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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아트센터 무대에 '국악, 명인대전'달서아트센터는 DSAC 아트 페스티벌 두 번째 무대로 우수 국악인들을 한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문 국악 축제 '제4회 달서국악 : 명인대전'을 오는 17일 오후 7시 30분 달서아트센터 청룡홀에서 개최한다. DSAC 아트 페스티벌은 음악, 연극, 오페라 등 순수예술부터 대중음악까지 타극장과 차별화된 콘텐츠로 다양한 장르의 전문 예술축제를 통해 지역민들에게 분야별 공연예술과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고자 기획된 프로젝트이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번 공연은 영동국립난계국악단 이현창 상임지휘자가 예술감독을 맡아 우리 전통음악의 진수를 즐길 수 있는 '명인대전'으로 꾸며진다. 국악 분야별 명인들을 초청해 민속음악에 뿌리를 둔 기악독주곡 '산조'와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판소리'를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공연은 김형섭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의 '최옥삼류 가야금산조'로 시작된다. '최옥삼류 가야금산조'는 최옥삼이 가야금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에게 배워 함동정월에 전한 가야금산조로 남도풍의 가락을 바탕으로 절제된 성음과 뚜렷한 문답 관계의 선율이 돋보이는 곡이다. 이어서 류근화 경북대 국악학과 교수가 '서용석류 대금산조'를 들려준다. '서용석류 대금산조'는 소리더늠 대금산조로 남도 음악을 근간으로 가락을 확장해 변청과 변조가 부드럽게 연결되고 자연스러운 선율 흐름이 인상적인 곡이다. 윤서경 전통창작음악집단 '4인 놀이' 대표는 '윤서경 아쟁산조'를 준비했다. 윤서경은 아버지가 완성한 '윤윤석류 아쟁산조'에 다양한 조 변화를 더해 자신만의 색으로 재구성했다. 이호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이 '서용석제 한세현류 피리산조'를 선보인다. 남도 시나위 가락을 바탕으로 피리산조 가락이 형성되어 농음의 폭이 크고, 꺾는 음의 간격을 넓게 두고 표현됐다. 마지막 무대는 소리꾼 김나니가 판소리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들려준다. 심봉사가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장면에서 슬픈 곡조로 시작해 점차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단으로 변화하며 대단원의 막을 장식한다. 고수로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인 윤재영과 연희앙상블 '비단' 대표 조한민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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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패랭이 쓰고 큰북 메고~얼쑤, 그리운 김법국 단장님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지난 3월 초 한 여성 국악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움과 애석함을 담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우리 김뻑국 선생님 가신지 2주기가 이번달 18일인데, 아무도 몰라주네요. 국악신문이 기념식 같은 것 못 하나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아마도 2022년 3월 21일 자 국악신문 부고기사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세상을 멈추게 하는 코로나 중이어서 유일하게 국악신문만 부고 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종로 3가 국악로 로터리 ‘김법국예술단’ 사무실은 최고 원로 송해 선생으로부터 10대 소리를 배우려는 아이까지 사랑방처럼 들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이 가신지 2년을 맞는 시기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2주기가 되는 3월 18일 몇몇 지인들과 이 소식을 나눴다. 모두 공감을 표했다. 그래서 금년에 국악신문이 앞장서서 기념사업을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더 많은 지인들의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든 기념 시상제도든 결성하자고 합의하였다. 4월 중순경 ‘아리랑연합회’가 나섰고,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나섰다. 이렇게 하여 국악신문을 포함하여 3자가 만났다. 그 결과 첫 회는 조직과 기금 마련 등이 어려우니 국악신문 주최의 기념상을 제정하여 첫 회 수상자를 배출하고, 내년에 기념사업과 제2회 시상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상명은 ’김법국국악상‘으로, 수상은 5월 중 공고하고 심사하여 5월 중 시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난 5월 1~4일까지 공고를 하고, 응모자 4인을 대상으로 12일 심사를 하고, 26일 시상식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기념상 일정을 잡고 나니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선생과 필자는 20여 년 전 CD 10장짜리 음반 ‘3代 정선아리랑’(신나라 레코드)을 내고, 이를 기념하여 ‘SBS토요무대 김순녀 정선아리랑’이란 발표회 겸 특집방송을 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음반의 주인공 김순녀 선생이 ‘김법국예술단’ 주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스승 이창배 선생의 탑시(塔詩) 액자를 중앙으로 하고, 역대 국악 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속에서 국악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곳이었다. 그 특유의 제스처를 써가며 배꼽잡게 하는 약장사 시절의 에피소드며, 가슴을 찡한 배고픈 시절 웃음 품앗이 ‘딴따라’ 시절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선생의 정확한 연대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선생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늘 만날 때마다 메모를 하고, 오랜 교유 관계의 지인이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이사의 얘기 대로라면 대략 이렇다. 50년대 이전, 60, 70년대 인천 생활, 80년대 이후 김법국예술단 운영, 2000년대 말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생의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 송해 선생의 증언으로는 1962년 KBS 성우로 잠시 일했는데, 효과음으로 뻐꾸기(암수 각각 우는 소리와 과부 뻐국이가 우는 소리)소리를 잘 내서 별명으로 부른 것이 ‘김뻑국’이라고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는 ‘김법국(金法國)’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은 일본이고 1937년생이다. 9살 때 원폭투하를 목격한 뒤 귀국,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우리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여 ‘왕따’를 당해 졸업도 못하고 서울로 왔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역에 내려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 씨를 만나 1년6개월 동안 머슴생활을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용인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말기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국악인들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여기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 씨에게 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장구와 피리를 어깨 너머 배우면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주로 경기도 일대를 돌며 ‘구루무’(크림) 등을 팔며 공연을 하였다. 이 시기 틈틈이 이창배 선생한테 경기민요를 배우고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무대도 섰다. 이렇게 유년의 50년 대는 험란한 시기지만 국악을 배우고, 국악인들을 만나 활동을 하게 된 시기이다. 1960~1970년대 초까지 인천 내동과 신포동의 신흥목공소에 주소를 두고 주로 인천지역의 인천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에서 소리와 만담을 소시민들에게 전했다. 동행은 만담 콤비 장소팔과 고춘자, 재담가 김영운과 배뱅이굿의 이은관, 탈춤의 양소운, 소리는 이창배 문하의 김옥심, 이은주, 최창남 등이었다. 선생은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쇼를 알리는 포스터를 벽에 부치러 인천 시내는 물론 주안 일대까지 다녔다. 그리고 표를 팔고 무대청소를 하고 출연까지 했다. 이때부터 패랭이 쓰고 몸집만 한 큰북을 앞으로 매고 만담과 소리와 코로 대금을 부는 등 장기를 발휘했다. 이 것이 인천시대이다. 1980~1970년대 중반에 들면서 ‘김뻑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시기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였다. 김 선생은 이은관 선생과 함께 종로 3가에 있는 요정으로 나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 부장이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는데, 김지미·서수남·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들 얌전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 선생은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청춘가 한 대목을 불러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이 부장은 "바로 이거야, 이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김법국 선생을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 원 이하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돈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바로 이 돈으로 ‘김뻑국예술단’을 차렸다. 그리고 묵계월·최창남·김덕수·임이조 등 이름있는 국악인들을 출연시킬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방부대와 노인단체 위문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김뻑국예술단’의 활동은 90년 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담의 명인’으로 불렸다. 이때 노인들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공연을 열면서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부 활동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 표창장(1998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4년), 국방부 장관상(1996년), 김대중 대통령 감사패(1998년) 등 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공연보다는 후배들의 무대를 마련해 주는데 힘썼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전수소’를 거의 무료로 운영하여 아리랑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기획사 업무도 하며 노년을 보냈다. 이 시기 특별히 주목되는 활동은 반재식 원장을 통해 ‘국악로’를 제정하게 한 일과 최창남 선생을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는데 역할을 해주셨고, 1996년 만담보존회를 꾸려 김용운 선생을 회장으로 모셔 전승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시기 두 번이나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완쾌후 건강을 되찾고 20여 년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2022년 3월 코로나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 마지막 제자로는 정선아리랑 명창 김순녀 여사가 있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홍익대 미대를 나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2주기를 보내며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아, 김법국 선생님. 내일 오후 쯤 종로3가 지나서 '국악의 거리'에 나가면, 그 텁텁한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에 패랭이 쓴 모습으로 마주칠 것 같다. 국악로 거리를 지나면 생각이 나는 분이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먼저 인사를 하시는 분이다. 한 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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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 담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명, 명'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 인생의 희로애락 같은 다양성을 담은 일곱 곡의 실내악 작품을 선보인다.세종문화회관은 오는 5월10일 체임버홀에서 서울시국악관현악단 특별연주회 2024 실내악 시리즈 I '명, 명'을 선보인다고 29일 밝혔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실내악 앙상블 SMTO와 객원 연주자 서수민(비올라), 이진희(어쿠스틱 기타), 김용하(타악)가 만들어내는 호흡이 기대되는 공연이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실내악 앙상블'SMTO 앙상블'은 지난해 '눈부신 파편', 'SMTO 앙상블 with 임현정' 공연을 통해 각각 전통음악을 재해석한 무대와 피아니스트 임현정과의 협연 무대를 선보였다. 해금 연주자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악장인 김애라가 음악감독을 맡아 낮에서 밤으로, 다시 밤에서 낮으로,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순환하며 '명(밝을 明)'과 '명(어두울 冥)'이 공존하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그린다.백병동(서울대 명예교수), 임준희(한예종 전통예술원장), 도널드 워맥(하와이대 교수), 박병오(제34회 대한민국작곡상 최우수상), 이경은(2023 KBS국악대상 작곡상)의 작품들과 김백찬(2019 KBS국악대상 작곡상)과 김상욱(2022~2024 서울돈화문국악당 실내악축제 예술감독)에게 위촉한 두 곡까지 일곱 곡의 실내악 작품들을 선보인다. 첫 곡은 '가야금, 비올라, 장구를 위한 Intertwined'로 도널드 워맥 하와이대 교수가 지은 곡이다. SMTO 앙상블의 가야금 파트 윤지현 단원과 추계예술대학교 비올라 교수 서수민, 음악그룹 '불세출' 동인 김용하의 장구 연주로 꾸며진다. 두 번째 곡 '해금 독주곡 冥2'는 원로 작곡가 백병동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동료 작곡가 고(故) 이성천을 그리며 작곡한 작품으로 해금 파트 정현지 단원과 김용하의 반주로 연주된다. 세 번째 곡 '피리독주곡 출렁'은 2023 KBS국악대상 작곡상을 받은 이경은의 곡으로, 피리 파트의 부수석 단원 성시영과 타악 파트 김태형 단원이 호흡을 맞춘다. 네 번째 곡은 대금의 연주 기법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대금 독주곡 2번 추성, 퇴성, 그리고 농음'으로 대금 파트의 김희정 단원과 김용하의 타악 반주로 연주된다. 제34회 대한민국작곡상 최우수상을 받은 작곡가 박병오의 곡이다. 다섯 번째 곡 '아쟁 독주를 위한 여백II-번짐'은 임준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장의 곡이며 아쟁 파트 수석 단원인 김상훈 수석의 대아쟁 독주로 선보인다. 이어 서울시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인 이재훈의 지휘와 수석 및 부수석 연주자들이 위촉곡 두 곡을 초연한다. 첫 번째 위촉곡은 김상욱 서울돈화문국악당 실내악축제 예술감독이 서울굿의 음악적 재료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작품 '덩기덩'이다. 이번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할 두 번째 위촉곡은 수도권 지하철 환승음악 '얼씨구야'를 작곡한 김백찬 작곡가의 '물'이다. 어떠한 물질 혹은 상황을 만나 변화하는 '물'처럼 악기, 음계, 박자를 만나 자유롭게 변화하는 '음(音)'을 상상하며 작곡한 '물' 연주에는 기타리스트 이진희가 참여해 국악기와 어쿠스틱 기타의 조화로운 앙상블을 보여줄 예정이다. 김상욱의 위촉곡 '덩기덩'은 서울굿의 음악적 재료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이다. 김백찬의 위촉곡 '물'은 어떠한 물질 혹은 상황을 만나 변화하는 '물'처럼 악기, 음계, 박자를 만나 자유롭게 변화하는 '음(音)'을 상상하며 만든 작품이다. 김애라 악장은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이번 무대를 통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이 국악 앙상블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눈과 귀, 마음으로 함께 느끼고, 국악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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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21>윤하림 해금풍류 II <산조> 2023년 윤하림 해금풍류 I <영산회상> 음반을 출반한 성남시립국악단 상임 단원 윤하림 해금 연주자의 2번째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1960년대에 발생한 류대봉, 임선문, 지영희, 한범수 명인의 산조가 수록되어 있다. ‘해금산조’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발생하였으며 1960년대는 공연과 음반계에서만 유통되던 산조가 교육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산조로서의 정형성과 틀을 완성한 시기로 해금산조의 확립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해금산조’를 만든 인물은 류대복(1907-1964), 임선문(1913-1987), 지영희(1909-1980), 한범수( 1911-1984)명인이 있으며 자신의 ‘해금산조’를 만들어낸 이들은 당대에 해금이라는 악기를 섭렵한 예인으로 악기 특수성의 파악을 뛰어넘어 산조라는 독자적 음악 양식으로 ‘해금산조’를 창조해 낸 예술가들이다. 4가지 ‘해금산조’ 모두 동시대에 발생한 산조들이지만 개인의 음악세계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자신만의 가락을 형성한 것으로 장단구성, 음역활용, 악조구성 등 음악적 특징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류대봉, 임선문 해금산조’는 CD 음반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산조이다. 1960년대의 ‘해금산조’ 4가지의 특징을 비교하며 감상한다면 4인 4색을 더욱 다채롭고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 이영섭의 창작음악 <바람으로부터> 영남대학교 음악학부 국악 전공 교수 이영섭 대금연주자의 창작음악 음반이다. 연주자의 4번째 음반으로 창작음악 음반으로는 첫 음반이다. 음반에는 연주자가 작곡한 다양한 구성의 7곡이 수록되어 있다. 연주자의 다양한 경험과 취향, 철학 등이 고스란히 담긴 고유한 색깔과 울림, 그리고 연주자 중심의 음악적 해석과 기법들을 작품에 녹여 내었다. 또한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연주자들과 깊은 교감은 아름다운 앙상블로 엮어져 마음에 바람을 새로이 일으키고 있다. 대금 독주곡 ‘호접지몽’ B플랫 대금으로 분다. 대금과 피아노 2중주 ‘Morning’, ‘Evening’은 D대금으로 연주하고 ‘A Hymn’은 단소와 피아노 2중주이다. 실내악 ‘나비의 꿈’에서는 B플랫 대금으로, ‘Wyndchase’(미국 렌트하우스의 이름)에서는 E플랫 대금, 마지막 ‘바람으로부터’ 곡에서는 소금을 연주한다. 