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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연주자 이승희 독주회, 대구와 서울에서'이승희의 해금, 소리 만들기 & _____ ' 공연이 오는 14일 오후 7시 30분 대구 공간울림과 24일 오후 4시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열린다. 이승희는 활대에 대한 고민을 담아 "해금 활 연습을 위한 <연습곡 1>”을 직접 구상하였다. 혼자 혹은 여럿이서 함께 차근차근 연습할 수 있는 이 곡은 이번 공연에서 ‘영남해금앙상블 해담’과 함께 연주한다. 이승희는 해금산조 독주자를 위한 연주회용 에튀드 <만반(萬般)>에 대해서 "작곡가이자 해금연주자로 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황재인의 곡이다. 산조를 연주하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탐구하고, 산조 연주에 대한 만반의 준비로 다섯 가지의 각 과제가 드러나는 에튀드를 들을 수 있다. 특히 산조를 위한 연주회용 에튀드로 발표된 것은 국악계에서 초연이다. 국악에 대한 접근성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전했다. 또한, 이승희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직접 곡을 구상하였다. "세곡의 도드리에 의한 인공지능 해금 연습곡 <순환>”은 2021년 POSTECH 주최로 이루어진 포항 AI풍류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이승희는 이 곡을 작업하며 "오래된 선율을 오늘의 기술로 다시 정렬하는 것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시작한 작업이지만 음악의 본질을 꿰뚫어 파악하는 인공지능이야말로 연습곡을 만들어내기 가장 적합한 기술인 것 같다”고 AI와 한국음악의 협업에 도전한 소회를 밝혔다.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곡은 "해금 독주와 동해안 무속 장단을 위한 <춤굿>"이다. 작곡가 이정호의 작품으로, 대게 동해안 무속 장단을 활용한 곡들은 국악 연주자들 사이에서 까다롭게 여겨지면서 동시에 연주에 대한 쾌감을 가장 크게 느낀다고 한다. 이 날 연주될 <춤굿> 또한 푸너리, 드렁갱이, 삼오장, 굿거리, 자진모리 등 연주자의 뛰어난 장단감과 집중력을 요하는 동해안 무속 장단들로 구성되어, 해금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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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의원 점자발전기본계획 간담회 개최국민의힘 김예지 국회의원과 문체부가 공동주최한 ‘제2차 점자발전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간담회’가 1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3 간담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점자법’ 제7조에서는 점자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5 년마다 점자발전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1차 점자발전기본계획 (2019~2023) 이 2023 년 만료됨에 따라, 제1차 기본계획의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고 점자 관련 정책환경을 분석하여 새로운 비전과 정책방안을 담은 제2차 기본계획 (2024~2028) 의 수립을 위한 연구가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김예지 국회의원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2 차 점자발전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점자 사용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부산점자도서관 안익태 사무국장이 좌장을 맡은 이번 간담회는 서울신목중학교 안제영 교사 , 빛나눔장애인자립생활센터 노언정 센터장,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용전 사무국장,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박의권 중앙이사, 전 대구광명학교 김수완 교사, 고예진 프리랜서 교정사가 참석해 문자 환경 변화 및 점자 사용자를 고려한 한국점자규정 정비, 맞춤형 점자교육 내실화 방안, 점자의 접근성 제고를 위한 점자 사용 환경 개선 방안 등의 내용으로 제2차 점자발전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이 진행됐다. 김예지 의원은 "오늘 간담회를 통해 제1차 점자발전기본계획의 성과와 한계점을 명확히 하고, 제시된 의견들이 제 2 차 점자발전기본계획에 적절하게 반영되어, 점자 사용 환경이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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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소식] '2023 대구 무형문화재제전' 21일 개막대구시는 무형문화재 개인 종목 보유자와 전수자들의 작품과 공연을 만나볼 수 있는 '2023 대구시 무형문화재제전'을 오는 21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개막한다고 19일 밝혔다. 엿새간 펼쳐지는 이번 제전에는 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단청장, 대고장, 모필장, 창호장과 국가무형문화재인 조각장, 소목장 등의 작품이 소개된다. 그동안 14회에 걸쳐 지산면 민속 전수관(관장 김기선)에서 인지리 문화축제로 개최해왔으나, 지산면의 민속 문화축제로 승화해 나가기 위해 올해부터 지산면 주민자치회(회장 고경득)와 공동으로 개최하게 되며 인지리 부녀회 및 청년회, 남도들노래, 진도만가, 인지리민요 등 다양한 단체가 참여할 예정이다.또한 전통문화 및 다양한 체험활동을 즐길 수 있는 어울림 한마당과 지산면 문화재 공연, 전통 민속 문화공연, 현대음악공연, 홍주 내리기 시연 및 시음, 전통 떡 시식 코너 운영 등 지산면 특산품 전시 및 판매행사 등 다양한 즐길거리와 볼거리도 준비된다. 행사 기간 매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종목별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직접 제작 과정을 실연하고 작품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는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오는 25일에는 판소리 심청가, 영제시조, 살풀이 종목 공연을, 26일에는 가곡, 수건춤, 판소리 흥보가, 동부민요 공연 등의 무대도 펼쳐진다. 조경선 문화체육관광국장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시 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의 품격 있는 작품과 혼이 담긴 생생한 무대를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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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오페라하우스, 오페라 본고장 이탈리아 진출대구오페라하우스(관장 정갑균)가 자체 제작 오페라 ‘투란도트’로 세계 오페라의 중심지 이탈리아에 진출한다.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 페라라시립극장 무대에, 게다가 극장의 2023/24 시즌 첫 작품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일반적인 국내 예술단체의 해외 공연이 공연장을 빌리는 대관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고려하면, 유럽 극장에서 시즌 참가작으로 공식 초청 및 공연료를 전액 지원받아 공연하게 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성과다.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이번 페라라시립극장 진출은 2021년 두 극장 간 공연교류 협약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2022년 대구오페라하우스가 대구국제오페라축제 메인오페라로 페라라시립극장이 제작한 ‘돈 조반니’를 초청 및 합작하며 시작됐다. 이번 투란도트 공연도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무대와 의상, 직접 캐스팅한 주·조역들이 이탈리아에 그대로 진출하는 형태로 진행됐으며 현지 합창단·오케스트라가 참여해 함께 공연을 꾸미게 된다.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자체 제작한 오페라로 이탈리아 극장의 공식 시즌 작품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2015년 살레르노 베르디극장에 진출한 ‘세비야의 이발사’ 이후 8년 만이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이번 투란도트 공연을 위해 최고의 출연진과 제작진들로 팀을 구성했다. 오페라·창작극·콘서트·무용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기민정이 연출,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청교도’, ‘토스카’, ‘나비부인’ 등 오페라들을 지휘하며 뛰어난 음악성을 입증한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마르첼로 모타델리가 지휘를 맡았다. 또 투란도트 역에 소프라노 릴라 리, 칼라프 역에 테너 윤병길 등 국내외 오페라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들이 대거 참여해 한국 오페라의 위상을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공연은 11월 24일(금) 저녁 8시, 26일(일) 오후 5시에 이뤄지며, 현재 절찬리에 예매되고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정갑균 관장은 "오페라의 발원지이자 심장부인 이탈리아 무대에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오페라를 공연하게 된 것은 한국 오페라의 수준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라며 "이번 이탈리아 공연에 이어 루마니아, 에스토니아, 독일 만하임 등 잇따른 유럽 무대 진출로 대구산(産) 오페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페라라시립극장의 마르첼로 콜비노(Marcello Corvino) 예술감독은 대구오페라하우스의 투란도트를 극장의 2023/24 시즌 첫 작품으로 올린 이유에 대해 "첫 번째는 투란도트가 동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오페라 역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장대한 작품 중 하나인 투란도트를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가진 높은 테크닉과 예술적 수준으로 훌륭하게 표현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이번 이탈리아 페라라시립극장에서 공연하는 투란도트에 이어 2024년에는 루마니아 부큐레슈티국립극장, 2025년에는 에스토니아 사아레마 오페라페스티벌, 2026년에는 독일 만하임국립오페라극장 등 유럽 극장으로 진출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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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문화유산교육 우수사례 공모전’ 안동하회탈춤 등 총 5건 선정문화재청은 문화유산과 연계한 수업의 우수사례를 발굴·공유하기 위한 ‘2023년 학교문화유산교육 우수사례 공모전’을 진행하여 5편을 우수사례로 선정하였다. 문화재청은 문화유산교육에 대한 일선 학교의 관심을 제고하고, 학교 현장에서의 문화유산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난 2018년부터 복권기금 재원을 활용하여 ‘학교문화유산교육 우수사례 공모전’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 10월 4일부터 11월 3일까지 약 한 달 동안 실시된 이번 공모를 통해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총 11편의 사례가 접수되었으며, 학교문화유산교육 심사위원회에서 사례의 적절성, 우수성, 효과성(확산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5편을 우수사례로 선정하였다. 