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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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제35회 죽령장승제 25일 개막영주시는 25일(토) 소백산 죽령장승공원 일대에서 제35회 죽령장승제를 개최한다. 영주시가 주최하고 죽령장승보존회가 주관하고 영주시의 지원으로 개최된다.죽령장승보존회 주관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시민들의 안녕과 영주 발전을 기원하며, 지역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됐다.이날 행사는 풍기텃고을풍물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장승점안식, 장승명문식 및 성인식, 장승 고사 순으로 진행되며 참석자들에게 이색적이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죽령장승보존회 김진식 회장은 "소백산 장승의 장엄한 기운이 시민들을 안전하고 평안하게 지켜주리라 믿으며, 전통문화의 가치와 정신이 보전 및 계승될 수 있도록 노력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한편 장승은 예로부터 마을 앞에 세워 나쁜 기운이나 병마‧재액‧호환을 막는 동시에 마을의 풍농과 화평, 출타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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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혜의 '시간의 얼굴' 작품전, 16일 개막칠순을 넘어서는 길목에서 중견작가 김경혜(영남이공대 명예교수) 작가의 열번째 작품전이 오는 16일부터 25일까지 10일간 대구시 중구 슈바빙 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되는 총 50여 개 작품전의 주제는 '시간의 얼굴'이다. 전통 한지와 먹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표현했다. 30여 년전 파리 유학 중에서부터 구상해 왔던 작품전이다. 한지라는 캠퍼스에 한지를 오려 부치고 먹을 입혔다. 한지를 보면 볼수록 시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재질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한지 작품전을 준비하는 김작가가 한달 전 대구시 작업실에서 이 작품을 보여 주면서, 우리는 아직도 전통문화예술에서 가져 올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출품작을 감상하면서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았다. Q.이번 작품 주제에 대해 설명하신다면 A. 50여 개 작품명은 '존재와 시간'이고, 하나 하나는 시리즈입니다. 주제는 '시간이라는 길 위에서 존재'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거스를 수 없죠. 이제, 비로소 시간이라는 길위에 서있는 나 자신과 마주 앉아 나는 누구인가? 왜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가를 묻게 되었는데, 하이데거(M.Heidegger)말처럼 시간이라는 길 위에서 존재를 되새기며, 인간의 존재는 시간아란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근원이며, 한편으로는 그 시간에 실려서 흘러가는 존재이죠. 그러나 인간은 한쪽 발은 영원성에 담그고 다른 한쪽 발은 시간성에 담그고 있는 이중 구조의 존재이죠. Q.이번 작품은 크게 흰색 한지의 면과 검은 먹으로 표현한 선이 대비되어 주제가 강렬하게 강조되네요 A.이번 작업은 시간 속에서의 존재를 표현해 보았죠. 존재를 근원으로 한지를 선택하여 접고 잘라서 운명을 표현했고. 삶이라는 것을 가늘고 긴 실로 단순한 선과 형상으로 작업해 보았다. 정리하면 존재를 상징하는 공간은 면으로, 삶은 가변성 있는 선으로 표현했다. 검은색과 흰색은 크게 존재의 빛과 그림자로 대비되는 효과를 내고 있죠. Q.이번 작품은 주제를 먼저 선정하고 '한지'를 택하셨는지요, 아니면 한지에 꽂히셨는지요. A.새로운 것을 경험하려고 떠났던 유학 시절에 나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방황을 가라 앉혀 준 것이 한지였다. 목판화를 찍으면서 선명하고 투박했던 그 맛! 특히 검은색 한지는 진중하면서도 무언가를 가득 품고 있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고 무궁한 깊이가 있다. 언젠가 한지를 제재로 표현하고 싶었죠. 그러다가 칠순이 넘으니 인간이라는 존재와 주어진 삶의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한지와 연결되었죠. Q. 관객으로서 이번 작품 중 (위 사진) 이 작품이 눈에 가장 처음 들어왔습니다. 제가 느끼는 건데요. 반쪽 얼굴 모습은 사람의 존재와 고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요. 빨간 색실로 한올 한올 꿰맨 작품에 대헤 설명해 주세요. A. 금방 찢어질 듯이 얇은 한지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한 올의 실은 삶의 지평에 서 있는 우리들의 존재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재질이다. 시간의 길 위에서 수많은 얼굴을 만났다. 자신에게는 너그럽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하고 냉철함에 놀라서 몸서리쳐졌고, 삶과 죽음이란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성에 막연하고 두려웠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태의 변화 속에서도 그들의 얼굴은 숭고하고 경이로웠다. 한편으로 반쪽 얼굴의 형상은 인간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마스크를 쓰고 사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얼굴은 규칙적인 도형이 반복되는구조를 빨간색실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피가 흐른다는 것이 아닐까. Q. 반쪽 얼굴은 그런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하고, 삶과 죽음이란 경계를 표현한 것인가요. A. 존재, 즉 인간의 빛과 그림자, 선과 악을 표현하지요.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중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다행히 인간이란 존재의 시간 앞에 누구나 공평하지요. 신앞에 선 인간은 시간성에 대해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한 존재로서 받아들여야지요. 그래서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죽을 힘을 다해서 할뿐이지요. Q. 작품을 설명하시면서 20세기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실존주의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운운하셨는데, 이번 작업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A. 하이데거의 '시간성(時間性)'을 표현하고 싶었죠.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과거·현재·미래의 삼상(三相)의 통일인 시간성으로서 제시했죠. 인간 하나 하나가 시간적·역사적 존재라고 설명하죠. 제가 이 부분에서 한 단면을 잘라서 제 나름대로 확대해석한다면, 개인 하나 하나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거죠. 그만큼 사람들은 삶 앞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거죠. 특히 지나가는 시간앞에서... Q.색상이 다른 4개의 한지가 잘려서 부친 이 작품은 어떤 의미인가요. 언뜻 두툼한 누비한복이 떠올랐습니다. (위 사진) A. 전통한복에서 모티브를 받은 작품이지요. 작품 구조는 면과 선을 표현했죠. 의식의 저편의 기억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먹을 갈고, 드로잉하고, 종이를 접고, 자르고, 붙이면서, 시간의 무한성과 유한성을 형상화 했죠. 접은 한지의 사각면은 무한한 시간(세월)의 중첩을 표현하고, 한땀 한땀 한줄로 박음질을 한듯한 세로 선으로 접힌 주름은 지금 이 시간에 실존을 느끼는 동시에 정지된 시간의 흔적, 즉 유한성을 한지에 표현하고 싶었죠. 장승의 얼굴에 영감을 받고 장승을 주제로 한 작품전을 가졌던 김작가는 영남이공대에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상업미술을 기반으로 한 복합미술 장르를 지도하면서 민속학이 가지고 있는 전통문화예술 콘텐츠에 눈뜨게 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야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2010년 안동국립대학교 민속학과에서 '조선후기 생활판화의 미의식과 기능'에 대한 연구(지도교수 임재해)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민속학과 현대미술을 연결해 보고자 대학에서 학생들과 많은 실험을 시도해보고 지도해왔다. 많은 재학생들에게 전통에 대한 재해석 확장에 큰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당시 한국 전통문화예술을 모티브로 한 주제작품은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할 때다. 서양화가 전공자 김작가는 파리 유학 중에 한국 전통문화를 그리워했다. 이때 김작가는 전통한지의 예술성과 다양성에 꽂히고 만다. 한민족은 오랫동안 전통 한지라는 재료로 만든 문필도구, 가구, 밥상, 장신구, 한복, 신발 등을 실생활에서 누려왔다는 것을....그리고 여기에 재질의 질과 색상 등 변화가 무한하고 바라만 봐도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고 감상하게 된다. 이후 김작가는 한국에 돌아와서 한지 작업에 몰두하여 왔다. 한지와 모더니즘 작품을 연결시켜 보고자 많은 시도를 해왔다. 민속학을 기반으로 재해석하여 내놓은 이번 작품전에서 관객들이 신선한 영감을 받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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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설날 세시행사 ‘새해가 왔어용’ 오는 9일 시작한국민속촌이 2024년 새해를 맞아 ‘甲辰(갑진) 새해가 왔어용’ 세시행사를 2월 9일(금)부터 25일(일)까지 진행한다. 이번 행사에는 청룡을 주제로 하는 특별 전시체험과 정월대보름의 전통 풍습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마련했다. 청룡의해 맞이 특별 전시체험 ‘청룡도 세화찍기’는 청룡이 그려진 목판에 세화를 찍어 소장하는 특별한 체험이다. 청룡도 세화찍기를 체험한 관람객에게는 신년 사주풀이 1회권을 무료로 제공한다. 세시풍속 용알뜨기(우물 속 용의 그림자 뜨기)를 변형한 ‘용알뽑기’도 진행한다. 용알뽑기는 꽝 없는 뽑기 체험으로, 설날행사 체험권부터 한국민속촌 공예품까지 푸짐한 경품을 준비했다. 청룡도 세화찍기와 용알뽑기 체험 가격은 3000원이다. 설날, 정월, 대보름의 아름다움과 전통적인 풍습을 담은 ‘일월, 감성맞이’ 전시도 열린다. 민속마을 4호 앞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진행되는 지신밟기, 쥐불놀이 등 쉽게 볼 수 있는 세시풍속 현장을 영상으로 표현해 전시한다. 관람객들은 영상을 통해 우리 전통 풍습을 실감할 수 있다. 울릉도 공터에서는 대형 연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연날리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됐다. 관람객은 소원을 담은 연을 만들고 넓은 공터에서 하늘 높이 날릴 수 있다. 공터 옆 조롱박터널에는 연 모양의 소망패에 올해의 소원을 작성해 걸어둘 수 있다. 설날 대표행사 ‘정초고사’는 설날 당일인 2월 10일(토) 오전 10시 한국민속촌 정문에서 열린다. 정문에서 시작하는 고사와 떡 나눔 행사로, 흥겨운 전통공연과 고사를 구경하고 떡을 나누며 설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가신 신앙에 따라 터주가리와 조왕신이 배치된 민속마을 19호에서는 지신밟기 특별행사를 2월 11일(일) 오전 11시 30분에 진행한다. ‘새해가 왔어용’ 행사의 피날레 이벤트인 ‘달집태우기’는 2월 25일(일) 오후 4시 30분 민속마을 19호 앞 큰 밭에서 진행한다. 약 5m 크기의 달집이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액운을 날려버리고 힘찬 새해를 보낼 수 있다. 이외에도 △장승혼례식 △볏가릿대 세우기 △흥선생과 일곱가지 죽공예품 전시(대나무 썰매 등)가 진행되며, 자세한 일정과 전시 장소는 한국민속촌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민속촌은 30만평 대지 위에 조성된 조선 시대 마을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테마파크이자 사극 촬영의 메카다. 최근에는 과거의 전통을 단순 계승·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즐기며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매 계절 새롭고 이색적인 축제를 선보이면서 여러 소셜 미디어 채널로 소통하고 있어 중장년층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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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설날 세시행사 ‘새해가 왔어용’ 9일부터한국민속촌이 2024년 새해를 맞아 ‘甲辰(갑진) 새해가 왔어용’ 세시행사를 9일부터 25일까지 진행한다고 6일 발표했다. 이번 행사에는 청룡을 주제로 하는 특별 전시체험과 정월대보름의 전통 풍습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마련했다.청룡의해 맞이 특별 전시체험 ‘청룡도 세화찍기’는 청룡이 그려진 목판에 세화를 찍어 소장하는 특별한 체험이다. 청룡도 세화찍기를 체험한 관람객에게는 신년 사주풀이 1회권을 무료로 제공한다. 세시풍속 용알뜨기(우물 속 용의 그림자 뜨기)를 변형한 ‘용알뽑기’도 진행한다. 용알뽑기는 꽝 없는 뽑기 체험으로, 설날행사 체험권부터 한국민속촌 공예품까지 푸짐한 경품을 준비했다. 청룡도 세화찍기와 용알뽑기 체험 가격은 3000원이다.설날, 정월, 대보름의 아름다움과 전통적인 풍습을 담은 ‘일월, 감성맞이’ 전시도 열린다. 민속마을 4호 앞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진행되는 지신밟기, 쥐불놀이 등 쉽게 볼 수 있는 세시풍속 현장을 영상으로 표현해 전시한다. 관람객들은 영상을 통해 우리 전통 풍습을 실감할 수 있다.울릉도 공터에서는 대형 연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연날리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됐다. 관람객은 소원을 담은 연을 만들고 넓은 공터에서 하늘 높이 날릴 수 있다. 공터 옆 조롱박터널에는 연 모양의 소망패에 올해의 소원을 작성해 걸어둘 수 있다.설날 대표행사 ‘정초고사’는 설날 당일인 2월 10일(토) 오전 10시 한국민속촌 정문에서 열린다. 정문에서 시작하는 고사와 떡 나눔 행사로, 흥겨운 전통공연과 고사를 구경하고 떡을 나누며 설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가신 신앙에 따라 터주가리와 조왕신이 배치된 민속마을 19호에서는 지신밟기 특별행사를 2월 11일(일) 오전 11시 30분에 진행한다. ‘새해가 왔어용’ 행사의 피날레 이벤트인 ‘달집태우기’는 2월 25일(일) 오후 4시 30분 민속마을 19호 앞 큰 밭에서 진행한다. 약 5m 크기의 달집이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액운을 날려버리고 힘찬 새해를 보낼 수 있다.이외에도 △장승혼례식 △볏가릿대 세우기 △흥선생과 일곱가지 죽공예품 전시(대나무 썰매 등)가 진행되며, 자세한 일정과 전시 장소는 한국민속촌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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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 수상자 명단판소리 명창부 대상 (대통령상) 이선희 최우수상 (전라남도지사상) 윤세린 우수상 (목포시장상) 김숙희 장려상 (대회장상) 박연희 판소리 일반부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전남숙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이지원 우수상 (한국국악협회전라남도지회장상) 유수현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민상 판소리 신인부 대상 (전라남도지사상) 박심업 최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장영화 우수상 (한국국악협회전라남도지회장상) 정시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순천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영순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이석성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조진옥 판소리 학생부 대상 (전라남도교육감상) 배수진 최우수상 (전라남도목포교육지원청교육장상) 나연우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김예은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공준웅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아진 무용 명무부 대상 (국무총리상) 장보름이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이가원 우수상 (한국에총전라남도연합회장상) 신연희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홍지선 무용 일반부 대상 (전라남도지사상) 김건우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임희주 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김현송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조희숙 무용 학생부 대상 (전라남도교육감상) 이경서 최우수상 (전라남도목포교육지원청교육장상) 황이수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김서현(10년생)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허정윤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인하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서현(06년생) 기악 일반부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최승아 최우수상 (한국국악협회이사장상) 성유미 우수상 (한국예총전라남도연합회장상) 이혜전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박준범 기악 학생부 대상 (전라남도교육감상) 송가원 최우수상 (전라남도목포교육지원청교육장상) 노윤지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이창준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연정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이진희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송희찬 고법 명고부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김태현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문제복 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X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X 고법 일반부 대상 (전라남도지사상) 최유정 최우수상 (목포시장상) 박수현 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박재우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정해찬 고법 신인부 대상 (목포시장상) 강진영 최우수상 (목포시의회의장상) 이복규 우수상 (한국예총 목포신안지회장상) 박심업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정시영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남삼례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김순옥 장려상 (한국국악협회 목포지부장상) 배광수 학생부 종합 대상 (교육부장관상) 송가원 국악공로상 (국회의원) 장보영 국악지도자상 (목포시장) 이영주 (목포시의회의장) 장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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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0)장생포는 지금의 여수 선소를 포함한 포구 이름이다. '곡(曲)' 혹은 '가(歌)' 등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생포는 어떤 포구였으며 어떤 노래였을까? "시중 유탁(柳濯)이 전라도에 출진함에 위엄과 은혜가 겸비하여 군사들이 장군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왜구가 순천부 장생포에 이르자 유탁 장군이 구원하러 감에 왜구들이 바라볼 뿐이었다. 