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5주년 기념 주상하이한국문화원 전시대한민국 임시정부 105년의 역사를 살펴보는 전시가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11일) 10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 거대한 뿌리' 전시를 이달 26일부터 5월 4일까지 주상하이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다고 22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과 함께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음악공연과 뮤지컬 등 다양한 한국문화행사를 진행한다. 전시에서는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과정,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던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 등 관련 유물 67점을 만나볼 수 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2대 국무령 홍진 선생을 각각 소개한 1920년대 독립신문과 김구 주석의 취임 선서(1944년) 등이 전시된다. 1부 ‘승리하고 돌아가리라’에서는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역대 수반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특히 1940년대 임시정부의 외교와군사 활동을 알린다. ▴ 2부 ‘가자, 조국으로!’에서는 광복 이후 귀국을 선언한 임시정부가 중국, 미국과의 협상 끝에 돌아오는 모습을 소개한다. ▴ 3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하다’에서는 1945년 12월, 당시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제작했던 개선문과 꽃 전차 구조물을 통해 전 국민이 환호했던‘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 모습을 재현한다. ▴ 4부‘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하다’에서는 중국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와 여러 유적지를 소개한다. ▴ 5부 ‘대한민국 정부, 임시정부를 계승하다’에서는 '대한민국 관보' 제1호와 국가등록문화재인 '한‧중‧영문 중국판 한국애국가 악보', 광복군 서명 태극기 등 헌법과 인물, 기념일과 상징물 등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계승 의지를 소개한다. 광복 이후 귀국을 선언한 임시정부가 중국·미국과의 협상 끝에 돌아오는 모습, 1945년 12월 당시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제작했던 개선문과 꽃 전차 구조물을 통해 전 국민이 환호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와 여러 유적지, '대한민국 관보' 제1호와 국가등록문화재인 '한·중·영문 중국판 한국애국가 악보', 광복군 서명 태극기도 소개된다. 주상하이한국문화원은 전시와 함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주제로 다채로운 한국 문화 행사를 진행한다. 한국 팝페라 그룹 랑코리아가 26~28일 주상하이한국문화원에서 한국의 시와 역사를 주제로 한 음악공연 '음악으로 그리는 105년의 역사'를 펼친다. 실존 독립운동가 양우조, 최선화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 창작 뮤지컬 '어느 독립운동가 부부의 좌충우돌 육아일기-제시의 일기'도 4월 11~13일 선보인다. 뮤지컬과 관련한 한·중 서적과 사진 자료들도 함께 전시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서 주로 먹었던 음식을 주제로 한 체험행사도 진행한다. 용호성 문체부 국제문화홍보정책실장은 "한국과 중국 국민 간에 임시정부를 연결고리로 하는 새로운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기대한다" 며 "문체부는 우리 민족 독립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가치를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
선조들의 삶 담긴 음식 문화는…조선의 '요리 비법'을 찾아서"임금의 복통과 설사가 심하여 약방에서 입진(入診·궁중에 들어가 왕을 진찰함)하고 황금탕을 지어 올렸다." (경종실록 1724년 8월 22일 기사) 1724년 조선의 제20대 임금인 경종(재위 1720∼1724)은 여러 날 동안 아팠다. 병환이 낫지 않아 수라를 드는 것도 힘들어했고, 여러 의원이 번갈아가며 진찰하기도 했다. 복통으로 시달리던 경종이 끝내 숨을 거두게 된 원인으로 지목된 건 생감과 게장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전해지는 한글 요리서 '음식방문이라'는 과실을 먹을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 "감과 배와 게를 함께 먹지 말라"는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기에 널리 쓰인 '요리책'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최근 펴낸 '조선 요리 비법: 장서각 소장 주식방문·음식방문이라·언문후생록 역주'는 한글 요리서 고전 3종의 가치에 주목한 책이다. 음식을 문화·인문학·역사학의 관점에서 연구해 온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중심으로 각 분야 학자 10명이 참여해 장서각 소장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했다. '주식방문'과 '음식방문이라', '언문후생록'은 모두 붓으로 필사한 자료다. 주 교수는 책 앞부분에 쓴 해제에서 이들 한글 요리서 3종의 특징과 구성, 다른 기관이 소장한 자료와 차이점 등을 분석한다. 요리법 항목이 몇 가지인지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장서각이 소장한 '주식방문'에 음식 이름이나 요리법 재료 등이 적힌 항목은 총 114가지이며, 이 중에는 병과(餠菓·떡과 과자)류가 35가지로 가장 많다.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 중인 '음식방문이라' 내용을 살펴보면 요리법과 음식을 먹을 때 조심해야 할 일 등 110가지, 의료와 가옥 관련 내용 12가지가 담겨 있다. '언문후생록'은 조선 후기 음식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요리법은 상세하지 않지만, 음식 이름과 재료 명칭을 한자와 한글로 함께 써놓아 조선 후기 음식 이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주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측은 "19세기 이후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요리서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의 음식문화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음식 문화에 담긴 선조들의 재치와 민간 신앙도 눈여겨볼 만하다. 밤을 구울 때 타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그중 하나를 남이 모르게 손에 쥐어 감추라'라거나 '밤마다 눈썹 위에 세 번씩 문질러 구워라'는 부분은 웃음을 자아낸다. 책은 원문 이미지와 판독 내용을 함께 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한글로 필사한 각 단어의 뜻, 비슷한 어휘 등을 주석으로 달았고, '현대어역' 부분에서는 요리서의 각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주영하 교수는 "조선시대 요리책을 연구할 때 필요한 것은 '책의 문화사'라는 시선"이라며 "역주서가 국어학, 음식학, 생활사 연구에 이바지하리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640쪽. (연합뉴스)
-
168통의 내밀한 편지들, '어린 왕자'를 꽃피우다"나의 모든 것, 난 당신에게 충실해. 나는 당신을 세계 곳곳으로 데려갈 거고, 우리는 별들을 길들일 거야."(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그의 아내 콘수엘로에게 쓴 편지 중에서) '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 사랑의 편지'(문학동네)는 '어린 왕자'를 쓴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 실종)와 그의 아내 콘수엘로(1901~1979)가 나눈 격정의 편지 168통을 모은 책이다. 1930년 두 사람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 만난 시점부터 생텍쥐페리가 비행 도중 실종된 1944년까지 15년간 서로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두 사람 간의 오해와 반목, 사랑과 신뢰는 물론 생텍쥐페리라는 위대한 작가의 속마음과 창작의 이면이 생생히 담겼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프랑스 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장에서 처음 만난 앙투안과 콘수엘로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창조적 분신을 발견하고서 금세 매료돼 짧은 동거를 거쳐 1931년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사랑으로 시작한 둘의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북아프리카부터 남아메리카까지 세계의 상공을 누비던 앙투안의 불안정한 생활 탓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기질 차이도 한몫했다. 엘살바도르 출신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콘수엘라는 자주 고립감을 느껴 친구들과 자유로운 교류를 원했지만, 긴 비행에 지친 앙투안은 그녀에게서 안정을 원했다. 이런 갈등은 때론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앙투안은 자신의 대표작 '어린 왕자'를 인용하면서 "'꽃은 언제나 어린 왕자 탓을 했다. 그래서 어린 왕자는 떠났다!' 이게 바로 내가 불평하는 이유야"라고 쓰기도 한다. 갈등과 반목, 오해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마지막 유일한 안식처를 자처한다. 특히, 비행으로 평탄치 못한 일상을 보내는 남편에게 콘수엘로는 끊임없이 글쓰기를 독려하고 심정적 지지를 보내는 대목들이 눈길을 끈다. "토니오(앙투안의 애칭), 소설 열심히 써서, 아주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봐. 우리의 이별, 절망, 우리 사랑이 흘린 눈물이 당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물들의 신비를 꿰뚫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49쪽) "난 당신이 그 책을 끝내야 한다고 굳게 믿어. 책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야. 글을 써. 절대 피하지 말고."(316쪽) 과연 아내 콘수엘로의 지지가 없었다면 전쟁 중 비행사로 일하며 글쓰기를 병행했던 작가가 '어린 왕자'나 '야간 비행', '전시 조종사' 같은 후대의 큰 사랑을 받은 작품들을 완성해낼 수 있었을까.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 꼽히는 '어린 왕자'가 탄생하게 되는 흥미로운 장면도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어린 왕자'는 1943년 초판이 출간됐지만 앙투안과 콘수엘로가 결혼하기 전인 1930년에 앙투안이 콘수엘로에게 쓴 편지에서도 이미 그 단초가 있다. "옛날 옛적에 한 아이가 보물을 발견했어. 하지만 그 보물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두 팔로 그 아름다움을 안고 있기에는 너무 아름다웠지. 그래서 아이는 우울해졌어." 책에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부터, 작가가 직접 그린 '어린 왕자' 삽화, 육필 원고와 엽서, 화가였던 콘수엘로가 그린 그림 등 풍성한 자료들은 물론, 편지가 쓰인 당대의 맥락을 상세한 각주로 담아 생텍쥐페리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초상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자국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이런 종류의 서간 문학이 잘 발달해있고 독자층도 넓다. 생텍쥐페리나 알베르 카뮈 같은 유명한 작가들은 물론 프랑수아 미테랑 등 정치 거물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가까운 사람과 주고받은 내밀한 편지와 엽서 등을 잘 보전해 연구하고 주석을 붙여 갈리마르 같은 명망 높은 출판사가 펴내는 건 이 나라의 오랜 문학 전통 중 하나다. 이 책 역시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고서 무려 77년이 지나 발견된 편지들이 밑바탕이 됐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나 엽서가 매우 희귀해진 시대에 더 빛을 발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문학동네. 윤진 옮김. 436쪽.