선정된 5편의 우수사례는 ▲ 인공지능과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여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음악 관련 유산을 직접 연주해보고 탐구한 대구국제고등학교의 ‘세계문화유산 음악편-과거와 미래의 만남’, ▲ 지역의 문화유산을 이론학습과 현장답사로 탐구한 뒤 직접 문화유산 해설사로 활동하고 홍보자료를 제작해보는 대구남동초등학교의 ‘Inside 대구-대구의 공간과 시간 속으로’, ▲ 화폐 속 문화유산에 대해 이해하고, 직접 선정한 문화유산이 담긴 화폐를 만들어본 파주 동패중학교의 ‘화폐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 안동하회탈춤을 주제로 이론과 체험학습을 영어수업 교과에 반영한 인천장아초등학교의 ‘세계 속 K-문화로 하나되는 우리들’ ▲ K-컬처 등 다양한 주제 아래 과거, 현재, 미래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문화유산 교육과정을 제시한 부산중앙중학교의 ‘K컬처 기반 주제중심학습을 통한 우리문화유산 꽃 피우고 열매 맺기’이다. 수상작은 사례집으로 제작하여 문화재청 누리집을 통해 공개하고 홍보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며, 오는 12월 6일 ‘문화유산교육 통합 연수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창의적인 학교문화유산교육 우수사례를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공유하여 문화유산교육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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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달구벌 전국국악경연대회(10월29일)일시:2023.10.29.(일) 시간:오전 10시부터 -장소:대구광역시 청소년 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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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민예총, 예술토크콘서트 ‘아트 Talk Talk’용인민예총이 오는 30일과 12월 1일 양일간 경기도 용인 플로렌스 파티하우스에서 예술토크콘서트 ‘아트 Talk Talk’을 개최한다. 경기도가 주최하고 용인민예총이 주관하는 경기도 문화의 날 문화예술지원프로그램 ‘예술토크콘서트 : 아트 Talk Talk’은 ‘예술을 말하다’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각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과 예비 · 청년 · 신진 예술가들이 담화를 나눌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11월 30일에는 ‘대한민국 예술의 전망과 과제’를 주제로 경기민예총 김성수 사무처장,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정호붕 교수, 용인대학교 연극학과 김종석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박인수 교수가 토론패널로 참여한다. 12월 1일에는 ‘대한민국 예술의 실제와 사례’를 주제로 상상발전소 남주경 대표, 메이킹컴퍼니 진해근 대표, 유상통프로젝트 오동석 대표, 생동감크루 남대원 대표가 토론패널로 참여한다. 예술토크콘서트 ‘아트 Talk Talk’은 매회 1, 2부로 나뉘어 진행되며 1부에서는 각 분야 예술전문가가 패널로 참여하는 토크콘서트, 2부에서는 패널들과 참여자 간의 네트워킹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예술마당 시우터 박종욱 대표가 콘서트의 진행을 맡았으며, DIMF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연기상 수상자 박병건, 전국우륵가야금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자 김태은, 전주대사습놀이 차상을 수상한 최관용이 노래와 연주로 콘서트에 참여한다. 용인민예총 안재식 지회장은 "이번 예술토크콘서트가 청년 · 예비 예술가들의 성장에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용인민예총은 문화예술인의 역량 강화와 문화예술인들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토크콘서트는 경기도 내 예비 · 청년 · 신진 예술가 2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신청은 온라인 구글폼(아트톡톡.lrl.kr)을 통해 선착순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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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청년협의회 '사할린의 밤,동포애를 나누다대구청년협의회(회장 하태균)이 주관하는 '제8회사할린의 밤' 행사를 지난 10일과 11일 이틀간 대구광역시 그랜드호텔에서 개최하였다. 1996년 사할린 첫 방문을 계기로 대구시와 민족통일 대구청년협의회는 2008년에서 2019년까지는 사할린에서 '대구의 밤'을 2016년부터는 대구에서 '사할린의 밤'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사할린 어른신들을 위한 대구청년들의 실천운동은 16년째 진행되고 있다. 하태균 회장은 "사할린의 밤 행사에서 흥에 겨워 혼자 춤사위를 펼치셨던 어르신과 "이런 흥겨운 음악과 기쁜 자리에서 어찌 어깨춤이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그 여덟 번째 기쁜 날을 기념하며 사할린을 오고가며 뜨거운 동포애를 나누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10일 전국사할린영주귀국동포연합회 전국 지역 회장단15명과 안산, 인천 논현동 5단지, 부산에 정주하는 사할린 동포들 120명 등 모두 약 140명이 참가했다. 환영 오찬 후 가진 본 행사에서는 개회 선언을 시작으로 표창장 수여 및 감사장 전달, 전국사할린영주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 각 회장단 인사말과 하태균 회장의 환영사를 비롯 사진촬영을 마치고 2부 축하공연을 선사했다. 전국사할린영주귀국동포연합회 권경석(81세) 회장은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1945년부터 사할린에 억류되어 가슴 아픈 이산과 함께한 우리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를 변함없이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대구 청년들에게 감사한다. 사할린 동포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출신이다. 이런 인연으로 매년 우리를 맞이해 주는 대구의 큰 마음에 따뜻하고 행복하다"며 대구 청년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대구광역시장 홍준표 시장은 "대구에서는 여덟 번째 만남이 되는‘사할린의 밤’행사가 고향의 향수를 달래고 모국 정착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여기에 머무르시는 동안 대구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축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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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대구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 대상에는 '연희난장 오날'대구광역시와 (사)대구국악협회가 주최한 제31회 대구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가 지난 11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로 인한 3년간 비대면 영상심사에서 전면 대면 경연으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국악 인구의 저변확대와 국악 인재 발굴 육성 및 전통문화 계승과 전승에 목적을 두고 있는 이번 대회에 전체 46팀 195명이 참가했다. 신기방기사물패 (초등부 대상 대구시교육감상),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김수현 (중고등부 대상 대구시교육감상), 공감노리 (신인부 대상 한국국악협회이사장상), 연희난장 오날 (일반부 대상 대구광역시장상)의 영예를 안았다. 일반부 대상을 수상한 연희난장 오날은 사물 판굿으로 참가해 심사위원으로부터 안정적인 호흡과 팀원 간 교감이 좋았으며 개인 기량이 뛰어나고 사물놀이를 기반으로 한 가락 구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대구국악협회 김신효 지회장은 "코로나 이후 사물놀이 운영단체가 와해 되면서 사물놀이를 향유하는 국악인들이 줄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전했다. 그러면서 올해 처음 추진한 개인놀이 참가자들을 보면서 다음 연도 대회는 개인과 단체로 구분 경연을 적극 검토하고 대회의 규모는 물론 사물놀이의 새로운 부흥기를 마련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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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국악관현악단의 배리어프리 음악극 '친절한 돼지씨', 18일세종국악관현악단(대표 겸 총감독 김혜성)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최하는 2023 공연유통협력 지원 사업 선정 및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행복북구문화재단과 협력하여 오는 11월 18일(토) 11시, 14시 어울아트센터 함지홀에서 배리어프리 음악극 <친절한 돼지씨>를 두 차례 선보인다. 본 사업은 승달문화예술회관, 인천서구문화재단, 강진아트홀, 부안예술회관, 안성맞춤아트홀, 논산문화관광재단, 금정문화회관, 행복북구문화재단까지 총 8기관과 협력하여 진행될 예정이다. 각 지역을 순회하며 부대행사로 예술인의 교류 및 활성화를 위한 지역예술인 작품전시가 진행된다. 세종국악관현악단이 제작한 음악극 <친절한 돼지씨>(원작:신정민 작가의 동화)는 2022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무장애 문화향유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제약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배리어프리 공연으로 재탄생되었다. 동화와 국악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소리꾼, 뮤지컬 배우, 수어통역배우, 국악 라이브 밴드로 구성된 작품이다. 공연 1시간 전 로비에서 진행되는 부대행사로 국악기를 보고 듣고 만져볼 수 있는 국악기 터치투어와 아트파인애플의 작품을 전시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 공감할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한 문화체험을 동시다발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한다. 1992년 여민동락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창단하여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새로운 우리 음악의 색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세종국악관현악단의 김혜성 대표 겸 총감독은 "장애인 가족 및 어린이들이 문화 향유 기회 증진 및 접근성 확대에 기여하고자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공간에서 문화를 교류하며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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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전통공연예술 지원 ‘전국풍류자랑 ,소옥대로_음유시인’대구 지역 예술단체인 우리음악집단 소옥(小屋)은 전통공연예술 단체들의 우수한 공연작품을 지원하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지역 전통공연예술 지원 사업’에 선정돼 ‘2023 전국풍류자랑’ 행사의 일환으로 ‘소옥대로_음유시인’ 연주회를 11월 22일~23일 오후 7시 30분 대구 수성아트피아 소극장에서 개최한다. 이날 무대에는 우리음악집단 소옥의 한국 전통악기 연주자인 김윤우(대금), 전예원(가야금), 정연준(생황, 피리), 김소연(아쟁), 강한뫼(작곡, 피아노) 총 5명이 오르며, 객원으로 김혜령(바이올린), 박소연(비올라), 우창훈(첼로), 김수경(소리꾼), 강민성(바리톤), 허은정(소프라노), 남수연(정가)이 함께한다. 