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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6)김산은 님 웨일즈에게 같은 곡조의 다른 곡명을 달아 세 편을 불러주었다. 앞 편에서 제시한 ‘아리랑’(Song of Ariran) ‘옥중가아리랑’(Prisoner's ballad of Ariran) ‘아리랑연가’(Love song of Ariran)이다. 적어도 1937년 이전 이렇게 시제(詩題)를 달리하여 아리랑을 재구성하여 부른 이, 특히 ‘옥중’을 쓸 수 있는 인물은 김산 밖에는 없다. 1932년 최영한(崔永翰)이 아리랑을 소재로 한 민요시의 부각을 말하며 "조선에서 조선 정조를 잘 표현한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민요일 것이다. 조선문학의 정화이며 조선 시가의 원류이다.”라는 민요론, 게다가 1930년대 신민요는 "시인 자신의 개성을 죽이고 민요의 정신에 입각하여 지은 노래”라는 1930년대 말 고종옥(高晶玉)의 신민요론을 뛰어 넘어 ‘시대의 노래’로 불리는 아리랑의 진면목을 보여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저의 아리랑론, 즉 김산의 아리랑 이식은 ‘저항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조선조말 조정의 무능함과 이에 더해진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한 철저한 저항인 것이다.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각인 시킨 「SONG of ARIRAN」 첫 면의 ‘아리랑’에서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오래된 전래민요‘라고 그 성격을 선명하게 제시했다. 여기에서의 망명과 투옥, 그리고 국가적 굴욕이란 1937년으로부터 300여년 전이니 조선조 말로부터 일제의 침략기(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 저항한 노래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저항은 탄압을 동반함으로 슬프고 비극적인 처지의 노래라고 했다. 책 첫머리에서부터 이러한 성격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이 애끓는 노래가 한국의 모든 감옥에서 메아리 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Every Korean prison echoes with these haunting notes, and no one dares deny a man's death-right to sing it at the end. The ‘Song of Ariran’ has come to symbolize the tragedy of Korea.) 그러나 비극에 머무른 노래가 아님도 분명히 했다. 저항의 그 끝에서 극적인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새로운 가사를 통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는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It is a song of death and not of life. But death is not defeat. Out of many deaths, victory may be born. There are those of us who would write another verse for this ancient "Song of Ariran.) 그래서 그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 극한 저항을 노래한 아리랑을 ‘위험한 노래’로 규정하여 ‘위험한 사상’만큼이나 위험하다며 탄압하였다.(The Japanese are almost as afraid of ‘dangerous songs’ as of ‘dangerous thoughts’.) 김산의 이러한 저항정신은 단순한 정치학적 약소국으로서의 저항이 아니다. 당연히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이 자리하고 있어 문명사적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 "우리 한반도는 언제나 일본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혹은 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진출해 나가기 위한 디딤돌이 되어 왔다. 수백년 동안 한국은 북방문화의 중심지였는데, 오랑캐들이 중국을 침략하는 길에 언제나 한국에 침입하여 한국의 아름답고 개화한 도시와 농촌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다.”(Our little peninsula has always been a stepping stone from Japan to China and back again, and from Siberia to the south. She was for hundreds of years the center of culture in the north, and every barbarian invasion passed over on its way to China, devastating Korea's fair cities and fields of civilization.) 이러한 자긍심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중국의 항일전선의 동지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불러주며 인식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다. 조선의 민요 아리랑.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고 모두 울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 노래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I taught everyone to sing the song I loved best-the old Korean Song of Ariran, and we all wept after we had sung this. The Chinese liked it very much and said they would never forget it.) 