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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한글서예가전 신인작가 이광호 작가의 시선봄바람을 타고 13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네번째 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출품한 30명의 작가 중 가장 젊은 신인작가라고 한얼 회장이 소개를 한 3분의 작가 중 이광호(43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현재 젊은 3040세대가 담당하는 서예술의 현장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서예를 좋아하다가 대학에서 서예학과를 전공하고, 지금은 경기대학에서 서예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양시 화정동 화정캘리서예아카데미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Q. 이광호 작가님, 오늘 축하드립니다. 전통문화 '한글서예'를 향유하는 전승주체로서, 속도로 경쟁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라고 할 수 있는 서예술이 다음 세대에도 계승되어야 하는 '미래지향적 지속가능성'이란 화두를 가지고 바라본다면, 즉 서예 분야 전문인으로서 서예의 순기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A.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디지털, 인공지능, 로롯공학, 바이오 기술 등 AI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를 통하여 신혁명의 시대를 맞이하는 요즈음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오늘날과 그리고 향후에는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되는 기술과 인간이어야만 할 수 있는 기술로 나뉘는 시대가 더욱 좁혀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붓을 쥐고 향유하고 있는 '서예'라는 순수예술은 인간 본연의 인성과 감성을 화선지에 녹여내리는 격조있는 독보적 예술 장르입니다. 모든 자연과의 어울림을 통하여 나오는 붓의 선질과 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현색(玄色)으로 형상화 할 수 있는 장르이지요. AI가 근접할 수 없는 분야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감성을 소통하고, 작가의 호흡으로 읽혀지고 감상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예술 중 손꼽히는 최고의 예술이라 자부합니다. Q. 젊은 세대들만 모여서 활동하는 서예술 단체가 있나요? A.네. 경기대학교 서예학과, 계명대학교 서예학과, 대구예술대학교 서예학과, 대전대학교 서예학과, 원광대학교 서예학과 이렇게 5개대학을 졸업한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하나되어 2014년도에 결성한 '80후'(八零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저는 80후 단체에 장형(長兄)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015년도에 백악미술관에서 "동행”이라는 타이틀로 창립전을 하게 되었고, 올해에는 10주년을 맞이합니다. 80후는 문파와 학파를 무시하고, 오직 서예가 좋아서 하나가 된 단체입니다. 가볍지 않은 클래식한 전통서예를 지향하며 우리의 서예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맺어졌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젊은 청년층의 단체 중에 가장 큰 단체입니다. 전시는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주로 인사동과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10주년 기획으로 중국, 대만, 일본, 말레이시아에서 서예를 전공하거나 교수로 재직 중인 젊은 친구들과 한국 백악미술관 전관에서 국제서예교류전을 준비 중입니다. 전시 기간은 2024년 8월29일부터 1주일간 전시가 진행됩니다. Q.한얼 선생님의 작품활동에 대해서 느낀 점은? A.한얼 이종선 선생님은 제가 존경하는 우리나라 한글서예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선생님입니다. 고즈넉하고 단아한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는 예술세계를 펼치시며, 결코 가볍거나 기교를 통하여 보여지는 글씨가 아닌 글씨다운 글씨를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장에서도 뒤를 잇고 있는 후학들이 본받을 만한 흔적들을 풍부하게 남겨주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서예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마음가짐 또한 그동안 걸어오신 선생님의 행보에서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서예진흥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헌신해 오시고 애써 주신 선생님의 모습으로 서예의 저변확대와 우리나라 서예를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선생님의 노고를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직접 전하지 못한 말씀을 이곳에 남기게 되어 뜻깊습니다. Q. 이번 '아리랑특별전'에 참여하신 보람은? A.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우리나라 선조들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아리랑 가사에 담긴 문학성에 놀라웠습니다. 