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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5)1930년대 중국 내 항일공산혁명 전선에는 아리랑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결과의 하나가 1940년 9월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정규 국군인 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광복군아리랑’이 공식 군가로 불린 사실이다.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성립된 군대로 이들에게 이미 아리랑이 공유된 결과이다. 이는 곧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아리랑을 불러주고 그 의미를 설명해 준 1937년 상황이기도 하다. 제21회에서 제시한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한국의 오래된 전래민요 아리랑’과 함께 ‘Song of Ariran’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1961년의 ‘한국과 김산의 생애에 관한 주해-나의 연안 비망록’에 두 편의 아리랑이 더 있다. ‘아리랑옥중가’와 ‘아리랑연가’이다. 충분히 님 웨일즈가 김산으로부터 듣고 영감을 받았을만한 노래이다. 김산으로서는 두 번의 투옥과 중국공산당의 질시(嫉視) 속에서 채화하여 간절하게 심연에 두었던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Song of Ariran’ 앞 부분의 진술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대목이 있다. 아리랑고개는 조선왕조의 폭정에 저항한 이들의 처형장으로 서울에 있는데, 이 고개를 오르는 사형수들에 의해 불리는 노래라고 하였다. 아리랑고개를 구체적 처소로 기록한 것은 이 기록이 처음이다. "젊은이 중의 한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지자, 그 뒤부터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름으로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한국의 모든 감옥에서 메아리 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죽음만이 남게 될 뿐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진술에서 아리랑은 지배자의 '억압'에 대한 피지배자의 ''저항의 노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죽음'이란 표현은 저항의 의미를 극명하게 강조한 것이다. 김산은 님 웨일즈에게 ‘아리랑고개’의 의미를 설명하고 아리랑을 불러 주었음을 알게 한다. 그 기억의 재현이 바로 다음의 ‘옥중가아리랑’이다. 김산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옥중가아리랑'(Prisoner's ballad of Ariran)이다. 옥중가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첫번째 고개를 넘어간다. 내 들던 막걸리는 어디 있나/이제는 한강에 펌푸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재판장 고개를 넘어간다 금시계줄은 어디로 갔나/쇠수갑은 맞지를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감옥행 고개를 넘어간다 운명의 선고를 기다리며/나이제 생사갈림길에 서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련다 아리랑고개에 간이역하나 지어라/집행인기차를 기다려야 하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동지여 동지여 나의 동지여/그대 열두고개에서 멈추지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열세고개를 넘으리니 Prisoner's ballad of Arira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re are twelve hills of Ariran And now I am crossing the first hill. Where are the wine and beer I used to have? Now it's the Hankiang Pump for me.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 of my court trial. Where is my wristwatch band of bold? These steel hand'cuffs do not fit so well.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 that leads to prison. Now I stand on the frontier of life and death, Waiting for the sentence of doom. Ariran, Ariran, Arari O! Soon I'll be crossing the last hill. Make a new way-station on the hills of Ariran, For I must await the executioner's trai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last of the hills of Ariran. Comrades, comrades, my comrades! I know you will not stop at the twelfth hill, Ariran, Ariran, Arari O! You will cross the thirteenth hill of Ariran. 이 옥중가는 조선의 정치범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로 "1921년 투옥된 한 조선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이 사설은 죄수 경험을 여러 단계로 말하고 있다. 