장군이 곧바로 붙잡았다가 놓아주니 군사들이 매우 기뻐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고려사악지'(1454년)의 기록, 이 노래가 <장생포>다. '전라도에 출진함'은 전라도 아닌 곳에서의 출진 예컨대 '합포(지금의 마산 합포구)만호'였을 때를 추정하게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준옥 교수 등이 밝혀두었다. 유탁장군이 '합포만호'였던 충혜왕 때는 왜구 침입이 없었고 '전라양광도 도순문사'였던 충정왕 때와 전라도 만호로 임명된 공민왕 때 즉, 장생포 전투는 유탁 장군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이라는 것이다. 1344년(충혜왕) 원나라로부터 '합포만호'로 임명되었고 1352년(공민왕 원년)에 전라만호가 되었다. 한편 다른 기록도 있다. "장성포(長省浦), 부의 60리에 있으니 고려 때 왜인이 침입해서 여기에 이르자, 유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니 적들이 쳐다만 보다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노래를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의 기록이다.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는 기록이 핵심 정보다. 선학들이 밝혀둔 장생포의 위치를 추적해본다. 순천부 동쪽 60리 포구, 장생포의 위치 문헌에서 언급한 (순천)부 동쪽 60리 전후한 지역의 포구들은 만흥포(萬興浦), 기질을포(其叱乙浦), 탄잠포(呑潛浦), 성창포(城倉浦), 조음포(助音浦) 등이다. 용문포(龍門浦)는 부의 동쪽 55리, 며포(㫆浦)는 부의 동쪽 61리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장생포가 몇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정보는 전후맥락을 고려한 위치와 거리 정보다. 이런 점에서 유탁 장군의 이전 거처였던 합포만호를 포함, 울산 남구 장생포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수의 문헌자료들을 검토한 선학들의 견해는 지금의 여수반도 내 포구에 집중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시대의 포구 검토가 도움이 된다. 변남주 교수가 발품을 팔아 전국의 포구를 조사했다(고석규 외, '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 참고). 옛 기록에서 위치를 비정할 때 방위 호명은 해로(물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위상 남동쪽이라도 물길에 따라 동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서에 여수지역 포구를 모두 순천부의 동쪽으로 표기한 이유다. 용문포(龍門浦)는 『읍지』에도 부의 동쪽 55리로 나와 있는데 용인포, 용개라고 불렸으며 현재 '고돌산포'에 해당한다.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다음은 『읍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동쪽 60리라 한 곳이다. 만흥포(萬興浦)는 만흥개라고도 하는데 만흥동 만성리 해수욕장 부근이다. 탄잠포(呑潛浦)는 화양면 장수리 자매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조음포(助音浦)는 종화동의 종포, 종개, 쫑개로 추정하고 있다. 기질을포(其叱乙浦)는 모사포로 추정한다. 성창포(城倉浦)는 현재 어느 지역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중에서 장성포를 당연히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순천부(팔마비)에서 여수 선소(장생포 내안)까지 동남향 직선거리를 재보니 27.46Km다. 60리는 관례적 환산법으로 계산하면 24km, 도량형법에 따르면 25.2Km에 해당한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지리서의 설명과 부합한다. 『한국지명총람』15(전남편Ⅲ)에 의하면, "장생포는 장성포, 장성개와 같다. 쌍봉명 안산리, 소호리, 선원리, 학룡리, 시전리, 웅천리에 걸쳐있다. 고려 30대 충정왕 2년(1530년 표기는 1350년의 오기) 5월에 왜구가 병선 66척을 이끌고 침입하여 노략질 하는 것을, 전라 양광도 도수문사 유탁 장군이 정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왜적의 배 한척을 무찌르고 왜적 13명을 죽이니, 그들이 놀라 달아나서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으므로 유장군이 스스로 장생포 노래를 지어 부르고, 군사들이 기뻐하여 동동곡(動動曲)을 불렀으므로 더욱 이름났다." 장생포(長栍浦)라는 이름은 벅수(남해안 지역에서 장승을 부르는 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 여수에 벅수가 많은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다. <장생포>는 북소리와 관련된 노래이자 연희(演戱) 여수시 쌍봉면 시전리 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둥둥골'이라 한다. 둥둥골 뒤편이 고락산(鼓樂山)이다. 한국향토문화대전에 의하면 북소리에서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최인선 교수에 의하면, 고락산성은 중간에 본성이 있고 산의 정상부(해발 335m)에 보루를 갖추고 있는 백제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으로 산 자체가 성이었다는 뜻이다. 한편 여수 진남관 북쪽은 종고산(鐘鼓山)이다. 한산대첩 때 산이 스스로 울어 충무공 이순신이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웅웅웅 소리를 낸다 한다. 이 또한 북소리 울려 진군하는 진남(鎭南) 혹은 승전고(勝戰鼓)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니 <장생포>를 북과 연결 지어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고락산성(鼓樂山城)에 왜 북 고(鼓)자를 붙였는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장생포>의 발생이 유탁 장군과 그 군사들의 승전가였다는 점을 참고하면 자연스럽게 북(鼓)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할 만하다. 괘락산(掛樂山)이라고도 하는데 테뫼식 즉,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 발권식 산성, 시루성, 머리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는 점 참고하면 고락산성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산 자체가 큰 북의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수 장생포를 배경으로 고려말엽에 지어져 대중 사이에 유포된 노래가 <장생포>라고 주장하는 배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 때의 산성이기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호명의 의미가 크다.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다는 장생포 노래, 그와 관련하여 불려지거나 춤으로 추었다는 장소를 현재의 여수 장성마을로 비정한 것은 이런 전거들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장생포라는 노래에 대하여 <장생포>는 고려 후기 유탁(柳濯, 1311~1371)장군이 장생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던 노래다.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김준옥 교수가 장생포곡, 장생포의 창작자, 창작연대, 창작지 등을 분석한바 있다. 장생포 전투는 유탁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에 일어났으며 노래 <장생포>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를 유탁장군과 군사들이 전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함께 불렀던 대중가요라고 했다. 동의한다. 민요가 작자 없이 구전 전승되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일명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를 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승전 내용을 기왕의 민요 리듬이나 선율 예컨대 오늘날로 말하면 산아지타령 등에 맞춰 노래하고 연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장생포, 장생포가, 장생포곡, 장룡성포, 장생곡, 특히 장생포 등곡은 장생포 외 다른 곡이라는 뜻일 수도 있으니, 모두 노래 이름이 달리 표현된 것일 뿐 넓은 범주에서는 같은 곡이다. 사실 노래만이 아닌 콘텍스트로서의 '장생포'다. <장생포>와 고려가요 <동동>의 상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는 시간을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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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수년 전 본 지면을 통해 초분을 다룬 바 있다. 최길성이 보고한 전북 위도의 증골장(蒸骨葬) 사례를 다시 주목한다. 초분에서 뼈를 추려가지고 집으로 와서 시루에 넣고 찌면서 당골이 굿을 한다. 발목 묶인 제물(祭物) 수탉이 울면 영혼이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굿을 중지한다. 비로소 시루에서 뼈를 꺼내어 깨끗이 한다. 최덕원은 시커먼 뼈라도 시루에 넣고 찌면 새하얗게 고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임산부일 때는 반드시 초분을 한다고 증언한다. 빈(殯)이라는 초분의 장례법 모두가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독장 즉,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아이들의 주검처리 형태와 연관된다. 왜 뼈를 찌거나 닦아내어 다시 매장하는 것인가? 초분으로 대표되는 이차장례에는 살보다 뼈를 중시하는 어떤 관념 즉 영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주검 자체를 자궁의 메타포인 동굴에 넣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고 썩어 없어지는 살보다는 오랫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뼈에 거듭남과 재생 등의 관념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초분장을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러한 스토리텔링 또한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한 측면을 다룬다. 뼈와 살의 분리,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증류해내는 방식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로부터 장례식을 인간의 몸으로부터 영혼을 증류해내는 기술로 독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창익은 그의 연구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에서, 장례식은 부패하는 신체로부터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일련의 세밀한 절차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단일한 장례식이 몸의 장례식과 영혼의 장례식 혹은 살의 장례식과 뼈의 장례식으로 이중화되는 사례들이 예시된다. 내가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민속원)에서, 장례를 두 개의 단위 즉 주검의 처리와 영혼의 처리로 나누어 분석했던 것도 이런 일환이다. 예컨대 살의 장례식을 일차장례식으로, 뼈의 장례식을 이차 장례식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일차장에서는 영혼이 깃든 뼈를 살로부터 구분해내는 작업을 하고 이차장에서는 영혼의 귀천 혹은 재생의 염원 등을 담은 서사극 축제, 특히 씻김굿의 영돈마리를 통해 증류주(음복주)를 만든다는 것이 내 책의 요지다. 망자가 더 오래도록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어떤 형태로든 재생을 염원하는 표현이 바로 망자의 주검을 다루는 방법과 절차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레이저가 보고한 『황금가지』의 다양한 사례들은 우리들에게 방대한 영감을 선사해준다. 캄보디아의 외딴 밀림 속 신비스러운 '불의 왕'과 '물의 왕이 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이 나라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이 신비스러운 두 왕은 화장(火葬)을 한다. 손톱과 이빨, 뼈 같은 것은 부적으로 경건하게 보관한다. 시체를 장작더미에 태우는 동안 죽은 주술사의 인척들은 왕이라는 싫은 직책에 오르게 될까봐 숲으로 달아나 숨는다. 사람들이 가서 그들을 찾는데, 은신처를 제일 먼저 들키는 사람이 다음 차례로 왕이 된다. 1891년 2월 한 프랑스인 장교가 이 외경스러운 왕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치 우리가 단군신화를 설화로 대하듯 서구는 물론 인류사에 하나의 우화로 남았을 법한 이야기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장속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세 개의 복주머니를 준비한다. 한 주머니에는 손톱을 다른 주머니에는 발톱을, 또 다른 주머니에는 머리칼을 담는다. 육신은 죽었어도 손톱발톱 그리고 머리칼은 일정 시간 자라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손톱발톱이 피부의 하나이긴 하지만, 죽어서도 죽지 아니하는 뼈에 대한 관념의 대신이라고 나는 풀이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승려들이 다비식을 마치고 획득하는 사리(부처나 성자의 유골)도 뼈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 아니겠는가. 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지극한 관념 뼈에 대한 이 지극한 관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썩는 살과 오랫동안 보존되는 뼈에 대한 분리 관념 말이다. 이 생각들이 좀 더 확장되면서 육신과 영혼의 분리 혹은 영혼의 구제나 재생, 부활을 따지는 종교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일차장으로서의 육신을 탈각하고 이차장으로서의 영혼을 좀 더 오래 혹은 영원히 존재하게 하는 장법으로 발전된 셈이다. 이차장으로서의 초분장이 살과 뼈의 장례를 분리하는 대표적인 장례법이다. 내가 현지 조사한 자료를 포함해 여러 선학들이 보고한 자료들에도 초분장에 대한 현지인들의 구술은 대동소이하다. 자연적으로 육체의 살을 없애고 뼈를 좋은 곳(선산 등)으로 모시려고 초분을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뼈에 영혼이 담겨 있다는 영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검 자체를 동굴에 넣거나 혹은 고인돌이라는 인공굴에 넣었다가 점차 육탈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하는 장례법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난 칼럼에서 고인돌과 옹관을 인조굴로 해석하고, 독(瓮)이라는 용어 자체가 도가지, 도가니 등의 용례로 알 수 있듯이 돌(독)과 관련 있음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고인돌 아래 매장 혹은 풍장(風葬)되었을 주검이 살과 뼈를 분리하는 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의 현답을 좀 더 추적해봐야겠다. 진도군 덕병리 장승제에서 소의 턱뼈를 바치는 이유 뼈에 대한 관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고분에서 발굴되는 동물의 뼈들을 고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이저의 보고는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해준다. 예컨대 돼지 형태의 곡물정령은 추수 때와 파종기에 각각 등장한다. 코울란트의 노이아우츠에서는 그 해에 처음으로 보리씨를 뿌릴 때, 농장주의 아내가 돼지 등뼈와 꼬리를 삶아서 밭에서 씨 뿌리는 일꾼에게 가져온다. 일꾼들은 꼬리를 잘라서 밭에다 꽃아 놓는다. 곡식 이삭이 그 꼬리만큼 길게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파종기에 미혼 남자를 밭에서 잔인하게 살인하는 사례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 돼지의 형상으로 그는 파종기에 땅에 묻히며, 추수 때 무르익은 곡식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미혼 남자보다는 주로 처녀가 이런 시작이나 증식, 생산의 기제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돼지뼈를 재생과 생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즉,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영혼력으로 관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레이저의 이 이론들을 유감주술(혹은 모방주술)과 접촉주술이라고 한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효과를 내며 그것과 접촉하면 비슷한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당산제(거리제로 호명한다)에서는 두 기의 석장승에 해마다 소 턱뼈를 바친다. 인근의 군내면 세등마을 당산제에서도 소턱뼈를 바친다. 벌교읍 대포리 당제에서는 도깨비고사라고 해서 끄렁치에 소뼈(한 마리라고 여기는 분량)를 담아 개펄에 헌식한다. 분화된 생각들이긴 하지만 모두 뼈에 대한 지극한 관념들을 뿌리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문이다. 화장(火葬)이 보편화된 현재, 이것이 영혼관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거친 풍속인지 인류사의 한 지점에 내 질문을 던져둔다. 죽음관과 영혼관은 곧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며 또한 삶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늦가을 문턱 가로수 아래 나는 그저 무심한 아파트숲을 응시할 뿐이다.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는 저급한 관념들이 진중한 논의도 없이 우리들의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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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성악의 맥, 명창들의 ‘인생과 노래’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오는 13일(화)부터 22일(목)까지 총 6회에 걸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일이관지- 성악’ 공연을 개최한다. 이번 무대에는 민요, 시조·가곡, 굿, 가야금병창, 잡가의 명창들이 전통 성악의 다채로운 멋을 전한다. 이창배, 안비취의 대를 잇는 스승과 제자의 무대 | 이춘희 강효주 6월 일이관지의 첫 공연은 경기소리 명창 이춘희와 강효주의 무대로 막을 연다. 근현대 경기소리의 명창으로 손꼽히던 이창배와 안비취의 맥을 이은 이춘희와 강효주는 사제지간으로 현재 이춘희 명창은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로, 강효주 명창은 이화여대 교수로 활동 중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대표적인 경기민요로 알려진 ‘노랫가락’과 ‘창부타령’, ‘청춘가’를 비롯해 이별의 슬픔과 인생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이별가’와 ‘정선아리랑’, 경기소리 가운데 가장 어려운 소리인 ‘12잡가’까지 다채로운 경기소리를 전할 예정이다. 