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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br>주요한의 기록, 그 진실은?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에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친일파 지식인’이란 규정하에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이 중에 주요한朱耀翰)은 ‘安島山全書’라는 방대한 저술에서 ‘애국가’ 항목을 두고 세 번에 걸쳐 작사자에 대해 거론한 인물이다. 그런민큼 누구보다도 주요한의 작사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된다. 이를 짚어 보기로 한다. 안창호의 생애를 다룬 대표적인 전기(傳記)는 이광수의 ‘도산안창호’와 주요한의 ‘安島山傳記’이다. 전자는 안창호를 "도덕주의자의 거울”로, 후자는 "민주적 지도자의 전형”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자료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도 평가를 받는다. 이 두 저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조직 초기부터 이광수가 귀국하는 1921년 2월 사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으로 함께 활동한 이들이다. ‘도산안창호’는 "작사자 문제 발화”로, ‘안도산전서’는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저술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 즉,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安島山全書’의 평가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평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주요한은 외견상으로는 몰라도 내심은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보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주요한의 발언을 순차화 하여 밝혀 보기로 한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주요한의 첫 발언은 네 가지 점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자 문제가 발발한 후 첫 번째의 반응이란 점이다. 미국의 한 백과사전 출판사가 애국가 작사자의 연혁을 문의해 온 바, 공보처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통보하려 한다는 기사(서울신문)를 낸 것이 1955년 4월 4일 자이다. 그리고 주요한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 4월 19일이기 때문이다. 둘은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으로 대표적이란 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반증하는 것임으로 쉽지 않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셋은 안창호의 최측근 중 한 명이란 점이다. 임시정부 시기와 흥사단 활동에서 이광수와 주요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했던 인물인데, 한 사람은 작사자로, 또 한 사람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다. 넷은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를 판단할 전문소양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장 시절 ‘적십자의 노래’ 등을 작사하고 ‘불놀이’를 발표한 시인이란 점이다. 주요한의 첫 발언은 이렇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기고문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신화적인 설’이란 표현은 곧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주장은 듣도보지도 못했다.”는 강경한 부인이다. 이 결과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며 안창호가 직접 "내가 작사했다”라는 말을 한 바도 없다고도 했다. 이는 "내가 작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라는 억지를 배척한다. 특히 안창호가 직접 자신이 작사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는 이후 1963년 발간한 ‘안도산전서’에서도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로 기술하여 이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지적 표현은 주요한의 깊은 내심에서 나온 확신임으로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발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한 글에서다. 1955년 12월 조사위원회 일원으로서, 자신이 주관한 월간잡지 ‘새벽’에 발표한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란 글이다. 여기서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는 대목의 행간을 읽어보기로 한다. "文敎部에서 愛國歌作詞者調査委員會를 委囑하여 그 사무를 추진할 때에 筆者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다.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 調査途中에 딴 所得이 있기로 여기 披瀝하고자 하는 바이다.(중략) 그때 開城에 있는 韓英書院에서 찍어 내서 몰래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거기는 약 2백餘篇의 唱歌가 수집되어 있는데, 推算年代로 보아서 물론 秘密出版이다. 이 唱歌集 속에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 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로 되어 있다. 曲調는 두 가지가 같다고 하였고, 曲譜를 보면 스코틀랜드 民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그것이었다. 그 밖에 韓末에 유행되던 여러 가지 노래가 수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筆者는 ‘靑年學友會歌’라는 것을 발견했다.(중략) 다음에 유명한 ‘去國歌’도 이 두 책에 揭載되어 있다. 이 歌詞는 春園선생이 저술한 ‘島山安昌浩’에 收錄되었으나 그 歌詞의 行數가 節을 따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一部 漏落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敍上의 兩 唱歌集에 收錄된 것으로서 완전한 歌詞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월간 <새벽>,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 1955, 12) 다소 길게 인용한 글은 주요한이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비로 ‘한영서원 발행 창가집’도 조사자로서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발언 "신화적인 설”이라는 단언은 적어도 이광수의 ‘도산안창호’ 기록을 분명하게 부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두 번째 발언의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고 한 소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작사자조사위원회에서 적어도 안창호가 작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또한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의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라고 구분하여 인용한 대목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영서원의 창가집에는 두 애국가의 작사자로 윤치호라고 밝혀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작사자조사위원회가 결론을 윤치호로 내리게 한 근거 중 하나라는 것과 1916년 ‘경무부 보고 애국창가집 사건’ 기록에 ‘윤치호 舊作 애국가’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다.(이후 1920년대 김종만 소장(所藏) 노래책에 애국가 작사자로 ‘윤선생 치호’로 표기되고, 가장 방대한 자료집인 1931년 한석원이 펴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에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 작사’ 밝힌 사실에서 재확인이 된다.) 이를 주요한은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주요한은 이 두 번째 발언의 행간에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다”를 담은 것이다. 만일 작사자조사위원회의 결론이나 자신의 견해가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상과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그 委員會의 결론에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했는데~”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두 번째 발언에서도 주요한은 내심으로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주요한의 저술 ‘安島山全書’에서 별도의 ‘愛國歌’라는 소항목을 두어 안창호 작사설을 확대, 재생산한 두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살피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이의 진앙지는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이다. 즉,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이다. 주목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단순히 "대답이 없었다”인데 주요한은 다음과 같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부연하였다.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라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시점과 장소는 주요한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 등으로 안창호와 이광수와 함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사정이다. 이런 점에서 주요한의 부연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즉,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하여 소위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이 사자성어는 굳이 말로 알려주지 않고 웃음으로 대신한다는 뜻이나 일반적으로는 직접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하는 모습이나 대응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예의상 대처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한다. 이에 적용하면 결국 안창호가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지만, 정작 안창호에게 작사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했다”인 것이다. 이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안창호와 함께 있었지만 들은 바가 없는 얘기이다.”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실상은 안창호 스스로가 작사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지 않느냐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애국가를 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작사하고, 이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확산시켰다. 다소 감동적인 이야기다.(이를 장리욱은 1983년 발행한 <偉大한 韓國人 安昌浩>(중앙서관, 118~119쪽)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확산시켜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핀다면 흔한 말로 ‘카더라 통신’ 수준인데, 에피소드의 시점 등을 눈여겨 읽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시점은 대성학교 개교 이후라는 점과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대리교장’ 같은 용어의 이해이다. 대성학교의 개교 시점은 1908년 9월이고, 대리교장 또는 대변교장은 저명 인사를 내세워 학생모집 효과를 얻기 위한 방편이고, 개교 후에는 윤치호가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평양의 안창호가 교장직의 대리를 맡아 쓰게 된 말이다.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다. 장소는 평양 대성학교 안창호 대리교장 사무실, 때는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 이후 어느 날, 등장인물은 서울에서 온 교장 윤치호와 평양의 대리교장 안창호, 개요는 안창호가 지어 두었던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는 애국가를 서랍에서 꺼내 보이자 윤치호는 이를 좋다고 하자 안창호가 이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양보하여 발표하자고 하며 확산시켰다. 여기에 굳이 작품 이름을 추론한다면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 정도일 것이다. 매우 드라마틱하다. 안창호가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명의(名義)를 넘겨주었다니 오늘이나 당시나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설정될 수 없는 것이어서 재미는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결정적으로는 현 애국가가 ‘찬미가 14장’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 1908년 6월인데도,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가사를 두고 잘되었다고 하며 안창호가 작사한 것을 윤치호의 작사로 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니 그렇다. 이런 이유로 주요한의 첫 발언에서 ‘신화적인 설’이라고 했다고 보는데, 이 극의 배경을 살피면 이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작사자 문제의 발화점인 ‘도산 안창호’의 본질적 문제이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책 여러 곳의 탈맥락적인 안창호 작사 언급 대목은 편집과정에서 원 저자인 이광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박현환(‘도산 안창호’의 저자가 이광수가 아닌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이다. 박현환은 안창호가 귀국하자 1922년 7월 귀국하여 이광수 주변에서 흥사단 활동을 도운 인물이고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복구 시기까지 국내 흥산단 업무를 관장한 인물이다.) 같은 인물이 가필한 결과라는 것이 문제다. 대표적인 대목이 ‘상해시대편’의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는 탈맥락적인 부분이다. 이에 따른 결론은 "전기소설에 근거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극의 대본이 ‘전문(傳聞)을 다시 전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요한은 위의 인용문 앞에 이렇게 전재하여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한 기술이라고 했다. 첫 발언자는 안태국, 이를 전한 이는 홍재형, 이를 듣고 주요한이 기록을 하였다. 첫 발화자 안태국(安泰國, 1877~1920)은 평양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대한제국시대 잠시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리고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이강, 차리석, 최광옥, 이갑 등과 함께 활동하며 안창호와 연을 맺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계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16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3.1민족운동 이후에는 평양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비서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3월 병사했다. 이를 감안(勘案)한다면 이미 1920년 이전에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시기 이전에 사위 홍재형한테 전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1940년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 정도로만 알려진 홍재형이 어떻게 장인에게 듣고 다시 이를 주요한에게 전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20년 이전 왜 이런 사실이 안태국만이 알고 있었느냐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언에 전언’을 통해 펼쳐진 대성학교를 무대로 한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은 제목 그대로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 살피려는 것은 임정시절 가사 일부를 수정하였다는 대목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1쪽에서 최남선이 언급한 부분이다.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주요한이 아닌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주요한의 나이가 당시 20세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역시 ‘안도산전서’의 ‘애국가’ 항목(93~97쪽)에서 4절의 일부를 수정했다는 것과 2, 3절에 대한 언급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1919년부터 상해에서 ‘임군을 섬기며’ 대신에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도산이 고친 것이었다. 둘째 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든지, 셋째 절 ‘가을하늘 공활한데’와 같은 웅장한 구상은 도산의 머리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1971년, 93~97쪽) 앞의 문장은 ‘찬미가 제14장’의 4절 중 ‘임군을 섬기며’를 현재의 ‘애국가’와 같이 ‘충성을 다하여’로 고친 것은 안창호라고 하였다. 이는 1919년 12월 1일 발행된 신한청년당 기관지 ‘新韓靑年’ 창간호 속 표지에 수록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임시정부 시기 수정된 것으로 볼 때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요한이 작사자에 대한 유일한 단정적 표현에서 그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의 해석 문제는 주요한의 표현대로 추정 정도일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작사자 문제를 확산시킨 ‘안도산전서’의 세 대목을 그 발화점인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대비하여 살폈다.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원천적 문제 제기이다. 이 책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 박현환(나정 박현환(蘿井 朴賢煥)은 1892년 평안북도 철산(鐵山) 출신으로 평안북도 정주 오산 학교의 이광수의 후배이면서 제자로 일본 유학 후 오산 학교 교사로 일했다. 3. 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과 흥사단 원동 단우로 ‘신한청년’과 ‘독립신문’ 편집 업무를 함께 하였다. 해방 직후에 흥사단 국내 위원부 재건에 앞장섰고, 흥사단의 해외 조직과 국내 조직 재건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 ‘태극기와 애국가’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에 곳곳에서 덧붙여 가필(加筆)을 하였다. 그 결과 감동적인 기술과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사실로 오해하게 하였다. 소설가적 성향을 발휘한 것인데, 박현환은 이광수를 따른 작가로 1920년대 초반 톨스토이 소설 부활을 ‘해당화’라는 제명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또한 해방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재건을 도맡은 인물이다. 이로서 이광수에게 전기소설 집필을 의뢰하고, 이의 편집과 출판을 주관한 인물이다. 그 결과 탈맥락적이고 산발적으로 작사자가 안창호라고 왜곡시켰다. 사실(fact)이 아니라 감동으로 가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은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자의 첫 발언, 1955년 12월호 월간 ‘새벽’ 기고문, 그리고 1971년 주요한이 편찬한 ‘안도산전서’ 에서 제시한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평가이다. 정리하면 주요한은 첫 발언 ‘신화적인 설’을 번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안도산전서’는 흥사단의 입장을 고려하여 부정하지는 않고,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순 서술을 한 것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요한이 안창호설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 할 수가 있다. 이는 위에서 살핀 바대로 주요한은 첫 발언 이후 이를 부인하거나 번복한 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주요한은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일부 사설을 수정한 바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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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별 김덕영선생을 찾습니다”문득 어떤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로 만남이 뜸했던 관성탓인지, 만나자는 전화를 하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오랜만에 언뜻 떠오른 사람이기에 오래 전 통화했던 번호를 찾고자 이름을 검색하여 수화기 표시를 누른다. 이내 빨간 원 안의 수화기 그림이 뜨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할 말을 준비한다. 이 세 마디 정도일 것이다. "별일 없었지요?” "왜 그렇게 소식이 없었어요?” "우리 이렇게 살아도 돼는 거요?” 그런데, 뜻밖에도 벨 소리가 아닌 상투적인 여성의 기계음이 들린다. 아니 뭐야 이상하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영어 기계음이 나오자마자 바로 끊었다. 그리고 잘못 걸었나 생각하고 다시 화면에서 번호 앞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 이름의 번호는 하나뿐이다. 틀림없는 그 이름에, 그 번호다. 그렇다면 혹시?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다. 이런 일이 칠순을 넘기면서부터 드물지 않게 있어 왔다. 대개 연조가 더 드신 분들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한숨을 몇 순배 돌렸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들어 주변 지인들에게 소식을 물었다. 돌고 돌아 확인이 되었다. 서너 통화 후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이 중에 하나이기가 일쑤였다. "그 양반 코로나 때 갔다 더라구. 나도 후에 들었어. 주변에 부고도 내지 않았데” "아이~그 양반 갈 때 되었지, 전에 만났을 때도 위태위태 했잖아? 거기다 술에 담배까지 했지?” "요양원에 들어갔는데 연락두절이야. 야속한 친구여!”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허무해서인지, 아니면 나도 이럴 수 있어서라는 비감 때문이지. 한숨이 유독 길어졌다. 그런데, 오늘 또 이런 지경을 만났다. 다만 주변에 돌려 알아볼 데가 없어 그렇게 단정할 것은 아니었으나 예감이 그렇다. 이 지면을 통해 그분을 찾고자 해서 실명을 밝히기로 한다. 그분은 2000년대 들어 국립국악원 공연에는 거의 방청객으로 자리했다. 국악방송 애청자로 ‘모범 애청자’로 꼽힌 바도 있다. 늦은 60대 들어 가야금을 배워 비공식적인 무대에 서기도 했다. 국학 관련 학술 모임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국악 관련 기념식 같은 데도 거의 자리를 했다. 남은 노년을 애국자로 사는 것이 틀림없다. 