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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12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6> 아雅는 궁궐에서 연주되는 궁중음악 곡조에 붙인 가사歌詞이다. 시이다. 「시경」에 소아小雅 74편 대아大雅 31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 시이다. 이들 시의 내용은 주周나라 개국을 칭송하고 선왕宣王을 영송詠頌하는 것 등 다양하다. 역사시 서사시가 많다. 순정純正한 것을 대아, 풍이 섞인 것을 소아라고도 하였다. 아는 바로잡음의 뜻을 가지고 있고 정正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는 조정 정악正樂의 노랫말이다. 풍風은 국풍國風이라고도 하며 송頌은 종묘 제례 때에 연주하던 악가樂歌의 시이고, 풍 아 송에 부賦 비比 흥興을 더하여 육의六義라 하는데 시를 짓는 여섯 가지 범주이다. 부는 신神의 말을 전하거나 신을 찬양할 때 쓰는 표현법이며 비는 비유법, 흥은 신명께 고하는 수사법이다. (詩有六義焉 一曰風 二曰賦 三曰比 四曰興 五曰雅 六曰頌 「시경」대서大序에 써 있다.) 또한 풍 아 송은 시가의 목적에 따른 체재상의 분류로서 시의 삼경三經이라 하며 부 비 흥은 표현법상 수사의 차이에 따른 분류로서 시의 삼위三緯라 한다. 시의 씨줄 날줄이다. 공자는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 육경六經 중에서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고 말하였다. 그가 정리한 시경의 시 삼백여 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하였다. 전혀 거짓됨이 없고 순수하다는 말이다. 20세때 태어난 아들 백어伯魚에게도 「시경」공부를 권하였다.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지.” 학관이 곁들였다. 고대 제왕들은 먼 지방까지 채시관採詩官을 파견해 거리에 나돌고 있는 노래며 가사들을 모아 민심의 동향을 알아보고 정치에 참고로 삼았다고 하며, 조정의 악관樂官에게 이 시에 곡조를 붙이게 하여 다시 유행시킴으로써 민심의 순화에 힘썼다. 그런 말도 하였다. 학관은 제술을 하고 있는 박연에게 편히 앉으라고 하였다.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신호였다. 시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아악에 대하여 논술해야 하는 것이다. "예 그러겠습니다.” 박연은 더욱 꼿꼿하게 앉으며 입론을 펼쳤다. 아악은 궁중의 정아正雅한 음악이다. 궁중 밖의 민속악에 대하여 궁중 안의 의식으로 쓰던 음악 아부악雅部樂 향부악鄕部樂 당부악唐部樂을 말한다. 그 중 아부악만을 아악이라고 하기도 한다.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 같은 것이다. 향부악과 당부악은 우방右坊, 아부악은 좌방左坊에 속하였다. 아부악을 더 우위에 두었던 것이다. 아악은 중국의 주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례 음악으로 발전하여 고려 때(예종 11, 1116년)에 송宋나라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이 전해지면서 비롯되었다. 그 전에도 태묘太廟(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종묘宗廟) 등의 제례에서 음악을 사용하였지만 대성아악은 원구圜丘 사직社稷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공자 묘) 등의 제사와 그 밖에 궁중의 연향宴享에 쓰이었다. 고려 말에는 악공樂工을 명나라에 유학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 조회朝會 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樂歌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아악의 정의와 유래 등을 말하고 현황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아악과 제례, 악현 악곡 등에 대하여 순서대로 말하고는 소견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다른 학문들에 비하여 음악 아악의 분야는 발전이 없고 중국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답습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것을 다시 물려받은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 고려조와 조선조가 서로 다르고 시대가 달라졌는데 변화가 없고 연구가 없고…” "그런 것 같은가?” 학관은 그의 말을 가로채며 그러면 다음 시간에 무엇을 개선하고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그 방안을 연구해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연이 난감한 얼굴로 학관을 바라보자 웃으면서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시경을 더 읽어 보시게. 답이 나올걸세.” 써지지 않으면 계속 읽으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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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문학의 세계' 작품 전시회11월21일부터 28일까지 농민문학기념관(관장 이동희)에서 농민문학작가 작품과 문헌자료 전시회가 열린다. 시, 소설, 수필 12인의 작가 작품과 다수의 작가 자료 전시, 그리고 류승규 유품 전시까지 농촌농민 제재 소설을 다룬 현존하는 작가와 작고한 작가의 자료를 만나 볼 수 있다. 전국 유일의 농민문학 자료 박물관인 ‘농민문학기념관’ 주최의 이번 전시회는 한국문학관협회 프로그램 지원 사업으로 마련되었다. #12인의 작가 작품 전시 이동희 소설가-흙의 소리2, 박화배 시인-눈 내리는 날 저녁에는, 김학진 소설가-울력터, 박희선-가을 밤비, 정삼일 시인-갈대, 정원식 시인-진딧물, 송하섭 수필가-어쩌다 여든, 이국수 시인-해넘이, 민영이 소설가-종소리, 우명환 시조시인-거위 예찬, 김용호 작고시인-주막에서, 김규동 작고시인-쌀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류승규 유품 사진전 류승규(1927~1993)소설가는 1958년 <자유문학> 지에 이무영 선생에게 추천 받아 많은 농민 농촌 제재 소설을 써온 충북 옥천 출신의 작가로 제1회 한국농민문학상 수상자이며 옥천 향리에 ‘류승규 선생 문학비’가 건립되어 있다. 또한 류승규를 기리기 위해 한국농민문학회가 제정한 문학상으로 ‘류승규 문학상’ 있으며, 옥천군에서 열리는 류승규 문학제에서 시상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농민문학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류승규 선생의 살아생전 집필한 저서와 자료가 공개된다. #소설과 영화소설 그리고 농촌 제재 소설을 다수 창작한 이무영(1908~1960)소설가를 비롯하여 28인의 여러 문학 작품이 전시된다. 소설, 시, 수필, 문예잡지, 영화소설 그리고 유고작까지 농민문학의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영화소설 아리랑’은 나운규 영화<아리랑>의 변사 대사를 옮긴 것이다. 스스로 ‘農村悲史’라고 하여 1920년대 조선의 농촌 현실을 영화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농민문학기념관’은 작가 이동희 선생이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무영, 류승규, 오유권, 박경수를 비롯한 농민소설가와 김용호, 구상, 권웅, 엄한정, 등 향토적 시인의 생애와 작품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또한 농민문학 작가 작품 자료, 충북 영동 지역 작가 작품 자료, 작가 이동희의 문학과 삶을 일람할 수 있는 발표 작품 저서 원고 교정쇄 창작노트 취재답사 노트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남북한의 문학지와 동인지, 북한 작가 작품 자료 등도 소장하고 있다. 이동희 관장은 제1회 흙의 문학상(문공부), 제4회 흙의 문예상(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제29회 한국문학상(한국문인협회), 제1회 농촌문화상(농업협동조합 중앙회), 제11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제4회 한글문학상(한글문학회), 제33회 월탄문학상(월탄문학상 운영위원회), 제11회 단국문학상(단국문인회), 제1회 무영문학상(무영문학상 운영위원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문화관광부), 영동예술상(충북 영동 예총), 단군문화상(한민족운동단체연합), 펜문학상(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홍조근정 훈장(대한민국 정부), 한국민족문학상(한국민족문학회), 순수문학상 대상(월간 순수문학사), 민족평화상(민족평화축전 조직위원회), 제3회 아리랑상(한민족아리랑연합회)을 수상하였다. 저서 (소설) 창작집 『地下水』현대문학사, 장편소설 『하늘에 그린 그림』청자각, 장편소설 『이무기가 사는 마을 』일신서적, 중편소설집 『벼랑에 선 사람들』문암사, 장편소설 『펄 속으로 들어간 새』현대문예사, 창작집 『비어 있는 집』대광문화사, 창작집 『오늘 그리고 우리』(공저) 도서출판 청맥, 장편소설 『울고 가는 저 기러기』도서출판 청맥, 창작집 『매화골 사람들』도서출판 풀길, 장편소설 『赤과 藍』도서출판 풀길, 창작집 『핏들』일신서적, 창작집 『흙바람 속으로』도서출판 풀길, 1997년. 장편소설 『돌아온 사람들』도서출판 풀길, 장편소설 『땅과 흙』(전5권) 도서출판 빛샘, 장편소설 『단군의 나라』(전3권)도서출판 풀길, 장편소설 『서러운 땅 서러운 혼』1, 2. 