두 남성 명창이 전하는 서도소리 | 박준영 유상호 14일에는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소리로 풀어낸 ‘배뱅이굿’의 일인자 이은관의 제자인 박준영, 유상호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남자 명창의 서도소리 무대를 선보인다. 서도소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민요로 이번 공연에서는 대표곡 ‘수심가’와 ‘엮음 수심가’를 시작으로 황해도 사람들이 사랑했던 ‘산염불’과 ‘자즌염불’, 배뱅이의 죽음과 이후 넋풀이 굿판에서 펼쳐지는 음악극 ‘배뱅이굿’, ‘긴난봉가’, ‘자즌난봉가’, ‘빠른난봉가’, ‘사설난봉가’를 전한다. 소리의 파생과 확산, 뿌리내리고 새 가지를 뻗다 | 강민정 채수현 15일에는 서울굿의 강민정 만신과 경기민요 소리꾼 채수현이 함께 무대를 꾸민다. 강민정 만신은 이번 공연에서 무녀(巫女)의 노래인 부정청배, 중듸밧산, 신장대감거리등으로 구성한 ‘서울새남굿’과 ‘서울천신굿’을 선보이고, 채수현은 경기민요가 통속민요로 나아갈 수 있었던 대표곡 ‘노랫가락’과 이를 토대로 한 ‘금강산타령’과 ‘바위타령’ 등을 부를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무속음악과 경기민요가 음악적으로 어디에 뿌리를 두고 어떻게 확산하고 영향을 끼치는지 발견하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는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 시조와 가곡 | 김영기 이재화 안정아 장명서 20일에는 전통 성악곡 가운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조와 가곡 무대가 이어진다. 1부 시조 무대에서는 젊은 소리꾼 안정아와 장명서가 평시조 ‘동창이’와 ‘태산이’을 ‘버들은’과 ‘매암이’로, 우조시조 ‘월정명’은 ‘나비야’로 등으로 바꾸어 기존 전통 악곡에 노랫말을 새롭게 붙여 창작해 선보인다. 2부 가곡 무대에서는 가곡의 김영기, 거문고의 이재화 명인이 함께하는 무대가 펼쳐진다. 김영기의 강하고 청아하며 안정적인 노래에 때론 강하면서도 섬세한 가락이 돋보이는 이재화 명인의 거문고가 어우러져 특별한 무대를 그려낼 예정이다. 박귀희 명창의 뒤를 잇는 제자들| 강정숙 강길려 정명희 정예진 이영신 21일에는 가야금병창을 하나의 음악양식으로 자리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박귀희 명창의 다섯 제자 강정숙, 강길려, 정명희, 정예진, 이영신이 단가 세 곡과 판소리 다섯 바탕의 소리를 전한다. '춘향가의 사랑가', '심청가의 방아타령', '흥보가의 제비점고', '적벽가 중 장승타령', '수궁가 중 가자 어서가' 등 다섯 바탕의 가야금 병창곡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소리를 모았고,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가야금 반주로 판소리의 여백을 채우고, 골격음을 함께 연주해 풍성한 소리로 깊은 울림을 더한다. 노래에 담아낸 남도 명창의 인생| 신영희 박양덕 김수연 6월 공연의 마지막 무대는 남도잡가 명창으로 널리 사랑받은 신영희, 박양덕, 김수연이 합동무대로 한 무대에 선다. 이번 공연에서는 전라남도의 구성진 성음이 돋보이는 ‘육자배기’를 비롯해, 경기 ‘자즌산타령’을 중심으로 만든 곡인 ‘자즌육자배기’, 음악적으로 판소리의 일부 대목들을 차용하여 만든 ‘개고리타령’까지 세 곡을 골라 들려준다. 특히세 명창이 직접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작사하고 작창한 ‘흥타령’과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논매기소리와 유흥요로 널리 불리는 ‘산아지타령’, 일명 ‘산타령’으로 무대를 마무리한다.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 성악’은 오는 13일(화)부터 22일(목)까지 총 6회에 걸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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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제34회 죽령장승제..영주 발전·시민 안년 기원영주시는 27일 소백산 죽령장승공원 일대에서 제34회 죽령장승제를 개최했다. 죽령장승보존회(회장 김진식)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영주시의 번영과 시민 행복, 지역 문화 융성, 전통문화 계승·발전을 기원하고자 마련했다. '2023 영주 소백산 철쭉제' 연계 행사로 마련된 죽령장승제는 풍기텃고을풍물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장승 깎기 시범, 장승 점안식·명문식·채단식, 성인식·합방, 장승 고사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풍기텃고을풍물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장승점안식, 장승명문식 및 성인식, 장승 고사 순으로 진행되며 참석자들에게 이색적이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김진식 죽령장승보존회 회장은 "소백산 장승이 영주 발전과 시민 안녕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장승은 예로부터 마을 앞에 세워 나쁜 기운이나 병마‧재액‧호환을 막는 동시에 마을의 풍농과 화평, 출타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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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4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오랜 세월 우리의 삶과 함께했던 장승은 지명이나 속담, 수수께끼, 전설, 설화는 물론이고, 문화재, 문학작품 속에서도 남아 있다. 장승과 관련된 지명으로 장승배기, 장승거리, 장승방, 장승리, 장생포, 미륵리, 법수리, 법수배기, 벅수재 같은 지명은 예전에 장승이 서 있던 곳이기에 붙은 이름이고 우리 지역에도 옛 영남대로변에 있는 공평동 ‘장승백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장승 관련 지명은 전국에 771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승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그날그날 날삯을 받고 일을 할 때는 시간만 보내려고 장승처럼 서 있고 도급(돗내기)에는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로‘날 일에 장승이고 도급 일에는 귀신이다.’, 주되는 목적과는 상관없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가짐을 비꼬아서 하는 말로 ‘벅수 이빨을 세면 벅수가 된다.’, 억지로 자신의 어떤 이익이나 이권을 위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면 ‘장승 입에다 밀가루 발라 놓고 국숫값 내라고 한다.’거나 ‘장승 얼굴에다 분가루 발라 놓고 분 값 내라고 한다.’하고, 멋모르고 함부로 나대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개가 장승 무서운 줄 알면 오줌 눌까?’, 키가 멋없이 큰 사람을 두고 ‘구 척 장승 같다.’라고 놀리는 말도 있다. 또 어떤 일을 하다가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않고 대책도 없이 그만두면 ‘벅수같이 자빠진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을 ‘벅수같이 멍하니 서 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벅수를 넘든가 뱅뱅이를 돌든가 무슨 상관이냐?’ 하는 등 많은 속담이 있다. 그리고 수수께끼로는 ‘밤낮으로 눈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입이 크되 말 못 하는 것이 무엇이냐?’ 등이 있다. 장승에 관한 설화로는 장승을 치죄(治罪)하여 도둑을 잡은 ‘명관치장승설화(名官治長丞說話)’가 있고,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고, 문화재로는 통도사의 ‘국장생석표’가 보물 제74호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장승은 ‘충무시 문화동 벅수(제7호)’, ‘통영 삼덕리 벅수(제9호)’, ‘나주 불회사 석장승(제11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제15호)’, ‘부안 서문안 장승(제18호)’과‘동문안 장승(제19호)’, ‘남원 서천리 석장승(제20호)’, ‘순창 충신리 장승(제101호)’, ‘순창 남계리 장승(제102호)’ 등이 있다. 1970년까지 조사된 장승 유적지로는 200여 개소 있었다. 장승은 또 힘없는 민초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무엇이든 이루어 주는 해결사였다.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장승에게 빌면 아이를 잉태시켜 주고, 반대로 어쩌다 부정한 아이를 가졌을 때는 장승의 코나 눈을 갉아서 감초와 섞어 삶아 먹으면 낙태한다는 비방약이 되는 양면성을 가지기도 하며 풍년, 풍어, 건강 등 소원성취를 해 주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경남 함양군 마천을 지리적 배경으로 한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다. 일명 ‘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하는데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이다. 함양군청 자료에 의하면,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얼굴은 춘이월 반쯤 핀 복숭아꽃이었다. 옥빈(玉鬢)에 보조개, 초생(初生)에 지는 달빛이 눈썹 사이에 어리었다. 앵두처럼 고운 입술은 당채(唐彩) 주홍필로 찍은 듯하고 버드나무같이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하늘하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것이 서시(西施)와 포사(褒姒)라도 따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사주에 청상살이 겹겹이 쌓인 까닭에 상부(喪夫)를 한 것이 징글징글하게 많아 팔자가 센 여자였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은 첫날밤 잠자리에서 급상한(急傷寒)에 죽었고 열여섯 살에 얻은 서방은 당창병(매독)에 죽었다. 열일곱과 열여덟에 얻은 남편은 용천병과 벼락으로 각각 죽었다. 열아홉, 스무 살에 얻은 서방도 급살로 죽었다. 뿐만 아니었다. 간부, 애부, 새흘유기, 입 한번 맞춘 놈, 젖 한번 만진 놈, 눈 흘레한 놈, 손 만져본 놈, 그리고 심지어는 옹녀의 치마귀 상처자락 얼른 대한 놈까지 모두 죽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명씩 남자들이 옹녀 때문에 죽자,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다 쓸어버리고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집을 지으니 황해도, 평안도 양 도민이 공론하기를 이년을 그냥 두었다간 남자 놈은 한 명도 없는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아내자고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양 도민이 합세하여 그녀를 서도에서 쫓아내었다. 옹녀는 남쪽으로 가다가 청석관에서 홀아비 변강쇠와 만났다. 그들은 서로 만나 말 몇 마디에 뜻이 맞아 바위 위에 올라가서 대사(大事)를 치렀는데 대낮에 연놈이 벌거벗고 익숙한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양골(陽骨)인 강쇠놈이 옹녀의 두 다리를 번쩍 들고 옥문관을 들여다보며 노래를 읊었다. "이상하게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빨은 없구나. 소나기를 맞았는지 언덕지게 패이었다. 콩밭 농사지었는데 듬북꽃이 비치었구나. 도끼날을 맞았는지 금 바르게 터져 있네, 생수처 온답(溫畓)인지 물이 항상 고이었다. 무슨 말을 할려고 옴질옴질하는 건지 만경창파 조개인지 혀를 빼어 물었으며 곶감을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 물렸고 만첩산중 으름인지 스스로 잘도 벌어졌네 연계탕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이 비치었고 파명당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절로 난다. 제 무엇이 즐거운지 반쯤 웃고 있구나. 곶감 있고 연계 있고 조개 있어 제사상은 걱정 없다” 옹녀가 반소(半笑)하고 갚음을 하느라고 변강쇠의 기물을 어루만지며 한 가닥 곡조를 빼어 읊었다.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전배사령(前培伺令) 서렸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군노(軍奴)런가 복떠기를 붉게 쓰고 냇물가의 물방인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는지 맑은 코가 웬일인가, 성정(性情)도 혹독하여 화가 나면 눈물 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괴였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장이궁이 그저 있다. 뒷 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구나. 소년인사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있다. 물방아 절구대며 쇠고삐걸랑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두 남녀는 서로 뜻이 맞아 부부로 인연을 맺고 각처를 떠돌며 옹녀는 애를 써서 들병장수 막장사를 할 때 변강쇠는 낫부림 넉장기, 갑사꼬리 여사하기, 미골 지패 퇴기질, 호흥호백 쌍육치기, 장군 멍군 장기 두기, 맞춰 먹기 돈치기와 불러먹기 주먹질 고패 떼기 윷놀이와 안집 뒷집 고누두기, 의복 전당 술 먹기와 남의 싸움 가로막기, 강새암 계집치기, 밤낮으로 싸움질을 일삼았다. 이에 옹녀는 변강쇠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하고 동반살이 하다가는 돈 모으기는 고사하고 남의 손에 죽을 테니 깊은 산에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산전이나 파서 먹고 땔나무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 할 터요, 강짜도 않을 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세” 그리하여 그들이 들어간 산이 지리산이다. 변강쇠는 이곳으로 이사 온 후로는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애끓게 하소연하다 나무라도 해 오라 했다. 변강쇠는 하는 수 없이 아내의 청에 따라 지게를 지고 담뱃대를 물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게으른 강쇠가 산에서 낮잠을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땐 하늘에 별이 총총하였고 이슬이 내리었다. "요새 해가 왜 그리 짧은가, 빈 지게 지고 가면 계집년이 방정 떨리.” 사면을 둘러보니 마천가는 길에 장승이 하나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 "벌목 정정 애 아니 쓰고 좋은 나무 거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불로소득 좋을시고” 지게를 찾아지고 장승 선 곳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하며 "네 이놈, 누구 앞에 색기하여 눈망울을 부릅뜨냐, 삼남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과거 마천 파시평과 사당놀음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 칠 때 후취덜미 가리딴죽 열두권법 범강장달 허네라도 다들 앞에 떨어지니 수족 없는 네깐 놈이 생심이나 바랄쏘” 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두름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우댓군 소리하며 제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를 장히 편다. "집안사람 거기 있나? 장작나무 하여 왔네” 뜰 가운데 턱 부리고 방문 열고 들어가니 강쇠 계집 반기느라 손목 잡고 어깨 주무르며, "어찌하여 그리 저물었나. 평생 처음 나무하러 가서 오죽이나 애썼겠는가, 시장한 데 밥이나 자시오” 방안에 불 켜놓고 밥상 차려 드린 후에 장작나무 구경차 불 켜 들고 나와 보니 어떠한 큰 사람이 뜰 가운데 누었는데 조관(朝官)을 지냈는지 사모품대 갖춰 입고 방울눈에 주먹코 채수염이 점잖았다. 여인이 뒤로 팍 주저앉으며, "애고, 이게 웬일인가 나무를 하러 간다더니 장승을 빼어 왔네 그려, 나무가 아무리 귀해도 장승을 빼어 땐단 말을 언문책 잔주에도 없는 말, 만일 패어 땐다면 목신동통 조왕동증 목숨 보존 못 할 테니 어서 지고 가서 제 자리에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오소” "가장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을 것이지 계집이 요망하게 그것이 웬 소린고. 나무 깎은 장승 인형을 패어 땐들 무슨 관계있나. 망할 말 다시는 하지 말라.” 강쇠는 밥상을 물린 후에 도끼로 장승을 패서 군불을 놓고 유정부처 홀딱 벗고 사랑가를 불러가며 개폐문(開閉門) 절판례(絶版禮)를 멋지게 하였다. 이때 장생목신 무죄하게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나고 부엌 속에 탄 재가 오죽이나 원통할 것인가. 의지할 곳 없이 중천에 떠서 울렴. 나 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 갚겠다. 대방전에 찾아가서 이 원정 하소연하오리다. 노들 선창목에 대방장승 찾아가서 문안을 한 연후에 원정을 아뢰니 대방 크게 놀라 "이 변이 큰 변이라.” 하고는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作破) 화장하였으니 이놈 죄를 물어 벌하고자 하니 금월 초사흘 삼경에 노들선창으로 일제 취회하여 함양 동관 조상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하여 주옵소서.” 하고 팔도 장승에게 통문을 냈다. 귀신의 조화라 오죽 빨리 전했겠는가. 조선의 장승 하나도 빠짐없이 기약한 밤에 다 모여 새남터 배게 서서 시흥 읍내까지 빽빽하였다. "통문사를 보았으면 모든 뜻을 알 터이니 변강쇠 지은 죄를 어떻게 다스릴꼬?”"교수형에 처합시다”"불로 태워 죽입시다.”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그놈을 쉬이 죽여서는 설치가 못될 터이니 고생을 실컷 시킨 후에 죽이되 열아흐레 동안 장승 화장한 죄인 줄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될 터이니 우리 식구대로 병 하나씩 가지고서 강쇠의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오장육부 내외 없이 벽에 도배하듯 겹겹이 발랐으면 그 수가 좋을 듯하오” 대방이 그 말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히 좋소, 그대로 시행하되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전라 경상 차지하고 오장육부 내장일랑 경기 충청 차지하며 팔만사천 털구멍도 빈틈없이 병을 단단히 잘 발라라” 이렇게 하여 변강쇠는 조선에 있는 모든 장승이 가지고 온 수백 가지의 병에 드러눕게 되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봉사를 데려와 점을 치고 명의를 데리고 오지만 치료가 불가하였다. 결국, 변강쇠는 죽고 말았다. 옹녀는 강쇠의 초상을 치러주는 이가 있다면 그와 함께 살고자 하였다. 먼저 중이었다. 그러나 변강쇠의 시체를 만지자마자 그만 죽고 말았다. 초라니 풍각쟁이 마종 떱뜩이들도 옹녀의 새 남편이 되기 위해 변강쇠를 초상 치르려고 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이상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지만, 변강쇠전은 겉으로 보면 남녀 간의 색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외설적인 작품으로 보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하층민들의 비극적 생활상과 종교관, 내세관 등과 결부되어 있으며 전설로서의 이 변강쇠전은 무분별한 성문화를 응징하기 위한 이야기로서 오늘날 문란해진 성 문화에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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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3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장승은 우리가 집단으로 삶을 영위했던 전통마을의 대표적인 공동체 신앙물로써 마을 또는 절 입구나 길가에 세워 둔 사람 머리 모양을 조각한 기둥으로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 등이 있다. 