그분과는 그저 만나면 악수하고, 간단한 안부 묻는 정도이다. 다만 관련 행사 문의로 전화를 받은 바 있어 전화기에 번호를 저장해 두었다. 그런데 이분이 지난해 어느 즈음부터 나타날만한 행사장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 두어 달은 두리번 거리다 다음에는 오겠지 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 달이 더 지나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지인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혹시 치아가 없어 입이 홀쭉하신 그 김선생님 못 봤어요?”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글쎄요~” 정도였다. 사실 이 분과는 깊다면 깊은 인연이 있다. 생생한 에피소드이다. 30여 년 전 KBS에서 ‘고서시장(古書市場)’이란 대형 행사를 3년에 걸쳐 시행했다. 그 중 2, 3회를 맡아 진행한 바 있었다. 바로 11일간의 판매 행사장에서 나이보다 늙수구레한 분이 제법 가격이 나가는 책들을 샀다. 일제시대 ‘소년’ 창간호 등을 세 차례나 사는 분이였다. 귀한 최남선 주제의 잡지 창간호를 구매한 분이라서 주목을 했다. 그런데 더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결제 방법이었는데, 조건부 가계수표 결재였다. "수표 이면에 서명과 전화번호를 남겼습니다. 은행에서 결재할 때는 꼭 제게 먼저 전화를 주세요. 수고스럽지만 꼭 부탁합니다.” 거듭 당부된 당부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분이 서울시 원예 담당 하급직 공무원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반 년치 이상의 급여에 해당하는 책값을 마련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던 듯하다. 1년 후, 3회째 고서시장이 열렸다. 필자가 운영을 또 맡게 되었다. 그분도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귀중 도서로 분류해 놓은 16세기 초의 고가 활자본 10여 권을 구입하였다. 지난해 보다 더 큰 액수였다. 그리고 역시 가계수표를 발행하였고, 결재수단도 같았고, 부탁 내용도 같았다. 행사 일정이 며칠이 남아 한 번 더 오시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오지 않았다. 그렇게 행사는 끝이나고 관련 부서장들과 회식을 했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출품을 한 고서점에서 사고가 나서 중도에 철수를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부득이 예정에 없던 결산을 급하게 했다. 긴급한 상황이라 회계 부서에서 처리를 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음을 행사가 끝나고야 알게 되었다. 송구스러웠다. 그렇다고 뒤늦게 연락을 취하는 것도 어울리지않는다는 생각에서, 내년에 만나면 안부를 묻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새해를 맞았다. 그 사이 KBS 사장이 바뀌었다. 사장(이원홍)이 문공부장관으로 갔다. ‘고서시장’도 중단되어 네 번째 행사가 개최되지 못했다. 자연히 그분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그분에 대한 생각도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청계천의 한 고서점에서 그분을 만났다. 평일 한나절이라 서점에는 주인과 셋뿐이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인사를 하였다. 다가가 마주하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지난 일을 물으려 했다. 그러자 그분은 별 내색 없이 목례로 답하고는 책값을 치루고 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피하기라도 하는 듯. 지난번 일에 대한 사과를 겸하여 차라도 한잔하려 했는데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집었던 책을 내려놓고 따라가려 했다. 그런데 주인이 혼자하는 말이 내 귀에 와 발을 멈추게 했다. "천애 없는 모범 공무원에다 애서가 양반을 고서 한번 잘못 샀다가 패가망신을 했으니. 공직자가 가계수표 남발해서 부도를 냈다고 강제 퇴직을 당했으니~ 쯧쯧 에이 세상에” "예? 저분이요? 가계수표 부도요?” "아니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그 일을 몰랐어요? 뭐, 그 방송국에서 한 고서시장인가 뭔가에서 수백만원 짜리 활자본 몇 권을 사고 말미를 달라고 약속을 하고 가계수표를 끊었는데, 거기서 이튿날 바로 은행에 넣었다는구먼, 그래서 난리가 났다는 거여, 그 양반 모범 공무원으로 뭐 영화에도 나왔던 사람이랍디다” 그랬다. 그의 말투나 행동거지는 반듯했다. 그렇다고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정중할 뿐이었다. 이 얘기를 듣고는 뒤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송구했다. 너무 송구했다. 그런데도 원망도, 나무람도 하지 않았다. 약속을 믿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자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렀다. 직업상 자주 국악 공연장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국립국악원 우면당 로비에서 그분을 만났다. 처음에는 몰라보았다. 왜냐하면 이가 모두 빠져 합죽이가 된 상태였다. 특유의 온화한 눈배가 아니었다면 몰라 볼 뻔하였다. 매우 반가웠다. 다행이 악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변명을 할 기회는 주지 않았다. 이 후 몇 년간 그분은 국악 애호가가 되어갔다. 공연장은 물론 관련 행사장에도 자주 참석했다. 이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도 거부감 없이 악수하고 미소로 답했다. 그러나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래서 10여 년전의 일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늘 마음 한 켠에 미안함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코로나를 만나 2년여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코로나 터널을 지난 이 봄, 국악 공연장에 그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공연이나 행사에 오면 그분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일이 거의 매일인데, 만날 수가 없다. 조바심이 생겼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부디 조급한 상상이 아닌, 다른 일로 국악 행사를 못 나오고 전화번호도 달리 쓰게 되어 번호를 바꾸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시 반갑게 악수하고, 그 온화한 미소를 마주하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꼭 마주하고 그 일에 대해 해명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그분을 찾게 되었다. "입이 홀쭉하고, 호가 ‘한별’이고, 이름이 ‘김덕영’이란 분을 알고 계신 분 계십니까? 혹시 계시다면. 이 안부를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이 퍽이나 궁금해한다고요. 그리고 이 봄날 향기 있는 국악공연에 나드리 한번 하셔 달라고요. 다시 말씀 드릴께요. 호는 ‘한별’, 성함은 ‘김덕영’ 선생을 찾습니다.” 김연갑(아리랑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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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윤치호 인정애국가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기원 또는 명칭일 수도 있고, 형태나 내용에 대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노래라는 점에서 전통성이나 전수 현상이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이런 과제와는 달리 의외적으로 우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배태된 작사자 문제가 걸려있다. 이는 역경의 근대사를 함께한 애국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노래의 유통과 전승이 아닌 익명성과 의례성으로 전승된 특성으로 하여 작사자 여하(如何)는 중요한 과제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기관인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반이란 기간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복구 중이 1956년 ‘국론분열을 우려하여’라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국가에서 공식화 하지도, 법제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잠복되었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문제는 90년대 들어 재론이 되었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 국가상징연구회 창립5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國歌 愛國歌에 대한 再檢討’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 프레스센타에서 개최한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연갑이 발표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에서 학술적으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정받았다. 그동안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譯述’의 해석 문제, 가사지의 ‘1907年 윤치호作’에 대한 오해, 이광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오류 등을 해결하였음은 물론,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신문 서재필 기록을 통한 ‘무궁화노래’의 윤치호 작사 확인 ②중앙대학교 안춘근(순흥 안씨)교수 발표 1904, 5년 필사 자료 3편의 위작 판명 ③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 결과 ‘윤치호 작사 확인’ 등의 성과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흥산단과 좌파계열의 진영논리로 윤치호 자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를 온전하게 인정하게 하는 데는 우선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더 면밀하고 자료와 해설로 설득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글 역시 이런 의도에서 그동안 작사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자료임에도 전체적인 조명이 도외시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사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얼마나 혼란이 격심했고, 그것의 해소가 얼마나 난문제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조사자료집’이지 ‘조사결과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연하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위하여 사전에 기본 자료를 취합하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한 것이지,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사자료 중에 "내용이 현행 애국가와 동일한 者의 有無如何는 未詳임”(1쪽)이란 표현 등을 오해하여 "조사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하였다”는 등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제1쪽의 서문격의 글, ‘애국가화창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의 종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총 54쪽의 프린트본(가리방)이다. 목차는 없고 1쪽부터 본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작사자 거론 5인을 적시하고 세 가지 설(說)을 제시하였다. 내용의 첫 문장은 "現行愛國歌作詞者로 論義 되고 있는 인물로는 尹致昊 安昌浩 崔炳憲 金仁湜 및 閔泳渙의 五人이고 또한 單獨作詞說, 合作說 및 改作說이 있다.”고 하였다. 합작설은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설이고, 개작설은 민영환의 작사를 김인식이 개작하였고, 그 후 안창호가 또다시 개작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작설을 제기했데,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안창호가 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때 거론된 인물은 5인이고, 이들 대상의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세 가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문헌과 신문 소재 애국가 기록을 3쪽에 걸쳐 인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편에 광무4년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 기록을 인용하였다. 한국법전 제2장 ‘의식’편에 1908년 애국가를 연주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그리스도신문(2회 인용)에 애국가와 황실가를 화창 또는 제창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전자는 8회, 후자는 2회 인용하였다. 문헌과 증언이 뒤석여 있다. 애국가의 종류 "애국가의 종류가 많았던 모양으로”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보를 인용하고, 김양선 목사와 장지영과 최남선의 증언을 수록했다.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국가 세 종류를 제시했다. 특히 1902년 학부(學部) 제정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애국가’와 관련한 기록과 위의 세 분의 증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 일부도 제시했다. 시선을 모으는 것은 이를 ‘애국가’가 아닌 ‘國歌’로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현행 애국가를 ‘국가’는 이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있었음을 알게 한다. 작사설 서론에서 밝힌 5인에 관련한 작사설을 1955년 5월 13일 이전까지의 신문 기사와 증언 등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민영환(2/1쪽), 안창호작사설(3쪽), 김인식작사설(1쪽), 최병헌작사설(1쪽), 윤치호작사설(6쪽) 순으로 관련설을 취합하였다. 윤치호 항목은 가장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윤치호설은 앞의 4인에서 제기한 설과 교차 검증을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다시 집중 분석을 하기로 한다. 부록 증보문헌비고와 한국법전 수록 애국가 기록과 독립신문 투고로 게재된 애국가 18편, 대한메일신보 잡보란 수록 무궁화가 2편과 애국가 수록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 ‘國歌調音’ 기사와 ‘대한제국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단행본으로는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본 창가책 인용 애국가를 수록하고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애국가(찬미가 제1장), 현 애국가 가사를 인용하였다. 한편 서북학회보 ‘西友’에서 "학부에서는 애국가 통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위원 중에는 학부협판 윤치호의 이름도 있다.”를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목록 21종의 참고문헌을 기록했다. 완조실록(王朝實錄-고종·순종 실기와 승정원 비서원, 규장각일기), 관보, 공사관기록, 독립신문 외 4종, 한국통사, 대한자강회보 외 2종 유년필독(幼年必讀 왜정시대 압수 책) 그리고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 손진태 편)이다. 의외인 것은 무가(巫歌)를 모은 ‘조선고가요집’이다. 이 시기 애국가를 수록한 해방 직후 발행의 노래책이 10여 종에 이르는데도, 이 같은 관계가 없는 무가집을 참고자료로 포함시켰다는 것은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5인에 대한 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5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중에 작사설 항목은 이 자료집의 핵심 주제로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영환부터 윤치호 작사설까지 살피기로 한다. 1. 민영환 작사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작사설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과 김동욱의 증언인데, 전자는 역사학자로 서울신문 1955년 4월 16일 자에 밝힌 내용이다. "거금 47, 8년 전 학생시대에 이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불렀다. 민영환 작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1908년에 들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부정확하다. 현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기에 들었던 시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영환 작사로 거론된 것은 1902년 학부에서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이다. 그러므로 장도빈은 현 애국가와 ‘대한제국애국가’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도 하였다. "당시에 안창호작 애국가를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는데 현행 애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안창호작’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거국가’인지 아니면 1908년 2월호 태극학보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찬 愛國歌’인지, 또 아니면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 자 기사 ‘大韓魂’에 포함된 ‘애국가’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안창호 작사 애국가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하게 하는 동시에 현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준 것이다. 김동욱의 증언은 출전이 없다. 조사자료를 꾸미는 과정에서 취합한 증언인듯하다. 당시 86세로 "기미년에 윤치호씨와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는 민영환에 틀림없다”(8쪽)라고 하였다. 이 증언 역시 1902년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와 혼동한 듯하다. 이런 오해의 배경은 이 애국가 악보 서문에 "大師府會計局總長陸軍副將 正一品勳一等 閔泳煥”으로 되어있기 때문인 듯하다. 2. 안창호 작사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작사설은 매우 관심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를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 출전이 제시되었다. ‘도산안창호’(1947. 5 30 刊)와 ‘도산안창호웅변전집’(1950 5 20 刊)으로, 여기에서 네 단락을 인용하였다. ①"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 부분을 ‘충성을 다하야’로 修正하였다.” ②"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넓리 불려져서 국가를 代身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自己의 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云云” ③"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對答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하지 않았다. 云云” ④"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十篇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 된 作品이라 云云”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은 모두 1947년 중반에 발행된 이광수가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것이 안창호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들 간의 교차 검증을 하면 다음과 같다. ①은 ‘신한청년’ 창간호에 게재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되어 나오니, 이를 안창호가 수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단 수정 시점이 창간호 발행 시점인 1919년 12월 이전이라는 단서가 충족되어야 한다. ②와 ③은 같은 맥락의 증언이다. 이 문제는 안창호가 언제 작사했는가와 왜 자신이 작사했으면서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느냐 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기된 안창호 작사 시기는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 윤치호 교장에게 안창호가 지은 것을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얻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역술 <찬미가>에 수록한 이후라는 문제가 확인된다. 여기에다 "왜 자신이 작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안창호의 겸양 때문이다” 또는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널리 전파시키려는 의도에서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있는 상태이다. 그 하나가 조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955년 4월호 ‘신앙생활’에 밝힌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의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 일제 압박 하에서 윤선생(윤치호)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자료에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광수의 두 번째 부인 허연숙(許英肅, 1897~1975)이 1955년 4월 20일 자 자유신문에 증언한 것으로, 윤치호의 딸이 이에 대해 問議해와 이광수가 설명하여 해득시켜 보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증언이 있다. 윤치호 작사설 자료에 수록된 주영환(朱榮煥)의 서면 증언이다. "이광수의 도산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출판 후 춘원은 안영자 씨를 통하야 訂正할 기회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광수는 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다 6,25 전쟁 혼란 와중에 납북을 당했다. 이런 상황임으로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로서 안창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은 윤치호 딸의 오류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증거력이 상쇄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족이나 친지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 측은 허영숙의 증언만을 거론하나 이 같은 대비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전기소설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인데, 앞장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에서 밝혔듯이 이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이미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되풀이하지만 이광수의 글이라면 이렇게 파편적이고 탈맥락적일 수가 없는 데다 ‘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이 생략된 사실에서와 같이 편집과정에서 가필과 삭제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어서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의 중장이 있다. 