-
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
(2)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임시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로 안창호를 염두에 준 바가 없다. 그리고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면서도 드러내 거론하지 않았고, 다른 길을 걷는다고 매도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기조를 견지하였다.” 지난 제1회 ‘임시정부 안창호 작사, 인식 없었다’의 결론 부분을 인용하였다. 임시정부의 이 기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방 후 출현하는 자료에 대한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즉, ‘金九先生 題 大韓愛國歌’ 악보 해설 부분이나, 1947년 이광수 저술 ‘도산 안창호’의 ‘소이부답(所以不答)’ 대목이나, 1948년 박은용의 동아일보 ‘윤치호의 작사 사실’ 기고문이나. 문제의 1955년 미국 출판사 문의에 대한 정부 입장과 그에 대한 반발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 제2회 ‘김구는 애국가 작자를 알고 있었다’에서는 이 기조를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악보의 해설을 살피기로 한다. 해방이 되어 환국을 고대하던 중인 10월 18일 김구의 친필로 제목을 단 악보이다. 비용은 중국국민당 정부와 한중 우호를 위해 설립한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가 담당했고, 악보전문 출판사인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가 출판했다. 당연히 원고와 편집 등의 업무는 측근인 엄항섭(嚴恒燮)과 민필호(閔弼鎬)가 전담하였다. 해방을 맞아 귀국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애국가 악보를 발행하려 한 것은 애국가의 위상을 홍보하고, 김구 주석을 부각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런데 이 악보가 수록한 ‘한국 애국가에 관한 고사(古事)’ 부분은 매우 주목된다. 비록 단출하지만 애국가의 연혁과 작사자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단 두 문장으로 구성된 전문은 이렇다. "이 애국가는 50년 전에 한 한국 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일명(佚名)해 버렸다. 처음에 서양 명곡을 채용하여 가사를 메워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 한국의 인사들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전에 한국 청년음악가가 새로운 곡조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곧 한국 건국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 네 가지 점을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 시점의 제시다. 즉, 1945년 시점에서 ‘50년 전’을 대입하면 1895년이다. 이는 ‘조선개국 기원 505회’ 기념식에서 애국가와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를 발표한 시점과 2년의 차이가 있지만 이 노래의 작사 시점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는 안창호의 나이가 17세 때이다. 이 연치(年齒)는 국가적 행사에 노래를 지어 발표할 위치가 아니다. 그러나 윤치호는 30세로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상해 중서서원(中書書院)에서 교수로 있다가 귀국하여 외부협판직을 맡는 등의 능력과 직위로 ‘무궁화가’를 지어 발표할만한 인물일 수 있는 것이다.(안창호의 연치 문제는 1955년 4월 서울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 보도에서 지적된 바이고, 윤치호의 능력에 대해서는 서재필이 ‘무궁화가’를 작사한 윤치호를 ‘한국의 계관시인’으로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다.) 둘은 ‘10년 전~ 새로운 곡조를 지어’란 시점이다. 이는 안익태가 ‘올드랭 사인’ 곡조를 대체할 ‘신곡보 애국가’를 작곡한 1935년과 정확히 일치한다. 임시정부가 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배경은 1940년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요청에 따라 ‘안익태 곡보 사용 허가’를 한 바가 있어 이때 관련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은 이렇게 정확하게 작사와 작곡 시점을 표명하는 상황에서 그 작사자에 대해서만은 "오래전에 숨은 이름으로 지금은 알 수 없다”라는 의미로 "佚名해 버렸다”라고 한 인물의 문제다. ‘일명’이란 낯선 용어는 ‘미상’이거나 ‘모른다’는 표현을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익명화(匿名化)이다. 이의 주인공은 임정요인으로 활동하다 7년 전인 1938년 작고한 안창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 좁게는 김구와 그 측근들이 안창호란 이름을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를 ‘한 한국 애국지사’라는 표현은 부적합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시기 윤치호에 대해서는 ‘한 한국 애국지사’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이런 정황은 지난 제1회에서 살핀 임시의정원 ‘애국가 수정안’의 발의와 그에 대한 처리 결과를 통해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인한 과정과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악보의 ‘한국애국가에 관한 고사(古事)’ 부분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해석 외의 결론은 탈맥락적이다. 가령 "북한에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숨긴 것”이란 주장 같은 것을 말한다. 이는 의도적인 왜곡이거나 문해력을 의심받을 만한 해석이다. "1945년 임시정부 김구와 그 측근들은 애국가 작사자를 알고 있었다. 작사자는 바로 윤치호이다. 다만 윤치호를 작사자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50년 전 한 한국 애국지사’로 지금은 ‘숨은 이름’이라고 하여 적대시하지 않았다.”
-
양소당(養素堂) 표지판을 보고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장)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안내문을 써서 종가 사랑채 앞에다 표지판을 세웠을까?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그 주체는 경상북도일 것이고 안동시에 있는 문화재이니 안동시도 그 당사자일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인 종손과 동성마을에 사는 일족들도 ‘읽어보지 않아서 몰랐다’는 정도로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갑작스럽게 이런 민망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안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종가 중의 한 곳인 안동 김씨 대종택인 ‘양소당(養素堂)’의 안내 표지판에 단순한 오자(誤字) 수준이 아닌 몇 가지의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서다. 물론 글을 쓸 때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잘못이 있을 수는 있다.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는 속언까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금석문에 버금가는 지정문화재 안내판은 그 경우가 다르다. 권위에 따른 파급효과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담긴 내용은 물론 글자 한 자까지도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더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이를 시정해야 한다. 먼저 현재 종택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영문 생략). 安東金氏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5호) 김씨 종택은 조선 전기 때 문신이었던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의 종갓집이다. 이 집이 위치한 소산리는 김영수의 할아버지인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이 15세기경에 입향한 이래 안동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김영수의 아들은 평양부 서윤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이고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이후 김영수의 후손들은 조선 후기 최대의 문벌로 성장하였다. 안동 김씨 종택은 ‘ㅁ’자형의 기와집으로 남서향이다. 대문은 없으며 사랑채와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왼쪽의 안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왼쪽에 방을 두었고, 오른쪽은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사랑채와 대청 사이에는 들문을 달아 필요할 때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하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필자 또한 『안동의 문화재』 라는 책을 몇 차례 간행한 터라 안내판의 잘못된 내용을 본 뒤 돌아와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1996년 간(刊), 미흡한 내용이었지만 현행 안내판의 오류는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욱 안도한 것은, 문화재 안내란에 김삼근(金三近)-김계권(金係權)과 그 아랫대인 학조(學祖, 出家), 영전(永銓, 司憲府 監察), 영균(永勻, 進士), 영추(永錘, 水原府使), 영수(永銖, 司憲府 掌令) 오형제, 그리고 영(瑛)과 번(璠), 순(珣) 삼형제까지 간략하나마 계보(系譜)를 표로 만들어 소개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계권의 동생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도 빠뜨리지 않았다. 보백당은 안동 김씨 가문의 최초 문과 급제자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필자 역시 "이 건물은 성종 때의 명신 양소당 김영수 공의 종가댁이다.”라고 소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 대종중 사무총장의 자문을 받은 뒤 그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졌다. 안내판을 포함한 그간의 소개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양소당 김영수’라고 썼기 때문이다. ‘양소당(養素堂)’은 김영수의 12대손으로 삼당 김영과 창균 김기보로 이어지는 소산 안동 김씨 대종가의 종통을 이은 인물인 동야(東埜) 김양진(金養根, 1734-1799)이 특별히 종갓집의 당호(堂號)로 그렇게 지은 것인데 말이다. 가장 큰 잘못 만을 우선 잡아서 안내판의 첫 문장을 다시 쓴다면, "이 집은 안동 김씨 대종택으로, 시조의 11세인 장령공 김영수가 처음으로 지었다. 그의 12세손 동야 김양근에 이르러서 당호(堂號)를 ‘양소당(養素堂)’이라 명명하였다.” 정도가 될 것이다. 시급히 수정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다소 장황하게 예전에 펴냈던 책 내용까지 들춰낸 것은, 안내판에서 안동 김씨 종가를 소개하면서 김영수의 삼형제 가운데 둘째인 김번(金璠) 만을 들어서 ‘최대의 문벌’로 성장했던 그의 후대를 이 종가가 잇고 있다고 표현해 계보상의 중대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는 ‘환부역조(換父易祖)’다. 의당 장남인 삼당공(三塘公) 김영(金瑛, 1475∼1528)을 소개한 뒤 특히 현달(顯達)했던 둘째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직계 후손들로 이어갔어야 했다. 이쯤에서 정리한다면, 안동 김씨 종가는 삼당공이지 서윤공의 종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청백(淸白)으로 전가(傳家)한’ 안동 김씨 가문에서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김번은 중종8년(1513)에 35세로 문과에 급제해 전적, 경기도사, 이조정랑, 평양서윤, 시강원 문학 등 직을 지낸 뒤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직에서는 탁월한 경륜(經綸)을, 외직에서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전범(典範)을 보이는 등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 후손들 가운데 문과 급제자 162분, 생원 168분, 진사 236분, 16분의 정승, 55분의 판서, 8분의 대제학, 3분의 왕비를 배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가는 특별한 경우(養子)가 아니라면 맏집으로 내려오는 것이 상례다. 그렇다면 김영(金瑛)이란 분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이처럼 종가 안내문에서 완전히 빠졌고, 그 후손들 또한 전혀 소개되지 않았을까? 삼당공 김영은 김영수의 장자(長子)로서 학덕은 물론 관료로서의 업적까지 두루 갖춘 분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후손들은 반가(班家)의 전통을 수립해 안동 소산(素山) 본향(本鄕)을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21세에 생원과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뒤 병인년 별시(연산군12, 1506) 때 32세로 문과에 급제했다. 4살 적은 서윤공보다 7년 전에 이룬 대과 급제였다. 그 뒤 수찬, 정언, 교리, 김제군수, 장령, 동부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두루 지냈다. 삼당이 급제한 문과는 연산군 당시에 치러진 마지막 대과였는데, 동방(同榜)으로는 김안로(金安老, 壯元)가 있다. 삼당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당한 분들의 억울한 죄를 회복시켜 줄 것을 상소하는 등 바른 일에 앞장섰던 강직한 선비요 관료로 살다가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삼당공과 그 아우인 서윤공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삼당공은 청풍계(淸楓溪), 서윤공은 장의동(莊義洞)으로 나누어 살다가 후일 삼당공은 직계 자손에게 이 터를 물려준 뒤 이곳을 떠나 안동 본향으로 귀거래(歸去來)했다. 삼당공의 후손 가운데 저명한 이로는, 손자에 창균(蒼筠) 김기보(金基報, 1531∼1588)가 있는데, 그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의 사위로 학문과 행검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 후기의 인물로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이 있는데 30세에 문과에 급제해 형조참의를 지내는 등 조야(朝野)에 널리 드러났다. 이렇기 때문에 결코 본향을 지킨 맏집이 종가 안내에서 누락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삼당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소산(素山)을 중심으로 한 안동에는 서윤공 직계 후손들이 단 한 집도 세거(世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억울한 형님에다 답답한 후손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지적할 부분은, 앞의 사안에 비하면 다소간은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알만한 이들조차 잘못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까 해서다. 안내판의 내용 중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 부분이다. ‘고손’은 ‘고손(高孫)’이라고 쓴 것일 터. 서윤공 김번의 고손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고손’은 ‘현손(玄孫)’이라고 쓰는 것이 바른 표기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조(高祖)와 상대적인 고손(高孫)으로 쓸 수 있으니 잘못이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사랑방에서 들은 것만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상당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보이겠다. 『명재유고』 번역본의 주(註)에 보면, ‘문숙공(文肅公)’을 설명하면서, "시조 윤신달의 고손(高孫)인 윤관(尹瓘)으로, 문숙은 그의 시호이다.”라 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번역본 주석에서도 또한 "서영보(徐榮輔)가 서종태(徐宗泰)의 고손(高孫)이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라 했다. 권위 있는 서책에조차 고손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아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권7 「문자부(文字部)」에 나오는 내용이다. "무릇 고조(高祖)라는 것은 고대(高大, 높고 큼)에서, 현손(玄孫)은 현원(玄遠, 아득하고 멈)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高祖)는 있어도 고손(高孫)은 없고, 현손(玄孫)은 있지만 현조(玄祖)는 없다. 그래서 지금 현조(玄祖)니 고손(高孫)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凡稱高祖者는 取其高大之義요 玄孫者는 取其玄遠之義라 故語曰有高祖 而無高孫이요 有玄孫 而無玄祖니 今謂玄祖高孫者는 誤矣라)” 첨언한다면,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란 부분에서 음서(蔭敍)를 주석으로 처리해 안내문 하단에 작은 글씨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을 세웠거나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의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라는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오늘날의 별정직 공무원과 같은 것이나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영천군수는 영천군수(榮川郡守)인지 영천군수(永川郡守)인지 분명하지 않다. 장령공 김영수는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한자로 병기(倂記)했으면 좋았을 부분이다.