저에게 아리랑은 고향에 계신 어머님 품과 같습니다. 자식과 부모가 하나 되듯이 아리랑과 우리 민족은 하나인 듯합니다. 그리운 고향에서 들려주는 아리랑은 어릴 적 나를 마주하게 되고, 잠시나마 어머님의 품에 안기는 듯합니다. 이번 아리랑특별전을 통하여 관람객들과 함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따스함을 나누었습니다. Q.독보적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한글서예의 아름다움은 어느 부분인가요? A.우리나라 한글의 특성은 다양한 획과 자유분방한 선들이 하나되어 이루어진 화려하고 기교가 담긴 글씨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예를 통해 다양한 조형미가 완성된다고 봅니다. 우선 한글은 우리의 고유한 글씨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 남겨주신 한글의 해례본에서 이미 우리는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하나의 국가가 완전하게 탄생하였음을 알리게 되었고, 선조들이 남겨주신 편지글과 한지에 담긴 조상의 얼을 통하여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한글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를 잇는 후학으로서 마땅히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딱딱한 펜과 연필이 아닌 붓으로 하여금 우리의 감성을 화선지에 표출하고 선조들께서 남겨주신 유산을 지켜낼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예술 중 한글서예는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작가는 "요즘 세상에 비인기 종목 서예를 하면서 밥 먹고 살기 힘드는데,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서 서예를 업으로 삼고 결혼도 하고 살게 되어 행복하다" 이어 "올해는 이즘한글서예협회 신임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심사를 거친 통과의례입니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초등학교 3학년에 처음 잡은 붓을 이 날까지 계속 잡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서예진흥법이 활성화 되어 서예를 경험할 수 하는 어린이가 확대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광호 작가 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고양시 미술협회 서예분과 위원장 경기대학교 서예학과 겸임교수 한국서예학회/한국서학회/한국서예가협회/한국청년서단/이즘/80후 임원.회원 화정캘리서예아카데미 主宰 이즘한극서예협회 신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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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1주기, 삶과 예술 재조명 큰 성과시인, 정치적 투사, 생명 사상가, 서화가 김지하(본명 김영일). 지난 8일 김지하 작고. 1주기를 맞아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있었다. 주로 동료들이 추모문화제 추진위를 결성해 학술심포지엄과 시화전시회와 음악회를 개최했고, 후배 학자들이 추모학술포럼 등으로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 4월 24일 오전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는 ‘김지하 시인 1주기 추모문화제’ 기자 간담회가 열었다. 1970년대부터의 문학 활동과 정치투쟁이 생명사상을 싹 틔운 것으로 이를 큰 자산화 해야 한다는 논의를 하였다. 추진위원장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는 김지하 선생은 놀랍게도 이미 30∼40년 전부터 문명 전환을 촉구했다고 평가했다. 추진위는 21세기 지구, 생명 담론이 나가야 할 생산적인 대안과 방향을 잡아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5월 3일, 동숭동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 집에서는 ‘김지하의 생명사상’을 주제로 포럼이 있었다. 윤명철, 김두규, 이윤선, 권철중이 토론자들과 함께 사상적으로 주목할 논제와 왜곡을 바로잡는 기회를 가졌다. 이날 특별 행사로는 미공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5월 6일 오후 7시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청계학당에서 추모공연이 열렸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가수 문진오 등이 ‘타는 목마름’ 등을 부르고, 임진택이 ‘소리 내력’을 선보였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1966년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후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 등단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담은 '타는 목마름으로'(1975)는 시대를 대표하는 저항시로 꼽힌다. 1970년 국가 권력을 풍자한 시 '오적'으로 구속되는 필화를 겪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 과정이 노래로 재구성되었다. 5월 6, 7일 양일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심포지엄 ‘김지하의 문학 예술과 생명사상을 주제로 문학과 사상을 조명하였다. 