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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前 국악의 아름다움, 음반 전시,100년 전 옛 음반에 수록된 판소리 등 국악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국립국악원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3월 5일부터 4월 7일까지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전시5관에서 '최고의 소리반: 신춘에는 엇든 노래 유행할가' 전시를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광주광역시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전시 5관에서 ‘최고의 소리반-신춘에는 엇든 노래 유행할가’ 전시를 연다. 이번 전시는 국립국악원이 수집한 유성기 음반 100여 점과 가사지, 사진, 신문기사 등 관련 자료들을 만날 기회다. 국립국악원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궁중음악 음반인 ‘조선아악’과 ‘아악정수’를 복각해 이번 전시회 때 선보인다. 또 이화중선, 임방울, 김소희 등 당대 명창의 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도록 복각한 디지털 음원 150여 점을 공개한다. 이번 전시는 유성기 음반과 관련 자료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과 관객이 복각된 음원과 엘피를 체험할 수 있는 감상실로 나눈다. 전시 1부 ‘최초의 소리기록’에서는 유성기와 음반의 역사를 소개한다. 2부 ‘최고의 가치’에서는 조선 궁중음악인 ‘조선아악’이 기록된 유성기 음반과 관련 자료를 공개한다. 3부 ‘최고의 인기’에서는 1920~30년대 인기를 끌었던 ‘춘향전’을 다룬다. 당시 유명 음반회사에서 발매한 음반과 시기별 변천 과정을 소개한다. 4부 ‘최고의 스타 명창’에서는 송만갑, 이동백, 이화중선, 임방울, 박록주 등 당대 명창들의 사진과 관련 기록을 만날 수 있다. 5부 ‘국창 임방울의 음반’에서는 호남권 대표 국창 임방울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전시 기간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는 명창 주소연, 김명남, 하선영, 허애선의 ‘심청가’, ‘흥보가’, ‘춘향가’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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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운 시절 소리꾼 이화중선 탄생 120주년 기념 영화 시사회시인이자 감독, 배우, 시나리오 작가 백학기 감독과 지역 영상업체 'JB영상연구원'이 공동 제작한 다큐 영화 '이화중선'의 포스터가 공개됐다.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은 본명은 이봉학(李鳳鶴)으로 일제강점기 17세 때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명창의 길을 걷기 시작해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해 이동백, 송만갑등에게 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때 임방울과 함께 음반을 가장 많이 녹음한 명창으로 꼽히는 등 타고난 좋은 목으로 어려운 대목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불러 청중을 매혹시켜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창법으로 대중화된 소리를 했으며, 슬프고 비장한 분위기의 대목을 탁월하게 구사했다. 판소리 명창인 이중선(李中仙, 1903-1935), 판소리 고수인 이화성(李化成)과 남매간이다. 지난 2019년 명창 이화중선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됐지만, 코로나19 등으로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다. 백 감독은 기존 충무로 제작 방식을 벗어나 지역영상업체 'JB영상연구원'과 합심해 지난 2022년부터 2년여 동안 영화 형식과 다큐 형식을 가미한 저예산 독립 예술영화로 '이화중선'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희박해서 이화중선의 일대기를 따라 그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을 중심으로 기록했다”고 전했다. 다큐영화 '이화중선'은 오는 24일 오후 7시 전주영화제작소 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시사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후 서울 시사회를 거쳐 국내외 영화제 출품과 함께 개봉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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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봉 이매방의 삶과 예술춤생애와 무용사적 의의 1. 들어가는 말 "하늘이 내린 춤꾼’,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전통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이기에 더더욱 이 시대의 국무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2015년 8월 7일 88세로 영면하였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전통춤을 오늘날처럼 곱게 다듬고 정립한 전통무용가는 한국무용사에서도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명창 중에서도 뛰어난 명창을 ‘국창’이라고 하는 만큼, 명무 중에서도 빼어난 명무를 ‘국무(國舞)’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매방을 국무로 칭하고 인정하게 될 만큼 춤꾼으로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기로 한다. 이매방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고,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았으며,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권번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으로 들어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전수받았다. 오늘날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가치와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매방의 춤생애 1) 입문기(入門期, 1930년대)-목포권번과 만주대련의 소년시절 이매방은 1927년 음력 3월 7일(호적상 1927년 5월5일)에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186번지에서 부친 이경식(李敬植)과 모친 조병림(曺炳林) 사이에서 3남2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이매방은 태몽과 관련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모친 조씨는 이매방을 낳기 전 태몽에서 모친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데 동그란 불덩이가 굴러와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명무로서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예고한 것이었다.