. 유엔참전용사의 가족 중에서는, 6・25전쟁에 미8군사령관으로 참전해 중공군의 공세를 꺾고 전선을 38도선 북쪽으로 북상시킨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장군의 외손자인 조셉 맥크리스천 주니어(Joseph Alexander McChristian JR) 씨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월튼 워커’ 장군의 손자인 샘 워커 2세(Sam, S. Walker Ⅱ) 씨도 포함되었다. 재방한하는 참전용사와 가족은 지난 6일 보훈부가 인천국제공항공사(사장 이학재)와 체결한 업무협약에 따라 인천공항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입국절차 간소화, 전용 출입국통로(패스트트랙) 등 최고의 예우와 공항내 전광판, 가로등 배너 등 감사 환영을 받는다. 방한단은 25일(화) 판문점 방문을 시작으로 26일(수) 유엔참전국 감사 만찬에 참석하고 27일(목) 부산 유엔기념공원 방문, 유엔군 참전의날 및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 참석, 28일(금) 전쟁기념관 방문의 공식 일정 후 29일(토) 출국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유엔참전용사분들은 73년 전 발발한 전쟁에서 낯선 땅, 낯선 나라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목숨을 바친 진정한 영웅”이라며"대한민국의 놀라운 70년을 만든 주역인, 이분들이 재방한 기간 어떠한 불편함도 없도록 최고의 예우를 다하고 대한민국과 참전국, 더 나아가 세계의 젊은이들이 유엔참전용사의 숭고한 인류애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국제보훈사업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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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세계합창대회’ 뜨거운 대성원으로 성료강원 강릉에서 열린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합창대회 ‘2023 세계합창대회’가 13일 폐막식을 끝으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3일 강릉아레나에서 개막한 강릉 세계합창대회는 11일 동안 강릉 일원에 개최된 모든 공연이 매진되는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6만3000여 명의 관람객과 연인원 3만8000명의 합창단 및 스태프가 참여해 총 10만1000여 명이 대회를 함께했다. 챔피언 대회 파트1 경연에서는 대한민국 ‘콜링콰이어(시닉팝/쇼콰이어)’팀과 인도네시아 ‘카랑투리 합창단(민속음악 아카펠라)’, 홍콩 ‘디오세산 스쿨 올드 보이즈(남성합창단)’이 대상을 차지했다. 파트2 경연에서는 벨기에 ‘아마란스 합창단(여성챔버콰이어)’, 네덜란드 ‘데쿠르 클로즈 하모니(재즈, 가스펠)’, 대한민국 ‘클라시쿠스(현대음악혼성)’이 각 분야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특히 국내 합창단 중 최고점을 받은 ‘클라시쿠스’팀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강릉 세계합창대회는 주요 방송 및 언론사들의 주목을 받으며 대회 1개월 전부터 800건 이상의 보도가 이어지는 등 큰 관심 속에 진행됐다.이번 대회에는 34개국 324개 팀이 참가해 개·폐막식, 시상식, 경연, 우정콘서트, 축하콘서트, 총회, 워크숍 등의 공식 행사가 펼쳐졌다. 국내외 300여개 합창팀들이 찾아와 지역상권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이날 오후 강릉아레나에서 열린 폐막식에서는 인종과 국가를 초월해 하나의 노래로 평화를 염원하는 타종 퍼포먼스와 대합창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보그닉 소녀합창단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평화의 하모니를 선사해 깊은 감동을 줬다. 허용수 강릉 세계합창대회 조직위원장은 "이번 대회는 강릉의 국제적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K합창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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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독 수교 140주년 문화행사..영화에서 클래식까지한국과 독일 수교 140주년을 기념한 다양한 문화행사가 독일 현지에서 개최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독일한국문화원과 함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7월 8일(토), 한-독 합동 클래식 공연 ‘함께하는 길’로 알린다. 한-독, 1883년 우호조약 체결 이래 신뢰하고 협력하는 동반자로 발전했다. 한국과 독일은 1883년 조·독 우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고 1963년부터 서독에 한인 광부와 한인 간호사를 파견하는 등 140년에 걸친 오래 교류를 통해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는 동반자로 발전해왔다. 특히 양국은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겪었음에도 한강의 기적과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등 유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왔다. 1970년에는 한·독 문화협정도 체결해 문화 분야에서도 계속 교류하고 협력해왔다. 7월 8일(토),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Konzerthaus) 대극장에서 열리는 한-독 합동 클래식 공연 ‘함께하는 길’에서는 한국인 지휘자 정나래가 이끄는 독일 도르트문트 청소년합창단*과 도르트문트 오페라극장 솔리스트인 테너 김성호 등이 무대에 선다. 독일 도르트문트 청소년합창단은 ’23년 6월 독일 최고 권위 독일합창대회에서 1등 수상했다. 김성호는 ’23년 6월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2023’ 가곡 부문 우승 차지했다. 9월부터는 베를린 훔볼트포럼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독일 프로이센 문화유산재단과 협력해 한국미술 기획전시 ‘훔볼트포럼 한국문화재 소장품 특별전’을 개막한다. 9월 26일(화)에는 베를린 아드미랄팔라스트(Admiralspalast)에서 국립무형유산원의 창·제작 브랜드 공연 ‘생각하는 손’을 개최한다. 한국의 무형문화재인 ‘사기장’과 ‘매듭장’ 보유자가 작업 과정을 무대에서 직접 재현하는 동시에 작업 과정을 무용가들이 무대에서 몸으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독일의 ‘마이스터*’ 정신에 상응하는 한국의 ‘장인’ 정신을 독일 관객들에게 전할 예정이다. 11월에는 베를린 바빌론 극장 등지에서 한국영화제를 통해 다양한 한국 영화를 소개할 계획이며, 특히 올해 광부 파독 60주년을 기념해 관련 다큐멘터리도 제작·상영한다. 한국에서도 한-독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울리히 뷔스트 사진전(7~11월)’, ‘하모니 마라톤 대회(9월)’, ‘한독수교 140주년 기념음악회(11월)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연중 개최할 예정이다. 문체부 유병채 문화예술정책실장은 "이번 수교 140주년 기념 문화행사가 자유를 보편적 가치로 하는 독일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K-아트를 비롯한 K-컬처의 매력을 독일 현지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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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세계합창대회’에 대한 기대‘세계인을 하나로’, '모두를 위한 평화와 번영', ‘우크라이나 팀’, 설레는 말들 아닌가! 내일부터 13일까지 강원도와 강릉시, 인터쿨투르가 주최하고 조직위가 주관하는 2023 강릉세계합창대회 행사 자료에 나오는 키-센텐스들이다. 3일 오후 강릉아레나에서 개막해 13일까지 11일간 강릉 시내 일원에서 펼쳐지는 세계 합창대회이다. 국가와 종교, 세대를 뛰어넘어 세계인을 하나로 이어줄 합창단이 대거 참가하게 된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팀도, 화려한 수상 경력과 타이틀을 지닌 총 34개국, 323개 팀, 8천여명이 합창으로 '모두를 위한 평화와 번영'을 합창으로 호소하는 자리이다. 이런 취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합창단은 우크라이나 ‘보그닉 소녀합창단’ 이다. 7월 3일 강릉아레나에서의 개막식 공연을 비롯한 축하콘서트와 13일 폐막 공연에서도 합창으로 멧시지를 전한다고 한다. 1970년대에 창단돼 전 세계를 투어 하는 팀으로 우크라이나 보그닉 소녀합창단(Girls Choir "Vognyk") 40명으로 구성되었다. 합창단 지휘자 올레나 솔로비(Olena Solovei)는 "나의 조국인 우크라이나는 전쟁의 포화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자 전쟁에서 분연히 일어난 대한민국에서 세계인의 마음을 울릴 평화를 노래하고 싶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외에도 명성 있는 세계적인 합창단들이 참가한다. 독일 'Sangerkreis Hildburghausen'합창단은 세계합창대회에 최다 참가하는 팀이다. 2012년 창단돼 벨기에 플랜더스(2021년) 합창제 출연 외에도 세계 주요 합창대회에서 수상을 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벨기에 아마란스(Amaranthe) 합창단은 지난 해 대회인 벨기에 플랜더스 대회에서 최고점을 받은 인터쿨투르 월드랭킹 5위에 빛나는 합창단이다. 또한 세계 대회에 처음으로 출연하는 미국 ‘Young People's Chorus of New York City’는 뛰어난 기교와 화려한 쇼콰이어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다문화 청소년합창단이라고 한다. 눈길을 끄는 합창단은 가장 먼곳에서 오는 합창단이다. 페로제도 보츠와나 ‘Kgalemang Tumediso Motsete Choir’로 한국까지 총 20시간 이상의 비행을 거쳐 도착하는 합창단이다. 국내 합창단도 대거 참여한다. 보컬리스트이자 서울장신대학 교수인 가수 진주씨가 제자들과 함께 지휘자로 참가한다. 시민단체 활동가, 직장인, 독립운동가 후손, 교사, 작가, 시인 등 개성이 뚜렷한 단원들로 꾸려진 '종합예술단 봄날'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다가가 노래로 위로하고 힘을 북돋우며 연대하는 합창단이다. 평균 연령 75세의 실버합창단인 '나누리 합창단'과 국내 합창단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 '사랑 합창단'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합창단이다. 이와 함께 불교·기독교 합창단부터 어린이합창단, 실버합창단, 장애인·다문화 합창단까지 다양한 합창단이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어 참가한다. 합창은 여러명이 모여 부르는 ‘떼창’과는 다르다. 악곡의 각 성부를 여러 사람들이 각기 맡아 부르는 형태로 2부, 3부, 4부 등으로 나뉘어 서로 화음을 이루면서 다른 선율을 노래한다. 서로 다른 성부로 조화를 이뤄 화음을 낸다. 마음을 모아 진실의 음역에서 창출한 화음이다. 그래서 합창은 공연성의 수준보다 한 마음으로 발하는 멧시지가 소중하다. 이번 ‘강릉세계합창대회’의 메세지 ‘세계인을 하나로’, '모두를 위한 평화와 번영'이 세계인의 마음에 전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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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3)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읍 갈평리 마을 입구 삼거리는 이강년 의병장 전적지로, 1907년 10일~11일 양일간에 있었던 갈평전투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갈평리 주민들과 이강년을 추모하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경모각(景慕閣)을 세웠고, 1979년 관에서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1907년 9월 9일 저녁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이 상초곡에 주둔하고 있는 이강년 의진(義陣)을 찾아와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의병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며 저녁밥을 지어 왔다. 