장승의 유래와 기원을 살펴보면 고대의 남근숭배에서 나온 것, 고려 시대 재화를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 불교 행사나 사찰 보수, 그리고 병자나 빈민을 구제하는 데 쓰기 위해 사찰에서 설치한 금융기관이었던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목장승은 부족국가 시대의 솟대(소도-蘇塗)에서, 석장승은 선돌[입석-立石]에서, 돌무더기로 만든 제당(祭堂)의 하나인 누석단(累石壇)에서 비롯되었다는 둥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 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 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 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목 등의 이름을 가졌다. 장승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지역과 지역의 경계표 구실과 길가에 장승을 세워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몇 리가 떨어졌고 이웃 고을 이름이 무엇인가를 기록해 두어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및 이정표 구실도 했으며,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의 수호신 역할과 개인의 소원성취(득남, 풍년, 풍어, 건강)를 기원하기도 했는데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里程) 표시는 없으며 ‘천하대장군’ 등의 표시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장승을 서낭당, 산신당, 솟대와 동등한 신물(神物)로 인정하며 동제(洞祭)의 주신 또는 하위 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는 장승에게 빌거나 제사를 지내 화를 피하고자 하였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생김새는 인면형(人面形), 귀면형(鬼面形), 미륵형(彌勒形), 남근형(男根形), 문무관형(文武官形) 등으로 나뉜다. 인면형의 경우 남장승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덧니와 수염을 단 형상이며, 더러는 몸체가 붉게 채색되기도 한다. 반면 여장승은 관이 없고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몸체를 청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귀면형은 왕방울 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미륵형은 불상(佛像)과는 달리 꾸밈이 없이 수수하며 자비스럽고 친밀감이 있다. 이 밖에도 석비형, 입석형, 석적형 등이 있다. 장승의 모양은 장소에 따라 채색, 형상, 크기 등이 다르나 모양이 괴엄(魁嚴)한 점만은 일치한다. 얼굴을 아주 무섭고 험악하게 만든 이유는 염병, 마마 등 병귀나 액귀(厄鬼)를 쫓아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장승의 명문(銘文)으로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 주류지만,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등의 방위 신장류,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定界), 금귀(禁鬼), 수소대장(受昭大將) 등의 호법 신장류, 풍수도참과 결부된 진서장군(鎭西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의 비보(裨補) 장승류, 두창(痘瘡) 장승류 등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장승 본연의 기능도 변하였고 명문도 다양화되었다. 마을 이름이나 안내판 또는 전시물, 장식물,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물과 신앙체로서 시국 장승을 깎아 세웠고 명문은 ‘민족통일 대장군’, ‘백두대장군, 한라여장군’ 등이 있으며 지리산 노고단과 문경새재, 계룡산 등지에 ‘민족통일 대장군, 평화통일 여장군’을 세웠다. 이는 전통적인 형식으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고 마을과 국가의 단결을 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부터 전해지는 장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중 ‘장승이 마련해 준 삼백 냥’이라는 이야기는 박문수 어사 행장기 중 하나로 전해지는 작가 미상의 이야기인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 모양새를 하고 여기저기 팔도를 돌아다니던 때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서 주막에 들었는데, 봉놋방에 들어가 보니 웬 거지가 큰대자로 퍼지르고 누워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본체만체하고, 밥상이 들어와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튿날 아침 거지가 "보아하니 댁도 거지고 나도 거진데,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같이 다니면서 빌어먹는 게 어떻겠소?” 하고 말을 거니 박문수도 영락없는 거지꼴이라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짐짓 "좋소, 그럽시다”하고는 그날부터 둘이 이곳저곳을 같이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마을 큰 기와집으로 썩 들어선 거지가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지금 이 댁 식구 세 사람 목숨이 위태롭게 됐으니 두말 말고, 지금 당장 마당에 멍석 깔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시오. 안 그러면 세 사람이 죽소”라고 하였다. 여인은 사람이 죽는다고 하니 엉겁결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 이 집 남편은 아들 둘을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자, 비를 피하기 위해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그때 저 아래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다. 어서 내려가자.” 급한 마음에 부리나케 내려오는데 뒤에서 큰 바위가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위험을 모면하고 내려온 남편은 전후 사정을 듣고 거지에게 절을 열두 번도 더 하면서 "우리 세 사람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내 재산을 다 달라고 해도 내놓으리다” "아, 정 그러면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돈 백 냥을 받았다. 받아서는 대뜸 박문수를 주는 게 아닌가. "이거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테니.” 박문수가 가만히 보니 이 거지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돈 백 냥을 받아서 속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며칠 후 어떤 마을로 가게 됐다. 그 동네 큰 기와집에서 온 식구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거지는 망설임 없이 박문수를 데리고 그 집으로 쑥 들어갔다. "이 댁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슬피 우시오?” 하니 "우리 집에 7대 독자 귀한 아들이 지금 병이 들어 다 죽어갑니다” "어디 내가 한 번 봅시다.” 그러더니 병 든 아이가 누워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들어가선 주인에게 말했다. "아이 손목에 실을 매어서 그 끄트머리를 가져오시오.” 미덥지 않았으나 주인은 아이 손목에다 실을 매어 가지고 왔다. 거지가 실 끄트머리를 한 번 만져보더니 "뭐 별것도 아니구나. 저기 바람벽에서 흙을 한 줌 떼어 오시오” 하더니 동글동글하게 환약 세 개를 지었다. 주인이 환약을 받아 아이한테 먹이니 다 죽어가던 아이가 금방 말짱해졌다. 주인이 그만 감복해서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7대 독자 귀한 아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내 재산을 다 달란 대로 드리리다.” "아, 그런 건 필요 없고 돈 백 냥만 주구려.” 이렇게 해서 또 백 냥을 받아서는 다시 박문수를 주었다.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거요.” 다시 길을 가다가 보니 큰 산 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웬 행세깨나 하는 집에서 상을 당해 장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니더니 마침 하관을 끝내고 봉분을 짓는 데 가서는 "에이, 거 송장도 없는 무덤에다 무슨 짓을 하나?”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일하던 사람들이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 그래, 이 무덤 속에 송장이 있으면 어떡할 테냐?” "아, 그럼 내 목을 베시오. 그렇지만 내 말이 맞으면 돈 백 냥을 내놓으시오.” 일꾼들이 달려들어 무덤을 파헤쳐 보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과연 송장 든 관이 없었다. "내가 그걸 찾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염려 말고 북쪽으로 석 자 세 치 떨어진 곳을 파보시오.” 그곳을 파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 관이 턱 묻혀 있었다. "여기가 명당은 천하명당인데 도둑혈이라서 그렇소. 지금 묻혀 있는 곳에 무덤을 쓰면 복 받을 거요.” 이렇게 해서 무사히 장사를 지내고 나니 상주들이 고맙다고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묫자리를 이렇게 잘 보아주셨으니 우리 재산을 달란 대로 다 내놓겠습니다.” "아, 그런 건 필요 없으니, 약속대로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또 돈 백 냥을 받았다. 그리곤 역시 박문수를 주었다. "이것도 잘 간수해 두오. 반드시 쓸데가 있을 거요.” 어느 날 첩첩산중이라 한참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거지가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만 이별해야 하겠소” "아, 이 산중에서 헤어지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오?” "염려 말고 이 길로 쭉 올라가시오. 가다가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그러고는 거지는 연기같이 사라졌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장승 하나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웬 처녀가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빌고 있었다. "장승님! 장승님!, 영험하신 장승님!. 우리 아버지 구원 백일 정성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꼭 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처녀에게 박문수가 "무슨 일로 이렇게 빌고 있소?” 하고 물으니, 처녀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관청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인데, 심부름 중에 나랏돈 삼백 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일까지 돈 삼백 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지 않으면 아버지 목을 벤다는데 돈을 구할 길이 없어 여기서 백일 정성을 들이는 중입니다” 하였다. 박문수 어사는 거지가 마련해 준 돈, 삼백 냥이 떠올랐다. 반드시 쓸데가 있으리라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생각했다. 돈 삼백 냥을 꺼내어 처녀한테 건네줬다. "자, 아무 염려 말고 이것으로 아버지 목숨을 구하시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 그런데 그 처녀가 빌던 장승이 비록 나무로 만든 것이지마는 박문수 어사가 가만히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같이 다니던 그 거지 얼굴을 쏙 빼다 박은 게 아닌가! 이렇듯 장승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선하고 정 많은 우리의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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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1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옛길을 걷다 보면 마을 어귀나 고개 위에 서낭당이 있고 장승이 서 있다. 문경에도 신현리 돌고개와 문경새재 옛길을 비롯해 마을마다 토지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요즈음 장승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문경시 공평동 ‘장성백이’ 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 입구와 영순면 금림리, 산양면 진정리 등 일부에서만 볼 수 있다. 서낭당은 대개 마을 입구에 있어 마을에 들어오는 액(厄)이나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주고 풍년을 기원하는 곳이며. 동제(洞祭) 혹은 마을굿, 당제, 당신제 등의 이름으로 마을마다 미리 정해져 있는 날에 주기적으로 제사나 굿을 여는데 그 주된 기원 역시 제액초복(除厄招福, 액을 막고 복을 부름)을 비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서낭당은 신성한 곳이며, 서낭당 앞에서는 부정한 행동이나 말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특히 서낭당의 신목(神木)에 해를 가하거나 쌓인 돌이나 돌탑을 훼손시키면 재앙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며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하고, 침을 세 번 뱉는 행위를 하면 재수가 좋고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으며 돌탑이 완성되면 돌을 정성스럽게 쌓은 사람들의 소원도 다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목이 오래되어 수명을 다해 고사했는데도 베어내지 못하는 것은 나무를 베는 사람이 큰 병이 들거나 급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서낭나무와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累石壇)이 함께 있는 것, 둘째는 누석단만 있는 것, 셋째는 서낭나무만 있는 것, 넷째는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것, 다섯째는 입석만 있는 것이다. 또 서낭나무에는 때 묻은 저고리, 동정, 백지(창호지), 모발, 기혈(器血-그릇에 담은 피), 엽전이나 재물, 베 조각, 5색 비단 조각, 짚신, 짚으로 만든 방망이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각각의 물건들에는 기원의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환자가 입던 저고리 동정을 거는 것은 서낭신이 병을 거두어 가라는 뜻이었고, 백지를 거는 것은 행운과 초복의 기원이며, 베 조각은 아이의 장수를 비는 것이며, 엽전이나 재물을 바치는 것은 재리(財利)를 많이 획득하기 위해서며, 치마를 걸어 놓는 것은 분가할 때 나쁜 귀신이 못 따라오게 하기 위함이며, 오색 천을 다는 것은 서낭신께 드리는 예단이다.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의 본딧말이라고 하나 일부 학자들은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지만 엄격히 구분하자면 성황당은 동네 뒷산에서 마을을 굽어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에 있고 한 칸짜리 당집으로 지어져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 것이며, 서낭당은 동네 어귀에 돌무더기, 나무 등으로 모시고 오색천이나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을 감고 있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성황은 마을을 보호하고 지키는 군주(君主)의 위치이고 서낭은 마을 어귀에서 적(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병사의 위치라고 한다. 지방에 따라 서낭당, 성황당(城隍堂), 할미당(전라남도), 천왕당(경상북도), 국사당(國師堂-평안도) 등으로 불린다. 장승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웠는데 조선 태종 14년에 10리마다 소후(小堠)를 30리마다 대후 (大堠)를 설치하여 1식(一息)으로 삼으라는 지시를 하였으며, 나무를 심거나 돌무더기를 쌓도록 하였고 장승도 그 일종으로 나그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한편 나쁜 귀신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했다.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들었으며 치켜 올라간 눈, 큼지막한 주먹코,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해학적이면서도 무서운 느낌을 준다. 이런 무서운 얼굴에는 악귀나 병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소박한 뜻이 담겨 있다. 장승은 주로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는데 대다수가 남자 장승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 장승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낭당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서낭 신앙이 전래한 것은 고려 문종 때로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고 한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神號)를 가봉(加封)하였던 일도 있었고,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서낭당이 생긴 유래는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가장 크며, 서낭 신앙에는 내세관이 없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일설에는 서낭당은 중국의 성황(城隍)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나 분명치 않으며 옛 중국 주나라 강태공의 부인과 얽힌 서낭당 유래 전설이 남아 있다. 강태공은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을 때 매일 같이 낚시만 하고 다니는 강태공이 집안일은 돌보지 않아 살기가 힘든 아내가 항시 불평이 가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의 부인이 멍석에 널어놓은 피가 소낙비로 다 떠내려가는데도 강태공은 이를 덮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아내가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 강태공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강태공이 천하를 주유하는 중에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문왕을 만났고 언행이 남다른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재상이 된 강태공이 금의환향 돌아오는 길에 들에서 피를 뜯던 한 여인이 강태공을 찾아와 나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강태공을 버리고 떠난 아내였다. 