이매방은 세 살적부터 끼가 발산된 천생의 춤꾼이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 같이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매방은 여자 같은 행동을 보고 부모형제들은 미쳤다고 야단법석이면서도 그가 철이 안 들어 그런 것일 거라고 지나치곤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가 그의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한편 이매방의 할아버지벌격인 이대조(李大祚, 김금옥에게서 춤사사)씨는 호남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던 춤의 명인으로써 승무와 북놀이에 탁월한 예인이었다.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포배당이라는 절마당 앞에 드럼통을 이삼십개 깔고 판자를 올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다. 이때 이대조(1870년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이 서로 잘 아는 친구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절에서의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며,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지속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씨가 소개한 목포권번에 입문하게 된다.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 입문하여 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학습도 함께 시작하였으나 판소리는 그의 목청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청이 터지질 않아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학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 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호남 권번에서 다양한 춤을 익힌 이매방은 유년시절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중국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에게 가서 약 5년간을 지내게 되면서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난다. 그리고 12세 무렵 대련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 무용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梅蘭芳)과 조우한다.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공연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이매방의 장검무는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의 기법을 토대로 창작된 춤이다. 6. 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지어 사용하게 되는데, 매란방에게서 배우고 느낀 예술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말도 잘 안통하고 해서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춤에 정진하게 된다. 2) 학습기(學習期, 1940년대)-역경 속에서 다져진 승무로 데뷔무대목포소학교를 졸업 후 이매방은 뜻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마음에 없는 목포공립공업학교를 입학(1940년)하였다.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항시 그의 마음에는 춤사위와 북놀이가 떠나질 않았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자신과 제자들이 입을 의상은 물론 공연에 필요한 무구(舞具) 소품들을 직접 바느질하거나 제작하였다.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하여서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결벽성과 치밀한 성격으로 아무리 소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매사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전문적인 한복 제작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1942년(16세) 목포역전에다 쇠가래를 세워 그 위에 막을 치고 드럼통을 깔아 만든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로 명인명창대회를 열고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승무를 담당한 박봉선이 사정이 생겨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목포 사는 신두옥도 놀음을 나가 없었고, 성산호주 역시 결혼을 하여 무대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방울은 승무를 추어야할 사람이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자 함국향에게 승무를 대신해서 출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함국향선생은 마침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이매방을 불러 임방울선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피리에는 임세균, 거문고에는 한갑득, 설장고에는 전사업, 전이섭, 김오채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과 함께 한 무대였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춤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해방 후로는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삼고무를 가르쳐 여성국악인들의 공연을 도와주었으며, 그해 승무로 첫 데뷔했던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승무로 출연하였다.이처럼 1940년대는 본격적인 춤과 가락을 익히는 학습기였다. 그동안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 때 귀국하여 간간히 춤을 익혔지만 목포로 전학한 후로는 당내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화순 능주출신)선생에게 학습하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면서 광주권번을 다녔다. 당시 박영구선생은 광주권번에서 승무와 북놀이를 가르치고 있던 권번선생이었다. 광주권번에서 박영구선생과 함께 춤선생으로 있던 이창조(장성출신)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하였다.