도서출판 푸른사상, 창작집 『갈등을 넘어서』(공저) 도서출판 푸른사상, 장편소설 『죽음의 들판-노근리 아리랑』도서출판 풀길. (이상 18종 25권) (수필집) 『빈 들에서 부는 바람』도서출판 한글. (논문집) 『흙과 삶의 미학』단대출판부. (평론집) 『문학에의 초대』(공저) 단대출판부,『현대소설의 이해』(공저)문학사상사. <농민문학기념관>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2길 5-1 (우)29121 지번매곡면 노천리 622-3 홈 페이지-www.nongminmk.com 연락처-대표 043-743-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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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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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11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5> 그런 집념의 나날을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보냈다. 정말 꽃이 피는지 잎이 지는지 모르고 지냈다.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한 점과 같은 목표를 향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박연은 생원시에 급제를 하였고 다시 성균관의 유생으로 들어가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계속 학업을 닦기 시작하였다. 영동 향교 유생의 배움이 소학이라고 하였다면 성균관 유생의 배움은 대학이었다. 가르침도 달랐고 물음도 달랐다. 임금(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궁전 뜰에서 아부제악이 연주되고 관로의 출발을 축하받던 꿈과 같은 향연은 잠시고 다시 진사과에 과거 시험을 치뤄야 했다. 하루 속히 급제를 하여야 했다. 욕심이 아니고 이땅의 대장부로서-언젠가부터 그는 그 크고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다-마땅히 가져야 할 욕망이었다. 부모님과 조상님 그리고 스승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집에서 이틀밤도 자지 못하고 돌아와 성균관에 입학, 엄격한 거재居齋생활을 하였다. 유생들은 생원 진사들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선비들이었다. 교육내용은 향교에서 배운 것의 연장으로 유학儒學의 경서와 한학漢學이었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주역 춘추 예기가 그 중심이 되어 있었고 교육방법은 교수의 전체적인 강의보다도 개별적 지도에 치중하였다. 각 유생이 전날 공부한 바를 토대로 하여 학관學官(교수)의 질의에 응답하게 하고 이것이 고사考查였다. 그 결과가 만족할 경우에 다음 진도를 나갔다. 다시 말하지만 교수의 강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익히고 터득한 자학自學에 의하여 얻은 지식을 문답식 고사를 통하여 성적을 발휘하고 평가하였던 것이고 개개인의 성적을 표준삼아 진도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독서에 의한 강학講學과 제술製述을 중요한 학과목으로 삼았다. 읽고 배운 바를 활용케 하고 문장을 다듬어 생각한 바를 정확히 발표하는 작문의 능력을 연마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시를 짓고 논문을 써서 발표하였다. 그것이 교과였으며 고사였다. 제술은 매월 3회 부과하였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학관들이 명륜당에 나와 앉으면 유생들이 예를 갖추겠다는 뜻을 아뢴다. 둥- 그 때 북소리가 울린다. 한 번 숙연하게. 북소리에 맞추어 유생들이 뜰에서 차례로 들어와 학관을 향해 읍례揖禮를 한다. 그런 뒤 유생들은 각각 재齋 앞에 모여 서로 마주 보고 읍한다. 매일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것이다. 다음으로 유생들이 앞으로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고 학관은 상하의 재에서 각각 한 명을 뽑아 배운 것을 외게 한다. 일강에 통한 자는 초록해 두었다가 세말에 1년의 분수를 통고하여 식년문과式年文科의 강경講經점수에 가산해 주도록 하며 불통한 자에게는 종아리를 때리는 벌을 가한다. 초달楚撻이다. 편달鞭撻과는 조금 뜻이 다르다. 둥- 둥- 이윽고 북이 두 번 울리면 유생들이 책을 가지고 선생 앞으로 나가 수업을 받는다. 땡땡땡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치는 것이 아니라 북소리를 울리는 것이다. 교수는 먼저 어제 배운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한 뒤에 오늘 수업에 들어간다. "많이 배우기를 힘쓰지 말고 깊고 넓게 탐구하고 연정硏精에 힘쓰도록.” 박연은 초달 대신 늘 그런 지적을 받았다. 다음 진도를 나가기를 원하였지만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 않고 뒤로만 갔다. 그것이 불만인 것을 선생은 표정만으로 잘 알고 말하는 것이다. "시詩와 부賦로도 나타내 보고. 정이 있어야 하고 흥이 들어야 돼.” "명심하겠습니다.” 학관은 새 진도로 시경에 대하여 설명하고 발문하였다.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이다. 황하강 중류 중원 지방의 시로서 주周나라 초부터 춘추春秋 시대 초까지의 시 305편을 수록하고 있다. 본디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311편으로 간추려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고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이다. 시경은 풍風 아雅 송頌 세 가지 내용으로 분류된다. 풍은 여러 나라의 민요로 주로 남녀간의 정과 이별을 다룬 내용이 많다. 아雅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儀式歌이며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는 악시樂詩이다. 아는 무엇이며 의식의 노래란 또 무엇인가. 아악雅樂에 대하여 박연이 제술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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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 ‘한글이 세상을 바꾸다’ 展이무성 화백의 "한글이 세상을 바꾸다” 전시회가 11월16일부터 12월 11일까지 상암동 YTN사옥 2층에서 열린다. 올해는 한글이 1443년에 창제된 지 477돌이며, 1446년에 반포된 지 574돌이다. 더욱이 한글 해설서로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에 발견된 지 8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한글 창제 28사건’, ‘한글을 지키고 가꾼 28사건’, ‘한글을 지키고 빛낸 여성 19인’을 선정, 글과 그림이 있는 전시회이다. 글에는 김슬옹(세종국어문화원 원장)이 맡았고, 이무성(한국화가)화백이 전 사화(史畵)를 맡았다. 한편 이무성 화백은 현재 본보에 연재중인 장편소설 흙의 소리 삽화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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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br> ‘박진주’의 아리랑 사연1941년 미국에서 ‘동서협회’를 조직하여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출판하는데 도움을 주고 "한국을 알자―2500만의 잊힌 친구”라는 주제의 강연회도 열었다. 그리고 이 행사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실상과 아리랑이란 노래의 가치를 이미 알고 있는 그 여인의 이름은 펄 사이든스트리커 벅(Pearl Sydenstricker Buck), 중국어 이름 싸이전주(賽珍珠)이다. 1930년 중국에서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 ‘동풍서풍’을 발행하고, 1931년 빈농부터 대 지주가 된 인물을 그린 작품 ‘대지’를 출판하였다. 1938년 미국의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해방을 맞은 한국을 찾아왔고, 이어서 1968년 까지 10차례나 방문했다. 한국전쟁 발발 해인 1950년에는 ‘한국에서 온 두 처녀’라는 작품을, 1963년에는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라는 작품을, 1968년에는 ‘새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해에 서울시가 이 여인에게 명예 서울시민증을 수여했다. 이 때 스스로의 한국어 이름을 제시했다. 바로 박진주(朴珍珠)이다. ‘Pearl’의 번역이 이름 ‘진주’로, ‘Buck’이 성씨 ‘박’이 되었다. 이 여인을 우리는 ‘펄벅 여사’라고 불러 온다. 1892년 미국에서 태어나 선교사인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하여 40여 년을 살았다. 이 때의 중국 체험을 소설화한 작품이 ‘대지’이다. 이 작품으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 부천에서 10여년을 살기도 했다. 이때 양반가 3대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를 썼다. 그리고 1973년 80세로 생을 마쳤다. 