강태공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 오게 한 후 물을 땅에 부어 버리면서 하는 말이 "어디를 가지 말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이 바가지에 물이 가득하도록 담으면 너와 같이 살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너의 원을 들어줄 수 없다” 하니, 여인이 "여보 우린 그때 가난해서 피죽으로 연명하고 살았는데 당신과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이 다 떠내려가는데도 그냥 책만 읽고 있었던 당신도 잘한 것이 없으니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였으나 강태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아내는 어떻게 하든 바가지에 물을 채워 함께 살아 보려고 흐르는 눈물과 침을 바가지에 담기 시작했고,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했으나, 끝내 강태공이 원하는 만큼은 채워지지 않았고 무심한 듯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버리고 여인은 그만 지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강태공은 죽은 옛 아내를 뒤로하고 길을 떠났고, 죽은 여인의 시신을 치워 줄 사람이 아무도 없자 지나는 길손들이 하나둘 돌을 던져 그의 시신을 덮어 주게 되었고, 그렇게 쌓인 돌무더기가 서낭당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한을 품고 죽은 강태공의 아내가 침과 눈물로도 못다 채운 바가지에 침을 뱉어 주어 죽어서라도 그 한을 풀도록 하겠다며 지금도 서낭당을 지나는 길손들은 서낭당에 돌 셋을 던져 탑을 쌓아 주고 침을 세 번 뱉고 가는 풍습을 남기게 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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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잃어버린 도깨비, 항간에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한다. 도깨비를 몰아낸 이들은 누구인가? 어두컴컴한 밤에만 출몰하던 도깨비들이 밤을 낮처럼 쓰는 전깃불에 밀려 산으로 바다로 도망 다니다 종내는 사라지고 말았다. 탄소문명이 도시 밖으로 몰아낸 것들이 어찌 도깨비뿐이겠는가. 밤이면 밤마다 마을이면 마을마다 도깨비들과 함께 살았던 우리들에게 이 상실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밤도 없고 낮도 없으니 만물이 소생하는 아침도 없고 만물이 죽는 저녁도 없다.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니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모호해지는 것 같다. 여러 나라들 중 자살률 일등한지가 십 수 년이 넘었고 고독사율마저 그 상위를 점하려 한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는 거대한 공룡처럼 웅크리고 앉아 도대체 도깨비들의 출몰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이 문명의 공룡들은 들과 늪을 메우고 야산과 숲을 깎아 빌딩들을 세우고 길을 냈다. 디지털문명을 앞세워 광선과 광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단축하니 마을의 안과 밖이 또한 사라져 버렸다. 이 공룡이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끝이 어딘지 흐리멍덩한 내가 알 길이 없다. 선과 악을 명료하게 분별한다는 이들만이 도심을 배회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땔나무꾼들은 어디 낄 자리가 없다. 나는 이 문명의 끝이 두렵다. 단지 소망할 뿐이다. 그저 도깨비처럼 다소 멍청하고 혹은 익살맞고 때로는 엉뚱하게 서있고 싶은 소망,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그저 마을과 숲, 이것과 저것의 경계에 서 있는 먹빛의 존재 말이다. 왕도깨비, 그 많던 도깨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자 없던 구술시대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도깨비 이야기가 정보전달의 전부였다. 문자 있던 시대에도 문자로부터 소외된 민중들은 입에서 입으로만 도깨비를 이야기했다. 어느 시기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조각과 도상과 부조들의 형상이 도깨비의 일부 기능을 대신했다. 하지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어서 접하는 도깨비가 우리 문화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점, 큰 이견을 내기 어렵다. 문자가 생기고 문자를 독점하는 지배세력들이 각종 도상과 문양으로 도깨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더러는 이데올로기를 얹고 더러는 지배집단의 욕망들을 뒤집어씌워 사람살이에 대한 해석을 가하거나 올가미를 씌워 구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숲과 늪과 도랑과 둠벙들, 바위와 돌과 나무와 더러의 인공물들에 투사했던 도깨비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념들이 쉽게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랴야마지준이 기록한 '조선의 귀신'이나 초기 민속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도깨비라는 맥락으로 모을 수 있는 이름들이 수백 개, 아니지 천여 개를 웃돈다.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청각 중심의 도깨비들이었다. 상상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도깨비들이 되었거나 엉뚱한 장소에서 탄생했던 존재들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의 오니가 막중한 영향을 끼쳤다. 불교적으로 도덕적 징치나 공간 경계의 문지기를 맡았던 관념들이자 형상들이었지 않나. 사실은 대부분 형상 없던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나타나거나 도깨비감투를 쓰고 나타나기도 하고 큰 혹을 달고 나타나기도 했다. 머리에 뿔이 두 개 달렸느니 하나 달렸느니 다투기도 하고 외다리 독각귀였던 도깨비들이 멀쩡한 두 다리로 달리기를 하는 등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면으로 크게 변화되었다. 한국 민화의 중시조라는 조자용은 귀면와에서 장승까지 유사 형상들을 모두 포섭해버렸다. 일본의 오니에 대해 한국의 이미지가 강조되고 여성적인 귀신에 대해 남성성으로서의 도깨비가 강조되며 민족이나 나라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왕도깨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청각 중심의 도깨비 이미저리가 시각 중심으로 급변하게 되는 시대를 마치 한 계절의 바람처럼 그렇게 지나왔다. 경계의 스토리텔러, 호모나랜스들을 기다리며 한동안 나는 의심했다. 그 많던 도깨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던 것일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확인했다. 청각의 시대, 시각의 시대를 거쳐 이제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구별 너머 어딘가, 아니면 마을 숲 바위틈 어딘가, 아니면 지금은 없어져버린 마을 둠벙과 늪과 개펄 어딘가에서 발신해오는 도깨비들의 수런거림을. 거대한 산악의 신들과 장대한 바다의 신격들 틈바구니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이지대에 출몰했던 마치 우리네 민중 같은 도깨비들 말이다. 거기에는 도깨비들에게 투사했던 우리들의 추억과 회상과 욕망들, 누군가에게 전가했던 책임과 의무들, 아! 무엇보다 지극하고 그윽한 사랑들이 겹겹이 포개져있다. 누구에 대한 사랑인지는 보고 듣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 전혀 엉뚱한 결론을 만들어내는 녀석이 도깨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웅장함과 비장함에 가려 존재감을 잃어버렸던 하찮은 것들에 주목할 뿐이다. 쓰이지 않은 행간과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읽는 이유라고나 할까. 이제 보이는가. 저기 저만치 북장구 들쳐 매고 낄낄대며 걸어오고 있는 이들. 찢어진 청바지에 히피복색을 두른 저 도깨비들. 탄소문명의 세례를 듬뿍 받은 도심에서 밀려나 개펄과 숲과 늪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저들 말이다. 이들은 남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자들이고, 불과 기둥이라기보다는 물과 하찮은 나무 조각들이다. 서양이라기보다는 동양이고 중국이나 일본이라기보다는 한국이며 도심보다는 시골마을이고 가진자들 보다는 못가진자들 아, 무엇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먹빛의 사람들이다. 나는 기다린다. 끊임없이 스토리텔링하는 호모나랜스(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폰깨비,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간 도깨비 더 획기적인 변화는 새천년을 시작하던 벽두 월드컵의 붉은악마와 올림픽과 촛불집회 등을 겪으며 우후죽순 나타났던 도깨비들이다. 그 많던 이미지들이 치우라는 캐릭터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민족주의니, 국수주의니 해명한다고 해서 도깨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치우가 도깨비가 아니라고 외친들 도도한 영상시대의 이미지 중심 시선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해서는 앞서거니 뒷 서거니 도깨비들의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청각의 시대, 혹은 다중시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이 또한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스마트폰을 '폰깨비'라 부르고자 한다.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낄낄대거나 겉으로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들으며 조잘거리는 것, 이것이 전통적인 도깨비들의 특징 말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도깨비들은 그동안 얼마나 웅얼거리거나 조잘거리고 싶었을까? 말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는, 말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호모나랜스들임에 틀림없다. 몸과 분리된 혼들이 밤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공포를 이겨내며, 혼잣말하는 미친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고 살던 그 풍경들이 제4차산업시대라는 세기의 벽두에 다시 소환되고 있는 셈이다. 폰깨비, 이 용어는 근자에 트렌드가 된 '인싸용어(줄임말)'이기도 해서, 가상세계의 캐릭터들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전깃불을 들여와 몰아냈던 도깨비들이 사뭇 다른 형국으로 소환되는, 이것은 분명히 또 하나의 도깨비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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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신통방통 지명 이야기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지명(地名)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낸 어떤 고장이나 장소, 즉 마을이나 지방, 산천, 지역 따위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지명을 언제 누가 지어 불렀는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다수 지명은그 고장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산, 강, 고개, 들, 골짜기 등과 같은 땅의 모양과 위치, 특성을 나타내거나 역사, 전설, 설화 등에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 마을은 ‘양짓마’나 양촌리로, 서당이나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동이나 향교리, 효자가 난 마을은 효자동,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은 장승배기, 배가 드나든다고 뱃나들 등과 같다.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예언이 함축되어 있고 앞날을 예견하는 지명이 있어 수백 년 아주 먼 후일 그 지명이 뜻하는 바대로 실현되는 곳이 많으며, 사람의 이름에도 길흉이 있고 이름이 주는 의미가 그 사람의 삶과 일치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경북 울진 온정리와 같이 따뜻할 온(溫) 자가 들어간 지명이 있는 곳에서 온천(溫泉)이 개발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먼저 사람 이름에 대해서 알아보면‘성명의 좋고 나쁨이 운명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짓거나 풀이하는 점술을 철학에 빗대어 이르는 말’로 성명학(姓名學)이 있다. 사람의 성명은 물론 상호, 회사명, 단체명, 지명 등의 이름에도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존재한다고 믿고 우주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 해로운 이름은 피하고 이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가(作名家)를 찾아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이틀 앓고 3일째 죽는 것) 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좋은 이름 짓기를 원하며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다가 더 좋은 뜻과 운기(運氣)가 있는 이름으로 개명(改名)하는 사람도 있다. ‘안득기’라는 학생이 있었다. 공부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에게 걸려서 "너 이름 뭐꼬?” 하니 " 안득깁니다”하니 "뭐 안드낀다꼬” 학생은 자기 이름을 말했는데 선생님은 ‘안 들린다’라고 장난치듯 말하는 것이라고 오해, 성이 나서 혼을 냈다는 것인데 이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야기다. 그리고 ‘노상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더니 노상 술을 마셨다는 사람이 있었고 ‘오미자’란 이름을 가진 여성분이 ‘문경오미자축제’에 오셨다가 오미자란 이름을 가진 덕분에 오미자 선물을 받아 가기도 하고 ‘김말자’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여성분께서는 어린 시절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부모를 원망하며 부끄러워했는데 나중에 결혼하고 ‘김밥집’을 내었는데 운명인 듯 김말자 이름대로 김을 말아 판매해 대박이 나서 부자가 되고 난 뒤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에게 감사했다는 등 이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로 옛날부터 전해오길 ‘월악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날이 오리라' 했다는데 충주댐이 들어서서 예언대로 월악산이 호숫물에 비쳤고, 충주댐이 들어선 곳의 옛 지명이 ‘물막이골’이라 했는데 물 막는 댐이 생겼으니 놀랍고, 1992년에 기공식을 개최하고 청주공항이 들어설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이 활주로 양쪽 끝 마을 이름이 각각 비상리(飛上里)와 비하리(飛下里)였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방향에 비상리(飛上里-청원군 내수읍)가 있고, 비행기가 착륙하는 방향에 비하리(飛下里-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가 있고, 관제탑이 들어선 자리에는 관제리(管制理)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니 마치 이 지역 조상들께서 이곳에 비행장이 들어설 것을 예견하는 선견지명이 있으신 듯 신기롭고 신통스럽다.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에 ‘하품리(下品里)’라는 마을이 있다. 하품리는 조선 시대 때 정승이 세 분이나 살았던 곳이라‘품실(品室)’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분동(分洞) 되면서 위쪽은 상품리(上品里), 아래쪽은 하품리(下品里)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농촌 지역이라 농산물을 생산하여 출하(出荷)하면서 산지(產地)를 표시하는데 ‘하품(下品)’이라 하니 아무리 우수한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해도 질 낮은 하품(下品) 취급을 받는 듯한 어감으로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졸릴 때 하는 나오는 ‘하품’한다는 느낌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 2005년 주민들이 행정기관에‘정품리(正品里)’로 개명을 요구하였는데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13년 9월 명품리(明品里)로 변경되었다. 경북 문경시 동로면에는 ‘수평리(水坪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 수평리는 예로부터 ‘넓은 들판에 물이 차서 수면이 평평하게 된다’는 풍설(風說)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1986년 12월에 준공한 경천댐이 생겨 옛사람들이 예견한 수평(水坪)이란 이름 그대로 ‘물이 평평한 마을’이 되었다. 경천댐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인 황장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상류인 금천을 막아서 만든 전형적인 계곡형 저수지로 물이 맑으며 수심이 깊고 넓은 호수다. 호수 위쪽에 있는 ‘천주봉(天柱峰)’과 주변의 산과 나무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각각 특색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치면 그 수려한 풍경이 일품이다. 그리고 연못에서 용이 승천한 마을, 또는 큰 못에서 용이 나타나 뒷산으로 올라가 마을을 지킨다는 ‘용연리(龍淵里)’가 문경읍에 있다. 여기에 2014년에 준공된 문경댐이 생겼다. 그리고 용연리에 인접한 곳에 평천리(平川里)가 있고 수평동(水平洞)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다는데 이 또한 신비스럽게도 이름에 걸맞고 지명이 예견한 대로 용이 살다 승천하는 큰물이 모인 댐이 생긴 것이다. 이렇듯 재미있는 이름 이야기와 우연인 듯 아닌 듯 앞날을 예견하는 ‘신통방통 지명 이야기’를 마친다. 구름나무/ 이만유 경천호에 천주봉 비치면 한 그루 구름나무에 물을 준다 하루 잠시 스치면 두둥실 하늘 닿는 마음을 삼류 로맨스로 전락시키기 싫어 탈 쓴 주인공이 되었다 어느 날 바람 스쳐 지나고 휑하니 텅 빈 그 자리에 그리움은 목이 긴 한 마리 학이 되었다 한줄기 불씨 봄눈 녹듯 사라지고 노을 지는 어스름 길에 호수 위 떠 오르는 별을 마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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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1/694쪽’의 아리랑(상)삼목 作 1984년 초, 삼목은 경기도의 한 사립중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86아시안 게임 개최가 발표되면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담론 속에서 아리랑, 김치, 태권도, 호랑이 같은 민족 상징에 대한 의미화 논의가 문화계 전반에 화두가 되어 있을 때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목도 열열하게 아리랑 자료 수집과 자라매김에 매진하고 있었다. 삼목이 새 학기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 출석부를 위치시키고 돌아설 즈음, 교무주임이 전화 받으러는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아 김씨, 나 장승백이 김이요. 오늘 서울에 오나요? 아리랑 자료가 나왔어요. 어, 비싸서 권하기는 좀 뭐 한데, 이게 만주국에서 나온 귀한 책이에요. 오늘을 넘기면 돌려주어야 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 거요. 