즉 경찰에 의한 체포,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 ‘한강 펌프’라고 명명된 물고문, 사형선고의 기다림, 그리고 다른 혁명가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종래의 열두 번째 고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승리 즉 아리랑의 열세 번째 고개를 쟁취할 것을 뜻하는 마지막 구절 등이다. 1921년, 어디에서, 공산주의자 누가 작사를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김산이 처음으로 투옥되기 이전에 아리랑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한다. 1930년말 북경 경찰에 체포되고, 이후 일본영사관에 넘겨지는 상황을 진술한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월 10일 아침 여덟시에 형사가 ‘오늘밤은 일찍 잠자리에 드시오. 내일이면 천진으로 이송될 것이요. 오늘밤이 친구나 부인을 부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하고 말했다.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군요.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합시다.’ 그날 밤 나는 휴식도 취할 수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벽 위에다가 ‘이곳에서 또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고 쓰고 내 이름을 서명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경찰서로 끌려갔다.” 김산 스스로도 ‘이곳에서 또 다시 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썼다는 사실에서다. 이상과 같은 ‘Song of Ariran’의 진술에서 비록 20년 후에 발간된 ‘한국과 김산의 생애에 관한 주해-나의 연안 비망록’에 수록된 다음의 ‘아리랑연가’ 역시 김산이 님 웨일즈(Nym Wales)에게 불러준 아리랑인 것이 분명하다. 이 노래에 대해서도 "남녀가 번갈아 부르는 이 노래는 많은 절로 되어 있다. 그 가사는 약 2백여년 전에 씌어졌다.(This song has many verses, sung alternately by men and girls. The verses was written about twenty years ago.)”라는 코멘트(Comment)를 한 것도 이를 알려준다. 아리랑연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구비/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떠나는 님은 잡지를 마라/못보다 다시 보면 달콤하거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에 물새는 못사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하늘에 별들도 많은데/구름 뒤에 날보고 웃는 이 누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Love song of Arira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 of Ariran. There are twelve hills of Ariran And now I am crossing the last hill. Never hold back a parting lover- Absence makes reunion sweet. Ariran, Ariran, Arari O! No waterfowl can live on the hills of Ariran. Yet if my lover lets me go freely, Before walking ten li my foot will be sick.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 moon comes up and the stars come out-- who is that laughing at us behind the clouds?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sl of Ariran. 이 ‘아리랑연가’ 3, 4절은 영화 ‘아리랑’ 주제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설이다. 그러므로 이 4절의 ‘아리랑연가’는 영화 주제가의 곡조로 불린 것이다. 물론 앞에서 살핀 두 편 모두 같은 곡조이다. 3음보 2행 1련에 2행 후렴의 형식에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자가 북경에서 살고 있는 김산의 장자 고영광(84·高永光) 선생을 초청하여 가진 리영희 대기자와 함께 한 김산서훈기념 간담회에서도 직접 모친으로부터 들어 배웠다며 불러 확인한 사실이다. 이에 따라 알 수 있는 것은 김산이 처음 투옥되는 1930년 말 이전에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가 중국의 항일전선과 조선의 감옥에서도 불렸다는 사실이다.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주제가 ‘아리랑’은 이미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까지도 한민족 공동체를 상징하는 노래로 전형성과 보편성을 획득한 노래였다는 것이 된다. 이런 사실에서 1941년 발행된 ‘Song of Ariran’은 아리랑史에서도 평가를 받는 기록물인 것이다.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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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 (3)지난 회에서 1930년대를 산 세 지식인, 영화감독 나운규, 정치학자 고권삼 그리고 ‘독립혁명가’(1984년 번역자가 규정한 표현) 김산의 아리랑관(觀)을 대비하였다. 