-
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
선우예권과 랑랑, 한중 우정과 화합의 메시지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 이하 문체부)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원장정길화, 이하 진흥원)과 함께 한중 수교 30주년과 ‘2021-2022 한중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해 11월 23일(수) 오후 7시 30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클래식 공연을 열고 음악으로 우정을 나눈다. 한국과 중국은 올해 수교 30주년을 기념하고 문화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기위해 지난해에 ‘2021-2022 한중 문화교류의 해’를 선포한 바 있다. 이에 작년부터 공식표어(슬로건)인 ‘문화로 나눈 우정, 미래를 여는 동행(중문: 文化增友谊,同行创未来)’을 주제로 다양한 문화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양국 피아노 연주자들이 호흡을 맞추는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과 중국은 수교 이후 30년간 쌓아온 우정을 확인하고, 마음으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시간을 가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음악회는 지난 15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 간에 문화교류 확대의 중요성을 확인한 뒤 열리는 행사로서 더욱 의미가 크다. 선우예권-아리랑, 랑랑-모리화 등 다양한 음악 소개 이번 공연에서는 국내외 무대에서 각광받고 있는 한국의 피아노 연주자 선우예권과 중국을 대표하는 피아노 연주자 중 한 명인 랑랑이 약 100분 동안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 감동의 무대를 선사한다. 선우예권은 1부에서 요하네스 브람스의 ‘여섯 개의 피아노 소품’, 클로드 드뷔시의 ‘판화’, 모리스 라벨의 ‘라 발스’, 그리고 아리랑을 선보인다. 2부에서는 랑랑이 프레데리크 쇼팽의 ‘야상곡 올림다단조’와 ‘왈츠 내림라장조’,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 마누엘 데 파야의 ‘불의 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중 일부를연주한다. 또한, 선우예권의 아리랑에 이어 랑랑은 중국 민요 모리화를 연주하며 한국과 중국의 우정의 밤을 수놓는다. 문체부 정향미 문화정책관은 "얼마 전 있었던 한중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민간 교류, 특히 젊은 세대 간 교류를 확대해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시진핑 주석도 인적‧문화 교류의 중요성에 공감을 표한 바 있다.”라며, "‘2021-2022 한중 문화교류의 해’ 이후에도 한중 간 교류, 특히 미래 세대 간 교류를 확대하여 문화로 나눈 우정이 미래를 여는 동행으로 이어지도록 지원하겠다.”라고 밝혔다.
-
'삼국유사 고장' 군위에서 '삼국유사 경연대회' 열린다'삼국유사의 고장' 군위에서 풍성한 전국경창대회가 열린다. 코로나 줄확산으로 예선은 8월 28일 비대면 동영상 심사로 치루어진다. 24일까지 동영상을 이메일로 제출하면 된다. 대한불교조계종 인각사에서 주최하는 ‘제1회 삼국유사 전통음악 경연대회’ 본선은 경상북도 '인각사' 특설무대에서 오는 9월 4일 열린다. 삼국유사를 집필한 보각국사 일연의 업적을 기리고 전통음악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인각사는 고려 충렬왕 때 명승 일연스님이 5년여 동안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저술한 뒤 입적한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특히 이곳에서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했다고 전해져 당시 전국 불교의 본산임을 알 수 있다. 법타 대종사(은해사 조실)는 "우리의 민족정신의 혼불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바로 우리 인각사고 또한 그 기본 텍스트가, 우리 성전이,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의 소중한 성전이 바로 삼국유사이다." 며 "인각사는 다음달 3일과 4일 산사음악회와 제1회 삼국유사 전국 전통음악 경연대회를 잇달아 열어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라고 전했다. 호암스님(인각사 주지)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새로운 시대조류에 맞게 활용하여 우리 문화를 재구성하여 활용해야 한다.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의 자산이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과제이다.”라고 밝혔다. 이번 대회는 '판소리'와 '민요' 두 파트로 경연을 치른다. 유치부·초등부, 중·고등부, 일반부로 나눠 심사를 진행한다. 접수 기간은 오는 24일까지이며 ‘삼국유사 전통음악 경연대회’ 블로그를 통해 참가 지원 신청서를 작성한 후 이메일로 영상을 제출하면 된다. 시상은 총합 장려상 12개, 우수상 6개, 최우수상 6개, 대상 6개 시상이며 총상금은 1840만원이다. 예선 결과는 8월 30일 블로그 공지와 (주)국악신문사 및 개별 문자로 통보할 예정이다. 총상금은 1,840만원으로 장려상 12개, 우수상 6개, 최우수상 6개, 대상 6개를 시상한다. 박문희 총연출은 "이번 대회가 전통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끼를 마음껏 발산하는 장이 되어 우수한 인재를 발굴·육성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앞으로 권위 있는 전통음악 등용문으로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삼국유사’ 전통음악 경연대회 조직인력 구성은 대회 본부장 호암 스님, 운영위원장 박병준, 조직위원장 박애리, 총연출 박문희 교수로 진행된다. 국악인 ‘박애리’가 진행을 맡는다. 박문희 총연출은 "이번 경연대회는 전통음악에 관심 있는 유치원생, 청소년, 성인들이 신명을 발산하는 무대의 장이 되어 우수한 인재를 발굴, 육성하며 권위 있는 전통음악 등용문으로 정착시키고자 하는 기대가 크다”며 "무관심했던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어 전통음악의 활성화를 도모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이어 "‘제1회 ‘삼국유사’ 전통음악 경연대회를 통해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 있는 전통음악 대회 등용문으로 정착시키고자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오늘 제18회 대구아리랑경창대회에서 경연장에서 국악인들이 입을 모아 "첫번째 경연대회이지만 국악계에서 권위있는 판소리 및 민요 부문 명창들이 심사하는 경연대회라고 소문이 났다"라고 전했다.
-
[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98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이 음반에 대해서는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1987년 가을 어느 날, 국악(판소리)이나 한번 들어볼까 하는 마음에 항상 고전음악 음반을 구입했던 종로에 있는 신나라레코드가게를 방문했는데, 그 때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수 천종의 음반 중에 국악음반은 10종류가 안되었다, 더구나 내가 찾는 판소리음반은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여러 음반가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듣고 있었는가? 심한 자성과 함께 고전음악으로부터 ‘국악으로의 귀향’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카루소, 질리 같은 성악가들의 유성기음반이 복각되어 호평리에 판매되는 것을 보고, 우리의 판소리도 일제강점기에 유성기음반으로 많이 발매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 것도 복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뜻이 같은 몇 사람과 줄이 닿아 돈을 각출하여 사가반으로 만들려고 일을 추진했다. 제목은 <판소리 5명창>으로 명명하고, 5명창의 사진으로 음반자켓을 꾸미고, 해설서는 5명창에 대한 설명, 가사와 주석을 달고, 유성기음반의 출처를 기재하고, 그리고 복각사업을 계속한다는 결의 하에 부제를 '명인명창선집(1)'로 붙였다. 판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살 수 있게 판매용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에 고전음악 레코드를 구입하는 신나라를 찾아가서 필자가 제의를 했다. 만약 음반이 팔리지 않으면 우리가 모두 인수를 할 테니 <판소리 5명창>음반을 판매용으로 발매하는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신나라에서 흔쾌히 승낙을 해서 명실 공히 우리나라 유성기음반 복각반 제1호 <판소리 5명창> 음반이 1988년 올림픽이 열린 시기에 빛을 보게 되었다. 한 타이틀에 1,000장의 음반을 판매하기 어렵던 시기에, 우리가 받은 로열티 5,500장(장당 200원이니 1,100,000원임)에 달하였으니 대단한 성과였다. 5명창의 판소리 대목 11트랙(A. B면)을 담은 이 음반은 기차가 지나가는 길옆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것 같은 열악한 음질이지만, 책에서만 보던, 대명창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예상 외로 국악애호가로부터 성원을 받았으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한편 들을만한 판소리 음반 한 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가 제작에 참여한 <판소리5명창>은 LP음반(사진 1)으로만 출반되었다. 일제강점기시대의 유성기음반은 저작권이 애매하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지나 유성기음반만 있으면 누구나 복각이 가능하기도 하다. 1991년에 출반사인 신나라는 자기들이 보유한 유성기음반으로 음원과 해설서를 교체하여 한국의 위대한 판소리 명창들 (1) <판소리5명창>(# 2)이라는 동일한 타이틀로 CD음반을 출반하면서 LP음반의 5명창 사진이 실린 표지디자인을 사용하였다. 5명창 사진은 당시 한국일보 기자인 김훈(‘칼의 노래’ 저자)선생이 제공해준 것으로 적법하게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나라는 1993년경에 5명창 사진을 삭제하고 동일한 이름으로 CD음반(# 3)을 재출반하였다. 이런 이유로 <판소리5명창>이라는 이름의 음반은 3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신나라는 <판소리5명창> 출반을 시작으로 국악음반 제작의 선두주자로 그 동안 수많은 국악음반을 발매해 왔으며, 제작에 참여한 몇 사람은 1989년에 ‘한국고음반연구회’를 결성하여 유성기음반에 담겨져 있는 국악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복각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LP음반 <판소리5명창>은 유성기음반 복각의 효시이며, 국악음반 출반 전성기를 가져오게 한 이정표적인 음반이다. 지금까지 6,300여장의 국악CD음반이 출반되었다. 이 작은 기적을 이루게 한 결정적인 음반이 이 <판소리5명창> LP음반이다. 음질은 아주 열악하지만, 명반의 대열에 올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지금은 3종류 다 구하기는 쉽지 않다. 언제가 마스터링 기술이 더 발전하고 여유가 되면 <판소리 5명창> LP음반을 새로 CD음반으로 출반하고 싶다. * 관련 음반(#2):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SYNCD-004&page=1 본 글은 이전에 소개한 글을 수정하여 실음 * 국악음반의 자세한 내용은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www.gugakcd.kr) 참조.