펄벅여사는 마지막 생을 산 한국을 중국보다 더 사랑했다. 그 사랑의 증거는 "한국은 고상한 국민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라는 헌사와 그 책 표지에 아리랑 대표사설과 후렴을 한글 반 궁체(宮體)로 담아 표현한 것이다. 1963년 영문학자 장왕록(張旺祿)의 번역으로 동시 발간되었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한국 외교관 100명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은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표지화로 담긴 아리랑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있을까? 1960년 가을 어느 날의 당시 국빈 예우로 공보처의 안내로 경주를 거쳐 안동 양반가를 취재하러 가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 무렵 안동을 들어서는 도로에서 소 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와 조우하게 되었다. 펄벅은 비포장의 차 먼지를 일지 않게 하기 위해 천천히 몰게 했다. 그리고 달구지의 속도로 가며 내다보았다. 소 고삐를 잡은 노인은 지게를 진채였고, 지게 위에는 볏집 한단과 잡동산이들이 담겨있었다. 빈 달구지이니 그 지게를 싣고 자신도 타고 갈만한데도 짐을 지고 가는 것이었다. ‘아, 하루 종일 밭에서 일을 하고 가는 소를 배려한 것이구나!’ 제 짐을 지고 소와 함께 가는 평화로운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농부는 소에게 들려 주는듯한 나직한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이아닌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바로 ‘아리랑’이었다. 펄벅은 이 때의 감동을 당시 한국예술원의 한 원로 시인에게 전했다. "일시 말라 흔들리지만 한파를 견뎌내고 봄이 되면 되살아나는 갈대처럼 한국인들은 시련을 딛고 일어날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임을 알고 있다” 취재 후기를 남겨 전해 오는 사연이다. 며칠 전 한 신문에 펄벅 여사의 친필 서명본이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표지와 서명을 보고 문득 여사의 아리랑 사연을 떠 올렸다. 어쩌면 여사는 어떤 이에게 이 책 하얀 내지에 서명을 하며 아리랑 사연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활달하면서도 정겨운 박진주 여사의 필체에서 ‘아~리~랑 아~리~랑~’만년필 사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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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희귀 음반과 서명본 도서 발굴, 공개두 가지 아리랑 자료가 발굴, 공개되었다. 아리랑 사연을 표지에 담고 있는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저자 서명본과 SP 음반 와타나베 하마코 노래 ‘우지마라 아리랑처녀’이다. 국악애호가 정창관(금년 화관문화 훈장 서훈자)선생이 본지에 공개한 두 자료는 최근 해외에서 입수한 것으로 ‘친필 서명본과 음원은 국내 최초 공개이다.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는 원제가 ‘The Living Reed’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Pearl S. Buck(1892~1973)의 한국 소재 장편소설이다. 국내에서는 1963년 장왕록(張旺祿) 번역으로 동시 발간되었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한국 외교관 100명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표지화(表紙畵)에 한글 반 궁체(宮體) 본조아리랑 대표사설이 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아리랑 자료로 수집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 공개 된 책에는 저자의 서명이 내지 첫 면에 들어 있다. 펄벅 여사의 성품이 들어나는 필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이다. 음반은 1952년 일본 Victor사가 발매한 유행가 '우지마라 아리랑처녀' SP음반이다. 노래는 와타나베 하마코, 반주는 빅터오케스트라이다. 와타나베 하마코는 이미 아리랑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1935년 최초의 일본 창작 아리랑인 ‘아리랑 야곡’을 부른 가수이기 때문이다. 이 번 공개되는 음반에 대해 정창관 선생은 "이미 일본 국회도서관 목록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고 추적 중이었다. 10여년만에 입수하여 음원을 듣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하여 희귀 음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음반의 가치는 최초 공개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곡명과 발매 시점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즉, 1952년은 한국전쟁 중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은 처참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이 때 옆 나라 일본이 '우지마라 아리랑처녀'라는 곡명의 노래를 발매한 것이다. 얼핏 보면 한국의 현실을 ‘아리랑이 울고 있다’라고 하며 이를 달래주는 듯하지만, 실상은 ‘불쌍하고 처량하니 아리랑이나 들어라’라거나, ‘우리 일본이 옆 나라 처녀들을 아리랑으로 달재주자’는 비아냥으로 해석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들에게도 비교 우위적인 우월감을 갖게 하여 상품성도 있었을 것으로 보게 한다. 결국 아리랑은 우리 못지않게 일본이 의미화 하며 상업적으로 상품화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그것도 미묘한 정서를 담아서. 이런 측면에서 이 음반은 단순한 아리랑 음원 자료 하나가 아니라 한일관계사를 담고 있는 외교사료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와타나베 하마코의 ‘아리랑 야곡’과 ‘우지마라 아리랑처녀’ 음원은 정창관의 유튜브 아리랑 채널, 일본아리랑에서 감상할 수 있다. 현재 정창관 선생은 본지 ‘정창관의 신보유람’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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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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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10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4> 박연은 아버지 어머니의 묘소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집을 떠나고 그동안 참배하지 못하게 됨을 고하고 가서 잘 되어 돌아오게 음우陰佑해 달라는 청을 드리는 것이었다. 물론 자식이 잘 되어야 부모에게 덕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기가 좋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죄를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많은 해찰을 하였습니다. 이제야 깨닫고 떠나려 합니다.” 박연은 한동안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하직 인사를 하고 거기서도 피리를 한 가락 불어 아들의 애틋한 마음을 바치었다. 반 나절이 지나 마곡리 산소를 내려오는 대로 길동 향교의 명륜당으로 갔다. 글을 배우러 온 차림이 아니라는 것을 유생들이 금방 알아차리고 모두들 놀라는 빛이었다. 훈장 선생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강론을 멈추었다. "진작 말씀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오늘 한양으로 떠나려 합니다.” 박연은 그리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하는 것이었다. 유생들도 모두 일어나 술렁대었다. "잘 생각했네.” 말을 안 해도 박연의 뜻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고 왜 그러는지도 알았다. 늘 진중하고 매사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겸손하고 함부로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그의 뜻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아무 객소리 없이 장도를 빌었다. "자네가 본이 되어 모두들 분발할걸세.” "책임이 무겁습니다.” "그래야지.” 빨리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라는 것이다. 유생들도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축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가 담긴 시선으로 정든 유생들을 바라보며 허리가 다 꺾어지도록 굽혀서 하직 인사를 하였다. 서로 허리를 있는대로 굽혀서 맞절을 하였다. 나중에 악성樂聖으로 돌아올 줄을 예견하여서인가. 엄숙하고 정연하고 그야말로 예를 다한 정경이었다. 