특히 감옥의 일본 간수에게 까지도 아리랑을 인식시켰다. 1930년말 북경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에 넘겨져 유치장 머물던 날, "이곳에서 또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Here I climb again the hills of Ariran.)라고 벽에 쓰고 일본 간수가 조선인 공산당 혁명가임을 알고 ‘인터네셔날가’을 불러달라고 했을 때 대신 아리랑을 불러주었던 사실이 있다. 그 절망적인 순간의 대화에서조차 아리랑을 언급하였다. "오늘 같은 날에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게 뭔데요?" "조선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음과 패배의 노래입니다. 아리랑이지요." 나는 이 노래의 의미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황량한 갈색 벌판을 바라보고 광동코뮨과 해륙풍을 생각하면서 낮은 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대단히 감동하여서 이제까지 들은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칭송을 했다. "당신 부인도 이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대로 이 노래를 알고 있지요. 만일 부인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면 당신은 부인에게 새 옷을 사주고 친절히 대해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유치장에서의 일본 간수와의 아리랑 교류, 얼마나 극적인가. 아리랑만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는 아리랑의 대동성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어제의 ‘북방문화의 중심지 문명국 조선’이 오늘의 중국과 일본의 소용돌이에서 슬픈 노래이지만 언젠가는 상생의 노래로 부를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 「SONG of ARIRAN」 속의 아리랑은 저항성(抵抗性), 대동성(大同性), 상생성(相生性)을 지닌 노래인 것이다. 이는 곧 아리랑이 지닌 정신으로, 이 때문에 아리랑은 보편 가치를 지닌 노래이다. 바로 김산이 발견한 이 영롱한 ‘아리랑정신’은 그의 투철한 혁명성 못지않은 빛나는 유산인 것이다. 「SONG of ARIRAN」은 김산(金山/1905~1938)으로 표기된 장지학(張志鶴) 또는 장지락(張志樂), 가명 장지락·리철암·류정화·한국류·류허·한산으로 쓴 인물의 생애와 그가 지닌 혁명정신과 그가 지닌 아리랑 정신이 무엇인가를 기록한 값진 책이다. 주인공 김산은 사회주의 혁명가·항일독립투사·아나키스트·국제주의자·민족주의자라는 다양한 평가를 받는 문제적 인물이다.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공산혁명이란 민족해방운동의 한 이념적 무기로서 인식하는 과정과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 차원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독점적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실천 활동(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시 추구)에 목적을 갖게 되었음을 대변해주는 인물이다. 만주·북경·광동 지역에서 조선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중국공산당에 입당, 활동하였기에 늘 일제의 눈을 피해 활동해야 했다. 아시아의 제국주의적 광풍을 중국 공산당 혁명 성공의 결과로 조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일원이지만 결코 "작은 약소국 조선이 흘린 피가 결코 물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소금처럼(like salt in water)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견지하였다. 이에 의해 조국에서 일제를 물리치고 새로운 질서에서 평화롭게 동아시아 국가로 함 산다면 모든 종교와 이념이 지극히 도달해야 할 상생의 실천인 것이다. 이러함에서 3.1운동으로 조국을 떠나기 전부터 인식한 아리랑의 속성을 주목하여 담론화 하며 절실한 동지로 삼았다. 그 결과 아리랑에 대한 혁명적 해석, 곧 ‘혁명을 견인하는 극한적 극복의 노래’로 입론하여 함께하였다. 그리고 인간적 교류의 처지에서 불의에 저항하나 크게 하나 되어 대동하고, 끝내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상생의 질서를 실천하는 노래임을 「SONG of ARIRAN」 에서 외쳤다. 김산은 아리랑정신의 지혜로운 발현자이며, 동시에 아리랑정신의 투철한 실천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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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br> 다시 읽는 'Song of Ariran'(2)80년 전인 1941년 뉴욕 존데이 출판사에서 발행된 ‘Song of Arirang’은 1965년 일본에서 안도지로의 역으로 ‘アテテソ-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이어 1987년 마쓰데라 이오꼬 번역으로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11판까지 발행했다. 그리고 1972년 미국 파나 프레스에서 ‘Song of Arirang’재판이 발행되었다. 중국에서는 1987년 연변역사연구소에서 한국어판 '백의동포의 영상'으로 발간되었고, 중국어 번역본은 홍콩 난유애 출판사에서 ‘白衣同胞 影像’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서야 아리랑이란 표제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6년 보유판 '아리랑 2-김산 생애 보충'이 발행되었다. 