5월 9일,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지난 4일 시작한 ‘꽃과 달마, 힌 그늘의 미학’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막을 내렸다. 평소 틈틈이 그려 지인들에게 전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발표한 시 ‘五賊’의 출판자료를 비롯하여 먹으로 그린 난초를 비롯해 매화, 달마도, 산수화, 채색 꽃그림, 글씨 등 40점이 선보였다. 그리고 글씨와 그림을 배운 무위당 장일순의 난초 그림 2점과 가수 김민기가 이번 전시를 위해 직접 쓴 노래 악보 등도 선보였다. 전시회는 시인으로 일생을 살았지만, 그림과 글씨에서도 시 못지않은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게 했다. 스스로는 ‘묵희(墨戱)’, '먹의 유희'라고 했지만, 화법에 정통했고 글씨는 유려한 달필로 현대 문인화가로 평가 받는 자리였다. 학술포럼을 주관한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학술회의를 연례화 하겠다고 했고, 전시회 진행에 참여한 한학자 김영복 선생은 ‘김지하 전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세명대 이창식교수는 ‘아우라지 미학’과 ‘율려학회’ 창립 등과 함께 선생의 전통음악관도 조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근래 인물 추도로서는 비교적 다양한 조명이 있었다. 그만큼 김지하의 현대사적 무게가 큰 인물임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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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백악미술관 '한글사랑 뜻그림'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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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전’을 마치며/이종선취월당 밝은 창가에서 이종선 시와 노래는 원래 하나이다. 노래가 시이고 시가 노래이다. 우리 시에는 낭만과 사랑이 들어있고, 정한과 흥이 녹아 배어 있다. 필자는 지난해 9월부터 매주 일 년이 넘도록 노래로 불리던 시를 붓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우리의 시를 붓으로 노래한 것이다.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연재하면서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붓이 시의 흥취와 운율의 고저장단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흐름은 미세하여 다른 이는 알 수 없을 것이나 나는 내내 이 느낌으로 글씨를 썼다. 평시조는 사설시조를 제외하고는 대개 45자 내외로 글자 수가 한정되어 있다. 제한된 글자를 한 서체로 연작連作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같은 체제의 중복으로 자칫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마다 변화를 주는 일이 절실했고, 나는 매번 고심하였다. 고체, 궁체, 민체의 모든 한글서체를 총동원했고, 필 속의 완급緩急, 먹의 농담濃淡과 획의 윤삽潤澁을 활용하여 시의 내용에 부합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정, 장방형의 구도와 선면 형태 등 다양한 지면에 주제를 돋보이는 장법章法을 구사하였다. 종이도 장지, 한지 중국선지 문양지 등을 고루 써서 변화를 주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한글 서체 조형의 변화에 천착해 왔다. 한 글자가 지니고 있는 수평과 수직구조의 조형을 벗어나고, 정형화된 일정한 자간과 행간의 관계를 자유롭게 운용하는 것이다. 수평과 수직구조를 벗어난 불균형의 자형에서 생성되는 활동성을 이용하여 생동감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부정형적不定形的인 낱글자에 대소의 변화를 주어 글자와 글자를 조응하게 하고, 이때 발생하는 불균형을 다음 글자들의 조응을 통해 안정을 이루어 가면서 행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행의 운용에 있어서도 낱글자의 운용에서처럼 첫 행의 불안한 구조를 다음 행이 보완하면서 안정을 이끌고 행과 행이 조응하여 전체 화면의 균형과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내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크고 작은 돌들을 이리저리 쌓아 이룬 석축이나 돌담에서 느끼는 자연미와 조화미를 내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마치 개성이 다른 다양한 인간들이 소통하고 융화하면서 건강한 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은 것이고, 서로 다른 식물들이 모여 산야를 이루고 각기 다른 물체들이 온천지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과 맞닿은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연 속에서 순리를 따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삼라만상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필자의 이 작업은 주로 고체작품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개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서체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는 민체에서도 이어져 얼핏 같아 보이지만 작품마다 글자마다 모습과 표정을 달리하였다. 