우리음악집단 소옥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후원하는 이번 공연은 한국 시조와 시를 노래하는 판소리, 정가의 전통성악 등 동양음악, 소프라노·바리톤의 서양음악이 조화된 공연으로, ‘소옥대로_음유시인’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해가 들다’를 시작으로 ‘나비의 춤’, ‘바다’, ‘하늘을 나는 꿈’, ‘달을 몰다’ 등 자신들만의 색을 입힌 곡들을 연주하며 우리음악집단 소옥을 알릴 예정이다. 공연 프로그램은 총 14개의 작품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곡이 강한뫼·양승환·반현정의 작곡가의 창작곡이다. 프로그램은 이들의 창작곡인 ‘해가 들다’, ‘달을 몰다’ ‘바다’, ‘도요새’ 등 자연물을 주제로 했다. ‘소옥대로_음유시인’ 연주회의 관람은 전석 무료며, 8세 이상 관람 가능하다. 우리음악집단 소옥은 대구 지역의 젊은 청년 예술가들로 구성돼 대구를 거점으로 전국에서 활동하는 창작국악 연주단체다. 2018년 창단해 2019년 ‘제13회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 은상 수상, ‘2020년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신진국악실험무대’ 기악 부문 아티스트 선정 등 국내 창작 국악 단체로서 작품성과 실력을 꾸준히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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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종합예술대회 ‘2023 대한민국예술축전’ 성료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하는 ‘2023 대한민국예술축전’이 10월 26일 국악부문 가람예술단(경상북도)을 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으로 선정하는 등 총 43팀에 대한 시상을 끝으로 성공적으로 폐막했다. 전국 규모의 유일 종합예술경연대회인 ‘대한민국예술축전’은 예술인들의 창작 기반 활성화 및 신규 일자리 창출과 국민의 문화예술 향유 증진을 목적으로 2018년부터 시작됐으며, 매년 전국체전이 개최되는 시·도에서 병행 개최해 예술과 체육의 융합적 시너지를 확대하고 지역경제에 긍정적 효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3 대한민국예술축전’은 6월부터 8월까지 광역별로 국악, 사진, 영화 등 세 개 부문에서 총 323팀의 예술가들이 참가해 뜨거운 열기 속에 치열한 지역예선을 펼쳐서 43개 본선 진출팀을 선정했으며, 10월 25일 전라남도 목포시 일원에서 열린 본선 경연에서 엄격하고 공정한 심사를 거쳐 부문별로 대상, 최우수상, 장려상, 특별상 등으로 나눠 수상자를 결정했다. ‘2023 대한민국예술축전’의 공동주관을 맡은 한국예총 전라남도연합회 임점호 연합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문화예술의 본향 전라남도에서 개최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무엇보다 두 체육대회를 연결하는 예술축전인 만큼 문화예술과 스포츠가 어우러져 함께 즐기고 소통하는 교류·화합의 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예술축전 개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큰 지원과 도움을 주신 전라남도에도 매우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전라남도 김영록 도지사는 박우육 문화융성국장이 대독한 환영사를 통해 "문화예술의 도시 예향 목포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전라남도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여러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다. 특히 문화융성국을 신설해 확장되는 문화산업을 선도하고 남도문화예술진흥을 지원하고 있다. 앞으로도 문화예술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 문화관광이 어우러지는 대도약 전남행복시·도를 만들어가는 주축 시책으로 삼겠다. 2023 대한민국예술축전에 오신 모두를 환영하며, 전남에 계시는 동안 좋은 추억 많이 쌓고 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목포시 박홍률 시장은 "목포는 대한민국 예술을 선구적으로 꽃 피웠으며 많은 예술인들이 배출된 도시다. 오늘날도 다양한 분야에서 저마다 특성을 갖고 문화예술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예향 본류의 고장이다. 오늘 이 축전을 통해 예술인 여러분께서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창조와 화합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시기를 바란다”며 "앞으로 한국예총이 한국의 문화예술을 세계로 알리고 대한민국을 융성한 문화예술국가로 이끌어 주시는데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라며 목포시도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예총 이범헌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번 행사를 위해 애써주신 전라남도, 전남예총을 비롯한 각 기관장 분들께 아낌없는 성원과 지원을 해주셔서 감사 인사를 드린다”며 "이 자리는 경연대회에 참여한 여러분 모두가 주인공이며 빛나는 자리로, 이 행사는 국내 유일 종합예술경연대회로써 앞으로 더 우리 국민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넘어 일상과 예술인 만나는 장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2023대한민국예술축전’의 영예의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 ‘2023 대한민국예술축전’의 수상자 명단 · 국악부문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 가람예술단(경상북도) △대상(공동) : 올라(전라남도) △우수상 : 타악그룹 판타지(대전광역시) △장려상 : 신영랑 국악단(경기도) △장려상 : 자연가락소리나눔(혼코리아)(충청북도) △전라남도지사상 : 국악밴드 나릿(대구광역시) △전라남도의회 의장상 : 와락심포니(부산광역시) △목포시장상 : 국악예술단 고창(전라북도) △목포시의회 의장상 : 국악타악그룹 버슴새(울산광역시) △한국국악협회이사장상 : 한양교방춤 예술단(서울특별시), 밴드이강(제주특별자치도), 전통연희단 도드리(충청남도), 진해문화원(경상남도), 힐링아트컴퍼니(광주광역시), 이윤경(강원도), 어울림무용단(인천광역시) · 사진부문 △대상 : 정애영(전라남도) △최우수상 : 고기태(경상북도) △우수상 : 장재기(인천광역시) △장려상 : 박일종(경기도) △장려상 : 한은미(충청북도) △전라남도지사상 : 김해연(대전광역시) △전라남도의회 의장상 : 강영복(강원도) △목포시장상 : 최영철(제주특별자치도) △목포시의회 의장상 : 유찬도(전라북도)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장상 : 서상국(대구광역시), 김수곤(충청남도), 조순덕(부산광역시), 이승규(경상남도), 김석진(울산광역시), 김정인(서울특별시) · 영화부문 △대상 : 김혜나(강원도) △최우수상 : 정현철, 윤복성(경기도) △우수상 : 이채령(인천광역시) △장려상 : 김주영(울산광역시) △장려상 : 이지호(경상남도) △전라남도지사상 : 이혜원(충청북도) △전라남도의회 의장상 : 나아리(전라북도) △목포시장상 ; 황영, 김은영(경상북도) △목포시의회 의장상 : 정민우(대구광역시)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상 : 이승재(서울특별시), 박지훈(광주광역시), 노보성(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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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판소리 "춘향가 – 눈대목" 비교 시연회100년 전의 판소리 명창들이 부른 <춘향가>의 눈대목을 한 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무대가 펼쳐진다. ‘논문 한 편을 보고 듣는 시연회’라는 부제처럼 이 공연은 100년 전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들이 판소리를 어떻게 발전·변화시켰는지를 비교해 볼 목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춘향가> 중 대표적인 눈대목인 ‘기생점고’와 ‘어사장모 상봉’ 대목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번 공연은 서편제의 시조로 추앙받는 명창 김창환의 아들이자 전설적인 명창 임방울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봉이(金鳳伊. 1878~1929. 전남 나주생)가 1915년 미국 빅타 레코드에 남긴 <춘향가> 중 ‘기생점고’가 109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또한 같은 해 이동백이 남긴 <춘향가> 중 ‘어사장모상봉’ 대목 전 곡이 사상 처음으로 공개되며, 1925년 중고제 명창 김창룡(金昌龍. 1872-1943. 근대 5명창. 충남 서천생)과 서도 명창 박월정(朴月庭. 1901~1960. 평남 강서생)이 일동 레코드에 각각 남긴 판소리 ‘기생점고’ 대목도 함께 공개된다. 김봉이(1878~1929)는 판소리 5명창으로 아버지 김창환을 사사했다. 1915년 미국빅타 레코드사가 김봉이의 <춘향가> 중 ‘이별가’와 ‘기생점고’를 녹음했는데, 그 중 ‘이별가’ 실물은 1993년 신나라레코드를 통해 존재 여부가 확인된 적 있다. 반면 ‘기생점고’는 그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으나 이번에 존재 여부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김봉이의 판소리는 김창환에 비해 장식음이 많고 전조 현상이 보이는 등 서편제 초기 모습을 가진 판소리로 평가받는다. <수궁가> 인간문화재였던 명창 정광수는 김봉이의 소리를 ‘사람 소리가 아니라 귀신 소리’라고 평하기도 했다. 한편 같은 해 녹음된 이동백의 ‘어사장모상봉’ 대목은 그가 40대에 녹음한 <춘향가>의 유일한 자료로서, 박석티부터 장모가 좋아라고 대목까지 총 14분에 걸쳐 녹음되어 있다. 이 녹음 역시 이번에 처음으로 전모가 공개된다. 다른 유파의 ‘어사장모상봉’ 대목과 다른 점은 춘향이 옛집을 묘사하는 부분이 매우 섬세하고 장모 축원 대목이 길며, 장모가 좋아라고 대목으로 끝을 맺는다는 점이다. 아니리가 적고 슬픈 대목의 목구성이 담담하게 표현되는 전형적인 중고제 소리를 보여준다. 김창룡과 박월정의 ‘기생점고’는 1925년 일동레코드에서 녹음되었는데, 김창룡의 ‘기생점고’는 아니리를 창으로 부르는 특징이 있으며, 서도소리꾼이면서 판소리 명창이기도 한 박월정 역시 ‘기생점고’를 아니리 없이 부른 공통점이 있다. 박월정은 조선 후기 대명창 정춘풍제를 잇고 있는 충남 홍성의 유공렬과도 친분이 있는 등 중고제를 배운 것으로 추정되는 소리꾼으로, 서도 시김새와 남도 창법을 절묘하게 배합해 판소리를 구사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날 무대는 현재 판소리계에서 젊은 천재 소리꾼으로 인정받고 있는 5명의 국악인이 꾸민다. 판소리 대통령상 수상자로 국가문화재 판소리 이수자 박은정(45)은 정정렬의 <춘향가>를 재현하며, 조상현 명창의 제자로 22년 KBS국악대경연 대상을 수상한, 국립창극단의 새내기 단원 이성현(28)은 이동백의 <춘향가>를 재현한다. 오랫동안 중고제 명창의 소리 재현에 힘쓰고 있는 이효덕(37)은 김봉이와 정정렬(丁貞烈. 1876~1938. 근대 5명창. 전북 익산생)의 <춘향가>를, 구례동편 판소리를 잇고 있는 차세대 소리꾼 박지수(22)는 김창룡의 <춘향가>와 김초향(金楚香. 1900~1983. 대구생)의 <춘향가>를 각각 재현한다. 판소리가 아닌 서도소리를 전공하며 현재 ‘타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나라(36)는 박월정의 <춘향가> 중 ‘암행어사 출도’ 대목을 부른다. 고수는 송만갑 고수대회 명고부 장원을 차지한 김민서(44), 최재명(23) 명고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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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Ⅳ 찬미가 ‘Patriotic Hymn’의 전승 과정현 애국가의 출현은 1908년 6월에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에 수록됨으로서 이다. 제15쪽 ‘Patriotic Hymn(Auld Lang Syne) 뎨十四’이다. 그런데 이 책이 재판(再版)임으로 초판 발행은 한영서원을 개교한 1906년 10월 전후로 본다. 그런데 윤치호가 1945년 작고 직전 자필로 남기 가사지에 ‘1907년 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이 초판에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작사 시점도 1907년부터 1908년 6월 어간이라고 보게 된다. 