-
대한불교관음종 홍파 스님 '9세 종정' 추대대한불교관음종 홍파 스님이 '9세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종정추대위원회는 낙산 묘각사(서울 종로구 종로 63가길 31)에서 오후 2시 30분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전 종단 원로와 김종규(박물관협회 명예회장) 등 사회문화계 인사가 참여 한 가운데 종정 추대 대법회를 개최했다. 종정에 오른 홍파 큰스님은 지난 1961년 관음종 개조 태허 대종사 문하에서 득도했다. 1963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발기 총회 참여해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시위 주도하고, 1965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3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불교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이어 청담, 성철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기도 한 스님은 1967년 대불련 군승촉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지난 1985년 종단협의회 사무총장과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으며 불교계 내부에서의 활동 보폭을 넓히기 시작해 1988년 관음종 총무원장 겸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원로원장 법륜(흥륜사 주지)스님은 "30여 년간 종단의 위상 제고를 위해 진력해 주신 홍파 스님께 감사를 표한다"며 "종단의 큰 어른으로 종단의 기강을 바로 세워 주실 것"을 당부했다. 9세 종정 홍파 스님은 "지난 2010년 8세 종정 남천 죽산스님 원적 이후 오랜 시간 종정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던 만큼 빈자리를 채우는 막중한 중책을 맡게 돼 부담이 크다"며 "최선을 다해 종단의 위상과 발전을 위해 힘쓰겠다"고 수락사를 대신했다. 1961년 태허 대종사 문하에서 득도의 길을 열어 준 관음종 개조는 한국전쟁의 폐허가 된 청계천변 청소년들을 묘각사로 모이게 해 끼니를 해결해주고 배움을 길을 열어 주는 등 민생불교에 공헌 한 스님이다. 대법회장에서는 홍파스님이 역주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법화경)’을 배포했다. 이 경전은 관음종의 근본 경전이자 대승불교의 정수(精髓)로 꼽힌다. 홍파스님은 "이 세상을 떠나20, 30년이 흘러 이 책을 낸 것은 참 잘한 일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홍파 스님이 묘법연화경을 번역하게 된 인연은 1963년으로 거슬러 간다. 당대의 강백(講伯)으로 이름을 떨친 운허 스님(1892∼1980)을 찾아가 번역 출간을 부탁했다. 그러자 운허 스님은 사촌인 춘원 이광수(1892∼1950)와 이 경전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춘원은 "묘법연화경은 기독교로 치면 성경이다. 가볍게 접근할 수 없으니 100독(讀)을 한 뒤 번역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춘원은 8개월 만에 100번을 읽고는 번역을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6·25한국전쟁이 터지고 납북되어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운허 스님이 춘원의 집에 가봤으나 원고는 찾을 수 없었다. 이후 동국대 역경원장에 취임한 운허 스님이 묘법연화경을 출간했다. 홍파 스님은 "‘묘법연화경’ 번역 출간으로 부처님 제자 된 밥값을 제대로 한 것 같다”고 했다. 홍파 스님은 "당시 운허 스님은 ‘춘원의 묘법연화경이 세상에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며 아쉬워했다”고 회고했다. ‘불교계의 마당발’로 알려진 홍파 스님이 아니면 알 수 없었을 일화이다. 홍파 스님은 운허 스님의 책이 나온 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언어 습관도 달라져 책을 새롭게 내게 됐다고 했다. 이번에 출간한 묘법연화경은 12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신라시대 원효대사부터 조선시대 김시습에 이르기까지 선지식들이 내놓은 해설과 일본 중국의 책을 참고했다. 각 품(品)의 말미에 주석을 달았다. 그는 "원효 스님은 법화(法華)의 문을 통과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며 "묘법연화경은 부처님이 마지막 시기 설법한 것으로 모든 경전의 사상과 흐름을 나침반처럼 안내 한다.”고 말했다.
-
[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92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우리의 판소리가 빛이 바래고 현대인의 귓전에서 멀어져 가는 1970년대에, 판소리학회는 1973년 가을에 판소리 감상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방송국의 연주실을 빌려 한 달에 한번 3회를 계속하다가, 1974년 1월부터는 한국브리태니커회사(대표 한창기)와 판소리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함으로써 판소리 감상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76년 3월 창간된 월간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서 그 이름을 ‘뿌리깊은나무 판소리감상회’(매주 수요일 공연)로 변경되어 1978년 10월에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서 100회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여기에 당대의 최고의 명창 21명과 명고 5명이 참여하였다. 이 감상회는 국내에서 음악공연 행사 중에서는 처음으로 100회를 기록하였으며 판소리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판소리 감상회 무대에 올려놓았던 판소리를 음반과 활자로 기록하여 영원히 간직하는 사업을 기획하면서,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진을 참여하게 하여 1982년에 스튜디오 녹음으로 ‘뿌리 깊은 나무 판소리’ 5바탕과 ‘단가’ 음반을 LP전집으로 고급스럽게 출반하였다. 해설서에는 판소리란 무엇이냐? 라는 이름으로 판소리의 전반에 대해 설명, 해당 판소리의 내력, 소리꾼과 고수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주석이 달린 가사가 수록되어 있으며 영어로 번역(가사 제외)되어 있다. 2000년에 한국브리태니커회사는 이 LP전집을 CD전집, <브리태니커 판소리전집>이란 이름으로 <적벽가>(소리:정권진 북:김명환 4CD), <춘향가>(소리:조상현 북:김명환 6CD), <심청가>(소리:한애순 북:김명환 5CD), <흥보가>(소리:박봉술 북:김명환 4CD) <수궁가>(소리:박봉술 북:김명환 3CD) 5바탕과 <단가>(1CD), 총 23장을 출반하였다. 당시 최고의 명창, 정권진, 조상현, 한애순 명창의 소리를 담았으며, 박봉술 명창은 <수궁가>, <흥보가>, 2바탕을 담았다. 반주는 모두 김명환 명고가 맡았다. <단가>음반에는 판소리 음반에 참여한 4명창의 소리가 2~3곡씩 수록되어 있다. CD에는 LP음반의 자세한 해설서가 축소 수록되었으며, 주석이 생략되었다. CD작업하면서 트랙을 세분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브리태니커 판소리전집>은 최고의 판소리 5바탕 전집이다. 판소리 완창음반은 판소리꾼이 뛰어 넘어야 할 태산이다. 완창공연에 도전하는 판소리꾼이 그 실황녹음을 활용하여 CD나 디지털음반(음원사이트 소개)으로 출반하는 것이 가능한데 2021년에는 판매용으로 판소리 음반이 한 장도 출반되지 않았다. 판소리꾼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브리태니커 판소리 5바탕은 바탕별로 CD나 LP를 중고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 한 바탕씩 구해서 전집으로 완성하는 것도 재미이다. * 본 글은 이전에 소개한 글을 수정하여 완성함. *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Z-LIS3-A0001&page=1 * 국악음반의 자세한 내용은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www.gugakcd.kr) 참조
-
K-콘텐츠 홀대하는 중국…"한한령 해제?...어렵다"전 세계가 '방탄소년단(BTS)', '파친코', '미나리', '오징어게임' 등 한국 문화와 콘텐츠에 열광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올해도 '한한령'을 이어갈 전망이다.한국콘텐츠진흥원은 최근 발간한 '중국콘텐츠산업동향(2022년 2월호)'에서 "한중 양국 정부 모두 새로운 정부의 집권교체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며 "올해 내에 서로간에 정치적 부담이 되는 (한한령에 대한) 큰 변화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중국은 2016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후 한국 영화와 드라마 수입을 전면 중단하는 '한한령'을 발동했다.중국 정부는 당시 '한한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는 드라마나 게임 등 한국산 콘텐츠의 유통이 금지됐다. 단체 관광객들의 한국 방문도 뚝 끊겼다.한국에 대해 우호적이던 중국인들의 시선도 이 즈음부터 바뀌었다. 한복과 김치의 기원을 놓고 문화공정에 나섰고 "한국전쟁은 한미 양국이 겪은 고난의 역사"라고 한 BTS의 발언을 놓고 중국인의 희생정신을 무시했다며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영화 '오! 문희'가 중국 극장에서 개봉하며 분위기가 전환됐다. 올해 들어서는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슬기로운 감빵생활' 등 한국 드라마의 중국 내 방영이 재개됐다. 이에 따라 한한령이 전면 해제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커졌다. 중국인들은 우회 접속 프로그램인 가상사설망(VPN)을 통해 '파친코', '오징어 게임', '지옥' 등 K-콘텐츠를 불법 시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하지만 양국의 정치상황으로 봤을 때 올해 한한령 전면 해제는 힘들다는 분석이다.중국에서는 오는 10월 20차 당대회에서 리커창 총리 등 여러 상무위원들이 교체된다. 3연임에 들어가는 시진핑 주석은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지만 수뇌부 권력 교체가 예상된다. 중국은 후보 시절 사드 추가 배치를 공약한 윤석열 당선인을 주시하고 있다.중국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는 지난 7일 "사드라는 단어는 중·한 관계의 금기어가 됐다"며 "양국은 다시는 그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콘진원은 다만 올해가 '한중수교 30주년'이자 '한중문화교류의 해'이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국제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콘진원은 "지정학적 대립이 다시 뚜렷해지고 있는 현 구도 속에서 한국의 새 정부가 이미 한미 동맹 강화를 천명한 만큼, 중국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보다 전향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이어 "이같은 중국의 태도 변화까지 고려하면, 한중 양국간 문화교류는 한한령 이전으로의 완전 정상화까지는 어렵겠지만 과거에 비해 보다 완화된 국면으로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한편, 콘진원은 중국 시진핑 정부가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결정되는 20차 당대회를 앞두고 주선율(애국주의 작품) 콘텐츠를 적극 지원하는 등 정치적 활용에 나설 것으로 내다봤다.
-
‘셜록 홈즈’ 전집 세트 리커버 출간추리 소설의 절대 고전 ‘셜록 홈즈’를 완역본으로 만날 수 있는 문예춘추사판 셜록 홈즈가 봄을 맞아 새로운 커버로 재탄생했다. 수많은 문학 작품 캐릭터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셜록 홈즈를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저자 아서 코난 도일은 40여년간 장편 4편, 단편 56편을 통해 세상에 셜록 홈즈를 소개했다. 셜록 홈즈는 이미 영화·드라마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원작에서 만날 수 있는 셜록 홈즈 특유의 재치와 번득이는 추리력을 뛰어넘기는 힘들다. 게다가 세간에 다수 출간된 셜록 홈즈 관련 도서들은 아동물에 치우쳐 명성에 비해 완역본을 읽어 본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문예춘추사 셜록 홈즈 전집 세트 완역본은 그간 많은 분량에 지레 겁을 먹고 읽기를 도전하기 꺼렸던 독자라도 누구나 읽기 쉽고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으며, 다양한 삽화를 삽입해 읽는 재미를 더해 홈즈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문예춘추사의 셜록 홈즈는 지난해 ‘윌라’와 협업으로 국내 최초로 오디오북으로도 출간돼 독자들의 큰 호응을 끌어냈다. 최신 번역으로 만나는 문예춘추사 셜록 홈즈 전집 세트는 △세련된 표지 △읽기 편한 본문 디자인 △가독성 뛰어난 번역과 편집 △친절한 주석으로 많은 독자에게 만족감을 선사할 예정이다. 전집에는 아서 코난 도일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담은 ‘셜록 홈즈의 발자취’가 부록으로 담겨 홈즈 전집과 관련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대부분 해결해 줄 것이다. 문예춘추사판 셜록 홈즈 전집은 셜록 홈즈 이야기가 주는 생동감을 그대로 담아 기존 블랙 커버에서 다채로운 컬러감을 입힌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됐다. 시리즈의 매력은 전권을 차례로 꽂았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의 멋진 실루엣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리커버 에디션은 예스24 온라인 서점에서만 단독으로 만날 수 있다. 특별히 전권이 담긴 하드 케이스를 제작해 소장 가치를 높였다. 문예춘추사 담당자는 "책 읽기 좋은 봄날, 셜록 홈즈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완독하는 것을 추천한다”며 "수많은 셜로키언(Sherlockian)을 만들어낸 위대한 추리 소설을 읽다 보면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아쉬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불교박람회 10년 성과 대구에서 ‘불교문화엑스포’로 꽃피‘천년, 신라 불교 문화의 울림’을 슬로건으로 한 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가 4월 7일부터 10일까지 나흘간 대구 엑스코 서관 1홀에서 열린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친 지역민들에게 문화적 치유를 제공하는 한편, 대구·경북 지역의 유구한 전통문화 자산을 불자와 시민들에게 선보이는 특별한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는 4월 7일 오후 2시 개막식으로 시작한다. 개막식에는 이번 행사의 주최사인 불교신문사 사장 현법스님, BBS불교방송 이선재 사장을 비롯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대구·경북 지역 정관계 인사 등이 참석해 역사적인 대구·경북 불교엑스포의 개막을 축하할 예정이다. 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후원과 대구광역시무형문화재연합회, 대한민국명인회, 대구·경북공예협동조합, 한국차인연합회 등의 협력으로 치러진다.이번 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에는 불교와 전통문화산업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과 불교문화산업 종사자 등 169개 업체가 참여해 239개 부스를 꾸린다. 이들 예술인들은 공예, 건축, 의복, 식품, 수행의식, 문화산업, 차 등 6개 분야에 걸친 전통불교문화상품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불교미술은 불교예술전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주제전 ‘장인의 손, 마음에 이르는 창문’은 대구무형문화재연합회와 함께 한다. 단청장, 모필장, 창호장, 대고장, 조각장 등 대구무형문화재연합회 소속 장인들이 일생에 거쳐 이룩한 작품으로 우리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불교·전통문화의 세계를 전시장에 불러온다. 기획전은 대구·경북의 지자체 콘텐츠와 관광 브랜드를 홍보하는 대구·경북 홍보관, 해외 전통 불교문화상품을 전시하는 해외교류전으로 구성됐다.특별전도 면면이 새롭다. 한국 템플스테이의 사령부인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은 템플스테이 20주년 기념 프로그램과 함께 사찰음식 특별전, 불교문화상품 ‘본디나’ 상품 등을 선보인다. 울주군공예협동조합은 전통기법을 활용한 도자, 의류, 다기, 침구류, 도요, 한지 등 울주군을 대표하는 전통 공예인들의 작품을 홍보한다. 대한민국 명인회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사상이 담긴 전통문화예술 작품을 준비했고, 한국불교미술공예협동조합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불교미술 작품을 폭넓게 펼쳐 보인다.한편 1홀 메인무대에서는 매일 오후 2시 따뜻한 불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유명 스님들의 초청법문을 라이브로 진행, 송출한다. 4월 8일에는 마가스님의 ‘내 인생에 꽃을 피우자’, 9일에는 주석스님의 ‘치유의 시대, 문화와 예술로 안부를 묻다’, 10일에는 지운스님의 ‘사진, 마음을 꿰뚫다’ 법문이 진행된다. 첫날인 7일에는 개막식 공식행사가 진행된다.이 밖에도 서관 야외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백담사 템플스테이, 다예감공방, 시니어벤처스, 대구파라미타 청소년협회 등 여러 단체에서 전통문화와 명상, 힐링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으로,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주최 측은 대구·경북의 지역적, 문화적 상생을 도모하는 이번 행사에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밝혔다.