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무안출신)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특히 이대조에게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배웠으며 이대조의 북가락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아 ‘천수북’이란 말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이매방 북가락이 일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대조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이다. 3) 방랑기(放浪期, 1950년대)-6.25사변 군예대 활동-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해방 후 진지하고 평화롭게 예인의 길에 정진하던 것도 잠시뿐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내려와 목포에서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전황(본명 전두황, 전옥의 동생, 전미례의 부친), 최옥산, 임종옥, 한계만, 유선도, 이경팔, 박정호 등이 내려와 공연한 것을 이매방은 보게 되었다. 이때 전황은 <처녀총각>, 안성희는 <장검무> 등을 추었다. 그리고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당시 무용동행위원장에 차범석, 국악동맹위원장에 장월중선 등이었다. 무용동맹에서 춤을 가르치거나 공연을 하였고 또 국악동맹에 가서 안무도 해주며 지냈다. 안성희가 "규태동무 북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바람에 피신해 있었지만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에 곤욕을 치루었다.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 역전 태평로에 본부를 두어 활동했다. 그 때 군예대에는 황해(전영록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그리고 무용가 김진걸, 황무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예대(종군연예인공연단) 일원(1951년)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이렇게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군산에서 연구소를 개설해주겠다는 유지들이 나타나 이매방이 24세(1951년)에는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때부터 이 매방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하여 그의 춤과 북놀이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할 때 춤을 배웠던 제자들로서는 박문자, 김옥순, 양향옥, 그리고 채영옥 등이 배웠다. 1953년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 함께 연구소를 했지만 결별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남동 양조장 옆에 국악원을 개설하여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쇼무대나 악극단 등 순수 무용활동 이외의 출연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하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다시 이매방의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올라와 창신동 신익희의 딸 신영균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부산에서 초량동, 범이동, 대신동 등지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56년 대통령 입후보했던 신익희의 사망으로 인하여 서울연구소를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도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의 역할이 켰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이매방의 공연작품으로 역시 <승무>와 <쌍검무>로 전통무용의 진수로 보여주며 춤기법이 매우 빼어났음을 표현하면서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승화되면 좋겠다는 평을 하였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근거지는 사실상 부산이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많은 예술인들이 체류하였었고 일부는 잔류하면서 예술의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매방도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 중심을 두어 고전무용의 중심인물이었고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58년에 부산공연을 올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4) 정립기(定立期, 1960년대)-다양한 춤 레퍼토리1960년대는 1950년대를 이어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그의 선생에게서 배운 북놀이를 그가 혼자 활동하던 1948년 북3개를 놓고 추는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지만 그 후 북5개를 놓고 치는 5고무, 7개를 놓고 치는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연희되고 있는 삼고무의 원조는 이매방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은 그의 탁월한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이매방의 주 활동무대는 부산이었으나 점차 활동무대를 서울로 넓혀나간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에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창작무용 <꽃신 짚신>발표회를 가졌고, 1968년 8월에 일본 대판(大阪) 상은 창립 15주년기념제전(대판후생회관)에 초청되어 <승무>로 출연하였고, 이어서 제23회 광복절기념공연(일본동경 거류민단 본부 주최)에 <승무>를 추어 갈채를 받았다. 5) 비상기(飛翔期, 1970년대)-전통춤의 예술성과 가치 인정1970년대 초까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나 이매방의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현재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서울에서 한 때 1956년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집에 신세지며 서울 창신동에다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6.25직후에 주 활동무대였던 부산에서의 활동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의 가치를 파악하고 많은 국악제전에 초청하여 출연하게 된다. 1970년부터 매년 부산에서 3.1절 기념 국악대제전에 <승무>공연, 1973년 4월 동래야류발표회에 <승무>초청공연, 그해 12월 전통예술감상회에는 <초립동>을 공연하였다. 1974년 5월 인간문화재 초청공연에 <승무>로 초청이 되었고 12월에 무용대공연에는 <화랑도>(전주삼남극장)로 출연하였다. 1975년 5월 강백천 대금산조발표회에 <승무>출연(부산민속예술관)하였고, 8월에는 이선옥 초청 신적무용발표회에 <사랑과 이별>을 안무하여 이선옥과 2인무로 출연(국립극장 소극장)하였다. 