곡 설명이 수록된 해설서는 자세하며, 대나무로부터 불어오는 소소한 바람이 우리들의 가슴에도 잠시나마 스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음반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문가영 <취타풍류> 국립남도국악원 문가영 피리 연주자의 비매품 USB 음반이다. 음반에는 21:20 초의 ‘취타풍류’가 대금 이관규, 해금 박은서, 장구 김형주의 사중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음원은 2023년 3월 18일 빛고을 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된 문가영 2번째 피리독주회 ‘취타’ 공연에서 ‘취타풍류’를 연주하였는데, 그 독주회가 끝나고 ‘취타풍류’ 녹음작업을 따로 하여 USB에 담은 것이다. ‘취타풍류’는 조선 시대 임금이나 고관의 행차, 군대 행진 때 사용된 음악이지만 지금은 감상용으로 연주되고 있다. 모음곡 형식으로 궁중의 ‘취타풍류’와 민간의 ‘취타풍류’가 그 구성이 조금 다르다. 이 음반에는 지영희 명인으로부터 전승되는 민간 취타풍류로 ‘취타-길군악-길군악 돌장-길타령-염불타령-삼현타령-별곡타령’ 7곡의 모음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설서는 아주 간략하고, 음반 형태는 CD처럼 제작되었다. 이 음반은 USB 음반으로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반 CD 케이스에 USB스테이션을 만들어 장착하고 있다. 처음 접하는 형태이다. USB 음반은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아 보관·정리하기가 난감한데 이렇게 제작하니 CD 장에 그대로 정리할 수가 있어 너무 좋다. 유성기음반 - 1925년 란란타령 <아릉렁고개뎡거댱짓고>-긴아리랑- 필자가 제작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주요 아리랑 유성기음반 복제 사업으로 14번째 음반이다. 음반 뒤에 부착한 제작자의 글을 인용한다. 1925년에, 일본축음기상회의 3번째 녹음(1923년)으로 <란란타령>(일츅죠션소리판 K-137A. B) 1장(2면)이 출반됩니다. 그중 A면 <란란타령 아릉렁고개뎡거댱짓고>(노래:유운선. 이유색)를 복제했습니다. 음반 라벨은 2종류가 보이나 복제라벨은 나중에 나온 것입니다. 이 음반에서 <란란타령>은 지금의 ‘긴아리랑’입니다. 유성기(SP) 음반은 유성기로 들어야 제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성기로 감상하기 위해 제작하였습니다. 본 음반은 영국(Vulcan Record Co.)에서 쪽반으로 제작하였습니다.(현재 양면 제작 불가) 음원은 제작자가 소유한 유성기 음반으로 제작하였습니다. 해설서의 가사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채록했습니다만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주요한 ‘아리랑’ 유성기 음반 복제사업도 막바지에 왔습니다. 끝까지 많은 성원 바랍니다. 유튜브 감상 : https://www.youtube.com/watch?v=5exBMS8yi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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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전설의 녹음스튜디오 ‘훈’에 대한 단상기미양(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誕’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설레고 벅차다. 생명의 탄생은 물론이거니와 원고 몇 장의 출력조차도 마찬가지다. 모두 전혀 다른 독립적인 원형의 탄생이며 형태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곳곳의 봄꽃들이 그제 모습들을 자랑하는 4월 마지막 금요일, 음원(音源)의 탄생 순간을 함께했다. "교대(서울교육대학) 후문에 있는 훈 스튜디오 사장님 아들이 근무하고 있는스튜디오”에서 만감이 오고 갔다. 만일 이렇게 부연(敷衍)한 상호가 아니었다면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나, 이 말에 불광동 골목을 돌고 돌아 찾아온 것이다. "훈 스튜디오 사장님”은 ‘이훈’, 그 아드님이 근무하는 고래사운드 스튜디오 실장은 ‘이유성’이다. 1992년 민주화 운동(?) 체류탄 연기 속에서 태어난 ‘아리랑CD 제1호’ 발매 이후 25종의 아리랑CD를 제작하면서 거의 대부분은 ‘훈’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믹싱(mixing) 같은 후반 작업도 했다. 코로나가 오기 직전 마지막 녹음이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 일부의 녹음이었다. 당시 교대 후문 훈스튜디오에 처음 오는 이들은 "와~!”라는 감탄사를 발한다. 대기실과 작업실과 녹음 부스 할 것 없이 곳곳에 80년 대부터 최고의 가수들 녹음장면 사진과 그들의 음반은 물론 스튜디오에 준 휘호(작곡가 김희갑 선생과 가수 장사익 선생)나 사인지(박범훈 총장 서태지와 아이들)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놀라움에 두리번거리면 "아리랑이시지요. 이번은 어는 지역 아리랑인가요?”라며 우리를 맞이 하시는 분. 나직한 체구의 전문가 포스의 시선, 그러나 온화한 눈매의 이훈 사장님이다. 이어 작업실로 안내하여 들어가면 다소 거만하기까지 한 믹싱 전문 남성 기사와 역시 씨크한 인상의 여성 바란스 전문 기사 두 분을 소개해 준다. 이것이 그동안 2, 3년마다 만나는 진풍경이다. 녹음은 주로 훈 사장님이 직접 맡고, 부수 마이크 세팅과 체킹 등은 기사들이 완성해 준다. 믹싱과 바란스 작업은 두 전문가가 다른 일정을 잡아 수행한다. 이분들은 선율, 박자, 강약 등 미세한 부분까지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수정, 보완을 통해 완결된 음원을 내놓는다. 이런 직업상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사장님은 소리꾼과 반주자들, 그리고 함께 온 이들에게까지 부담을 갖지 않게 하는데 최대한 편안하게 배려를 해주신다. 까다로웠던 다듬이 소리가 들어가는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 선생과 보존회원들) 음원 녹음 때도 특히 그랬다. 10명이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를 녹음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라 모두 긴강하고 있었는데, 훈 시장님은 하루종일 걸리는 오랜 기술적 시연을 반복하면서 원만하게 처리해 주었고, 오지에서 온 연로한 분들이 편하게 녹음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녹음실 부스에서 연행자와 각각의 악기 연주 기념사진을 찍는 번잡함도 장소 사용 등에 대해 배려를 해준다. 이러한 배려가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녹음 전문 스튜디오의 명성을 갖게 한 배경일 듯싶다. 바로 이런 스튜디오에서 탄생한 음원으로 정선·대구·밀양·문경·춘천·공주·경산 등 지역 아리랑 음반이 발매되었고, 이들은 나름의 완결성와 고유성을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이런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며 들어선 스튜디오에서 콘설을 마주하고 있는 이를 보고 직감했다. "훈스튜디오 사장님의 아들”, 빼어 닮았다. 키도 그만하다. 자태도 그 모습이다. 이내 반가움과 편안함이 왔다. 4년여 만에 훈 사장님을 만나는 듯했다. ‘훈’ 스튜디오 자체가 아니라 그 사장님을 기억했듯이 ‘고래 사운드’가 아닌 ‘훈 사장님의 아들’인 것이 그저 너무 반가웠던 것이다. 가끔씩 손에 닿은 아리랑음반 해설에 담긴 훈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들. 이를 볼 때마다 떠올린 사장님. 분명 하늘에서도 이번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 녹음 작업을 내려다 보고 계시는 듯하다. 스튜디오를 방문한 이재옥(한연연회) 회장님, ‘정선에 가면’을 녹음한 유망한 소리꾼 곽동현, 피리와 장구 반주를 해준 두 분은 사장님에게는 낯선 분들이다. 그러나 모두 아리랑을 지극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니 반가워 하실 듯하다. "훈 사장님, 그립습니다. 사장님은 우리나라 역사적 음반의 존재와 함께 영원하실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일은 누군가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 말석의 아리랑 음반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추모의 마음, ‘이혜솔, 인생의 소리길 왕십리아리랑’에 고이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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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폭 비단에 담긴 조선왕실의 잔치국립국악원은 주스페인한국문화원(원장 신재광)과 주오스트리아한국문화원(원장 임진홍)과 함께 ‘임인진연도병(壬寅進宴圖屛)’을 주제로 하는 한국음악특별전시 '조선왕실의 춤과 음악'을 4월 18일(목)과 4월 19일(금)에 개최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국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임인진연도병’,(서울특별시유형문화유산) 이외에도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와 같은 대표적인 국악기를 비롯하여 태평소, 자바라, 나발, 나각 등의 대취타 악기, 춘앵전 복식, 대취타 복식과 같은 전통공연 의상과 <대악후보>와 <악학궤범> 등의 고문헌도 함께 전시한다. 또한 도병에 담겨 있는 궁중무용의 실제 공연 영상을 송출해 전시 이해를 돕는다. ‘임인진연도병’은 1902년 4월 고종황제가 51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는 의식절차와 이를 기념하는 궁중잔치를 기록한 병풍으로,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1폭~5폭에는 기로소 입소 장면이, 6폭~9폭에는 진연(進宴, 궁중잔치)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궁중무용 춘앵전, 헌선도, 향령무, 쌍무고, 선유락 등과 궁중음악을 연주하는 악대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겨져 있어 조선 후기 궁중 잔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한국음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국악체험상자를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2023년 주헝가리, 주폴란드한국문화원에 국악체험상자를 기증한 것에 이어 올해는 주스페인, 주오스트리아한국문화원에 국악체험상자를 기증했다. 국악체험상자는 전통풍류음악의 국악기 편성을 체험하는 <나만의 풍류>, 국악기의 형태과 소리를 살펴볼 수 있는 <한국의 악기>, 그리고 전통공연을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한국의 음악과 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 개막식에는 궁중무용 춘앵전과 피리독주 공연이 펼쳐져, 전시와 국악에 대한 관람객의 이해를 도왔다. 개막식을 찾은 많은 관람객들은 화려한 궁중무용 춘앵전의 춤사위와 복식,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인 아리랑의 선율을 함께 부르며 큰 호응을 보냈다. 국립국악원 김명석 국악연구실장은 "국립국악원은 작년 폴란드, 헝가리에 이어 올해 스페인, 오스트리아에 국악 유물 전시와 함께 국악체험상자를 보급하여 K-culture 확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하반기에도 벨기에, 스웨덴문화원까지 한국음악특별 전시를 진행할 계획으로,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춤과 음악을 널리 알리는데 이바지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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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 연주가 최태영이 해석하는 ‘시나위’오는 25일 오후 7시 30분에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제2회 최태영 해금 독주회 – 최태영의 해금 ‘선율’'이 개최된다. 해금 연주가 최태영이 지난 2019년 진행한 첫 번째 독주회 ‘해금선율’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독주회다. 현재 민속 음악 전문 연주단체인 이음회의 동인으로, 오랜 시간 KBS 국악한마당의 전속 연주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태영은 MBC 전주대사습 장덕화 민속 반주단으로도 소속되어 전주대사습(대회)의 역사와 품격을 함께 지켜오고 있다. 2021년 제46회 난계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연주로 대상(대통령상)을 수상, 그 실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4호 삼현육각 이수자로 경기 민속음악의 올곧은 계승과 올바른 전승을 위한 행보를 펼침과 더불어 경북대, 용인대, 한양대 등에 출강하며 후학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최태영이 준비한 이번 공연은 ‘선’이 가진 아름다움을 다루고 있다. 전통 기와지붕과 한복 등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적인 ‘선’의 매력, 전통악기를 다루는 연주자로서 그는 한국 전통음악의 중요한 미학으로 ‘선’을 꼽았다. 긴밀한 호흡과 섬세한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지는 선의 형태와 흐름, 즉 ‘선율’의 완성을 위해 연주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이번 공연에서는 ‘시나위’를 주제로 한 다양한 모습의 해금 ‘선율’을 준비하였다. 순간의 감각들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시나위’는 연주자 본인의 성향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분야로, 즉흥성과 완성도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연주자에게 많은 경험과 다양한 음악적 지식을 요구한다. 최태영은 시나위를 두고, "산조 연주가 이미 완성된 형식의 그림을 잘 그려내는 작업이라면, 시나위는 그 순간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자유롭게 그려내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번에 그려낼 ‘시나위’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지영희, 김영재 두 명인의 해금 시나위 가락을 통해 명인들이 추구한 ‘선의 아름다움’을 되짚어 봄과 동시에 그들의 선율 안에 내재 된 음악적 경험과 지식을 탐구해보고, 최태영의 해금선율을 중심으로 그의 시선과 생각이 담긴 시나위를 선보이고자 한다. 첫 번째 프로그램 '지영희 해금 시나위'는 해금과 피리의 명인이자, 경기지역 장단의 대가인 지영희 명인의 해금 시나위로 1968년 명인이 녹음한 음원을 토대로 피리 시나위와의 접목을 통해 음악적으로 풍성함을 느낄 수 있도록 재구성해 보았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김영재 해금 시나위'는 지영희 명인의 제자이자, 해금과 거문고에 능한 김영재 명인의 해금 시나위로, 명인의 ‘국악인생 50주년 기념음반’에 수록된 연주로 그의 예술적 결실이 담겨있는 가락이다. 보편적으로 연주되는 산조의 청(KEY)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조성과 운지법을 활용하여 마치 해금으로 소리를 하듯 자연스러운 흐름이 인상적이며 해금의 다양한 음색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해금 시나위를 위한 ‘선율’'은 현재의 무대화된 시나위의 틀에서 조금 결을 달리하여 해금을 중심을 아쟁과 구음이 잘 어우러지도록 구성한 시나위로, 남도적인 맛을 한껏 살려낸 해금선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해금이 가진 선율이 돋보일 수 있도록 악기의 구성은 최소화하였고, 이를 위해 최태영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지음(知音) 김선호(장구), 황민왕(구음, 장구), 조성재(아쟁, 징), 장수호(피리, 타악)가 함께 무대를 채우며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고, 평론가 윤중강의 사회로 공연에 품격을 더할 예정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선’을 그리며 그 선들이 가진 다양한 미학을 해금을 통해 음악에 담아내고 싶다는 최태영. 주최측은 "두 줄의 현을 긋는 동안 그려내는 음악의 흐름, '최태영의 해금 ‘선율’'. 이번 무대는 해금 연주가 최태영이 그동안 성실하게 묵묵히 쌓아온 음악의 궤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티켓은 전석 2만원으로 인터파크티켓을 통해 예매 가능하며, 주관사인 아트스퀘어 위아(0507-1354-2149)를 통한 전화 예약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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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 '서울스테이지 2024' 4월 공연 개최서울문화재단이 선보이는 고품격 예술 콘서트 '서울스테이지 2024' 4월 공연이 오는 23일, 24일 양 일간 낮 12시(정오)에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와 청년예술청에서 열린다. 2022년부터 시민의 일상 가까이에서 고품격 예술 콘서트를 제공해 온 ‘서울스테이지11’을 서울문화재단 창립 20주년을 맞아 확대 개편한 사업이다. ‘서울스테이지11’은 지난 2년간 재단 11개 문화예술공간에서 130회 이상의 공연을 개최, 약 600명의 예술가가 1만 5천여 명의 시민들과 만난 바 있다. 지난 3월 대학로센터와 노들섬에서 열린 <서울스테이지 2024> 올 시즌 개막 공연에는 소리꾼 고영열과 바리톤 이승민, 인디 뮤지션 권순관, 서사무엘이 참여해 700명 이상의 시민을 만났다. 4월 공연은 완연한 봄 날씨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가곡과 전통음악이 만나 선보이는 컬래버레이션(협업) 공연과, 클래식 음악가들이 함께하는 하모니카 공연으로 준비했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종로구 동숭동, 23일 화요일 낮 12시)에서는 소프라노 이해원이 ‘화음花音, 흐드러지다’를 주제로 절정을 향해 가는 봄날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수놓는다. 이해원은 국립오페라단, 국립합창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등 국내 유수의 예술단과 협연하며 최근 주목받는 신예 성악가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김명현(피아노), 이지영(가야금), 송현수(해금), 이준섭(피리ㆍ생황), 최균(편곡)과 함께 우리나라의 유명 가곡들을 국악의 어법으로 풀어낸, 서양의 작곡기법과 동양의 연주가 만난 특별한 협동 무대를 선보인다.▲ 청년예술청(서대문구 충정로3가, 24일 수요일 낮 12시)에서는 하모니시스트 박종성이 조영훈(피아노), 천상혁(기타), 박건우(첼로)와 함께 클래식으로 재해석된 대중음악부터 정통클래식까지 아우르는 ‘하모니카 불어오는, 봄’을 선보인다. 박종성은 지난해‘서울스테이지11’연희문화창작촌에서 진행된 낭독 공연(북콘서트)에 참여하여 관객의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다양한 클래식 연주자와 협연하는 하모니카 연주가 한층 더 기대를 모은다. 이와 더불어 <서울스테이지 2024>의 상설 프로그램으로 운영 중인 ‘피아노 서울’의 시민 이벤트를 함께 진행한다. ‘피아노 서울’은 시민의 일상에서 예술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거리 피아노를 서울시내 6곳(대학로센터, 노들섬, 명동예술극장, 반포한강공원, 마로니에공원, 홍대 레드로드 등)에 설치해 운영 중이다. 시민 이벤트는 오는 19일(금)까지 거리 피아노가 추가로 설치되길 바라는 추천 장소를 <서울스테이지 2024> 공식 인스타그램(@seoul_stage)에 접속해 설문을 작성하고 제출하면 되며, 참여한 시민 중 추첨을 통해 소정의 상품을 제공한다. 모든 공연은 무료이며, 자세한 공연 소식과 예매 정보는 서울문화재단 누리집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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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 III ‘한국의 숨결’[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지난 3월 29일,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 III ‘한국의 숨결’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펼쳐졌다. 이날 공연에서는 국내 합창음악의 선두 주자인 국립합창단과 함께 우리 전통의 정서를 담은 한국적 색채의 ‘시조 칸타타’와 장르 간 경계를 허문 현대적 색채의 ‘천년의 노래, REBIRTH’ 두 곡이 선보여졌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박상후 지휘로, 국립국악관현악단 72명과 국립합창단 54명, 소프라노, 테너, 정가 가객 등 130여 명이 무대를 가득 채워 웅장한 합창을 들려주었다. 