이렇게 출현한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또 하나의 애국가에서 대표적인 애국가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애국가 가사 4절의 면모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도 국가 안녕과 독립에 대한 기도문으로 통하여 자연스럽게 연계,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와 일정 기간 까지는 길항(拮抗) 관계로 불리다가 3.1운동기를 계기로 대표적인 애국가가 되었다. 2) 1910년 9월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 一. 동물과 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ᄂᆞ님이 보호ᄒᆞ샤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히 보전ᄒᆞ세 二. 남산우헤 뎌 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ᄅᆞᆷ이슬 불변ᄒᆞᆷ은 우리 긔샹일세 三. 가을하ᄂᆞᆯ 공활ᄒᆞᆫ데 구름업시 놉고 /발근 달은 우리 가ᄉᆞᆷ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샹과 이 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ᄅᆞᆼ하세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기관지 ‘신한민보’ 제1면에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게재된 전4절 가사다. 주목되는 것은 ‘윤티호 작가’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이는 애국가 자료를 게재한 매체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제1면에 가사 전4절과 함께 작사자를 밝힌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전승기록이다. 찬미가 제14장과 다른 점은 ‘아래 아’ 표기를 했다는 점과 4절 ‘님군을 섬기며’가 ‘민족을 모흐며’로 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14장을 텍스트로 하지 않고, 구술에 의한 것으로 보게 한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곡명이 ‘국민가’로 변이 된 점이다. 이는 ‘국민회의 회가(會歌)’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고쳤다고 보게 된다. 더불어 제4절 ‘님군을 섬기며’도 국권 상실로 임금이 없음으로 ‘민족을 모으며’로 수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3) 1912년 간도 용정촌 애국가 간도 용정촌 국자가(龍井村 局子街) 한인의 소지품을 일본총영사관이 압수, 보고한 자료에 들어있는 애국가이다. 이 창가집에는 소년보국가·운동가·한반도가·대한혼가·부모은덕가·학도가·혈성대가·영웅모범가·조국생각과 함께 애국가가 들어있다.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한 애국가는 후렴구 1절 마지막 구절이 ‘우리민족 만세’로, 마지막 구절이 ‘길이 광복하세’로 되어 있다. 후렴구 일부를 변이시킨 것은 의외이다. 4) 1914년 「태평양잡지」 애국가 이승만(1875~1965)이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창간한 월간 「태평양잡지」 1914년 4월호에 ‘애국가와 찬미가’라는 기사에 수록된 자료이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 입수되어 확인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고 밝힌 자료이다. 「찬미가」를 언급하면서 "무궁화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 애국가라고 하였다. 특히 애국가의 탄압 실상을 밝히고 있는데, "찬미가는 본국에서 압수하고 매매를 금지한 책인데 한 권을 우리가 얻었기로 대강 뽑아서 등재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차 노래를 애국제도로 모본하여서” 국내에서 찬미가를 압수하고, 애국가를 금지했음을 전했다. 이 시기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1913~1915)돼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를 기사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소유자들이 스스로 폐기, 희귀해졌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5) 1915년 간도 광성중학 교재 수록 애국가 중국 간도 소영자(小營子)의 광성중학교(光成中學校)에서 1914년 간행한 「최신창가집」을 일제가 입수하여 보고하였다. 이 책 첫 작품이 ‘國歌’라는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를 싣고 있다. 신한민보의 ‘국민가’와 유사하다. 다른 점은 제1절 ‘하나님이 보호하사’가 ‘한아님이 보우하사’로,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업시 놉고’를 ‘놉고 구름업시’로 변이시켰다. 그런데 "찬미가" 4절의 ‘님군을 섬기며’를 신한민보 ‘국민가’와 같이 ‘민족을 모으며’로 하였다. 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신한민보 ‘국민가’가 소영자에서 불린 것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소영자에서 국민가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1916년 하와이 발행된 「애국창가집」 애국가 표지에는 ‘愛國歌’로 등사되어 있고, 목차 다음에 <애국창가집 서문>이 실려 있다. 판권의 간행일자는 1916년 5월 13일로 되어 있어 1915년 국내 한영서원에서 간행된 "창가집"을 바탕으로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사 1절은 ‘하ᄂᆞ님이 보우ᄒᆞ샤’, ‘우리나라 만셰’로, 3절은 ‘구름업시 높고’로, 4절은 ‘님금을 섬기며’로 되어있다. 7)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 소재 애국가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2. 남산 우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기상일세 3. 가을하늘 空闊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김규식 중심의 조직인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속표지에 수록된 전 4절 가사이다. 각 절의 변이 상이 확인 된다. 이 가사는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계승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기록이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주필 이광수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안창호의 자문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제14장의 전승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주목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신한청년’에 게재된 애국가 가사의 변이는 2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부 자구가 바뀌었다. 1절의 ‘보호’가 ‘保祐’로, ‘우리 대한 만세’가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없이 놉고’가 ‘놉고 구름없이’로, 4절의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의 애국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변이상 중에 ‘충성을 다하야’라고 바뀐 부분은 예사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 부분을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가 수정하였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수정이 이미 191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임정시절 안창호와 가장 가까웠던 주요한이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 선생이 수정하였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미 1910년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에서 ‘충성을 다하야’로 수정되어 나온 다는 사실에서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시기와 지역이 거짓이 되는 것이고, 이 혼란의 주체가 안창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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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전통공연 예술단체 육성 공연 ‘2023 전국풍류자랑’ 개최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지역 전통공연예술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2023 전국풍류자랑’ 지역공연을 개최한다.전통공연예술 단체들의 우수한 공연작품을 지원하는 ‘지역 전통공연예술 지원 사업’은 지역의 전통예술 단체를 육성하고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올해 새로 기획됐다. 올 상반기 공모를 통해 선정된 21개 단체는 ‘2023 전국풍류자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각 단체의 소재지에서 지역민들을 위한 공연을 선보인다.올해 사업으로 지원을 받는 지역 전통예술단체는 울산광역시(2), 대구광역시(2), 부산광역시(2), 광주광역시(1), 강원특별자치도(1), 충청도(4), 경상도(5), 전라도(3), 제주특별자치도(1)에 소재한 총 21개 단체다.올해 9월 울산 지역 예술단체인 ‘내드름연희단’의 ‘착한광대 강제 환생 프로젝트 - 환생전’을 시작으로 전국 20개 시·군 지역에서 총 43회 공연이 진행된다. 10월에는 울산의 명소와 음악을 들려주는 ‘울산국악실내악단’의 ‘울산사계 Ⅲ - 울산노정기’, 동백섬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부산가야금연주단’의 ‘동백섬의 현황신화’ 등 6개 단체의 11회 공연이 진행된다. 11월에는 제주설화와 음악을 바탕으로 한 ‘사단법인 제주국악연희단하나아트’의 ‘제주성주풀이 : 새 집을 지어 오람구나’, 진해 연도섬에서 전해지던 여성 상여문화의 독특한 장례 풍습을 담은 ‘예술in공간’의 ‘연도댁 이야기’ 등 10개 단체 20회 공연이 지역의 특색 있는 전통예술 소재로 제작돼 펼쳐진다.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김삼진 이사장은 "지역의 전통예술 소재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을 지역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지역에서 펼쳐지는 공연인 만큼 지역민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고, 이를 통해 지역의 전통공연예술 단체가 활동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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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숨어 있는 100가지 매력 ‘로컬100’, 키크니 작가와 함께 알린다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 이하 문체부)는 지역의 문화매력을 찾아내고, 지역문화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지역의 명소, 콘텐츠, 명인 등을 ‘로컬100(지역문화매력100선)’으로 선정했다. ‘로컬100’은 지난 3월에 발표한 ‘지방시대 지역문화정책 추진 전략’의 후속 조치로서 지역 대표 유·무형 문화자원을 선정·홍보하기 위해 새롭게 추진하는 사업이다. 유인촌 장관은 국민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지역문화를 알리기 위해 10월 17일(화), ‘키크니’ 작가를 ‘로컬100’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지역문화 명소 58개, 지역문화 콘텐츠 40개, 지역문화 명인 2명 선정 문체부는 지역의 문화, 예술, 역사, 관광, 생활양식 등 지역문화자원에 기반을 둔 유・무형의 지역문화 명소와 지역문화 콘텐츠, 지역문화 명인 등 ‘로컬100’을 2년간(2023~2024년) 국내외에 집중적으로 홍보한다. 