필자는 문자를 대함에 한자를 중국 글이라 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우리 문화에 젖어들어 체화되었고, 한자를 이용하지 않고는 의미소통이 어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우리의 문자생활에서 따로 할 수 없어, 한문까지야 능통할 바 없다 하더라도 한자 자체를 모르는 체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한글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상형문자인 한자를 아울러 쓸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문자의 소리와 표정을 두루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한자를 끌어들이지는 않지만 독해를 위해 필요한 경우 작품에 기꺼이 이용한다. 이 연재 작품에 한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 친숙하게 사용됐던 문투이기에 현대인들에게는 낯설지만 피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에 그대로 썼다. 특히 시인의 시상을 옮기려 하였고 창자의 흥을 얹으려 하였다. 글자와 행간에 운율을 실었고 붓 끝에 흥을 실어 붓으로 노래를 불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 내 마음 속에서만 울리었고, 춤사위는 손가락 끝을 통해 보이지 않는 대로 붓 터럭의 가닥을 흔들었다. 작품을 쓰는 내내 태백이 되어 달빛 아래 술잔을 기울였고, 가끔은 도연명을 만나려 오류촌을 찾기도 했다. 황진이를 그리워하다가 이름 모를 시인을 만나 코가 삐뚤어지기도 여러 번. 세상에 좋다는 산촌 경개를 거침없이 두루 하였으며, 때론 속절없는 외로움에 가슴을 에다가, 있지도 않는 부귀공명을 버리고 끝내 운림 처사가 되었다. 고래 영웅들이 나누어 누린 복락을 나는 붓으로 노래를 부르며 독차지하였던 것이다. 이 아니 어찌 천복이 아니겠는가. 이번의 전시회는 국악신문에 2020년 9월부터 매주 연재하였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작품 중 52점이 출품되어 백악미술관에서 12월 9일부터 1주일간 진행하였다. 내가 드러낼 수 있는 한글서예의 모든 것을 선보이는 기회였다. 붓으로 불린 우리 음악사설이 국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물론 서예인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호응을 이끈 것은 성과라 하겠다.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국악신문사에 큰 고마움을 전한다.(202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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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악 사설 한얼 이종선 특별전', 책으로 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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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이종선 특별展, "코로나 터널 속 서예계 성과"한글의 상형성을 완성하는 작업으로 나름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한얼 이종선의 개인전이 큰 관심 속에서 열렸다. 3년만의 개인전에다 코로나 터널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들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국악신문 인기 연재 ‘한얼 이종선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전은 2020년 09월 20일자 제1회 작품 ‘가곡원류’ 소재 시조 ‘梅影이~’로부터 2021년 11월 24일자 제64회 안민영의 ‘어리고 성긴 가지~’ 까지 64편 중 52편을 선보였다. 오후 4시 개최된 백악미술관 3층 전시실 개전식에 함께한 관객들은 다양한 서체, 다양한 작품 형태, 특히 한자와 한글의 조화미에 격찬을 하였다. 개전식에는 서예계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하여 축하하였다. 테이프 커팅에는 소헌 정도준, 규당 조종숙, 우전 맹관영, 이영철 동방대학원대학교 총장이 이종선 작가와 함께했다. 국악계에서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정은하, 기연수 명예교수, 이무성 화백이 함께했다. 그리고 주최 측인 국악신문사에서는 기미양 대표이사와 김지연 상임이사가 함께 했다. 이종선 작가는 인사말에서 "국악신문 1년 반 동안의 작업은 행운의 기회였다”면서 고통에서 이루어 낸 나름의 성과를 만족해 하였다. 축사는 스승인 소현 정도준 회장, 원로 규당 조종숙 서예가에 이어 우전 맹관영 회장이 성과와 평을 했다. 맹관영 회장은 1980년 방송통폐합 때, TBC동양방송이 깃발을 내리는 순간 ‘뉴스 기상도’ 마지막 뉴스를 울먹이는 목소리로 송출하여 한국방송역사에 획을 그은 주인공이다. 이날은 중학교 때 이경배 작가로부터 서예를 시작한 서예가로, 한국서예문인화원로 총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축사에서 "한얼 이종선 아우의 작품은 보면 볼 수록 끌리는 감칠맛이 특징인데, 이번 작품들에서도 이 맛이 두드러져 감동을 받았다”라고 했다. 주최측 주식회사 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는 "우리 신문 주간 연재의 품격을 높여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라고 하고, 코로나가 아니라면 전국 순회전시와 해외 동포사회 전시를 하고 싶은 작품들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전시는 일주일간 15일까지 열린다. 