조사자료에는 두 가지 증언을 수록했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제기한 것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상해에서 안창호가 ‘임금을 섬기세’를 ‘충성을 다하여’로 改作을 하였을 때 자신에게 問議(9쪽)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같은 조사자료 같은 항목에서 최남선이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11쪽)이라고 지적을 하였다. 이는 주요한의 나이가 20세라는 점으로 보아 최남선의 지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의 ‘성자신손’(무궁화노래)을 ‘동해물과 백두산이’(애국가)로 개작하였다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대성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윤치호는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서 이런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낭설인 것이다. 다음은 최일봉(崔日鳳)이 서면(書面)으로 제출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의주 강연에서 안창호가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주었다 云云”이라고 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안창호가 임정시절 내무총장 비서실에서 "이유필(李裕弼) 입회하에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 하고 언명하였다. 云云”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의 진정성은 의문이 된다. 그리고 후자는 안창호설의 상투적인 주장이라 위의 김인서 목사 주장으로 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영숙 씨의 증언을 살핀다. 두 가지를 인용했다. 하나는 ‘도산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윤치호 측에서 이광수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득하고 돌아갔다는 것과 자신이 진명학교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하며 "도산이 作詞하야 愛蘭 민요곡을 부쳐서 부르다가 김인식 씨가 음악가로서 名聲이 있었으므로 作曲을 부탁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자는 앞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살핀 바와 같고, 후자는 문맥상 애매하여 논의 할 필요를 갖지 못하나 김인식설의 배경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인식 작사설 음악교육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 크게 관심을 둔 인물이다. 직접 직원이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고,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 1935~)이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인데, 하나는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여러 학교와 기관에서 지도한 음악가이고, 둘은 1955년 당시 작사설 거론자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다.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초기 상황에서 종횡한 음악가이다. 김인식은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고, 그 뒤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 스눅(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이후 바이올린과 코넷까지 배웠는데, 오르간 연주는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 1학년 음악수업을 맡을 정도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지도를 요청받고 교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부설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도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상에서 애국가 작사설의 인물로 시선을 끌만 하였다. 조사자료에는 1908년에 진명여학교 창립기념에 쓰기 위해 ‘애국가’란 제목으로 작사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박서양(경성합창단 단원)이란 학생이 부르는 ‘성자신손~ 운운’하는 "皇室歌(作者不明)를 듣고 이것에서 힌트를 얻어 작사·작곡을 하여 기념식에서 불렀고, 그 후 기호학교에서도 가리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7년 후에 작고하였음에도 작사자로 제외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1998년 발간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상술하였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1907년을 전후한 당시 윤치호와는 YMCA 활동과 한영서원 하기 음악강습 교사 활동, 그리고 종교교회와의 관련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 둘째, 1910년 경신학교 교사 재직 시 <보중친목회회보> 창간호에 발표한 <애국가>가 무궁화가 가사에 자신이 작사한 것을 더하여 ‘올드랭 사인’곡으로 발표하며 ‘김인식 작사’로 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현 애국가가 아니라는 점. 셋째, 이 같은 사실을 생존 시에 밝히지 않았다는 점. 넷째, 작사자조사위원회의 출석 증언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점. 마지막은 남긴 일기에 "찬송가에 손을 얹고 작사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일기를 쓴 일자가 작사자 조사 직후라는 점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외 김인식설에는 김한규 고유상 홍만유, 그리고 당시 진명여학교 학생 3인의 증언도 있다. 이는 모두 ‘김인식 작사’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김인식 작사의 다른 작품들과의 혼동에서 결과한 것이다. 한편 증언자 중 출판인 회동서관(淮東書館) 사장 고유상(高裕相)이 관심을 끌지만, "김인식 작 창가책 소형이 있었다”는 단순한 증언일 뿐이었다. 실제 김인식 명의의 악보집과 창가책과 악전(樂典)이 있지만 거기에 애국가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김인식 작사로 발표된 애국가(KOREA)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KOREA)는 8·6조 시형에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같은데, 노랫말을 의외로 두 부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후렴)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총 4절에서 1, 2절은 김인식 작사이고, 3, 4절은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3, 4절이다. 이 1, 2절을 언제 작사하여 재구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윤치호가 ‘찬미가 제14장’(현 애국가)을 작사한 1907년 중반 이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다시 밝히겠지만 화가 김은호의 회고록 ‘書畫百年’에 윤치호 작사 증언 부분에서 김인식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것이 확인된다. ‘예술통신’ 1947년 2월 10일 자 ‘愛國歌 其二’로 나오는 것은 물론 몇몇 필사본에도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확인하듯이 김인식은 당시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가’에다 가사를 더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증언을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가로서, 생존 인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4. 최병헌 작사설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위 ‘윤치호·최병헌 공동작사설’의 인물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최병헌 항목에는 최황(崔晃) 등 가족 2인의 명의로 제출한 자료가 요약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05, 6년 경 정동 자택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작사했다. ②윤치호와는 독립협회 때부터 친교, ‘황실가’ 후렴을 빌려 ‘하나님이 보호하사’ 애국가를 작사했다. ③윤치호는 기독교인이 아님으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 ④윤치호는 최병헌의 권유(勸誘)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작고 28년 후의 후손들이 제출한 자료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같은 내용은 어불성설이다. 윤치호는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으로 최병헌 보다 입교가 12년이 앞선다. 최남선이 이를 교정시켜 주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 시기 최병헌은 주사직에 있었다. 가족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이를 견준다면 앞의 두 가지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도 있다. 12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후 위의 인물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여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년 만인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을 하려 했다. 이에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YMCA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작사자에 대한 코멘트를 할 만한 동시대 지식인임은 분명하다. 조사자료에는 자신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에 14세로 참가하여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며, 작사자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하였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滯美 中에는 안창호작이라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들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기 직후 미국과 하와이에서는 신한민보 등에서 애국가 또는 ‘국민가’(동일 가사)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에 가치를 둔다면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5. 윤치호 작사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교육자·정치가·저술가·개신교 운동가·계몽 운동가·언론인·독립협회·만민공동회·신민회·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한 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 의회설립운동을 벌이고, 황제에게 불충(不忠)하는 역적으로 취급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제경찰의 미행과 내사 등을 견디지 못해 친일로 전향하였다. 애국가 작사 문제는 문헌과 증언과 상황이 확정에 이르는 단계이지만, 친일 프레임에 발목을 잡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작사설 항목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 개의 그룹인데, 하나는 한영서원 제자들의 증언, 둘은 가족의 주장, 셋은 지인들의 주장, 넷은 평론가 또는 제3자의 증언이다. 이제 각 측의 주장과 앞의 네 작사설을 교차검증하여 증거 자료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한다. 한영서원 제자 신영순(申永淳) 외 3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우선 ‘特別讚美歌集’ 즉, 초판 ‘찬미가’의 존재를 알려 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제1장이 국가(영민요곡), 제2장이 황실가(영민요곡)이고, 그 다음이 독립가와 신병가 등이었는데, 곡조는 찬송가 곡이었다”라고 하여 재판과는 다른 편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첫째 제1장이 국가(KOREA), 제2장이 황실가로 편제된 점, 둘째 재판 ‘찬미가’에 없는 찬송가 곡조의 ‘독립가’와 ‘신병가’가 수록된 점, 셋째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이상의 세 가지를 들어 재판과 다른 초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아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점을 보강해주기도 한다. ‘찬미가’ 초판은 1906년 10월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 첫 입학생 14명에게 배포하기 위해 소규모로 출판을 했고, 1907년 작사한 현 애국가 외 2편의 ‘애국적 찬미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포함하여 재판을 1908년 6월에 발행하였다. 이의 존재를 바로 한영서원 학생들의 체험적인 직접증언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어서 1913년 "창가를 수집하여 비밀로 노래책을 출판하였다가 투옥되고 압수를 당했는데. 제1권 제1장 ‘애국가’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 되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 창가집의 실물이 없어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책에 대한 ‘창가책사건’ 관련 기록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드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최규남의 증언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9세로 한영서원 다닐 때의 경험을 진술한 것인데, "한영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부치고 선생 朴嶼陽(강화출신)씨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며 이것은 윤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제자 김동성도 50년 전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윤치호)이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唱歌集’과 ‘讚美歌冊’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혼동을 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다른 인물들의 작사설과는 다른 전문가의 증언이 있다. 박은용과 주영환이다. 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은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愛國歌考’에서 윤치호가 1945년에 남긴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통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47년 발행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오류를 이미 7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좌익계 음악평론가의 이 질타는 친일파 척결이라는 첨예한 시점에서 시류에 따라 안창호가 민족지도자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주영환(朱榮煥)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는 기자협회보 3호에 서정주가 쓴 ‘청년 이승만’에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口傳을 받은 筆記”에 근거하여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한 사실, 둘은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에 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점, 셋은 윤치호 자손이 이광수에게 정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 번째는 앞의 안창호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증언을 상쇄시키는 것으로 의미가 큰 증언이다. 윤치호작사설에 특이한 두 인물의 주장도 있다. 백락준과 최남선으로, 백락준(白樂濬, 1895~1985)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관한 문교부 전임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증언은 서울신문에서 밝힌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자신이 윤치호로부터 직접 받은 ‘찬미가’를 통해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찬미가’를 6.25 때 분실했다고 하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찾는다는 기사를 낼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력을 지닌 자료였다. 최남선의 증언은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 증언이다. 윤치호 가족 측에서 1945년 작성한 ‘자필 가사지’의 ‘一九0七年 尹致昊 作’ 표기 문제, 철자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다. "<一九0七 尹致昊作>이 眞이라면 윤 씨 작이라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1907년 윤치호 작’이란 표기는 가사를 쓴 시점이 아니라 작사를 한 시점을 밝힌 것이기에 서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윤치호가 이른 시기에 어문법에 관심을 보인 인물임으로 역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자필 가사지’가 윤치호가 직접 쓴 진적(眞籍)이라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 최남선의 증언은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유지된 기조이다. 첨언한다면 최남선은 조사자료 ‘애국가의 종류’에서 ‘대한제국애국가’와 현 애국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 전문가적인 소견을 피력한 인물이다. 윤치호작사설 주장의 의미 있는 그룹은 윤치호 가족들이다. 사위 정광현, 이복 동생 윤치왕이 그들이다.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윤치호의 셋째 사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기간 두 번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한 가족 일원이다. 조사자료에는 ‘찬미가’ 재판의 존재를 제시하고, 1945년 작성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佐翁 筆跡의 애국가는 1945년 作故하기 전에 가족들의 請으로 讚美歌集에서 베낀 것이다. 謄寫할 때 綴字法도 多少 고치고 또한 ‘임금을 섬기며’의 句는 이미 改作한 것이라 하야 現 歌詞로 고쳐 썼다.” 윤치호 작사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증거력이 큰 사료인 ‘자필 가사지’의 작성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에 의해 기념으로 남긴 것이란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중 "님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이유에 대해 가족들이 바뀐 부분 대로 쓸 것을 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서 <찬미가> 제14장과 차이나는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윤치왕은 1907년 "애국가 ‘백두산이’(영국민요)를 지어 학교에서 부르고 소책자로 박어서 분배”했다고 ‘찬미가’의 존재를 증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5인에 대한 작사설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조사자료는 1955년 4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로 촉발되어 5월 13일 자료집을 발간하고 조사가 시작되어 1956년 8월 31일 최종회의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는데 활용하였다. ②작사자로 거론된 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인이며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이 있었다. ③주요 내용은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 부록, 참고문헌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각 작사설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민영환 설은 1902년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 작곡 ‘대한제국애국가’ 악보집 서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에 대한 오해로 비롯되었다. 최병헌 설은 ‘불변가’라는 시에서 남산을 본 감상을 더해 작사했다고 하나 이 원작은 확인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제기한 설일 뿐이다. 음악가 김인식의 작사설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3,4절에 자신이 지은 1, 2절을 구성해 1910년 발표한 ‘愛國歌’(KOREA)를 오해한 제자들 유포한 설에이를 철회하지 못한 본인이 주장한 설이다. 안창호 설은 이광수가 지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왔을 때 안창호가 지은 현 애국가를 보여주고 양해를 받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양해를 얻었다는 시점이 이미 윤치호가 작사하여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간한 이후여서 시점이 문제가 된다.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3개월 전이 1908년 6월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소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사의 탈맥락상과 연동이 되는 것으로 안창호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역시 대성학교 학생들과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설인 것이다. 윤치호 설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만으로도 작사 사실을 확정할만하다. 홍색 표지의 초판과 재판 역술 ‘찬미가’가 제시되었고, 1945년 작성된 ‘자필 가사지’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한영서원 제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있고, 가족들의 확신으로 자료가 제시된으로서 작사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거론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활을 하여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한 두 가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진실을 주장하기에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증거자료와 증언의 부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는 거의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6개월간의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회의는 이 자료집에서 제시한 윤치호 관련 자료와 증언의 교차검증 과정이기도 하였다.(물론 조사과정에서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치호 작’ 자료 등 확인) 이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윤치호 작사 사실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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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국립극장(극장장 박인건)은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권 2를 발간했다. 2021년 창간호 ‘초연에서 레퍼토리’에 이어 발간된 두 번째 연구총서는 ‘창극의 변화와 도약’을 주제로 관련 전문가들이 심층 연구한 결과물을 248쪽 분량으로 엮었다.