김산에게는 자신의 격한 항일 투쟁적 삶이 적국 일본에게 먼저 전달된 셈이다. 역설인가 당연지사인가? 필자는 2007년에 음반 ‘김산아리랑’(신나라 뮤직) 제작에 참여했다. 이 때 ‘Song of Arirang’소재 김산 구술의 ‘아리랑’ 관련 기록을 꼼꼼히 분류한 바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1930년 초부터 중반에 이르는 기간의 정황에서 진술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첫 번째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1930년 11월 "나는 일본 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심리상태에 대한 압력을 최악의 방법으로 실험 받았다고 진술했다. 나에게 그 이상의 어떤 시련이 또 있었겠는가?”로부터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 형을 마치는 1934년 4월 전후가 된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김산은 영화 ‘아리랑’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동포사회에까지 상영되어 반향을 일으키는 정점인 1930년을 전후하여 체험하고 인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In Korea we have a folksong, a beautiful ancient song which was created out of the living heart of a suffering people. It is sad, as all deep-felt beauty is sad. It is tragic, as Korea has for so long been tragic. 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김산) 이 명징한 아리랑 인식의 결정체, 김산의 진술 중 하나이다. 과연, 이 시기 이 땅의 지식인 중 누가 ‘민요 아리랑’, ‘노래 아리랑’, ‘그 넘어의 아리랑’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다행히 여기에 꼽을 수 있는 이가 있긴 있다.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한 사람, 영화감독 나운규(羅雲奎.1902~1937)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견주기는 격이 떨어지지만 정치학자 고권삼(高權.1901~?)을 한 사람 더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다. 민족성이랄까 할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아리랑고개, 그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 이런 일관된 정신을 거기 담지(擔持)한 것이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이외다. (중략)영화가 문화사업의 하나라면 민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백 리 밖에서 아무리 기를 흔들어야 그 기가 민중의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언제나 우리는 민중보다 보(步)만 앞서서 기를 흔들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나운규) 나운규가 작고하기 1년 전인 1936년, 영화 '아리랑'의 감독 당시를 회고한 대목 중 일부이다. 영화 ‘아리랑’을 고개를 넘는 활기찬 패기를 넘는 남성상을 그리려 했지만 그런 역할을 했는가를 스스로 회의하고, 영화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중들에게 가파를 현실을 극복하자고 추동한 것이다. # "비폭력 비협동의 理想의 정치적 가치는 문화적으로 진보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조선의 ‘아이롱(아리랑)主義’는 근본적이요 적극적인데 더욱 가치가 있다. 이 <아이롱主義>는 정치사상에 있어 위대한 존재요 또 조선의 정치사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요소다.(중략) ‘아이롱主義’의 철학은 평화주의이다. 평화가 없고는 건설이 없고 건설이 없고는 문화가 없고 문화 없는 데는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평화의 使徒요 인류평화의 指導者이다.”(고권삼) 정치학자 고권삼이 1933년 일본 발행한 ‘近世朝鮮興亡史’로부터 1947년 서울에서 발행한 '朝鮮政治史'에 기술한 ‘아리랑主義’ 중 일부이다. 정치학자임으로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33년이란 시점의 ‘평화’와 ‘행복’은 천황 지배하의 순응에 따른 것임으로 친일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거기다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강사와 제주도에서 좌악계열 정치가로 활동(1949년 월북하여 생사불명) 하면서도 이 친일적 인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든 나운규는 영화론과 민중론을 투영해, 고권삼은 정치론을 적용해 아리랑의 성격을 재규정한 의미있는 인물들이다. 모두 풍전등화의 1910년대 초에 때어나 민족적 수난의 극점에 이르는 1930년대를 자신만의 길에 투신하여 굴곡진 삶을 산 이들이기에 아리랑을 남달리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산 이로 유독 진지하고 실천적인 아리랑론을 진술한 김산은 언제 아리랑을 체험하여 옹골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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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1)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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