1부에서는 이영조 작곡의 ‘시조 칸타타’를 소프라노 이유라, 테너 신상근, 정가 하윤주의 협연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칸타타(cantata)는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다’(cantare)에서 유래한 용어로, 17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기악 반주에 독창·중창·합창이 어우러진 성악곡이다. ‘시조’는 문학이자 음악의 한 갈래로, 조선 시대 유행한 시조에는 당시의 시대적인 정서와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두 장르가 결합한 ‘시조 칸타타’는 이영조가 새롭게 만든 장르로,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태어난 두 성악 장르가 조화를 이루어 각각 고유의 어법을 지닌다. 이영조 작곡가는 "한국 전통음악이라는 우리만의 진솔한 맛을 서양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악곡 형식의 그릇으로 담아낸 곡”이라고 밝혔는데, 그 말처럼 전통적이면서도 서구적인 매력이 함께 존재하는 무대였다. ‘시조 칸타타’는 ‘자연’, ‘사랑’, ‘효’ 세 갈래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무대를 꽉 채운 국립국악관현악단과 국립합창단의 웅장하고 화려한 합창과 합주로 무대가 시작됐다.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균형 있게 나뉜 성부가 자아내는 온전하고 편안한 화성 진행 안에 노래와 연주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관현악 연주는 전통 음악 어법이나 음계가 다양하게 활용되기보다는 서양 음악적 스케일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빠르고 화려한 패시지로 연주되기도 하고, 서정적인 화성 진행이 다양하게 활용되기도 했다. 소프라노의 고음과 대금의 청소리가 함께 연주해 질러낸 부분은 국악기와 합창의 어울림에 대해 고민한 작곡가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음악은 자연 안에 거하라는 주제를 가지고 경외감이 드는 웅장함을 자아냈고, 이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다룬 곡이 솔리스트들의 노래로 불렸다. ‘봄’은 웅장하면서도 힘 있는 3박으로, 한국 가곡 느낌이 나는 합창과 연주로 진행되었다. 중간중간 계면조의 꺾는음을 사용하는 등 전통 어법이 녹아든 한국적 색채가 묻어났고, 합창단의 노래는 레퀴엠(Requiem)이 연상되며 엄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어 해금과 아쟁, 스트링의 장난스런 활놀음으로 분위기가 밝게 전환되며 소프라노 이유라의 솔로가 얹혔다. 그는 ‘지지배배’ 등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경쾌하고 빠른 패시지로 노래해 성악의 매력을 선보였다. 대금과 소금은 마치 플루트와 피콜로의 음색을 따라 하는 듯한 표현으로 연주했고, 오페라 마술피리 중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이중창이 떠오르며 유쾌하면서도 밝은 봄의 따스함이 그려졌다. ‘여름’은 느리고 애절한 느낌 가운데 테너 신상근의 아련한 음색으로 시작됐다. 이 곡은 소리북이 곡을 이끌어가며 장단으로 박을 잡아간 것이 인상적이었다. 느린 시조를 서양 성악으로 노래하는데, 그 위에 소리북 특유의 채편 소리가 얹히니 신선하고 새로운 판소리를 듣는 듯했다. 이어 연주된 첫 번째 ‘가을’은 피리의 서정적이고 전통적인 독주로 시작하여 부드럽고 평온하게 흘러갔고, 그 위에 가객 하윤주가 ‘월정명’으로 시작하는 가사를 얹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정가 특유의 표현이 묻어나며 전통적인 느낌을 물씬 자아냈는데, 관현악 또한 흔들고 꺾어내며 힘 있는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바로 이어진 두 번째 ‘가을’은 합창단의 남성들이 유니즌(Unison, 몇 개의 악기 혹은 오케스트라 전체가 같은 음 혹은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는 일)으로 앞서 불렸던 ‘월정명’의 가사를 받아 노래했다. 그들이 불러내는 선율은 정가의 표현을 그대로 흉내 내 꺾고, 흘리고, 시김새를 활용하여 전통적인 색채를 표현하였다. 서양 음악적인 화성 진행이 사용되고 각 성부마다의 매력을 다르게 주어 노래하니 마치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 것처럼 엄숙하고 신성한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 그 선율 진행은 전통 가곡다웠기에 더욱 묘하고 매력적이었다. 지조 있고 절개 있는 대나무를 표현하듯 웅장하고 화려하던 ‘겨울’은 영화음악 같기도, 현대음악 같기도 했다. 오묘하고 독특한 화성 진행은 어디로 튈지 모를 느낌을 주었고, 반음계와 다양한 텐션(Tension, 기본 화성 위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비화성음을 쌓는 것)을 활용함으로써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두 번째 파트 ‘사랑’은 테너 독창자가 부채를 들고 노래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랑을 비유 대상으로 표현한 이 곡은 춘향가 중 사랑가가 연상되었는데, 테너 음색으로 판소리처럼 노래하니 더욱 색다르고 특이했다. 서양음악적인 음악 진행과 전통 음악 어법의 조화야말로 한국적 칸타타의 가장 큰 매력임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효’의 첫 번째 곡 ‘하늘 땅’은 세 명의 솔리스트(소프라노, 테너, 정가 가객)가 함께 주고받으며 노래했다. ‘효’를 주제로 한 우리 시조 안에서 서로 다른 음악적 표현과 음색이 한데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마지막 곡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셨으니’에서는 부모를 그리고 공경하는 마음이 합창으로 깊이 드러나, ‘효’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를 예술적이고 평온하게 표현하였다. 2부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자 석학인 이어령 선생이 조감해 온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가사와 음악으로 담아낸 ‘천년의 노래, REBIRTH’를 만날 수 있었다. 2021년 ‘천년의 노래, REBIRTH’에서 위촉 초연된 작품으로, 시대의 지성이었던 이어령 선생의 한국 문화론이 담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인의 신화’, ‘뿌리를 찾는 노래’, ‘한국인 이야기’ 등에서 발췌한 내용이 노랫말로 엮여있다. 앞서 1부에서 연주된 ‘시조 칸타타’가 고전적이고 전통적이었다면, ‘REBIRTH’는 조금 더 대중적인 표현이 가미된 느낌이었다. 우효원 작곡가는 이어령 선생의 많은 저서 속에 담긴 아름다운 우리 민족의 이야기와 깊은 성찰의 언어를 총 5개의 악장에 담아냈다. 편종과 오션드럼(Ocean Drum), 목탁, 정종 등의 특수 타악기가 자아내는 고요하고 평온한 분위기 속에 거문고를 시작으로 악기들이 점점 들어오며 발전됐다. 하나의 동일한 리듬 형태의 리프를 반복시키며 커진 음악은 평화로운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이 그려지는 듯했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전통적이고 평온하게 그려냈다. ‘흙, 바람, 눈물’과 ‘MEMENTO MORI’(죽음을 생각하라)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흙, 바람, 눈물’에서 합창단이 가사의 내용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내는 다이내믹은 곡의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예를 들어 ‘악운’이나 ‘가난’ 같은 부정적 단어는 강렬하고 세게 질러내다가도, 내 땅이라 다짐한다는 긍정적인 가사는 간절하면서도 서정적으로 불러냈다. 감정적인 노래와 연주는 마치 뮤지컬이나 오페라 같은 하나의 극을 보는 듯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어령 선생이 자주 강조했던 ‘MEMENTO MORI’는 존 노의 테너 독창으로 함께했다. 깔끔하고 완성도 높은 다이내믹이 인상적이던 그의 음색은 죽음의 본질과 두려움을 노래하며 모두에게 다양한 생각을 안겨주었다. 성대한 합창으로 희망을 노래한 ‘노래여, 천년의 노래여’는 우리나라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던 이어령 선생의 마음이 가사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득한 추억을 그리는 듯 고요한 소아쟁의 음색과 대중적이고 단정한 코드 진행, 풍성한 연주와 음악적 빌드업에 마음이 차올랐다. 음악의 절정에 이르러 타악기 연주자들이 사물놀이를 연상시키는 합주를 하며 우리 민족의 흥을 깨워냈고, 대금의 서정적인 아리랑 선율로 이어지며 우리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의 선율로 구성된 ‘환희의 아리랑, REBIRTH’가 연주되었다. 4중창 성악가들이 합세하여 다 함께 부르는 아리랑이 무대를 감쌌다. 각 성부의 조화가 새로 편곡된 아리랑 선율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노래했고, 모두가 흥겹게 부르는 ‘판’을 만들어냈다. 한국인의 한과 흥을 물씬 느낄 수 있던 무대였다. ‘시조 칸타타’는 ‘자연’과 ‘사랑’, ‘효’를 주제로 합창과 독창, 국악관현악이 어우러지게 구성되었다. ‘천년의 노래, REBIRTH’는 한민족의 삶, 한과 흥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이 두 무대는 과거의 선조들로부터 현재의 우리, 미래의 세대가 살아갈 이 땅에서의 모든 감정과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아리랑 부를 때 너와 나 되네, 쓰리랑 부를 때 우리가 되네’라는 가사처럼, 함께 살아왔고 함께 살아갈 이 땅의 우리가 더욱 지켜나가고 그려나갈 것에 대해, 그리고 국악관현악과 서양 합창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보여준 ‘함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 정서가 살아 숨 쉬는 동시에 서양 고전 형식이 조화롭게 그려나간 이번 무대처럼, 배려하고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갈 우리의 삶과 예술을 더욱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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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생 60여년, 한상일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한상일(1955~)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는 국악에 입문한 지 올해로 60여 년을 맞는다. 때 맞춰 지난 1월 25일 서울문화투데이 신문에서 선정하는 제15회 문화대상에서 국악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을 대형화하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보급에 큰 기여를 해왔으니 만큼 수상은 당연해 보인다. 한 감독을 3월 30일 오전 창덕궁 근처에서 만났다. 창덕궁의 건너편에 있었던 옛 국악학교 터와 창극 연출가 허규(1934~2000) 선생이 운영하던 북촌창우극장에 대한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한 감독이 배우고 공연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밴 공간들이었다. 한감독의 음악 인생은 아버지 한범수(1911~1984) 선생에게서 비롯됐다. 해금과 대금 연주에서 ‘한범수류’를 만든 장인이셨다. Q. ‘한범수류’는 어떤 특색을 가졌나요? A. "진양은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가락을 짰고, 중모리에는 바리에이션을 넣었어요. 대개 산조는 판소리 어법을 많이 차용하는데 선친은 판소리 어법을 배제한 채 기악을 판소리의 아류가 아닌 개성을 갖춘 독자적 영역으로 만들었죠. 독립곡 형태의 양식을 갖는 잘 짜인 산조였어요.” 한 감독은 출생지인 충남 부여에서 옮겨와 서울서 살던 9살 무렵부터 선친에게서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적(소금)에 입술을 갖다 대고 ‘빈 병 불 듯이’ 소리를 내는 법부터 배웠다. 맨 처음 부른 곡은 아리랑이었다. 유일하게 알던 곡이었던 까닭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들어보시더니 ‘재능이 있다’ 느끼셨는지 ‘한번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본격적인 교육은 배문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전문 과정이니 만큼 선친은 곡의 음악적 성격과 그에 합당한 표현법에 관한 이론을 먼저 설명하신 후에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론 먼저 기능 나중’식 교육법이었다. 산조곡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12주기와 24주기 식 기승전결법을 배웠다. 기자는 연주가 스토리를 가진 채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버지의 도제식 교육으로 소금과 대금을 사사한 후에 서울국악예고와 추계예술대학에 진학해 피리를 전공했다. 왼손잡이여서 대금 연주는 접었다. 다른 연주자들과 대금 잡는 방향이 거꾸로여서 합주에 지장을 준 때문이었다. 이후 한상일은 작곡의 길에 들어서 중앙대 대학원 작곡 과정 석사를 거쳐 1987년 국립창극단 기악부 초대 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창극에 전주곡을 비롯, 간주곡과 엔딩곡 등을 작곡해 기악 연주를 가세한다. 소리꾼과 고수 2인의 무대인 판소리와 달리 창극에는 출연자가 많이 등장하고 다양한 연기가 표출되는 만큼 기악 연주의 역할이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 획기적 시도로 창극의 사이즈를 대형화시키는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필요성에 몰입한다. 서구의 오페라나 발레처럼 노래와 춤에 걸맞은 관현악단의 기악 연주가 더해짐으로써 창극 공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었다. 기왕에는 연주자들이 재량껏 즉흥연주로 채우던 부분을 악보에 근거한 연주로 체계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5년 1월 1일 마침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이 공로로 그는 2000년 국무총리 표창과 200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후 모교인 서울국악예술고(현 국립전통예술고)에서 5년간 교사 생활을 했고, 동국대학교에서 20여 년 간 한국음악을 가르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동국대에서 1년 정도 재직했을 때인 1999년 문화부에서 연락이 왔다. 초대 박범훈 단장에 이어 제2대 국립국악관현악단장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관을 창설시킨 주역이었으니 만큼 자연스러운 주문이었다. 동국대 강의가 걸림돌이 됐으나 ‘강의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겠다’는 한 교수의 다짐과 설득에 당시 송석구 동국대 총장이 흔쾌히 응해주면서 그는 겸직을 할 수 있었다. 한 단장 재임 시절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의 창의력 넘치는 작곡과 연주 지휘에 힘입어 창극, 무용 등의 장르와 동반 성장하며 "한국음악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맥’과 ‘강강술래’, ‘대(代)’ 등이 그의 분신들이다. 그는 특히 강강술래의 매력을 잊지 못한다. 진도 아낙들이 힘든 시집살이의 슬픔과 고된 노동의 괴로움을 노랫말과 군무로 씻어내는 놀이문화여서 전국화시켜 국민놀이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애와 한을 해학과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와 의지가 표출되는 놀이인 까닭이다. 강강술래의 다양한 버전을 작사작곡해 각계각층에 전파하고 싶어 한다. 기자 역시 대립과 갈등이 있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강강술래 놀이가 확산되면 모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강강술래의 아리랑화(化)’일 터이다. 한상일 감독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박사 코스였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때문이었다. Q. 왜 갑자기 동양철학을 공부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A."원래는 예악학(禮樂學)을 공부하고 싶어서였어요. 전통음악을 하다 보니 예악의 뿌리와 이론적 배경을 알고 싶었죠” 그러나 기대와 달리 유학대학원에서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 해석만 배웠지 예악에 관해서는 공부할 길이 없었다. 책도 교수진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는 결국 판소리가 어떻게 체계화됐는지의 과정을 연구해 그걸로 학위를 취득했다. 억지춘양으로 배운 것들이었지만, 경전 공부가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소리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하면서 세계인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개발하기 위해 전통악기를 개량하는 시도에 힘을 보탰던 것도 그런 영향이었다. 국악의 보전과 계승, 창작 지원 그리고 해외 진출을 돕는 ‘국악진흥법’이 지난해 6월 국회를 통과해 올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국악인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현역의 한상일 감독도 환영을 표한다. Q. ‘국악진흥법’은 국악인들의 오랜 숙원이지요. A.-"네, 국악인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거여서 기대가 큽니다. 우리 국악사에 선을 긋는 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국악의 날’을 제정해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길이 간직해 나갔으면, 하는 희망도 피력한다.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능할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Q.국악이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A."국민들로 하여금 국악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여건 조성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학교 졸업식 같은 행사에 반드시 ‘사미센’ 연주를 동반하고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에도 일본 음악을 삽입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어요” 한 감독은 대중매체가 좀 더 국악 프로그램 편성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큰 힘이 되는 만큼 정책 차원에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도 피력한다. 아울러 교육 과정에도 국악 악기 연주 코스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한때 베네수엘라의 불우 청소년 계도 프로그램이던 ‘엘 시스테마(El Systema)’를 도입해 청소년 국악기악단을 운영하던 중 지도 교수의 운영비 횡령 사건으로 중단 돼버린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 프로그램의 부활을 기다린다. 기자는 국악진흥책 시행을 계기로 세계로 뻗는 K-pop의 흐름에 K-국악도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우리 가요가 한국음악 전공자들의 가세로 탄력을 받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까닭이다. 세계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와 노래, 춤을 바탕으로 하는 킬러 콘텐츠가 나올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에 대한 관심도 깊다. 생애 첫 피리 연주곡이 아리랑이기도 했지만, 아리랑이 국악의 대중화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정신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Q.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A."우리 민족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아리랑에 의지해 살아왔습니다. 