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는 공연예술박물관의 소장자료를 적극 공개하는 동시에 공연예술 분야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자료의 연구를 확대하고자 격년으로 발행되고 있다. ‘창극의 변화와 도약’이라는 주제로 발간된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 권 2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예술로 거듭난 창극의 역사를 조감하고 발전의 원동력에 대해 고찰한다. 이를 위해 분야별 전문가 7인(서연호, 전성희, 김향, 박인혜, 송소라, 이진주, 최혜진)이 집필진으로 참여했다. 창극의 기원, 국립창극단의 역사, 연출 흐름, 작창과 반주, 무대 미학, 소재의 다양화, 배우의 연기 등 여러 관점에서 오늘날 창극의 특성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공연예술박물관이 소장한 포스터, 프로그램북, 대본, 공연 사진 등 자료 도판 100여 점도 함께 수록했다. 박인건 극장장은 "격년마다 발간되는 연구총서가 공연예술 연구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공연예술박물관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공유하는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11일(목)부터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홈페이지(www.ntok.go.kr)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으며,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자료실 및 주요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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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마을출판사, 고려인 이주문화사 ‘고려인인문학산책’ 개정증보판 출간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마을출판사는 최근 디아스포라 고려인의 이주 및 문화사를 자세히 기술한 ‘고려인 인문학 산책’ 개정 증보판을 출시했다.이 책은 광주정착 고려인동포의 삶과 문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고려인문화관 김병학 관장이 마을주민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문강좌 원고를 모아 책으로 낸지 1년 만에 ‘제7강 중앙아시아 초원에 피어난 한글문학’과 ‘제8강 시대적 혼란 속에서 희망의 길을 낸 고려인 언론인 선각자들’ 부분을 추가해 발행됐다. 추가된 내용은 ‘고려인 한글문학’ 과 고려인 모국어 신문 ‘고려일보’ 에 관한 것이다. 내용 중 일부가 초판에 실린 글 일부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고려인 인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줄 것으로 판단되어 증보했다.특히 2023년은 고려인 인문학의 바탕이자 원천인 ‘고려일보’ 가 창간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따라서 이번 증보판을 통해 창간호 영인본 ‘삼월일일’과 제4호 ‘선봉’, 1937년 강제이주 후 발행된 ‘레닌기치’, 1991년 1월 바뀐 지금의 ‘고려일보’ 사진자료 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김병학 관장은 "지난해 발행한 초판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판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며 "좀 더 보완된 증보판을 통해 독자들의 아쉬움이 해소되길 기대한다” 고 말했다. 한편, 김병학 관장은 재소 고려인 50여만 명이 즐겨 부르는 '고려아리랑'의 작사자다. 2005년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다수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냈고, '천산에 올라',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고려인 극작가 한진 전집', '경천아일록 읽기' 등 다수의 고려인 연구서와 편찬서도 출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현재 고려인선조들의 잊혀진 항일독립전쟁 역사와 강제 이주사, 생활사, 한글 문학 등 1만2천점을 소장하고 있는 고려인마을 산하 월곡 고려인문화관 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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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동학농민혁명 연구' 창간 발간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는 학술지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창간했다고 5일 밝혔다. 창간호에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일반논문 4편, '홍재일기로 본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특집 논문 4편, 경북 김천의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신자료 '갑오일기' 등이 실렸다. 이 학술지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역사학, 민속학, 지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의 연구 논문이 수록되며 연간 2회 발간될 예정이다. 앞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올해 4월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를 소장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연구소를 출범했다. 연구소는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발간,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식 개최, 부안·정읍·고창·군산·장흥과 공동 학술대회 개최 등을 추진하고 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은 "전문 학술지 학농민혁명 연구의 간행을 맞이하여 100주년 이래 자료 발굴·유족 확인·기념 사업을 함께 해온 연구자들의 학문 성과를 기대한다. 또한 신진학자의 정진한 연구 성과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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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Ⅳ 찬미가 ‘Patriotic Hymn’의 전승 과정현 애국가의 출현은 1908년 6월에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에 수록됨으로서 이다. 제15쪽 ‘Patriotic Hymn(Auld Lang Syne) 뎨十四’이다. 그런데 이 책이 재판(再版)임으로 초판 발행은 한영서원을 개교한 1906년 10월 전후로 본다. 그런데 윤치호가 1945년 작고 직전 자필로 남기 가사지에 ‘1907년 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이 초판에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작사 시점도 1907년부터 1908년 6월 어간이라고 보게 된다. 이렇게 출현한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또 하나의 애국가에서 대표적인 애국가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애국가 가사 4절의 면모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도 국가 안녕과 독립에 대한 기도문으로 통하여 자연스럽게 연계,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와 일정 기간 까지는 길항(拮抗) 관계로 불리다가 3.1운동기를 계기로 대표적인 애국가가 되었다. 2) 1910년 9월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 一. 동물과 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ᄂᆞ님이 보호ᄒᆞ샤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히 보전ᄒᆞ세 二. 남산우헤 뎌 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ᄅᆞᆷ이슬 불변ᄒᆞᆷ은 우리 긔샹일세 三. 가을하ᄂᆞᆯ 공활ᄒᆞᆫ데 구름업시 놉고 /발근 달은 우리 가ᄉᆞᆷ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샹과 이 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ᄅᆞᆼ하세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기관지 ‘신한민보’ 제1면에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게재된 전4절 가사다. 주목되는 것은 ‘윤티호 작가’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이는 애국가 자료를 게재한 매체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제1면에 가사 전4절과 함께 작사자를 밝힌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전승기록이다. 찬미가 제14장과 다른 점은 ‘아래 아’ 표기를 했다는 점과 4절 ‘님군을 섬기며’가 ‘민족을 모흐며’로 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14장을 텍스트로 하지 않고, 구술에 의한 것으로 보게 한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곡명이 ‘국민가’로 변이 된 점이다. 이는 ‘국민회의 회가(會歌)’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고쳤다고 보게 된다. 더불어 제4절 ‘님군을 섬기며’도 국권 상실로 임금이 없음으로 ‘민족을 모으며’로 수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3) 1912년 간도 용정촌 애국가 간도 용정촌 국자가(龍井村 局子街) 한인의 소지품을 일본총영사관이 압수, 보고한 자료에 들어있는 애국가이다. 이 창가집에는 소년보국가·운동가·한반도가·대한혼가·부모은덕가·학도가·혈성대가·영웅모범가·조국생각과 함께 애국가가 들어있다.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한 애국가는 후렴구 1절 마지막 구절이 ‘우리민족 만세’로, 마지막 구절이 ‘길이 광복하세’로 되어 있다. 후렴구 일부를 변이시킨 것은 의외이다. 4) 1914년 「태평양잡지」 애국가 이승만(1875~1965)이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창간한 월간 「태평양잡지」 1914년 4월호에 ‘애국가와 찬미가’라는 기사에 수록된 자료이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 입수되어 확인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고 밝힌 자료이다. 「찬미가」를 언급하면서 "무궁화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 애국가라고 하였다. 특히 애국가의 탄압 실상을 밝히고 있는데, "찬미가는 본국에서 압수하고 매매를 금지한 책인데 한 권을 우리가 얻었기로 대강 뽑아서 등재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차 노래를 애국제도로 모본하여서” 국내에서 찬미가를 압수하고, 애국가를 금지했음을 전했다. 이 시기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1913~1915)돼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를 기사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소유자들이 스스로 폐기, 희귀해졌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5) 1915년 간도 광성중학 교재 수록 애국가 중국 간도 소영자(小營子)의 광성중학교(光成中學校)에서 1914년 간행한 「최신창가집」을 일제가 입수하여 보고하였다. 이 책 첫 작품이 ‘國歌’라는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를 싣고 있다. 신한민보의 ‘국민가’와 유사하다. 다른 점은 제1절 ‘하나님이 보호하사’가 ‘한아님이 보우하사’로,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업시 놉고’를 ‘놉고 구름업시’로 변이시켰다. 그런데 "찬미가" 4절의 ‘님군을 섬기며’를 신한민보 ‘국민가’와 같이 ‘민족을 모으며’로 하였다. 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신한민보 ‘국민가’가 소영자에서 불린 것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소영자에서 국민가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1916년 하와이 발행된 「애국창가집」 애국가 표지에는 ‘愛國歌’로 등사되어 있고, 목차 다음에 <애국창가집 서문>이 실려 있다. 판권의 간행일자는 1916년 5월 13일로 되어 있어 1915년 국내 한영서원에서 간행된 "창가집"을 바탕으로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사 1절은 ‘하ᄂᆞ님이 보우ᄒᆞ샤’, ‘우리나라 만셰’로, 3절은 ‘구름업시 높고’로, 4절은 ‘님금을 섬기며’로 되어있다. 7)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 소재 애국가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2. 남산 우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기상일세 3. 가을하늘 空闊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김규식 중심의 조직인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속표지에 수록된 전 4절 가사이다. 각 절의 변이 상이 확인 된다. 이 가사는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계승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기록이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주필 이광수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안창호의 자문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제14장의 전승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주목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신한청년’에 게재된 애국가 가사의 변이는 2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부 자구가 바뀌었다. 1절의 ‘보호’가 ‘保祐’로, ‘우리 대한 만세’가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없이 놉고’가 ‘놉고 구름없이’로, 4절의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의 애국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변이상 중에 ‘충성을 다하야’라고 바뀐 부분은 예사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 부분을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가 수정하였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수정이 이미 191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임정시절 안창호와 가장 가까웠던 주요한이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 선생이 수정하였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미 1910년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에서 ‘충성을 다하야’로 수정되어 나온 다는 사실에서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시기와 지역이 거짓이 되는 것이고, 이 혼란의 주체가 안창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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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창호 작사 애국가, “따로 있다”안창호의 글과 구술 자료는 ‘도산안창호전집’ 도산안창호전집, 총 14권, (사)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2000에 수록되었다. 이 중에 안창호의 세 가지 필명이 확인된다. 하나는 ‘산옹(山翁)’, 둘은 ‘섬뫼’, 마지막은 ‘애국생(愛國生)’이다. ‘산옹’은 주요한이 창간한 잡지 ‘동광(東光)’ 16호에 발표된 ‘合同과 分離’라는 글로부터 14회를 이은 글에 쓴 필명이다. 구술을 이광수가 윤문하여 발표한 것인데, 일제의 눈을 피해 내용 일부를 빼며("事勢不得이 빼 먹은 곳이 많습니다. 그리 알고 보아 주십시오”)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 1926년 11월호에 ‘山翁을 그리면서’라는 글을 통해 분명히 안창호의 필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섬뫼’는 ‘島山’의 우리말 표현이다. 이 쓰임은 역시 ‘동광’ 1926년 6월호 외 세 편의 글에서 쓰인 것이다. 스스로가 썼다고 볼 수도 있고, 편집자가 발표자의 신변 보호를 하기 위해 쓴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 ‘애국생’은 두 가지 자료에서 확인 된다. 1908년 ‘태극학보(太極學報)’ 3월호(제18호) 소재 ‘讚愛國歌’의 필자로 쓴 것으로, 이것이 안창호의 필명이란 사실은 ‘신한민보 新韓民報’ 1943년 11월 5일자 ‘애국지사의 노래’에서 확인이 되었다. 이 중 살피려는 것은 ‘애국생’이란 필명으로 안창호가 발표한 ‘讚애국가’이다. 그런데 이는 의미상 이미 존재하는 어떤 애국가를 기리는 뜻으로 지은 또 하나의 애국가인 셈이다. 이 작품을 수록한 ‘태극학보’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태극학회가 1906년 10월 창간호를 발행한 잡지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기관지로 발전하여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하였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배포 지역이 넓었다.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특히 제10호에 이원익(李源益)의 ‘愛國歌’ 등을 수록하여 발행 목적을 실현하였다. 또한 안창호에 대한 활동상을 수록하고 작품을 게재하기도 했다. 바로 ‘찬애국가’가 그 하나이다. 그렇다면 안창호가 이 ‘찬애국가’를 발표하게 한 원래의 애국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윤치호의 ‘애국적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07년 초 귀국하면서 관심을 보인 것이 국가상징의 하나인 국가(애국가)였다. 그런데 이미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전파된 애국가가 있었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함께 교육사업을 하고자 하는 윤치호 작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찬하며 자신의 애국하는 노래를 지은 것이다. 찬愛國歌(찬성시 하나님 가히로 同調) 愛國生 이상의 안창호(애국생) 작사 ‘찬애국가’는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큰 작품이다. 하나는 1908년 2월 이전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등에서 부르고 있는 윤치호 작사 현 애국가의 존재를 안창호가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안창호 역시 독립신문이 주도한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에 늦게나마 참여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결과는 의외로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오인하게 한 것이 된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다.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의 원천은 1908년 3월 태극학보에 발표한 또 하나의 애국가인 ‘찬애국가’의 존재를 오인한 결과이다. 안창호 작사 애국가는 별개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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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누드 아리랑고개’를 수록한 ‘회계와 세무’ 창간호작품 ‘아리랑고개’ 여체의 곡선미를 ‘아리랑고개’로 표현했다. ‘아리랑고개’의 의미가 사진작가에게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해석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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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쇄본 애국가 가사 전승 실상현 애국가의 전승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도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대와 출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필사 자료보다는 인쇄본 자료를 통해 살필 필요가 있다. 필사본은 유일본일 경우 진정성 측면에서 가치가 있지만, 대개 사적 기록이란 점에서 필사 시점과 기록 배경이 명확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인쇄본은 단행본의 경우 판권을 통해서, 잡지나 신문은 발행 일자나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상업적 매체의 성격에 따라 게재 내용의 배경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인쇄본은 전승 년대, 즉 수직적 전승 과정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과 객관적 대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채택하게 된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인쇄본 애국가 가사 자료는 대략 다섯 종 정도로 볼 수 있다. 첫 문헌 기록은 연활자본 1908년 재판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이다. 이 문헌은 현재까지 역술자(번역과 작사자)와 인쇄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진 최초(最初)의, 최고(最古)의 문헌 소재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수록(인쇄) 시점, 작사자 기록 여부, 곡명의 차이, 표기법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이 판본은 1908년이란 시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윤치호가 직접 ‘자필 가사지’를 통해 밝힌 ‘1907년 작사’ 후 재판 ‘찬미가’에 수록한 것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현대철자법으로 표기하였다. 舊철자법(국어정서법)이 아닌, 1937년 이후 쓰게 된 오늘날의 철자법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사자 윤치호의 선각자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필 ‘가사지’와 함께 이미 철자법을 30여 년 앞서 ‘아래 아’같은 구(舊)철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이 표기 문제는 1955년 애국가작사자 조사 때는 물론 최근까지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윤치호는 ‘독립신문’ 편집에서부터 ‘찬미가’ 발행 때까지 언문일치를 실현하여 ‘아래 아’ 같은 표기를 철폐하여고 띄어쓰기를 계몽하였다. 1907년 학부에서 7월 8일 개설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에서 ‘ㅣ’와 ‘ㅡ’의 합음으로 ‘ㅏ’(阿)음과 같음으로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사촌 동생 윤치오(尹致旿)이다. 이 기관은 주시경과 지석영 등을 위원으로 구성하여 약 3년 동안 한국어 정서법 통일을 토의한 곳이다. 이 연구소 설립과 연구는 당연히 윤치호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 윤치호의 한글 사용과 그 표기에 대한 앞선 실천의지는 외무아문 참의로서 통역업무를 맡았던 시절의 한 회고에서 확인이 된다. 즉, 영문을 번역하거나 통역하는데 난삽한 한문을 쓰는 것보다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함을 안 것이다. "언문을 보급시킬 생각만은 간절하여 나라의 형편을 공사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또한 언문을 보급하여야 조선 사람이 속히 깨이겠다는 뜻을 누차 진언하였다.” 당시 미국공사도 긍정하여 외무독판 김홍집에게 외교문서에 언문을 사용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조선 언문을 못 배웠소.”라고 강하게 거부하여 실천하지 못했다는 회고이다. 분명한 한글 사용론자의 면모이다. 이런 위치였음으로 1907년 한영서원과 뒤 이어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언문(諺文)이라는 일부 계층어를 일반 국민어(생활어)로 전환시켰고, 말하기와 쓰기의 일치, 즉 언문일치를 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작사자 표기 여부이다. 