가격은~” 삼목은 어차피 토요일이라 서울 집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부리나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대지극장 앞에서 내려 다시 노량진행 버스를 타고 진오서적(당시 고가의 문학서적 위주로 판매하던 고서점) 근처 다방에서 여차저차한 사정을 들어 월급 날 값기로 하고 양도를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여러 번 망설이고, 많은 생각 끝에 한달 원급에 반을 더한 가격으로 샀다. 문헌 소재 ‘아리랑’은 거의 부속적으로 존재한다. 표제標題가 ‘아리랑’인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제가 다른 컨텐츠 속의 하나로 끼어있거나 일부로 언급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끼어있는 경우는 잡지 속에 수필이나 시나 단편 소설 한편이 들어있는 경우이고, 일부로 언급 되는 경우는 어떤 이의 수필 속에, 회고기 속에 에피소드로, 또 아니면 ’아리랑을 불렀다‘ 정도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입수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전체 값을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억울한 여건을 감수하고 값을 치르는 것이다. 삼목이 구입한 책 중에 거의가 이런 경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값을 치루고 산 것이 바로 ‘장승백이 김선생’(고서 중개인 중에는 매우 신사다운 분으로 일본어 번역에 능통한 분, 1990년대 말 작고)에게서 구입한 ‘半島史話와 樂土滿洲’이다. 1943(강덕10)년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만선학해사滿鮮學海社가 발행한 책이다. 이 출판사는 당시 만주국의 지원으로 발행 되던 ‘만선일보’ 필진들과 만주국 조선인 문인들이 정주하던 곳이다. 시기상으로 한반도에서나 만주에서 낸 책으로는 순 한글로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사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목차 첫머리는 대일본제국총리대신 장경혜, 중화민국정부주석 왕정위, 前조선총독 남차,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 사회 지도자 윤치호의 서문을 필두로 한 148항목의 방대한 책이다. 내용에서는 오세창의 기념 휘호를 비롯하여 역사학자 이병도, 만주건국대교수 최남선, 법학자 유진오, 작가 이광수, 민속학자 고유섭, 시인 이은상, 음악학자 함화진, 기자 차상찬, 신학자 채필근, 시인 윤해영 등의 그과 작품을 수록한 총 694면, 오늘날의 A3 싸이즈 대형 판형 책이다. 이런 책에 ‘아리랑’이 들어있었다. 속된 말로 148항목 중 1편의 시속에, 694면 중 단 한 면에, 끝에서 두 번째 쪽에서, 그것도 딸랑 ‘14줄 중에 아-리-랑’ 3자가 들어있을 뿐이다. 시 ‘樂土滿洲’, 윤해영尹海榮 작품이다. 낙토만주樂土滿洲 一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 광이 두르자 三끝없는 地平線에 五穀金波 굽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先驅者 한 千年 歲月後에 榮華萬歲 빛나리 제3절 2행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에서 ‘아리랑’이 나온다. "이렇게 작품의 표제에서도 아니고 시행의 한 어휘로 나온다. 이것도 아리랑 자료로 취급할 수 있나? 또 가치가 있나? 윤해영은 어떤 사람인가?” 삼목이 이 책을 살 때 수 없이 머리 속으로 되물었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목은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미군정청 발간 독도 자료 수록 잡지 창간호와 사운 이종학 선생과 맞바꾼 ‘解放歌謠’라는 노래책 속 윤해영 작사 ‘滿洲 아리랑’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윤해영이 ‘아리랑’을 일회적인 시어로만 인식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인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1947년 발간된 ‘해방가요’의 ‘滿洲 아리랑’은 이렇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一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二 말발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三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윤해영 시, 김기진 작곡, 백년설(1915~1980) 노래로 태평레코드사에서 1941년 12월에 음반으로 나왔다. ‘나그네 설음’과 ‘번지없는 주막’으로 명성을 날린 백년설의 유명세로 보면 만주와 한반도에서 ‘아리랑 만주’도 널리 불렸음이 짐작된다. 그런데 두 편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만주 봉천’, 삼목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두 분 있었다. 어린 시절 설 명절이 되면 두 분이 사촌들과 함께 설을 지내러 서울에서 왔다. 3일 정도 들은 이야기들이지만 화로를 감싸고 듣던 대부분은 만주 봉천에서 살다 해방이 되어 평안도 남시(사촌 형 중에 ‘봉천’과 ‘남시’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데, 그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란다.)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 온 이야기다. 삼목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4촌 누이는 눈물을 훌쩍이며 듣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삼목이 또랑한 기억으로 담고 있는 것은 "왜놈들에게 속아서 만주로 간 거지”라든가 "그때 만주 신경은 지금 서울보다 더 좋고말고”라든가, "만주가 망하지 않았다면 일본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됐을거고, 설 쇠러 그 곳으로 왔을 것인데~ ”이다. ‘낙토만주’와 ‘만주 아리랑’, 두 작품의 여운이 묘했다. ‘속았다’와 ‘좋았다’로 읽혀지며 아리랑의 정서를 흔들었다. 이상한 이런 감정은 왜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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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솟대·120년 된 상엿집... 온라인 콘텐츠로 민속현장 재현장승과 솟대, 상장례 문화 등 우리 민속 현장의 생생한 의례의식을 살필 수 있는 모습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온라인 자료가 공개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현장 내용을 온라인 콘텐츠로 구현한 '장승·솟대조사대작전'과 '삼척맹방리상엿집'을 민속박물관 누리집에 공개했다고 5일 밝혔다.'장승·솟대조사 대작전'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전국의 장승솟대 442건을 조사한 민속조사의 고전을 재해석했다. 장승과 솟대는 마을의 경제적 번영과 구성원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현재 장승과 솟대 문화가 많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오늘날에도 매년 마을 구성원들이 장승을 깎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다.'삼척 맹방리 상엿집'에는 1899년 중수된 오래된 상엿집인 강원도 삼척 맹방리 상엿집과 그 지역의 상장례 문화가 담겼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상장례 문화와 관련해 마을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구술 조사를 했고, 당시 상장례 기록 사진도 입수해 수록했다. 민속박물관은 민속현장조사 보고서를 온라인 콘텐츠로 제작하는 사업을 올해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1988년 조사를 시작한 시기에는 비교적 흔했던 목(木)장승과 솟대는 이제 쉽게 보기 힘든 민속문화재가 됐다"며 "기록하지 않으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게 민속"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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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산국악당, 평론가 초이스 ‘2022 젊은국악 단장’ 무대서울남산국악당은 ‘2022 젊은국악 단장’이 10월 19일(수)부터 10월 29(토) 2주간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 7시 30분, 총 4회에 걸쳐 연희, 무용, 음악의 무대를 선보인다고 밝혔다.연희, 무용, 음악계의 저명한 평론가들이 선정한 ‘2022 젊은국악 단장’은 각 장르에서 조명받고 있는 젊은 아티스트들로 구성돼 관객들에게 국악의 다양한 장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다. 동시대를 이끌어갈 아티스트들의 열정으로 붉게 물든 무대를 기대한다.이번 젊은국악 단장의 첫 번째 순서는 ‘뛰는 꾼, 밟는 꾼, 노는 꾼’의 연희팀이다. 음악평론가 윤중강의 추천으로 선정된 김성현, 이정동, 정승하가 각각의 무대를 선보인다. 김성현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전수자로 그의 춤에선 땅을 밟는 동작이 누구의 춤보다 안정적이며, 땅을 잘 밟을 줄 아는 연희꾼이다. 이정동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전수자로 그의 춤에선 하늘로 솟구치려는 의지와 현실의 억압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표현된 잘 뛸 줄 아는 연희꾼이다. 마지막 정승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그는 춤을 통해 하늘에 기도할 줄 알고, 인간과 놀 줄 아는 연희꾼이다.두 번째 순서는 ‘3인 3색-협업의 춤, 위로의 혜원굿 그리고 놀이정신과 해학의 우리춤!’의 무용팀이다. 무용기획자 장승헌의 추천으로 선정된 김현선, 이이슬, 최종인이 다채로운 안무를 선보인다. 김현선은 전통과 창작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다양한 시도와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우리 춤의 깊은 호흡과 느림의 미학을 무대에서 소리 없이 강하게 표출하는 무용수이다. 이이슬은 파격과 도발적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제안으로 프로페셔널 무용수로서 자리매김을 시작했다. 작은 체구의 단점을 탈피할 만큼 반복적 연습과 자신만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자신만의 춤 스타일을 구축한 안무에 진심을 담보로 무장한 무용수이다. 차세대 대표 남성 안무가 최종인은 자유로운 영혼의 춤꾼이다. 한국춤을 근간으로 새로운 표현방식을 스스로 찾기 시작하며, 독창적 실험정신과 유쾌한 감성을 빚어 무용에 당찬 메시지를 담는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안무가이다.세 번째 순서로 ‘전통예찬’의 가야금 연주자 김철진이다. 음악학자 김희선의 추천으로 선정된 김철진은 전통에 기반한 꾸준한 정진과 현대음악을 통한 테크닉과 해석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는 연주자이다. 전통의 뿌리를 천착해나가는 그의 내공은 연주가 까다롭기로 알려진 작곡가들의 현대음악 연주에서도 빛을 발한다.2022 젊은국악 단장의 유종의 미를 선보일 네 번째 순서는 ‘집은 집이 아니다’의 구이임이다. 음악평론가 송현민의 추천으로 선정된 구이임은 구민지, 이채현, 임정완으로 구성된 음악 그룹이다. 연주자 모두 주체가 돼 각자의 음악을 제시하고 이를 함께 타협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장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예술을 수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룹으로 이번 무대에서는 ‘집’이라는 특정 콘셉트를 중심으로 음악을 새롭게 풀어내고, 엮고, 새로 빚는 자리를 마련했다.앞으로 국내와 해외에서 더욱 주목하게 될 경쟁력 있는 아티스트들로 젊은국악 단장을 통해 국악계를 선도해나가고 더욱더 성숙해질 것이라 신뢰한다. 꾸준한 음악 만들기와 엮기를 통해 이 시대에 새로운 예술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하며, 이번 젊은국악 단장이 이를 위한 발판이자 지렛대가 될 것이다.2022 젊은국악 단장은 10월 19일(수) 오후 7시 30분 연희, 10월 22일(토) 오후 7시 30분 무용, 10월 26일(수) 오후 7시 30분 김철진, 10월 29일(토) 오후 7시 30분 구이임 순서로 진행되며, 공연이 종료된 후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아티스트와 직접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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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박문수 생가터 표지석’ 세운다현장의 리더십과 위민정신으로 조선시대 600여명 암행어사의 대명사 조선후기 슈퍼스타 박문수. 다가오는 10월3일(음 9월8일) 박문수 선생의 탄신 331주년이다. 암행어사박문수문화관(관장 장승재)은 선생의 탄신 기념으로 태어나고 자란 평택시 진위면 봉남3리에서 ‘암행어사 박문수 선생 생가터’ 표지석 제막식을 갖는다. 암행어사 박문수 선생은 평택이 낳은 조선후기 슈퍼스타 역사인물이며 조선시대 600 여명 암행어사의 대명사위대한 한국인이다. 박문수는고령박씨로 박장원 현종때 이조판서의 증손자로 외가 경주이씨 진위 봉남리의 외조부 이세필 집에서 태어났다. 백사 이항복의 현손녀가 어머니이고 처가는 청풍김씨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시행 대표 인물 잠곡 김육선생의 고손녀가 부인이다. 박문수 선생 생가터 표지석 제막식을 주관한 장승재 암행어사박문수문화관장은 "지금까지 평택에 수많은 위인이 있어왔지만 전국적인 인물은 오직 암행어사 박문수 선생이라면서 박문수 선생에 대한 재조명과 ‘암행어사의 메카’와 더불어 ‘암행어사 박문수 플랫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박문수 선생 역사인물 문화콘텐츠화를 통해 평택의 대표적인 명소화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암행어사박문수문화관은 제막식을 마치고 오후 3시30분부터 암행어사박문수문화관 2층 교육장에서 암행어사 박문수 대표적 연구자인 조한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의 "평택 진위출신 암행어사 박문수 위민정신” 특강을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박문수 선생 생가터 표지석 제막식 자축연도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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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선, 전정민, 이난초, 송순섭, 김일구 5인 5색 ‘판소리다섯바탕의 멋’(재)우진문화재단(이사장 김선희)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판소리다섯바탕의 멋’으로 송년의 의미를 되새긴다. ‘판소리다섯바탕의 멋’은 해마다 최고의 명창 다섯이 5일간 혼신을 다해 소리판을 열고 전주의 소문난 귀명창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객석을 채워주는 무대다. 올해로 서른 번째를 맞은 무대에는 김일구, 이난초, 송순섭, 전정민, 안숙선 명창이 오른다. 이제는 그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유파로 자리한 우리의 소리를 굳건하게 지켜낸 원로 명창들이다.공연은 15일부터 19일까지(평일 저녁 7시, 토요일 오후 4시)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에서 펼쳐진다.15일에는 안숙선 명창이 무대에 올라 ‘춘향가’ 중 옥중대목 쑥대머리부터 끝까지를 부른다.안숙선 명창은 80~90년대 노쇠해진 국악계에 젊은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누구라도 그의 소리를 듣기만 하면 판소리를 좋아하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였던 것. 안숙선 명창의 춘향가는 만정 김소희로부터 이어지는 바탕이다. 김소희제 춘향가의 특징은 어느 유파보다 춘향가의 비극적 상황이 두드러진다. 정정렬 바디를 계승한 김소희는 정정렬제에는 없는‘쑥대머리’를 첨가했다. 신재효 창본에 등장하고 김세종이 불렀던 쑥대머리를 첨가함으로써 명창의 더늠을 계승하면서 춘향의 비극적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날 공연의 북은 조용기 고수가 잡는다.16일에는 전정민 명창이 박초월제 ‘수궁가’를 선보인다. 이날 부를 대목은 초입부터 산신제 지내는 대목까지다.전정민 명창의 수궁가는 송흥록 명창에서 비롯되는 동편제 소리이며 유성준을 거쳐 박초월 바디로 전승되고 있다. 판소리를 가리켜 ‘수리성의 미학’이라고도 하는데, 그의 소리는 멋스러운 너름새와 또렷한 가사전달, 편안하게 판소리 한바탕을 타고난 수리성으로 이끌어내는 매력을 가졌다. 계면조의 애원성과 방울목으로 한시대를 풍미한 미산 박초월 명창의 수궁가를 회상하며 감상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날에는 홍성기 고수가 합을 맞춘다.올해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보유자로 지정돼 그 누구보다 의미있는 해를 보낸 이난초 명창은 강도근 바디 ‘흥보가’를 17일 올린다. 이난초 명창은 초앞부터 첫째박 타는 대목까지를 부른다.이난초 명창은 전남 해남출신으로 목포에서 김상용 선생으로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1980년대 남원에서 동편제의 대가인 강도근 명창을 만나게 되어, ‘흥보가’를 비롯하여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사사했다. 이난초 명창의 소리는 사설의 이면과 형용 동작을 정확하게 소리로 표현하며, 수십 년 간의 수련을 통해 얻어진 다양한 기교들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날 무대는 이태백 고수가 함께한다.18일에는 송순섭 명창이 박봉술제 ‘적벽가’를 선물한다. 군사 싸움타령에서부터 장승타령까지를 선보이는데, 적벽가는 고사성어 등 한문학적 요소가 많아 사설이 어렵고 지난한 전투장면이 많아 씩씩한 우조를 특징으로하는 동편제 정서와 잘 맞는다. 송순섭의 적벽가는 송만갑-박봉래-박봉술로 이어진 소리다. 원래 송만갑의 적벽가에는 ‘삼고초려’대목이 없었지만 박봉술이 김채만제에서 따왔다. 박봉술의 정신을 올곧게 이은 이가 송순섭이다. 그는 이른 나이에 목이 꺾이는 불행을 겪었으나 초인적 독공으로 자신의 소릿길을 개척했으며 치명적인 병마와 싸워 이겨냈다. 이날에는 박근영 고수가 합을 맞춘다.19일에 펼쳐지는 마지막 무대에는 김일구 명창이 오른다. 그 역시 올해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돼 의미있는 해를 보냈다. 김일구 명창은 강산제 ‘심청가’ 중에서 배의밤이 대목부터 끝까지를 완창하며 힘과 기교를 겸비한 무대를 선물한다. 김일구 명창의 심청가는 박유전-정재근-정응민으로 내려요는 심청가다. 박유전의 호가 강산이었기에 강산제 심청가라 부른다. 김일구 명창은 박봉술의 제자로 적벽가 전수조교로 지정됐지만, 심청가만은 보성소리를 이어받은 장영찬에게 배웠기 때문에 강산제 심청가를 하고 있다. 슬픈 계면조의 소리가 주조를 이루는 심청가는 효녀 심청이 눈 먼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내용은 송년의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어울린다. 이날 무대에서는 조용안 고수가 북채를 잡는다. 우진문화재단 관계자는 "1991년 첫 사업으로 ‘판소리다섯바 탕의 멋’을 시작해 2020년 현재 30회에 이르기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정통판소리 공연을 진행해 왔다”며 "30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문화재급 명창과 고수들의 단골출연으로 다섯바탕의 주요 유파의 거의 모든 바디를 공연해오며 단체의 역량을 축적시킨 한편, 명창과 고수와의 네트워크를 다져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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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거창서 아시아1인극제아시아1인극제가 이달 29~31일 거창에서 열린다. 아시아1인극협회(회장 한대수)는 유진규 예술감독을 새로 영입, 바뀐 '아시아1인극제·거창'을 새롭게 선보인다. 제의와 놀이가 함께하는 아시아 공연예술의 정체성을 이어받아 공연과 난장이 함께하는 축제 ‘난리버꾸통 *’이 펼쳐진다. 올해 연극제에는 인도, 일본, 방글라데시, 튀르키예, 타이 등 6개국 1인극 배우 25명이 출연한다. 