아리랑을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선교사이던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표현처럼 ‘한민족에게 쌀과 같은 필수불가결한 존재’ 혹은 고난 극복의 수단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한상일 감독은 1989년 무렵 (사)아리랑연합회 창립에 일조하며 임원을 맡으면서 아리랑의 보급과 대중화에 이바지해 왔다. 특히 발굴과 보존 및 아리랑의 가치 구현에 관심이 크다. 19세기부터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등지로 내몰린 동포들이 한국을 이루는 요소들 즉, 겨레의 글 한글과 겨레의 민요 아리랑에 의지해 고난의 세월을 견뎌 왔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들은 낯선 환경에서도 그곳 풍경을 담은 아리랑 노랫말을 우리말로 지어 불렀다. 그들에게 한글과 아리랑은 등대의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 앞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범민족 차원에서 북한에 존재하는 아리랑도 수집해 보존할 생각도 펴고 싶어 한다. 한 감독은 아리랑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음원을 제작하는 공헌을 했다. 대표 아리랑을 모아 일류 장인들과 연주했다. 올 6월 대규모의 아리랑축제를 상정해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행사가 성사 된다면 수 천 명의 전국 생활국악인들이 대규모 인간띠를 만들어 대합창을 이뤄내는 순간 대한민국은 용트림을 하며 에너지를 뿜어댈 것이다. 우리 속의 편협과 미움을 떨쳐내는 벅찬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 한상일 감독이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라고 말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가 여생의 계획으로 ‘아리랑 정신의 구현’을 버킷 리스트의 맨 윗부분에 올려놓고 있는 까닭이다. 한 감독은 자기에게도 그 기회가 닿기를 갈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아리랑을 가져가 30여곡의 ‘일본판 아리랑’을 작곡했다.”라는 일본 매체의 보도를 접하면서 문화는 창조의 힘만큼이나 보존능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된다. 단단히 움켜잡지 않으면 놓치게 마련이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 보존과 전승 노력에 절로 박수를 치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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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의 ‘왕의 음악’국립국악원과 창덕궁관리소는 오는 4월 3~6일 4회에 걸쳐 희정당 야간관람과 대조전 월대에서 국립국악원의 공연이 함께하는 ’오얏꽃등 밝힌 창덕궁의 밤‘(이하 창덕궁의 밤)을 운영한다. ‘창덕궁의 밤’은 평소 내부관람이 제한된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전각인 희정당의 야간관람과 함께 국립국악원의 품격 있는 공연을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공연은 조선 왕실의 역사를 담은 공간인 창덕궁 대조전에서 정악(正樂)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작품을 통해 낭만과 감동이 있는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사할 예정이다. 공연의 내용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난 세자인 ‘효명세자’가 남긴 시를 노래한 시조(時調)와 정재(呈才)를 포함한 구성으로 공간이 갖는 의미에 우리 음악의 멋을 더한 무대로 꾸몄다. 공연의 첫 무대는 효명세자가 남긴 ‘세자가 왕위에 올라 백성을 위해 애쓰겠다.’는 뜻을 담은 시조 ‘잠룡’을 선율에 담아 노래하고 모친 순원왕후의 40세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꾀꼬리의 자태를 무용화한 ‘춘앵전’을 선보인다. 이어서 넓은 음역대와 청울림이 주는 청아한 소리로 대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대금 독주곡 ‘청성자진한잎’을 연주한다. 마지막 무대는 ‘올바름이 만방에 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정만방지곡’ 중 ‘상령산’으로, 피리가 먼저 선율을 시작하고 여타 악기들이 한둘씩 더해가며 ‘표정만방지곡’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장중함으로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창덕궁 공연을 포함해 문화 공간을 활용한 다양한 국악 공연을 추진하고 있다. 궁, 서원 등 지역의 문화 공간에서 연간 40여 회 가량의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며, 이번 기회를 통해 국민 모두가 국악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국립국악원과 창덕궁관리소가 함께하는 ‘창덕궁의 밤’은 오는 4월 3일(수)부터 6일(토)까지 해설은 18시 30분, 18시 40분 두 차례 희정당에서, 공연은 19시 30분에 대조전에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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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남도국악원, 토요상설 ‘국악이 좋다’ 가무악 향연국립남도국악원은 오는 23일 토요일 오후 3시, 대극장 진악당(전남 진도)에서 2024 토요상설 ‘국악이 좋다’ 가·무·악 종합공연 '국악의 향연'을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다양한 봄꽃이 만개하는 봄날과 어울리는 곡들을 담아 구성하였다. ‘흩은 가락’이라는 의미의 기악독주곡 형식의 산조를 서용석 명인의 가락으로 엮어 연주하는 <산조합주>를 시작으로, 유비가 관우·장비와 함께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 찾아가는 내용을 담은 판소리 적벽가 중 <삼고초려> 대목, 남도잡가 중 유명한 온갖 새가 나오는 <새타령>, 피리독주곡 <상령산풀이>까지 선보인다. 이어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양손에 부채를 들고 여러 가지 꽃과 물결 모양을 만들며 추는 <부채춤>, 보는 이로 하여금 모두를 신명 나게 하는 <김오채류 선반 설장구>, 마지막으로 박범훈의 가야금 독주곡 <새산조> 연주 위에 펼치는 국립남도국악원 무용단 이임정 단원의 무용까지 감상할 수 있다. 공연은 무료이며, 공연 전후 진도읍사무소와 국악원, 오산초등학교(고군면) 거쳐 회동(신비의 바닷길)과 국악원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제공한다. 또한,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을 위해 11월까지 공연 스탬프 쿠폰 이벤트를 진행하여 참여한 관람객들에게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한다. 공연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국립남도국악원 누리집(https://jindo.gugak.go.kr), 또는 전화(061-540-4042, 장악과)로 안내받을 수 있다. 한편, 2004년 개원한 국립남도국악원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해, 앞으로도 더욱 다양한 공연과 교육, 체험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 국민의 문화쉼터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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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탄탄한 국악관현악: ‘작곡가 이강덕[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은 지난 7~8일 기획공연 ‘작곡가 시리즈 Ⅲ’을 선보였다. 작곡가 시리즈는 창작국악의 토대가 된 작곡가를 선정해 의미를 되새기는 무대로, 이번 공연은 창작국악 1세대, 작곡가 이강덕의 작품만으로 꾸며졌다. 이강덕은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이왕직아악부 아악수를 거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재직했다.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1962년 관현악 '새하늘'로 국립국악원 신국악 작곡 공모에 당선, 작곡가로 등단한 후 관현악, 협주곡, 중주곡 등 80여 편의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번 공연에서는 지금도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는 대표 관현악곡과 협주곡이 총 5곡 연주되었다. 7일에는 가야금 서은영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수석, 피리 진윤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해금 이동훈 전북대 교수가, 8일에는 초연 당시 협연자들이었던 가야금 이재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리 이종대 부산대 명예교수, 해금에 홍옥미 지영희류 해금산조 보존회장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 둘째 날이었던 8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는 많은 관객들이 자리했다. 무대를 열어낸 첫 곡 ‘송춘곡’은 ‘봄을 칭송한다’는 제목처럼 봄날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감각으로 그려냈다. 경쾌한 선율은 중간중간 반음계를 내어 특수한 느낌을 내기도 했는데, 마이너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단순하고 깔끔한 진행이 돋보였다. 이 곡은 또한 짧은 구로 이루어진 단일 주제를 가지고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양하게 변형 및 발전시켰다. 장단과 리듬에 변화를 주며 흥겨운 느낌을 내다보니 지루할 틈 없었고, 국악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음계와 선법을 활용한 진행은 한국적이고 다채로운 느낌을 주었다. 음악적인 구조 또한 탄탄했다. 관현악기들의 주고받는 부분이나, 서로 비워주고 채워주는 구간이 확실하여 관현악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어느 악기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균형 있게 비중을 둔 깔끔한 곡이었다. 본격적으로 협주곡이 시작되었다. 처음 독주자로 나선 해금 연주자 홍옥미 명인이 연주한 ‘해금협주곡 4번’에는 경기지방 무속 가락을 근간으로 만든 지영희류 해금산조의 특징이 담겨있었다. 관현악은, 진양부터 자진모리장단까지 산조 장단의 흐름에 따라 해금의 특수한 표현에 맞추어 풍성함을 만들어 내거나 해금을 받쳐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힘썼다. 홍옥미 명인의 해금 연주는 화려하거나 멋 내는 느낌보다는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고 깔끔한 성음이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농현과 선율, 과하지 않은 표현과 흥청대는 장단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특히 그가 연주하는 평우조(화평하고 평온한 조)는 발랄하면서도 우직했고, 마지막 푸는가락에 이르러 연주된 꺾거나 떨어내는 표현은 민속악적 색채가 짙게 묻어나며 명인의 오랜 공력이 돋보였다. 세 번째로 ‘메나리조 주제에 의한 피리 협주곡’이 연주되었다. 경기시나위 보존회장을 지니고 있는 명인 이종대의 피리 연주로 진행된 이 곡은 신명 나는 굿거리장단으로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떠오르는 민속적이고 밝은 선율이 돋보였으며, 시원하게 뻗어내며 연주하는 피리 선율이 매력적이었다. 이 곡은 강원도 메나리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으로 토속적인 민요적 요소가 강했고, 빠른 패시지로 진행되는 순차 진행이 많았다. 이강덕 명인은 간드러지고 여유 있는 호흡으로 물 흐르듯 연주하였고, 구성진 피리 농음과 흘러내려 떨어내는 메나리조의 선율적 특징을 잘 살려내어 연주해 냈다. 더불어 관현악 또한 안정적이고 깔끔한 연주로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강덕이 작곡한 협주곡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바로 가야금을 위한 협주곡이다. 이날 연주된 ‘가야금 협주곡 1번’은 가야금을 위한 협주곡으로는 제일 처음에 작곡된 곡이다. 또 독주 악기 혼자 기량을 발휘하는 카덴자(Cadenza)가 이 곡에서 처음으로 창작국악에 사용되었다. 둘째 날 무대에서는 이재숙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가야금 협연자로 함께했다. 이재숙 명인은 깊은 울림이 가득한 연주로 심금을 울렸고, 여유롭고 힘 있는 연주로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굿거리로 시작하여 4/4박자, 중모리, 굿거리, 카덴차, 동살풀이로 계속해서 바뀌는 장단 속에서, 가야금의 다양한 표현이나 변화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장단에 맞추어 연주하는 가야금 연주와 더불어 장구의 장단이 계속 반주로 함께 했는데, 황병기 가야금 연주곡이 연상되기도 하며 연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재숙 명인의 가야금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었다. 겉으로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듯 보이나, 그 안은 매우 깊고 단단했다. 무대는 ‘염불 주제에 의한 환상곡’으로 마무리되었다. 작곡가 이강덕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고인이 극락세계에서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뜻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모든 악기가 함께 짧은 주제 선율을 강하게 연주하며 곡이 시작되었다. 이 곡은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하며, 경쾌함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 안에 악기들이 번갈아 가며 질러내는 부분이 많이 등장했다. 이는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마음이 반영된 듯 느껴졌다. 곡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간중간 들리는 징 소리와 방울, 목탁 소리, 그리고 민속악적 색채가 짙은 장단과 선율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陁佛)’의 가사를 노래하는 육자염불이 연상되었다.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느린 무장단 안에 피리와 대금이 서로 번갈아 가며 독주 선율을 연주하였는데, 메나리조를 중심으로 연주된 선율에는 슬픔과 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기리는 작곡가의 마음이 묻어났으며, 깔끔하고 균형 있는 장단과 선율 진행은 자유롭고 탄탄했다. 이강덕은 음악과 전통에 관한 이해도가 높은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기승전결이 뚜렷했고, 완성도가 굉장히 높았다. 어느 하나의 악기에 치우치지 않고, 각 악기의 음색과 음높이를 잘 활용하여 풍성하고 탄탄한 음악적 구조를 만들어 냈다. 또 장단과 조, 악기의 특징을 잘 활용했으며, 단순한 선율적 리프(일정한 코드 진행을 반복하는 반복구)를 사용, 발전시켜 주제 테마로 만들어냈다. 그 테마를 반복하여서 들려줌으로써 관객들은 음악을 더욱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이번 공연을 통해 전통 악기가 지닌 본연의 소리와 조화를 느껴볼 수 있었다. 요즈음 새로 작곡되는 관현악은 서양 음악에서 온 코드 진행이나 화성법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하지만 이강덕의 음악은 화려하거나 서정적이기보다는, 악기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음색, ‘조’와 ‘장단’을 집중적으로 활용한 단순하고 깔끔한 진행을 선보였다. 창작국악 1세대 작곡가의 음악을 통해, ‘기본’과 ‘전통 본연의 소리’에 집중하며 국악 관현악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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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정의 서도소리 첫 번째 이야기지난 9일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재학 중인 최민정이 서도소리 첫 발표회를 마쳤다. 김지민의 사회로 서도소리 대표 곡인 관산융마, 수심가, 공명가, 등을 네 명의 반주자와 함께 했다. 장단에는 김영주, 대금에는 윤진우, 피리에는 고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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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립국악단 기획공연 젊은예인콘서트 ‘청연’전주시립국악단 기획공연 젊은예인콘서트 ‘청연’이 7일 오후 7시 30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펼쳐진다.ARKO한국창작음악제 작곡가로 세 차례나 선정되면서 이름을 알린 이정호 객원지휘자의 해석으로 만나는 이날 공연에는 김다희(가야금), 손세빈(판소리), 이서진(거문고), 임윤우(피리), 조성윤(해금) 등 차세대 국악 스타들이 나서 공연을 꾸민다. 첫막은 끝없는 중앙아시아의 모랫길을 걷고 달리던 사람들, 그리고 소리를 표현한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협주곡 푸른 사막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어 송익필, 신숙주, 김동연 등 조선 시대 문장가의 시조를 모티브로 한 토마스 오스본의 ‘해금협주곡 Verses’에 의해 낭송된다. 강솔잎 전주시립국악단 단원이 편곡한 ‘창과 관현악 심청가 중 심청이 선인 따라가는 대목이 대미를 장식한다. 섬세하면서도 시원스러운 피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피리협주곡 서용석제 한세현류 피리산조’가 관객의 마음을 위로한다. 맑은 빗소리를 통해 치유와 회복을 표현한‘거문고협주곡 청우’등이 차례로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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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완의 피리 열 번째, ‘숨과 쉼’을 나누다[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2월의 끝자락, 지난 27일 서울돈화문국악당이 2024 공동기획 프로젝트의 세 번째 공연으로 ‘박치완의 피리 열 번째, 숨과 쉼’을 선보였다. 박치완은 전통음악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넓은 연주 스펙트럼을 가진 피리 연주자로, 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지도단원으로 재직 중이다. 활발한 연주 활동을 통해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박치완의 이번 독주회에서는, 다채로운 피리 창작 음악 레퍼토리를 통해 피리의 고유한 소리를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은 20세기 초기의 창작음악 작품부터 근래에 작곡된 작품까지 총 5곡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곡으로 작곡가 이상규가 시인 신석정의 시 ‘청산백운도’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한 작품으로 알려진 ‘피리 독주곡 청산(靑山)’이 연주되었다. ‘청산(靑山)’의 곡 소개는 이렇다. ‘山은 급할 것이 없고, 바쁠 것도 없다. 山은 시기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山은 늘 넉넉히 그렇게 서 있다. 이러한 山의 모습을 피리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박치완은 담백하고 깔끔한 음색으로 곡을 연주 해 나갔다. 이 곡은 특히 ‘나니레’를 비롯한 다양한 정악 시김새를 활용하여 한국적인 색채가 짙은 우직함이 돋보였다. ‘청산(靑山)’은 정해진 장단의 틀은 없지만 자유로운 박 속에서 세 번 전조 되고, 원조로 돌아와 끝났다. 박치완은 속소리와 질러내는 소리를 넘나들며 뻗어내며 안정적이고 편안한 피리의 음색을 보여주었다. 급하지도, 바쁘지도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넉넉히 서 있는 산의 모습이 마음을 두껍게 채워주는, ‘숨과 쉼’이라는 무대의 제목과 잘 어우러지는 곡이었다. 두 번째로 작곡가 원일의 ‘간(間)’이 연주되었다. 곡이 연주되기 전, 박치완 연주자가 관객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가 영상에 띄워졌다. 