이 ‘찬미가’ 재판 판권에서 "譯述者 尹致昊”로 나온다. 이 기록은 일부의 주장처럼 ‘번역자’로, ‘편집자’로, ‘감수자’로 해석을 하든 윤치호가 첫 인쇄 기록자란 위치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후의 문건과 증언 등에서 "작사자 윤치호”로 말하고 기록하고 있다면, ‘역술자’에 대한 번역은 ‘譯’과 ‘述’, 즉 "일부의 번역과 일부의 지음”의 합성어로 보아야 제14장을 비롯한 2편은 작사로 보는 것이 옳다. 만일 살핀 세 가지 의미로 쓴 용어라면 각각의 용어가 더 간명하고 정확한 표기인데, 왜 실용주의자이며 한글 사용론자이기도 하고, 이런 용어를 쓰는 다른 나라를 유학한 인물이 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함부로 썼겠는가. 2.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이 자료는 1910년 9월 21일 자 미주지역 교민신문 신한민보 소재 ‘국민가’(윤티호작) 신문 활자본 4절 가사이다. 기사 내용의 전후 맥락으로 작사 후 3년 ‘찬미가’ 발행 2년 후라는 시점은 분명하다. 노래로든, 출판물에 의해서든 유포, 확산의 맥락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애국가’나 ‘찬미가 제14장’이 아닌 ‘국민가’로 표기되었다. 당시 미주지역 교민단체이며 안창호가 선도하던 ‘국민회’의 단체가로 개명한 듯하다. 안창호이든 신문 편집자이든, 아니면 국민회 간부이든 간에 이 4절 가사를 인식하고 ‘국민회가’(國民會歌)로 개제(改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시기 ‘찬미가’를 텍스트로 했다면 이런 곡명으로의 전환은 가능한 것이다.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2절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기상일세 3절 가을하날 공활한데 구름 업시 높고 말근달은 우리 가삼 일편단심일세 4절 이긔상과 이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우나 즐거오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찬미가’와는 다르게 구(舊)표기법인 ‘아래 아’자를 썼다. 그리고 4절에서 ‘님군을 섬기며’(현 ‘충성을 다하여’)가 ‘민족을 모으고’로 개작되었다. 그러나 4절에서 ‘기상’을 ‘긔상’으로 1908년 ‘찬미가’와 같게 쓰고 있어 근본적으로 ‘찬미가’가 텍스트였음을 추정하게 된다. 이는 ‘찬미가’가 국내외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작사자를 ‘윤티호’로 명기했다.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다. 왜 안창호가 주도하는 ‘국민회가’의 작사자로, 안창호가 모를 리 없는 신한민보가 이 4절 가사를 윤치호라고 했겠는가? 당시 미주지역에서는 안창호의 명성이 윤치호 못지않았다. 이는 윤치호가 명백한, 아니 굳이 이를 따질 필요가 없는 기독교적 애국가의 작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이 노래의 보급을 위해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3.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월간 잡지 ’신한청년‘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발행한 잡지이다. 1919년 11월 27자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1면에 신한청년당에서 월간 잡지 ‘신한청년’ 창간호를 12월 1일 자로 발행한다는 광고를 하기도 했다. 이는 임시정부와 그리고 독립신문과 같은 체제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집필과 편집은 이광수가 맡았다. 발행 주체인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단원들을 주축으로 조직한 한국 독립운동 단체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으로 꼽힌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당원으로는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안창호였으며,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1923년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해체되었다. 바로 이 당에서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제1면에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 4절이 수록되었다.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1.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람 大韓으로 기리 保全하세(후렴) 2. 南山우에 져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氣象일세 3. 가을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업시 밝은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4. 이氣象과 이맘으로 忠誠을 다하야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특징적인 것은 가사에 한자를 썼다는 점이다. 이는 문사인 이광수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부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해를 위한 방식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4절 "님군을섬기며”가 오늘날과 같은 "忠誠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 확인된다. 이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안창호가 개작했다고 하는 부분이라 주목이 된다. 이 부분의 개작은 1919년 12월 이전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광수는 상해에 오기 전 일본 체류 시 조선유학생 총회에서 "새로운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부르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상해에 와서는 3.1 독립운동사 등을 집필하면서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했다면 이 창간호에 "작사자 안창호”라고 표기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이 기록에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보게 된다. 앞서서 살핀 임시의정원 회의 기록이나 김구 제 ‘대한애국가’ 악보에 반영된 입장이 이미 이 시점에 공유된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즉, 작사자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윤치호 작사 사실을 알고 부정적인 의사를 표하는 이들에게는 안창호 작사설을 내비치거나, 또는 아예 무응답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5. 안익태 작곡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2절 가사 세 번째 자료는 1935년 11월 안익태 작곡의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가사이다.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EA KOOK KA) 악보는 국한문과 영문으로 1935년에 발행되었다. 표지 1장과 악보 2장으로 합창 및 피아노 반주부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했다. 신한민보가 주 판매처였다. 가격은 1부당 20센트이다. 1면에는 애국가 1절과 2절이, 2면 악보에는 후렴 가사가 인쇄되어 있다. 이 악보가 1940년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사용 허가를 신청할 때 동봉한 것이기도 하다.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샤 우리 나라만세 2. 남산 위에 뎌 소나무 ㅅ덜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샹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보젼하세(후렴) 이상과 같이 2절 만을 기록하고 있어 가사를 대비하는 자료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다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악보 소재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 가사에는 ‘하샤’, ‘뎌’, ‘ㅅ덜갑’ 같은 구철자를 사용하였다. 이는 앞에서 살핀 ‘국민가’ 보다 늦은 시점임에도 구철자를 썼다는 점에서 ‘찬미가’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구술을 옮긴 것이거나 구철자로 표기한 가사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악보에는 "안익태 작곡, 김준성 목사(John Starr Kim) 영역”이 표기돼 있다. 작사자는 밝히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출판물에 작곡가와 함께 작사자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애국가와 안익태’의 저자 김경래의 기록처럼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황사성 목사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면 악보의 완벽성을 위해서나 가치를 위해서나 이를 표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명색이 태극기와 애국가와 독립선언서로 3.1운동 시위에 참가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한 음악도로서, 더욱이 윤치호로부터 유학비 일부를 도움 받은 자로서 자신이 작곡한 가사의 작사자를 모르고 작곡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안익태는 작사자를 모르지는 않았다고 보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정말 몰랐다면 ‘미상(未詳/Unknown)’이라고 표기하여 악보의 완벽성을 갖췄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악보 발행 후원체인 미주 한인단체와 신한민보 측의 의사를 반영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자라면 이미 작고한 이후임으로 일제의 탄압을 염려한 조치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윤치호라면 임시정부의 입장처럼 밝히지 않는 편이 보급이나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애국가 가사 4절 이 악보는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ANTHEM)’이다. A調 4/4 Andante, 오선보와 숫자보를 병기한 악보는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악보에 부기되었다. 중국 충칭(중경)에서 발행된 김구의 장서인과 친필로 표제를 쓴 표지 왼쪽에 ‘金九 題(김구 제)’와 ‘金九之印(김구지인)’이라는 인장과 김구 친필로 ‘一九四五 十月十八日’(1945년 10월18일)이 쓰여 있다. 뒷면 중앙에는 중사장(中山裝)의 김구 사진이 있고, 사진 아래쪽에서는 ‘한국애국가 고사(故事)’와 작곡자 그리고 번역자(중역/민석린, 영역/정한범)를 소개하였다. 악보집은 충칭의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에서 이사소(李士釗)가 편집, 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역사성과 변천 과정을 담고 있는 ’한국애국가‘에 법적 위상을 부여한 문건이다. 또한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발행한 마지막 출판물이며, 동시에 임시정부 주석 명의로 출판된 첫 공식 악보이다. 김구 제 ‘한국애국가’ 소재 4절 가사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에 저솔나무 철갑을 두른 뜻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정성을다하야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이 애국가는 ①50년 전에 한 ②한국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③일명(佚名)해 버렸다. 처음에 서양 명곡을 채용하여 가사를 메워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 한국의 인사들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전에 ④한국 청년음악가가 새로운 곡조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곧 한국 건국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1945년 50년 전의 상황으로 말했다. 이를 풀이하면 50년 전으로서 ①1895년이다. 이 때 작사된 애국가의 작사자를 1919년 임시정부 수립초기 또는 악보를 발행하는 해방직전인 1945년 시점에서 ‘佚名’했다고 했다. ④작곡 시점을 10년 전이라고 했으니 1935년이 된다. 이 안익태 작곡 시점은 이 시기 우리로서는 알 수 없었던 시점이다.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81년 미주 교민 양주은이 ‘신한민보’ 40년 발행분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②의 "50년 전”이란 표현은 정부와 독립협회의 공동 행사인 1897년 ‘조선개국 기원 505회’ 기념식에서 윤치호가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가를 발표한 시점과 1년 차이이다. 그리고 ‘수기’란 공식 문서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작사’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윤치호가 독립협회 또는 서재필의 요청으로 행사를 위해 준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시기 윤치호는 분명 ‘한 한국애국지사’였음으로 일치하는 표현이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며 외부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발간에 적극 참여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③의 ‘일명’이란 표현은 주의가 요구된다. 윤치호는 1915년 2월 13일 ‘105인 사건’으로 영어(囹圄)의 몸에서 특사로 출감하며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제에의 협조 의사를 내비쳤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을 실망시킨 시점에다 이후 4년 후인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면서 윤치호의 망명(亡命) 내지는 동참(同參)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응하지 않아 크게 원망을 하게 된 시기이다. 정리하면 "김구의 이 기록은 윤치호 작사 동일 후렴 ‘무궁화가’또는 ‘찬미가 제10장’ 작사 사실을 애국가의 시원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여 단지 작사자를 ‘일명’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상에서 190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인쇄 자료에서 곡명, 작사자 표기 여부, 가사의 변이를 살폈다. 그 결과 주목하는 작사자 표기 여부에 대해서는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났음이 확인되었다. 하나는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의 경우 윤치호를 ‘역술자’로, 둘은 1919년 신한민보 ‘국민가’ 기록으로 윤치호 작사로 명확히 밝혔다. 셋은 작사자를 ‘미상’ 등으로도 표기하지 않고 아예 밝히지 않은 경우이다.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와 1935년 안익태 악보의 경우이다. 마지막은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대한국애국가’의 ‘일명(佚名)’ 표기이다. 그런데 ‘찬미가’의 ‘역술자’ 중 ‘술’은 윤치호의 작사를 반영한 것이고, ‘국민가’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표기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적어도 안창호 작사는 아니다”를 명확히 한 것으로,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역설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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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문화재단 문화예술 잡지 '와나(WANA)' 창간 1주년삼성문화재단(이사장 김황식)이 발행하는 문화예술 매거진 '와나(WANA)'가 창간 1주년을 맞았다. ‘크리에이터들이 만든 크리에이터들의 이야기’를 지향하며 창간호 '공예 와 나', 2호 '몸 와 나', 3호 '글 와 나'를 발간했다. 지난달 28일 발간한 제4호 '밥 와 나'에서는 ‘밥’을 테마로 ‘우리 삶 속의 밥’ 으로 상을 차려 대접한다. 객원 편집장은 셰프이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약 중인 노영희가 맡았다.'밥 와 나'는 ‘밥’과 관련된 몇가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밥이 맛있다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꼭 쌀을 먹어야 밥일까? 요즘처럼 편리한 시대에 직접 지어 먹는 밥이 의미가 있을까? '와나'는 밥을 대하는 다양한 질문과 입장을 잡지에 담았다. '와나(WANA)'는 매 호 예술 분야의 한가지 주제를 선정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조명하는 ‘원 테마 (One-Theme) 매거진’이다. 매 호 새로운 주제로 신선한 시각과 영감을 주는 아티스트를 소개하며, 편집 디자인, 표지 아트워크 및 사진, 영상, 표지 AR에 이르기까지 요즘 주목받는 크리에이터들이 매번 새롭게 제작에 참여한다.연 3회, 호당 5000부를 발행하며, 전국의 도서관, 독립서점, 복합 문화공간 등에 비치하고 개인독자는 삼성문화재단 홈페이지(samsungculture.org) 에서 신청하면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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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 ‘어린이 나라’ 특별전5일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들의 인권 보호와 꿈을 응원하기 위해 만든 ‘어린이날’이다. 도심 속 국립 박물관과 공연장에서 진행되는 어린이날 주요 행사를 소개한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잡지 '어린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어린이 나라’를 오는 8월 20일까지 진행한다.'어린이'는 일제강점기 시절이던 1923년 어린이들의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며 만든 한글잡지다. 이번 전시에서는 1923년부터 1935년까지 발간된 122권 중 현재 전해지는 120권의 '어린이'를 통해 어린이 개념 정착, 어린이 문화 형성 과정, 미래를 이끌 어린이의 모습을 제시한다.나라를 빼앗긴 시기 '어린이'는 어린이들에게 지식을 보급하고 인성을 함양해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어린이』를 만들기까지 밤낮없이 일하던 편집실의 모습과 참여했던 사람들의 노력, 잡지의 제작 과정들이 펼쳐진다. 『어린이』 창간호부터 납활자를 이용했던 ‘활판 인쇄기’ 등 접하기 힘든 유물들이 감동을 전한다.부록으로 증정됐던 말판 놀이법을 소개하는 공간도 흥미롭다. 어린이 대운동회, 세계일주 등 말판놀이 체험공간에서 직접 참여해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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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시노부 준뻬이 ‘아라란アララン’삼목 作 1984년 들어 삼목은 한국잡지협회 협회보 기자로 요란스럽게 살 때다. 언론 분야와 국학분야 학술세미나 참가, 전국 헌 책방 순례와 아리랑 기행, 매달 20일 전후에는 협회보 편집, 출간을 위해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날밤을 새우기 일수였다. 헌 책방 순례 목적은 잡지 창간호와 발행인과 편집인 관련 자료, 그리고 아리랑 자료 수집을 위해서다. 이때 일간지에 발굴 자료를 공개하고 협회보에 ‘한국잡지인 열전’을 연재하기도 했다. 2월 초, 동경한국연구원東京韓國硏究院에서 전화를 받았다. 최서면 원장의 배려로 일본 진보초 고서점에 삼목이 찾는 책이 입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지난 연말 최서면 원장과의 통화에서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헐버트가 쓴 아리랑에 관한 논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후 3개월만에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일본 중년 여성의 정중한 톤의 서툰 우리말이 수화기로 넘어왔다. "최원장님께서 전하랍니다. 진보초 키타자와 서점에서 연락이 왔는데, 연갑선생이 최원장님께 구입을 부탁한 코리아 레포지토리 1896년과 97년 2년분이 입수되었다고 합니다. 직접 구입를 하신다면 연락처를 드리겠고, 아니면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대행해 드리겠습니다. 가격은 2년치 합본임으로 고가입니다.” 너무나 기뻤다.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는 않고 바로 연락을 하겠다고만 했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지난 해 말 최원장과의 통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1896년 헐버트씨가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아리랑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구입 기회를 놓쳐서 연구원이 갖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자세히는 기억이 없네만. 분명한 것은 아리랑 악보하고 가사 둬 페이지가 있었네. 구입하겠다면 내가 아는 서점에 주문을 해놓겠네. 1896년 2월호 아니면 3월호일 걸세” 그동안 최 원장이 방송과 신문에 발표한 발굴 자료를 보면 주로 독도 영유권 문제, 안중근 의사 기록과 유묵 존제, 독립운동 관련 사료이지만,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수 자료를 일본은 물론 미국 등에서 구입 한 장서가 2만여 권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이 허튼 소식을 전할 리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 획기적인 아리랑 문헌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부터 이 번 전화를 받기 까지 삼목은 틈만 나며 이런 생각으로 혼자 미소를 띠기 일 수였다. "악보가 있다? 분명 아리랑 악보가 포함된 최고最古의 문헌기록이다. 악보를 재현한다면 획기적이다. 구입하면 어디에 발표할까? 조선일보? KBS?” 이런 기분에서 삼목은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대해 기독교 자료에 밝은 청계천 경안서점 김시한 장로와 나까마 김연창 선생과 단국대 공연자료연구소 김종욱선생 등에게 방訪을 냈다. 나오면 무조건 고가로 사겠다. 그리고 한 턱 내겠다고. 이런 들뜬 기분에 책값이 얼마인지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특별해도 잡지 한 권 값 정도야 못 감당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번 전화에서 한 권이 아니라 2년치 24개월 합본이며, 가격이 1년 원급이었다. 전화를 받고 3일간을 고민했다. 결국 구입을 포기해야 했다. 너무 큰 가격 때문이었다. 국내 서점이라면 해당 호수만 사자고 조르거나 외상을 하거나, 계약금을 내고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하겠지만, 일본의 서점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경 최 원장 비서실에 솔직하게 전달했다.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커 구입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삼목은 아쉬움 속에서 ‘코리아 레포지토리’를 놓지 않았다. 그래서 국립도서관은 물론 대학도서관 장서목록과 장서가로 널리 알려진 중대 김근수 교수와 공주대 하동호 교수의 목록 까지 확인하였다. 그러던 여름 장마통에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을 들렸다. 몇 번 인터뷰로 뵌 바 있는 이겸로 선생께 최원장과 통화한 이야기를 전하며 그렇게 비싼 것인 줄 몰랐다는 푸념을 했다. 그러자 선생은 자신이 10여년전 취급한 바가 있는데 어디로 납품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고 한 뒤 빨간 색 하드커버의 책 한 권을 빼 주었다. 참고할 만 하다며 건네주었다. ‘외국어 표기 간행물 목록’이란 책이다. 퇴근 후 펼쳐 본 이 책에는 ‘KOREA REPOSITORY’의 존재는 물론 총 목차 1896년 2월호에 ‘KOREAN VOCAL MUSIC’이란 아티클이 있음을 확인했다. 최 원장이 2월호 아니면 3월호라고 했으니, 이 글에 아리랑이 언급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든 것이다. 