이선옥과의 콤비를 맞추게 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한순서는 자연히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6년 1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무용공연 <신검(바리공주)>를 부산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이매방 선생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명예교수인 무용학자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30일 서울 YMCA에서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추면서부터이다. 전통무용연구회(회장 정병호)가 주최한 <이매방 승무 발표회>에서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추었고, 찬조로 김소희 국창의 판소리(고수 김득수)와 이선옥의 살풀이춤이 올려졌고, 악사에 지갑성, 전태용, 이생강, 김순봉, 오주환, 서용석, 김한국 등이 반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병호 교수가 최초로 ‘승무의 미학’를 발제하였으며 안내장에는 김천흥의 축사가 기록되었다. 또한 이날 이매방 춤을 감상하고 조선일보 기사에 발표한 홍종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등골이 으쓱 들었다가 놓는 그 순간 그 깊은 한숨소리는 들은 바 없었으나 그 순간의 한숨은 하늘이 꺼지는 듯 깊은 느낌이었다..... 이씨의 춤이 각별하다는 점은 악곡이 지닌 장단과 가락 속에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온몸에 매듭과 힘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작동하고 있다는 그 기교를 훨씬 넘어서 그의 전신에 넘쳐 흐르는 예술적, 창조적 그리고 또 즉흥적인 감흥이 압도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홍종인, "이매방씨의 승무를 보고”, 『조선일보』(1977년 8월 3일자).홍종인의 평문은 사실상 이매방의 전통춤이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별이 등극했음을 시사는 글이다. 감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북가락, 섬세하고 고운 춤사위에 모두 감동을 받은 공연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6) 만개기(滿開期, 1980년대)-<북소리> 시리즈와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평생 춤의 길을 걸으면서 외길로만 살아온 이매방은 지난날의 춤생활을 돌이켜 보면 한과 정으로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이매방은 평생 동안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대, 굿쟁이, 기생, 당골소리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으며 살아왔다. 거기에다 이매방의 성격이 직설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수틀리면 욕잘 하기로 유명한 그는 호랑이, 사자이빨, 따발총, 직사포, 욕보, 욕대장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한 면일 뿐이다. 이매방의 내면에는 그간 겪어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예술혼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당시 이매방 춤의 진수를 처음 제대로 알아본 이는 당시 전통무용연구회장이던 중앙대 정병호 교수였다."이매방씨가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승무의 명무자라는 것과 오늘의 북틀춤을 탄생케 한 창조자로서의 장본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씨의 승무에서 돋보이는 것은 하나는 그가 치는 북놀이이다. 그는 북놀이를 할 때 마치 한(恨)을 풀 듯이 신명나게 치고, 감정을 한곳으로 몰입시켜 주술경에 도달한 정도이다....이매방의 승무는 비단 춤사위의 멋 만이 아니라 북놀이에도 그 정수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북놀이는 궁편과 각을 조화있게 타주(打柱)하는 가운데 많은 가락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교는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신비스런 율동이다”.(정병호, "이매방의 승무”, 『전통문화』,1984년 5월호)이매방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무대공연을 주선하는 등 그가 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속학자 정병호는 그의 춤 중에서 승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승무에 있어 북틀의 창시자라는 점과 감정이입에 입각한 승무의 춤사위를 주술적 무아경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묘술로 풀어내면서 이매방을 최고의 춤꾼으로 극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도록 조사에 착수하여 이매방 승무의 가치와 미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병호교수의 제자로 연구에 참여했던 필자도 함께 YMCA 이매방 승무발표회(1977년), 이매방전통무용의 밤(명동유네스코회관, 1981년)을 동참하였고, 이매방춤 마포연구소에 찾아가 면담하면서 특히 당시에 이미 승무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던 고 한영숙 승무와의 차별성과 승무의 미학과 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매방 춤판 최고의 결정판 <북소리> 씨리즈의 시작이었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에 이어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 인정에서 보류된 이매방의 승무에 대해 사생활과 예술세계는 별개라는 당시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과 더 열정적으로 이매방 승무를 알리기 위해 1981년 유네스코 회관 공연을 주선하여 문화재위원들을 초청하여 이매방 승무의 예술적 가치와 지역성과 전통성을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87년 7월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일본무용예술제 참가와 국악대공연에 참가 등의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7) 결실기(結實期)(1990년대)-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과 이매방 춤인생 60년1990년대의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 이어 1990년 10월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이매방은 창신동, 돈암동, 대현동, 운니동, 삼성동, 그리고 마포를 거쳐 지금의 양재동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었다. 