메시지는 곡이 하나하나 끝날 때마다 반복되었다.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가 있는지 물으며 쉼을 통해 여유를 갖자는 그의 마음이 가득 담긴 내용이었다. ‘ 간(間)’은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로움이 특히 돋보이는 아름다운 곡이다. 진하고 센 색채와 연한 바람 소리가 조화를 이루고, 특히 옅은 속소리와 뻗어내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빠르게 연주되는 부분에서는 피리가 보여줄 수 있는 음색적인 매력이 도드라졌다. 가야금과 피리는 서로 다른 프레이즈를 연주하는 듯하면서도 하나로 얽혀 들어갔다. 가야금과 함께 연주되는 ‘간(間)’은 기존에 기타로 연주되던 원곡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는데, 공간감과 울림이 가득하던 원곡에 비해 마이크 없이 피리와 가야금 본연의 소리로 단조롭지만 깔끔하고 우직한 색다른 느낌을 선사해 주었다. 박치완 연주자는 고음을 뻗는 부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갈함과 벅찬 감정을 전해주며 덤덤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토마스 오스번(Thomas Osborn)의 ‘비상’은 끊이지 않는 긴 숨에서 오는 집중도가 강했다. 굵게 떨어내다가 사그라들고, 음을 흘러내리고 끌어올리는 기법이 다양하게 활용된 이 곡은, 아슬아슬하지만 아름다운 피리의 음색이 특히 돋보였다. 반음계와 장구의 혼합 박 리듬이 합치되며 서로의 공간을 채워나갔고, 정형화된 선법(mode)이 드러나지 않고 음 하나하나의 진행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같은 멜로디 리프를 계속 반복해서 들려주고, 그 주제에 살을 붙여 조금씩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작지만 확고한 ‘비상’을 나타냈다. 희망차기보다는 음울한 분위기의 진행과 점점 작아지는 끝맺음은 일반적으로 희망차고 긍정적인 ‘비상’과는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오히려 너무 낙관적이거나 밝게 날아오르기보다 낮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움직이는 한 사람의 ‘비상’을 표현하는 듯 해, 힘을 빼고 찬찬히 날아오를 수 있다는 용기가 마음에 따스하게 와닿았다. 작곡가 류형선의 ‘나무가 있는 언덕’이 네 번째로 연주되었다. 대중적이고 서정적인 선율과 피리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결을 마주할 수 있던 이 무대는 가야금과의 연주로 따스함과 편안함을 선보였다. 박치완은 다이나믹하고 현란한 기법보다는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연주에 치중하였다. 한 음 한 음을 소중히 여기며 음악을 책임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만큼 피리와 음악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지막 곡이 연주되기 전, 박치완 연주자가 직접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무대를 소개했다. 열 번째 독주회인 이번 무대에서 그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며 여유가 없는 본인을 돌아보며 관객들과 함께 여유, 그리고 쉼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했다고 전했다. 유쾌하면서 따스한 그의 말에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지막으로 그가 연주한 곡은 자작곡 ‘0.83_숨의 시작’이었다. 딸의 초음파 사진을 보고 그 신비로움에 벅차 만들었다는 이 음악은, 심장 박동 소리가 장구의 궁편 연주로 이어지며 자유롭고 여유로운 선율로 편안한 흥겨움을 전해주었다. 치열하고 분주한 일상에 듣는 그의 피리 소리는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피리의 두껍고 부드러운 음색을 듣고 있자면, 숨을 크게 내쉴 때 몸과 마음이 벅찬 공기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어느 순간 힘을 내기 어려운 때가 찾아온다. 하지만 나무를 바라보듯, 나의 자리에서 나의 시간으로 비상하듯, 쉼을 챙겨 피리 소리처럼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게 오늘의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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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리로 들려주는 남성창극 ‘살로메’지난 2월 2~4일,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희곡 ‘살로메’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남성창극 살로메’가 대학로예술극장에 올랐다. '남성창극 살로메'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남성 배우들만으로 꾸려진 창극이다. 김시화 연출의 창극 데뷔작으로,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인 이 공연은 예언자 요한을 사랑한 공주 살로메와 이를 둘러싼 헤로데 왕가의 뒤틀린 욕망을 그려냈다.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여성국극’이 유행한 적은 있어도, 기존 원작의 인물 구성을 전부 남성 배우로 바꿔 남성 소리꾼들이 여성 역할까지 모두 맡아 무대를 채워낸 남성 창극은 처음 시도되었기에 더욱 주목받은 작품이다. 인간의 광기와 집착으로 점철된 '남성창극 살로메'는 ‘귀토’,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의 창작 창극을 연출한 고선웅이 날카롭고 재치 있는 문장들로 각색했고, 정은혜가 이를 소리로 만들어 작창했다. 음악은 김현섭 작곡가가 맡았다. 김현섭에 의하면 '남성창극 살로메'는 "장르와 경계, 전통과 현대 그리고 무대와 청중의 벽을 어떻게 현시대의 걸 맞는 언어로 풀어내어 생명력 짙은 작품으로 완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통악기 피리, 생황, 태평소, 그리고 아쟁과 가야금, 전통 타악기를 비롯해 첼로와 피아노가 다양하게 어우러지게끔 했다. 이 작품에서는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쉬지 않고 등장했는데, 각 등장인물의 배역에 걸맞은 테마 음악이나 소리의 차별성에 따른 악기의 구분, 차이 등이 음악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무대가 열림과 동시에 괴기스러운 사운드가 귀를 울렸다. 아쟁과 피리가 얽혀 짧지만 강렬한 효과음을 만들어 냈고, 비극의 서막이 온몸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언제 그런 기괴한 소리를 냈냐는 듯이, 곧이어 힘 있으면서도 서정적인 악기의 조화로운 연주가 무대를 감쌌다. 이 작품의 주제곡이 연주되고, ‘빨간 달이 검은 우물 속에’라는 가사의 노래와 함께 극이 시작되었다. 이날 공연 무대에 오른 윤제원은 살로메의 광기를 온전히 분출시켜 그려냈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는 요한에게 집착하여 탐하는 살로메를 요염하게 그려내다가도 반대로 거친 변화를 주며 연기했다. 소유욕의 욕망에 사로잡힌 살로메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광기’ 그 자체였고, 어쩌면 인간 본연의 모습일 수 있는 그 원초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묘한 불편함과 기분 나쁜 동질감을 동시에 그려냈다. 원작의 또 다른 여성 캐릭터인 살로메의 어머니 여왕 헤로디아는 소리꾼 서의철이 맡았다. 서의철은 ‘하하하!’ 하고 우렁차게 웃는 웃음소리나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걸음걸이로 극 중간중간 웃음을 선사하며 무대의 분위기를 풀어 나가다가도, 질투에 휩싸이고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거나 과격한 연기를 선보이며 극의 긴장도를 더했다. 호위대장 나라보스를 연기한 정보권과 왕비의 시종 메나드 역의 김수인은 서로를 향한 어긋난 사랑과 탐욕으로 얽혀 있었다. 헤로디아는 메나드를, 메나드는 나라보스를, 나라보스는 살로메를, 살로메는 요한을 사랑하다 결국 모두가 파국을 맞게 된다. 나라보스의 죽음 이후 의붓딸인 살로메를 사랑하는 왕 헤로데 역을 맡은 유태평양은 살로메에게 춤을 춰 달라고 요구하고, 살로메는 그 대가로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한다. 요한을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어 끝내 요한을 죽인 살로메는 은쟁반 위에 놓인 그의 머리를 바라보며 입을 맞추다가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그런 살로메의 괴기한 모습은 집착과 광기가 가져오는 씁쓸함을 전하며 우리의 삶마저 돌아보게 했다. 몰아치는 극의 전개 속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소리에 더해, 그들의 연기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헤로데 왕 역을 맡은 유태평양의 연기가 돋보였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선대왕의 망령에 사로잡혀 두려워하면서도 욕망에 눈이 먼 미친 왕의 자극적인 모습을 자극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해 눈을 뗄 수 없는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 극은 남성 소리꾼들의 수준 높은 연기와 소리가 돋보임과 동시에 흔치 않은 음악적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각 악기는 그 악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매력을 물씬 드러냈는데, 첼로의 경우 서양 악기에 특화된 깊은 울림과 화성으로 소리를 풍성하게 채워주기도 하고, 하모닉스(Harmonics)를 활용해 괴기스러운 음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동시에 음을 흘러내리거나 전통 어법을 흉내 내며 한국적인 연출을 선보여 창극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첼로의 소리를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가야금과 아쟁은 등장인물들이 소리를 할 때 선율을 따라 연주하기도 하고, 장단 중 소리가 비는 구간을 타악기와 함께 채워 나가며 독특한 시각으로 음악을 만들어 냈다. 특히 아쟁은 첼로와 더불어 비슷한 사운드를 구현해 내다가도 과격하고 애절한 부분을 한이 서린 사운드로 연주해 내며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조성해 냈다. 각 악기는 독자적인 소리를 마음껏 드러내 보이다가도, 음을 분리하고 해체해 음향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 악기와 소리가 서로 배려하며 균형을 맞추어 나가 하나의 온전한 극을 만들어 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고선웅 작가는 인터뷰에서 과도하게 서사를 주어야만 이 이야기가 원작보다 더 선명한 교훈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전했다. 그만큼 그가 풀어낸 직관적인 대사와 가사는 극을 이해하기 쉽게 도와주었는데, 어렵지 않게 풀어낸 이야기의 전개와 서사는 인간의 집착과 광기로 인한 비극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전해 주었다. 극의 끝에 다다라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극단적인 분위기 속 등장인물들이 뒤틀린 욕망 때문에 모두 죽음을 맞이한 후, 감정 없이 명령대로만 움직이던 신하 나아만만이 홀로 남아 이들의 어리석음을 애석해한다. 그는 지금을 묵묵히 살아가는데 가치를 두자는 어찌 보면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말로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갖고야 말겠다는 광기 어린 마음이 불러온 집착, 그리고 파국. 이러한 욕망은 비단 무대의 인물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뒤틀린 욕망이 비극이 되어 빨간 달이 뜨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나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마음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종종 본인의 그런 절규 어린 감정을 마주하고 좌절한다. 뒤틀린 본성을 인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그 감정을 이겨내기 또한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기형적 욕망의 끝에는 결국 허망함과 공허함만이 남을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기억하자. 우리는 모두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인 동시에, 결국 그 본성을 이겨내고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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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18>유지숙 노래 최경만 피리 <관산융마.수심가> 유지숙 명창은 2015년 프랑스의 Ocora 레이블로 Yu Ji-suk Traditional Songs <North Korea> 음반을 출반하고 이번에 서도소리의 백미인 관상융마와 수심가를, 유지숙 노래 최경만 피리 <관상융마.수심가>라는 음반명으로 2장의 음반을 출반하였다. CD 1, ‘관산융마’에는 7곡이 수록되어 있다. 전통민요 중에서 유일하게 칠언절구의 한시를 가사로 부르는 노래인데, 민요보다는 전통가곡의 음계와 선율 분위기와 창법을 담고 있어 서도소리 명창들도 어렵게 느끼는 노래이다. CD 2, ‘수심가’에는 8곡이 수록되어 있다. 서도소리는 ‘수심가조(토라)’라고 부르듯이 수심가는 서도소리 음계의 기본이 되는 노래이다. 노래는 긴수심가-엮음수심가-긴수심가로 구성되어 있다. 반주는 모두 최경만 피리 명인의 독반주로 서도소리의 아름다움을 잘 받쳐주고 있다. 유지숙 명창은 경기 강화 출신으로 오복녀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0호 서도소리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해설서는 김해숙 교수의 글로 아주 자세하며 영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서도소리 음반이다. 피리만의 간결한 반주로 서도소리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일청을 권해 본다. 정영만 <넋 노래> 정영만 무인은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0대를 이어 온 무가에서 태어난 11대의 장남이다. 어릴 때부터 가무악 속에서 자랐고 8살 때 굿판에서 ‘피리부는 새끼무당’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굿판을 떠나 선반공, 기관장, 택시기사로 전전하다 1987년 가문의 굿이 국가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으로 지정되자 굿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야 그의 음악을 2장의 음반으로 만나게 되었다. CD 1에는 ‘신청’(굿과 음악을 가르쳤던 장소)이라는 이름으로 ‘불림’, ‘길군악’, ‘선왕풀이’, ‘수부시나위’, ‘영남대풍류’, 5곡이 수록되어 있고, CD 2에는 ‘산수계’(통영 신청을 중심으로 모인 세습무계 모임)라는 이름으로 ‘굿산조’, ‘가래소리’, ‘구음시나위’, ‘망향’, ‘상여소리’, 5곡이 수록되어 있다. ‘굿산조’는 처음으로 듣는 이색적인 산조이다. ‘구음시나위’는 박병천 명인의 구음시나위가 생각난다. 정영만 무인은 국가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 보유자이다. 음반으로는 첫 음반으로 해설서에는 음반과 곡설명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많은 제자들과 함께한 음반이다. 무속음악에 관심있는 분에게는 필청의 음반이다. <진민진 아쟁산조>-박대성류- 진민진 아쟁연주자의 3번째 음반이다. 음반에는 박대성류 아쟁산조 ‘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실려 있다. 연주자는 박대성 명인의 제자로 부산대학교에서 한국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부산국악원 연주단 부수석단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018년 진민진아쟁창작곡집 <바다 숲을 걷다>, 2021년에는 2집 <아쟁, 정가와 마주 닿다>를 출반한 후 처음 산조음반을 출반 한 것이다. 음반에 수록한 박대성류 아쟁산조의 박대성 명인은 한일섭 명인의 제자로 명확한 계보로 전승되고 있으며, 스승의 가락을 토대로 명인의 예술성과 음악성을 담아 산조 가락을 완성하였다. 주로 즉흥으로 가락을 짜서 연주하다가 가락이 정형화되는 시류에 맞추어 본인의 가락을 정리하여 유파를 형성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가락구성과 운궁법에 대한 다양한 시도와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 어법을 가진 산조를 형성하였다. 음반에는 ‘진양-중모리-중중모라-자진모리’, 4악장의 ‘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수록되어 있다. 장구는 부산대학교 박환영 명예교수가 맡았다. 연주자는 섬세하고 차분한 연주로 박대성류 아쟁산조를 잘 표현하고 있다. 해설서는 보통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있다. 필자는 2005년에 박대성 명인을 위해 정창관국악녹음집(8) <박대성의 국악세계> 음반을 제작한바가 있다. 그 때의 산조 녹음장면을 회상하면서 들을 수 있어 행복했다. 이다은 <잔별의 이야기> 이다은 소리꾼의 첫 번째 EP음반이다. EP(Extended Play)음반이란 원래 7인치 45회전 음반을 지칭하고 있는데, 지금은 수록곡(시간)이 적은 LP음반이나 CD음반을 EP음반으로 부ᅟᅳᆯ고 있다. 음반에는 3곡의 노래곡과 같은 기악곡이 수록(모두 6곡)되어 있다. 타이틀곡 '그래스긍가'는 수궁가 중 좌우나졸 대목을 모티브로 토끼가 별주부에게 속아 바닷속으로 간 이야기를 현대의 정서에 맞게 풀어낸 곡이다. 레트로와 국악을 결합하여 새로운 장르와의 융합을 도전한 곡으로, 직설적인 표현으로 현대의 각박한 삶에 믿음이 사라진 것을 비판한다. ‘뱃노래’는 쉽게 꺾이지 않은 인간의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영원의 숨결‘은 신의 관점에서 본 세상과 인간의 탄생과 소멸을 몽환적인 대중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통곡조에 현대적인 변용을 토대로 인간의 삶을 다채롭게 담아내고 있다. 피아노, 베이스, 전자기타, 드럼이 반주로 참여하고 있다. 한 페이지의 해설서에는, 이 음반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담아낸 인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앨범으로, 각자의 삶에서 꿈을 이루고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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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숙 선생, 팬 제자 후원자들과 정담어린 ‘축원 덕담’"서도소리의 특징과 매력은 진중하고 무거움에서 나오는 기백과 품격입니다. 관상융마와 수심가가 그 대표적인 소린데, 깊은 요성은 애뜻하고 아련한 그리움을 안겨 줍니다.” 듣고 또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유지숙선생의 ‘서도소리론’ 진수를 함께했다. 피리소리에 받쳐 관산융마와 수심가의 섬세한 시김새와 요성을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닐리리타령’에서는 서도 구음을 전해주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일소당(佾韶堂) 모티브대로 강화의 소녀가 국악인으로 걸은 걸음들을 토크 쇼로 보여 주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전승교육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유지숙의 이면을 잔잔한 웃음으로 전해주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걸은 걸음거리로 앞으로 더 멀리 갈듯하다. 피리, 장고, 바라, 무징 4인조 바라지들과 펼친 축원덕담으로 팬과 제자들과 후원자들의 1년 신수를 빌어 무대를 여몄다. "추강이~대-길하리로다” 입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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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 명창과 피리 명인 최경만, 내달 필리핀에서 'K-국악' 진수 펼친다이춘희 명창과 피리 명인 최경만이 내달 필리핀에서 'K-국악'의 진수와 우수성을 알린다.국악 공연기획사 부지화예술단은 이춘희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을 비롯해 피리 연주자 최경만, 모던타악그룹 '표선아소나타' 등이 필리핀 대표 축제의 하나인 '파낙벵가 페스티벌'(2월 1~29일)에서 초청공연을 펼치게 됐다고 17일 밝혔다. 