나운규는 독립운동가이며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이 그리는 아리랑은 남성적이고 의협적(義俠的)이라고 했고, 고권삼은 일제의 본토에서 식민지 조선의 정치사를 입론하는 입장에서 아리랑은 비폭력적이고 순치(順治)된 이들의 노래라고 했다. 그리고 김산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했는데, 이는 1910년대로부터 30년대 격동의 조선이 겪는 파고를 몸으로 부대끼며 실천한 자가 아니면 토로할 수 없는 아리랑관이라고 규정하였다. 과연 김산의 이 같은 진술은 ‘Song of Arirang’ 속에 어떻게 구체화 되었고, 그 의미와 깊이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Song of Ariran’의 님 웨일즈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 문장 안에서 많은 열쇠말(K-word)를 담고 있다. ‘남자(김산)’, ‘연안(延安)’, ‘1937년’, ‘도서관’, ‘영문책자’, ‘명단’인데, 이 책 속의 아리랑을 맥락적인 이해를 돕는 키워드이다. 이 중에 1937년이란 시점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김산에게는 인생과 진술의 최종의 시한(時限)이고, 님 웨일즈에게는 1941년 초 인쇄에 넘기는 기간인 3년간이란 집필의 시작 시점이다. 맥락적 이해의 중요한 단서인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연안에서였다. 그곳에 머물러 있던 1937년 초여름 어느날, 나는 루쉰(魯迅)도서관에서 영문 책자를 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고 있었다.” 김산과의 우연한 만남, 국민당에 포위를 당한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는 연안, 두 사람의 지식욕이 강하여 독서 범위가 넓은 상황을 알려주는 노신도서관, 영어 해독과 소통이 가능한 사이라는 점, 중국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많은 조선인들의 존재, 이런 정황 속에서 아리랑이 언급되었고, 이들 간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선 책명으로부터 접근해 본다. ‘Song of Ariran’에는 표제(表題)로서, 노래 가사를 통해서, 노래의 역사와 기능에 대한 진술 부분에서 ‘아리랑’이 등장한다. 우선 책명을 ‘Song of Ariran’으로 한 점이 주목된다. ‘Ariran’이 노래라고 부연한 것과 표기의 문제이다. 이는 님웨일즈가 김산이 희곡 작품명이나 상호명 ‘아리랑’을 말한 것과 구분하여 표기한 결과이다. 그리고 표기에 있어서는 모두 일반적인 표기인 ‘아리랑(Arirang)’이 아닌 ‘아리란(Ariran)’으로 표기한 문제이다. 이는 당시 일본의 표기를 따른 것으로 본다. 일본은 ‘란(Ran)’을 ‘란’과 ‘랑’으로 함께 발음한다. 이 역시 님웨일즈가 표현한 것으로 본다. 아마도 당시 님 웨일즈가 중국, 필리핀, 미국에서 집필에 참고한 자료가 모두 일본 측의 것이거나 일본어 표기 자료였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님웨일즈를 만나고 그의 자료를 검토한 김연갑 선생이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코네티컷주립대 도서관에서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님 웨일즈는 여건 상 중국과 필리핀, 그리고 미국에서 관련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결국 ‘Song of Ariran’이란 표현은 김산의 ‘공식 기억(Official Memory)’이 아닌, 이를 듣고 옮긴 님 웨일즈가 재해석한 표현인 것이다. ‘Song of Ariran’의 목차 앞에는 5절의 아리랑이 수록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면에 길지 않은 글이나 경구가 담긴 경우는 주인공이나 독자에게 전하는 필자의 헌사(獻詞)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책의 아리랑은 님 웨일즈가 김산과 한국인에게 보내는 헌사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에서 이 별면 돌출은 님 웨일즈가 이 책의 이름을 ‘아리랑’으로 삼은 배경을 알 수 있게 한다. 아리랑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한국의 오래된 전래민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 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가면 다시는 못오는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 삼천리 강산만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a(Ariran)"로 시작하는 것들은 크게 발음하고 마지막 음절에 악센트를 붙여서 아-리-란(아-리-랑)으로 강하게 발음한다.) Song of Ariran(Old Korean folksong of exile and prison and national humiliatio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re are tweleve hills of Ariran/ And now I m clossing the last hill. many stars in the deep sky/ Many crimes in the life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Ariran is 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ath to Ariran has no returning.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Oh, twenty million countrymen/ where are you now? Alive are only three thound li/ of mountains and rivers.