-
대구경북 불교·전통문화를 한눈에 ‘장인의 손, 마음에 이르는 창문’전대구경북 지역의 불교문화와 전통문화를 한눈에 톺아보는 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가 4월 7일부터 10일까지 대구 엑스코 서관 1홀에서 열리는 이번 엑스포는 ‘천년, 신라 불교 문화의 울림’을 슬로건으로 열린다. 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를 대표하는 주제전은 대구무형문화재연합회와 함께 꾸린 ‘장인의 손, 마음에 이르는 창문’전이다. 불교문화와 전통문화를 엮어가는 장인들의 굳은살 박인 손에 주목해 단청장, 모필장, 창호장, 대고장, 조각장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전시한다. 먼저 단청장 전연호의 ‘하동칠불도’와 금니 ‘화엄경제5권변상도’가 전시된다. 모필장 이인훈은 붓으로 구현한 장인정신을 선보인다. 족제비 꼬리털(황모)과 염소털(양모), 쇠털(우모), 한우 귓속털(한우 이모) 등을 활용한 ‘현판 특수필 3종’이 특히 눈길을 끈다. 창호장 이종한이 홍송으로 제작한 ‘모란꽃살문’, 대고장 김종문의 ‘단청 법고’, ‘백골 승무북’, ‘연꽃조각단청 승무북’도 실물로 만나볼 수 있다. 조각장 김용운의 ‘백금상감정병’과 ‘금상감봉황향로’, ‘후렴통’도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낸 문화예술의 극치다. 문화산업전에는 대구와 경북의 불교문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170개 업체가 224개 부스를 차린다. 건축, 공예, 식품, 차(茶), 수행의식, 문화산업과 IT, 의복, 국제 불교 등 다양한 분야의 불교와 전통문화를 조명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대구경북 지자체 부스에서는 지역 관광과 홍보를 포함해 방문객 대상 현장 이벤트를 진행한다. 울주군도 공예 프로그램을 통해 14개 공예 업체의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문화 상품으로 자리매김해온 ‘템플스테이’ 공식 출범 20주년을 맞아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준비한 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하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가봄 직한 템플스테이 사찰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기차 여행이나 지역 여행과 연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홍보한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차원에서 개발해온 불교문화 상품 브랜드인 ‘본디나’ 상품을 특별 전시하는 부스가 마련됐으며, 사찰 음식 전문 스님들이 진행하는 사찰 음식 프로그램도 알차게 준비했다. 불교문화의 정수를 담아 서울국제불교박람회를 한 단계 도약시킨 것으로 평가받아온 불교예술 장인들의 작품전시도 대구를 찾는다. 약 40부스 규모로 불상, 탱화, 조각, 회화, 소품 등 현재 한국 불교예술의 맥을 이으며 전통의 복원과 현대적 계승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장인들이 솜씨를 뽐낸다. 호평을 받으며 불교예술 관련 페어로 자리 잡아가는 서울국제불교박람회의 붓다아트페스티벌이 대구 지역에서도 흥행을 이어갈지 주목해볼 만하다. 행사 기간 매일 오후 2시에 진행하는 무대 프로그램은 스님들의 법문 초대석으로 꾸며진다. 4월 8일에는 마가스님의 ‘내 인생에 꽃을 피우자’ 초청법문, 9일에는 주석스님 초청법문이, 10일에는 지운스님 초청법문이 준비됐다. 엑스코 서관 외부에서는 백담사 템플스테이 부스, 다예감공방 블록체험 부스, 시니어벤처스 상감드림캐쳐 체험부스, 사단법인 대구파라미타 청소년협회의 체험 부스 등이 운영된다. 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는 4월 7일 오후 2시 개막식이 진행되며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라이브로 참여할 수 있다.
-
대구경북 불교·전통문화를 한눈에 ‘장인의 손, 마음에 이르는 창문’전 개최대구경북 지역의 불교문화와 전통문화를 한눈에 톺아보는 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 개막이 보름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4월 7일부터 10일까지 대구 엑스코 서관 1홀에서 열리는 이번 엑스포는 ‘천년, 신라 불교 문화의 울림’을 슬로건으로 열린다. 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를 대표하는 주제전은 대구무형문화재연합회와 함께 꾸린 ‘장인의 손, 마음에 이르는 창문’전이다. 불교문화와 전통문화를 엮어가는 장인들의 굳은살 박인 손에 주목해 단청장, 모필장, 창호장, 대고장, 조각장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전시한다. 먼저 단청장 전연호의 ‘하동칠불도’와 금니 ‘화엄경제5권변상도’가 전시된다. 모필장 이인훈은 붓으로 구현한 장인정신을 선보인다. 족제비 꼬리털(황모)과 염소털(양모), 쇠털(우모), 한우 귓속털(한우 이모) 등을 활용한 ‘현판 특수필 3종’이 특히 눈길을 끈다. 창호장 이종한이 홍송으로 제작한 ‘모란꽃살문’, 대고장 김종문의 ‘단청 법고’, ‘백골 승무북’, ‘연꽃조각단청 승무북’도 실물로 만나볼 수 있다. 조각장 김용운의 ‘백금상감정병’과 ‘금상감봉황향로’, ‘후렴통’도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낸 문화예술의 극치다. 문화산업전에는 대구와 경북의 불교문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170개 업체가 224개 부스를 차린다. 건축, 공예, 식품, 차(茶), 수행의식, 문화산업과 IT, 의복, 국제 불교 등 다양한 분야의 불교와 전통문화를 조명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대구경북 지자체 부스에서는 지역 관광과 홍보를 포함해 방문객 대상 현장 이벤트를 진행한다. 울주군도 공예 프로그램을 통해 14개 공예 업체의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문화 상품으로 자리매김해온 ‘템플스테이’ 공식 출범 20주년을 맞아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서 준비한 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하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가봄 직한 템플스테이 사찰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기차 여행이나 지역 여행과 연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홍보한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차원에서 개발해온 불교문화 상품 브랜드인 ‘본디나’ 상품을 특별 전시하는 부스가 마련됐으며, 사찰 음식 전문 스님들이 진행하는 사찰 음식 프로그램도 알차게 준비했다. 불교문화의 정수를 담아 서울국제불교박람회를 한 단계 도약시킨 것으로 평가받아온 불교예술 장인들의 작품전시도 대구를 찾는다. 약 40부스 규모로 불상, 탱화, 조각, 회화, 소품 등 현재 한국 불교예술의 맥을 이으며 전통의 복원과 현대적 계승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장인들이 솜씨를 뽐낸다. 호평을 받으며 불교예술 관련 페어로 자리 잡아가는 서울국제불교박람회의 붓다아트페스티벌이 대구 지역에서도 흥행을 이어갈지 주목해볼 만하다. 행사 기간 매일 오후 2시에 진행하는 무대 프로그램은 스님들의 법문 초대석으로 꾸며진다. 4월 8일에는 마가스님의 ‘내 인생에 꽃을 피우자’ 초청법문, 9일에는 주석스님 초청법문이, 10일에는 지운스님 초청법문이 준비됐다. 엑스코 서관 외부에서는 백담사 템플스테이 부스, 다예감공방 블록체험 부스, 시니어벤처스 상감드림캐쳐 체험부스, 사단법인 대구파라미타 청소년협회의 체험 부스 등이 운영된다. 2022대한민국불교문화엑스포는 4월 7일 오후 2시 개막식이 진행되며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라이브로 참여할 수 있다.
-
[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80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1990년대는 복각음반의 전성기였다. 1993년에 서울음반이 일본 요코하마창고에 잠자고 있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빅터사의 금속 원반을 인수하여 복각사업을 시작하자, 국내에서는 일제강점기의 한국음악 출반의 양대 산맥인 일본 콜럼비아사의 원반에 주목하게 된다. 콜럼비아사의 원반 음원은 1987년에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KBS에서 테이프로 복사해온 바 있다. 1995년에 LG그룹의 LG미디어가 복각사업을 전제로 일본 콜럼비아사로부터 유성기음반 원반의 음원을 인수하여 복각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LG미디어는 1995년 6월에 첫 음반으로 콜럼비아유성기원반(1)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2CD)을 선보인 이래 1996년 9월 콜럼비아유성기원반(14) <판소리의 전설 5명창>까지 총 14집을 출반하였다. 창극이란 중국의 경극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공연 형태로 판소리에 나타난 인물을 소리꾼이 나누어 배역을 맡고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창극 춘향전’ 음반은 1934년에 일본에서 녹음되었으며, 김창룡 명창이 도창을 맡고 이화중선, 오비취, 권금주 명창이 참여하였으며 북은 한성준 명고가 맡았다. 모두 조선성악연구소에서 활동한 명창들로 당시의 창극 모습을 조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이 음반은 18장(36면)으로 ‘연애편’, ‘이별편’, ‘재봉편’, 각각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번에 걸쳐 순차적으로 출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은 <콜럼비아판 춘향전>으로 많이 불리고 있다. 콜롬비아 금속 원반은 현재 일본 오사카 국립민족박물관에 해외자료로 대만음반, 상해음반, 조선음반(2,846면)으로 구분되어 보관되어 있다. 유성기 복각음반은 유성기음반에서 직접 음원을 녹음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음질이 매우 열악하다. 혹자는 기찻길 옆에서 음악을 듣는, 소나기가 오는 가운데 음악을 듣는 격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콜럼비아유성기원반 시리즈는 금속원반에서 직접 음원을 발췌하였기 때문에 그 깨끗하고 선명한 소리에 놀라기도 한다. 지금의 녹음기술로 출반된 음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이 시리즈의 해설서는 관련된 많은 자료와 사진, 곡 설명과 주석을 단 가사를 수록하여, 일반인들은 그 음원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료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콜럼비아유성기음반은 디지털음원으로 국내에 들어왔으나 상당한 양이 복각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콜럼비아원반시리즈는 지금도 중고음반사이트에서 만날 수 있다. 보이면 무조건 구해 놓아야 할 명반이다. * 본 글은 이전에 소개한 글을 수정하여 실었으면 지지난 주에 소개한 콜럼비아유성기원반(7) <정악의 원류를 찾아서)(기악편)와 같이 참고하시기 바람. . *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LGM-AK001(K001)*&page=1 * 국악음반의 자세한 내용은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www.gugakcd.kr)를 참조 바람.