지역문화 명소로는 ▴지역만의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는 박물관, 미술관, 복합문화공간, 극장 등 문화시설, ▴지역문화 연계형 상권, 거리, 마을, ▴지역문화 기반의 상품·콘텐츠를 판매하면서 문화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음식점, 숙박시설, 카페 등 58개를 선정했다. 주요 선정 사례를 살펴보면 ▴ ‘안동 하회마을’은 유교책판, 징비록, 병산서원 등 사유와 성찰의 정신문화와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선유줄불놀이 등 놀이문화가 어우러지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서 선정됐다. ▴ ‘대전 성심당’은 1956년 대전역 앞 찐빵집으로 시작해 오직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지역브랜드로, 성심당문화원 운영, 지역대학에의 ‘성심당 마이스터클래스과’ 개설 등 ‘빵’으로 지역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다. ▴약 200만 명이 방문하는 ‘양양 서피비치’는 양양군이 보유하고 있는 해변을 중심으로 새로운 ‘서핑문화’를 만들어 양양군을 연중 찾는 여행지로 변화시켰다. 지역문화 콘텐츠로는 지역문화를 토대로 새롭게 창출된 ▴문화·예술·관광 상품 및 브랜드, ▴문화·예술·공연 프로그램, ▴축제 및 이벤트, ▴생활양식(라이프스타일), ▴출판·인쇄물·디자인 등 40개를 선정했다. 지역문화 콘텐츠로 선정된 사례 중 하나인 ▴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진주성에 갇힌 조선군의 군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남강에 풍등을 띄운 것에서 유래한 ‘유등’을 소재로 지역축제를 만들어 발전시켰다. 시민 4만 명이 ‘소망등’ 만들기에 직접 참여하고 유등축제 기간에 전시한 유등은 인근 상가에 임대하거나, 진주 실크등은 해외에 수출하는 등 ‘유등’은 진주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고 있다. ▴‘남원시립국악단 상설 창극공연’은 판소리 춘향가, 흥부가의 배경지인 남원의 광한루와 야외공연장 등에서 판소리를 재해석해 공연하는 프로그램이다. 2023년에는 ‘방자, 춘향을 말하다’를 광한루원 월매집에서 공연해 지역주민과 방문객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역문화 명인은 지역문화예술인, 인물 등으로, ▴대구의 대고장(大鼓匠) ‘김종문’, ▴평창의 ‘이효석’ 등 2명을 선정했다. 김종문 씨는 대구무형문화재 중 큰 북을 만드는 대고장으로, 60여 년간 대구를 대표하는 북을 만들고 있다. ‘로컬100’은 전국 228개 지자체와 문체부 2030자문단 ‘엠지(MZ)드리머스’, 문체부 4070지역문화매력기자단 등 국민발굴단의 추천을 받은 후보 461개 중에서 선정됐다. 선정 기준으로는 ▴매력성, 특화성, 지역문화 연계성, ▴문화·경제·사회적 효과, ▴지역주민 및 방문객 방문·향유 영향력, ▴지역발전 기여 가능성 등에 대한 국민발굴단과 지역문화 전문가 등의 평가와 누리소통망(SNS) 언급량, 통신데이터 추정 방문객 수 등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함께 반영했다. ‘로컬100’은 문체부 공식 인스타그램(mcstkorea)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인촌 장관, "국민이 문화로 지역에 머물고, 살고, 가고 싶게 새로운 지역 이야기 만든다”고 전헸다. ‘로컬100’ 홍보의 첫걸음으로 유인촌 장관은 10월 17일(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키크니’ 작가를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위촉장을 수여했다. ‘키크니’ 작가는 일상과 여행, 상품 등에 관한 국민들의 댓글을 소재로 감동과 재미를 주는 짧은 만화와 웹툰을 재치 있게 그려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문체부는 국민이 사랑하는 지역문화 자원을 지역문화적 가치, 이야기 등과 엮어 쉽고 재미있는 홍보콘텐츠로 제작하고 알리기 위해 ‘키크니’ 작가를 홍보대사로 선정했다. ‘키크니’ 작가는 2024년까지 홍보대사로 활동한다. 유 장관은 "문화로 지역소멸에 대응하고, 지역에서도 문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문화로 지역이 발전할 수 있는 핵심은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에서 시작한다. 이번에 선정된 ‘로컬100’에 대한 생활공감형·밀착형 홍보를 과감하게 추진해 국민이 문화로 지역에 머물고 싶고, 살고 싶고, 가고 싶게 만드는 새로운 지역 이야기를 만들어 내겠다.”라고 밝혔다. ‘키크니’ 작가는 "그 지역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지역문화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찬란한 지역문화를 알리고, 그릴 기회가 생겨 감사하다.”라고 홍보대사 위촉 소감을 말했다. 문체부와 지역문화진흥원은 ‘키크니’ 작가와 함께 진주남강유등축제, 안동하회마을, 대전성심당 등 ‘로컬100’에 얽힌 국민의 사연을 그림으로 그려주는 ‘키크니가 로컬100 사연을 그려드립니닷!’ 행사도 진행한다. 누구나 10월 17일(화)부터 11월 12일(일)까지 네이버폼(https://naver.me/FOMXT0rN)으로 사연을 신청할 수 있으며, ‘키크니’ 작가가 사연 3개를 선정해 그림으로 그려줄 예정이다. 선정된 사연은 문체부(mcstkorea)와 ‘키크니’ 작가 인스타그램(keykney)에서 11월 17일(금)부터 확인할 수 있다. 사연 신청자 중 추첨을 통해 선정된 100명에게는 소정의 기념품을 선물할 계획이다. 아울러 문체부와 코레일관광개발(대표 권신일)은 기차로 지역문화를 연결하는 ‘로컬100 기차여행’ 상품을 개발한다. 첫 번째로 ‘로컬100’에 선정된 ‘신안 퍼플섬’에서 열리는 ‘2023 문화의달’ 행사와 연계한 상품을 출시한다. 내외국민 누구나 기차여행 상품으로 ‘로컬100’을 만날 수 있으며, 코레일관광개발 누리집(www.korailtravel.com)에서 더욱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문체부는 코레일관광개발 등 민관과 협력해 ‘로컬100’을 지속적으로 홍보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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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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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공연이 된 제21회 대구아리랑축제무대는 북춤으로 정화되었다. 이어 진행자의 정중한 멘트가 이어졌다. "1956년 영천에서 출생, 60년대 말로부터 80년대 초 까지 서울에서 주경야독으로 전통소리를 연마,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고향 영천과 대구에서 경기민요와 영남민요의 무대화에 노력, 전국아리랑보존회 대구 지회장으로 활동, 2000년부터 본격적인 영남민요와 영남아리랑 전승 토착화,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계기로 ‘대구아리랑’ 작창과 ‘대구아리랑축제’ 창안, 대구 최계란 명창 추모 행사와 경창대회 창안, '아리랑상'공로상 수상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와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지정에 기여,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결성, 전승자 독려. '아리랑의 날' 선포식 참가 지난 대구아리랑축제 때만 해도 이 공간에서 지휘하던 그 분이 오늘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 분은 지난 1월 초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 분, 우리가 사랑하는 아리랑 명인 정은하 선생이십니다. 이제 영정으로 모시고 오늘 행사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출연자들 그리고 관객 여러분, 보내시고 처음 맡는 행사인만큼 정은하 선생에 대해 목례로 추모의 예를 표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23일 대구 달성아트센터 청룡홀에서 21회 대구아리랑축제는 다소 무겁고 숙연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행사를 준비한 제자들의 마음과 주요 출연자들인 영남지역 아리랑보존회 회원들, 그리고 기꺼이 먼 걸음으로 참여한 명창들과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반영한 듯하다. 오후 7시, ‘대구아리랑축제’ 첫 무대는 ‘최계란명창전국아리랑경창대회’ 명창부 대상 수상자 한승연의 ‘정선아리랑’으로 시작되었다. 정은하 선생의 의지로 시작된 대구아리랑경창대회는 지난해까지 16명의 명창을 배출하고 이번 17회는 정선 출신 한승연이 대상을 받았다. 이들을 통해 ‘대구아리랑’과 대구아리랑축제를 전국에 알렸다. 초청 명창의 무대는 제1회 때부터 첫 무대를 꾸며준 김길자 강원도무형문화제 1호 정선아리랑보유자와 70년대 초 ‘청구성악연구소’에서 함께 수학한 경기민요 이수자 이금미 명창이 긴아리랑으로 무대를 빛냈다. 영남의 아리랑을 대표하는 ‘영천아리랑(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울릉도아리랑(울릉도아리랑보존회 황효숙)’ ‘성주아리랑(성주아리랑보존회 임옥자)’ ‘상주아리랑(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김학영,이상우)’ ‘경상도아리랑 (성주의병아리랑보존회 최문희)’ ‘독립군아리랑, 광복군아리랑(대구아리랑보존회 김상준,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허윤도, 김정수)’이 불려졌다. 이어서 ‘최계란 本 대구아리랑(동구지부 오은비)’ ‘정은하 本 대구아리랑(신수진, 전성희, 김천지부 허희자, 남구지부 백선혜, 경산지부 안정인, 달성군지부 성은주)’ ‘신대구아리랑(부회장 오은비, 이사 신수진)’ ‘밀양아리랑(수성구지부 조순남)’이 불려졌다. ‘부산아리랑(부산아리랑보존회 김희은)’ ‘홀로아리랑(이사장 곽동현)’ ‘본조아리랑(출연자 모두)’ ‘진도아리랑(어란이팀)’ 공연이 펼쳐졌다. 특별 순서인 정은하 선생 활동상을 보여준 동영상은 모두를 숙연케 했다. 영남지역 아리랑의 존재 부각을 위한 30여 년의 각고는 아리랑 역사에 길이 남는 역정임을 확인 시켜주었다. 특히 첫 제자인 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대표, 부산아리랑보존회 김희은 대표, 울릉도아리랑보존회 황효숙 대표의 무대는 정은하 선생과의 각별한 교분으로 특별했다. 그리고 40여 년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온 이인수 대구교육대 교수, 김상준 외 광복군아리랑 팀의 무대는 정은하 선생에 대한 많은 상념을 떠 올리게 한 무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빛나고 듬직한 무대는 정은하 선생이 남긴 애 제자 곽동현, 신수진, 오은비가 불러준 신구 ‘대구아리랑’ 3곡을 연창으로 꾸민 공연이었다. 정은하 선생이 작창 한 최고의 창작 아리랑 1호인 ‘대구아리랑’을 부를 때는 객석 곳곳에서는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어린 시절 정은하 선생의 손길에 의해 소리길을 밟아 어엿한 소리꾼으로 성장하여 이번 두 행사를 꾸린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오전 9시 반 경창대회로부터 저녁 8시 반, 본 행사를 이어가는 동안 서로가 주고받은 눈길은 오는 정은하 선생의 1주기 추모공연을 하자는 합의였다. 이번에 참여하지 못한 역대 출연 명창인 이춘희, 강송대, 이호연 명창 등과 경창대회 배출 17명의 대상 수상자들이 함께하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대구시 ‘대구아리랑’ 보유단체 지정과 전국아리랑공연예술연합회 단체의 법인화를 이뤄내자는 묵시적 합의였다. 정은하 선생을 보낸 후 첫 행사는 단촐하지만 정성을 드린 무대였다. 진행자가 선생의 영정을 향해 "정은하 선생님 만족하셨지요. 든든하지요!”라는 멘트로 마무리 하였다. 정은하 선생의 부재를 극복하고 그 분이 심어 놓은 유지를 실천하자는 다짐을 가슴에 새기는 계기였다. 