국악인 김명순, 유명숙, 박영애 등이 함께한다. 이번 공연은 모던국악을 추구하는 부지화예술단이 12년 전 기획한 공연과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계기가 됐다. "대중 연예인들이 전통 국악과 민요를 배워 해외 공연을 성공적으로 펼치고 있다"는 내용의 당시 방송을 본 필리핀 바기오 시장과 정해철 한인회장의 초청으로 이번 공연이 성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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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오복녀 명창 호흡 그대로, 음반 '관산융마 ․ 수심가' 발매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민요나 잡가를 일컫는 '서도소리'의 유지숙(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전승교육사, 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명창이 서도소리의 정수로 꼽히는 '관산융마․수심가' 음반을 발매했다. 서도소리는 남도소리와 경기민요와 다른 음계를 사용하고 음을 떨면서 내는 가창 기법 또한 독특한 특징이 있어, 서도소리를 내려면 '대동강 물을 먹어보고 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부르기 어려운 소리로 꼽힌다. 서도소리의 정수를 담은 대표 악곡은 '관산융마'와 '수심가'로, '관산융마'는 총 44구로 된 신광수(1713~1775)의 한시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 악양루에 올라 관산의 전쟁을 탄식해 북쪽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를 창으로 부르는 유일한 서도시창으로 고도의 기교를 요한다. 슬프고 근심하는 마음이 가득한 노래 '수심가'는 서도소리의 섬세한 감정과 호흡을 담은 서도민요의 대표곡이다. 유지숙 명창은 '관산융마'와 '수심가'를 각각 1장의 음반에 담아 자신의 사재를 털어 총 3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이번 음반을 완성했다. 유 명창은 서도소리의 대표 악곡으로 꼽히는 두 곡을 올곧게 음반으로 남겨 우리 소리를 지키고 전승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번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그 배경을 밝혔다. 노래하기 어려워 주로 4구까지 부르던 '관산융마', 이번 음반에 총 14구까지 담아 스승 오복녀 명창의 호흡 그대로… 50여 년 만에 '관산융마' 전 구절 녹음 시작해 총 44구로 되어있는 '관산융마'는 창법의 난이도와 곡의 분량 등을 고려해 대개 공연과 음반에서는 4구까지 부르는 편이다. 현전하는 음반 중 관산융마의 44구를 모두 수록한 음반은 1972년 오복녀, 김정연, 김수영, 박윤봉 명창의 LP음반 '서도소리대전집'이 유일하다. 유지숙 명창은 이번 음반의 14구 녹음을 시작으로 남은 30구의 관산융마도 음반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또한 유 명창은 스승인 오복녀 명창의 호흡을 그대로 담아내기 위해 이전 음반에 기록된 스승의 노래 시간에 맞춰 한 곡 한 곡 음반에 담아 원곡의 미를 최대한 살렸다. 유 명창은 "비슷한 선율에 다른 가사를 이어 부른 것이 아니라, 각 가사 내용에 맞춰 섬세한 음악적 표현을 하는데 집중했다.”고 밝히며 "육상의 단거리 경기와 장거리 경기가 다르듯 오랜 그리움이 가득한 실향민의 심정을 긴 호흡으로 담아내고자 힘썼다.”고 언급했다. 북에서도 원곡의 멋 살려 부르기 어려운 '수심가' 그리움과 애틋함 담겨진 노랫말의 정서를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 보통 수심가는 수심가를 부른 뒤 박자와 음계의 변화를 통해 엮음 수심가로 이어 부르는 데, 간혹 이어지는 가사 내용이 서로 조화롭지 못한 경우가 있어 이번 음반에서 수심가와 엮음 수심가의 유사한 노랫말 정서를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세월의 아쉬움, 젊은 날의 회한, 임에 대한 그리움 등 수심가의 주요 가사를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해 수심가 본연의 멋을 살렸다. "한탄하는 마음을 담은 수심가는 인민의 감정을 북돋는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재 북에서는 '수심가' 본연의 정서를 담아 부르기가 어렵다”고 언급한 유 명창은 "노랫말의 정서에 맞춘 수심가의 재구성을 통해 수심가의 정서가 짙게 드러나도록 음반에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민속악 피리의 거장이자 배우자 최경만 명인의 피리 반주로 서도소리의 감성 살리고 섬세한 음악적 해석과 입체적 감상 도와 이번 음반의 유일한 기악 반주자로 참여한 최경만 명인은 민속음악계의 대부로 꼽힐 만큼 탁월한 연주와 표현으로 이 시대 최고의 피리 연주자로 꼽힌다. 유 명창의 배우자이기도 한 최경만 명인은 누구보다도 유 명창의 소리를 잘 이해해 이번 음반에서 서도소리의 매력을 한 층 높였다. '관산융마'에서는 정악에서 사용하는 세피리를 활용하면서도 두터운 성음과 묵직한 저음을 담고, 선율 또한 민요적 감성으로 풀어내 노래의 중심을 지켰다. '수심가' 연주에는 향피리를 활용해 노래와 어울리는 해석을 더하였다. 대개 두 곡의 선율 악기 반주는 단소나 무반주로 했었지만 피리 반주로 녹음한 것은 이번이 최초다. 최 명인은 두 곡의 연주에 '간주 겸 전주' 같은 선율을 추가해 하나의 긴 노래처럼 구성해 곡 전반의 정서를 최대한 살렸다. 소리 인생 본래의 숙명이자 과업을 시작하는 심정, 서도소리 올곧게 담아낼 작업 이어갈 것 유지숙 명창은 이번 음반에 대해 "서도소리 인생길에 접어들면서 언젠가는 완수해야 할 큰 과업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했다”고 언급하며 "이제 그 큰 과업을 위한 첫 발을 떼었고, 앞으로도 남은 소리 인생에도 서도소리를 올곧게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가 안팎으로 서도소리의 멋을 알리고 명맥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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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통공연예술 창작인큐베이팅 사업 '청춘만발' 공모전국립정동극장(대표이사 정성숙)은 2024 청년 전통공연예술 창작인큐베이팅 사업 <청춘만발> 참가작품 공모 접수를 오는 12월 21일(목)부터 2024년 1월 21일(일)까지 한 달간 진행한다. <청춘만발>은 올해 ‘전통음악’ 중심에서 ‘전통공연예술’ 전 분야로 지원 범위를 확장해 음악, 무용, 연희 등 다양한 전통예술 분야 청년 예술인의 창작 과정을 들여다보았다. 8년 차를 맞이하는 2024년 <청춘만발>은 ‘창작지원금 확대’에도 나선다. 기존, 최고의 아티스트 500만 원, 우수 아티스트 300만 원을 지원한 데에서 올해 최고의 아티스트에 1,000만 원, 우수 아티스트에 500만 원, 인기 아티스트에게 100만 원을 각각 수여한다. 또한 체계적 창작 인큐베이팅을 위해 공모 시기를 개편하고 여유 있는 기간을 확보해 완성도 높은 최고의 개인 무대가 가능하도록 준비한다. <청춘만발> 참가는 열린 공모로 진행되며, 50분 이내 공연이 가능한 19세~34세 이하 청년 전통공연예술인(개인 또는 팀)이면 지원할 수 있다. 전통예술 장르의 순수 창작, 재구성, 장르 간 협업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으로 신청이 가능하다. 서류와 영상 심사를 통해 1차 선정팀을 선발하며, 2024년 8월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1시간가량의 개인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1차 선정된 10팀에는 동일한 창작지원금이 제공되며, 무대를 위한 제작 · 연출 및 국립정동극장의 기획 및 홍보마케팅, 무대 기술 등의 모든 시스템을 지원한다. 최종 선발은 경연 형태의 2차 개별 발표회를 통해 영예의 대상을 선정한다. 국립정동극장 정성숙 대표이사는 "<청춘만발>의 지원율과 창작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통예술분야 청년 창작인들의 열정과 도전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으로 <청춘만발>이 젊은 예술인들의 창작 동력과 되었으면 한다.”며 사업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2023 올해의 최고 아티스트로는 경기민요 소리꾼 ‘윤세연’이 선정되었으며, 우수 아티스트에는 영산재를 모티브로 의식 무용을 창작 화한 한국무용 듀오 ‘더블링(Doubling)’, 피리를 중심으로 국악기의 소리와 앰비언스를 탐구하는 솔로 아티스트 ‘shi-ne(정신혜)’가 각각 선정되었다. 수상자는 극장 및 타 기관 연계 사업을 통한 공연 기회도 적극적으로 마련해 지속적인 무대 기회를 지원해 나갈 예정이다. 올해는 ‘정동야행’ 축제와 연계한 국립정동극장 문화프로그램 <정동다향>에 참여 아티스트의 무대를 선보였으며, 2023 선정자 윤세연, 더블링(Doubling), shi-ne(정신혜)가 <웰컴 대학로 페스티벌>과 <렛츠종로 – 국악로 페스타>를 통해 다양한 무대 경험을 쌓았다. 특히 2023 올해의 최고 아티스트 윤세연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출연하는 2024년 국립정동극장 <신년음악회>에 함께한다. 2024 <청춘만발>의 참가 접수는 1월 21일까지 진행된다. 국립정동극장 홈페이지에서 공모신청서를 다운 받아 작성 후 이메일 접수하면 된다. (문의 국립정동극장 문화사업팀 02-751-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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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관현악의 확장, ‘소리의 색채’-“빼어난 감각”12월 7일,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2023 믹스드 오케스트라 Ⅱ - 소리의 색채’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믹스드 오케스트라 시리즈는 우리 음악의 확장성에 주목하며 새로운 실험을 지속하는 프로그램으로, 2022년 9월 ‘충돌과 조화’, 2023년 9월 ‘존재 그리고 연결’ 이라는 부제의 공연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빼어난 감각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박승원, 한웅원, 황호준 작곡가들에게 위촉 초연작을 받아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으며, 모듈러신스(모듈러 신디사이저의 약칭. 각각의 모듈로 이루어진 전자음악 악기)를 활용한 실험적 전자음악으로 더 채도 높은 파격을 시도했다. 모듈러신스 연주는 모듈라서울(Modular Seoul)이 맡아 관현악단과 함께 모든 곡을 연주하여 더욱 풍성하고 밀도 높은 무대를 선보였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따뜻한 겨울, 푸른빛의 분위기 있는 조명이 은은하게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믹스드 오케스트라의 ‘mixed’라는 단어처럼 새롭고 다양한 시도가 어떻게 묻어날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관람하였다. 오프닝 곡으로 ‘수제천’이 연주되었다. 모듈라서울의 멤버 임용주가 구성한 음악으로, 시공의 강산을 넘어 다다른 그곳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암전 가운데 전자 사운드가 공간을 메워 나가기 시작했고, 관현악단의 수제천이 연주되었다. 웅장한 행진곡의 울림 위에는 모듈라서울이 만들어 내는 다채로운 사운드가 가미되었다. 특히 베이스 음역대를 풍성하게 채워주며 수제천의 단아한 웅장함을 배로 느껴볼 수 있었다. 번갈아가며 편종과 편경을 비추거나 음악의 진행에 맞추어 조명을 다양하게 활용한 연출도 흥미로웠다. 박승원이 작곡한 위촉 초연작 ‘네 개의 판(Four Fields)’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무대가 시작되었다. 이 곡은 반복되는 시간의 선상에서 이완과 긴장, 수렴과 확산이라는 키워드로 국악 관현악과 전자음악의 조화를 구현한 작품이다. 낮은 베이스 음역대의 신스 사운드가 무대를 감쌌고, 그 위에 해금과 아쟁, 가야금의 반복적인 효과음이 얹어지며 고요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피리의 슬픈 듯 구성진 선율이 연주되고, 마이너한 분위기로 흘러가던 음악은 독특한 전자 사운드와 악기의 고유한 음색이 어우러지다가, 신스 베이스가 점점 쿵쿵거리며 빠른 리듬으로 점철되어 클럽이나 라운지 음악이 연상되기도 했다. 또 국악기 소리에 과한 딜레이(delay)를 걸거나 음색을 비틀어 내 다양하게 활용하기도 하며 이질적이고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운드의 변화에 따라 조명과 미디어 아트도 함께 변화했고, 어떻게 진행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무대의 흐름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국악 관현악과 전자 사운드가 각각 따로 노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국악 관현악의 연주에 패드(Pad) 성 배경으로만 활용되던 모듈러 신스는 관현악 연주가 빠질 땐 급작스럽게 클럽 음악 같은 장르로 전환하여 국악 관현악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또 마이너한 분위기를 이끌어 가다 말고 갑자기 서정적인 선율을 연주한다거나, 곡을 급작스레 마무리하여 자연스럽지 못했던 흐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음으로 프렐류드, 고희안 트리오, 서영도 일렉트릭 앙상블 등 국내 최고 재즈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는 한웅원의 위촉 초연작 ‘드럼과 국악 관현악을 위한 소릿바람’이 연주되었다. 작곡가가 직접 드럼 연주로 참여하며 국악 관현악 역사상 최초의 드럼 협주곡으로 기록된 이 무대는, 작곡가와 협연자가 동일하기에 그 누구보다 음악을 가장 잘 해석할 것이라고 느껴져 더욱 기대되었다. 하이햇(Hi-Hat)과 심벌(Cymbal)로 한국 전통 장단 리듬꼴을 연주하며 시작한 무대는 독특한 음계 구성의 묘한 선율을 연주하는 관현악과 함께 힘 있게 달려 나갔다. 웅장하고 강렬한 연주는 드럼이 아닌 것 같은 느낌도 받았는데, 이는 장단을 중심으로 연주했기 때문이다. 드럼으로 자주 듣던 서양음악 스타일의 연주가 아닌 새롭게 재해석된 드럼 연주는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음향적으로는 몽환적이고 축축한 사운드의 모듈러 신스 연주가 가미되거나, 관현악기의 음색을 비틀어 변화를 주기도 했고, 마림바와 태평소의 과한 농음을 통해 효과음적인 악기 사운드를 구현해 내기도 했다. 관현악과 드럼의 등장 타이밍이나 연주 효과적 분배가 적절했고, 유려한 드럼의 연주 또한 훌륭했다. 특히 드럼의 탐(Tom) 사운드를 활용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한웅원은 장단의 강세를 탐(Tom) 악기의 고저로 표현하였다. 장단과 드럼 악기를 확실하게 이해했기에 나올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이 시대의 새로운 국악 관현악, 드럼 협주곡이 아니었을까. 제1부의 마지막 무대는 황호준의 위촉 초연작 ‘디스토피아’가 장식했다. 불협화음 음향 효과를 극대화한 이 곡은, 인간의 욕망, 극단적 소비를 만들어낸 자본주의 시스템에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관객들이 디스토피아로 계속 끌려 들어가며 살 것인지 자문하도록 만들었다. 반음계와 5박 리듬의 진행으로 오묘하면서도 특이하게 시작된 음악은 어딘가 불편하고 마이너한 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5박과 6박이 반복되며 변화하고, 모듈러 신스의 천둥 치는 듯한 전자 사운드를 듣고 있자니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 시스템에 질문을 던지는 작곡가의 의도가 들리는 듯했다. 특히 서정적인 반음계 하행 클리셰 코드 진행 위에 어딘가 불편한 선율이 얹어진 부분은 황호준 작곡가의 고유한 음악적 특색이 드러나며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감정을 선사해 주었다. 2악장이 시작되자, 아름다운 선율이 무대를 감쌌다. 1악장은 불완전한 디스토피아 같았다면, 2악장은 사랑과 행복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유토피아를 꿈꾸는 듯한 아름다움이 무대를 감쌌다. 하지만 국악기에 음향 효과로 딜레이(delay)와 리버브(reverb)가 너무 많이 걸려 음악의 진행에 방해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과한 음향 효과는 악기의 고유한 매력을 반감시킬 수 있기에 조금 더 적절한 어우러짐을 연구했더라면 더 풍성한 음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모듈러 신스는 음악에 억지스럽게 개입된 느낌을 받았다. 다이나믹하고 풍성한 느낌을 주는 건 좋았으나, 악기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화를 이루는 연구가 더욱 필요해 보였다. 제 2부의 첫 무대는 한웅원이 작곡한 위촉 초연곡 ‘보이스와 국악 관현악을 위한 베틀가’가 장식했다. 가수 선우정아가 함께한 무대로, 재즈보컬의 즉흥 연주 방식인 스캣(scat)을 선보였다. 그는 구음처럼 목소리만을 통해 베틀가의 선율을 차용하거나, 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베틀가를 통성으로 노래하기도 하며 재지(Jazzy)한 무대를 펼쳐내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을 선보였다. 이 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보컬이 노래가 아닌 악기의 한 부분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선우정아는 관객들에게 짧은 노래 구를 제시하며 따라 부르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해금과 대금, 피리, 아쟁 등의 국악기가 제시하는 선율을 목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각 악기의 특성이 녹아있는 선율을 받아 표현한 그의 목소리는 악기 그 자체였고, 악기 소리의 특성을 잡아 특색있게 노래하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국악 관현악과 스캣(scat)을 활용한 재즈보컬과의 만남은 흔치 않아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했으며, 국악기와 보컬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진정한 음악적 화합을 선사해 주었다. 휘날레를 장식한 무대는 김성국 작곡의 일렉트릭 기타 협주곡 <능게>가 장식했다. 전통음악 ‘능게’는 행진 음악을 뜻하며, 주로 태평소, 나발 등의 관악기와 북, 바라 등의 타악기로 연주하며 힘차고 경쾌한 음악적 특징을 지닌다. 이 작품은 주로 태평소로 연주되는 전통음악 ‘능게’의 주선율을 재료로 일렉트릭 기타와 믹스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작곡되었다. 기타리스트 KAY BROWN의 협연으로 연주된 이 곡은 화려한 기타 사운드와 퍼포먼스가 눈과 귀를 매료시켰다. 밝고 경쾌한 능게 선율이 일렉 기타의 깔끔하고 매력적인 음색과 관현악으로 함께 연주되니 한국적이고 벅찬 느낌을 받았고, 현대적이고 모던하면서도 전통의 색이 돋보여 한국 홍보영상 음악으로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음악은 능게 선율을 주제로 하여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발전해 나갔다. 2악장에서는 경기민요 태평가의 선율을 차용한 생황과 일렉 기타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편안함을 선사해 주었고, 일렉 기타의 화려한 솔로 부분은 넋을 놓고 감상하게 되었다. 아쉬웠던 것은 전반적으로 일렉 기타의 기교와 화려함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협주곡이긴 하지만 국악 관현악곡이기에 조금 더 다양한 전통 음악적 요소가 등장했으면 했는데, 다분히 기타 연주자의 록(Rock) 콘서트 같았고 관현악은 단순하게 받쳐주기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일렉 기타의 연주를 돋보이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국악 관현악과 기타가 전통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면 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믹스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무대 뒤를 비롯한 천정에 수놓아지는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의 조명 또한 공연 내내 시야의 흥미로움과 모던한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국악 관현악이 새롭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은 긍정적이었지만, 국악이 아닌 타 음악과의 자연스러운 혼합을 위한 더 다양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인기 있는 아티스트나 장르를 통해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것도 좋으나, 전통의 본질을 더욱 중심에 두고 그 색채를 잃지 않은 채 음악적인 발전을 시켜 나가, 이 시대에 가장 걸맞은 국악 관현악의 꾸준한 발전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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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돌린 연주자 아비탈 "카멜레온 같은 소리에 빠져보세요"(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다섯 살에 윗집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던 만돌린 줄을 튕겨본 순간 사랑에 빠졌죠." 