이들은 연극제 기간 거창사건 희생자 박산합동묘역을 비롯해 거창문화원, 삼봉산 문화예술학교 등을 옮겨다니며 묘역, 극장, 마당, 폐교, 운동장 등 다변화하는 축제 공간에서 관객과 하나가 되는 공감을 공유한다. 본 공연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장르 1인극을 접할 수 있다. 개막 공연은 29일 거창문화원 상살미홀에서 열린다. 이날에는 개그맨 전유성 씨가 개막 개그를 선보인다. 이어 김선옥 진주·삼천포 12차 농악 명인 공연과 이은결 마술사가 펼치는 '환술과 퍼포밍 일루션의 만남'이 진행한다. 부대행사로 미니 솟대와 장승만들기, 도자기 빚기, 사주와 타로 체험행사도 열린다. 일본 최고의 판토마임 배우 시미즈 기요시와 기예인 센와카, 방글라데시의 록만 미르, 인도의 소마 다스, 태국의 농 하오, 투르키예의 셀베르 카부스, 무게수스 등 해외 초청 아티스트들도 함께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창작 판소리 임진택을 필두로 허창열, 이정훈, 이길영, 한받, 강해진등이 출연하고 30일 밤12시에는 거창군 고제면 삼봉산문화예술학교에서 황해도 굿 양정의 만신이 '대동굿 산천거리'로 난리버꾸통을 펼친다. 김현영 아시아1인극협회 기획팀장은 "아시아1인극제에서는 아시아 각국 지역색이 담긴 전통연희·퍼포먼스·무용극·음악극·마임·오브제인형극 등 다양한 장르 1인극을 만나볼 수 있다"며 "꿈과 희망, 열정적인 공연을 함께할 수 있는 축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1인극제는 올해로 32회째를 맞는다. 1988년 공주 아시아1인극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07년부터 거창에서 열고 있다. 연극제는 전통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고 주체적인 독창성으로 자생적 문화를 창출해 나가자는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 고 심우성 선생의 선언으로 시작됐다. 아시아1인극협회는 작년부터 ‘아시아1인극상’을 제정하여 아시아1인극의 발전과 부흥에 기여한 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2022년은 서연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한국 연희분야의 연구와 발전에 실천적 역할을 한 공로로 수상한다. 아시아 각국의 전통이 담긴 연희, 퍼포먼스, 마임, 무용극, 음악극, 연극, 오브제인형극, 마술, 저글링, 다원예술 등 동시대의 1인예술가들이 펼치는 색색의 무대가 코로나-19로 지난 몇 해간 힘들고 아팠을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의 난리버꾸통’을 선물할 것이다. 유진규 예술감독은 "거창은 작은 곳이다. 1인극인들도 작다. 그러나 우리는 작지만 빛나는 별을 꿈꾼다. 거창도 아시아의 1인극들도 작지만 별처럼 빛나기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찾아오기를 바란다.”고 축제에 앞선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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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기록한 통역관이자 서화가, 청운 강진희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1851년에서 1919년까지 살다 가셨으니 일면식이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와 조우하게 된 것은 2022년 5월 29일 서울 강남의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에서였다. ‘연緣, 이어지다’라는 제목으로 사후 백여 년만에 처음 열린 기념전이었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가 청운 선생의 피를 이어받은 혈연관계이고, 이혜신 큐레이터가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으며,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대표이사가 소장하고 있던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樂府合英'을 전시회에 내놓은 연유로 ‘인연’이 강조됐다. 예화랑 측은 한자로 쓰여진 악부합영을 고전번역원에 맡겨 번역해 소개하고, 관직에 있으면서 서화와 판소리 분야에서도 활동했던 강진희 선생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그를 조명했다. 청운은 제대로 부각된 적이 없지만,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어학 실력도 뛰어나 한문 지식을 바탕으로 중국어사전을 펴냈으며,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일어와 영어를 구사해 1886년 일본공사접응관차를 거쳐, 1887년 통역원으로 박정양1841~1904 주미공사의 미국 수행을 맡았다. 주로 일어로 미국측과 소통했고, 그 내용을 우리측에 통역했다. 어떤 생김새였을까? 궁금해하던 기자에게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888년 4월 26일 조지 워싱턴1732~99의 생가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박정양 공사, 이종하 무관, 이하영 서기관과 나란히 섰는데, 그들보다 훨씬 큰 체격이다.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날 정도로 키 차이를 보인다. 서화에 능했던 통역관은 처음 마주하는 서구의 문명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카메라가 없던 나라의 주재원이었던 까닭이다. 당시 서구의 과학문명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박정양보다 5년 앞서 미국을 방문했던 조선보빙사가 겪은 일화는 웃음짓게 만든다. 1년 뒤 갑신정변의 주범으로 멸문지화를 당하는 홍영식을 단장으로 민영익, 서광범, 유길준 등 20대의 조선 엘리트들이었다. 서구 문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춘 인물들이었음에도 그들이 받은 문화 충격은 컸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는 이해불가였고, X-RAY는 "귀신의 소행”이었으며, 엘리베이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사절단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만나자 넙죽 큰 절을 해 미국 신문에 그 모습이 실리기도 했다. 식탁에 흉기인 포크와 나이프가 오르는 건 "상스럽다”고 느꼈고, Y-shirts에 대해서는 "편리하겠다‘며 호감을 표했다. 청운은 큰 문화 간극 속에서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목격한 풍경을 머릿속에 각인했다가 조선에 돌아와 화선지에 붓으로 옮겨 소개했다. '미사묵연-화초청운잡화합벽'이다. 청운은 1911년부터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 등과 서화미술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청운은 금석학에 밝아 위창 오세창1864~1953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위창은 전서와 예서를 익혀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청운의 인물됨과 생애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다. 이혜신 큐레이터가 찾은 김영욱의 2017년 논문 '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에 서화가로서의 청운이 소개돼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청운의 저서 악부합영은 판소리 애호가로서의 청운의 면모를 보여준다. 두 자료를 근거로 그를 형상화해본다. 강진희는 35세에 관직에 진출해 60세까지 법부와 학부의 요직에서 관원으로 일했다.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와 교육부에 근무한 셈이다. 61세부터는 서화에 전념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진주 강씨姜氏인 그의 가문은 누대로 의관醫官 집안이었다. 모친 역시 의관 집안이었다. 조모는 역관 집안 출신이었다. 청운은 의관 대신 역관을 선택했다. 조모인 천녕 현씨玄氏 가문의 영향이 컸다. 왜학倭學을 전공해 잡과에 합격해 사역원 종 9품직인 참봉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현재의 일어 통역관이었다. 당시 주미 공사관에는 참찬관 이완용1858~1926, 서기관 이상재1850~1927, 번역관 이채연1861~1900 등 10인이 근무했다. 이 당시 청운은 이미 전서에 조예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민기의 논문 '근대 전환기 한국 화가의 일본화 유입과 수용'에 한 일화가 소개된다. 청운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에 들렀을 때 일본 화가 야스다 베이사이安田米齌1845~88를 만나 '추경산수도' 1점을 선물 받고 자신의 전서 글씨를 선물한 까닭이다. 주제에 대한 접근의식도 집요했던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에 19일간 동승했던 훗날의 주한미국대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목격담에 따르면, 청운은 가벼운 옷 차림으로 여객선의 홀에 나가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다녔다. 알렌은 그런 청운을 "the snoop”으로 표현했다. 꼬치꼬치 캐묻고 다니며 탐색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청운은 그만큼 호기심이 많았으며 알고자하는 열망이 컸던 인물로 이해된다. 청운은 미국 체재 시절 박정양을 수행해 28개 공사관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벌였고, 이상재, 이채연 등과 볼티모어 등 여러 지역을 유람하며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89년 귀국해 1910년 한성고등여학교 서기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법부와 학부에서 활동했다.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국한회어國韓會語' 편찬을 돕고, 역사와 지리 서적 간행에도 관여했다. 61세이던 해부터 1919년 타계하기까지 9년간은 서화가의 길을 걸었다. 앞서 워싱턴 주재 시절에도 장승업 풍의 '묵매도墨梅圖', '괴석국란도怪石菊蘭圖' 등의 수묵화를 그렸다. 1888년에는 훗날 순종이 되는 동궁 이척1874~1926의 15번째 탄강일을 축원하는 '승일반송도昇日蟠松圖'도 그렸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강진희는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매화를 잘 했다”고 평했다. 강진희의 생애를 연구한 김영욱은 "강진희 30대의 회화는 화면의 구성과 소재에서는 19세기 화단의 경향을 수용하고, 맑은 담묵을 즐겨 사용해 담담한 느낌의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했다. 제작 목적에 맞는 소재를 포착하고 간략한 필치로 묘사하여 그림의 이야기를 잘 전달했다. 또한 전각의 인장을 회화와 연계시켜 시·서·화·인 ‘四全’을 지향한 작화 방식은 서화가 시기까지 지속되었다.”라고 평했다. 귀국한 후 머리 속의 풍경들을 화첩으로 남겼다. '화차분별도火車分別圖', '종남귀래도終南歸來圖' 등이다. 이 화첩은 1983년 ‘최초의 미국견문화美國見聞畵’라는 제하로 동아일보에 보도됨으로써 처음 알려졌다. 화차분별도는 워싱턴 공관에서 멀리 두 열차가 오고 가는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다. 조선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함선과 기차를 경험했으나 두 열차가 교행하는 모습은 겁이 날 정도로 신기했던 모양이다. 제목 옆에 ‘웃음이 나왔다’라는 뜻의 ‘부지일소付之一笑’를 날인했다. 철도와 기차를 중심으로 많은 배경은 생략하고 간략한 필치로 스케치했다. 이국적 풍경의 핵심만 포착하여 묘사함으로써 그림의 주제를 뚜렷하게 전달했다. 청운 강진희는 서화가 외에 판소리 연구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부분이 의외이다. 당시 선비들이 남종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 속에 시를 쓰던 ‘화중유시畵中有詩’의 인문화人文畵에 몰두하는 게 트렌드였던 만큼, 서書와 화畵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판소리에 관심을 가진 건 매우 이례적인 경우인 까닭이다. 그냥 즐기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전문 서적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놀랄만 하다.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속요들의 가사를 채록하고 수록한 악부합영樂府合英이 그 업적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목이다. ‘악부’는 노래가사를 한시 형태로 옮긴 것이다. 고려 때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래로 몇몇 학자들이 이 작업을 해왔다. 한시漢詩의 기본 형식은 한 구句당 5자나 7자로 이루어지지만, 악부 한 편이 몇 구로 구성되는지, 한 구는 몇 자로 이루어지는지 등에 대해 정형定型은 없었다. 노래가사의 길고 짧음에 따라 시가형태도 들쭉날쭉이었다. 청운의 악부합영은 모두 5부로 구성돼 있다. 각 부마다 자신의 필명인 일소헌一笑軒의 이름으로 제사題詞를 지었다. 신헌申櫶과 신위申緯가 채집한 곡들을 정리하며 ‘푸른 갈대 수풀을 배로 헤치고 다니며 소악부小樂府를 읊조리다碧蘆吟舫小樂府’라고 표현하고, 자기가 기록한 곡들에는 ‘푸른 갈대서리를 배를 타고 다니며 소악부를 읊고 후기를 짓다題碧蘆吟舫小樂府後’라고 썼다. 벼슬아치로서 판소리를 연구했던 송만재1788~1851가 광대놀이를 보고 지은 시, 관우시觀優詩를 옮기며 감상평을 덧붙이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세상에 떠도는 유행가 아홉 수九歌’는 스스로 채록했다. ‘합영合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여러 영걸들의 합작품‘이라는 점을 나타낸 것이라 풀이된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서문에서 "일소헌一笑軒이 소악부小樂府를 모방하다.”라고 스스로 소악부의 형식을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소악부는 한시의 절구체絶句體를 고수하는 악부이다. 즉, 시처럼 절구 형태를 따른 작은 시小詩의 형식이다. 악부합영은 구전으로 전해오던 우리 노래를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당시 소리하던 사람들이 한자를 몰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청운의 작업은 의미가 크다. 선대인 신위, 신헌과 후대로서 천재 소리를 듣던 육당 최남선1890~1957 등도 같은 작업을 한 바 있다. 청운은 그들이 빠트려 국문가사만 전해져오던 곡들의 가사를 한자로 옮겨 기록했다. 그의 한문 실력이 작용했다. 일소헌一笑軒이 기록한 속요 46수에 벽로운방소악부碧蘆韻舫小樂府 40수 그리고 여산노초(礪山老樵, 송만재)의 관우시觀優詩 50수를 묶었다. 청운은 기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선생이 소요(小謠 : 우리나라 민요)를 채집하여 <벽로운방 소악부>라 명명한 칠언절구 40 수는 가사가 오묘하고 가락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졌다.”라고 선대의 업적을 칭송하고, 자신이 기록한 속요 46수는"무더위에 비까지 와서 후텁지근한 날, 풍등風燈을 앞에 두고 우연히 남악주인(南岳主人, 최남선, 1890~1957)이 찬정撰証한(골라서 정한) 가곡(歌曲, 원 제목은 歌曲選)을 읽고, 그 가운데서 무명씨無名氏가 지은 것만을 찾아내어 국문(한글)은 버리고 한자로 문장을 짓고 압운(押韻, 시가에 규칙적으로 운을 다는 일)까지 해서 뜻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하였다.” 청운은비록 칠언절구의 형식을 빌려서 쓰기는 했지만, 노래의 원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하고 있다. 다만 ‘변변치 않은布鼓雷門’ 작품이지만, "꽃그늘 아래 술동이를 앞에 두고 혹시라도 지음자知音者가 한번 목청껏 뽑아주기를 기다리노라.”라며 겸손을 보였다. 서언의 말미에는 중국 강소성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가 수계修契한 지 26번째 계축년(1913)에 고송유수관 주인古松流水館 主人이 홍두紅荳 꽃 아래서 글제를 쓰다.”라며 한껏 고양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악부합영의 모두에 밝힌 서언緖言에도 그런 감정이 드러난다. "음악은 울적함을 풀어주고 노래는 마음을 드러내는데, 모두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시詩에 읊고 감흥하는 것에 의한 비유가 있다면음音에는 고음과 저음 및 맑은 소리와 탁한 소리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시대에 따라 기풍氣風이 변하는데,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성운聲韻이다. 광대가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상말로 대사를 하고 거리에서 노래하는 것은, 자기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입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광대가 소리를 길게 빼서 노래하고 악기를 두드려서 연주하여 권선징악을 표현하는 데서 비분悲憤한 감정을 일으키니, 즐거운 데서 즐거워하고 슬픈 데서 슬퍼하게 된다.그러므로 음악을 듣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니, 어찌 음악을 얕잡아 볼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음악은 국문이 아니면 가락을 만들 수 없어서 곡조를 맞추기 어려우니, 시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번에 국문을 버리고 압운押韻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서 우아함을 얻으려는 것이다. 시경詩經의 작자가 민요를 채집했던 이유도 어찌 이와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구전되던 노랫말을 한문으로 기록한 것은 "비속함에서 벗어나 우아함을 얻으려는” 취지라고 언급했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절의 인식이다. 이제 청운의 작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자. '임의 자취 사라진 꿈夢無跡'은 어쩐지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라는 가곡을 연상시킨다. 夢爲我請遠方君 꿈이 날 위하여 먼 데 임을 데려왔건만 不勝欣起影無存 기쁨에 겨워 일어나니 그 모습 사라졌네 君或怒而飄然去 임이 혹시 노해서 홀연히 가셨는가 如何覺來不見痕 잠에서 깨니 자취가 보이지 않네. '문밖에 나와서 기다리다出門望'는 친구를 그리며 기다리는 정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夜雨花開酒初熟 밤비에 꽃은 피고 빚은 술도 막 익었네 琴朋留約帶月回 벗이 거문고 가지고 달이 뜰 때 온다 하니 分付兒童仔細看 아희야, 자세히 보아라 茅檐月與故人來 초가집 처마에 달이 뜰 때 벗도 함께 오는지 '당신이 직접 오세요宜身至前'는 당시 여인으로서는 당찬 모습을 담았다. 莫倩他人尺素馳 남에게 편지 전하지 마시고 當身曷若自來宜 당신이 직접 오시면 좋겠어요 縱眞原是憑傳札 아무리 진심을 편지로 전해도 成否從遠未可知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없거든요 '백마는 울고 아가씨는 옷을 잡고白馬靑娥'는 "백마는 가자 울고 해는 기울어”라는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 欲去長嘶郎馬白 낭군의 백마는 가자고 길게 울고 挽衫惜別小娥靑 어여쁜 아가씨는 옷을 잡고 이별을 아쉬워하네 夕陽冉冉銜西嶺 석양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고 去路長亭復短亭 갈 길은 멀고도 머네 '나비야 청산 가자胡蝶靑山去'는 노랫말이 일품이다 白胡蝶汝靑山去 흰 나비야 너도 청산 가자 黑蝶團飛共入山 호랑나비야 떼지어 함께 청산으로 날아가자. 行行日暮花堪宿 가다가 날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꽃이 푸대접하면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황진이의 '벽계수碧溪水'는 청운 덕에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진 가사이다. 마지막 연만 "명월明月이 만건곤滿乾坤하니 쉬어감이 어떠하리”로 바뀌었다. 대중성을 의식한 소이일 것이다. 