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Now I am an exile crossing the Yalu Rive/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of three thounsand li are also lost.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pronounced with broad "a's" and accented on the last syllabe, thus, A-ree-ran) 이 책에서 아리랑 가사를 독립적으로 표기한 것은 이 자료가 유일하다. 그러나 다음 회에서 살피게 된 ‘아리랑2’에서는 두 편이 더 있다. ‘아리랑옥중가’와 ‘아리랑연가’가 그것이다. 이를 연관 지어 볼 때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아리랑을 진지하게 불러 주었고, 이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올린 "김산이 부른 아리랑-Song of Ariran 속의 아리랑에 관한 진술(2005년 자료집)”에서 제시했듯이 다양한 내용의 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5절 형태의 아리랑을 한 편으로 볼 때 1930년대 당대 잡가집이나 창가집이나 민요조사 자료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이는 많은 아리랑 가사에서 나름의 주제대로 재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항에서 확인이 된다. 하나는 후렴의 위치와 형태이다. 후렴을 먼저 부르고 사설을 부르는 방식은 본조아리랑의 전형이다. 또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2행 3음보 가사도 1926년 개봉 영화‘아리랑’ 주제가의 후렴이다. 이는 1930년을 전후하여 정형화된 것이다. 둘은 총 5절의 가사 배치 문제이다. 제2절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는 주제가‘아리랑’에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주제가 이후에 첨부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5절은 주제의 서사를 염두에 두고 재구성 한 것이다. 즉, 1절 "아리랑 고개는 열 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한 것과 마지막 5절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 삼천리 강산만 잃었구나”라는 데서 조국 산천을 떠나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왔다는 처지를 제시하고, 그 ‘마지막 고개’에는 잃어버린 삼천리 땅을 두고 왔다는 분통을 표현한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이는 현실이고, 김산은 이를 분명히 직시하고 아리랑을 부르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님 웨일즈는 이 아리랑을 통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투혼을 불사르는 조선의 한 청년을 거대한 중국혁명 대열에서 발견하고 주목한 것이다. 마지막은 노래에 대한 두 곳의 부연(敷衍)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필자가 처음으로 주목하고 번역한 부분인데, 곡명 밑의 것과 5절 마지막 문장이다. 전자는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한국의 전래민요”라는 부분이다. 이는 이 노래의 성격과 기능을 표현한 것이다. 김산이 처음으로 일제에 넘겨져 투옥된 1930년 11월 20일 이후의 경험을 통해 구성된 것임을 알려 주고, 김산이 아리랑을 부르는 이유를 알린 것이다. 후자는 "a(Ariran)"로 시작하는 것들은 크게 발음하고 마지막 음절에 악센트를 붙여서 아-리-란(아-리-랑)으로 발음한다.강하게”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이는 진술자와 기록자가 매우 진지하게 묻고 답한 결과이다. 이 시기 아리랑 가창에 대한 주(註)를 부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상에서 검토에서 ‘Song of Ariran’ 속의 아리랑 진술은 진술자 김산과 기록자 님 웨일즈 간의 진지하고 긴밀한 관계에서 이뤄진 결과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정연한 진술이었든, 아니면 정연하게 정리한 것이든 그 결과는 분명 주옥같이 빛나는 ‘아리랑’ 한 편인 것이다.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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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br> 다시 읽는 'Song of Ariran'(2)80년 전인 1941년 뉴욕 존데이 출판사에서 발행된 ‘Song of Arirang’은 1965년 일본에서 안도지로의 역으로 ‘アテテソ-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이어 1987년 마쓰데라 이오꼬 번역으로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11판까지 발행했다. 그리고 1972년 미국 파나 프레스에서 ‘Song of Arirang’재판이 발행되었다. 중국에서는 1987년 연변역사연구소에서 한국어판 '백의동포의 영상'으로 발간되었고, 중국어 번역본은 홍콩 난유애 출판사에서 ‘白衣同胞 影像’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서야 아리랑이란 표제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6년 보유판 '아리랑 2-김산 생애 보충'이 발행되었다. 김산에게는 자신의 격한 항일 투쟁적 삶이 적국 일본에게 먼저 전달된 셈이다. 역설인가 당연지사인가? 필자는 2007년에 음반 ‘김산아리랑’(신나라 뮤직) 제작에 참여했다. 