세계적인 만돌린 연주자 아비 아비탈은 11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2023 한화클래식' 기자간담회에서 요즘은 보기 드문 악기인 만돌린의 매력을 소개했다. 한화클래식은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고음악 축제로 오늘날 관객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는 옛 음악의 아름다움을 꾸준히 알려왔다. 올해 공연은 오는 12∼1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지휘자이자 리코더 연주자인 조반니 안토니니가 이탈리아 바로크 앙상블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를 이끌고, 아비탈이 함께한다. 몸통이 둥근 기타처럼 생긴 만돌린은 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다. 18세기에 살롱 음악으로 사랑받았지만, 최근 클래식 음악 공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악기는 아니다. 아비탈은 "만돌린은 아주 단순하고, 친근한 악기"라며 "전 세계 다양한 문화 속에서 줄을 튕겨 연주하는 악기들이 각각 만들어졌는데, 그중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악기가 만돌린"이라고 말했다. 이어 "누구나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직관적인 악기여서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연주할 수 있다"며 "이 때문에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무대에서 연주되는 진지한 악기로 여겨지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대중성은 만돌린의 축복 같은 특성이지만, '아마추어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라는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비탈은 어린 시절 만돌린을 배우면서 실력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는 점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그는 "만돌린 연주는 즉각적인 반응과 보상이 따랐다"며 "바이올린은 3년 정도 열심히 해야 들을 만한 소리가 날 것 같은데, 만돌린은 초반에 배우기 쉬워 빠르게 실력이 느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만돌린의 매력을 '카멜레온'에 비유하며 다채로운 색깔을 낼 수 있다고 자랑했다. "만돌린으로 라흐마니노프 곡을 연주하면 러시아 느낌이, 비발디 곡을 연주하면 이탈리아 느낌이 나죠. 드보르자크의 '아메리카'를 연주하면 미국적인 소리가 나고요. 카멜레온 같은 악기라고 생각해요." 올해 공연에서 만돌린만큼 눈길 가는 악기는 한국 전통 악기인 피리다. 안토니니가 직접 한국인 피아노 연주자에게 선물 받은 피리를 연주한다. 연주곡은 솔리마의 '피리, 현,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쏘(So)'다. 원래는 아주 짧은 앙코르용으로 작곡됐지만, 이번엔 4∼5분 길이로 작곡된 버전이 세계 초연된다. 안토니니는 "한국의 오보에라고 할 수 있는 피리는 굉장히 흥미로운 악기"라며 "피리의 음성에서 여성이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더 배우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만돌린과 피리뿐만 아니라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가 시대악기로 연주하는 고음악도 기대를 모은다. 1985년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를 창단해 이끄는 안토니니는 "우리만의 분명한 색깔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명암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악기가 가진 다양한 색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고 악단을 소개했다. 또 40년 가까이 고음악 앙상블을 이어온 저력에 대해 "음악에 대한 해석이 항상 살아있어야 한다"며 "같은 곡을 연주해도 매번 다른 해석을 하려 하고, 이전에 했던 스타일과는 정반대로 하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연주자의 커리어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 과거의 방식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신선함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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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봉 이매방의 삶과 예술춤생애와 무용사적 의의 1. 들어가는 말 "하늘이 내린 춤꾼’,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전통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이기에 더더욱 이 시대의 국무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2015년 8월 7일 88세로 영면하였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전통춤을 오늘날처럼 곱게 다듬고 정립한 전통무용가는 한국무용사에서도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명창 중에서도 뛰어난 명창을 ‘국창’이라고 하는 만큼, 명무 중에서도 빼어난 명무를 ‘국무(國舞)’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매방을 국무로 칭하고 인정하게 될 만큼 춤꾼으로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기로 한다. 이매방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고,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았으며,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권번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으로 들어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전수받았다. 오늘날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가치와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매방의 춤생애 1) 입문기(入門期, 1930년대)-목포권번과 만주대련의 소년시절 이매방은 1927년 음력 3월 7일(호적상 1927년 5월5일)에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186번지에서 부친 이경식(李敬植)과 모친 조병림(曺炳林) 사이에서 3남2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이매방은 태몽과 관련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모친 조씨는 이매방을 낳기 전 태몽에서 모친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데 동그란 불덩이가 굴러와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명무로서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예고한 것이었다.이매방은 세 살적부터 끼가 발산된 천생의 춤꾼이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 같이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매방은 여자 같은 행동을 보고 부모형제들은 미쳤다고 야단법석이면서도 그가 철이 안 들어 그런 것일 거라고 지나치곤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가 그의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한편 이매방의 할아버지벌격인 이대조(李大祚, 김금옥에게서 춤사사)씨는 호남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던 춤의 명인으로써 승무와 북놀이에 탁월한 예인이었다.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포배당이라는 절마당 앞에 드럼통을 이삼십개 깔고 판자를 올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다. 이때 이대조(1870년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이 서로 잘 아는 친구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절에서의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며,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지속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씨가 소개한 목포권번에 입문하게 된다.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 입문하여 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학습도 함께 시작하였으나 판소리는 그의 목청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청이 터지질 않아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학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 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호남 권번에서 다양한 춤을 익힌 이매방은 유년시절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중국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에게 가서 약 5년간을 지내게 되면서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난다. 그리고 12세 무렵 대련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 무용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梅蘭芳)과 조우한다.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공연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이매방의 장검무는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의 기법을 토대로 창작된 춤이다. 6. 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지어 사용하게 되는데, 매란방에게서 배우고 느낀 예술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말도 잘 안통하고 해서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춤에 정진하게 된다. 2) 학습기(學習期, 1940년대)-역경 속에서 다져진 승무로 데뷔무대목포소학교를 졸업 후 이매방은 뜻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마음에 없는 목포공립공업학교를 입학(1940년)하였다.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항시 그의 마음에는 춤사위와 북놀이가 떠나질 않았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자신과 제자들이 입을 의상은 물론 공연에 필요한 무구(舞具) 소품들을 직접 바느질하거나 제작하였다.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하여서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결벽성과 치밀한 성격으로 아무리 소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매사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전문적인 한복 제작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1942년(16세) 목포역전에다 쇠가래를 세워 그 위에 막을 치고 드럼통을 깔아 만든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로 명인명창대회를 열고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승무를 담당한 박봉선이 사정이 생겨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목포 사는 신두옥도 놀음을 나가 없었고, 성산호주 역시 결혼을 하여 무대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방울은 승무를 추어야할 사람이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자 함국향에게 승무를 대신해서 출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함국향선생은 마침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이매방을 불러 임방울선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피리에는 임세균, 거문고에는 한갑득, 설장고에는 전사업, 전이섭, 김오채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과 함께 한 무대였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춤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해방 후로는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삼고무를 가르쳐 여성국악인들의 공연을 도와주었으며, 그해 승무로 첫 데뷔했던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승무로 출연하였다.이처럼 1940년대는 본격적인 춤과 가락을 익히는 학습기였다. 그동안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 때 귀국하여 간간히 춤을 익혔지만 목포로 전학한 후로는 당내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화순 능주출신)선생에게 학습하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면서 광주권번을 다녔다. 당시 박영구선생은 광주권번에서 승무와 북놀이를 가르치고 있던 권번선생이었다. 광주권번에서 박영구선생과 함께 춤선생으로 있던 이창조(장성출신)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하였다.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무안출신)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특히 이대조에게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배웠으며 이대조의 북가락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아 ‘천수북’이란 말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이매방 북가락이 일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대조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이다. 3) 방랑기(放浪期, 1950년대)-6.25사변 군예대 활동-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해방 후 진지하고 평화롭게 예인의 길에 정진하던 것도 잠시뿐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내려와 목포에서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전황(본명 전두황, 전옥의 동생, 전미례의 부친), 최옥산, 임종옥, 한계만, 유선도, 이경팔, 박정호 등이 내려와 공연한 것을 이매방은 보게 되었다. 이때 전황은 <처녀총각>, 안성희는 <장검무> 등을 추었다. 그리고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당시 무용동행위원장에 차범석, 국악동맹위원장에 장월중선 등이었다. 무용동맹에서 춤을 가르치거나 공연을 하였고 또 국악동맹에 가서 안무도 해주며 지냈다. 안성희가 "규태동무 북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바람에 피신해 있었지만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에 곤욕을 치루었다.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 역전 태평로에 본부를 두어 활동했다. 그 때 군예대에는 황해(전영록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그리고 무용가 김진걸, 황무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예대(종군연예인공연단) 일원(1951년)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이렇게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군산에서 연구소를 개설해주겠다는 유지들이 나타나 이매방이 24세(1951년)에는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때부터 이 매방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하여 그의 춤과 북놀이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할 때 춤을 배웠던 제자들로서는 박문자, 김옥순, 양향옥, 그리고 채영옥 등이 배웠다. 1953년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 함께 연구소를 했지만 결별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남동 양조장 옆에 국악원을 개설하여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쇼무대나 악극단 등 순수 무용활동 이외의 출연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하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다시 이매방의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올라와 창신동 신익희의 딸 신영균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부산에서 초량동, 범이동, 대신동 등지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56년 대통령 입후보했던 신익희의 사망으로 인하여 서울연구소를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도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의 역할이 켰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이매방의 공연작품으로 역시 <승무>와 <쌍검무>로 전통무용의 진수로 보여주며 춤기법이 매우 빼어났음을 표현하면서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승화되면 좋겠다는 평을 하였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근거지는 사실상 부산이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많은 예술인들이 체류하였었고 일부는 잔류하면서 예술의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매방도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 중심을 두어 고전무용의 중심인물이었고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58년에 부산공연을 올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4) 정립기(定立期, 1960년대)-다양한 춤 레퍼토리1960년대는 1950년대를 이어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그의 선생에게서 배운 북놀이를 그가 혼자 활동하던 1948년 북3개를 놓고 추는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지만 그 후 북5개를 놓고 치는 5고무, 7개를 놓고 치는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연희되고 있는 삼고무의 원조는 이매방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은 그의 탁월한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이매방의 주 활동무대는 부산이었으나 점차 활동무대를 서울로 넓혀나간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에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창작무용 <꽃신 짚신>발표회를 가졌고, 1968년 8월에 일본 대판(大阪) 상은 창립 15주년기념제전(대판후생회관)에 초청되어 <승무>로 출연하였고, 이어서 제23회 광복절기념공연(일본동경 거류민단 본부 주최)에 <승무>를 추어 갈채를 받았다. 5) 비상기(飛翔期, 1970년대)-전통춤의 예술성과 가치 인정1970년대 초까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나 이매방의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현재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서울에서 한 때 1956년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집에 신세지며 서울 창신동에다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6.25직후에 주 활동무대였던 부산에서의 활동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의 가치를 파악하고 많은 국악제전에 초청하여 출연하게 된다. 1970년부터 매년 부산에서 3.1절 기념 국악대제전에 <승무>공연, 1973년 4월 동래야류발표회에 <승무>초청공연, 그해 12월 전통예술감상회에는 <초립동>을 공연하였다. 