-
[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66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1992년 봄, 당시 (주)서울음반(현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일본 협력사인 빅터회사에서 그들의 요코하마창고를 정리하던 중 다량의 한국음악 금속원반(Master 혹은 Mother Disc)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때 서울음반은 필자에게 이 원반의 가치를 문의해 왔으며, 필자는 한국고음반연구회 이보형 회장의 말을 빌려 "빅터 유성기원반은 우리의 문화재다. 이 원반을 인수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것이다.”라고 자문하였다. 이에 서울음반은 직접 일본으로 가서 실물을 확인한 후 발견된 전량을 인수하기로 하고, 1992년 8월에 588장(SP레코드 294장 분량)의 원반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빅터축음기주식회사(이하 빅터사)는 일본 콜럼비아사와 더불어 유성기(SP)음반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한국의 음반산업을 주도하였고 방대한 분량과 우수한 음질로 그 가치가 뛰어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유성기음반의 원반은 2차 대전의 혼란기에 음반회사의 관리공백으로 인한 분실과 공습으로 인하여 거의 소실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콜럼비아사의 원반은 오사카에 있는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빅터사의 원반은 이렇게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음반은 복각전문 부서를 신설하여 체계적으로 빅터 유성기원반의 복각사업을 추진하였으며, 필자의 듀얼 78회전 턴테이블을 차용하고 유성기음반 전용 카트리지로 원반을 재생하여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를 LP와 CD로 제작하게 된다. 그 첫 번째로 출반한 음반이 1993년 봄에 선보인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 1 <춘향전 전집>(3CD)이다. 전집물로는 판소리사에 가장 손꼽히는 음반으로, 원래 유성기음반 19매 38면이나 본 전집에는 농부가 2면이 빠져 36면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음원은 1937년 빅터사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으며 소리꾼으로는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 박록주, 김소희 명창이 참여하였고, 북은 한성준 명인이 잡았다. 이 전집에는 여태까지의 판소리 녹음에 따른 경험이 집약되어 있고, 녹음기술 또한 다른 전집에 비해 훌륭하다. 소리배역을 적절히 설정하고 극적 구성도 치밀하다. 당시의 유성기복각음반은 유성기음반에서 음원을 녹음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음질이 열악하였지만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는 원반에서 음원을 녹음하였기 때문에 그 깨끗하고 선명한 소리가 놀랍다. 해설서에는 많은 자료와 사진, 곡 설명과 주석을 달은 가사를 수록하여, 빅터 춘향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글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소리 그 자체도 훌륭하지만, SP복각반으로 음질도 우수하며 자세한 해설서가 더해지니 과연 국악명반이다. 일본은 이 귀중한 유성기원반을 선뜻 인계해줄 나라가 아니다. 당시 빅터사의 국제부에 근무하였던 지한파 인사인 요시히사 혼다 부장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겐 고마운 분이다. 빅터 유성기원반은 2012년에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그 해 필자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로엔엔터테인먼트로부터 국립민속박물관에 577매가 기증되었다. 일본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에 콜럼비아원반이 있다면 우리나라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빅터원반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현재 이 원반을 디지털음원으로 복각하는 작업을 고려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음반에서는 총 588 매 중 387 매, 66% 정도 LP와 CD로 복각되었다. 어렵게 보존되어 일본에서 돌아온 빅터 유성기원반은 경사스러운 전통음악 사료의 발굴이며, 국악음반사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 1 <춘향전전집>(3CD)이다. 지금은 출반된 지 오래되어 구하기 힘들지만, 중고음반시장에서는 간혹 볼 수 있다. 보면 무조건 구해야 할 국악명반이다.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SRCD-1087&page=1
-
보물로 지정된 '데니·김구 서명문·진관사' 태극기'데니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과 조선 후기 조각승 색난의 대표작 4건이 보물로 지정됐다.문화재청은 '데니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을 포함한 총 7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고 25일 밝혔다.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태극기 유물 3건은 '데니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다. 19~20세기 초 제작된 것들로, 일제강점기 혹독한 시련 속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문화재다.보물 ‘데니 태극기(데니 太極旗)’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가 소장했던 것으로,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태극기의 존재는 1977년 미국인 역사학자 로버트 R. 스워타우트 교수에 의해 오리건 대학교에 보관된 ‘데니문서’가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데니 태극기(데니 太極旗)'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가 소장했던 것이다.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학계에서는 이 태극기가 데니의 유품 중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그가 조선에 마지막으로 머문 해인 1890년을 제작의 하한연대로 보고 있다.세로 182.5㎝,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김구 서명문 태극기(金九 署名文 太極旗)'는 1941년 3월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메우스 Charles Meeus)에게 준 것이다.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데니 태극기’는 세로 182.5cm,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 주석이 1941년 3월 16일 중국에서 글을 적어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미우스)에게 준 유물이다. 김구는 태극기에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고 쓰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긴 작은 도장을 찍었다.매우사 신부는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에게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해 오다 '안창호 유품' 중 일부로 1985년 3월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크기는 가로 62㎝·세로 44.3㎝이며, 비단에 청색과 홍색 천으로 태극을 붙이고 검은색 천으로 사괘를 덧대어 만들었다.은평구 북한산 진관사에 있는 태극기는 2009년 5월 사찰 부속 건물인 칠성각 보수 공사 중에 불단 안쪽 벽체에서 나왔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 태극기다.수습 당시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등 독립신문류 5종 19점이 태극기 안에서 확인됐다. 신문 발행 시점이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 사이여서 태극기도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불에 타 손상된 흔적과 구멍이 곳곳에 있어 3·1운동이나 이후 독립운동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됐다.또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 부분과 사괘를 먹으로 덧칠해 만든 점이 특징으로,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한 사례여서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서울 진관사 태극기(서울 津寬寺 太極旗)'는 2009년 5월26일 서울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됐다.신문류는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신대한', '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년 6월6일부터 12월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됐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밖에 문화재청은 조선 17세기 조각승으로 이름을 떨친 색난이 만든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을 보물로 지정했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축하문, 문화재 됐다한국광복군의 독립, 외교 활동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문화재로 등록됐다.문화재청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축하문,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등 6건을 문화재로 등록한다고 13일 밝혔다.'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축하문'은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주석이자 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인 김구 주관 하에 거행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관련 유물이다.중국 측 인사와 서방 외교사절, 신문사 대표 등 참석자들이 서명한 서명문과 한중이 연합 항전해 일본에 승리하자는 의지를 담고 있는 축하문으로, 충칭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과 외교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선전해 항일 독립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기관지다.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취지와 활동 상황을 군사, 외교, 국제정치,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기관지 제목인 '光復(광복)'의 글씨를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지청천)의 필체를 활용한 점도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은 1945년 5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훈련교재다. 일반강령, 기본정책, 본군의 정훈계획(학과훈련, 선전대강) 등 조국 광복의 최선봉을 담당할 한국광복군의 '강철 같은 정신 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한국광복군이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다가 중국과 끊임없는 교섭을 거쳐 마침내 1945년 5월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으로 바뀐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는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사회장(1930년 3월)에서 낭독된 약력서다. 그의 출생과 성장, 사망, 주요 활동과 사상, 가족관계 등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김좌진 장군의 전 생애를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은 1930년 장항선 판교역 철도개통과 함께 근대기 서천지역 활성화 중심지가 된 곳이다. 양곡을 비롯한 물자의 수송과 정미, 양곡, 양조산업, 장터가 형성되어 한국 산업화 시대에 번성기를 맞다가 2008년 철도역 이전으로 본격적인 쇠락을 거친 근·현대기 농촌 지역의 역사적 흐름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안에 있는 정미소, 주조장, 방앗간, 극장, 구 중대본부 등은 근대생활사적인 요소를 잘 간직하고 있어 별도의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한편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순천 동남사 사진기 및 확대기'는 순천에서 설립된 동남사(1952∼1976)가 제작·판매한 사진기 4종과 확대기 2종 등이다.1948년부터 정부의 수입금지 조치와 국산장려운동이 전개되면서 수입에 의존하던 사진기의 수급이 어려운 상황에서 동남사는 국내 기술로 사진기 국산화를 시도했고, 이렇게 제작된 총 4종의 동남사 사진기를 통해 근대 사진기 제조업 발달사를 확인할 수 있어 문화재로 등록할만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1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
-
고종이 선물한 실물 태극기 보물 지정태극기가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데니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점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12일 밝혔다. 1891년 1월, 조선 정부의 외교 담당 고문이었던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는 4년 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데니는 조선이 다른 나라와 불리하게 통상 조약을 맺지 않도록 조언했고 "자주독립국인 조선이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청나라의 미움을 산 데니는 결국 조선을 떠나게 됐는데, 국왕 고종은 그에게 깃발 하나를 선물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것은 태극기였다. 가로 262㎝, 세로 182.5㎝ 크기인 이 태극기는 데니의 후손이 1981년 한국에 기증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실물 태극기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 주이 태극기(1884)다.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된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2009년 서울 진관사에서 독립신문 등과 함께 발견됐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독립 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벨기에 신부 매우사(샤를 메우스)에게 준 것이다.