이강년은 주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모두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이곳에서 지냈다. 9월 10일 새벽 일찍 하초곡을 거쳐 요성으로 부대를 옮겨 주둔하고 있을 때 갈평 쪽에서 포성이 울려왔다. 척후병의 급보에 의하면 어젯밤 갈평리로 들어간 조동교, 김현규 부대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의병이 대패하였으며 흐르는 시냇물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인명 피해가 크며 갈평마을은 왜군이 불러 질러 화염이 치솟고 있다고 하였다. 급히 진군계획을 세우면서 현지 정세를 살펴보니 수백 명의 일본군이 있었으나 달아난 의병을 추격하거나 마을에 숨어 있는 의병을 수색하기 위해 흩어져 있고 갈평 냇가에는 본진 50여 명, 1개소대 병력만 남아 있는데 지금 점심 취사 준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후기 의병의 주된 전술은 치고 빠지는 유격전이 대세였다. 운강 이강년은 기습작전을 펴기로 하고 제장(諸將)을 불러 사방으로 분산, 적의 주둔지 가까이 까지 은밀히 접근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내가 총을 쏘면서 깃발을 흔드는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사방에서 기습당한 일본군은 당황하여 일부는 총을 들고 저항했지만, 대다수는 도망가기 바빴다. 이렇게 하여 조동교, 김현규 의병부대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약탈을 일삼던 일본군 본진 1개 소대를 궤멸시키고(적 8명을 생포 및 사살) 일본군이 소지했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한 갈평전투는 의병 전투사에 빛나는 큰 성과였다. 이어서 9월 14일 적성전투에서 신태원 후군장 등 아군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한 후 예천 명봉사에 머물다가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단양을 거쳐 영춘으로 향했다. 9월 25일 영춘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 12일 괴산 연풍전투에서 일본 수송대를 급습하였으며, 10월 22일 원주 유치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11월 2일부터 11월 15일까지 4차에 걸친 죽령전투에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 및 격퇴하였다. 이어서 소백산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세 불리로 단양 영춘으로 퇴각한 뒤 신돌석부대와 합진하여 순흥을 공격하여 일본군 퇴각시켰다. 다시 11월 26부터 12월 25일까지 충북 단양 일대에서 유치전투, 백자동전투, 영춘궁동전투, 복상동전투, 월계동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전투를 계속하다가 12월 말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춘천 쪽으로 이동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신식무기와 탄약을 가진 정예 군인 3천 명이 합류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1908년 1월 일으킨 한성 탈환 작전이다. 총대장으로 경기도 여주 출신이며 문경으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해 오다 거의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진공 작전에 돌입했으나, 효(孝)란 절대 가치를 가진 유림으로서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이인영을 이어 총대장 역할을 맡은 창의군 군사장(軍師長)인 선산 출신 왕산 허위(許蔿)는 동대문 밖 30리(현재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일대)까지 진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다. 비록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서울진공작전은 흩어져 있던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켜 일제에 대항,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때 운강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여하였다. 운강 이강년은 해가 바뀐 1908년에도 변함없이 항전하였는데, 1월 6일 경기도 동북부 낭천전투를 비롯해서 3월 28일까지 가평 건천전투와 용소동전투, 대청동전투, 포천 청계전투에 임했으며,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는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 강릉 하사동전투와 사동전투, 홍천 북면전투, 양양 백사장전투를 계속하였다. 5월 16일에는 경북 북부 봉화 서벽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다시 6월 4일 봉화 내성전투, 6월 10일 봉화 재산전투, 6월 21일 제천 오미리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렇게 많은 전투 중에 ‘봉화 서벽전투’에서 이강년이 대승한 것을 기리기 위해 봉화군민들이 뜻을 모아1984년 12월 봉화군 춘양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항일의거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 슬프도다! 하늘도 무심하지! 강원도·충청도·경북 일대에서 종횡무진 활동하셨던 운강 이강년 선생의 13년(1896년∼1908년)간의 의병 투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청풍군 금수산 ‘작성산(鵲城山)전투’에서 발목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셨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일본군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들이 주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때 한탄하기를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또 옥중에서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라는 시를 남겼다. 의병장 이강년은 왕손으로서, 선비로서, 의병장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죽겠다며 면회 온 아들에게 구차하게 "살려 달라 하지 말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의연함을 보였다고 한다.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신 이강년 선생은 마침내 1908년 10월 13일(음력 1908. 9. 19)51세를 일기로 의기에 찬 일생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시니 하늘도 산천도 슬피 울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역에 출빈(出殯-임시 운구 안치)되었다가 나중에(12월 13일) 제천 두학동 장치미로 반장(返葬) 후 다시(1944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강년 선생의 순국 후에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호국 인물인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최영, 강감찬, 이순신, 김종서, 권율, 곽재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22분과 함께 흉상으로 모셔져 있다. 이번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순례’ 중에 ‘애국과 의병정신’이란 주제를 두고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어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내용을 소개하면, 문경시 가은읍 ‘운강이강년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선유구곡 제9곡 옥석대(玉蕮臺)에 학천정(鶴泉亭)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 鶴泉(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의 옆에는 글의 주인인 듯한 이름으로 李完用(이완용)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강년과 이완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강년과 이완용은 1858년생 동갑이다. 이강년은 22세에 무과(고종 17년-1880년)에 급제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고난의 삶을 살다 중년인 51세(1858∼1908)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전기한 바와 같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전쟁기념관 호국인물 흉상’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이완용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처신으로 부귀영화와 노년인 69세(1858∼1926)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을사오적,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는데 학생 여러분은 누가 참삶을 산 인간 승리자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였다. 문경에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84인이 계신다. 그래서 문경은 ‘의병과 독립운동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문경 출신 역사 인물 중에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다 생을 마치신 분이 많이 계신 반면에,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한일합방에 찬성하는 등 친일 매국을 하고 조국의 젊은 청년들을 희생물로 하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제물이 되도록 하여‘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문경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자도 있다. 이번 3박 4일 일정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맺음말로, 우리가 이번에 걷는 순례길에는 이강년 의병대장 외에 이름이 알려진 의병은 물론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의병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그 혼이 살아 있는 길을 걸었다. 우리가 이 힘든 산악길을 걷는 의미는 고난의 세월을 살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의병들을 기리며, 세계 유일 분단국가로서 북한의 핵 위협과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언제든지 또 다른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다 같이 의병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마음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지난 2018년 6월 1일 ‘의병의 날’을 맞아 문경에서 개최된 행정안전부 주최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에서 필자가 자작시인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란 추모 헌시를 낭독하였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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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아리랑제’, 가능성 확인되었다‘제2회 동두천아리랑제’가 지난 25일 오후 5시 시민회관 공연장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동두천아리랑보존회가 호국보훈의 달에 마련한 625전쟁 정전 70주년 기념하는 동두천아리랑제이다. 