그후 지금까지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데, 한국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 하지만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자 그의 많은 옛 제자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입문한 문하생들이 그의 춤과 북놀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의 활동은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Ⅲ>(호암아트홀)를 가진 후, 1991년 미국순회공연, 1992년 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를 가진다. 이어서 1995년 광복50주년 민속종합예술제 출연과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을 가졌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999년에 우봉 이매방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을 가지면서 1990년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8) 국무기(國舞期, 2000년대)-외길인생 우봉 이매방 춤 70년격변기를 살아온 우리의 춤선구자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듯이 명무 이매방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이매방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다. 2001년 갑작스럽게 발병한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주위의 걱정과 안타까움 속에 위 대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몸무게가 15kg 빠지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매방은 작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직접 살풀이춤과 입춤을 추는 저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오직 춤만을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감히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이다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은 2005년 7월 목포문화예술회관 1층에 마련된 이매방의 살풀이와 승무를 전승하는 공간으로 이매방의 이수자들이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삼고무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우봉이매방춤경연대회’는 이매방의 예술혼을 예향 목포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창립된 행사이다. 전통춤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매방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우봉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그중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의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나온다. 결국 이매방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 스스로의 속멋에서 우러나온 춤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수춤이 아니라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본인의 혼을 담은 전통춤이었기에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제 우봉 이매방이 왜 국무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한국 전통춤의 기법과 미학적 표현법을 볼 때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현하는 전통무용가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에서도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가하는 무용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아름다운 춤사위기법을 가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어릴 적 처음 춤입문에서 고운춤만을 추는 기방에서 춤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권번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이 이웃에 살아 그 집을 드나들면서 기방춤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자처럼 예쁜춤의 기본이 몸에 배여있어 이매방춤에는 기방예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보다도 더 여성적인 기방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소리꾼들에게는 유파별로 또는 계통별로 ‘소리바디’가 있듯이 이매방의 춤맵시에는 이미 기방계통춤의 고운 ‘춤바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여성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매방은 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무리 춤바디가 기방계적 표현력을 지녔다 해도 대개의 남자춤꾼들은 남성의 ‘춤속’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의 춤사위와 표현법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화된 ‘춤속’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성정체성이 뒤바뀐 남성춤꾼이라 해도 모두 춤속이 여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뒤섞인 혼성춤속이거나 어설픈 여성춤속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은 완벽한 기방계 ‘춤바디’에다 가장 섬세한 내면적 정서의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춤속’을 지닌 특별한 춤꾼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목포권번에서 호남기생에게 처음 춤을 사사한 이매방은 그후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무용가로 성장한다. 맨 처음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 이는 이대조는 무안 출신으로 목포권번 사범으로 춤과 음악에 능통한 전통예인이며, 이매방에게 승무, 검무, 장고춤을 가르쳤다. 또한 옥과 출신인 신방초에게 육자배기, 화초사거리, 가곡, 검무, 승무 등을 익혔고, 10대 중반에는 광주권번에서 화순 출신 박영구 문하에서 승무와 북을 배웠고,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춤과 기악에 능통한 이장선의 문하생이 되어 다양한 예능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 모두가 호남일대와 경향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궁중 어전 출입도 잦았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들이었다. 