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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40)김종욱 음악동맹에서도 오는 8월 16, 17 양일 경복궁 후정에서 개최되는 해방1주년기념음악대회에 출연예정이던 바 금반 동 동맹은 이에 출연을 거부하기로 되었다 한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국악의 창조주]: 함화진 이와 같이 음악에 대하여 심심한 아량으로 고악의 쇠퇴한 국악을 정리 혁신하시고 신작악곡으로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발상發祥’ ‘여민악與民樂’ ‘봉황음鳳凰吟’ ‘만전춘滿殿春’ 등의 저명한 대악곡을 창정하시는 동시에 여기에 당한 악보를 제정하시고 또 조종의 공덕지성대와 체조지간난締造之艱難‘을 형용하여 ’용비어천가‘ 1백 25 장을 제정하여 악무에 화주和奏하고 제례무와 연례무를 창정하시고 음악은 아악 당악 향악(속악)의 3종으로 분류하여 그 성질과 용처를 명백하게 분정하였으니 대왕은 음악뿐만 아니요 시가와 무용에까지도 심대한 포부를 발휘하사 사계에 홍대무비鴻大無比하신 업적을 끼치신데 대하여 우리 음악인은 우리 국악의 창조주이신 세종대왕을 추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므로 대왕은 내치와 외교로부터 내지 음악에까지 그 포부와 역량이 아니 미친 곳이 없던 중에 역사상으로 가장 광휘있는 훈민정음 외에 다수한 서적이 편찬되고 혹은 간행되어 널리 후세에 끼치신 혜택이 너무도 광범하셨으나 오직 음악에 관한 서류만이 당시에 간행되지 못하여 유감이었으나 약 60여 년 후인 성종 24년에 그때 실행된 기록이 비로소 발간되었으니 이것이 음악 상 최대 저서인 ‘악학궤범樂學軌範’이다. 대왕은 재위 32년에 춘추는 54세로 한참 모든 경영에 더욱 왕진旺進하실 이때에 불행히도 승하하시어 가진 바 포부를 완전히 수성遂成치 못하시고 만년까지 큰 성과를 걷우려 하시던 차에 아깝게도 세상을 버리시니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유감이 적지 아니하였다. 대왕의 시호는 ‘장헌莊憲 영문英文 예무睿武 인성仁聖 효소孝昭대왕이시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음악교육은 이렇게(6)] 전창이라 함은 모방하여 따라 부르는 것을 말함이다.(즉 일 구절의 노래를 선생이 먼저 부르면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 부르는 것) 음악에 다소 경험이 있는 아동의 대부분에게 이 전창방법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것은 간단하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됨으로써이다. 그러나 이 전창법이 다만 초등에게만 적당한 것이 아니라 성인에게도 배움의 빠름과 자연적 방법이기 때문에 적절한 방법이 된다. 아동들이 모방하는 편이 되는 이상 선생은 아동들이 일순一純한 음성으로 쉽게 흉내 내기에 적당한 방법 태도로 하는 좋은 표본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아동들이 호감을 가지고 또 빨리 배울 수 있게 하려면 선생의 태도가 더 친절(동무같이)하고 더 유쾌하게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연예= [‘국도’ 해방기념 특별 프로]: 국도극장에서는 오는 8월 15일 해방 기념일의 프로 편성을 기간 예의 강구 중이던 바 이번에 다음과 같이 프로를 결정하여 기념 당일부터 1주일간을 상연키로 되었다 한다. # 서울 관현악단= 출연자 계정식, 김천애, 이인선 # 낙랑극회= 김사량 작 이서향 연출 ‘붓돌의 군복’ 1막 # 조영 제작 ‘제주도 풍토기’(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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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8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4> 그리고 전적典籍을 뒤지고 고래의 예악서禮樂書에 근거하여 철저한 고증과 고제古制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무수히 올린 상언上言이 그랬고 쉴새 없이 입안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이 그랬다. 향악을 정리하고 구악을 이정하는 일에 몸을 바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와 악 전반에 걸친 쟁점爭點을 제기하고 그에 매달려 생각을 하고 글로 썼다. 맞지 않고 잘 못 된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성정이 그렇기도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내려진 왕명이라고 할 때 잠시도 해찰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대단히 신중히 하였다. 상주上奏 상언上言 말이다. "무일舞佾의 위치가 맞지 않습니다. 옛 현인의 도설圖說을 상고하여 보니 종묘宗廟의 가운데에 있고 악현樂懸의 북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악현의 북쪽 섬돌의 남쪽에 벌여놓는 것은 옛 제도에 어긋납니다. 또 땅이 좁고 위치가 좁아서 나아가고 물러서며 변화를 지을 도리가 없으니 진실로 온당하지 못합니다.” 박연의 지적은 너무도 분명하고 단호하였다. 