토속아리랑 '이담어러리타령' 8수, 창작아리랑 '동두천아리랑' 10수.... 2곡이 발표 되었다. 동두천에는 전래되는 어러리(아라리)와 본조아리랑 선율이 불려진 것이다. 이 아리랑을 유은서 회장이 아리랑학회 자문을 받고 현지 답사를 병행하여 발굴하고 복원하여 동두천 시민들에게 지난해 제1회 동두천아리랑제에서 알렸다.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이후 유은서 회장은 아리랑학회에서 동두천에도 아라리가 불려졌다는 학술적 근거를 가지고 경로당을 찾아서 발굴작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유회장은 경기북부 지역에서 30여 년간 국악 활동을 하면서 북한강 수계를 따라서 불려지는 포천어러리, 연천어러리(아라리) 등에 주목했다. 이후 '경기아리랑에 관한 연구'로 국민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동두천 관내 많은 경로당을 찾아가며 귀담아 들었던 아라리를 정리하였고, 8년 전 동두천지역 어르신들로부터 이담이라는 옛 지명이 담긴 이담어러리 30수를 찾았다.이렇게 동두천에도 향토민요인 이담어러리타령과 아리랑이 채록되었다. 현재 동두천아리랑보존회에서 향토민요 ‘이담어러리타령’이 전수되고 있다. 이담어러리타령 (소리:유은서/채록:기미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나를넘겨주게 아리랑 고개는 열두고개 아리랑 고개로 날만 넘겨주게 올라가는 신감사야 내려오는 구감사야 구관이 명관이라고 말 전하거라 내가 넘어가는 고개는 한 고개라 우리 님 고개는 열두 고개 이담면 흐르는 물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 저 멍텅구린 날 안고 돌줄 모른다 해는 지는데 갓을 쓰고 어디를 가오 첩의 집에 가거들랑 나 죽는 꼴 보고 가소 앞집의 처녀는 시집을 가는데 뒷집의 총각은 목메러 간다 여보게 총각아 목메러 가지 말고 이내몸 시집간데로 몸살러 오게 아리랑사(史)에서 6.25전쟁과 동두천은 깊은 관계가 있다. 주한 미군 제7사단가 '아리랑', 안흥리 '아리랑다리', 동두천 위안부 모임 '아리랑'이다. 1953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동두천 보산리에 주둔한 주한 미군 (캠프 케이시)제7사단가가 '아리랑'이다. 특히 동두천 양공주로 불린 위안부들의 모임도 '아리랑'이고, 1964년 3월 10일 준공이 된 주한 미군 제7사단 장병들이 지어준 '아리랑다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아리랑다리는 "64년 3월 10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 안흥리에 주한 미 제7사단 장병들이 손수 지었다. 제7사단장 그레이 소장이 양주 군수에게 '아리랑다리'를 지어서 인계했다. 폭 2m, 길이 120m로 미국과 한국의 굳은 우정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다리라고 지었다"(대한뉴스 제 460호)라고 한다. 당시 동두천에서는 2만 6천명이나 되는 주한 미군 제7사단의 단가 아리랑이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미군들과 주민들이 만나면 손 붙잡고 아리랑을 자주 불렀다고 한다. 혹자는 출렁거려서 아리랑다리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당시 미제 통조림 깡통이 줄줄이 매달려 있어서 '깡통다리'라고도 불려졌다고 한다. 이렇게 서양속담에도 "사랑받는 아이는 이름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1967년에 '아리랑다리'라는 영화로도 나왔다. 그런데 1972년 노후한 아리랑다리를 헐고 현재는 새로운 다리를 짓고서 안흥교라는 이름을 부쳤다. 지난 6일 동두천아리랑보존회원들과 함께한 동두천아리랑답사에서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서 관내 역사 유래에 대한 지명이나 시설을 적극 발굴하여 안흥교를 다시 아리랑다리로 복원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당시 아리랑다리를 지어주고 1971년 3월 2만명의 미군들이 철수하면서 제7사단가로 불린 아리랑을 미국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코리아라는 나라는 전쟁 페허 속에서도 남녀노소가 모였다 하면 아리랑을 부르면서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설명하면서.....(주한 미군 제7사단에 3대가 복무한 마이클람부라우 박사(손자) 증언) 당시 동두천은 지나가는 개들도 입에 파란 달러를 물고 다닌다고 했다. 그만큼 급작스럽게 자본 집중과 유입으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1950년 전쟁이후 동두천이야말로 아리랑이 가장 많이 불려진 지역이기도 하다. 군가로 불린 아리랑은 자연스럽게 미군들과 위안부들에 의해 불려져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세계적 뮤직션들이 아리랑 음반을 발매하고, 미국 동포들까지도 아리랑을 애국가처럼 불렀다. 지금도 6월 보훈의 달 뉴스에서 한국을 다시 찾는 미군 참전용사들은 의례적으로 당시를 기억하며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유은서 회장은 "새로 작창한 동두천아리랑에는 동두천 미군 기지촌의 애환이 담겨 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반 강제동원이나 속여서 끌려온 어린 여인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들의 한을 아리랑으로 정화하고 치유하시기를 바라며...."라고 설명하면서 어느새 울컥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도 함께 눈물이 고였다. 작년에서부터 그분들을 무대에 모시려고 수차례 청을 드렸는데 아직까지는 만나주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는 세상인데...아직까지 그분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보존회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오늘을 동두천아리랑제 개최일로 정례화 하기로 하였다. 식전행사로 풍물패 밝달이 지신밟기와 풍악을 울려 신명과 흥을 올렸다. 이어 동두천에서 전래되고 있는 향토아리랑 이담어러리타령, 창작아리랑 동두천아리랑이 첫 막을 열었다. 동두천아리랑 (소리:유은서/채록:기미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넘어간다(후렴) 우리낭군 먼동이 트면/모랫말가고요 아낙네들 신천물/빨래터에서 놀고요 저기가는 기차는/검은연기만 나고 이내가슴 타는데도/검은연기가 나네 동산올라 구경하니/길가는행인왜모르나 천하일색 나하나와/놀다가지못하고 고추당추 맵다해도/시집같이나 매울소냐 못살겠네 영죽겠네/이내시집은못살겠네 자재암 풍경소리는/ 바람따라 울리고 소요산 공주봉에는/ 바람소리 좋구요 만경창파방을삼고/연화수다가 옷을입고 이리떠도 둘이나둥둥/저리떠도 둘이쌍쌍 꽃이야 곱다마는/가지 높아서 못꺾었나 꽃은 꺾어/머리에 꽂고/잎은흝어다 입에물고 미군부대 앞마당에는/민들레꽃 고운데 꽃답던 이내청춘/어느새 시들어졌네 아리랑다리는 깡통강통/깡통다리라네 아리랑다리는 출렁출렁/출렁다리라네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과 회원들이 지난해 동안 갈고 닦은 가량을 펼쳤다. 2019년 함양산삼엑스포에서 음반으로 발매된 '황석산아리랑'(작곡:양평수, 소리:유은서)도 함께 선보였다. 한국무용 '살풀이'(이해영예술단), 변검, 동동구루무(송해문화예술진흥회), 한국무용 '강원도아리랑'(늘춤무용단), 인형극 (정승재)이 펼쳐졌다. 이어서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과 이병일(특별회원), 회원들이 소극으로 꾸며서 배역을 맡고 들려준 왕십리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을 생생한 감동으로 선사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사할린에는 왜왔나 왜왔나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남화태 징용왔네 안성아리랑보존회 조명숙(안성경서도잡가 보유자)과 회원들이 1911년에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안성아리랑을 선사했다. 조명숙 명인은 안성권번이신 어머니를 따라서 70 평생 노래만 불렀다. 뛰어난 공력으로 무대를 신명나고 신나게 만들어서 초청 단체 중 가장 많은 박수와 관심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관객으로 오신 귀명창들에게 전화가 왔다. '귀한 소리 들었다고" 동두천 시민들에게 서울경기 지역과 사할린에서 향유하고 있는 아리랑들을 선보였다. 안성아리랑, 동두천아리랑, 왕십리아리랑, 사할린아리랑과 함께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선사했다. 총 10개 단체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날 박형덕 동두천시장, 김승호 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회 김경수 지회장, 김성보 대한노인회 동두천시지회장, 동두천여성단체협의회 윤한옥 회장, 동두천농업협동조합 목현균 조합장, 동두천시종합자원봉사센터 형남선 센터장, 안성아리랑보존회 조명숙 회장,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 이무성 화백, (주)국악신문 관계자,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 등 300여 명의 관객들이 함께했다. 박형덕 동두천시장은 시민들에게 "동두천아리랑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고 전했다. 김승호 동두천시의회 의장은 "아리랑은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과 아이덴티티를 대표하는 인자"라고 전했다. 대한노인회동두천지회 김승호 회장은 "이제 두 돐을 넘은 동두천아리랑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랫동안 지역 전통문화 창달을 위해 온 김경수 동두천국악협회장의 배려와 지원을 부탁한다"고 전했다. 한편 동두천 전통문화 발전에 힘쓰고 있는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 김경수 지부장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었지만 동두천 지역 아리랑의 발굴과 복원작업을 통해 동두천의 역사성을 '동두천아리랑'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동두천아리랑보존회는 지난 2012년 12월에 세계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리랑과 함께 향토아리랑 동두천아리랑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아리랑을 통해서 지역문화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데 목적을 둔 비영리 문화단체다. 또한 아리랑 3대 정신(저항, 대동, 상생)을 계승한다. 지난 12월 등재 10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선에 세운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비에 동두천아리랑이 새겨져 있다. 유은서 회장은 "이번 동두전아리랑제를 위해 동두천아리랑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아리랑답사를 회원들과 수행하면서 더욱 아리랑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내년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주제의식을 구축하고, 스토리텔링 작업으로 다듬어서 소극으로 동두천아리랑을 올려보고자 한다."라고 전했다. 제2회 동두천아리랑제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고 동두천시, 동두천시의회, 전국아리랑공연예술연합회, (주)국악신문, 동두천예총, 대한노인회동두천지회, 동두천농업협동조합이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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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한마당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장 (현 석관중학교장)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현지 사할린 동포들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인사를 나눈다. 