그리고 큰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은 1800년대 외국인이 쓴 한국관련 기사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과 아리랑 같은 노래를 언급한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기록 보다는 외국인의 기록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후 삼목은 헐버트는 물론 알렌, 비숖, 같은 선교사들의 자료와 1800년대 말 한국에 왔던 일본 지식인들의 자료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첫 수확도 거두었다. 단국대 김원모교 수실에서 확인한 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1871~1962)가 동경당서점에서 1901년 발행한 ‘한반도韓半島’를 보게 되었다. 국제법 전공자로 1876년 한국에 와 인천이사청仁川理事廳 이사관으로 근무한 시절을 회고한 책으로, 여기에서 "한성사범학교 교사 헐버트씨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진 아리랑 악보~”라고 언급한 사실을 찾아냈다. 일부 원문을 인용하고 번역을 하면 이렇다. 아리랑의 음조音調가 ‘망국적亡國的’이라고 하여 비관적으로 이해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곧 한국관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若し夫れ夜半月を踐んで南山の麓, 倭將臺の 邊を逍遙するあらんか, 無邪氣なる少年か意味なく謠ふ 「アララン」の哀歌は, 東西相聞ゆる擊杵の音と相和し, 歷史の興廢と人事の悲哀とを語るものに似て無量の感慨を生せしむ, 詞藻を解せさる予まで之れを聞ひて一句湧くを止むる能はさるなり. 繫絃已歇仙風生.殘雲搖曳木覔城.天暗夜深人將睡.何處沈沈砧杵聲.韓家婦女何黽勉.獨伴孤燈坐三更.君不聞悠悠掠耳阿蘭曲.悲調自具無限情. 혹시라도 한밤중에 달빛을 밟으며 남산 기슭 왜장대 주변을 산책하는 일이 있다면 그 곳에서 순진무구한 소년들이 따라 부르는 아리랑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와 잘 어우러져, 역사의 흥폐(興廢)와 세상살이의 비애를 이야기하는 듯하여 무망함을 느끼게 된다. 문학적인 시문(사조詞藻)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 못하지만, 이것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시 한 수 쓰는 것을 자제하기는 어렵다. 거문고 타는 소리 이미 그쳤고 시원한 바람 부네하늘에 떠있는 조각구름 목멱성 남산 위를 오가네날 저물고 밤 깊어져 사람들 잠자리에 들 시각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한국의 부녀자들은 그 얼마나 부지런한가?홀로 외로운 등불 앞에 삼경이 되네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멀리서 들려오는 아리랑을구슬픈 곡조 속에 저절로 무한한 정 담겨있네” 아리랑관觀도 일본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를 확인한 것은 큰 소득이다. 곁들어 ‘아라란(アララン)’ 또는 ‘아란곡阿蘭曲’이란 표기 확인도 큰 소득이었다. 일본인의 기록 키워드를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1984년 여름으로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삼목은 외국인의 아리랑 기록을 찾는 일로 뜨겁게 살았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한국잡지협회를 나와 ‘한국출판정보센타’라는 기획사를 꾸려 본격적인 사료 수집과 컨텐츠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덕에 1901년 시노부 준뻬이의 ‘한반도’ 기록에 이어 1908년 N. 알렌의 'Things Koreans' 소재 아리랑 기록 등을 찾아냈다. 이는 삼목의 아리랑 인식을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다음 세 가지를 인식한 것이다. 하나, 아리 또는 아라리와 다르게 아리랑은 민요가 아니고 민중의 노래이다. 둘, 그 기점은 1800년대 중반이다. 셋,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와 다르게 문헌으로 전승하고 확산되었다. 이런 인식을 확신으로 갖게 된 것은 삼목이 문헌 소재 아리랑을 집요하게 매달린 이유이다. 그 첫 결과는 구본희 부국장(2014년 작고)의 권유로 8월 26일자 스포츠조선에 "아리랑 樂譜 最古가 바뀐다”란 제하의 기사를 내게 되었다. "1901년 발간 한반도에 수록 발견 정설로 알려진 총독부자료보다 10년 앞서 ‘아리랑’으로 표기, 4분의 4박자로” *추록-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의 ‘한반도韓半島’는 1990년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삼목이 원본을 구입한 것은 1997년 2월 일본 신보초 한 고서점에서 구입했다. 시노부 준뻬이는 경제학을 전공한 자로 한말韓末 우리나라에서 일본 총영사總領事로 3년 간 근무했다. 서양인들의 저술보다 구체적이다. 발문(跋文)을 쓴 유명인사가 6명이나 된다. 이 책이 국내에서도 읽혔음은 1909년 10월호 ‘대한흥학회보’ 제6호 ‘지역상소역地歷上小譯’(MH生)에서 인용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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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1/694쪽’의 아리랑(상)삼목 作 1984년 초, 삼목은 경기도의 한 사립중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86아시안 게임 개최가 발표되면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담론 속에서 아리랑, 김치, 태권도, 호랑이 같은 민족 상징에 대한 의미화 논의가 문화계 전반에 화두가 되어 있을 때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목도 열열하게 아리랑 자료 수집과 자라매김에 매진하고 있었다. 삼목이 새 학기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 출석부를 위치시키고 돌아설 즈음, 교무주임이 전화 받으러는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아 김씨, 나 장승백이 김이요. 오늘 서울에 오나요? 아리랑 자료가 나왔어요. 어, 비싸서 권하기는 좀 뭐 한데, 이게 만주국에서 나온 귀한 책이에요. 오늘을 넘기면 돌려주어야 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 거요. 가격은~” 삼목은 어차피 토요일이라 서울 집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부리나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대지극장 앞에서 내려 다시 노량진행 버스를 타고 진오서적(당시 고가의 문학서적 위주로 판매하던 고서점) 근처 다방에서 여차저차한 사정을 들어 월급 날 값기로 하고 양도를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여러 번 망설이고, 많은 생각 끝에 한달 원급에 반을 더한 가격으로 샀다. 문헌 소재 ‘아리랑’은 거의 부속적으로 존재한다. 표제標題가 ‘아리랑’인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제가 다른 컨텐츠 속의 하나로 끼어있거나 일부로 언급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끼어있는 경우는 잡지 속에 수필이나 시나 단편 소설 한편이 들어있는 경우이고, 일부로 언급 되는 경우는 어떤 이의 수필 속에, 회고기 속에 에피소드로, 또 아니면 ’아리랑을 불렀다‘ 정도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입수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전체 값을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억울한 여건을 감수하고 값을 치르는 것이다. 삼목이 구입한 책 중에 거의가 이런 경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값을 치루고 산 것이 바로 ‘장승백이 김선생’(고서 중개인 중에는 매우 신사다운 분으로 일본어 번역에 능통한 분, 1990년대 말 작고)에게서 구입한 ‘半島史話와 樂土滿洲’이다. 1943(강덕10)년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만선학해사滿鮮學海社가 발행한 책이다. 이 출판사는 당시 만주국의 지원으로 발행 되던 ‘만선일보’ 필진들과 만주국 조선인 문인들이 정주하던 곳이다. 시기상으로 한반도에서나 만주에서 낸 책으로는 순 한글로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사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목차 첫머리는 대일본제국총리대신 장경혜, 중화민국정부주석 왕정위, 前조선총독 남차,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 사회 지도자 윤치호의 서문을 필두로 한 148항목의 방대한 책이다. 내용에서는 오세창의 기념 휘호를 비롯하여 역사학자 이병도, 만주건국대교수 최남선, 법학자 유진오, 작가 이광수, 민속학자 고유섭, 시인 이은상, 음악학자 함화진, 기자 차상찬, 신학자 채필근, 시인 윤해영 등의 그과 작품을 수록한 총 694면, 오늘날의 A3 싸이즈 대형 판형 책이다. 이런 책에 ‘아리랑’이 들어있었다. 속된 말로 148항목 중 1편의 시속에, 694면 중 단 한 면에, 끝에서 두 번째 쪽에서, 그것도 딸랑 ‘14줄 중에 아-리-랑’ 3자가 들어있을 뿐이다. 시 ‘樂土滿洲’, 윤해영尹海榮 작품이다. 낙토만주樂土滿洲 一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 광이 두르자 三끝없는 地平線에 五穀金波 굽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先驅者 한 千年 歲月後에 榮華萬歲 빛나리 제3절 2행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에서 ‘아리랑’이 나온다. "이렇게 작품의 표제에서도 아니고 시행의 한 어휘로 나온다. 이것도 아리랑 자료로 취급할 수 있나? 또 가치가 있나? 윤해영은 어떤 사람인가?” 삼목이 이 책을 살 때 수 없이 머리 속으로 되물었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목은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미군정청 발간 독도 자료 수록 잡지 창간호와 사운 이종학 선생과 맞바꾼 ‘解放歌謠’라는 노래책 속 윤해영 작사 ‘滿洲 아리랑’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윤해영이 ‘아리랑’을 일회적인 시어로만 인식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인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1947년 발간된 ‘해방가요’의 ‘滿洲 아리랑’은 이렇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一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二 말발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三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윤해영 시, 김기진 작곡, 백년설(1915~1980) 노래로 태평레코드사에서 1941년 12월에 음반으로 나왔다. ‘나그네 설음’과 ‘번지없는 주막’으로 명성을 날린 백년설의 유명세로 보면 만주와 한반도에서 ‘아리랑 만주’도 널리 불렸음이 짐작된다. 그런데 두 편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만주 봉천’, 삼목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두 분 있었다. 어린 시절 설 명절이 되면 두 분이 사촌들과 함께 설을 지내러 서울에서 왔다. 3일 정도 들은 이야기들이지만 화로를 감싸고 듣던 대부분은 만주 봉천에서 살다 해방이 되어 평안도 남시(사촌 형 중에 ‘봉천’과 ‘남시’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데, 그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란다.)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 온 이야기다. 삼목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4촌 누이는 눈물을 훌쩍이며 듣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삼목이 또랑한 기억으로 담고 있는 것은 "왜놈들에게 속아서 만주로 간 거지”라든가 "그때 만주 신경은 지금 서울보다 더 좋고말고”라든가, "만주가 망하지 않았다면 일본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됐을거고, 설 쇠러 그 곳으로 왔을 것인데~ ”이다. ‘낙토만주’와 ‘만주 아리랑’, 두 작품의 여운이 묘했다. ‘속았다’와 ‘좋았다’로 읽혀지며 아리랑의 정서를 흔들었다. 이상한 이런 감정은 왜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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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작가의 필명변(筆名辯)‘如是我聞 知見不生分 嘎音哦哩’ 굳이 해석하자면 "나는 그렇게 들어 알기에 알음알이로 아는 체 하지 않는다.”란 말이다. 삼목三目의 책상 앞 벽에 붙어있는 글귀다. "선인으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알되 어설프게 아는 척은 하지 마라”는 경구다. 잘 알려진 불경 첫머리말에 우리식 한자를 합성한 약간은 억지스런 문장이지만 삼목은 소중하게 30여 년을 지니고 다닌다. 빛이 바래 흐릿한 만년필 글씨는 삼목의 스승이기도 한 중하中夏 최서면崔書勉 선생(1928~2020/향년 92세)이 써준 것이다. 당연히 낙관이나 서명이 없는 메모 쪽지 수준이지만, (재)국제한국연구원 원장 시절 기획실장으로, 초대 전국아리랑보존연합회 이사장 시 사무국장으로서 일할 때인 1989년 받은 것이다. 초겨울 어느 날 저녁, 방배동 해무海霧라는 고급 카페에서 몇몇 분들과 만찬 후 갖게 된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기 끝에 선생의 ‘서면’이란 이름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삼목은 그야말로 말석에서 의미 있게 듣는 처지였다. 자리에는 원로 교수, 영화감독, 기업가, 이렇게 세 분과 함께 선생의 본명이 호가 되고, 호가 이름이 된 사연을 듣게 된 것이다. "내 본명은 원래 중하야, 최규하 사촌형님과 같이 우리는 하夏자 돌림이거든. 지금 내 이름 서면을 쓰게 된 사연이 있지. 1947년이지. 동아일보 사장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을 때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도움으로 미군정에 재심을 청구하여 2년 뒤인 49년 10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이 됐었거든. 그때 이시영 선생이 지어준 것이 ‘서면’이야. 이때부터 내 초명 중하는 지금 호로 쓰게 되었지. 이시영 선생이 출감하면 정치하지 말고 책 보며 근면하게 살라며 지어 준 것이지. 이게 좋아서 본래 이름은 호로 쓰고 호로 지어준 것을 이름으로 쓰게 되었지.” 삼목이 자신의 상전 이름에 관한 사연이니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에 특유의 줄담배를 피며 얼음 소리가 나는 그라스를 흔들며 삼목을 지목하였다. "자네는 호가 뭔가? 있나?” 자신의 얘기에 눈을 떼지 않고 주목하는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해선지, 어린 나이니 호가 있겠나 싶어서 한 질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삼목은 좀 들뜬 어투로 즉각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30대 중반에 60대 원로들의 말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발언권을 얻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예, 저요? 쓰진 않지만 있긴 합니다. 석 삼, 눈 목자, 삼목三目입니다. 눈이 세 개니.... 뭘 잘 찾아낸다는 뜻입니다.” "눈이 셋이라고? 그래? 어 그러고 보니 자네 양미간에 점이 하나 있으니 그렇네.” 이 말에 좌중의 시선이 삼목의 이마를 향했다. 국제법학계 원로 배재식 교수가 거들었다. "그거 쓸만하네. 그래서 자료 찾는 일 하려고 최 원장에게 온 거야?" "아닙니다. 그냥 주신 분의 설명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 "야 이 사람아. 지금 들었잖나. 책 읽는 데 근면하라는 뜻대로 최 원장은 온 세상 책을 다 읽고 있잖아. 자네도 호대로 귀한 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 아냐? 좋은 호야. 그래 지어 준 분이 뉘신가?” "예, 저를 도와주신 분인데, 유명한 분이 아니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삼목은 구체적으로 밝히지를 않았다. 아니 밝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앞에 있는 중하 선생과 사이가 아주 나쁜 사운 이종학史芸 李鐘學선생(1927~2002/향년 75세)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분 사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도 자료 진위와 해석 차이로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이다. 어느 정도 알려진 얘기지만, ‘시마네현 고시 공고’ 문제로 대립하는 서울대 사학과 신용하교수, 이순신 장군 유묵(‘寒山島’. 이 유묵에는 ‘閑’이 아님) 진위 판정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지곡서당 좌장 임창순 선생과 같은 관계다.(이 두 분과의 갈등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화에서 밝힐 예정이다.) 사운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대로라면 서면 선생의 일본 국제한국연구원을 방문하여 독도자료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시대 문집 소재 독도 기록 자료를 양도할 수 있느냐”고 청하자 사운선생 소장 자료하고 교환을 하자는 조건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몇 개월 후 한국에 온 서면선생이 수원 이종학 선생 자택으로 방문, 자료를 살피게 되었다는데, 서면 선생이 이종학 선생의 고지도 한 점과 교환을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지도는 가격이 매우 크게 나가는 것이라 사운선생이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중하 선생이 약속을 위반한 것이라고 화를 내고 헤어진 후 사이가 영영 멀어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후 사운선생은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중하선생이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북한 김일성에 관한 정보를 전하는 편지를 구하게 되어 "최서면은 중앙정보부 정보원”이라는 말을 하게 되고, 이것이 중하 선생에게 들어가게 되면서 사이가 아주 나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어서 '삼목'이란 호를 사운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말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내친김에 이 호를 받게 된 전말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구구한 것을 빼고 정리하면 이렇다. 1995년 초, 삼성문화재단과 사운 선생이 울릉도 ‘독도박물관’ 기공식을 위해 울릉도에 체류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날씨가 쾌청한 날에 군 관계자와 성인봉 정상에서 독도를 목측目測하고자 오른 적이 있다. 다행히 눈이 온 후 맑은 날씨이어서 전해 오는 바대로 한 점點으로 독도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운 선생만 보인다고 하여 설왕설래하다가 두 사람이 한 점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매우 만족한 마음으로 선생의 이장설이 있었다. "독도는 일본은 어디에서 보든 목측이 불가하지.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구. 이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독도를 국토로 인식했다는 말이지.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 얼마나 극적인 순간인지 알겠지!” 두 사람은 방금 전 독도를 목측하였다는 사실이 매우 큰 의미가 있다는 선생의 설명에 강하게 긍정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다 이 말끝에 어떤 역술가가 지어준 호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남들과 다른 눈썰미가 있다는 것은 사주팔자에도 있나 봐. 1970년대 말 얘긴데, 모 교수와 강릉에서 귀중한 문헌이 발굴되었다는 신문을 보고 그걸 보려고 갔다가 허탕을 치고 오던 중에 그 교수가 잘 아는 역술가를 방문하게 되었지. 종로 3가 단성사 뒷골목이었는데, 그 양반이 내 사주도 묻지 않고 바로 하는 말이 나보고 남들이 몰라보는 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야. 보통 사람들 보다 눈이 하나 더 있다나? 그러더니 석 삼자 눈 목, ‘삼목’을 호로 쓰면 좋겠다며 써주더라구. 지금 내가 쓰는 사운史芸이란 호는 자호自號야. 삼목이란 호는 그 양반이 주어 받긴 받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쓰지 않았지.” 이런 사연을 듣고 산을 내려와 도동한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삼목이 선생에게 요구하였다. "선생님, 그 삼목이란 호 쓰지 않으실 거면 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어렸을 때 친구들이 저 보고 이마 가운데 점이 있다고 ”눈이 하나 더 있는 놈"라고 놀렸거든요. 제 별명이잖아요” 그런데 선생은 선뜻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긴 자네도 그런 재주는 있어 보여. 자네 나이에 80년대 중반 우리나라 잡지 창간호 전시회를 열고, 그때 군정청에서 독도 기사를 넣은 간행물 창간호를 보고 아리랑(‘가요 만주아리랑’)이 수록된 노래책 ‘해방가요’와 교환하게 되면서 나랑 인연을 맺은 거 아냐? 눈이 세 개라는 별명을 삼목이란 호로 쓰는 거 의미가 있겠는데? 쓸라면 쓰라고. 자네 호로” 삼목은 이렇게 해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호를 갖게 되었다. 이종학 선생의 호 ‘삼목’을 받게 되어서..... 그리고 이후 3년여 시간을 함께하기도 했다. 결국 삼목은 중하 선생의 (재)국제한국연구원 기획실장으로 2년 반과 사운선생의 사운연구소 연구부장으로 3년 여의 활동 기간은 사료 데이터베이스 작업에 함께함으로써 사료 해석에 대한 감각과 이해력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삼목의 40대에서 60대에 이른 나름의 전문 분야 활동에 큰 밑받침이 되었다. 그래서 두 스승과 관련한 이 에피소드는 마치 어제인 듯이 소상하고 애틋하게 피력하는 그의 중요한 ‘과거’이다. 삼목의 40여 년 집중 작업은 ‘역사의 노래 애국가愛國歌’와 ‘민족의 노래 아리랑’ 연구이다. 그 일단이 바로 ‘막소설 아름아리’다. 스승으로부터 듣고 배운 사료 해석력을 바탕으로 두 주제를 지표화하고, 역사화하는 작업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단다. 막소설이란 ‘소설이듯 소설이 아닌 형태’, ‘두서없는 이야기’ 정도로 ‘막’에 방점을 둔 표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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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방송, ‘예술지존’ 창간 및 서울국제사진공모전 공모한국사진방송이 최고급 예술저장고 ‘藝術至尊(예술지존, All Arts Aura)’을 창간했다고 3일 밝혔다. 예술가들의 ‘최애’ 작품을 고급스럽게 영구히 보전하고 널리 알리려는 게 목적이다. 연속 간행물 mook 예술지존은 장르, 테마를 따지지 않고 모든 예술가가 자신의 저작물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골라서 수록하고, 작가들이 페이지당 9권씩을 배분받아 직접 각계각층에 배포해 널리 알리면서 서점, 도서관, 공공장소 배포도 진행하고 있다. 주관처인 한국사진방송 출판사업부(부장 이용만)가 접수하는 2호부터는 전 세계 예술가들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실을 예정이며, 특히 동아리별 참가를 권장하고 있다. 한편 한국사진방송은 예술가들이 널리 소통, 교류할 수 있는 세계화 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위해 ‘서울국제사진공모전(SEOUL KOREA International Photographic Exhibition 2023)’을 유치, 진행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류신우 작가가 총괄/심사위원장을 맡아 진행되는 서울국제사진공모전은 세계 각국의 권위 있는 단체들의 공인을 얻었으며 올해 6월 24일까지 국제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들을 접수하고 있다. 출품 및 자세한 사항은 서울국제사진전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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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39)김종욱 문학가동맹에서는 지난 5일 오후 2시 시내 인사정 문맹 임시사무소에서 해방기념 제1차심사위원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먼저 각 분과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각 부문에서 각 후보작품 3개 이내를 추천하기로 하고 지난 1년간에 창작된 총작품목록을 작성하여 심사에 착수하였다 한다. (중략) # 희곡부= 김태진, 이서향, 함세덕, 김남천 (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청년무대’ 기념공연 ‘붓돌의 군복’]: 민주청년동맹 동구위원회 직속극단 ‘청년무대’에서는 8. 