-
항일독립유산, 보물과 등록문화재 된다문화재청은 광복절을 앞두고 태극기와 광복군 유물 등 항일독립유산들을 대거 보물과 문화재로 지정·등록 예고했다.12일에 열린 제4차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데니 태극기’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은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와 별도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 4건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독립운동사료를 포함한 근현대문화유산에 대한 적극적인 역사·학술 가치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2019년부터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들에 대한 검토를 시작해 작년에 「말모이 원고」 등 한글 관련 문화재 2건을 보물로 지정했으며, 이후 두 번째로 태극기 3건을 이번에 보물로 추가 지정 예고하는 결실을 맺었다. * 조사대상 선정 국가등록문화재: ①데니 태극기(국가등록문화재 제382호), ②김구 서명문 태극기(제388호), ③불원복(不遠復) 태극기(제394호), ④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제458호), ⑤말모이 원고(2020년 보물 지정), ⑥조선말 큰사전 원고(2020년 보물 지정), ⑦윤동주 친필 원고(제712호), ⑧이봉창 의사 선서문(제745-1호) 이번에 지정 예고한 태극기 3건은 19세기~20세기 초 제작된 것들로, 일제강점기 혹독한 시련 속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문화재이다. 우리 역사 최초로 국기(國旗) 제작이 시도되고 변천되는 과정과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대한민국 역사의 대표이자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데니 태극기(데니 太極旗)」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가 소장했던 것으로,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 태극기가 데니의 유품 중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가 조선에 마지막으로 머문 해인 1890년을 제작의 하한연대로 보고 있다. *O.N.데니: 1877년 중국 천진(天津) 주재 미국영사를 시작으로 1880년 중국 상해(上海) 주재 미국영사로 재직 중, 1886년 이훙장(李鴻章)의 추천을 받아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및 내무 담당 고문으로 부임. 이후 4년 동안 외교·법률·경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실무를 담당. 1886년 6월 조선과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 시 국제관례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이 불리한 통상 조약을 맺지 않도록 조선을 보호하고자 했고, 조선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서 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조력함. 1888년 3월 『China and Corea』를 발표해 서구의 국제법적 이론을 토대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히고 청의 내정간섭을 부정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인해 중국의 미움을 사 결국 1891년 1월 조선을 떠나게 되었음. 1977년 로버트 R. 스워타우트(Robert R. Swartout) 교수에 의해 ‘데니문서’가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본격화되었음. ‘데니 태극기’는 세로 182.5cm,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1882년 9월이었고 1883년 3월 6일 고종은 전국에 사용토록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19세기 말 한국의 국기가 반포된 이래 그 모습을 그리거나 기록한 자료들은 일부 남아 있지만 실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데니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태극기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설: ①태극기 제정은 1882년 5월 미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논의되었음.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의 회고에 따르면 5월 22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서로 국기를 교환했다고 함. 이를 방증하는 자료가 미국 국회도서관 슈펠트 문서철에 보관되어 있으며, 1882년 7월 19일에 미국하원이 태극기 도식(圖式)을 승인한 자료인『Flags of Maritime Nations』에도 실려 있음 ②1882년 9월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영국공사 애스턴, 선장 제임스와 논의하여 제작하였고, 일본에 도착해 숙소에 건 것이 최초의 태극기라고 알려져 있음. 박영효의『사화기략(使和記略)』문건 안에도 이미 4괘와 8괘가 그려진 기(旗)가 준비되어 있었고 "상[고종]에게 명(命) 받은 바 있다”는 언급으로 보아 박영효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닌 조정에서 논의된 것을 일본으로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보여준 것으로 판단됨 1883년 태극기 사용이 전국에 선포되었지만 규격 등이 정해지지 않아 1949년 국기 제작법이 제정될 때까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다. ‘데니 태극기’는 제작기법 측면에서도 근대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 정세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당시 서양 국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참조한 것으로, ▲ 전통적인 손바느질이 아닌 상하 90cm 정도 크기의 넓은 폭의 면직물을 바탕재료로 하여 재봉틀을 사용해 박음질했다는 점, ▲ 청색·홍색 태극과 청색의 4괘(四卦)를 부착하는 데 있어 바탕천을 오려내고 두 줄로 박음질해 멀리서도 문양이 또렷하게 보이도록 시각적 효과를 꾀한 점 등 초창기 국기 제작법을 적용해 매우 정교하고 정성껏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깃대 속에 머리카락 또는 동물의 털 뭉치를 채워 넣은 사실이 과학조사 결과 밝혀졌는데, 이는 심을 튼튼하게 만들어 관공서 등에서 게양했을 때 세로로 단단히 버틸 수 있도록 착안한 방식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데니 태극기’는 ▲ 국기를 제정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한제국 외교적 노력을 증명하는 유물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한 열망의 상징이 된 태극기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 ▲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한 미국인 외교관 가문이 90여년 넘게 간직해 오다 우리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진정한 호혜(互惠, 서로 동등하게 혜택을 누림)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 ▲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태극기라는 점 등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할 사유가 충분하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金九 署名文 太極旗)」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메우스 Charles Meeus)에게 준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1941년 경 매우사 신부는 선교사로서 중국 충칭(中慶)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가기 전 김구 선생이 태극기에 글을 써서 주며 미국에 가서 우리 동포를 만나면 이 글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함. ‘김구 서명문 태극기’의 전래에 얽힌 일화는 미주 한인들이 발간한 신문인『신한민보』1942년 3월 19일자(3면)에 자세히 보도됨. 세로 44.3cm, 가로 62cm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의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어 제작한 소형 태극기이다. 깃대는 오른쪽에 천을 덧대어 만들었으며, 괘는 가로 상단에 건괘(乾卦)와 감괘(坎卦), 하단에 이괘(離卦)와 곤괘(坤卦)가 배치되어 있다. 깃대와 괘의 사이에는 김구 선생의 친필로 묵서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작고 네모난 인장이 찍혀 있다. 이 태극기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김구와 안창호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서명문에서 김구는 망국의 설움을 면하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광복군을 도와줄 것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강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의구(義句, 올바른 글)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 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 지금까지 알려진 19세기~20세기 초 제작 태극기 중 정확한 제작시기가 알려진 유일한 자료라는 점, ▲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신념이 대표적으로 담겨 있다는 점, ▲ 매우사 신부로부터 안창호 선생이 태극기를 전달받기까지 상황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전래 경위가 분명하다는 점, ▲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극기의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제작되어 태극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서울 진관사 태극기(서울 津寬寺 太極旗)」는 2009년 5월 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신문류는 「경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신대한(新大韓)?·?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태극기를 숨긴 인물로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 혹은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던 승려라고 추정하고 있음. 백초월은 3.1만세운동 직후 비밀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불교계의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제공하는 등 국내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인물임. 또한 태극기가 싸고 있던 자료들이 1919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되어 국내에 밀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를 감추기 위해 태극기에 싸서 칠성각에 숨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되었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현재 1919년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 진관사 태극기와 발견된 독립신문류 현황 자료명 발행일 수량 비고 신대한신문 제1호 1919년 10월 28일 화요일 제2호 1919년 11월 3일 월요일 제3호 1919년 11월 12일 수요일 3점 단재 신채호가 발간한 신문으로 국내에 새롭게 알려짐 독립신문 제30호 1919년 11월 27일(2점) 제32호 대한민국 원년 12월 25일(2점) 4점 특히, 제30호에는 ‘태극기’라는 제목의 시(詩)가 수록되었음 조선독립신문 <호외> 제32호 1919년 6월 6일 제40호 1919년 8월 12일 제41호 1919년 8월 제42호 1919년 8월 20일 5점 자유신종보 제4호 미확인 제7호 대한민국 원년 9월 19일 제12호 대한민국 원년 10월 6일(4점) 6점 중국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운동계 신문으로, 최초 공개된 자료 경고문 1919년 6월 1일 1점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한경고문으로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 아울러 진관사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에도 태극기와 태극문양 및 태극기 관련 기사가 실려 있어 더욱 의의가 있다. 특히, 태극과 4괘가 우주 만물의 기본 요소나 만물의 생성·변화·발전하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힘과 사랑’을 토대로 ‘자유와 평등’을 온 세상에 실현해나가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당시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함께 살펴볼 수 있어 ‘진관사 태극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진관사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형태상으로도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부분과 4괘를 검정색 먹물로 덧칠해 항일 독립의지와 애국심을 강렬하게 표현했으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라는 점에서 항일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처럼 ‘진관사 태극기’는 ▲ 불교계 등 다양한 계층에서 주도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 ▲ 항일 정신을 형태상으로 강력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점, ▲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를 통해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해 문화재에 담긴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데니 태극기’ 등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주석이자 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인 김구의 주관 아래 거행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관련 유물이다. 서명문은 전례식에 참석한 중국 측 인사와 서방 외교사절, 신문사 대표들이 서명한 유일의 원본 방명록으로, 충칭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외교 활동, 언론 창구를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축하문은 전례식을 축하하는 의미로 중국 인사들이 보낸 것으로, 사진으로만 전해오던 당일 전례식 단상에 실제로 걸려 있었던 실물자료로 역사적 가치도 높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선전하여 항일 독립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기관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취지와 활동 상황을 군사, 외교, 국제정치,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기관지 제목인 ‘光復(광복)’의 글씨를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또는 지청천)의 필체로 활용한 점도 역사적 의미를 더하는 자료다.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은 1945년 5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소책자 형태의 훈련교재로, 조국 광복의 최선봉을 담당할 한국광복군의 ‘강철 같은 정신 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내용 구성은 일반강령, 기본정책, 본군의 정훈계획(학과훈련, 선전대강) 등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발한 독립운동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교재는 한국광복군이 이전까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다가 중국과 끊임없는 교섭을 거쳐 마침내 1945년 5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속으로 변경되어 그 통할을 받음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어 역사·사료적 가치가 높다.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는 1930년 1월 만주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金佐鎭, 1889.11.24.-1930.1.24.)의 사회장(1930년 3월)에서 낭독된 약력서다. 김좌진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한국독립운동사의 무장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본 약력서는 그의 출생과 성장, 사망, 주요 활동과 사상, 가족관계 등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김좌진 장군의 전 생애를 순차적으로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4건에 대해서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이번 태극기 보물 지정 예고를 계기로, 역사·학술적 중요성이 널리 인정된 국가등록문화재 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여 이를 국보·보물 지정 대상에 포함시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제도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계획이다. 또한, 항일독립유산 등 다양한 근현대문화유산을 꾸준히 발굴하여 지정·등록하도록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으로 임하여 우리 문화재의 숨겨진 가치를 재조명하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다. 한편, 지난 6월에 등록 예고된 바 있는「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과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문화재로 등록했다. 「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은 1947년 4월 서윤복 선수가 광복 이후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KOREA'(코리아)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달고 국제대회인 '제5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받은 배지 형태의 메달이다. 서윤복 선수의 우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 군정 시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KOREA'(코리아)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세계에 알렸던 사건으로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6・25 전쟁 중 첫 출격(1952.12.14.)을 앞둔 환송행사(장행회(壯行會), 1952.12.5.)에서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천영성)에게 제2기 후배들이 응원과 성명(서명문)을 담아 전달한 태극기다. 응원의 내용은 '臨戰無退(임전무퇴)', '信念(신념)', '祖國統一(조국통일)', '快男兒(쾌남아)', '祝初出擊 先輩 千永星 中尉(축초출격 선배 천영성 중위)' 등으로, 출격에 임하는 조종사에 대한 격려와 전쟁 승리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6·25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정규과정을 통해 조종사를 배출하려는 공군의 의지와 노고가 상징적으로 집약된 첫 출격의 기록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 천영성(1929~2019년/6·25 전쟁 중 62회 출격):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전투 항공지원작전(52.10.25 ~53.7.27)’ 에 F-51D 전투기 편대로 투입되어 적 벙커·동굴을 파괴하는 등 38선 북쪽의 설악산·속초지역 및 거진-간성지역을 확보하는데 기여(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역임)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이들 2건도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해 나갈 것이다.