시시각각 소식들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퇴근길에서 열어 보고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하트를 보낸다. 지난 11일 주말 아침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의 초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귀국하고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영주귀국동포들이 사시는 경기도 양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찾아가는 아리랑 학교"가 열린 것이다. 서울에서 양주까지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면서, 지난 3년 간 임기를 마친 사할린한국교육원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 중 많은 추억들 중 '사할린아리랑'은 기미양 대표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3년 전 7월 중순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과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사할린 비자 갱신차 일시 귀국했다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행사를 준비하는 문제로 종로에서 만난 것이다. 현재는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된 상태이지만 2016년부터 매년 아리랑연합회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공동주최로 사할린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연을 수 차례 지속적으로 주관해 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국내외 55개 아리랑전승단체와 연구단체로 구성된 순수 시민운동단체이다. 그후 일시 귀국 때마다 국악신문사에서 보내주는 한복과 태극선 부채, 태극상모(이담농악), 아리랑음반,국악음반 등을 사할린 한민족예술동포단체에 전달했고, 아리랑학회에서 주관하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에 수강하기도 했고, 돌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 특강과 새해 첫날 우리말방송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미양 대표와는 아리랑 관련 자료와 행사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화상통화로 10월에 내린 사할린 첫눈 소식을 건내 주어서 국악신문 포토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에서 지어준 '아리랑누각'과 '아리랑공원' 건립 소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국제적 사정으로 매년 사할린아리랑축제 및 아리랑 예술공연 단체가 준비하는 사할린 방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사할린에서 탈춤과 소고춤, 사할린아리랑, 밀양아리랑, 어부놀이 등 민속춤과 아리랑배우기 등을 통해 사할린 동포 및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2022년 3월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 50명과 함께 특별초청 되어 동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22년 KBS방송 한민족수기공모전 수상자 인터뷰, 한민족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서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KBS한민족수기공모전 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사할린 동포의 존재와 이산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지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러시아어 대화가 들려서 참으로 신기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말 걸고 싶은 기분이랄까. 문경에서 도착한 대형버스에서 앰프와 악기, 다듬이, 박스 등이 리어카에 실려서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할린 어른들도 함께 손수 나르시고 계셨다. 떡과 수박 등 다과회까지 준비를 해오셨다. 공연 식전 행사에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게 되면, 1세대 어르신들께 큰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양주 율정마을 동포 1세대분들께 바닥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이어 "아직도 3년간 살다 온 사할린 기억이 생생해서 자다가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글을 쓰며 추억한다. 그리고 영주귀국 신청 전에 부모가 사망하시면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2세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가슴이 울컥해져서 머리 속이 먹먹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닫혀진 대강당 문이 오늘 3년만에 처음 열게 된 것이다. 한쪽 면은 대형 사이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비치는 공간이라서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무덥지는 않았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관람객이 늘어나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다소 습기가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할린에서 살다오신 어르신들께는 부담이 되는 기온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체질이 형성된 분들이라 한국의 무더운 여름은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는 사할린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9월 말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고 했는데....이제는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3년간이나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회장:이만유)가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모두 아리랑판이다. 율정마을 어르신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의 '왕십리아리랑',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동두천아리랑'이 불려졌다. 2부는 문경에서 오신 40여 명의 아도위 회원들이 준비했다. 아도위합창단과 아도위연주단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 주시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단이 트롯트를 선사했다. 동포들이 무대에 나와서 우리 전통 춤사위와 러시아 민속 춤사위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신명을 높여 주었다. 트롯트에서 빠른 비엔나 왈츠, 불루스 등을 망라한 춤판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노래보다 춤을 더 즐긴다. 우리가 노래방을 좋아하는만큼 그들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휘날레 춤판에는 많은 어른들이 춤을 추시고 기뻐하셨다. 코로나가 때문에 너무나 오랜만에 모여서 추어보는 춤이라고 하시면서....이러한 자연스런 파티 풍경은 사할린에서 근무하는 동안 너무나 낯익은 어울림이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운 사할린 추억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문경시민들은 동포 분들께 드릴 정성이 담긴 선물도 듬뿍 가져 오셨다. 문경시장이 보낸 아리랑 책자, 문경특산물 오미자 와인, 오미자김 등을 뒷풀이에서 풀어 놓기도 하셨다. 직접 만든 생강조청을 준비하신 문은자 여사님의 정성이 대단하다. 기미양 대표님은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장으로서 '아리랑'을 매개로 현지 사할린 동포와 전국 여러 지역의 사할린 영주귀국동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분들의 성함과 얼굴, 모스크바에서부터 사할린에 사는 친인척 관계에서 겹사돈 관계까지 거의 알고 계신다. 그동안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고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안간, 인천 등 에 사시는 많은 사할린 사람들을 만나서 강제동원과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표님과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2017년 사할린 이산의 역사가 다큐로 방영되고,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참가를 널리 알려오고 계신다.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공중파와 출판을 통해 소개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매년 대상 수상작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의 고통이 담긴 가족사이다. 작년 대상 역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글학교 수강생 김경순(77세) 어른이 수상했다. 201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간 개최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사할린아리랑무용단과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대상과 금상을 받았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앙상블(단장:박영자), 오늘 만난 양주 율정마을 사할린 동포로 이루어진 사할린아리랑보존회 합창단이 수상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게나김 단장도 초청되어 무대에서 '카레이스키아리랑'을 부녀가 같이 불러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는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리랑을 매개로 활발한 개방과 교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판데믹의 여파과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의 중단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아리랑을 매개로 문경시민들과 사할린이 연결된 오늘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의욕을 신선하게 일으키는 날이다. 순수 시민운동단체로서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의 활동이 놀랍다. 이만유 회장의 특강에서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온 국민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진정성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먼 길을 와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동두천아리랑보존회, 한편 이혜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님은 병원 입원 중에도 양주까지 오셔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재입원하셨다.