박연은 다시 허리춤에서 피리를 꺼내었다. 고맙고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동안 닦은 기량을 다 발휘함으로 답례를 하려는 것이다. 높고 깊고 넓고 큰 가르침과 배움의 은덕을 다른 무엇으로도 보답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때보다도 그의 소리는 힘이 있고 부드러우며 간드러지고 그러면서 미묘하게 가슴을 흔드는 것이었다. 신명이 나면서 눈물이 나고 간절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모두들 축축한 눈으로 말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수 대신 눈물을 흘리었다. "어서 가시게.” 목이 가라앉은 훈장의 얘기를 듣고야 박연은 밖으로 나왔고 향교 마당 끝 홍살문 앞에서 다시 큰절을 하고야 신들메를 고쳐 매며 길을 재촉하였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굶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양 길은 멀고도 험하였다. 힘들고 막막할 때도 그는 피리를 꺼내어 불었다. 피리는 그의 심지이며 의지이고 꿈이었다. 풀피리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문사文詞가 울연蔚然히 성장했고 개연慨然히 예악에 뜻이 있어 널리 전해오는 문적文籍을 구했으며 의칙儀則을 강론하고 토구討究하였다. 더욱 종율鍾律에 정통해서 어릴 적부터 항상 앉으나 누우나 가슴 속에 악기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고 입술로는 곡조에 맞추어 휘파람을 불었으니 대개 스스로 체득한 묘방妙方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 때의 학자로 음악이론에 일가를 이루었던 담설 홍계희洪啟禧(1703~1771)는 난계 시장諡狀에 그렇게 썼다. 한 마디로 박연은 예악에 신명을 다 바치었던 것이다. 한양이 초행은 아니었다. 옛날 기억을 되살려 머물던 객사에 다시 투숙을 하였고 그 때 듣던 피리 소리가 들리었다. 다른 악기들 연주하는 소리도 들리었고. 그로부터 몇 해만인가. 그런데 그 장악원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전과 같지 않았다. 더 간절하게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만스럽고 시원찮게 들리기도 하였다. 그의 기량이 발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루 이틀 후에는 거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좋게 좋게 생각하였다. 과거 시험 채비를 해야 했다. 경서를 읽고 외고 쓰고 시를 지으며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잠도 옳게 자지 않았다.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문밖 출입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경서와 역사서의 문답이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 묻고 대답하였다. 그의 공부방법은 책문策問과 대책이었다. 그 자신이 시험관 판관이 되어 묻고 그것을 또 자신이 당사자가 되어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정의에 입각해서 대범하게 늠름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선 말이 되어야 했다. 그것도 현실문제를 가지고 입론立論을 하였다. 노비 사여私與 사수私受 문제, 육조六曹의 분직分職 문제, 충청 경상 전라 삼도전三道田 개량 문제 그리고 신문고 설치, 한양 천도遷都 등 당시 현안들에 대해서 명쾌하게 논리를 세워 말하는 것이다. 논리가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러 절기가 바뀌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눈이 짓무르고 귀가 멍먹하고 목이 쉬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내 무릎 앞에서와 부모님 묘 앞에서 그리고 스승과 유생들 앞에서 혼신을 다해 불던 자신의 피리 소리만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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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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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9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3> 아내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왜 이러고만 있느냐고 말하지 못한 것이고 그런 내색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어떻다고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분들만 위하고 명분에만 매달려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고 답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도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장독대의 천룡신에게 정화수를 떠다 놓고 빌 뿐이었다. 새벽마다 우물에서 찬물을 길어 떠다 놓고 어떨 때는 몇 번 물을 길어올 때마다 새 물을 갈아 놓았다. 밤늦게까지 서서 간절히 빌었다. 남편의 눈에는 한 번도 띄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 피리 소리 퉁소 소리가 들릴 때도 송씨는 천룡신에게 부엌의 조왕신에게 아니 집안의 모든 신에게 산신 천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그 효험이라고 할까 남편 스스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겠다고 하는 얘길 듣고 황공하여 감동의 눈물이 쏟아지고 흐느껴지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어느 것이 앞섰는지 모르지만 성적인 만족감을 소나기처럼 흥건히 느끼면서 마구 흐느껴지는 것이었다. 모처럼 다 흐트러진 내외의 야단스런 모양이 황홀하게 감읍되어진 것이었다. 수줍음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었다. 아니 뭐라고 표현되어도 좋지만 두 사람은 한 몸 한 덩어리가 되고 불덩이가 되었던 것이다. 날이 희붐하여서야 두 사람은 서로 떨어졌고 남편은 금방 코를 골았다. 아내는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았고 해방감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빼어 밖으로 나왔다. 달이 다 지고 뿌옇게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미명 속이지만 송씨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살금살금 장독대로 가서 천룡신에게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다. 중얼중얼 진언을 하면서. 남편의 과거 길이 순탄하고 빛이 밝게 비치길 빌고 몸 건강하고 무사 안녕하길 축수하였다. 날이 밝아지자 샘으로 물을 길러 갔다. 일어난 김에 잠자리로 다시 가지 않고 쌀을 씻어 안치고 잡아온 물고기 말려두었던 것을 찾아 비늘을 떨고 석쇠에 구울 차비를 하였다. 산나물 묵나물 말린 것도 찾아 손질을 하고 된장에 고추장을 풀어 뚝배기에 앉혔다.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그녀는 밥상부터 더욱 정성스럽게 차리고 싶었던 것이다. 박연도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무언가 분주히 왔다 갔다 하다가 큰기침을 몇 번 하며 아침상 앞에 앉는 것이었다. 의젓한 그 기침 소리는 어젯밤의 모든 일을 휘감아버리는 듯하였다. 아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상 앞에 앉고 약속대로 밥그릇을 방바닥에 놓지 않고 손에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박연이 말하였다. "말이 난 김에 바로 한양으로 떠나려 하오. 여기 일은 당신에게 다 맡기고 가니 잘 부탁하오.” "아니 왜 갑자기 그러세유?” 아내는 어제저녁과 같은 말을 하며 안절부절 하였다. "갑자기가 아니고 많이 늦었소. 남아이십미평국이면 어떻고 하였는데 내 나이가 지금 몇이오?” 스물일곱 여덟, 서른에 가까웠다. "차비는 아침에 다 하였소. 짚신도 한 죽 얻어다 놨고, 향교에 가서 인사를 하고 바로 갈 터이니 이웃과 집안에는 당신이 잘 말해 주시오.” 그런 얘길 하느라고 밥숟가락은 들지도 못하였다. 송씨는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너무 대견스러운 남편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정말 갑작스럽게 남편이 하늘같이 우러러 보이고 자신이 한없이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자꾸 흘러내려 부엌으로 나왔다. 얼굴을 닦고 숭늉을 끓여가지고 다시 들어왔다. 그런데 또 남편은 밥을 먹고 있는 대신 이상한 몸짓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진지를 안 드시고 뭘 하시는 기라유?” 숭늉 그릇을 남편의 밥상에 올려놓으며 놀라서 물었다. "어서 그리로 앉기나 하시오.” "예?” "내가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소. 그동안 이리저리 닦은 내 소리를 들려주리다. 당신에게 주는 내 마음이오.” 너무 의외의 해괴한 말을 듣고 송씨는 어리둥절하다가 다시 눈물은 펑펑 쏟았다. 