주최측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을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 대구 시민들과 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 김신효 지회장 등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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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회 대구 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11/11)■ 행사몀: 제31회 대구 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 ■일 시 : 2023년 11월 11일(토) 10:00 ~ 17:00 ■장 소 : 대구문화예술회관 비슬홀 ■주 최 :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주 관 :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후 원 : 대구광역시 ․ 대구광역시교육청․ (사)한국국악협회․ (사)대구예술문화 단체총연합회, (주)국악신문사 세부요강 ■경연종목 - 중고등부, 일반부 : 사물놀이(앉은반, 선반 - 단체 및 개인놀음) - 초등부, 신인부 : 사물놀이(앉은반, 선반 - 단체 및 개인놀음) ※초등부, 신인부에 한해 사물놀이 가락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곡 참가 가능 ■경연시간 : 단체 10분 내외, 개인놀음 5분 내외 ■순번확인 : 추첨없음(접수역순) ■초등부, 중고등부 - 오전 9시 ■신인부, 일반부 - 오전 11시 30분 ■참가부문 : 초등부, 중 ․ 고등부, 신인부, 일반부(단체경우 인원수4~10명내외) ■참가자격 ■초등부 : 초등학교 재학생 및 그에 준하는 아동 ■중고등부 : 중,고등학교 재학생 및 그에 준하는 청소년 ■신인부 : 전공을 하지 않은 대학생을 포함한 만19세이상 성인 ■일반부 : 대학생을 포함한 만19세이상 성인 ※ 단체 및 개인에 대한 경연 및 심사는 별도 구분 없이 동일하게 진행함 ※ 참가자격, 경연부문 등에 대한 허위 사실이 발견될 시 참가 취소할 수 있으며수상시 수상취소는 물론 지급된 상장과 상금은 회수할 수 있음 ※ 단체 참가인원수는 4~10명을 원칙으로 하나, 초등부, 신인부는 관계없음 ※ 2022년대회 일반부 최고상 수상경력자는 참가할 수 없음 ※ 2022년대회 신인부 최고상수상팀은 팀원50%이상 인원 변경시 참가 가능 ※ 경연시간은 전체일정 진행상 당일 심사위윈 회의를 통해 조정될 수 있음 ※ 창작곡은 반드시 사물놀이 가락을 기반으로 한 창작 작품이며 초등부, 신인부에 한함 ■유의사항 - 학생부 참가자는 단일학교가 아니어도 무방하며, 단일학교가 아닌 경우 학교명이 아닌 단체명으로 접수하여야 하고 수상시 상장표기는 단체명으로 기재 - 특수학교 교급 편재는 통상관례에 준함 - 부문 중복 출전 불가 (단, 동일부문 개인 및 단체는 가능) - 참가팀 구성은 참가부문에 맞게 구성해야 함. 단, 중고등부는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단일팀을 구성해도 무방함 - 상장은 단체일 경우 단체명 한장만 발급되며 추가 발급 불가 참가신청서 교부 및 접수 ■신청기간 : 2023년 10월 4일(수) ~ 11월 3일(금) 오후4시까지 ■신청방법 : 방문접수, 우편접수, e-mail접수, 팩스접수(당일 원본 제출)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본 대회 소정양식) 신청서 다운로드 http://dggukak.imweb.me/ (주)국악신문사 ■참 가 비 : 없음 ■신청서 교부 및 접수 장소 - 주소 : (우:42672) 대구광역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문화예술회관 내 제2예련관(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 E-mail : gukakdg@naver.com - 전 화 : TEL(053)256-7957, FAX(053)289-5808 ※ 우편 또는 e-mail 접수 권장, 우편접수는 신청마감일 도착분에 한함. ※ 시상내용은 대회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도 있습니다.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 대구광역시 달서구 공원순환로 201 문화예술회관 내 제2예련관 TEL(053)256-7957 FAX(053)289-5808 http://dggukak.imweb.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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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대구아리랑제, 정은하 명인을 그리며대구아리랑(정은하 본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는 넘어가네 어데에 아니라예 핑계만 찾지말고좋으면 좋다고 눈만 껌뻑하이소팔공산 수태골 감도는 구름아우리님도 내 못잊어 그리 떠도느냐아이구 이 문둥아 좋다 말만말고추야장 긴긴밤에 날 찾아오이소금호강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오면가신님 그리워서 내 못살겠네경감영 선화당은 대구의 자랑아름답게 보존하여 후세에 남기세비슬산 참꽃필 때 슬피우는 소쩍새우리님도 내 그리워 피토해 우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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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제21회 대구아리랑축제 성료사단법인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회장 곽동현)가 주최하는 제21회 대구아리랑축제 및 제17회 대구최계란명창전국아리랑경창대회가 9월23일 대구 달서아트센터 청룡홀에서 성황리에 마쳤다. 특별공연으로 ‘최계란 本 대구아리랑’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색다른 느낌으로 신나고 경쾌하게 편곡하여 ‘신대구아리랑’이 초연되었다. 특히 대구아리랑 세가지 버전, ‘최계란 본 대구아리랑(1936년), 정은하 본 대구아리랑(2003년), 신대구아리랑(2003년)을 선사했다. 대구아리랑(최계란 본) 아롱아롱 아롱아롱 아라리야 아이롱 고개로 넘어가네(후렴) 낙동강 기나 긴 줄 모르는 임아 정나미 거둘랴고 가실라요 낙동강 해다진데 우리님아 관산만리 어디아고 가실라요 언제나 오실 라요 내 사랑아 봄풀이 푸르거든 오실라요 공산에 우는 두견 너 무삼일로 임 그려 썩은 간장 다녹이노 관산만리 구름속에 저 달이 숨어 금호강 여물에 눈물지네 대구아리랑(정은하 본) 어데에 아니라예 핑계만 찾지말고좋으면 좋다고 눈만 껌뻑하이소팔공산 수태골 감도는 구름아우리님도 내 못잊어 그리 떠도느냐아이구 이 문둥아 좋다 말만말고추야장 긴긴밤에 날 찾아오이소금호강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오면가신님 그리워서 내 못살겠네경감영 선화당은 대구의 자랑아름답게 보존하여 후세에 남기세비슬산 참꽃필 때 슬피우는 소쩍새우리님도 내 그리워 피토해 우더냐 제1회부터 초청 공연을 해 온 김길자(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 ’정선아리랑‘ 예능보유자)명창의 ‘정선아라리’과 이금미(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 명창의 ‘경기 긴아리랑이 무대를 더욱 빛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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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대구최계란명창 전국아리랑경창대회 명창부 대상 한승연23일 대구달서아트센터에서 개최된 제17회 대구최계란명창 전국아리랑경창대회 명창부 대상 한승연이 차지했다. 독립적인 전국단위 아리랑 경창대회로는 정선아리랑경창대회에 이은 역사 깊은 대회이다. 故 정은하 명창이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를 결성하며 아리랑전승 활성화를 위해 제정한 대회로 긴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상주아리랑, 대구아리랑(정은하 작창) 명창을 배출했다. 금년에도 학생부, 일반부, 단체부, 명창부에 많은 응모자가 참가하여 경연을 벌였다. 금년 명창부 대상 수상자인 한승연은 한중대전통문회학부 한국음악전공하고 정선아리랑 이수자로서 10여년 활동해 오는 재원이다. 정선군립아리랑예술단 18년, 정선아리랑보존회회 21년, 현 정선아리랑보존회이사로도 활동해 오고 있다. 다수의 수상경력도 있다. 제16회강뭔무형문화대제전 신진상 수상, 제48회 정선아리랑제실버합창대회 대상 수상을 하였다. 명창부 금상에는 조여화, 은상에는 서금옥, 동산에는 조희진, 장려상에는 이혜솔이 수상했다. 이번 대회는 정은하 명창의 유지를 받들어 제자들이 준비한 대회로 내년부터는 더 확대된 대회로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였다. 한편 심사위원장 이금미 명창은 "학생부가 중고들학생이 없이 초등학생들로 채워진 것은 매우 아쉽다. 그들이 모두 서울로 진출한 탓인데, 내년부터는 이들을 적극 독려하여 참여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명창부 대상 한승연 금상 조여화 은상 서금옥 동산 조희진 장려상 이혜솔 일반부 금상 최문희 은상 성은주 동상 윤정원 장려상 송정란, 신재희 단체부 금상 송정희 외 6명 은상 최은주 외 5명 동상 장춘자 외 7명 장려상 김춘자 외 5명, 문귀옥 외 3명 학생부 금상 최정원 은상 신화영 외2명 동상 박신우 장려상 강준서, 박시현 외 1명 특별상 김채아, 최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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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강덕이 할머니가 부른 '밀양아리랑'2023년 9월 11일부터 13일 사이, 한국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金練甲) 이사장과 대종교 원로 리창구(李昌九)께서 연변에 와서 나(리광평)를 찾았다. 김연갑께서는 이미 몇해 전에 두번이나 연변에 다녀와 연변음악가협회의 도움과 나의 도움으로 조선족의 유명한 음악가들이고 음악교육자들인 전화자(全花子), 안계린(安继麟), 김봉관(金凤官)등을 만나 중국조선족음악, 특히는 연변에서의 아리랑에 관한 연구성과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수집하였었다. 특히는 2013년 7월 21-22일에 오셨을 때는 1급 작곡가 안계린의 '장백산아리랑'에 관한 자료와 김봉관이 수집정리한 연변에서 불려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등 자료들을 수집한 후 한국에 돌아가 여러가지 도경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아리랑 음악에 대한 성과들을 전세계에 널리 홍보를 하였던 것이다. 그때 영화 ‘아리랑’ 연구가 기미양과 함께 오셨을 때도 나의 안내로 이곳 룡정시 지신진 명동학교의 졸업생이고 1926년 한국에서 처녀작 "아리랑” 을 발표하고 그후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소문난 라운규(罗云奎)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유서 깊은 룡정의 몇 곳을 답사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라운규가 조선 회령의 기차역 로동자들이 아리랑을 부르면서 일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아리랑' 창작에 몸을 바쳤다고 하던 저 두만강 건너 회령 기차역을 룡정시 삽합진 망강각에 올라 바라보았고, 또 명동학교 전시관에서 라운규를 소개한 전시품들을 살펴보았으며, 라운규네가 올랐던 선바위, 그리고 지난 세기 3,40년대에 아리랑극과 노래가 공연되였다던 룡정 성세극장 옛터도 답사하였던 것이다. 이번에 그는 10년만에 다시 연변에 왔다. 그런데 그때 만났던 안계린과 감봉호 음악가들이 이미 저 세상사람이 되였고 전화자 선생님도 외출한 상황이라 이전에 련락하였던 분들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였단다. 다행스러운 것은 내가 아직 건강하게 활약하고 있기에 이번 걸음은 전부 나에 의거한다는 것이였다. 세월의 흐름은 그 누구도 어쩔수 없으니깐 오직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봐야 하겠다. 나는 김연갑선생님과의 전화통화에 의해 연길시 연서가 35호에 자리잡은 한정호텔(汉庭酒店) 403실에 그들의 숙박을 잡아주었고, 11일 오후 2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4시 반에야 입국수속을 마치고 출구로 나온 김연갑과 리창구를 반갑게 맞을 수 있었다. 호텔 수속을 마치자 김연갑은 전화자 선생님이 출국하였기에 만날 수 없고 안계린과 김봉관도 사망하셨기에 만날수 없어 몹시 서글프고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번 걸음에 연변조선족음악 더욱히는 아리랑 노래에 대한 연변의 연구성과들을 료해하고 이전에 연변에서 밀양아리랑이 불러졌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나한테 무슨 수가 없겠는가고 따지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저녁 식사 시간에 연변문련원 부주석이였고 조선족음악가이며 중국조선족명인관 관장인 류영근(柳永根)한테 전화를 걸어 김연갑이 왔다고 알려주면서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참관시킬 수 없겠는가고 청을 하였다. 