-
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1『서양인이 본 조선』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수집하여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수집가에 따라 다르다. 이는 고서 수집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목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자연히 그 방면에서는 저절로 많은 지식이 쌓여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저술가 중에는 유명한 고서 수집가가 많다. 나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서양인이 본 조선』(호산방, 1996)과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열화당, 2008), 『한국 북디자인 100년』(21세기 북스, 2013)이라는 세 권의 책과, 몇 편의 논문을 썼다. 나야말로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저절로 글이 써지고 책이 만들어진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누구일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30여 년 전, 서양에서 출판된 한국 관련 자료들을 하나 둘 접하면서부터 우리나라와 서양의 접촉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관련 서양 도서의 수집은 『서양인이 본 조선』을 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와 마에마 교사쿠의 『고선책보』의 영향을 받아서다. 나는 이 두 책을 알고 난 후 우리의 서지 작업이 외국인에 의해 이렇게 정리되었다는 것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결국 나로 하여금 서양에서 출간된 조선 관련 서지를 정리하도록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1655년부터 1949년까지 약 300년 동안 서양의 선교사·탐험가·군인·학자들이 조선을 관찰하고 연구한 바를 서술한 188종 261판본 287책의 여러 서양어계 도서들을 서지학적으로 정리한 책이다.(*사진 84) 각 도서의 제목과 저자·출판사·출판지·출판연도·판수·책수·면수·크기와 삽화 수 등을 표시했고, 책에 실린 흑백과 컬러 사진 몇 점을 실었다. 그 다음에는 저자와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동안의 국내 연구 상황을 주석으로 소상하게 밝히려고 했다. 그 다음 장에는 각 책에 들어 있는 목차와 삽화 목록, 사진과 삽화를 수록했다. 목차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영어·불어·독어·네덜란드어·스웨덴어·러시아어 등이 원전 그대로 실려 있다. 따라서 이 목차만 보고도 원전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설명한 대로, 이 책은 서지에 관한 전문서적인 동시에 역사서이다. 서지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한 연구대상이 지금까지 어떻게 조명되었고 또 어떤 관련 자료가 있는가를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 어떤 내용의 책이 어떻게 출판되었는가를 종합하여 밝히는 일은 모든 학문에 기초를 닦는 작업이다. 더구나 그 자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본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양인들이 기록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자 민족문화의 자산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 선조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 주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이 땅의 역사를 제삼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연구되었는가 하는 것은 서양 접촉사와 관련해 큰 의미를 갖는다. 이들 책 중에는 개항 이전 조선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선어의 소개, 서양에서 제주를 일컫는 명칭, 서양 술의 조선 전래, 성서의 조선 전래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이 나라 문을 걸어 잠근 채 집안싸움만 하고 있을 때 서양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조선을 방문 또는 탐사했으며 그때마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껏 이러한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이 방면의 자료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사진 85~88) 고서 수집에서 수집 대상의 주제는 독창적이어야 한다. 다른 수집가나 박물관에서 미처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라면 더욱 좋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선 관련 서양 도서는 매우 매력적인 주제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주제가 정해졌다 하더라도 자료가 저절로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유능한 파트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능한 파트너는 모든 자료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료들을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외국에 직접 나가서 구하기도 하고, 국제적인 고서적상을 한국으로 직접 불러들여 구입하기도 했다. 이미 조선 관련 서양 고서가 미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스웨덴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관계로 나는 각 나라별로 유명 고서점 또는 중개인을 선정해 이들과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들 파트너가 제공하는 자료를 거의 다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을 대여섯 권씩 사기도 했다. 하지만 파트너들이 나를 위해 구해 준 것들이므로, 중복되는 책이 있어도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격이 점점 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서에서 초판본은 의미가 각별하다. 당연히 모든 고서 수집가들이 초판본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초판본 못지않게 모든 판본의 책이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 관련 서양 고서를 수집할 때부터 모든 판본에 의미를 두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앞에서 소개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897년 뉴욕 플레밍 레벨 출판사(Fleming H. Revell Company)에서 초판본이 간행된 이후, 같은 해에 삼판본까지 출간되었다. 1898년에도 판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책이 간행되기도 했다. 한편 1898년과 1905년에는 런던 존 머레이(John Murray) 출판사에서도 출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각 판본의 표지 장정과 편집, 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사진 89~90)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목사이자 동양학자인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Korea, the Hermit Nation)』은, 1882년 뉴욕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Charles Scribner’s Sons) 출판사와 런던 앨런(W. H. Allen) 출판사에서 같은 해에 출간되었는데, 이 두 책은 내용은 똑같으나 접혀 있는 지도 한 장과 책등 부분에 인쇄된 글자가 약간 다르다. 그후 이 책은 1888년·1897년·1904년·1907년에 각각 증보판이 나왔으며, 여러 차례 중판되었다. 나는 이들 중 1882년 뉴욕과 런던에서 나온 초판본과 또 다른 갈색 장정의 1882년 뉴욕판본, 1888년 뉴욕 삼판본, 1894년 뉴욕 사판본, 1897년 뉴욕 육판본, 1904년 뉴욕 칠판본, 1907년 뉴욕 팔판본을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사업성이 없는 책이다. 그러니 어떤 출판사에서도 욕심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호산방에서 직접 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이 출간되기까지 자료수집에 10수 년, 집필·제작에 5년이 걸렸다. 교정도 스무 번 넘게 보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자랑이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아쉬움만 남는다. 그나마 이 책이 이만큼의 모습이라도 갖추게 된 데는 사진의 역할이 컸다. 사진 작업만도 꼬박 삼 개월이 넘게 걸렸는데, 이때 테스트로 찍은 필름만도 한 박스가 넘는다. 사진작업은 구름 사진가로 유명한 김광수 선생이 맡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반향이 대단했다. 광화문 일민문화관에서 가진 『서양인이 본 조선』 출판기념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고, 관련 학자들에게도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이 전시는 우리의 고서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고서 전시와는 분명 그 궤를 달리했다. 장소부터가 전문 미술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기획에서부터 디스플레이, 진행에 이르기까지, 고서가 미술의 한 장르에 포함되어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사진 91~92)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이 책의 출간과 전시를 통해 나의 문화적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때의 모든 전시기획과 진행을 내가 직접 주도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의 꿈인 책박물관 설립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렇게 책을 내고 성대한 전시를 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된 책들은 고서 수집가들은 물론 학계에서도 잘 모르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주위의 연구자와 수집가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나는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출판기념 전시회의 열기가 구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위안이라면, 이 책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바쳤는지 모른다. 또 나의 전 재산을 이 작업과 맞바꾸는 오기를 부려야만 했다. 이제 그 대가로, 내가 지금까지 책을 수집하고 글을 쓰고 또 출판을 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움보다 더 큰 고통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
[특별기고] 그들은 우리의 땅도, 역사도, 문화도 빼앗아 갈 것이다이용수(판소리 이수자, 서울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참으로 걱정이 된다.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 눈에 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은 앞으로 계속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우선 중국부터 따져보자. 중국은 무서운 나라다. 몇년 전 사드보복 하는 것을 보라. 그들은 그간 동북공정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땅도 이미 자기들 수중으로 들여놓고 있다. 자신들의 땅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자기네의 것이라고 하고 만리장성도 확장하여 다시 만들어 놓고, 이제는 한강 이북은 자기네의 지배를 받았던 제후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고사도 왜곡하고 있다. 몇 년 전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미국대통령에게 이미 그런 뜻으로 자신 있게 말하지 않는가? 우리의 상고사도 자기들 위주로 만들고, 우리의 배달환국의 조상인 태호복희씨, 신농씨, 치우천황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제는 단군상마저도 크게 만들어 놓고 자랑하고 있다. 아리랑도 자신들의 문화재로 등록하고, 한복도 자기네 옷이라고 하고, 또 요즘은 김치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민족음악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까지 자기네들의 문화재로 등록하여 놓았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문화를 뺏을 시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네의 조상인 태호복희씨가 만든 8괘의 태극기도 앞으로는 자기네 조상이 만든 것이니 우리가 쓰지 못하게 할 것이고, 우리의 판소리도 자신들의 문화라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왜냐? 판소리는 대대로 내려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글로벌하게 만들어 놓은 문학의 보고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대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9000년 전부터 내려온 반고니 노고할미니 하는 모든 신화적 인물은 물론 앞에서 거론한 환인시대, 환웅시대, 단군조선 시대의 7,200년 우리 조상의 인물들이 다 나오고 중국의 요임금, 순임금을 비롯하여 우, 탕, 주문무 등 군주와 영웅시되는 인물들이 다 등장한다. 아시아의 역사이기도 하고 세계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정신세계의 모든 영역까지를 총괄한다. 철학가와 시인 등 잘 알려진 인물은 물론 지리적으로도 치우천황시대 우리가 지배하고 살았던 중국대륙 전역은 물론 아시아 남방전역과 한반도를 다 대상으로 하여 소설과 판소리로 만든 것이다. 수궁가는 인도의 불교이야기 ‘전등신화’에서 시작하여 중국 남해바다를, 적벽가는 중국의 적벽강에서 시작하여 오, 위 촉 3국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역사적 사실 외에 판소리 속의 해학과 세세한 작품구성은 모두 우리 식으로, 흥부가와 심청가도 중국 일대와 한반도를 대상으로 지역과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폭넓게 설정하였다. 물론 춘향가는 주로 한반도와 남쪽지방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고. 이제 중국은 그럴 것이다. 판소리 속의 인물과 지역의 소재가, 그리고 한시를 비롯하여 문화적인 요소가 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판소리는 자기들이 만든 중국의 것이라고 언젠가는 주장할 것이다. 지금 우리 판소리 하는 세대가 가고 조용해지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중국의 문화가 오래 전부터 이렇게 훌륭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진짜 판소리 속에는 어마어마한 우주가 다 들어있고, 모든 세계의 문학과 음악이 다 들어있는, 그래서 우리 민족이 앞으로 먹고 살아갈 콘텐츠의 보고인 것이다. 보아라, 판소리의 위력을!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지금 BTS의 한류에 이어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전 세계 젊은 층의 유튜브 3억 뷰를 달성하여 또 하나의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또 한국의 방송국마다 진행되는 트로트의 참가자들 중에 잘한다는 평을 받은 참가자는 예외 없이 그간 판소리로 목청을 틔웠거나 목구성을 제대로 잘하는 경연자였다. ‘범 내려온다’는 수궁가를 그대로 옮겨 춤과 함께 공연한 것이 히트를 친 것이지만 주요 원인은 바로 그 장단이 바로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엇모리장단’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이 시절 ‘땅따먹기’놀이와 같이 땅 위에 선을 그어놓고 두 발로 서 있다가 왼발로 내딛고, 다시 또 왼발로 뛰는 깨금발 식의 장단이다.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장단이 아니고, 약간 엇박자를 내어 불안전 하는 듯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흥을 돋워주는 징단이다. 마치 지난 2002한일월드컵 때 응원박수 치는 것과도 같은 장단이다. "대-한민국!” 하며 소리내어 응원하면 이어서 "따단- 따. 단-따-!”하며 약간의 텀을 두고 엇박자로 나가는 그 장단을 말한다. 이 장단의 응원으로 당시 응원기에 무서운 얼굴상으로 그려진 우리 배달환국의 14세 천황을 ‘붉은 악마’라고 해서 자손들이 버릇없이 이름을 붙였지만 조상님은 그것도 어여삐 보아 우리나라를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 주셨다. 이번에도 같은 장단이라 할 수 있는 ‘범 내려온다’도 우리만의 엇모리장단이다. 이 장단은 어디에고 함부로 나오는 장단이 아니고 판소리 3, 4시간을 하는 한바탕에서 한 두 번 나올 정도의 장단이다. 언제나 상서로운 일이 생길 징조일 때, 예를 들어 하늘에서 흰 수염을 기른 도사나 혹은 천사가 내려온다거나, 산에서 영험한 짐승인 호랑이가 내려온다거나, 고승이 나타나거나 무서운 장수, 예를 들어 관우나 장비 또는 조자룡 같은 무서운 장수가 나타날 때 위엄있게 하는 소리가 바로 이 장단이다. 우리민족을 앞으로 먹여 살릴 콘텐츠는 바로 판소리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장단으로 흥을 잘 살려야한다. 그러니 이처럼 판소리 속에 젖어있는 문화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그간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상고사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우리문화를 정립하여 확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못 박아 놓지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정부가 앞장서서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