작품은 1백만원에서 300만원 정도로 판매된다. 첫날 이미 10여 편이 관객의 품으로 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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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아리랑보존회 특별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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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노래를 붓으로 부르다’ 한얼 이종선 書藝展"한글은 상형성象形性에 취약하기 때문에 독자미獨自美의 표출이 어렵다. 당연히 글자와 글자 행과 행의 조화기 필요하다. 글자와 행과 여백의 소통을 통해 전체를 하나로 이끄는 것이 내 작업의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글자의 가독성可讀性을 확보하며, 글감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조형과 획에서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구체화시킨다.” 우리나라 한글 서예계의 중진인 한얼 이종선의 대표 작품 ‘훈민정음 서문’의 자평 일부이다. 한글서예의 특징과 속성을 명료하게 제시한 대목이다. ‘한글서예’의 성립 자체가 한글이 전용되면서 부터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만큼 작가적인 운용 여지가 많은 분야이다. 이 분야의 주역 중 일인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던가. 2년 남짓한 연재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64편에는 작가만의 작품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주요 서체인 궁체, 민체, 고체와 한문 행초서체와 예서, 호태왕비체의 필의筆意를 더해 자, 행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며 균형을 이루는 질량분활법을 잘 드러냈다. 이는 한글에 한자가 섞인 우리 노래 시조·가곡·잡가의 다양한 변격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우직하고 질박한 우리 노래의 속성을 고저장단은 물론 시김새 까지도 표현한 듯하니, 이동식 대기자가 표현했듯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준~”(본지 11월 28일자) 것이다. 국악신문 2020년 09월 20일자 제1회 작품 ‘가곡원류’ 소재 시조 ‘梅影이~’로부터 2021년 11월 24일자 제64회 안민영의 ‘어리고 성긴 가지~’ 까지 64편 중 52편이 선별, 전시하게 되었다.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일주일간 열린다. 작품은 노래로 또는 율창律唱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대가 열성(列聖)에서 명공석사(名公碩士)는 물론 기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가의 명작이다. 물론 잡가 ‘처세가’ 같은 뛰어난 무명씨의 작품도 있다. 글감은 대체적으로 잘 알려진 가집인 청구영언·가곡원류·남훈태평가·해동가요·교주가곡집 소재 선정작이다. 전시작의 형태도 다양하다. 우연욕서偶然欲書로 좋은 글귀를 만나 불현듯 글씨가 쓰고 싶어 붓을 들었는데 마땅한 종이가 없어 옛 서책의 남는 종이에 쓴 잔지여묵殘紙餘墨도 있어 손바닥 크기에서 2메타 남짓한 크기도 있다. 바탕지도 다양하다. 장지는 물론, 최고급 냉금지, 다양한 문양지, 시전지, 중국산 선면 문양지까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1953년 경기도 용인 출생이다. 노장적 삶을 살고 있는 성정대로 ‘한얼’과 ‘醉月堂’을 호로 쓰고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으로 유농서회惟農書會를 주재하고 있다. 불교방송개국기념비, 고려대학교 100주년기념관비 등의 금석문을 남겼고,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성균관대학교, 한글학회, 김대중기념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언제부터 인지도 모르게 늘 그 모습으로 있어 왔던 자연스러움에 나는 더 애착을 느낀다. 이것이 전통에 바탕을 둔 서예 미학을 기본 조건으로 하여 나의 작품이 진행되는 이유이다.” 작가의 서예에 대한 서론緖論이며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서론書論이다. 이에 기반한 작가의 한글궁체와 흘림, 한문 전서와 예서, 국한문 혼서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감상하는 귀한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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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인기 연재 , 한얼 '이종선의 서예로 읽는 우리 노래 사설' 전시회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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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를 맞아 서예가 이종선을 만나다시조 시인으로 알려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 분천으로 내려와 어부가를 시조 형식으로 만들어 퇴계 이황과 그 형 온계 이해를 배 위로 불러서 관객으로 하고는 노래로 불렀다. 