언녕부터 김연갑에 대해 알고 있는 류영근은 이는 우리 중국조선족음악을 세계에 홍보하는 좋은 기회라면서 래일 오전 10시에 연변대학 맞은켠 대학성1호 건물 8층 연변미술관 옆에 있는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찾아오라는 것이였다. 내가 이 기쁜 소식을 김연갑한테 전하자 그들은 너무 흥분되여 어쩔바를 몰라 하였다. 그러자 나는 지금의 안도현 명월진에 1938년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집단이민을 오셨던 강덕이란 할머니가 계신데 그를 만나면 밀양아리랑을 부르는 걸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김연갑은 래일 오전에 중국조선족명인관을 참관한 다음 즉각 안도현 명월구로 가서 강덕이할머님을 만나보자고 하였다. 김연갑은 그렇게 되면 이번 걸음의 목적을 이룰수 있을 것 같다며 나한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 올렸다. 나는 밤이 깊어 택시를 타고 룡정으로 돌아왔다. 9월 12일 내가 택시를 타고 오전 9시 10분에 한정호텔에 도착하니 그들은 언녕 1층 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안도현 명월진의 강덕이할머니에게 저들이 오늘 오후에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하였다. 그러자 강덕이는 지금 자기는 허리가 아프면서 걷기가 힘들어 안도현중의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하였다. 내가 그러면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오면 자기한테 전화를 하라는 것이였다. 9시 40분이 되자 우리는 걸어서 중국조선족명인관에 도착하였다. 중국조선족명인관 녀성관장이 저들을 반기면서 류관장께서 손님을 접대하다보니 약 반 시간 후에 오실거라면서 김연갑과 리창구한테 전시품들을 까근히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명인관에는 현재 연변조선족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는 허세록, 그리고 김성민, 정진옥, 박우, 동희철, 김남호, 허원식, 방룡철, 안계린, 안국민, 최연숙, 최삼명, 김봉호, 최창규, 김봉관, 박서성 등 16명의 연변조선족음악가의 사적들과 음악작품들, 그들을 소개하는 책들과 CD, 메달과 증서, 그들이 사용하던 악기, 실물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류영근께서 오시더니 김연갑 등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시고 오신 것을 환영한다면서 16명 연변음악가들의 사적을 상세히 소개하여 주었다. 김연갑 선생은 이전에 자기는 여러 차례 연변에 다녀와 조선족음악에 대한 조사를 하였었는데, 그때는 이런 전시관이 없어 모진 애를 먹었단다. 그런데 오늘 이런 현대적인 전시관을 보니 몹시 격동된다면서 연변문화의 발전 성과를 만끽하게 되고 조선족 음악에 대한 깊이와 수준을 형상적이고도 예술적으로 실감하게 된다고 탄복을 금할줄 몰랐다. 특히 이 명인관에서 듣는 조선족음악은 이전에 자기들이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들이 풍부하고 다채로워 중국조선족음악에 대한 애착심이 더 생기고 또 리해를 더 깊이있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관람과 소개가 끝내자 류관장은 우리 일행를 데리고 동영상실에서 중국조선족명인관소개, 연변음악가소개에 관한 동영상들을 관람시켰다. 그러면서 류영근은 앞으로 여러 가지 도경을 거쳐 김연갑 선생에게 이런 자료들을 제공하여 주고 여러 면으로 교류를 하며 중국조선족음악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기에 힘쓰겠다고 말씀드렸다. 김연갑 선생은 류영근관장의 접대와 소개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와 경의를 표하면서 이런 자료들을 잘 활용하여 전세계에 중국조선족음악을 잘 홍보하기에 최선을 다 하며 앞으로 많은 교류와 협작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하였다. 류영근 관장은 우리들에게 오찬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자신의 승용차로 우리들을 연길기차역 광장 장거리 뻐스역까지 모셔가서 안도로 갈수 있도록 편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나는 김연갑 선생, 리창구 선생과 함께 연길에서 안도로 달리는 버스를 타고 떠나 오후 2시 10분에 안도현 명월진에 도착한 후 택시를 잡아타고 안도현중의병원 409호 병실로 찾아가 강덕이 할머님을 만나게 되였다. 허리 통증으로 인하여 걷기가 힘들어 입원치료를 받는다는 강덕이 할머님은 몹시 허약해 보였다. 아래에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이 강덕이 할머니와의 인터뷰 내용을 록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김연갑: 할머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고향엔 다녀가셨어요? 강덕이:우리 부모네는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1938년도에 이곳 연길현 명월촌 도안구(오늘의 안도현 명월진 신툰촌)에 집단이주를 왔댔어요. 나는 그 이듬해인 1939년에 도안구 집단이주민 부락에서 태여났지요. 약 10년전에 우리 부부는 한국의 고향에 한번 놀러갔댔어요. 고향집이 있는 데로 가니까 우리 옛 집터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옛집은 이미 허물어졌더군요. 그래서 왜 집을 허물었는가고 물으니 새로운 주인이 이사를 오면서 그 집에 사람들이 들지 않으니 허물고 그 자리에 콩크리트 바닥을 하여 마당으로 쓰고 있다고 합데다. 그리고 바닥 옆에 창고를 짓고 거기에 우리 부모네가 쓰던 디딜방아랑 가대기랑과 낡은 가구들도 진렬하고 있었다.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는 어릴 때 사셨던 집터 기억이 나세요? 강덕이: 나는 중국에서 태여났으니 나의 엄마의 말을 자꾸 들어 조끔 알고 있었지요. 나의 엄마는 우리집 대문앞에 대추나무 한 그루 심어 놓았는데 아이들이 채 익지 않은 대추를 따 먹는다고 야단을 쳤댔다고 말하셨지요. 그래 가보니 정말 그 대추나무 한그루가 그냥 있더군요. 나의 할아버와 할머니께서 일찍 사망하시다보니, 고모는 우리 아버지와 단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고달프게 살았대요. 우리 고모가 아버지를 키우셨대요. 그때는 장가를 가려면 밑며느리를 집에다 데려다 놓고 키워서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15살인 우리 엄마를 집으로 데려왔대요. 그래서 고모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키워서 나이가 되니까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 고모네가 중국에 이주를 가게 되였대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두고는 갈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우리 고모는 아버지네를 데리고 중국에 집단이주를 오게 되었대요. 그때 고모는 중국으로 가려면 꼭 된장과 간장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더러 도가지에 된장과 간장을 각각 담아서 중국에 가져오게 했대요. 지금 그 도가지를 내가 보존하고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집단이주를 왔단 증거물이 아니겠어요? 우리 어머니는 고향에 있으면서 삼을 심어서 실을 내여 삼베를 짜서 집식구들의 옷을 해 입혔대요. 중국에 와서도 삼베를 짜야 옷을 지어입을 수 밖에 없으니 계속 삼을 심고 그걸 실로 내여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짰어요. 나도 어릴 때부터 엄마가 베를 짜는걸 도와서 실을 비비기도 하고 감기도 하였지요. 리광평: 이 분은 그때 부모님들이 가지고 왔던 독을 보관하고 있을뿐아니라 어머니께서 짜셨던 베천 쪼각들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외 여러 가지 물건들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강덕이: 그때 두부를 만들려면 콩물을 천으로 짜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가 짠 베천으로 콩물을 짜는 주머니를 만들었지요. 지금 그 주머니를 보관하고 있어요. 김연갑: 참, 그 베천쪼각이라도 가지고 갔으면 좋겠는데요. 리광평: 그때 저 할머니께서 그 베천쪼각을 저한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는 저도 가지고 싶지만은 이 천을 고이 잘 간직하였다가 이 마을 신툰촌력사전시관을 꾸릴때 전시하여야 제일 값이 있을거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김연갑: 그리고 할머니, 이전에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찾아와서 이런저런 조사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지 않았어요? 강덕이: 그때 많이 왔지요. 한국에서도 오고 중국의 북경, 장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왔댔어요. 그때 우리 마을은 전 연변에서 제일 처음 명명된 조선족민속마을이였거든요. 한번은 북경에서 온 도연(导演)이 우리 민속촌에 대한 촬영을 아주 상세하게 하였어요. 그러면서 아주 훌륭한 동영상을 만들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도연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그만 차에서 중풍을 맞아 사망하였대요. 하여 그 좋은 자료들이 몽땅 없어지고 동영상도 만들지 못했거든요. 얼마나 아쉽던지! 지금은 년세 많은 분들이 다 사망되고 집단이주력사 이야기를 할만한 사람들이 없어요. 이젠 나 혼자만 남았어요.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도 그때에 노래랑 많이 불렀댔습니까? 강덕이: 아이고 정말 많이 불렀댔어요. 김연갑: 그러면 아리랑도 불렀고 밀양아리랑도 불렀댔습니까? 강덕이: 아리랑이야 제일 많이 불렀댔지요. 밀양아리랑도 그렇고. 밀양군과 합천군이 서로 있대여 있고 또 집단이주도 함께 왔으니 고향에서 있을 때도 그렇고 또 이곳에 와서도 그렇고 밀양아리랑을 많이 불렀댔어요. 리광평: 할머니, 그럼 저하고 함께 밀양아리랑을 불러 봅시다. 강덕이와 리광평이 밀양아리랑을 부릅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님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스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강덕이: 야, 이 노래를 많이 불렀댔어요. 그런데 내가 부르는 밀양아리랑은 방금 부른 것보다 가사 틀려요. 이 가사는 고모님과 어머니가 많이 부르던 가사래요. 그래서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지요. 김연갑: 그러면 이곳에서 해방이 나기전부터 밀양아리랑을 불렀단 말씀이군요. 강덕이: 그거야 당연하지요. 해방전부터 불렀다니깐요. 김연갑: 그러면 할머님의 부모님들이 부르던 노래가사대로 불러 보세요. 강덕이: 그러면 부를게요. "이것 보소, 저것 보소 뭘 보란 말이요 신작로 복판의 대갈보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김연갑: 이 가사는 제가 한국에서나 밀양에서 들어본적이 없는 독특한 가사입니다. 이건 이곳에서만 불러진 가사입니다. 리광평: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별미입니다. 김연갑: 할머니께서 노래도 잘 부르시고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젊었을 때는 명창이였겠습니다. 이전에 이 노래를 록음한 적이 있어요? 강덕이: 그때 어디에 록음기가 있었겠어요? 김연갑: 아니 이 마을로 취재를 왔던 사람들이 록음하셨는가 하는 말입니다. 강덕이: 이 노래가사로 된건 록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처음입니다. 리광평: 2018년 한국 대구의 EBS방속국의 국장 김영봉이란 PD가 강덕이와 권유세가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비디오촬영을 하였댔습니다. 김연갑: 아이참, 정말로 소중한 이야기를 하셨고 뜻 깊은 밀양아리랑을 불렀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밀양아리랑은 집단이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불러졌다는 유력한 증거로 됩니다. 