악무樂舞 진퇴의 법을 자세히 상고하여 보면 선유先儒가 말하기를(언제나 전제하는 어투이며 방법이었다) 일무를 추는 데는 사표四表를 세우고 춤추는 사람이 남표南表에서부터 이표二表에 이르는 것을 일성一成이라고 하고 이표에서 삼표三表에 이르면 이성二成이라고 하며 삼표로부터 북표北表에 이르면 삼성三成이라고 하고 다시 남쪽을 전향轉向하여 북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사성四成이라고 하며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오성五成, 삼표로부터 남표에 이르면 육성六成이라고 하였다. 풍악도 또한 여섯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천신天神이 다 강림降臨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신을 제사하는 환종궁圜鍾宮 육변六變의 춤이다. 또 남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칠성七成이 되고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팔성八成이 되는 것이다. 풍악도 또한 여덟 번 변화한다. 사표는 나라 사방의 바깥이라는 뜻으로 온 세상을 이르는 말이다. 일성은 춤출 때 곁들이는 음악의 단위로 한 장章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12율律의 기본 음인 황종黃鍾에서 시작하여 육율六律과 육려六呂를 거쳐 다시 황종으로 오는 것으로 넉자를 한 박으로 여섯 박 곧 24자가 일성이 된다. 남표 북표는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백과사전 음악사전(세광음악출판사 음악대사전)에도 없었다. 요즘 사전을 대신하는 인터넷도 뒤져보았다. 이표 삼표 이성 삼성 사성 오성 육성 칠성 팔성 그리고 뒤의 구성九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옛 음악, 국악 용어의 뜻을 직역直譯으로라도 설명하지 못하나 고명한 독자들은 여러 경로로 알기를 바라고 필자처럼 짐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춤사위와 율동 가락 울림의 변화무변… 종묘 선농先農 선잠先蠶 우사雩祀 등 제사에 여러 사람이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춤을 추는 일무佾舞…. 그리하여 땅의 귀신이 다 나와 응감應感하는 것이다. 이것은 땅의 신을 제사하는 함종궁函鍾宮 팔변八變의 춤이다. 또 삼표로부터 북표에 이르면 구성이 되고 풍악 또한 아홉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사람 귀신도 제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사람 귀신을 제향하는 황종궁黃鍾宮 구변九變의 춤이라고 하였다. 상언은 계속되었다. "상고하여 보건대 이 사표 진퇴의 절차는 무무武舞의 법입니다. 문무文舞에는 명백한 설이 없습니다. 선유 가공언賈公彦이 말하기를 무무에 사표가 있으니 문무에도 응당 사표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상도陳常道의 「예서禮書」에 말하기를 가공언의 말이 사리에 맞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에서도 지난 을해년乙亥年(세종 23, 1431) 겨울 대제大祭를 친행親行할 때에 정도전鄭道傳 민제閔霽 권근權近 제조提調 등이 찬수撰修한 의궤儀軌 속에 문 무 두 가지의 춤을 각각 사표로 하고 서로의 거리를 사보四步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일을 악현 북쪽 섬돌 사이에 두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무일을 전정殿庭의 가운데에 벌여 육변 팔변 구변의 의식을 다 하게 하십사고 하였습니다.” 박연은 그렇게 전적과 사례를 가지고 논리를 펴며 아뢰었다. 무일의 위치에 대해서 거리에 대해서… 며칠을 다듬은 논리였다. 어쩌면 참으로 하찮은 대단히 미미한 문제였지만 너무도 중요하게 철저하게 지적을 하고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본조本朝에서 의례상정소와 같이 살펴보오니 위에서 말한 묘정廟庭에 헌현軒懸을 설치할 곳은 실로 비좁습니다. 청하옵건대 남쪽 섬돌에서부터 구보九步를 더 넓게 하소서” 종지從之, 박연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4년 1432년 3월 4일 세종실록 55권에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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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7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3> 이날 경연은 세종 임금이 정악을 창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모을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잘 펴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영의정 황희가 참석한 대신들의 뜻을 대변하듯 아뢰었다. "고맙소. 정말 그렇게들 해 주길 바라오.” 임금은 영의정과 대신들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흡족해 하였다. 그러며 박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특별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박연도 목례를 하였다. 잘 알겠습니다. 열과 성을 다 하겠습니다. 염려마시옵소서. 간절히 눈으로 아뢰었다. 