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할린아리랑보존회 및 율정마을 어르신들, 오늘 사할린과 문경의 만남을 순조롭게 이어주신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동행 등,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귀한 다음 만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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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참요(讖謠) 파랑새 동학의 노래라 불리는 '파랑새요' 같은 조 같은 가락 달라진 노랫말 시대적 맥락 속 숨은 뜻 들어 있어 세상 모든 소리 들어 아는 '관음조' 천리 밖 소리 들어 길흉화복 꿰뚫어 봉건사회 뿌리째 뒤흔든 동학운동 다시금 파랑해 노래를 흘얼거린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지었다. 벽화를 그려야 할 차례였다. 마침 한 노인이 찾아왔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리겠다.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주지스님이 수락은 하였지만 보지 말라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살짝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림 그린다던 노인은 온데 간 데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주지스님이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짝 놀란 파랑새가 붓을 입에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진 무위사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림을 그리던 파랑새가 날아가 버렸으니 화룡점정(畵龍點睛), 점안식을 못한 셈이랄까. 그래서 지금도 무위사 극락보전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사찰의 파랑새 설화는 전북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 설화나 낙산사 및 홍련암 등이 유명하다. 의상대사가 한 곳에 참배를 하다가 푸른 새를 만났다. 갑자기 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상이 그곳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비로소 바다에 붉은 빛의 연꽃이 솟아올랐다. 관음보살의 현현(顯現)이었다. 지금의 낙산사 혹은 홍련암이 생긴 내력이다. 내소사에는 호랑이가 사찰을 짓고 파랑새가 단청(丹靑)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남녀노소 모르는 이 없이 잘 알려진 우리 민요다. 대개 '파랑새노래'라고 한다. 항간에서는 여기서의 파랑새를 1894년 아산만에 상륙했던 청나라 군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나라이니 파란색이라는 뜻으로 이해한 듯하다. 녹두밭은 동학당이고 청포장수는 서민대중이며 녹두꽃은 전봉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전봉준의 어릴 때 이름이 녹두였다니 녹두꽃을 녹두장군에 비유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풀이들은 견강부회적 말맞추기일 가능성이 높다. 대개 한자말을 우리식으로 풀어쓸 때 이런 잘못을 많이 범한다. 청나라는 푸를 청(靑)이 아니라 맑을 청(淸)을 썼다. 발음의 유사성을 고려하더라도 청나라군사에 비유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노래는 이렇게도 불린다. "새야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파랑새'의 자리에 '녹두새'가 배치되었다. 이 노래로 보면 녹두새(파랑새)는 전봉준을 가리킨다. 정 반대의 해석인 셈이다. 같은 곡조 같은 리듬인데 여러 가지 노랫말들을 바꿔 불렀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노래여서일까? 당대 민중들의 수요와 욕망들이 달라서였을까? 그래서다. 동학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파랑새요'를 상고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단순한 댓구로 가져다 쓴 용어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인용하는 배경, 행간의 숨은 뜻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랑새와 관음조(觀音鳥)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이해 내 콩 밭에 머물렀던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 밭의 파랑새야......" 필사본에 나오는 '청조가' 즉 파란새 노래다. 가사를 보면 동학의 '파랑새노래'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랑새가 그렇고 콩밭이 그렇다. 여기서의 파랑새는 사다함의 연인 미실이다. 정민 교수는 이 노래가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자체의 위작 가능성이 분분하니 크게 강조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파랑새노래의 연원은 신라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설화적 맥락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황해북도 고달굴 전설에 관음조(觀音鳥)가 나온다. 여기서의 관음조가 곧 파랑새다. 낙산사와 홍련암이 우리나라 관음의 최대 도량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가 천부관음을 조성하고 얻은 아이가 자장이라는 이야기와 경덕왕 때 천수관음에게 빌어서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6세기 무렵이니 어쩌면 '파랑새 노래'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설화적 내력으로만 본다면 강진 무위사나 부안 내소사 등도 관음도량이다. 관음(觀音)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이다. 청진기를 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소리 들어 사람의 길흉화복을 꿰뚫어본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생겨난 당대 민중들의 조바심이 직조해낸 것이 동학의 파랑새 노래 아닐까? 김익두가 펴낸 〈전북의 민요〉에는 또 다른 노랫말이 소개되어 있다. "새야새야 무당새야 미륵산에 앉지 마라 샛바람이 부는 것이 눈동자를 가릴러라." 무위사에서 점안식을 하지 못하고 날아 가버린 파랑새가 저잣거리에 들어 무당새가 되었던 모양이다. 식자들이 지어 좀 어렵긴 하지만 이들 모두를 참요(讖謠)라 한다. 여기서의 무당새, 미륵산, 눈동자는 전봉준, 녹두꽃, 동학으로 소급되며 곤핍한 이승을 구원할 관음으로 환원된다. 좌절된 혁명, 실패한 전쟁이었을까. 봉건사회를 뿌리 채 흔들었던 그 정신이 유효하다면 어쩌면 동학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파랑새 노래를 흥얼거려봐야겠다. 오월의 참요(讖謠)흔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뿌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봉건사회에서 근세사회로 넘어가는 절절한 전쟁이었다면 5.18 또한 부조리한 군부의 압제와 질곡으로부터 민주사회로 넘어가는 치열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기 불린 노래들을 에둘러 참요(讖謠)로 해석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주제삼은 노래다.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노랫말들로 구성된다.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나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 동학혁명기의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5.18 기간에 불린 수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을 참고한다. 김선출 진술서에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 우리들은 정의파다 등의 노래가 불렸다. 최병진 수사조서에는 정의가, 투사의 노래, 봉선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흔들리지 않게, 내게 강 같은 평화, 새 나라의 어린이, 그 때 그 사람 등이 이른바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어 부르기)로 불렸다. 이외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불린 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항쟁이 끝나고 김종률이 지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정태춘의 '5.18(잊지 않기 위하여)'까지 또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렸다. 다시 파랑새를 생각한다. 갑오년 농민들은 왜 파랑새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단지 전봉준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염려였을까. 처형에 대한 애절한 반응이었을까. 적어도 이 노래를 참요의 범주에 넣고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라로 거슬러 오르는 관세음보살과 고려의 건국, 조선의 건국을 암시했던 민요들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기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시방 5.18의 노래를 어떻게 소비하거나 재구성하고 있는 것인지. 구시대를 비판하고 새 세상을 준비했던 그 노래, 참요 말이다. 다시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 것인지 녹두장군 파랑새 노래에 비춰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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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특별전서울역사박물관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해 '6·25전쟁과 한미동맹' 전시를 오는 20일부터 9월24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다고 19일 밝혔다.한미동맹 및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이해 기획된 이번 전시는 전쟁 당시 한국에 원조를 제공했던 미국과 유엔의 노력 및 활약상, 한미동맹의 형성과정 등을 소개한다.전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6·25전쟁과 서울 ▲한미동맹의 태동 ▲원조와 재건 ▲대한민국의 평화를 수호한 영웅들로 구성돼 있다.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자료, 실물자료 70여 점 등을 중심으로 한미동맹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전시한다. 아울러 전쟁기의 서울과 서울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전시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간은 평일 및 주말 모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공휴일을 제외한 월요일은 휴관이다.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는 1950년 6·25전쟁 발발부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까지 한미동맹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조명한다. 전시를 둘러보며 전쟁의 아픈 기억과 함께 평화를 위한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공헌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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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 얼쑤!