1974년 5월 인간문화재 초청공연에 <승무>로 초청이 되었고 12월에 무용대공연에는 <화랑도>(전주삼남극장)로 출연하였다. 1975년 5월 강백천 대금산조발표회에 <승무>출연(부산민속예술관)하였고, 8월에는 이선옥 초청 신적무용발표회에 <사랑과 이별>을 안무하여 이선옥과 2인무로 출연(국립극장 소극장)하였다. 이선옥과의 콤비를 맞추게 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한순서는 자연히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6년 1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무용공연 <신검(바리공주)>를 부산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이매방 선생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명예교수인 무용학자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30일 서울 YMCA에서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추면서부터이다. 전통무용연구회(회장 정병호)가 주최한 <이매방 승무 발표회>에서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추었고, 찬조로 김소희 국창의 판소리(고수 김득수)와 이선옥의 살풀이춤이 올려졌고, 악사에 지갑성, 전태용, 이생강, 김순봉, 오주환, 서용석, 김한국 등이 반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병호 교수가 최초로 ‘승무의 미학’를 발제하였으며 안내장에는 김천흥의 축사가 기록되었다. 또한 이날 이매방 춤을 감상하고 조선일보 기사에 발표한 홍종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등골이 으쓱 들었다가 놓는 그 순간 그 깊은 한숨소리는 들은 바 없었으나 그 순간의 한숨은 하늘이 꺼지는 듯 깊은 느낌이었다..... 이씨의 춤이 각별하다는 점은 악곡이 지닌 장단과 가락 속에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온몸에 매듭과 힘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작동하고 있다는 그 기교를 훨씬 넘어서 그의 전신에 넘쳐 흐르는 예술적, 창조적 그리고 또 즉흥적인 감흥이 압도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홍종인, "이매방씨의 승무를 보고”, 『조선일보』(1977년 8월 3일자).홍종인의 평문은 사실상 이매방의 전통춤이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별이 등극했음을 시사는 글이다. 감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북가락, 섬세하고 고운 춤사위에 모두 감동을 받은 공연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6) 만개기(滿開期, 1980년대)-<북소리> 시리즈와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평생 춤의 길을 걸으면서 외길로만 살아온 이매방은 지난날의 춤생활을 돌이켜 보면 한과 정으로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이매방은 평생 동안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대, 굿쟁이, 기생, 당골소리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으며 살아왔다. 거기에다 이매방의 성격이 직설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수틀리면 욕잘 하기로 유명한 그는 호랑이, 사자이빨, 따발총, 직사포, 욕보, 욕대장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한 면일 뿐이다. 이매방의 내면에는 그간 겪어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예술혼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당시 이매방 춤의 진수를 처음 제대로 알아본 이는 당시 전통무용연구회장이던 중앙대 정병호 교수였다."이매방씨가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승무의 명무자라는 것과 오늘의 북틀춤을 탄생케 한 창조자로서의 장본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씨의 승무에서 돋보이는 것은 하나는 그가 치는 북놀이이다. 그는 북놀이를 할 때 마치 한(恨)을 풀 듯이 신명나게 치고, 감정을 한곳으로 몰입시켜 주술경에 도달한 정도이다....이매방의 승무는 비단 춤사위의 멋 만이 아니라 북놀이에도 그 정수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북놀이는 궁편과 각을 조화있게 타주(打柱)하는 가운데 많은 가락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교는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신비스런 율동이다”.(정병호, "이매방의 승무”, 『전통문화』,1984년 5월호)이매방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무대공연을 주선하는 등 그가 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속학자 정병호는 그의 춤 중에서 승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승무에 있어 북틀의 창시자라는 점과 감정이입에 입각한 승무의 춤사위를 주술적 무아경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묘술로 풀어내면서 이매방을 최고의 춤꾼으로 극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도록 조사에 착수하여 이매방 승무의 가치와 미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병호교수의 제자로 연구에 참여했던 필자도 함께 YMCA 이매방 승무발표회(1977년), 이매방전통무용의 밤(명동유네스코회관, 1981년)을 동참하였고, 이매방춤 마포연구소에 찾아가 면담하면서 특히 당시에 이미 승무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던 고 한영숙 승무와의 차별성과 승무의 미학과 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매방 춤판 최고의 결정판 <북소리> 씨리즈의 시작이었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에 이어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 인정에서 보류된 이매방의 승무에 대해 사생활과 예술세계는 별개라는 당시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과 더 열정적으로 이매방 승무를 알리기 위해 1981년 유네스코 회관 공연을 주선하여 문화재위원들을 초청하여 이매방 승무의 예술적 가치와 지역성과 전통성을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87년 7월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일본무용예술제 참가와 국악대공연에 참가 등의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7) 결실기(結實期)(1990년대)-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과 이매방 춤인생 60년1990년대의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 이어 1990년 10월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이매방은 창신동, 돈암동, 대현동, 운니동, 삼성동, 그리고 마포를 거쳐 지금의 양재동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었다. 그후 지금까지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데, 한국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 하지만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자 그의 많은 옛 제자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입문한 문하생들이 그의 춤과 북놀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의 활동은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Ⅲ>(호암아트홀)를 가진 후, 1991년 미국순회공연, 1992년 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를 가진다. 이어서 1995년 광복50주년 민속종합예술제 출연과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을 가졌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999년에 우봉 이매방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을 가지면서 1990년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8) 국무기(國舞期, 2000년대)-외길인생 우봉 이매방 춤 70년격변기를 살아온 우리의 춤선구자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듯이 명무 이매방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이매방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다. 2001년 갑작스럽게 발병한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주위의 걱정과 안타까움 속에 위 대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몸무게가 15kg 빠지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매방은 작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직접 살풀이춤과 입춤을 추는 저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오직 춤만을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감히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이다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은 2005년 7월 목포문화예술회관 1층에 마련된 이매방의 살풀이와 승무를 전승하는 공간으로 이매방의 이수자들이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삼고무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우봉이매방춤경연대회’는 이매방의 예술혼을 예향 목포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창립된 행사이다. 전통춤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매방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우봉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그중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의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나온다. 결국 이매방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 스스로의 속멋에서 우러나온 춤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수춤이 아니라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본인의 혼을 담은 전통춤이었기에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제 우봉 이매방이 왜 국무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한국 전통춤의 기법과 미학적 표현법을 볼 때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현하는 전통무용가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에서도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가하는 무용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아름다운 춤사위기법을 가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어릴 적 처음 춤입문에서 고운춤만을 추는 기방에서 춤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권번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이 이웃에 살아 그 집을 드나들면서 기방춤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자처럼 예쁜춤의 기본이 몸에 배여있어 이매방춤에는 기방예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보다도 더 여성적인 기방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소리꾼들에게는 유파별로 또는 계통별로 ‘소리바디’가 있듯이 이매방의 춤맵시에는 이미 기방계통춤의 고운 ‘춤바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여성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매방은 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무리 춤바디가 기방계적 표현력을 지녔다 해도 대개의 남자춤꾼들은 남성의 ‘춤속’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의 춤사위와 표현법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화된 ‘춤속’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성정체성이 뒤바뀐 남성춤꾼이라 해도 모두 춤속이 여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뒤섞인 혼성춤속이거나 어설픈 여성춤속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은 완벽한 기방계 ‘춤바디’에다 가장 섬세한 내면적 정서의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춤속’을 지닌 특별한 춤꾼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목포권번에서 호남기생에게 처음 춤을 사사한 이매방은 그후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무용가로 성장한다. 맨 처음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 이는 이대조는 무안 출신으로 목포권번 사범으로 춤과 음악에 능통한 전통예인이며, 이매방에게 승무, 검무, 장고춤을 가르쳤다. 또한 옥과 출신인 신방초에게 육자배기, 화초사거리, 가곡, 검무, 승무 등을 익혔고, 10대 중반에는 광주권번에서 화순 출신 박영구 문하에서 승무와 북을 배웠고,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춤과 기악에 능통한 이장선의 문하생이 되어 다양한 예능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 모두가 호남일대와 경향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궁중 어전 출입도 잦았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들이었다. 이처럼 이매방은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면서 권범사범들인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의 제일가는 명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과 다양한 춤가락을 익혀 호남춤의 특성과 미학을 정립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유한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간에 호남춤의 대를 이은 한진옥을 비롯한 몇몇의 호남춤의 명인들이 있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만 활동하다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매방은 고향 목포에 머무르지 않고 부산, 군산, 광주 등지를 거쳐 한국예술의 중앙무대인 서울로 진출하여 호남춤의 예술성을 범한국춤으로 위상을 높였다. 이매방 춤에서 전승되는 보석같이 소중한 호남제 춤사위는 실로 다양하다. 춤사위 용어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춤사위 명칭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이다. 이매방이 춤을 가르칠 때 매번 강조하는 대삼소삼은 장단의 강약을 따라 춤사위도 강약으로 표현하는 춤기법으로 강과 약으로 반복하면서 조율하여 추는 방식으로 춤의 섬세한 리듬성과 변화성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의 기법 중 정중동 또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는 양우선도 중요한 춤 특징으로 손짓과 발짓의 모든 동작은 양우선의 원리를 따른다. 가령 발은 뒤꿈치부터 앞꿈치로 옮겨지고, 팔은 엎으면 반드시 뒤집고, 뿌리가 내려오면 끝이 올라간다거나 끝이 쳐지면 뿌리가 올려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기교와 원리가 연출된다. 또한 보법에서 비정비팔(比丁比八)이라는 발디딤은 호남춤에서 내려오는 오랜 춤기법 중의 하나로, 발 딛는 자세가 한자의 정(丁)자 혹은 팔(八)자의 모양으로 딛는 독특한 형태의 보법이다. 오른발에 이어 왼발 끝으로 딛어 오른발 옆에 옮겨 딛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고 펴는 형태의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은 이매방 춤의 몸가짐과 돋음새, 오금새, 디딤새로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진수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매방의 첫 스승 이대조는 그의 집안 할아버지벌이 된다. 즉 이매방의 집안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인 이대조 대(代)까지 대대로 무업(巫業)을 해온 무계의 혈통을 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세습되면서 천부적인 예능성을 이어받아 오게 된다. 대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경우는 도중에 도태되지만 선천적 예능성을 지닌 유전인자를 지닌 예인들은 대를 이을수록 더 유명해진다. 이매방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나이인 15세 때 증명되었다.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가설무대에서 명인명차대회를 열었는데 승무를 추기로 한 박봉선이 불참하여 대타자로 승무를 추었으나 관중들의 찬사가 뜨거웠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매방은 이 모든 스승들의 춤기량을 뛰어넘는 춤기법과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래서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된 전국의 모든 류파와 계통의 전통춤 전승자와 명무들을 볼 때 이매방만큼 춤을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명무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한국전통춤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이매방을 명무 중에서 명무인 국무로 호칭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매방은 예닐곱 살부터 목포권번에서 예기들의 춤을 접하고 춤 배우기를 권유받아 이대조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북경 매란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거나 목포로 돌아와 춤을 배웠다. 이처럼 이매방은 어린 10대에 호남의 이름난 명인들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악가무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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