다음날 바로 세종 임금은 승지를 불러 결심한 뜻을 다시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과 성정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하여 예악이 바로 서야 하고 무엇보다 악이 바로 서야 하고 정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알았으니 한 시도 주저할 일이 아니며 서두르고 박차를 가해야 하겠다. 이것은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이며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일이며 풍요롭고 신명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 나라 관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임금 된 자로서 앞장을 서야 또한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은 분부를 내리기에 앞서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승지는 대언들과 악에 조예가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학자들 관리들의 의견을 모으고 뜻을 모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고 지체 없이 그렇게 추진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승지나 대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 일로서 그야말로 백년대계이며 거국적인 사업인데 왕명을 전달하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거기(예악)에 전담하는 기관이나 부서를 두고 연구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도 여유 있게 주어 충분히 연구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종 임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참 좋은 의견이오. 그렇게 해야겠오. 악을 바로 세우는 일 정악을 창제하는 일, 아악을 창제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전통 음악 향악鄕樂을 바로잡고 정리하는 일과 병행해야 하는데 그 또한 일이 많고 어려운 일이며……” 세종 임금은 계속 의견을 내고 과제를 쏟아놓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가사歌詞를 아름다운 곡에 올린다면 이 또한 악을 바로 세우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이를 전담할 관서를 두고 과감하게 추진해야 될 것이고 그것을 승지에게 다 맡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우선 구악舊樂을 정리하는 일을 관장할 부서를 두어야 일의 두서가 맞는다. 그리고 국가 전례典禮 예제禮制 정치 사회제도 등을 연구 하는 부서를 두어야 한다. 바로 단행된 구악이정도감舊樂移定都監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가 그것이다. 정악의 길은 어렵고 중차대하였다. 거기에 모든 중지衆志와 정치력을 쏟아야 했다. 임금은 의례상정소에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총제 정초 신상 권진으로 제조를 삼아 추진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구악이정도감에는 예문관대제학 유사눌 집현전대제학 정인지 관습도감 제조 박연 경시주부 정양을 겸임시켜 구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창제하는 일을 하도록 명하였다. 특명이었다. 집현전 옆에 의례상정소를 설치하고 관습도감 안에 구악이정도감을 두었다. 모든 업무가 다 겸임이지만 악을 바로 세우는 정악, 아악 창제를 모든 일의 선두에 두고 추진하였다. 그것이 임금의 의지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의 뜻이며 의지이자 나라의 뜻이며 시대의 정신이었다. 새 물결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한 대로 그 소용돌이에 박연이 있었다. 그는 나라 음악, 국악의 새 물길을 흐르게 하는 데 분골쇄신하였다. 악성樂聖에 이르는 대업大業이었다. 세종 임금과의 인연이라고 할까 유사눌이 그를 임금에게 천거하기도 했고 옛날 아버지 어머니 무덤 앞에서 시묘를 하며 피리를 불던 때부터 소리와 가락은 운명지어져 갔던 것이다. 물론 그의 노력도 있었다. 그의 노력이란 잠을 안 자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시를 짓고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고 예를 세우는 일이고 악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 방안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가 특별히 음감에 뛰어나고 악기제작에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고 혼신을 다 쏟은 것이었다. 하나 더 말한다면 자연적인 삶의 대처라고 할까 흙과 같이 나무와 바람과 같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하는 성정이었다. 궁은 흙의 소리요 상은 나무의 소리이듯이 오음이 다 자연과 우주조화의 음이라고 하는 데에 심취한 철리哲理 악리樂理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능력과 음감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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