지난 11일 오후 2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서 사할린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문경시민 40여 명이 양주사할린동포회(회장:김정희)를 찾아서 아리랑으로 동포애를 나누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이만유, 아도위)가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일환으로 10년 전 사할린에서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양주사할린동포회를 찾았다. 양주 사할린 동포들은 2018년부터 문경시민들과 문경(2번). 광화문광장, 사할린(3번), 정선 등에서 7번을 만났다. 특히 2018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사할린 현지 사할린공연단(단장:이진선) 35여 명이 초청되었을 때, 당시 문경시민들과 문경새재에 올라서 '아리랑고유제'(제사장:이만유)에도 함께 참가했다. 당시 2018문경새재아리랑제 주제곡 '카레이스키 아리랑'의 작곡가 김세르게이 선생이 사는 곳이 양주 율정마을이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의 배우자이다. 지난날 문경시민들과 사할린 동포들의 만남을 헤아려볼 때 이번 행사는 그만큼 의미가 깊다. 매년 양주 사할린 동포에게 문경사과를 보내주는 익명의 회원도 있다. 환영 축하 공연으로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미분 회장과 회원 20명이 사할린아리랑을 선사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활동했던 사할린 동포 2세 김세르게이 작곡가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추어서 사할린아리랑 합창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기미양 국악신문 대표이사,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이 축사를 전했다.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은 "최근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의 초청으로 파주사할린동포회원들과 함께 경상북도 영주에서 개최한 '통일아리랑평화축제'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시대 서민들과 왕이 마주 보면서 함께 불렀다는 노래가 아리랑이고, 지역마다 아리랑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역사 기록에도 서민과 왕이 같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고 봅니다. 저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처음 들어본 노래는 아리랑입니다. 늘 부모님이 일하실 때마다 아리랑을 불러서 따라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사람들이 모이면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민족은 아리랑을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라고 소감과 함께 축사를 전했습니다. (주)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이사는 축사에서 "2012년 아리랑이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담론이 횡행하지만, 오늘 사할린 동포를 대표하는 권경석 회장에게 감사장을 받는 두 단체의 활발한 전승활동 사례를 들어 자랑 좀 하겠습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리랑문화 운동을 하는 자발적 시민운동단체입니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려오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왔을 때는 '코로나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 답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정선, 진도, 밀양에 이어 사할린을 가려고 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실행을 못하고 해서,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하려고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창조성'을 주목하는 아리랑의 속성에 주목하여 왕십리아리랑을 창작. 보급에 성공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창작아리랑의 창출 가능성을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어느 고을이든 공동체의 노래로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할리아리랑보존회도 전승단체로서 정선에 세운 인류무형문화유산아리랑건립비에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양주 사할린 동포는 해외 전승단체로 2018년 문경 디아스포라 아리랑 축제에서, 매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 지난해 12월 정선에 세운 유네스코아리랑비건립식에도 동행해 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김세르게이 작곡가와 사할린아리랑보존회가 살고 계시는 양주 율정마을을 아리랑마을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지 못하는 가운데 이렇게 오늘 이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여러분과 사할린 동포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3년간 임기를 마치고 3개월 전 귀국한 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이병일 원장은 넙죽 바닥에 엎드려 사할린 동포들에게 전통 방식의 큰절을 올렸다. 사할린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2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모두가 갑자기 가슴이 울컥 숙원해졌다. 이어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교직을 맡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그리운 동포들이 살고 있는 사할린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톡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만 올 수 있고, 부모가 사망하면 2세는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특히나 전쟁으로 4년이나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동포들을 위문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문경시민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전했다. 이후 전국사할린귀국통포연합회 권경석 회장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과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이사장, 삼정제빵소 대표에게 각각 공로상을 수여했다. 아도위 이만유 위원장은 "오늘 행사는 우리 아도위가 '새로운 아리랑 역사를 쓴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대일항쟁기 이후 70여 년 동안 사할린에 억류된 동포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얼굴을 마주보니, 매년 문경새재아리랑제와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서 사할린 동포들이 문경에 방문을 할 수 있는 방향도 모색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공로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보편 가치 실현에 힘써 오신 귀 단체의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저항 대동 상생정신으로 사할린과 사할린아리랑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주셨음에 대해 전 회원의 뜻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2023. 06. 11. 전국사할린귀국동포연합회장 권경석)" 이혜솔 회장은 "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 이후 사할린 동포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회원들과 힘이 닿는 날까지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전수교육,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후원에도 앞장 서겠습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어 신현국 문경시장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마련한 선물 전달식이 있었다. 문경시가 보낸 문경아리랑 전승자 송영철 옹에 대한 구술생애사 책과 문경오미자김, 문경오미자 와인, 아도위 문은자 부회장이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생강조청이 전달되었다. 식전 행사를 마치고, 전 사할린동포회 강상용 회장이 환영사에서 "코로나가 오기 전 양주사할린동포회는 그동안 문경시민들과는 7번을 만났다. 2018문경새재아리랑제(디아스포라 아리랑) 2019문경찻사발축제에 초청되어 2번이나 문경을 방문했고, 2018년 사할린아리랑제가 열리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고윤환 문경시장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광화문 광장)에서 전국 55개 지역 아리랑전승 단체들과 함께 문경시민들을 만났다. 오늘 이렇게 먼길을 찾아주신 문경시민들에게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사할린아리랑보존회 최나타샤 회장은 "지난 2018년 12월 아리랑연합회에서 관광버스를 보내 주어서 우리 양주 사할린 동포들이 양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통일아리랑축제'에서 북한, 중국, 일본 동포들이 부르는 여러 아리랑을 처음 들었다. 이후 사할린합창단을 만들어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라고 회상했다. 이어서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전했다. 제1부에서 아도위 문경시민들이 본조아리랑, 홀로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이 이어서 연곡으로 소개되었다. 아도위합창단은 이어서 함수호 단장이 작곡한 창작아리랑 풍년아리랑, 코로나아리랑을 한두리국악단의 반주에 맞추어서 힘차게 선보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이 왕십리아리랑을 선보였다. 이어서 동두천아리랑보존회 유은서 회장이 동두천아리랑을 불렀다. 이어서 문경새재아리랑 배우기 시간을 가졌다. 이춘자, 전정남, 안복수 회원이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 구절 한 구절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 이춘자 강사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리말을 유창하게 잘 못하는 동포들이 금방 따라서 부르는 모습이 신기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문경아리랑을 배운 동포 중 이영헌씨는 "올해 문경아리랑경창대회에 나가보자고 하며 언제냐"고 물어본다. 문경아리랑을 따라서 부르면서 신명이 나서 어깨춤도 추었다. 한편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은 작년 대구아리랑경창대회에 동영상을 보내는 비대면 심사에 출전해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행사를 마치고 양주에서 직접 구운 빵과 차를 준비한 다과회에서 동포애를 나누었다. 문경에서는 떡과 수박, 문경오미자 와인을 준비해서 내놓았다. 오후 6시 아도위 회원들은 동포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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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1)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호국보훈의 달’ 6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먼저 가신 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 뜻을 가슴에 새기고자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進軍路)문경 구간 도보 순례’를 하였다. 