그러면서 분별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잘 알았으닝께 진지부터 드시고 하세유.” "아니요. 그러면 맥이 빠질 것 같소. 내가 조금 있다 당신의 정성을 다 먹으리다. 자 그럼…” 더욱 황공한 송씨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다. 이윽고 박연은 그동안 쌓은 실력을 있는 대로 다 발휘한 소리를 가다듬어 피리를 부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희한한 피리 소리는 해도 멎고 바람도 멈추는 신기한 음률이었다. 온갖 새들도 뜰로 날아와 짹짹짹짹 반주를 해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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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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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8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2> "왜 다른 사람 다 듣게 그래유. 어서 들어가세유.” 아내는 남편을 부축하여 마루로 방으로 끌어들이며 오히려 송구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억지로 방에 들어서자 또 저녁상의 상보를 벗기어 그의 앞에 밀어놓고 부엌으로 나가 뚝배기 토장을 데워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박연은 아무 소리 못하고 밥상 앞에 앉았다. 책걸이를 하느라고 술도 먹고 떡도 먹고 이것 저것 입을 다셔 밥생각이 없었지만 아내의 성의를 생각하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고 숟갈을 들어야 했다. "같이 들어요.” "예 알았어유.” 아내는 겸상에 마주 앉긴 했지만 밥그릇은 방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숭늉을 가지고 와 상 위에 올려놓고야 술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늘 있는 일이었던 것이지만 이날따라 너무 미안하고 안쓰럽게 생각이 되었다.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밥을 상 위에 올려놓으시오.” "아니 오늘 갑자기 왜 그러세유.” 아내는 몸 둘 바를 모르며 남편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어서 내 말을 들으시오.” 그는 이번에는 아주 근엄하게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아내는 밥그릇을 상 위로 올려 놓긴 하였지만 술을 뜨지는 않았다. "어서 드시오. 정말 나라는 사람은 나밖에 모르고 산 것 같소. 수신만 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소. 용서하시오.” 그러며 다시 눈물을 보이고 사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술을 뜰 때까지 강권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남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며 뼈 있는 말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시키는 대로 할 터이니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말고 미안해 하지 말고 늘 하던 대로 하라고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사정을 하고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의 말이 너무도 고맙고 갸륵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아내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아내에게 다시 한 번 진 것 같았다. 같은 것이 아니고 정말 그랬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는 다시 아녀자에게 지면 되느냐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내 대장부가 소소한 일에 얽매이면 쓰느냐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근심하지 아니하고 미혹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용기 말이다. 항상 되뇌이고 있는 어록이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仁)에 살고 천하에서 가장 바른 자리(義)에 올라 앉으며 세상에서 가장 큰 길(道)을 걷는다. 인의의 길이다. 남이 알아서 써 주면 백성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도 그의 뜻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뜻을 움직이지 못하며 총칼도 그의 뜻을 굴복시키지 못한다. 맹자의 대장부상像이다. 박연은 아내의 간절한 눈빛에서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늦은 저녁상은 한없이 길어졌다. 그는 뒤란에 묻어 두었던 호리병을 파내어 가지고 들어와 두 사람의 밥그릇에 따루었다. 봄에 진달래 꽃잎으로 담은 술이었다. 아내는 세숫대야를 들고 와서 손을 씻으라고 하고 수건도 대령하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 술도 예쁜 잔에 따루어져 있었다. "햐 참, 당신!” "술은 술잔에 드셔야지유.” "그러게 말이오.” 아까와는 달리 파안대소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아내에게도 따루어 주었다. 아내도 얌전히 잔을 받고 반배를 하였다. 나누지 못했던 합환주合歡酒였다. 효도다 시묘다 늘 근엄하기만 했다. 가을 밤 환한 달빛이 들창으로 넘어 들어왔다. 그는 혀가 말을 듣지 않는 대로 일생일대 중대한 발표를 하였다. "그동안 닦아온 학문을 이제 시험을 한번 해 보리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지만 용기를 내 보겠오. 떨어지더라도 너무 실망은 하지 마시오. 계속 도전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께 말이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아내가 울고 있었다. 너무 황공하였던 것이다. 슬퍼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너무 기뻐서 그런다고 하였다. 그날 밤 합환은 거칠고 끝이 없었다. 깊은 가을밤은 달이 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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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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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7흙의 소리 이 동 희 빈 터 <1> 관로의 길로 들어서는 과거의 최초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생원시生員試는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의 제목으로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시험하였다. 그리고 합격자에게 생원이라는 일종의 학위를 수여하는 것이었다. 진사시進士試는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문예 창작의 재능을 시험하는 것으로 3년에 한 차례씩 치러졌고 국왕의 즉위와 같은 큰 경사 때 별시別試가 있었다. 박연은 6년 뒤에 있었던 진사시에 다시 급제를 하게 된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집에 내려와서야 아내를 의식하게 되었다. 미안하고 송구하고 죄를 지은 것 같아 볼 면목이 없었다. 징역살이를 시킨 것이었다. 젊은 아내에게 그보다 더한 고통을 준 것이었다. 여산 송씨 판서를 지낸 송빈의 금지옥엽 같은 딸로 예의 바르고 심성이 고왔다. 신혼에 여막에서 6년을 지내도록 말 한마디 않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오.” 1년 2년도 아니고 독수공방을 하고 있는 아내가 너무 애처러워 말하면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고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유?” "듣기는 누가 있어 듣는다고 그래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어유.” 너무나 사리가 분명했다. 아내와 같이 거처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방사라고 할까 전혀 관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이 다 아는 효자를 집 사람이 모를 리 없지유.” "한 번 안아만 주고 가리다.” 빈말이라도 한 마디 할라치면 오히려 어른스럽게 절도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지신명이 내려다 보고 있어유.” "내가 당신에게 졌소.” "아녀자에게 지면 안 되지유.” 아내는 그러며 산에 갈 차비를 차려 주는 것이었다. 시묘는 남편이 하였지만 그 뒷바라지는 아내가 다 하였던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후에도 좌정을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였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피리를 불고 퉁소를 불며 슬픔을 달랬다. 