밀양아리랑을 이곳에서 불렀다는 생동한 증거물을 찾게되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는 우리 예상밖의 성과입니다. 정말로 소중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리광평: 저는 이 할머니를 1988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줄곧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 할머님은 제가 만나서부터 농악대에 들어서 북을 치거나 장고를 치는걸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잘 불렀답니다. 김연갑: 할아버지도 이 밀양아리랑을 불렀습니까? 강덕이: 나의 령감은 춤을 추거나 악기를 다루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생산대에서 늘 회계사업을 하니깐 그런 일을 할 여가가 없었어요. 하지만 노래는 참 잘 불렀어요. 정말로 아까운 분이였어요. 십여년간 생산대 회계를 하였지요. 회계를 잘하여 상장도 탄 것이 있었는데 어디에 들어갔는지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리광평: 제가 이들 부부한테 여러번 권고를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자기나 자기집에서 겪어왔던 실제적인 일들을, 가정에 생겼던 일들을 글로 적어서 이 세상에 남겨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2018년에 이분의 남편 권유세께서 친히 반년동안의 정력을 들여 1만2천여 글자나 되는 《안도현 명월진 신툰촌 력사재료 참고서》를 친히 썼댔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꼭 잡고서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리관장, 내가 리관장의 부탁대로 없는 재간이지만 이 신툰촌력사재료 참고서를 썼소. 그러니 리관장께서 보시고 다시 수개도 하고 보충도 하여 앞으로 책에 실리도록 하여주오. 이것이 나의 최후의 소망이요. 꼭 부탁드리요.”라고 하셨댔습니다. 하여 나는 그 글을 본 다음 수개도 하였고 원본을 돌려준 다음 더 내용들을 보충하라고 맡겼댔습니다. 그러자 권로인은 다시 다른 책에 옮겨 뻬끼면서 또 다른 내용도 보충하였습니다. 나는 그걸 다시 수정하고 타자를 하여 로인님들께 드렸습니다. 지금 그 내용과 원본들을 제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앞으로 책이 출판될 때 꼭 이 글을 넣으려고 합니다. 김연갑: 그 원본과 글들을 다 보관하고 있다구요? 참 의미있는 큰일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훌륭한 력사증거물로 될 겁니다. 정말로 소중한 기록들입니다. 할머니께서 글을 쓸수 있어요? 강덕이: 쓸수 있어요. 한자든 조선글이든 다 쓸수 있습니다. 김연갑: 이 노트에 할머님의 이름과 주소, 방금 부른 밀양아리랑노래의 가사를 적어주세요. 강덕이: (글을 쓰신다.) 아이고, 이젠 손도 말을 잘 안들어요! 김연갑: 그 정도면 대단한거지요. 년세가 85세인데요. 확실히 이곳에서 밀양아리랑을 불렀댔군요. 그리고 할머님 신분증도 촬영합시다. (강덕이께서 신분증을 내놓자 내가 사진기로 복사하였고 할머니께서 쓴 글도 사진기로 복사하였다.) 김연갑: 할머님의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대갈보, 대갈보란 무슨 뜻인가요? 강덕이: 대갈보? 우리는 뚱뚱한 사람들을 대갈보라고 합니다. 김연갑: 그러면 할머니께서 병원에 얼마 동안 계셔야 된대요? 강덕이: 지금은 한 단락치료기간이랍니다. 치료를 해보고 만약 났지 않으면 다음 치료계단으로 넘어간답니다. 오늘까지 사흘간 치료를 하였는데 좀 나은것 같기도 합니다. 김연갑: 건강하시여서 리광평선생님한테 이야기를 다 하시십시요. 그러면 그걸 연변이나 한국 합천군과 밀양군에도 다 알려지게 될겁니다.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이 나면 전화를 통해서라도 수시로 이야기해 주세요. 강덕이: 리선생님이 물어보면 제가 대답할수 있어요. 김연갑: 리선생님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리광평: 최근에 제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PD와 합작하여 이들 부부가 2018년 8월에 결혼 60주년 기념행사인 회혼례를 치르던 장면들로 조선족민속전문프로를 만들고 있습니다. 김연갑: 참 좋은 일들을 많이 하시고 있네요. 할머니께서 건강하셔서 리선생님한테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세요. 강덕이: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반가운 귀빈들에게 때시걱이라도 끓여줄 텐데 참 미안합니다. 더욱이 병원까지 찾아와 주시니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네, 부탁대로 할게요. 김연갑: 건강하십시요. 다음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올게요. 치료를 잘 받으세요. 뜨거운 악수를 나누면서 우리들은 아쉬운대로 석별의 인사를 올렸다. 병원에서 나오니 오후 세시 반이 가까워졌다. 하여 우리는 택시를 타고 명원구 시내의 길가에 펼쳐져 있는 장마당으로 다녀갔다. 거기서 송이버섯 3송이와 땅콩, 해바라기씨, 수박 등을 샀다. 그리고 명월구 공공버스역에 다녀가 공공버스를 타고 연길에 돌아왔다. 연길기차역에 다녀가 물어보니 이젠 이곳에선 려객기차를 탈수 없으니 연길서역 고속철도역에 가야 한단다. 하여 우리는 16선 공공버스를 타고 직접 연길서역에 이르러 13일 오전 8시 19분 연길—단동 고속렬차 표를 샀다. 호텔부근 부산돌솥밥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저녁 8시 반이 되였다. 나는 래일 아침 7시에 연길서역에서 그들을 만나 이틀간에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메모리에 담아 드리고 또 나의 선물로 참깨를 드리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택시를 타고 룡정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6시 반에 연길서역에 도착하였다. 김연갑선생측도 7시 10분이 되자 연길서역에 도착하였다. 나는 약속대로 그동안 답사 사진을 찍은 메모리와 참깨를 드렸다. 단동행 고속렬차 출발시간이 오라지 않기에 그들은 다투어 검표를 마치고 대합실로 들어갔다. 나는 16선 버스를 타고 아리랑축구공원 북측역에서 내려 '연길아리랑축구공원' 간판들과 공원 모습들, 신체단련을 하는 사람들을 명심하여 기록하였다. 이 사진은 메일로 김연갑선생님한테 보내드릴 준비를 마치였다. 나는 다시 16선 버스를 타고 연길 모아산에 도착하였다가 룡정버스를 타고 룡정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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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완창판소리 '김영자의 수궁가-정광수제'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은 <완창판소리-김영자의 수궁가>를 10월 14일(토)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김영자 명창이 깊고 탄탄한 성음으로 정광수제 ‘수궁가’를 완창한다.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영자 명창은 8세에 강산제 보성소리의 계승자인 정권진 명창으로부터 ‘심청가’와 ‘춘향가’를 배우며 판소리에 입문했다. 이후 김준섭 명창을 비롯해 김소희·박봉술·성우향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을 두루 사사한 김 명창은 안정적인 중하성(아랫소리의 음)부터 시시상청(최고조의 고음)까지 거뜬하게 소화해 탁월한 목청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판소리 다섯 바탕(흥부가·춘향가·수궁가·심청가·적벽가)을 모두 완창한 것은 물론, 1985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1974년부터 1999년까지 국립창극단원으로 활동한 그는 소리뿐 아니라 발림(신체를 활용한 몸짓‧부채 등으로 극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것)과 아니리(일상적 어조로 말하듯 표현하는 것)에도 뛰어나 20여 년간 여러 창극 무대에서 주역을 도맡았다. 이외에도 전북 전주시에 국악 전수관을 개관하는 등 후학 양성을 위해 꾸준히 힘을 쏟아왔다. 김영자 명창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 카네기홀과 링컨센터 페스티벌,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등 해외 유수의 공연장과 축제에서도 완창 무대를 선보이며 전 세계에 판소리의 아름다움을 알려왔고, 국악 발전과 전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가 됐다. 이번 공연은 김 명창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국립극장에서 선보이는 두 번째 완창 무대로, 정광수제 ‘수궁가’를 들려준다. 판소리 ‘수궁가’는 병든 용왕을 위해 토끼 간을 구하러 세상에 나온 자라가 토끼를 용궁으로 유인했으나, 토끼가 꾀를 부려 세상으로 살아나온다는 내용이다. 토끼가 재치를 발휘해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재담과 소리로 들으며 삶의 지혜를 깨닫기에 제격인 작품이다. 등장인물의 언변 대결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노래하는 부분 등 아기자기한 대목이 많아 듣는 즐거움이 있다. 그중에서도 정광수제 ‘수궁가’는 동편제의 시조인 송흥록으로부터 송광록-송우룡-유성준-정광수로 전승된 소리다. 음악성과 문학적인 소양을 모두 겸비한 정광수 명창이 유성준 명창으로부터 전해 받은 ‘수궁가’ 사설을 다듬었다. 격식 있고 유려한 사설 표현이 돋보이며, 힘 있는 통성과 우조 성음을 바탕으로 하는 동편제의 특징이 잘 나타는 동시에 서편제의 다양한 기교까지 더해져 있다. 완창판소리 10월 공연은 1987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전수교육조교가 된 김영자 명창의 소리로 정광수제 ‘수궁가’의 진수를 감상할 귀한 기회다. 김 명창은 특유의 힘찬 목청과 실한 성음, 명료한 발음으로 다양한 동물 캐릭터 이야기와 약(藥)에 대한 용어 등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는 ‘수궁가’를 누구보다 재미있게 들려줄 예정이다. 김영자 명창은 "완창 무대를 100여 회 넘게 섰지만 완창 무대는 아직도 긴장된다”라며 "일흔이 넘은 나이라 걱정도 앞서지만, 오랜만에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는 만큼 좋은 소리를 들려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이수자 이태백과 국립민속국악원 단원 강길원이 함께 고수로 나서며, 해설과 사회는 송지원 음악인문연구소장이 맡아 작품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국립극장 <완창판소리>는 1984년 시작된 이래 당대 최고의 명창들이 올랐던 꿈의 무대이자, 판소리 한바탕 전체를 감상하며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최장수 완창 무대다. 39년 동안 공연되며 소리꾼에게는 최고 권위의 판소리 무대를, 관객에게는 명창의 소리를 가깝게 접할 기회를 제공해왔다. 2023년에도 전통의 정체성을 지키며 소리 내공을 쌓고 있는 소리꾼이 매달 이 무대를 통해 소리의 멋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관객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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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9월이 / 나태주9월이지구의 북반구 위에머물러 있는 동안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너는내 가슴속에 들어와 익는다.9월이지구의 북반구 위에서서서히 물러가는 동안사과는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너는내 가슴속을 떠나야 한다. 추천인: 김길자(정선아리랑보존회장) 오늘은 대구아리랑제가 21돐을 맞는다. 20년 전 제1회부터 올해까지 매년 뜨거운 광복절날 대구아리랑제 무대에 섰다. 전국에서 온 아리랑꾼들이 대구에서 뜨겁게 아리랑을 불렀다. 나에게는 대구와 정선을 아리랑으로 잇게 해주었다. 이제는 별이 된 아리랑 명인 정은하 선생님이 그립고 그립다. 20년 동안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전국 아리랑의 리더, 정은하 선생! 오늘 무대 앞자리에서 아리랑을 들으러 오시겠지......대구아리랑!, 정은하!,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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