15기념행사로 ‘적성赤星’지 창간호에 게재되었던 김사량金史良 작 희곡 ‘붓돌의 군복’을 박향朴鄕 씨 연출, 김순경金順敬 무대감독으로 8월 하순 경 중앙에서 상연케 되었는데 이 공연에는 특히 부녀자 동맹원의 찬조출연이 있다 한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청주에 연극열 왕성]: 충북 청주에는 저번 청주방송과장 한기선韓基善씨를 중심으로 ‘청주방송예술연구협회’가 조직되어 수일 전에 제1회 발표로 박원전朴元全 작 한기선씨 연출로 방송극 ‘흘러간 못자리 판’을 방송하여 호성적을 이루었는데 이번에 다시 제2회 발표로 박원규씨 작 한기선씨 연출인 ‘반가운 손님 오시는 날’을 불일 내로 방송한다고 한다.(청주 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학술지= [‘국학國學’ 창간, 국전國專서 발행]: 조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왜정 탄압으로 말미암아 국문을 해득치 못하는 일반대중을 계몽코자 국학전문학교에서는 이번에 편집부를 설치하고 ‘국학’이라는 월간잡지를 발행키로 되었다는데 특히 이 잡지는 동교 학생들의 손으로 편집될 터이라 한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영화= [‘유’사 뉴스와 관객의 시비 -낙수첩-]: 요즈음 미국 영화 ‘유나이데트 뉴스’가 매주 상영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이 뉴스영화의 해설 즉, 아나운서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전혀 경험 없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어감을 잘 굴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어서 그 해설이 명백치 못한 것은 유감천만-. 그런데 지난 4일 날 모 극장에서 마침 이 뉴스가 상영될 때의 소동? 일경! 즉 2층 구석에서 어느 야지 패가 "야, 이놈아! 말 좀 똑똑이 해라. 어디 들을 수 있겠느냐?”라고 고함한데 이 말대꾸로 아래층에선 또 "이놈! 미친 수작 하지 마라! ”하자 이러고 보니 전 후자 어느 쪽의 잘잘못을 가릴 바는 아니나 적어도 전자는 비평가요 후자는 公衆道德家일 법 한데 어느 편이고 간에 극장 내에선 정숙 ! 정숙! 단 어색한 해설자만은 속히 교대시킬 필요가 있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일 전범공판 뉴스, 이필우씨 휴대 귀경]: 동조東條, 송강松岡, 소기小磯등 일제 파쇼 마魔의 거두들을 일망타진으로 공판하는 광경을 특별뉴스에 수록한 필름을 작금 동경에 출장 중이던 촬영기사 이필우 씨가 금반 휴대 귀경하였다. 이 공개는 근일 적당한 방법으로 실시될 것이라는데 그에 앞서 특별초대시사회가 개최될 예정이라 한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영화인대회 연기]: 금 7일 오후 2시부터 영화동맹 회의실에서 개최예정이던 남조선 영화인대회는 집회허가관계로 수일 간 연기하기로 되었다고 한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최초의 국어판 ‘링컨 전’ 시사]: 최초의 우리 국어 자막판인 미국 R. K. O사 작품 ‘아브라함 링컨’의 초대시사회를 오는 10일 오전 10시부터 수도극장에서 중앙영화사 주최로 개최한다. 그런데 이 자막 제작은 기보한 바와 같이 군정청 영화과의 손으로 된 것이다.(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인사]: 방한준씨(군정청 영화과장) 신병 요양 중 6일부터 등청 (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극장= [충남 금산錦山에 새 극장 개관]: 해방 후 우리 민주문화의 재건공작을 위하여는 모든 문화영역이 다 그러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장문화가 가지고 있는 사명이란 가장 시급을 요하는 문제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로서는 무엇보담도 극장 증설 문제가 또한 절실한 과재인데 이는 자재문제 등으로 하여 당분간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일이었는바 금번 충남 금산에 ‘금산극장’이 새로 생겼다 한다. 건물은 전혀 신축으로 단층인데 정원은 천 명이며 경영자는 인삼포를 경작하는 박주원朴周源씨라 한다.(금산 발 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서울 시내 극장 동원표(1일)] 극장 제명 인장인원 국제 영화 ‘조춘’(제1일) 320 국도 ‘미국의 기밀실’(제1일) 5268 수도 영화 ‘유황도의 결전기’ (제4일) 1899 중앙 ‘몬테 성의 비밀’(제6일) 489 서울 ‘소년 슈발리에’(제3일) 743 장안 백민가극단(제7일) 878 제일 악극사 공연(제4일) 914 단성 ‘바람 부는 시절(제7일) 910 (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극장 금주 프로] 국제 5- 11 영화 ‘조춘’ 국도 5- 9 영화 ‘미국의 비밀’ 수도 8- 14 극단 자유극장 공연 중앙 6-10 혁명극장 ‘무영탑’ 동양 8-14 가극단 백조, 태평양 합동 공연 서울 3- 7 ‘소년 슈발리에’ 단성 8-14 영화 ‘비는 온다’ 제일 5-10 악극사 공연(藝術通信 259호. 1946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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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일제강점기 출판문화의 빛과 그림자....한국잡지 120년’ 학술대회...한국출판학회(회장 노병성)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오는 28일, 코엑스에서 ‘한국잡지 120년, 시대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고 밝혔다. 1896년 2월 5일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 근대 잡지인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의 '친목회회보' 등 창간호를 통해 120년 한국 잡지 역사를 돌아보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학술대회는 가천문화재단이 후원한다. 가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가천박물관은 '대한자강회월보'(1906년)와 '낙동친목회학보'(1907년), 근대 종합 잡지의 효시인 '소년'(1908년) 등 2만657종의 잡지 창간호를 소장하고 있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근대잡지는 1896년 2월 15일 대조선인 일본유학생친목회에서 창간한 '친목회회보'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1908년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을 종합 잡지의 효시로 보고 있다. 그 뒤로 한국 잡지는 다양하고도 올곧은 시대정신을 담아내며 120년 역사를 기록해 왔다. 이에 출판과 잡지 연구의 모체인 한국출판학회는, 잡지 창간호 박물관을 운영하는 가천문화재단 후원 아래, 오는 5월12일 2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잡지 120년, 시대를 말하다”란 대주제로 기자 간담회를 가질 예정이다. 발제자로 나서는 부길만 동원대 명예교수는 '잡지로 보는 일제강점기 - 잡지 창간호를 중심으로'에서 일제강점기 역사를 왕조 사관이나 경제 사관이 아닌 출판문화 사관으로 살핍니다. 윤세민 경인여대 교수는 '한국 최장수 잡지 '경향잡지'의 120년 시대정신'을 주제로 잡지와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연결해 연구한 성과를 발표한다. 이날 김진두 서일대학교 교수는 1930년대의 여성 잡지인 '삼천리'를 통해 당시의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끌어 나갔는지를 발표한다. '삼천리'에서는 민족 문제와 계급문제 그리고 여성문제의 동시적 해결을 주장하였다. 김교수는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고 여성지위 향상을 위한 당시의 노력을 조망해볼 예정이다. 교육학 전공의 김희주 씨는 1940년대부터 1990년까지의 교육잡지 창간호 22종을 살펴 각 연도별로 교육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본다. 해방 이후 창간호에 나타난 가치관은 ‘교육의 재건’ 이었으며, ‘60년대와 ’70년대에는 ‘교육의 대중화’가 핵심적인 가치였다. ‘80년대에는 ’교육의 전문화‘가 주된 가치였으며, ’참교육‘의 탄생으로 대변되는 90년대에는 ’교육의 다양화‘가 부상하는 가치였다. 부길만 동원대학교 명예교수는 '잡지로 보는 일제감정기-잡지 창간호를 중심으로' 라는 발제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왕조사관이나 경제사관과는 전혀 다른 출판문화사관으로 바라볼 예정이다. 부교수는 역사를 서적과 잡지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최남선, 방정환, 김동환, 차상찬의 활동을 출판문화사적 측면에서 해석하고자 하였다. 윤세민 경인여자대학교 교수는 "우리나라 최장수 잡지인 '경향잡지'는 곧 한국잡지의 역사이며 한국천주교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지난 120년 동안 이 땅의 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앙의 백년지기’, ‘민족의 백년지기’로서 목소리를 울려 왔던 '경향잡지'는 민족을 배신하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윤교수는 이런 빛과 그림자를 밝혀내며, '경향잡지'의 시대정신 그리고 그 의의와 과제를 제언할 것이다. 5월 28일 코엑스에서 열리는 금번 학술대회는 120년 한국잡지 역사를 학술적으로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가운데, 잡지 창간호의 가치와 의의, 120년 한국잡지가 담아온 시대정신을 올곧게 밝히는 뜻깊은 자리가 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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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학술지 '공연예술문화연구' 창간호 발간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이 학술지 '공연예술문화연구' 창간호를 28일 발간한다고 밝혔다.'공연예술문화연구'는 공연예술학과 박물관학의 담론부터 학제 간 융합 연구까지 당대 한국 공연예술연구의 경향과 흐름을 담아 매년 발행할 계획이다.창간호는 공연예술 전반에 관한 담론을 주제로 한 특집과 해외의 공연예술박물관을 소개하는 연재, 문화 전반을 고찰한 주요 저술을 통해 공연예술의 흐름을 짚어보는 서평 등으로 구성되었다.'특집'은 매년 다른 주제를 선정해 공모를 통해 논문을 모집한다. 올해는 '국립극장 70년, 회고와 전망'을 주제로 투고된 논문 중 심사를 거쳐 김남석과 김진각의 글을 선정해 수록했다.'연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극장 도서관을 소개한 양민아의 글이 실렸고, 서평에는 최유준의 '리추얼의 종말(한병철 저)'과 김민조의 '국립극장 70년사(국립극장 편)'가 수록됐다.최석영 공연예술박물관장은 "'공연예술문화연구'를 통해 한국 공연예술학과 박물관학 융합 연구 발전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며 "향후 등재지 선정을 목표로 학술적인 깊이와 넓이를 더해나갈 것"이라고 전혔다.'공연예술문화연구'는 이날부터 국립극장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으며, 3월 이후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자료실과 주요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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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음악연구’·‘음악세계’ 한민족음악총서 최초 공개국립국악원은 1988년부터 2009년까지 북한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발행한 당대 북한 유일의 음악 전문잡지인 ‘음악세계’ 43권의 총목록과 색인을 망라한 ‘한민족음악총서 제12권’을 전자책(PDF)으로 발간했다. ‘음악세계’는 윤이상(1917-1995)과 윤이상음악연구소를 통해 북한의 민족음악 연구 성과와 북한의 현대음악 연구 자료를 국내외에 소개하고 조선음악의 우수성과 뛰어난 연구 역량을 홍보하기 위해 발간되었다. 1988년 창간호부터 1991년까지 총 7권은 ‘음악연구’라는 제호로 발간되었고, 1992년부터 ‘음악세계’ 라는 제호로 변경됐다. 1990년대부터 북한 음악을 연구해온 국립국악원은 앞서 북한의 형성기인 1950‧60년대 잡지, ‘조선음악’과 ‘조선예술’의 총목록과 색인집을 각각 2016년과 2020년에 발간한 바 있다. 이번 ‘한민족음악총서 제12권’에서 다룬 ‘음악세계’는 1980년대부터 비교적 최근 북한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담고 있는 잡지다. ‘한민족음악총서 제12권’은 ‘음악세계’가 2010년부터 온라인 잡지로 전환되기 전 발간된 전체 43권의 호수별 목차의 총목록, 작품, 인명, 갈래, 주제 색인을 담아, 북한 음악계의 관심 주제와 국악과 양악의 배합 문제 등 한국음악계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를 편리하게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색인에 대한 원문은 국립국악원 북한음악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이러한 학술연구의 기초 자료가 남북한의 문화교류가 재게 될 경우 함께할 수 있는 토대로 활용될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에 동참하는 작은 발걸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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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인년(壬寅年), 문경과 호랑이 이야기새해 들어 새로운 연재로 ‘이만유 시인의 문경사랑’을 신설합니다. 필자 이만유(75세)님은 전 문경문인협회 회장으로 뜨거운 시심과 남다른 정신문화의 소유자로 문경을 세심하게 알고 뜨겁게 사랑하는 분입니다. 최근 시집 ‘문희(聞喜)의 노래’를 펴내 ‘문경의 정체성을 육화(肉化)한 시인’으로 평가 받는 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문경구곡원림보존회와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를 이끌며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현역 문화운동가이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매주 토요일, ‘이만유 시인의 문경사랑’ 문희경서(聞喜慶瑞)를 전해 드립니다.(편집자 註) 이만유(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호랑이해인 임인년(壬寅年) 새해가 밝았다. 사실은 다가오는 2월 1일 설날이 되어야 임인년 호랑이해가 시작된다는 것이 맞지만, 이미 사람들이 양력 2022년 새해를 호랑이해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문경과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이고 신화, 전설, 민담, 민속신앙 등 우리의 삶 속 깊숙이 스며들어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살아왔다. 단군신화에서부터 근래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으로 호랑이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 구한말인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한반도 형상을 나약한 토끼로 그린 것에 대해 육당 최남선이 1908년 호랑이 모양의 지도를 창간호 ‘소년’에 발표했고 그 뒤 넓은 대륙을 향해 앞발을 치켜들고 포효하는 용맹스러운 호랑이 모습으로 표현한 ‘근역강산 맹호기상도(槿域江山 猛虎氣像圖)’가 그려졌다. 전국에 호랑이 관련 지명이 동해 영일만 호미곶(虎尾串)을 포함해 389곳이 있다고 하는데 호기심으로 올해 검은 호랑이해를 맞아 신씨 성, 돌, 호랑이가 많다고 해서 ‘신석호(申石虎)의 고장’이란 별칭을 가진 우리 문경에는 어떤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이나 지명이 있나 알아보았다. 삼국사기에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키어 장군이 되었다.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나무 밑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라는 호랑이 관련 기록이 있다. 문경에는 전통사찰이나 곳곳에 호랑이 그림과 흰 수염의 산신령이 모셔져 있는 산신각이 있고 그중 문경새재에 ‘주흘산 산신각’과 ‘조령산 산신각’이 있다. 여기에 ‘어명에 죽은 산신령’이란 전설이 전해 오는데, 조선 태종 때 문경 현감의 명령을 받아 조정에 올릴 문서를 지닌 역졸이 문경새재에서 호환(虎患)을 당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태종이 크게 노하여 즉시 금부도사를 보내어 문경새재 산신령(호랑이)을 잡아 오라는 엄명을 내렸지만 잡지 못하자 산신각에 제사 지내고 어명을 제단에 붙여 놓았더니, 그날 밤 삼경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비명이 들리더니 잠잠해졌다. 그 이튿날 산신각 앞에 산채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고 그 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길 선비가 개고기를 먹고 호랑이 그림이 있는 산신각 앞을 지나가면 발이 땅에 붙어 꼼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조선 시대 문경새재에는 호랑이 많았다고 한다. 굶주린 사람들이 쌀을 가져갈 수 있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쌀독으로 유명하며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인 전남 구례 운조루(雲鳥樓) 솟을대문 위에 벽사의 개념으로 잡신을 막는다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다. 대구 출신무인(武人) 유이주(柳爾胄)가 한양으로 가던 중에 문경새재를 넘다가 채찍으로 후려쳐 잡은 호랑이 뼈다. 호피는 영조 대왕에게 바치고 백호 장군이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한 것이다. 문경읍 용연리(龍淵里)‘범바윗골’은 용못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범바위가 있고 지곡리(池谷里) ‘범바위’는 주치밭등에 있는 바위인데 범이 이 바위에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호계면(虎溪面)에 범 호(虎)자가 들어가 있는데, 호계면 지형이 호랑이가 영강을 보며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기도 하고, 오정산 호랑이가 마을 앞 냇가까지 무리 지어 내려왔다고 하여 호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계면은 11개 법정이동 중 호랑이를 포함 다수가 동물과 관련된 지명으로, 별암리의 자라 별(鱉), 견탄리의 개 견(犬), 구산리의 거북 구(龜), 우로리의 소 우(牛), 봉서리의 봉새 봉(鳳) 등의 지명을 가진 것이 아주 특이하며, 선암리(仙岩里)에는 상선암 서북쪽 배넘이산 중턱에 있는 산제당에 남녀신(男女神)이 호랑이의 호위를 받는 탱화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초사흘 밤에 제사를 올린다. 또 봉서리(鳳棲里) 범바우 아래쪽에 봉암사(鳳岩寺)라는 절이 있어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예천의 대국사라는 절의 중이 이를 시기하여 그 까닭을 캐어 보니 봉암사 뒤쪽에는 범처럼 생긴 범바우가 있고, 절 앞쪽에는 개처럼 생긴 개바우가 있어 범이 굶지 않게 언제나 먹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중이 몰래 개바우를 깨트려 버렸다. 그 후부터 절이 점차 쇠잔해져 폐사되고 말았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산북면 호암리(虎岩里)는 마을 앞 사불산에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호암리라 하였고 불당(佛堂)이 있는 불당골(佛堂谷)에 송씨 부인이 자식을 얻기 위해 밤마다 불당을 찾아 기도하였는데 정성이 지극하여 호랑이가 길을 인도하고 보호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가은읍 죽문리(竹門里)복호산(伏虎山) 전설은 배고픈 호랑이가 먹이를 구하려고 나왔다가 도태라는 곳에서 한 동자가 덫을 놓고 호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엎드려서 화를 면하였다고 하여 엎드릴 복(伏) 자가 들어간 복호산이 되었다고 한다. 마성면 남호리(南湖里) ‘호랑목골’은 북실 서쪽에 있는 호랑이가 다니던 길목이었고, 하내리(下乃里) ‘범바위등’은 범바우골에 있으며 범이 자주 나와 앉았다는 바위가 있는 등이라 하였고, 농암면 연천리(連川里) ‘범의굴’은 버무잣골 서쪽에 있는 범이 살던 굴이고, ‘복골’은 말바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伏虎穴)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농암 1리 냇가에 개 한 마리가 지나가려 하는데, 종곡리의 괴정(槐亭) 뒷산에서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맞은편 성재산 밑에 있던 사자가 호랑이를 견제하고 노려보므로 서로가 잡아먹지 못하는 지세인데 훗일 사자와 호랑이, 개는 그대로 바위로 변했다고 하며 지금도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며, 또 종곡리(鍾谷里) ‘범바우'는 뒷바리 동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범처럼 생겼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그리고 영강 주변에 있는 특이한 명당으로 호랑이 입인 범아구지 호구혈(虎口穴)에 모신 묘(墓)가 있는데 시사(時祀)를 지낼 때 명당의 기가 너무 강해 후손들의 몸을 상하게 한다고 하여 묘소 가까이 가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곳도 있다. 마지막으로 농암면의 구 선암초등학교에 있는 고려왕검연구소 이상선 소장과 전국 제일의 명품이라는 사인검(四寅劍)을 소개하면, 국내 첫 ‘야철대장’이며 노동부 전통야철 도검부문 기능 전승자, 경상북도 최고 장인으로 선정되어 활발한 작품활동과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소장이 만든 사인검(四寅劍)은 십이지상(十二支像) 중의 호랑이 인(寅)자가 네 번 겹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제작되는 검으로 잡귀와 액운을 막아주는 신성한 ‘영물(靈物)’로 조선 시대 왕이 신하에게 하사하여 사악한 것을 베고 나라를 지키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검이다. 글쓴이: 이 만유 이상으로 임인년(壬寅年)을 맞아 문경과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를 마치며, 2022년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인 묘서동처(猫鼠同處)를 마음에 새기면서 모든 일에 시비곡직(是非曲直)을 옳게 가리고 호시우보(虎視牛步)하여 새해는 국운이 창성하고 코로나를 극복하여 7만 문경시민은 물론 5천만 국민 모두 검은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희망찬 한 해, 모든 것이 다 이뤄지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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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오페라단이 걸어온 길…1960년대 공연예술 조명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이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 창간호를 발간했다.이번 연구총서는 공연예술박물관이 소장한 자료를 공개하는 동시에 공연예술분야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자료의 심층 연구를 확대하고자 올해 처음 만들어졌다. '초연에서 레퍼토리로'라는 주제로 발간된 창간호에서는 1960년대 국립극단·국립오페라단이 걸어온 역사를 공연예술박물관 소장 자료 중심으로 고찰한다.분야별 전문가 7인(김남석·김옥란·김현주·박동우·백현미·우혜언·허영한)이 집필진으로 참여해 총 320쪽 분량으로 엮었다. 두 단체가 고유한 레퍼토리를 확보하기 위해 펼친 다양한 활동을 문화예술사적 관점에서 서술했으며, 당시 국립극장 무대미술의 역사도 다룬다.또 공연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60년대 국립극단·국립오페라단의 창작 작품과 국내 초연 작품의 사진 자료 60점도 함께 수록했다.최석영 공연예술박물관장은 "이번 창간호를 시작으로 격년마다 다양한 주제를 담은 연구총서를 발간할 계획"이라며 "박물관 소장 자료가 적극적으로 활용·공유돼 공연예술연구와 그 발전에 토대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공연예술박물관 소장자료 연구총서'는 30일부터 국립극장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내려 받을 수 있다. 내년 1월부터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자료실 및 주요 도서관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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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아리랑읍’으로 개명(改名), 어떻습니까이동식/ 前 KBS 해설실장 前부산총국장 2002년 해외 근무를 마치고 잠깐 시간을 내어 고향 문경을 방문하는 길에 초등학교 3년 반을 다닌 충북 진천의 광혜원을 찾았다. 그때 승용차로 이동하면서 물어물어 만승초등학교를 찾았는데, 교정으로 가는 길이 조금씩 바뀌고 학교 건물도 새로 지어 옛날 추억을 되살리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학생 때 타고 오르던 느티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그걸 보는 것으로 추억의 아쉬움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가 있는 곳은 원래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리였고, 만승면에 있다고 만승국민학교(초등학교로 바뀜)였는데, 이 만승면의 이름이 언젠가부터 광혜원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게 궁금했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최근에 보니 2000년에 이름이 바뀌었단다. 