이 때 ‘Song of Arirang’소재 김산 구술의 ‘아리랑’ 관련 기록을 꼼꼼히 분류한 바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1930년 초부터 중반에 이르는 기간의 정황에서 진술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첫 번째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1930년 11월 "나는 일본 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심리상태에 대한 압력을 최악의 방법으로 실험 받았다고 진술했다. 나에게 그 이상의 어떤 시련이 또 있었겠는가?”로부터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 형을 마치는 1934년 4월 전후가 된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김산은 영화 ‘아리랑’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동포사회에까지 상영되어 반향을 일으키는 정점인 1930년을 전후하여 체험하고 인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In Korea we have a folksong, a beautiful ancient song which was created out of the living heart of a suffering people. It is sad, as all deep-felt beauty is sad. It is tragic, as Korea has for so long been tragic. 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김산) 이 명징한 아리랑 인식의 결정체, 김산의 진술 중 하나이다. 과연, 이 시기 이 땅의 지식인 중 누가 ‘민요 아리랑’, ‘노래 아리랑’, ‘그 넘어의 아리랑’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다행히 여기에 꼽을 수 있는 이가 있긴 있다.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한 사람, 영화감독 나운규(羅雲奎.1902~1937)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견주기는 격이 떨어지지만 정치학자 고권삼(高權.1901~?)을 한 사람 더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다. 민족성이랄까 할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아리랑고개, 그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 이런 일관된 정신을 거기 담지(擔持)한 것이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이외다. (중략)영화가 문화사업의 하나라면 민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백 리 밖에서 아무리 기를 흔들어야 그 기가 민중의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언제나 우리는 민중보다 보(步)만 앞서서 기를 흔들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나운규) 나운규가 작고하기 1년 전인 1936년, 영화 '아리랑'의 감독 당시를 회고한 대목 중 일부이다. 영화 ‘아리랑’을 고개를 넘는 활기찬 패기를 넘는 남성상을 그리려 했지만 그런 역할을 했는가를 스스로 회의하고, 영화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중들에게 가파를 현실을 극복하자고 추동한 것이다. # "비폭력 비협동의 理想의 정치적 가치는 문화적으로 진보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조선의 ‘아이롱(아리랑)主義’는 근본적이요 적극적인데 더욱 가치가 있다. 이 <아이롱主義>는 정치사상에 있어 위대한 존재요 또 조선의 정치사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요소다.(중략) ‘아이롱主義’의 철학은 평화주의이다. 평화가 없고는 건설이 없고 건설이 없고는 문화가 없고 문화 없는 데는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평화의 使徒요 인류평화의 指導者이다.”(고권삼) 정치학자 고권삼이 1933년 일본 발행한 ‘近世朝鮮興亡史’로부터 1947년 서울에서 발행한 '朝鮮政治史'에 기술한 ‘아리랑主義’ 중 일부이다. 정치학자임으로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33년이란 시점의 ‘평화’와 ‘행복’은 천황 지배하의 순응에 따른 것임으로 친일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거기다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강사와 제주도에서 좌악계열 정치가로 활동(1949년 월북하여 생사불명) 하면서도 이 친일적 인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든 나운규는 영화론과 민중론을 투영해, 고권삼은 정치론을 적용해 아리랑의 성격을 재규정한 의미있는 인물들이다. 모두 풍전등화의 1910년대 초에 때어나 민족적 수난의 극점에 이르는 1930년대를 자신만의 길에 투신하여 굴곡진 삶을 산 이들이기에 아리랑을 남달리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산 이로 유독 진지하고 실천적인 아리랑론을 진술한 김산은 언제 아리랑을 체험하여 옹골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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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1)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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