향교에 갔다가도 바로 돌아오지 않고 산바람 강바람을 쏘이고 다녔다. 퉁소 바위에 앉아 지푸내(심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옥계玉溪폭포 아래서 하염없이 물소리를 듣고 있기도 하였다.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하였다. 너무나도 컸던 애통과 아쉬움이 도무지 가셔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소리를 다듬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밤늦도록 강을 바라보고 조신스럽게 퉁소를 불며 부모란 무엇이며 자식이란 무엇이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벼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인가, 혼자 묻고 생각하였다. 천문 지리보다 어렵고 노 젓고 짐 지는 것보다 힘들었다. 답이 찾아지지 않고 자꾸만 의문이 쌓이었다. 소리란 무엇이며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냐 즐거움이란 무엇이며 예술이란 또 무엇인가, 조금은 알듯도 하고 점점 모르겠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 아래서 득음得音이라도 하려는 듯이 목청껏 피리를 불었다. 소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마구 퍼대고 앉아 울기도 하였다. 실성을 한 듯 껄껄거리며 웃어대기도 하였다. 그가 생각해도 괜찮은 소리가 될 때는 혼자 무릎을 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리가 됐는지 어쨌는지 사실 그로서는 그 경지를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괜찮다고 좋다고 대단하다고 하는 얘기에 귀가 얇아지기도 하고 차츰 나름대로 느낌을 갖게도 되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향교의 명륜당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는 서생이었다. 아주 모범생이었다. 시문을 짓는 사장학詞章學이나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소학과 사서오경 그리고 여러 역사서들을 꿰뚫었고 가례는 몸소 실천해 보였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러나 집에서는 아내에게만은 믿음을 주지 못하였다. 철이 들지 못한 모습이라고 할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명륜당에서 심경心經(송나라 때 진덕수陳德秀가 시경 서경 등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편집한 책)의 책거리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술이 거나하였다. 밤이 늦은 시각에 갈지자걸음으로 집 앞에 당도하였을 때 아내가 사립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늘 밤늦을 때마다 이렇게 한없이 서서 기다리다 맞이해 주었던 것 같다. "미안해요. 정말 너무 잘못했소.” 그는 아내를 와락 끌어안으며 울컥하였다. "왜 이러세유. 어서 들어가셔유.” "내가 수신修身만 하고 제가齊家는 못 하였소.”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계속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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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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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6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 <5> "히야아 참 별천지네!”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믿어지지가 않아 입이 딱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음률이나 음악에 대한 사무가 무엇이며 그것을 나라 관아에서 맡아 해야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에게 물어보기 전에 생각해 보았다.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아직 어리고 시골 강촌에 살고 있는 하동 산골짜기 소년에 불과하지만 알 것은 다 알고 또 궁금한 것은 한 없이 많았다. 또래 중에서도 의문이 생기면 매사 그냥 지나치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없는 그로서는 항상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고 다짐했고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웬 놈이냐?” 사무를 보고 있는 중년의 아전이 다가왔다. 몽둥이를 차고 있었다. 도무지 두리번두리번 실내를 살펴보는 것이 수상하고 유난하였던 것이다. 좌판 같은 데다가 많은 악기를 진열해 놓았고 벽에는 여러 가지 그림과 설명이 담긴 걸개와 편액들이 걸려져 있었다. 소년은 그 양쪽을 번갈아 보며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들어오는데도 어거지 떼를 썼던 것이다. "시골 촌놈이올시다.” "뭐가 어째?” "여기가 뭘 하는 곳이랑가요?” 너무 태연하고 순진한 소년의 얼굴 청아한 눈빛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아전은 씩 웃으며 표정을 바꾸고 천천히 얘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여기는 음악의 교육과 연주활동을 관장하던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여러 관리들과 교육생들이 있는 관서였다. 뒤에 안 일이지만 장악원에는 음악 교육을 담당한 전악典樂(정6품) 전율典律(정7품) 전음典音 전성典聲 등 관리와 악사樂師 그리고 여러 명의 악공樂工 악생樂生을 두었던 것이다. 음악 활동은 주로 악공과 악생들이 담당하였다. 예조禮曹에 소속되어 있어 제례 연회 등에서 음악 연주 활동을 하였다. 가령 종묘 제례는 속부제악俗部祭樂을 그리고 사직 제례는 아부제악雅部祭樂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문무백관과 조회할 때, 국왕과 왕비의 생일, 문무과의 전시殿試와 생원 진사과의 급제 발표 등에서 전정고취殿庭鼓吹를 연주하였다. 상상만 해도 휘황한 궁중 음악들이었다. "참 대단 뻑쩍합니다.” 시골 촌마을 소년의 머리속에 다 들어갈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그러나 찬란하게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너무나 가슴이 벅차고 뭔가 철철 넘치는 기류가 곤두박질치며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있는데 은은히 울려 퍼지는 음률이 제압하고 있었다. 어젯밤 듣던 소리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던 가락이었다. 악사가 불고 있는 피리 소리였다. 그가 다시 듣고 싶은 간절한 소리임을 알고 있었던가. "아아……” 그립고 아쉽고 아련한 가락이었다. 계속 그 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 피리 소리는 그날 그의 가슴에 붉게 인쳐진 것이다. 운명의 소리였다. 그때 그 순간부터 피리를 불 때 그냥 불지 않았다. 피리든 퉁소든 거문고든 가장 곱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하여 아니 최상의 가락과 음률을 뽑아내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의 노력을 다 하였던 것이고 그것을 하루 이틀 조금씩 조금씩 다듬어갔던 것이다. 천성이 손톱만치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긴 했지만 그 도가 달라졌다. 키도 훌쩍 크고 어른스러워졌다. 끈기는 더 대단해졌다. 그냥 그저 남다른 소리를 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풀이면 풀 나무면 나무에 혼신의 힘을 다 불어넣었던 것이다. 어쨌든 근동에서 알아주는 재동이었다. 모두들 그의 소리에 감동을 하고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였다. 한두 번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퉁소바위가 있다. 고당리 마을 앞을 흐르는 고당개 조금 아래쪽 산 옆 강 속에 있는 길쭉한 바위를 그렇게 부른다. 모양이 퉁소 같아서가 아니고 박연이 퉁소를 불던 바위였다. 그가 피리를 불고 퉁소를 불면 산천초목이 다 반응하고 춤을 추었다. 앞에서도 얘기하였지만. 음악의 힘이었다. 장악원에서 어린 촌뜨기의 뇌리에 박힌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전정고취였다. 찬연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째던가. 28세가 되던 태종 5년(1405)에 생원과에 급제하였고 국왕과 문무백관이 보는 궁전 뜰에서 아부제악이 연주되었다. 그때 대낮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정정-<피리소리4> 내용 중 박흥생이 박연의 4촌 동생이라고 하였는데 4촌 형임, 영동군 심천면 면지편찬위원장 이규삼 선생이 연재소설을 읽고 연락하여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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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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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5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4> 호랑이 설화는 하늘과 땅을 감동시킨 이야기들이다. 