지난 6월 3일부터 6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문경YMCA’와 ‘아리솔지역아동센터’ 주관으로 학생 26명, 지도 교사, 향토연구사 등 38명이 참가했다. 의병 활동 지역이 산악지대라 위험 구간은 조령산악구조대 10명이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도와주셨고, 차가 다니는 도로 구간은 문경경찰서 관할 지구대 파출소의 경찰차로 에스코트하여 주셨다. 이렇게 장장 41.3km를 도보 순례를 하면서 운강 이강년 의병 대장의 흔적을 찾아 학생들과 함께 창의한 ‘도태장터’와 피 흘려 싸워 승리한 ‘갈평전투’ 등 곳곳의 전투 현장을 찾아갈 때 문화관광해설사, 향토연구사들과 함께 필자는 4일간 동행하며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해설하였다. 유사 이래 우리 민족은 나라가 위급하면 의병이 활동하여 구국운동을 펼쳤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국가 부흥 운동’에서부터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시대 때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이 이곳저곳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임진왜란 때는 고을 수령이나 관리들이 도망갔지만, 오히려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해 백성들이 창의(倡義)하여 저항하였다. 당시 왜군이 조선의 약한 군사력을 파악하고 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오산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민초들의 의병 활동으로 곤경에 처했다. 또 일본은 대장이 죽으면 오합지졸이 되고 해산하게 되는데 우리 민족은 대장이 죽으면 또 다른 대장이 뒤를 이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는 우리 민족만의 특성이 있다. 일본 백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산 위에서 구경하다 전투에서 이기면 세금 내고 복종한다는데, 우리 민족은 신분을 떠나 너도나도 직접 목숨 걸고 싸운다. 때로는 의병이 관군보다 더 조직적이고 더 용감하게 싸웠다. 운강 이강년은 1859년 2월 19일 문경시 가은읍 상괴1리 도태마을에서 조선 세 번째 왕인 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 19세 손으로 출생하였다. 이강년 어머니께서 태양이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출생 시 도태마을 앞 둔덕산이 3번 울었다고 하였다. 이는 비범한 인물이 출생한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보았다. 1880년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게 참여하였으며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의병장 유인석 등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한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 전쟁이 시작되었다. 운강 이강년도 선비이고 왕가의 후손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털어 군사들을 모집하였고 가은 도태 장터에서 거의(擧義)하였다. 처음에는 문중, 포수, 농민 등 60여 명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창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의병에게 참여하겠다면서 300여 명이 합세하고, 거의 한지 이틀째인 2월 25일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반역 행위자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김인담을 체포하여 구 농암장터 ‘개바위’에서 효수(梟首)하였다. 그랬더니 유생과 농민 등이 찾아와 의병이 되겠다고 하여 600여 명의 의진(義陣)을 갖추게 되었다. 이어서 2월 26일 상주 함창 태봉과 충북 수안보 병참기지를 연결하는 중요 노선인 고모산성에 부대를 주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함창 태봉의 일본 병참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2월 27일 충주의진과 합공작전을 계획했으나 무슨 사정인지 알 수 없으나 충주의진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모젤소총, 기관총, 수류탄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6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퇴하게 되었다. 이 ‘고모산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진은 큰 상처를입게 되었다. 의병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구식 화기인 화승총이나 화살로 대응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때 인근 마을과 주막거리가 불탔는데 지금 돌고개 성황당 앞에는 타다 남은 느티나무가 반쪽이 타서 속살을 드러낸 채 서 있어 그날의 아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운강 이강년은 ‘고모산성 전투’에서 뼈아픈 시련을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의진을 재정비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3월 12일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하여 충청북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고 합진(合陣)한 뒤 유격장으로 임명되었다. 유인석은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실천에 옮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하나인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 유학자로서 선비들 중심으로 조직된 의진으로 전투력이 약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무장 출신 이강년과의 합진은 유인석이 고무(鼓舞)되고 호좌의진을 더욱 튼튼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이강년 의병장을 반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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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기록영상 467편 공개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정전 및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오는 8일 6·25전쟁 기록영상 467편을 공개한다.이번에 공개되는 기록영상은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된 미국 육군통신대가 촬영한 영상이다. KBS가 미국 국가기록원(NARA)에서 수집해 고해상도로 디지털화했다. 전쟁이 남긴 상처와 폐허에서도 계속되는 일상, 평화를 위한 연대와 희생의 현장 등 6·25전쟁의 기억과 한미동맹의 역사적 시원(始原)을 담고 있다.한미동맹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스미스 부대의 모습, 인천 앞바다에 상륙하는 미군들, 맥아더와 이승만이 참석한 수도 환도식, 흥남 철수의 긴장감, 휴전회담과 교착상태의 고지전 등을 볼 수 있다.박물관은 앞서 지난 3월3일 KBS와 공동으로 만든 현대사 기록영상 아카이브 플랫폼 ‘움직이는 현대사: 선명한 역사’를 통해 개항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기록영상 335편(총 4,920여 분)을 공개한 바 있다.이번에 공개되는 영상을 비롯해 기록영상 총 802편이 박물관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박물관의 황보명 자료관리과장은 "6·25전쟁 기록영상은 전쟁의 상처와 폐허 속에서도 서로 다른 국적과 피부색의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여 자유와 평화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던 70년 전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라며 "필름 수장고가 아닌 누구나 볼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기록영상의 진가가 발휘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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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지켜낸 당신의 희생을 기억합니다”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5일"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헌신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그 위훈을 기리는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을 6월 6일(화) 오전 9시 55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약 50분 동안 거행 한다”고 밝혔다. 올해 추념식은 국가유공자와 유족, 정부주요인사,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약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국가보훈부 출범 직후 개최되는 이번 현충일 추념식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당신의 희생을 기억합니다」라는 주제로 오전 10시 정각, 추모를 위한 사이렌과 함께 전 국민이 참여하는 ‘전국동시 추모 묵념’을 시작으로, 국민의례, 추념공연1, 국가유공자 증서수여, 추념사, 추념공연2, 현충의 노래 제창 순으로 거행한다. 국민의례 중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해군 제3함대 소속 최진영 소위*가 낭독하고, 애국가는 국가유공자의 후손과 제복근무자(군, 경찰, 소방, 해양경찰, 교정공무원) 등 8명**이 국방부 성악병 4명과 함께 선도한다. 헌화·분향 이후에는 위패봉안관 내에서 무명용사 및 위패봉안유공자에 대한 참배가 추가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추념 공연은 장단지구 전투에서 포탄 파편이 머리에 박히는 부상을 당했으나 이를 빼내지 못한 채 2005년 작고하신 6‧25참전유공자 고(故) 이학수 상병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소개한 후, 고 이학수 상병이 1952년부터 전역할 때까지 해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작성한 93페이지 분량의 ‘병상 비망록’ 중 일부를 발췌‧각색하여 낭독한다. <고 이학수 상병 이야기> ① 1931년생, 고교 졸업 후 경찰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한창 중인 1951년 해병대 자원 입대함 ② 1952년 장단지구 전투에서 머릿속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 ③ 전투 당시 머리를 다쳐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황에서 다리를 다친 동료를 등에 업고 그의 시력에 의존하여 위험을 벗어남 ④ 수술에 위험이 있어 파편이 머릿속에 박힌 채 살다가 2005년 작고 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여, 1952년부터 전역할 때까지 진해 해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93페이지 분량의 병상 비망록을 작성함 국가유공자 증서수여는 1951년 입대하여 6‧25전쟁에 참전, 육군 제3사단 소속으로 강원 금화지구 전투 중 전사한 고(故) 조종두님 등 총 5명(붙임2 참조)에게 친수한다. 두번째 추념 공연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영웅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를 담은 대합창곡 「비목」을 다양한 세대별로 구성한 연합 합창단과, 국방부 성악병이 함께 선보인다. 