만승면이란 이름은 한자로 ‘萬升’(만승)이어서, 어릴 때는 뜻을 알기 어려웠는데, 升이란 글자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 말이라는 계량 단위 중의 되에 해당하니 이곳이 됫박으로 만 개 이상의 소출이 나는, 너른 옥토가 있는 땅이란 뜻이 되어 굳이 나쁜 뜻은 아니라 하겠다. 그런데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인 1910년 우리나라 전 행정구역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광혜원이란 오래된 이름을 제쳐놓고 자의적으로 갖다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광혜원은 사통팔달의 교통 요로였기에 조선시대 나라에서 공무 출장이나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관원들의 숙식과 갈아탈 말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던 곳으로, 충주 감영에 근무하던 충청 관찰사들도 이곳에서 업무 인수인계하였고 그 터가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유서 깊은 동네였다. 또 널리 베풀다는 뜻도 담겨 있어 만승보다는 뜻이 더 좋다. 그러기에 지방의 읍면 이름을 주민들의 뜻에 따라 바꿀 수 있게 된 이후인 1999년 상반기에 주민들이 ‘만승’이라는 이름 대신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광혜원’으로 이름을 바꿔 달라는 청원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주민 1천5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7.2%의 주민이 찬성함으로써 진천군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충청북도에 행정구역 조정계획을 올려 승인을 받음으로써 2000년 초에 드디어 이름이 광혜원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에서 읍면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주민 90% 이상이 찬성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도의 타당성 분석과 도의회 승인, 행정자치부 승인 등의 복잡한 절차가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는 자신이 사는 행정구역의 이름을 기왕이면 일제시대에 멋대로 책정된 이름보다는 그 땅의 역사와 유래, 지정학적인 인연, 인물과 풍속, 특산물 등을 고려해서 많은 곳이 새 이름을 얻고 있는데,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충북 영동군의 황금면은 이미 1991년에 추풍령면으로 바뀌었고,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은 2007년에 대관령면으로 바뀌었다. 내가 충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듣던 이름인 상모면이 2005년에 온천 이름을 딴 수안보면으로, 이류면이 2012년에 대소원면으로 바뀌었다. 눈에 띄는 것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이 2009년에 김삿갓면으로 바뀐 것과 동강에 있는 유명한 한반도 지형의 이점을 살라기 위해 2015년에 영월군 서면을 영월군 한반도면으로 바꾼 것, 또 영월의 수주면을 2016년에 무릉도원면으로 바꾼 것 등 전국에서 나름대로 지명의 특색과 이점(利點)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참으로 많은 변경이 있었음을 김윤승 지리산 문학관장의 조사 결과를 보고 알게 되었다. 전남 담양의 남면은 2019년에 가사문학면으로 고쳤다. 이 일대에 역대 문인들이 부른 멋진 가사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에 착안한 것이리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은 2015년에 남한산성면으로 고쳤다. 훨씬 알기가 쉽다. 그 전의 지명을 보면 일제가 한 군(郡)의 경우 읍을 기점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를 표시하는 명칭을 많이 갖다 붙였는데, 이런 것들이 어느새 각 지자체와 주민들에 의해 자기 고을, 마을을 자랑하고 알리는 지명으로 바뀐 것이다. 자 그러면 문경이 고향인 필자에게도 욕심이 생긴다. 문경이라는 이름은 옛날 경상도 쪽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갔다가 급제했다는 경사스러운 소식(慶)을 제일 먼저 듣고(聞) 접하는 것이란 뜻이어서 그 유래와 역사가 찬연하다. 따라서 그 문경이라는 이름 자체를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제 문경이 그동안 군(郡)에서 시(市)로 바뀌면서 예전 군청 소재지인 점촌이 문경시로 바뀌는 바람에 그전에 그냥 문경이라고 부르던 문경읍(邑)의 명칭이 애매해지고 혼란이 오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문경읍에 대해서는 더 나은 이름을 찾아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김윤승 지리산 문학관장은 문경에서 나온 국연문집(國硏文集)창간호에서 문경을 ‘문경아리랑읍’으로 부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나섰다. 알다시피 문경은 문경아리랑의 본고장이다. 문경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리랑의 원조라고 한다. 문헌상 처음으로 ‘아리랑’에 ‘문경새재’가 등장하는 것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1896년 오선악보로 남긴 ‘아리랑’에서이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 아르랑 얼사 배띄어라 // 문경새재 박달나무 / 홍두깨 방맹이 다나간다" 이 노래는 경북에 있는 ‘문경새재’를 거론하였지만 동부민요의 메나리 토리가 아닌 서울·경기를 중심으로 하는 경(京)토리 선율구조로 되어있어서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아리랑을 부르는데 거기에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에 따르면 '문경새재'는 이어 조선조 말 음악교육자인 이상준(李尙俊, 1884~1948)이 1914년 펴낸 朝鮮俗曲集(조선속곡집)에 오선악보로 소개된 아르랑타령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 아리령 아리령 아라리오 아리령 띄여라 노다가게 ...."라고 등장한다. 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는 전국적으로 당시 대중들 사이의 야한 유행어로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경새재’는 경남 밀양시 지명이 달린 <밀양아리랑>에도 등장한다. 1926년 대구 달성 권번 출신 김금화(金錦花)가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한 초기의 밀양아리랑타령에는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얼시고 날 넴겨줄까 / 문경아 새자는 웬 고개드나 구부야 구부로 눈물이 난다 / 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얼시고 날 넴겨줄까" 이다. 물론 문경지방에서 부르는 문경아리랑에도 ‘문경새재’가 등장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길로 놀아나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문경새재를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 구비가 눈물이 나네" 아리랑 고개라는 것은, 어느 특정 지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들이 대체로 수긍하는 것이지만 이처럼 전국의 아리랑에 문경새재와 박달나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문경’이야말로 아리랑 음악과 문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문경에서는 <문경새재아리랑>을 이어받은 송옥자 씨가 신문 방송을 통해 문경의 아리랑 전통을 전국에 활발히 알리고 있다. 2008년부터 문경시는 ‘문경새재아리랑제’와 아리랑 관련 행사들을 매년 성대하게 펼쳐오고 있다. 문경새재 입구에는 각 지역 아리랑 노래비를 세워 놓았다. 바로 앞 ‘옛길박물관’ 내에는 음반, 영화 아리랑 대본, 아리랑에 관련된 서적 등이 모여 전시되고 있다. 전국 방방곡곡 전해오는 아리랑 가사 10,068수가 책으로 집대성됐다. 국내 유명 서예가 122명이 2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아리랑 가사를 붓으로 쓴 것이 50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문경시 옛길박물관에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문경읍 관음리에는 시조시인 권갑하 님이 세운 '문경아리랑시조문학관'이 시조 속에 녹은 아리랑 문화를 모아 보여준다. 문경시 문경읍 하초리는 2014년 8월 14일에 '문경새재아리랑 마을'로 선포됐다. 이 마을에서 1917년부터 2001년까지 84년 동안 살았던 송영철 옹은 <문경새재아리랑>을 문경새재아리랑답게 부른 마지막 가객(歌客)으로, 그가 부른 소리는 다른 아리랑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리랑에 관한 한 역사적으로나 민속적으로나 정선아리랑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곳이 문경읍이기에 차제에 이 읍의 이름을 ‘문경아리랑읍’으로 하자는 것이 그 제안의 취지이고, 필자도 이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 문경시가 아리랑의 본향이라는 정체성을 극대화하고 브랜드 효과를 선점하려면 문경읍을 ‘문경아리랑읍’이란 이름으로 먼저 개칭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름을 처음 쓰는 지역이 된다. 이미 경상북도에서는 지난 2007년 이후 최근까지 10개 시·군이 13개 행정구역의 이름을 변경했거나 변경을 추진 중이다. ‘문경아리랑읍’이란 이름을 선점하는 것은 절대 빠르지 않고 오히려 늦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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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에누리 없는 고서점 ‘엿장수 마음대로’란 말이 있다. 엿장수가 엿을 늘이듯 무슨 일을 제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못마땅한 투로 이르는 것으로, 고서점 주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고서 가격은 고서점 주인 마음대로란 말인가. 사실 그렇다. 고서점 주인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고서 가격을 정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수요자인 수집가가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처럼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의 평가 기준에 많은 차이가 있다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다. 고서점 주인이 아무리 합당하다고 생각해 제시한 값이라도 그 책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거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고서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책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 책이 누군가에게 팔린다면 그 순간 이것은 합당한 가격이 되는 것이다. 결국 고서는 사고파는 값이 정가다. 호산방에서는 고서의 가격을 정할 때 몇 가지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책정한다. 그 요인이란 그 책이 갖고 있는 희귀성·효용성·시장성 등이다. 우선, 희귀성이란 자료의 희귀한 정도를 말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한 35년 전쯤의 일이다. 하루는 어떤 고서점 주인이 내게 아주 귀한 책을 보여주겠다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십 년 넘게 고서점을 했지만, 이런 책은 처음 봅니다.” 주인의 이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책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얼마냐고 물었다. 순간 주인은 조금 난감해 하는 눈치다. 내가 가격을 너무 성급하게 물은 것이다. 그는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내가 책을 펼쳐 보지도 않고 대뜸 가격부터 물었으니 맥이 빠진 것이다. 주인은 조금 멈칫하더니, 아주 귀한 책이라 ○○원은 받아야겠다고 한다. 내가 즉시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도리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 책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어 보이기만 했다. 서점 주인이 내놓은 책은 1898년 영국에서 발행된 비숍(I. B. Bishop, 1831-1904)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이었다. 비숍은 영국의 여성 작가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나 여행했다. 남장을 하고 나귀를 타고 다니며 여행할 정도로 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그때의 여행기로,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베스트셀러다. 지금은 많이 알려지고 번역본도 나왔지만, 35년 전쯤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매우 귀한 책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이 책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기에 그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책을 보지 않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장정이 매우 인상적이다. 푸른색 천 바탕에 영문 제목과 저자명을 금박으로 처리하고, 붉은색과 검은색의 태극문양을 압인했으며, 그 옆에 다시 붉은색 네모 바탕에 ‘朝鮮’이란 한자 제목을 금박으로 디자인했다. 그런데 한자 제목인 ‘朝鮮’의 ‘鮮’자가 ‘’으로 뒤집혀 인쇄되었다. 이는 아마 외국인이 편집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잘 몰라 글씨가 뒤집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디자인 차원에서 일부러 뒤집어 놓았다면 이는 대단한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사진 78) 나는 고서를 살 때 여태껏 내 입으로 깎아 달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흥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흥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서점 주인에게 가격만 적당하다면 한 푼도 깎지 않고 책을 살 터이니 꼭 받을 가격만 말하라는 암시를 주어 왔다. 그래서 조금 비싼 듯해도 두말 않고 사기도 한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되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주인은 긴장하게 마련이다. 설령 눈앞의 책은 포기한다 해도 다음 것들에 대한 흥정을 미리부터 해 놓는 식이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흥정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주인에게 설명할 틈을 주지 않고, 또 책을 살펴보지도 않고 사겠다고 한 것은 주인과의 기싸움이다. 조금 비싸게 사는 것도 기싸움에서 이기는 한 방편이고, 이것이 결국은 싸게 사는 길이다. 위의 예에서처럼 고서의 희귀한 정도가 가격을 결정하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서점 주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효용성이란 책의 활용성을 고려한 것으로, 고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를 말한다. 이러한 가치 또한 책에 따라, 이용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가의 수배 내지 수백 배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평가의 일부도 결국은 고서 가격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수필가 박연구(朴演求) 선생이 호산방에서 이태준(李泰俊)의 『무서록(無序錄)』을 사 간 적이 있다.(* 사진 79) 그는 이때의 사연을 『책과 인생』 창간호(1992년 3월)에 「쌀 한 가마니 값과 맞바꾼 수필의 정수」라는 글로 발표했다. 그는 이 수필에서, 수필의 정수로서 김용준(金瑢俊)의 『근원수필(近園隨筆)』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무서록』을, 망설임 끝에 쌀 한 가마니 값으로 구입한 가난한 문사(文士)의 호사를 고백했다. 박 선생이 처음부터 이런 수필을 쓸 생각에 『무서록』을 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가까이 두다 보니까 글의 소재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무서록』은 범우사에서 문고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선생이 원고료나 인세를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하면 이 책값보다 훨씬 더 받았을지도 모른다. 안 받았으면 또 어떠한가. 고서란 이렇게 활용하는 것이다. 한편 박 선생이 고백한 대로, 가난한 문사의 처지에서 이 책의 당시 가격 10만 원은 분명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 만약 이 책의 가격이 2~3만 원 정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이 책이 박 선생에게까지 차례가 갔을까. 아마 박 선생과 만나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갔을 것이다. 그래서 고서는 적당히 비싼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꼭 필요한 사람을 기다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시장성이란 수집가의 선호도에 따른 시장 논리를 말함이다. 어떤 특정 분야의 책을 찾는 수집가가 많으면 자연 그 분야의 책값은 오르게 마련이다. 또는 앞으로 누가 이 책을 찾을 것을 예측하여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10~20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외에도 고서 가격을 결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남들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책이라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고서점 주인이 이것을 예견하고 준비해 놓았다면 수집가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집가가 이것을 모두 알아차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알아차린다 한들 주인의 손에 들어간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고서 가격은 고서점 주인 마음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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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회 기관지 ‘Sayaka’ 창간호 발간재한일본인회 ‘라일락’의 기관지 ‘사야카(Sayaka/沙也可)’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간행물 명 ‘사야카’는 재한 일본인의 상징으로 임진왜란 때 투항하여 김해김씨 사성(賜姓)으로 ‘선한 나라 조선’에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지은 충선(忠善)의 본명이다. 이런 표제의 기관지를 낸 것은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겠다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이를 반영한 듯 캐치프레이즈로 ‘세상을 밝히는 일본 여성이 되자’를 표방하고 있다. 이런 발행 취지로 이 잡지의 내용은 재한 일본인들에 대한 이해와 일본문화 교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타브로이드 판형으로 총 44쪽에는 20여개의 항목을 수록, 볼거리가 풍부하여 눈여겨 볼만한 기사들이 많다. 특집으로는 파키스탄 여권운동가 말라라 유사프자이( ملاله یوسفزۍ)를 다루었다. 1997년에서 2020년 기준으로 최연소인 노벨상 수상자이며, 유일하게 미성년자의 나이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탈레반 조직이 여학생들을 학교에서 쫓아낸 파키스탄 북서부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스와트 골짜기에서 교육권 및 여성 인권운동을 하였다. 이 기사는 열악한 상황에서 여권의 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젊은 여성, 유사프자이의 국제적 여권 운동 과정을 다루었다. 특히 2009년 당시 11살이던 시절 영국 공영방송 bbc의 의뢰를 받고 ‘구루 마카이의 일기’라는 필명으로 여자 학교 파괴 행위를 생생하게 고발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전말을 소개했다. 2015년에는 이슬람 파괴자의 총탄을 맞고 사경을 해매다 극적으로 생환했다. 이 때의 성명서는 세계에 큰 감동을 주었다. "저는 제게 총을 쏜 병사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제게 총이 있고 그가 제 앞에 서 있다 해도 저는 그를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호메트, 예수 그리스도, 부처님으로부터 배운 자비의 마음입니다. 마틴 루터 킹과 넬슨 만델라로부터 상속받은 변혁의 유산입니다. 또 이것은 간디, 바사 칸, 테레사 수녀에게서 배운 비폭력의 철학입니다. 그리고 제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용서의 정신입니다. 바로 제 영혼이 제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온화하여라. 모든 이를 사랑하라’라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를 입증한 사례를 전하였다. 다음은 강용자의 이방자 여사 전기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 입니다’ 리뷰 기사이다. 잘 알려진 이방자 여사의 발언 "내게는 사랑하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를 주제로 전 생애를 요약하였다. 이 기사 역시 한일 관계의 이해를 위한 의미있는 기사이다. 눈 여겨 볼 기사는 이 잡지 이름인 ‘사야카’에 관한 아카시 마수에의 기사다. 부제를 ‘사랑은 시간을 넘어 한국을 사랑한 일본이 장수 이야기’라고 하였듯이 사야카의 조선에 대한 흠모를 제시 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의 일절을 제시했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오, 용기가 없어서도 이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잇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만 합니다.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禮義)의 나라에서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1962년 72세의 나이로 5남 1녀를 두고 세상을 떴으나 현재 7500여명의 후손을 둔 사야카(김충선)의 생애를 짧지만 감동적으로 처리하였다. 마지막 기사는 아직도 개최가 확정되지 않은 도쿄올림픽에 관한 기사다. 그런데 접근 방식이 손기정 선수를 중심에 두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기사이다. 즉, ‘마라톤 일본 첫 금메달 리스트 손기정 선수’ 라는 부제에서 2020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는 ‘손기정 선수의 오랜 꿈을 이룬 것’이라며 한일교류에 큰 도움이 될 도쿄올림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한편 보너스 기사가 주목을 끈다. ‘안녕하십니까 라일락입니다’라는 총회장 우부카타 준코의 단체 소개 글이다. 이 라일락회의 존재는 2020 ‘문경새재아리랑제’ 행사에서 일본 민요 ‘이츠키자장가’ 공연을 통해 알려졌는데, 많은 이들이 이 단체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글이다. 단체 성격은 남성 권력 중심의 단체가 아닌 ‘한국에 시집 온 일본 여성들의 모임’이다. 결성 취지는 ‘남북 뿐만 아니라 원래 같은 뿌리인 일본인도 같은 민족으로 살자’이다. 활동 방향은 ‘여성들의 감성과 특색을 살려 자유가 넘치는 이상세계의 실현’이다. 이런 단체이기에 코로나 극복을 위한 경북 문경에서의 아리랑 한마당 축제에 참여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이 잡지는 앞으로 한일 독자들에게 마음의 가교로 기능하리라고 보아 제2호의 속간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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