박연의 효행은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없이 그가 25세 때 태종(2년, 1402년)의 명命으로 정려를 받은 이름난 효자였다. 효자 집안이었다. 4촌 동생인 국당菊堂 박흥생朴興生 이요당二樂堂 박흥거朴興居와 함께 박연의 효자각이 심천 고당리에 세워져 있다. 삼효각三孝閣이다. 박연은 조상들의 가르침대로 행하였지만 향교에 나가며 가례家禮를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 가례에 대한 주자朱子의 학설을 모아서 편찬한 것으로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 특히 관혼상제에 대하여 세세하게 기록해 놓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정통을 삼았고 무엇보다 예학禮學을 중시하여 온 사림들은 물론 모든 선비들의 실천 덕목이었다. 선비들뿐 아니라 꿈을 가진 이 땅의 젊은이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기본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끝이 없고 한이 없는 것이 효이며 성이었다. 어머니 경주김씨의 3년 상을 여막에서 보내고 다시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3년 더 하였던 효성은 호랑이의 심성도 움직인 것이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박연은 천성이 곧고 바르며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한 치도 건너 뛰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그의 성정이었다. 아홉 마리 소의 한 터럭만큼도 거짓된 마음을 갖지 않으며 마음에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거리낌이 있으면 되돌아보고 되물어보고 되짚어보고 하였다. 집안 어른들 마을의 어른들에게 물어보고 향교의 훈장이나 서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누구에게 물어보기 전에 스스로 터득하였고 하는 일마다 그르침이 없었다. 적어도 유소년기 그의 언행은 그랬다. 도무지 아이 같지 않았다. 그것이 마냥 장점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줄곧 그런 삶은 지속되었다. 효행은 그중의 하나였다. 충신어효자지문忠臣於孝子之門, 충신은 효도하는 집안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생원生員으로 급제하여 문과에 초임되어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의 관직에 있는 동안 그가 충신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직하고 성실하게 임하였고 거기에 열정을 다 쏟아부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다. 생을 바치었다. 그러나 호랑이를 움직인 것은 그의 효행이나 충직하고 열정적인 그 어떤 것만은 아니었다. 신묘한 경지에 도달한 음악적 소양이라고 할까, 천부의 재능이 발휘되어서인가, 그의 손놀림과 입바람을 타고 물무늬처럼 영롱하게 울려 퍼지는 가락은 하늘과 땅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청솔가지를 흔들며 새들이 다투어 노래 부르고 짐승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음악의 감화력은 금수에까지 미치었던 것이다. 선인들이 음악으로써 백성의 정서를 순화함을 정치의 요체로 삼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고 박연의 일생일대의 사명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만 그 이야기는 다시 하기로 하고, 피리 소리의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 보자. 소년 시절이었다. 무슨 일로였던지 한양에 며칠 동안 다녀온 적이 있었다. 세 살 때 떠난 아버지 대신 담대하고 늠름한 소년 박연이 며칠 동안을 여관에 머물러 있으면서 객수客愁에 젖어 있을 때였다. 깊은 밤 어디선가 아련한 가락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필닐니리…… 필닐닐 필닐니리…… 멀리서 아련히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그리운 소리, 간장을 녹이는 가냘픈 피리 소리였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던 소년은 왠지 슬픔에 젖기도 하고 한없는 아쉬움에 휩싸이기도 하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리 소리가 끊어진 다음에도 계속되는 여운을 느끼었다. 뜻밖의 난데없는 피리 소리의 간절한 여운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곡은 처음 들어보았다. 애절하고 간절하고 그리움과 아쉬움에 부대끼게 하고 도무지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메어질 것만 같았다. 이튿날 소년은 수소문하여 피리 소리가 났던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은 장악원掌樂院이었다고 한다. 전국의 음률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그런 곳이 다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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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장편소설] 흙의 소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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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4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3> 너무나 생생하였다. 비몽사몽간이었지만 도무지 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여막을 나와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고 산길을 허위허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눈꼽도 떼지 않았다. 흐트러져 있는 상투도 그렇고 의복도 제대로 차리지 않은 채였다. 산을 내려와서는 마구 달리기 시작하였다. 당재라면 2십리가 넘는 길이다. 옥천군 이원 동이면에 접한 지금의 길현리로 산 넘고 물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우선 강을 건너야 했다. 날근이 나루터에서 혼자 배를 탔다. 사공이 투덜거려 그가 노를 잡고 젓기 시작하였다. "배삯을 말하는 기 아니고…” "뭐라요? 그럼.” "원 꿈을 가지고, 사람 일도 아니고 말이여.” 마수걸이에 혼자 배를 띄우는 것에 대해 따지는 것이 아니고 꿈자리를 가지고 젊은이가 헐떡거리는 것이 답답하고 그것도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시묘살이를 끝도 없이 계속하고 있는 이름난 효자인데다가 사간원 홍문관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이조판서吏曹判書(사후 추증追贈) 박천석朴天錫의 귀동 아들이 아닌가. 삯이야 수곡으로 받으면 되지만 도무지 새벽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 박연은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딴 소리만 하였다. "빤히 바라보이는데 왜 이리 멀어요.” 그리고 노를 사공에게 쥐어주며 허리춤에 끼어 있던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새벽 강을 거슬러 간드러지게 울려 퍼지는 가락은 아련하게 수면 위를 춤추는 듯 안개 속을 가르고 있었다. 사공은 푸념 대신 한 곡조 더 신청을 하는 것이었다.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도 장단이 되었다. 박연은 배가 나루에 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개펄에 뛰어 내려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다시 뛰었다. 산속인가, 들판인가, 뛰면서 호랑이의 소재를 생각했다. 산 고개를 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재에 당도했을 때 과연 꿈이 아닌 사태가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나와 웅성대고 있었다. 맞았다. 호랑이를 앞에 두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녀석이 틀림없었다. 박연은 허겁지겁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 모두들 땀을 철철 흘리며 나서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아아니?” 도대체 누군데 남의 동네 일에 참견이냐고 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냐는 얘기였다. 사람들 중에는 효자로 이름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맞네 맞아.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여?” 