靑山影裏碧溪水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 容易東去爾莫誇 동쪽으로 쉬이 흘러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難復回 푸른 바다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데 滿空明月古今是 온산 가득 밝은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동짓달 긴긴 밤冬至永夜'은 황진이黃眞伊가 지은 애절한 연시戀詩이다. 국문으로 전해져오던 가사를 청운이 한자로 옮겨 적었다. 截取冬之夜半强 동짓달 기나긴 밤 절반을 애써 잘라서 春風被裏屈蟠藏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말아 두었다가 燈明酒煖郞來夕 등 밝히고 술 데워 놓고 임이 오신 날 저녁에 曲曲鋪成折折長 굽이굽이 길게 펴리라 청운은 채록곡마다 직접 제목을 지어 붙이고 작사가의 이름을 명기했다. 없는 경우에는 ‘무명씨’로 표기했다. 신위 등 선대 기록자들에게는 헌사의 의미로 직접 절구를 지어 올렸다. 청운은 악부합영의 의미를 ‘기록’과 ‘전승’으로 보았다. "문장의 인연”을 살리려는 또 다른 예술의 장르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세상의 백년은 천상의 하루에 불과할 뿐인데, 더구나 그 하루 동안의 영고성쇠와 희로애락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민요를 노래로 전할 경우에도 흥망성쇠에 따라 존속되거나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다.시구詩句는 오랜 시일을 세상에 남아 있으니, 사람에게 문장의 인연은 참으로 귀중하지 않겠는가.” 송만재가 광대놀이를 보고 쓴 '관우희오십수觀優戱五十首'는 광대패의 소리와 재담, 재주를 보고 느낀 저자의 감상문 형식이다. 줄여서 '觀優詩'라고 부르는 그 글에는 영산(靈山, 혹은 단가短歌)에 대한 디테일한 평이 들어있어 후대의 판소리 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영산은 놀이판에서 목을 풀 때의례적으로 하는 몇몇 재담과 타령打令을 포함하는 여러 곡의 혼칭混稱이다.요령要令은 광대가 재주를 부릴 때 하는 재담과 발림이다. 觀優詩는 광대패의 놀이를 눈 앞에서 직접 보듯 하게끔 묘사했다. "거문고 타고 피리불며 촛불 밝히고 밤새 노는데, 서늘한 정자와 높은 누대에 바람에 꽃이 떨어진다. 정신은 북과 함께 움직이고소리는 몸동작과 함께 표현한다. 방자한 웃음에서 해학이 물결처럼 나오고 입에서 말이 샘솟듯이 흘러나온다.” 청운은 송만재의 '관우시' 뒤에 서둘러 기록으로 남겨야 했던 사정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정악正樂은 모두 여항(閭巷, 시중)에서 전습된 것과 장악원梨院의 고악古樂과는 차이가 있다.최근에 창을 부르는 기생이 요모조모 뒤섞어서 두서가 없어지니 억지로 기억하기는 어렵다.” 청운이 언급한 정악들은 조선 시대 중기에 널리 불리던 12가곡으로, <백구사白鷗詞>,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행군악行軍樂>, <황계사黃鷄詞>, <처사가處士歌>,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양양가襄陽歌>, <매화타령梅花打令>, <수양산가首陽山歌> 등이다. 고려시대 시조작가 이현보李賢輔의 <어부사漁夫詞>만 빼고는 모두 작자가 미상이다. 12가곡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가사歌辭보단 길이가 짧지만 풍류적인 서정을 담고 있다. 바뀌고 사라지는 추세여서 회자되는 노래들을 기록해 소개하며 당부했다. "널리 한 번쯤 전해주시라.” 광한루 위로 아른거리는 봄빛, 오작교가의 긴 그넷줄. 염문설(艶說)을 뿌리는 이는 지금 이 어사(李御使)라 아름다운 인연으로 옥중에서 향기를 쌓네. (서춘향(徐春香)과 이몽룡(李夢龍) 누가 알았으랴, 심청이 천상(天上) 선녀의 몸으로 잘못을 저질러 맹인 집안에 떨어질 줄을 해신(海神)의 아내가 되려고 공양미 300석과 몸을 바꾸었는데 궁궐 잔치에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했구나. (심청(沈淸) 낭자) 화(禍)는 악행으로 인해서 쌓이고 복(福)은 인덕(仁德)으로 말미암는다. 부귀는 쓰디쓴 가난에서 나온다. (연흥보(延興甫)) 가소로운 인간이여, 어리석고 한심한 자여, 이제 제비가를 부르며 서로 친하게 지내려무나. (연자가(燕子歌)) 도시락과 표주박,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천리강산에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네. (유산가(游山歌)) 세상엔 갖가지 즐거운 일이 많으니, 사람들이 이별가를 부르게 하지 마라. (이별가(離別歌)) 시중에 떠돌아 다니던 작자 미상의 노래 아홉 곡을 채록해 한자로 옮겨 적으며 청운이 밝힌 후기에는 노래에 반영된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시하고 있다. "하루는 친구의 책상에서 고시古詩를 보고 빌려서 소맷자락 속에 넣고 와서구가九歌만 베끼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저녁에그 맛을 세밀하게 완미하였다. 아! 인생은 꿈이니 좋은 꿈도 있고 나쁜 꿈도 있다. 하지만 깨어나면 조만간에 또다시 즐거움을 좋아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리는데,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어떤 사람은 악몽을 만나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왜 그러한가.대체로 어진 사람은 꿈을 꾸지 않으니, 꿈조차 사람의 선악을 따르는 것인가.항심恒心이 있는 사람은 망상妄想을 하지 않고항심이 없는 사람은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게 행동한다.잠꼬대 역시 정상적인 꿈과 배치되는 것이다.깨어나는 것에도 도가 있으니,배우지 않으면 깨어나기 어렵다. 하물며 꿈은 흔적이 없으므로 먼저 마음에서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푸른 하늘에 항상 뜬구름이 있어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 구름을 쓸어내고 하늘을 본다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구름이 항상 무심하게 굴에서 나와서 하늘을 가리는 것은 이 시끄러운 세상의 업장業障과 같아서,올 때에는 빠르게 오지만 갈 때는 아주 더디게 간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베낀 것이다.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상심하면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으리오.아, 부질없는 인생이 꿈인 줄 알지만 깨어나기도 어렵고 또 이해하기도 어렵다. 청운은 게송 '성미가醒迷歌'를 좋아했다. 이런 노랫말을 담고 있다. 그의 삶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할 만하다. 미혹을 벗어난 사람은 담백함을 즐기니 초가집에 살며 베옷을 입어도 마음이 편하다 영예를 구하지 않으니 치욕이 가까이 오지 않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분수대로 살면서 시속을 따르네 사물은 언제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 만사에 만족하고 수행을 하면 자신의 복록을 만들게 되네 참고문헌: 김영욱,"청운 강진희의 생애와 서화 연구, 미술사 연구," 2017 강진희, '악부합영',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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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위대한 한국인, 암행어사 박문수’ 출두요!‘가난한 백성들의 영웅’, ‘백성들의 삶을 보살핀 해결사’, ‘청렴한 관료의 상징’, ‘세제개혁 애민 실천의 명판관’, ‘암행어사의 전설’······. 이런 매력적인 표현들은 우리 설화의 주인공 ‘어사 박문수’에 대한 것이다. 영조가 "잠 잘 때 외에는 박문수를 생각한다”라고 한 각별한 군신관계를 알려주는 기록(홍제전서)이나 전국 200여 편의 설화 주인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구비문학대계)에서 역사 콘텐츠의 주인공임을 입증한다. 어사 박문수(1691~1756)가 330년만에 책으로 현현(顯現)하였다. 장승재 암행어사박문수문화관장이 쓴 ‘위대한 한국인, 암행어사 박문수’ 출판기념회을 통해서다. 지난 4월 28일 어사의 출생지인 평택 진위면 암행어사박문수문화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평택 출신 판문점과 관광 전무가인 장승재 관장이다. 장 관장은 고향 평택에서 자라며 어른들로부터 박문수 선생에 대해서 듣고 자라 추앙하는 인물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정 관장은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박문수의 위민(爲民)정신과 현장(現將)의 리더십은 우리 시대에도 필요한 정신이며 실천 요강이다.” 박문수는 1691년 9월 8일 경기도 진위현(현 평택시 진위면 봉남3리)에서 태어나 활동한 조선시대 정치가이며 600여명 어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암행어사이다. 암행어사박문수문화관은 2020년 11월 박문수의 위민정신과 현장(現將) 리더십을 함양하기 위해 선생이 태어난 평택시 진위면에 설립되었다. 그동안 문화관은 위민실천 리더십 아카데미 운영, 선생 탄신 33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개최, 박문수 선생 연계 현장 탐방 프로그램 개발, 2022 암행어사 박문수 선생 학술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홍보와 저변확대에 열중하고 있다. 이 책은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 박문수는 누구인가? 암행어사 박문수의 위민정치. 암행어사 박문수의 문화스토리. 암행어사 박문수의 문화 플랫폼.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모저모. 암행어사 박문수관련 문화탐방. 암행어사 제도와 역대 암행어사 열전. 암행어사 박문수 관련 단체. 왜, 암행어사 박문수인가? 등으로 구성됐다. 저자는 "박문수 선생이 백성을 사랑한 정신과 리더십을 밑바탕으로 박문수 선생을 새롭게 조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며 "선생 생가터 표지석 설치. 암행어사 박문수 홍보대사 위촉, 암행어사 박문수선생기념사업회 결성, 암행어사 박문수 대상 시상식 개최, 박문수 선생 학술세미나 등을 중장기 계획을 세워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11월 개관 이후 ‘박문수 정신’(충성·충정·청렴·위민·실천·소통)을 실천하기 위해 평택 진위를‘암행어사의 메카’로 삼아 현창사업은 물론 지지체 발전을 위한‘암행어사 박문수 위민실천 리더십 아카데미’등을 개최해 왔다. 저자는 기념사를 통해 "암행어사 박문수 관련한 수많은 서적, TV 연속극, TV다큐, 대중가요 등은 있었던 것에 반해 박문수의 정신과 얼을 이어받기 위한 사업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암행어사 위민사상과 리더십이 재조명되고 ‘암행어사 박문수학’이 탄생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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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표 작가 38인, 임인년 맞이 ‘호랑이’ 주제로 희망과 응원 전한다”박대성, 강형구, 우국원, 이재삼 등 국내 미술계 거장들과 최근 대만 유명 연예인과 결혼 발표로 이슈인 구준엽 작가와 김규리 아트테이너들이 참여한 ‘Amulet_호령전_범을 깨우다’가 서울 전시 성공에 이어 부산 전시를 신세계센텀시티 백화점에서 오는 11일부터 31일까지 열린다. 전시 주제는 ‘호랑이의 영험한 기운’이다. 2022년 임인년의 상징인 ‘호랑이’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들로 올해 초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자는 취지이며, 원화 그리고 디지털 전시와 함께 3월 22일부터 참여 작가의 NFT 발행이 디지털 자산 거래소 업비트 플랫폼을 통해서 매주 수요일 발행 예정으로 국내 최고 작가의 NFT 를 수집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한국화의 거장 ‘박대성 작가’를 비롯해 한국적 서양화를 대표하는 ‘강형구 작가’ 그리고 목탄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재삼 작가’ 등 국내 정통회화 거장의 작품이 전시된다. 그 외 △김선두 △장승효 △허회태 △김정기 △아트놈 △ 찰스장 △우국원 △ 김정선 △ 정연연 △ 권현진 △콰야 △전병삼 △홍경택 △구준엽 △김규리 등 서울에서 공개된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공개될 예정이며 원화 작품과 디지털 아트 및 NFT 작품이 각각 청담 원갤러리와 하남 스타필드에 공개된 서울 전시와 달리, 부산 전시에서는 LG 올레드 TV 로 구현된 디지털 작품과 NFT 작품 그리고 원화 작품이 함께 동시에 부산 신세계 센텀 시티에 공개되어, 한층 더 풍부한 볼 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부산 전시 개막 기념 오프닝에선 국내 미술계 유명인사들과 아트테이너 등이 참석해 다채로운 이벤트를 진행한다. 강형구, 이재삼, 김정선, 찰스장, 엄익훈, 정해운, 김혜경 등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와 아트테이너 김규리 작가 그리고 최근 다양한 방송 활동을 하고 있는 신아영 아나운서의 도슨트 투어 및 글씨당 김소영 작가의 화려한 라이브 드로잉 쇼도 함께 선보인다. 부산, 울산, 경주, 포항 등 국내 대가 작가와의 만남 그리고 신작을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원화와 함께 유명 작가의 한정판 에디션 작품과 함께 소장 가치가 높은 한정판 NFT 를 구매할 수 있는 전시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3월 24일에는 이번 전시 작품을 직접 방송을 통해서 구매할 수 있는 라이브 옥션도 준비되어있다. 특히 이번 전시를 기획한 총괄 아트 콘텐츠 디렉터 정나연 대표는 "‘Amulet_호령전_범을 깨우다’는 하정우, 구준엽, 우국원, 하지원 등의 작품이 공개돼 관심을 모은 2021년 ‘Amulet_우행전’에 이어지는 국내 최초 아트 시리즈 프로젝트로 매년 새해 그 해를 상징하는 동물을 국내외 최고 작가분들이 신작으로 전시를 하여 이슈가 되고 있다. 2022년 올해 임인년 호랑이띠 호랑이의 영험한 기운을 주제로 온 국민에게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자는 취지로 기획됐다”면서 "벌써 2023년 토끼띠 토끼 전시에 대한 문의가 국내외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제안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이 공간의 제약 없이 다양한 작품을 관람하고, 호랑이의 영험한 기운을 얻어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주최사로는 아트테인먼트 컴퍼니 레이빌리지와 그림그린이 공동 주최하며,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비티씨 커뮤니케이션즈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 LG전자, 스타필드하남 그리고 부산신세계센텀시티가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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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월대보름, 국립민속박물관 놀러간다한 해의 첫 보름이자 보름달이 뜨는 날로 음력 1월 15일에 지내는 우리나라의 명절이다.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이날은 우리 세시풍속에서는 가장 중요한 날로 설날만큼 비중이 크다. 12개월 동안 세시풍속행사 총건수는 189건이다. 그 중 정월 한 달이 세배·설빔 등 78건으로서 전체의 거의 절반이 되어, 1년의 세시풍속 중에서 정월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음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는 첫 보름달이 뜨는 대보름날은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세시풍속이 마을과 고을에서 행해진다.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마을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고, 오곡밥과 같은 절식을 먹으며, 달맞이와 달집태우기, 지신밟기와 쥐불놀이,기줄다리기 등 전통행사로 주민 화합과 안녕을 기원했다. 가정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귀가 밝아지라고 마시는 술(귀밝이술)을 나누었다. 특히 며느리는 시부모님께 올 여름 더위를 이기시라는 의미로 새로 만든 술의 첫잔을 올렸다. 코로나 시대지만 새해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통 문화 행사가 서울 곳곳에서 열린다. 연날리기, 달집태우기, 다채로운 세시풍속을 체험할 수 있다. 도 무형문화재 제2호이자 201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삼척기줄다리기는 해안지방인 부내(府內)가 여성이고, 서북 산간지방인 말곡(末谷)이 남성을 상징한다. 부내가 이기면 해사(海事)가 풍년이 들고, 말곡이 이기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정월 대보름 세시풍속을 다양하게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 장승동산에서 15일 오전9시부터 오후5시까지 한지에 소원 적고 금줄에 끼우는 행사가 진행된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정월대보름 전시체험행사 '휘영청, 둥근 달'도 개최된다. 오는 20일까지 소원종이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시조를 적은 노래패로 겨루는 '화가투', 막대기로 다양하게 놀 수 있는 '산가지' 등의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 안내데스크에서는 이날 오전9시부터 오후4시까지 '액막이연' 만들기 꾸러미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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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설·정월대보름 행사 ‘새해가 왔어흥’ 개최전통문화 테마파크 한국민속촌이 민족 최대 명절 설날·정월대보름을 맞아 1월 29일부터 2월 20일까지 특별 행사 ‘새해가 왔어흥’을 진행한다. 이번 행사에는 온 가족이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임인년 호랑이 소재의 콘텐츠가 가득하다고 밝혔다. 행사 시작일인 1월 29일부터 △설빔 입고 세배하기 △임인년 한 해 운세를 점치는 토정비결 △올해의 복 담기 등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나는 체험들을 즐길 수 있다. 용하다고 소문난 토정비결은 오직 신년에만 만나볼 수 있는 특별 체험이다. 2월 1일 설날 당일에는 방문객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 정초 고사를 민속촌 정문에서 진행한다. 여기에 흥이 절로 나는 우리 전통 놀이 ‘지신밟기’를 공연하며 가정의 다복을 기원한다. 특별 전시 ‘호랑이의 숲’과 ‘호랑이의 굴’에서는 호랑이와 관련된 민속을 재현한다. 호랑이의 숲에는 나무로 된 호랑이 조각과 조선 시대 호랑이를 잡기 위한 호랑이 덫, 벼락 틀이 전시됐다. 호랑이와 관련된 속담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를 경험하기 위한 호랑이굴 체험도 있다. 호랑이굴에서는 호랑이를 쫓기 위한 여러 농악 기구를 체험할 수 있다. 정월대보름 체험으로는 한 해의 액운을 막는 부럼 깨기와 마을의 화합과 평안을 기원하는 장승제를 2월 12일에 선보인다. 행사의 피날레는 2월 13일 진행되는 ‘달집태우기’가 장식한다. 정월 행사 기간 한국민속촌을 방문한 모든 관람객의 소원을 달집에 담아서 하늘로 피워 올린다. 활활 타는 달집을 보며 마음속 짐을 날려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과 소원을 담아보자. 이 밖에도 꽁꽁 언 지곡천 위에서 짜릿한 빙어 낚시와 얼음 썰매를 경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편 한국민속촌은 임인년 맞이 특별 이벤트도 준비했다. 4인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호야와 함께 가족 할인’ 패키지는 자유이용권 최대 40% 할인 혜택과 함께 한국민속촌 대표 호랑이 캐릭터인 ‘호야’ 인형을 선물한다. 패키지는 한국민속촌을 찾아 구매할 수 있으며 캐릭터 인형 소진 시 자동 종료된다. 행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한국민속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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