끝으로 ‘현충의 노래’를 참석자 전원이 함께 제창하며 추념식을 마무리한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 바쳐 희생·헌신한 분들의 정신이 영원히 빛날 수 있도록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면서 "국가보훈부 출범을 통해 보훈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 국민들이 보훈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지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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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소난지도 의병항쟁 추모 및 제13회 의병의 날 기념식충남 당진시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일 시청 대강당에서 제117주년 소난지도 의병 항쟁 추모 및 제13회 의병의 날 기념식을 열었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이날 기념식에는 유족과 보훈 가족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유족과 보훈 가족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소년소녀합창단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의병 영상물 관람과 공로패 수여, 기념사, 추모사, 헌시 낭송, 의병의 노래 제창을 진행하며 순국선열의 애국충정을 널리 이어가자고 다짐했다. 당진 소난지도는 1906년 면천 출신의 최구현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항쟁에 이어 1907년 정미 조약에 의한 군대 강제해산 이후 홍원식 의병장을 주축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등 당시 항일 의병 전쟁의 산실이다. 당진시는 이러한 항쟁을 기리기 위해 전체 면적 1천626㎡ 규모에 봉분 1기와 상석 1기, 기념비 1기, 당주석 2기 등을 갖춘 소난지도 의병총을 조성해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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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단이 남긴 경기도의 문화유산'…경기문화유산학교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전쟁과 분단이 남긴 경기도의 문화유산'이라는 주제로 상반기 2023 경기문화유산학교를 연다.3일 경기문화재연구원에 따르면 6월14일부터 7월19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2~4시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경기문화유산학교가 진행된다.각 강의 주제는 ▲제1강 분단과 경기도, 그 흔적들(개관) ▲제2강 사진으로 보는 분단현실 : DMZ와 접경지역의 군사시설 ▲제3강 전쟁과 분단이 남긴 근대문화유산 ▲제4강 경기도 수복지구의 마을과 문화자원 ▲제5강 한국전잰 전적지와 기념물 ▲제6강 경기도의 피난민촌과 월남인의 삶 등이다. 수강생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강의 도서를 제공한다.역사와 문화유산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으며, 오는 5일 오전 10시부터 경기문화재연구원 누리집 (http://members.ggcf.kr/events/1473)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경기문화재단 관계자는 "6·25 전쟁 총성이 멎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고통은 지속되고,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와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갈등이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다"며 "강의를 통해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를 이해하고, 종전협정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정전협정으로 누리고 있는 평화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한편 경기문화유산학교는 2018년부터 시작된 경기문화재연구원의 대표 교육프로그램이다. 하반기 경기문화유산학교는 경기북부 지역민의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 파주시 운정행복센터 다목적홀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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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제일 귀하다”는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사람이 제일 귀하다”인내천(人乃天) 사상이 핵심인 동학농민혁명은 탐관오리와 외세 앞에서 조선 백성은 전봉준과 함께 과감히 들고 일어났다.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도화선이 되어 전봉준의 지휘로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전봉준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관아에서 매질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안해 사회변혁을 꿈꾸었다. 1차 농민전쟁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났다. 2차 농민전쟁은 전라도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된다. 당시 동학군들이 불러서 전국으로 확산된 노래는 '새야 새야 파랑새~"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청포장수 울고 간다새야 새야 파랑새야우리 논에 앉지 마라새야 새야 파랑새야우리 밭에 앉지 마라 파랑새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사 그리고 관군을 의미한다. 녹두는 동학 농민군이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의미한다.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만민 평등세상을 추구했던 민중항쟁의 노래다.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싸웠으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에 의해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했다. 동학 농민군은 신식 무기를 갖춘 청군과 왜군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 동학농민군은 비록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 사상과 저항운동은 의병정신에 이어지고 있다. 다음달은 보훈의 달이다. 그리고 내일은 6월 1일 의병의 날이다. "농민으로부터 시작한 개혁이 나라의 힘이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기록물들이 지난 5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포고문은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로 시작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살기를 맹세한다"로 이어진다. 당시 포고문은 고부 농민봉기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부가 무장현(현재 고창군 공음면)에서 전국적인 농민봉기를 선언하면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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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남원 청년이 전범 용의자로 전락,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은 그가 살아생전 남겼던 고난과 역경이 새겨진 5년이란 세월을 기록한 일기다. 가족과 생계를 위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20살의 남원 청년이 전범 용의자로 전락한 내용이 담긴 책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를 통해 우리는 70년전 동아시아 역사와 세계 열강 속에서 개인이 당해야 했던 수난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역사라고 본다. 1923년 최영우란 남자가 전라북도 남원 서도리에서 태어났다. 전주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2년 스무 살 청년 때 포로감시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여러 수용소에서 일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범 용의자로 현지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5년 후 귀국, 2002년 세상을 떠났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출판 효형출판)'은 소설 혼불의 배경지인 남원 수동마을에서 태어난 최영우가 태평양 전쟁에 일본군 포로 감시원으로 참전 후 남긴 육필원고를 손자 최양현이 재구성한 책이다. 이 책은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패망과 연합국의 승전 처리기인 1947년까지 5년간 20살 남원 출신 최영우가 남긴 육필 원고다. 10여 년 동안은 그의 손자 최양현씨가 직접 탐사하고 새롭게 발굴해 재구성했다. 차남으로 태어난 최영우는 큰 형과 동생 대신 포로 감시원 채용에 응시해 전쟁 참전을 결심하고 두 달간 훈련을 받은 후 인도네시아 '남방'의 자바섬에 배치됐다. 2년 만기 근무에 봉급을 받는 정식 군무원이었지만 현실은 일본군 이등병보다 못한 최말단 대우를 받았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세가 반전되면서 최영우를 비롯한 포로감시원들은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1945년 일본 패망으로 일본군 소속 전범 용의자로 전락했다. 연합군 포로 학대 혐의를 받은 다수의 젊은 조선인 청년들 조선인 출신 포로감시원 148명이 B·C급 전범이 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무려 129명, 이중 23명은 사형판결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7년 3월 연합군 감옥에서 그는 석방됐다. 5년 전 3천여 명이 함께 출발했는데 130여 명만 겨우 귀환선을 탔다. 그러나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아 경계인을 선택한 사람까지 그들의 삶 역시 어수선했다. ‘관리번호 132번 최영우’가 남원 서도역에 도착해 서성일 때 당숙모와 마주쳤지만 피골이 상접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전범 용의자가 된 최영우는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 자카르타 치피낭 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47년 9월 히로시마를 거쳐 한국으로 귀국, 생전에 틈틈이 포로감시원 시절을 기록으로 남겼다. 저자 최양현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느 무명인 청년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함께 공감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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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명무, 호남살풀이춤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게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051026cholsun4.jpg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 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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