박연은 아랑곳없이 호랑이의 목덜미를 쓸어안으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몇 년 부모님 시묘살이를 같이 한 녀석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한 채 눈물부터 나왔다. "아이고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여?” 방금 함정에서 끌어올렸다는 호랑이는 척 널부러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떠 봐. 얼른. 왜 이러고 있는 기라?” 난데없이 출현하여 낯선 젊은이가 하는 행동에 대하여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박연은 이제 호랑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으며 땅을 치고 있었다. 호랑이는 숨이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는 도리가 없는 현실을 인정하여야 했다. 슬픔이 복받치고 가슴이 꽉 메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라요?” 마을 사람들을 원망하다가 또 호랑이를 원망하다가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당장 그가 해야 될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박연은 제대로 차려 입지도 않은 옷깃을 여미고 정중한 어투로 인사를 하였다. 자신의 존재를 밝히며 아버지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를 대기도 하였다. 할아버지 박시용朴時庸은 성균관 직강直講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의 직에 있었고 작은 아버지 박천귀朴天貴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밀양박씨 그리고 복야공파僕射公派 집안 사람들도 있는 터여서 그를 알아보았다. 여기 누운 호랑이와의 관계도 소상히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호랑이를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엎드려 빌며 간절히 청하였다. 호랑이 고기 맛을 보겠다고 입을 다시던 군중들, 쓸개는 어떻게 하고 가죽은 어떻게 하고 장택을 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냐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고 하였지만 마을 어른들은 어허 으음 큰 기침을 하며 눈빛을 맞추었다. 그리고 박연의 효심과 짐승과의 감동적인 인연을 가상히 여겨 호랑이를 넘겨주기로 하였다. 양반고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의 입김이 세었다. 박연은 죽은 호랑이를 아버지 어머니 묘소로 둘러메고 와서 정성을 다해 묻어주었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고 훗날까지 문중에서 어머니 제삿날 호랑이 무덤에도 제사를 지내었다. 그리고 앞에서 얘기한 대로 박연의 묘 앞 왼쪽에 의호총을 써 놓아 함께 명계冥界를 지내고 있다. 피리 소리는 난계 국악제로 대신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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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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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흙의 소리 3흙의 소리 이 동 희 피리 소리<2> 민하는 호랑이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아랫말 안골에 쌍정문이 있는데 오촌梧村 박응훈朴應勳의 효자문 통덕랑通德郞 박수현朴守玄의 아내 선산김씨의 열녀문을 이른다. 효성이 지극한 오촌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근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병이 나 약을 지으려고 밤중에 길을 나서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상주와 선산 100여 리 길을 호위하였다. 등에 태워 단숨에 갔다 왔다고도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묘지를 알려주었고 묘를 쓸 때도 호랑이의 보호를 받았다. 이런 감동적인 일화를 현감과 선비들이 왕에게까지 상달하게 한 것이다. 그는 오래전 충북 영동군 매곡면 수원리 박명근(1908∼1983)옹이 세필로 쓴 「호점산 실기」를 취재하여 학회지에 싣게도 하였지만 답사는 이 글을 쓰는 기회에 하게 되었다. 실기라는 것은 말의 뜻대로라면 실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호랑이를 타고 다니고 호랑이와 친교를 맺은 희한한 이야기이다. 오촌의 묘는 황간면 소계리 성주골 호점산虎點山에 호랑이 무덤 호총虎塚과 함께 있다. 이름도 호점산이라 붙인 것이다. 참 이상하게 연결되는데 그도 호랑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이던가, 3 4학년 땐가, ‘바른말 하기 듣기’ 시간이 있었다. 지금의 특활 시간 같은 것이었다. 특기나 장기자랑을 하는. 노래를 하기도 하고 묘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그의 차례가 돌아왔고 별 특기가 없는 터라 팥죽 할마이 얘기를 하였다. 한 할머니가 산마을에 혼자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할머니를 잡아먹겠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팥 농사를 지어서 동지 팥죽을 쑤어 놓을테니 그때 와서 팥죽도 먹고 나도 잡아먹으라고 달래서 돌려보낸다. 동짓날 다시 온 호랑이는 할머니가 맛있게 쑤어 준 팥죽을 다 먹고는 어흥, 할머니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들을 때는 참으로 재미있었는데 영 잘 안되었다. 어떻든 그는 그날 이후 팥죽 할마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는 팥죽은 떼고 할마이가 되었다. 사투리 억양을 상상해 보시라. 운명인가, 언제부터인가 이야기를 하는 업을 갖게 되고 줄곧 죽을 쑤고만 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어떻고들 말한다. 오래전 옛날 옛적의 일을 말할 때이다. 동화에서는 지금도 호랑이가 많이 등장한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현실을 뛰어넘는 이야기라야 재미가 있다. 그도 그런 이야기를 실제 이야기처럼 듣고 울고 웃고 하였던 것이다. 팥죽 할머니에 나오는 호랑이는 악역을 하고 있고 거기에 대응하여 멍석이 호랑이를 둘둘 말고 지게가 지고 멀리 가버리는 것으로 인격을 부여하여 처리한다. 박연의 이야기는 그렇게 고랫적 이야기는 아니다. 나이도 스무 살이 넘고 성인이었다. 어머니 내간상內艱喪을 당한 때가 스물한 살이고 거려삼년居廬三年 우거려삼년又居廬三年 시묘를 하였다. 대개의 호랑이 이야기는 효행과 연관이 되어 있고 이 여막에서 박연과 함께 지낸 녀석의 경우도 지극한 효성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러면서 사뭇 다른 데가 있었다.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고 할까. 상주가 괴로워하면 같이 축 처져 괴로워하고 졸면 같이 졸다가 잤다. 무엇보다 노래 곡조에도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박연이 피리를 잡고 불 자세를 취하면 자기도 들을 준비를 하는 듯 다소곳이 고쳐 앉아 앞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추임새를 넣듯이 입을 쩍쩍 벌리기도 하고 수염을 쫑긋 세우며 앞발 뒷발짓을 하였다. 피리 소리는 연일 이어졌다. 애절한 소리는 산천을 흔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인 일인지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발그림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겨.” 궁금하다가 걱정이 되고 또 기다리다가 애가 탔다.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안 온 날이 없었다. 와서 박연의 여막을 같이 지키고 피리 소리를 들어주었다. 참으로 고맙고 가상한 녀석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였다. "정말 웬일이여.” 새벽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이 붙여지지 않았다. "몸살이라도 난 것인가.” 아니면 이제 안 올 셈인가. 어디로 다른 데로 간 것인가. 뭐 섭섭한 것이 있었던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새벽 동이 틀 무렵이었다. 막 잠이 들었는데 녀석이 나타나 죽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상주님! 상주님! 살려 주세요. 함정에 빠졌어요. 여기 당재인데요. 정말 죽게 되었어요. 상주님 제발 살려주세요.” "아니!” 꿈속이었다. 박연은 벌떡 일어났다. 꿈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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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장편소설] 흙의 소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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