아쉽게도 그 노랫가락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노랫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고쳐 만들어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부르고 즐겼던 시조나 가곡을 직접 들을 수 없는 현대에 이 노래들을 붓으로 들려주는 서예가가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지낸 중진 서예가 이종선(67) 씨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을 2년 이상 발표하며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주어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2일 전시회를 준비하는 이종선 서예가를 이동식 국악신문 대기자가 천도교 수운회관에 있는 서실에서 만났다. Q. 전시회를 하신다고요? A. 네. 지난해부터 음악이 담긴 우리 말, 시조, 한시 등 사설을 한글로 써서 국악신문에 발표해왔는데요, 그동안의 작업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작품을 오프라인으로 시민들도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9일에 인사동의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에서 한 열흘 엽니다. Q.그동안 신문에 쭉 올려주시는 서예 작품들은 아주 보기에 편하고 다양하고 또 정말로 노래를 읽어서 듣는 듯한 흥취를 느낍니다. 그런 것들이 한글로 써서 그런 것이겠지요? A. 우리 조상들은 생활에서의 생각, 사상, 감회 이런 것들을 시조나 시로 만들어 발표해왔고 또 노랫말로도 전하고 있는데, 우리말로 된 이런 것은 굳이 한문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다 보니 한글서예로 표현하는 게 본래의 언어의 특성과도 맞아서 편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Q.선생님은 그동안 한글서예 운동을 주도하셨지요? A. 서예의 뿌리는 한자이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니 서예도 우리 나름대로 추구해야 할 길이 있는데, 한자서예는 중국인들이 개척한 서예 세계를 자칫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서예라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을 글씨로 담아내는 것이라면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글인 한글로 쓰는 것이 맞고 그것이 예술로 승화되면 더없이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한글서예는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1425년에 세종 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셨지만,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다 한문을 쓰고 궁 안에서나 일상 서민들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한글이 사용되었기에 문자 조형, 곧 서예로서의 한글은 사실 근세 이후에 한글이 전용되면서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를 확대 개발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지요. Q. 그런가요? 한글서예가 한자처럼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A. 그렇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한 장르로 대중에 등장한 것이 1920년대 초로, 윤백영이란 여성이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인 궁체를 처음으로 전시작품으로 출품을 했고, 그 무렵부터 여러분들이 궁체로 한글서예를 태동시켰습니다만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일중 김충현 씨가 지금 우리들이 많이 쓰는 정자체의 한글서예, 거기다가 훈민정음 판본에서 따온 고체까지를 발표함으로써 한글서예의 시대가 본격화되었지요. 그 뒤 남궁억, 장지연, 이철경 등 문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넓어졌는데 다만 그것이 엄격한 틀에 갇혀 있던 편이었다가 최근 20년 이래에 한글서예도 조형미를 새롭게 추구하는 현대 서예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Q. 그런데 서예 작품들을 보면 순수 한글만이 아니라 한문과 혼용해 쓴 경우도 있던데... A. 사실 우리가 한글날을 맞으면 꼭 나오는 것이 한글전용이라는 말인데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말에는 상당히 많은 한자어가 들어가 있고 그것들은 한글로만 표기하면은 뜻이 명확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서예라는 것도 어차피 종이 위에 글자를 쓰는 것이기에 그 뜻을 명확히 해야만 정신과 예술성이 높아지는 것이기에 한글로 쓰지만 필요한 경우엔 한자를 써서 그 뜻을 보다 명확히 하는 작업입니다. Q.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셨지요? 그때 문경에서 아리랑 노랫말을 모아서 한글서예로 표현한 큰일을 하셨는데.... A. 제가 한국서학회 이사장으로 있을 때 마침 문경시가 전국의 우리 아리랑 가락과 사설을 모으자는 운동을 시작해 저희가 문경시와 MOU를 맺고 2년 동안 갖은 애를 써서 아리랑 가사들을 거의 망라해서 서예로 담아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붓으로 부른 아리랑이라고 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 120여 회원들이 각기 10점에서 30점까지, 1만 수를 자신의 필체와 필법, 철학으로 썼기에 그 아리랑 서예를 통해서 노래로만 있던 아리랑이 유형의 시각예술로 태어났고요, 이 작업으로 우리나라 현대 한글서예의 다양한 표현 세계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집약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구나 이 작업을 하면서 문경에서 만들어진 전통 한지를 썼는데, 이게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순수 천연재료만으로 만들었기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한지 중에 가장 좋더라고요. 비단은 오백 년이고 종이는 천년을 간다는데, 이번에 한지장 김삼식 씨가 만든 전통 한지들로 쓴 아리랑 작품들은 정말로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문경시에서 한 아리랑 서예 작품화는 아리랑 가사와 사설을 처음 모은 것도 그렇지만, 한글서예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획을 긋는 작업이었습니다. Q.그런데 한국서학회는 외국에서도 한글 서예전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서예가 외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가 궁금합니다. A. 저희는 이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한글을 아는 분들이라면 한글서예도 당연히 관심이 있고 또 새로운 예술표현에 대한 탐구심도 있습니다. 전에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그런데 한자가 뜻글자인 데 비해 한글은 소리글자라서 서예의 조형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요? A. 서예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해서 이름이 다르고요, 사실 중국 서예인들이야 한자를 쓰는데. 일본 서예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표음문자인 가나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자신들의 글을 많이 쓰지요. 어찌 보면 한자만의 서예를 그들의 상황에 맞게 조형적으로 확대 개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한자(漢字)이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Q.한자나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이 많아지면서 서예도 큰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 같은데요? A. 서예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예술의 표현대상이 갖고 있는 생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인데, 거기에는 또 글 자체의 인격이랄까 품격에다가 서예가의 인품도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약허(若虛) 곽사(郭思)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높지 않을 수 없고 기운이 높으면 생동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인품을 담아 한자와 한글이 같이 쓰이면 그 효과가 더 좋아질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인들에게 서예는 한글이 들어감으로써 우리 서예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최근 서예 인구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년과 노령인구가 많아지고 또 지역사회에서 취미 개발을 위해 각종 강좌가 많아지면서 서예를 배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서 서예인들로서는 이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 서예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어려서 서예를 가르치지 않은 때문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예는 다른 예술 장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수양 수단이기에 전인교육을 위해서도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는 서예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저희 서예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Q.‘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지요? 글씨가 곧 그 사람이란 말인데, 이 선생님 취월당(醉月堂)이란 호가 재미있어 보입니다. 어떤 연유가 있습니까? A.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젊었을 때 술을 자주 했는데, 제 스승인 능허(凌虛) 스님이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에 나오듯이 술에 취하지 말고 달에 취하라는 뜻으로 호를 주셔서 감사하게 쓰고 있습니다. Q.12월 9일이지요? 그런 작업들이 이번 전시회에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A. 네. 시간 되시면 인사동에 나오셔서 백악미술관을 찾아주셔서 우리 한글서예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디로 갈 것인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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