이처럼 이매방은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면서 권범사범들인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의 제일가는 명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과 다양한 춤가락을 익혀 호남춤의 특성과 미학을 정립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유한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간에 호남춤의 대를 이은 한진옥을 비롯한 몇몇의 호남춤의 명인들이 있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만 활동하다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매방은 고향 목포에 머무르지 않고 부산, 군산, 광주 등지를 거쳐 한국예술의 중앙무대인 서울로 진출하여 호남춤의 예술성을 범한국춤으로 위상을 높였다. 이매방 춤에서 전승되는 보석같이 소중한 호남제 춤사위는 실로 다양하다. 춤사위 용어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춤사위 명칭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이다. 이매방이 춤을 가르칠 때 매번 강조하는 대삼소삼은 장단의 강약을 따라 춤사위도 강약으로 표현하는 춤기법으로 강과 약으로 반복하면서 조율하여 추는 방식으로 춤의 섬세한 리듬성과 변화성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의 기법 중 정중동 또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는 양우선도 중요한 춤 특징으로 손짓과 발짓의 모든 동작은 양우선의 원리를 따른다. 가령 발은 뒤꿈치부터 앞꿈치로 옮겨지고, 팔은 엎으면 반드시 뒤집고, 뿌리가 내려오면 끝이 올라간다거나 끝이 쳐지면 뿌리가 올려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기교와 원리가 연출된다. 또한 보법에서 비정비팔(比丁比八)이라는 발디딤은 호남춤에서 내려오는 오랜 춤기법 중의 하나로, 발 딛는 자세가 한자의 정(丁)자 혹은 팔(八)자의 모양으로 딛는 독특한 형태의 보법이다. 오른발에 이어 왼발 끝으로 딛어 오른발 옆에 옮겨 딛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고 펴는 형태의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은 이매방 춤의 몸가짐과 돋음새, 오금새, 디딤새로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진수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매방의 첫 스승 이대조는 그의 집안 할아버지벌이 된다. 즉 이매방의 집안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인 이대조 대(代)까지 대대로 무업(巫業)을 해온 무계의 혈통을 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세습되면서 천부적인 예능성을 이어받아 오게 된다. 대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경우는 도중에 도태되지만 선천적 예능성을 지닌 유전인자를 지닌 예인들은 대를 이을수록 더 유명해진다. 이매방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나이인 15세 때 증명되었다.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가설무대에서 명인명차대회를 열었는데 승무를 추기로 한 박봉선이 불참하여 대타자로 승무를 추었으나 관중들의 찬사가 뜨거웠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매방은 이 모든 스승들의 춤기량을 뛰어넘는 춤기법과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래서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된 전국의 모든 류파와 계통의 전통춤 전승자와 명무들을 볼 때 이매방만큼 춤을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명무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한국전통춤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이매방을 명무 중에서 명무인 국무로 호칭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매방은 예닐곱 살부터 목포권번에서 예기들의 춤을 접하고 춤 배우기를 권유받아 이대조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북경 매란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거나 목포로 돌아와 춤을 배웠다. 이처럼 이매방은 어린 10대에 호남의 이름난 명인들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악가무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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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30년대 판 K팝, 재현 공연1920~30년대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당대 유행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전통 성악 공연 무대가 이틀간 선보인다.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 민속악단(예술감독 유지숙)은 오는 6일(수)과 7일(목) 저녁 7시 30분,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100여 년 전 유성기 음반에 담긴 유행가를 한데 모은 기획공연 '경셩유행가'를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당시 유성기 음반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주목받은 스타 명창들의 주옥같은 민요, 판소리, 신민요 등 15곡을 민속악단 성악 단원들의 목소리로 꾸며 무대에 되살렸다. 유성기 음반을 타고 대중음악으로 등판한 우리 소리 1920년대를 기점으로 국내에 등장한 유성기 음반은 본래 소리판이나 풍류방에서 즐겼던 우리 소리의 무대를 안방과 사랑방으로 옮겨놓았다.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서든 소리를 즐길 수 있게 한 유성기의 등장으로, 당대 소리꾼들은 일약 스타로 떠오르고 그들의 노래는 대중들이 따라부르는 유행가로 불렸다. 당시 한 면에 3분 30초 가량 수록할 수 있는 음반의 제한적인 시간에 따라 유성기 음반의 등장은 자연히 음악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대중들에게 짧은 시간에 음악을 소비하게 해 다양한 유행가의 탄생에 일조했다. 전통 성악계의 새로운 스타와 장르의 탄생 이번 공연에서는 이러한 유성기 음반에 담긴 대표적인 유행가를 전통 성악 장르로 구분해 민속악단 단원들의 목소리로 소개한다. 첫 무대를 여는 서도소리에서는 최순경, 장학선 명창이 부른 '서도 성주푸리'를 비롯해 최순경의 '반월가', '화투풀이'를 들려준다. 지금의 서도소리에 비하면 애잔한 정서는 덜하고 진잔하면서도 고졸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가야금병창으로 유행가의 중심에 섰던 오태석의 '박타령'과 '돈타령', 이소향의 '호접몽', 성금암의 '소년가'도 무대에서 만난다. 그저 소리를 받쳐주는 가야금의 보조적인 역할을 넘어서 뛰어난 기량의 연주력이 돋보인 점이 특징이었는데, 이번 공연에서도 원곡의 소리와 연주의 멋을 살려 무대에 선보인다.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김초향 등 당대 전설로 불리던 판소리계 스타들의 곡 다섯 작품도 만난다. 모든 소리에 힘을 주어 부르는 요즘의 판소리와 달리, 때론 힘을 빼고 담백하게 무심한 듯 부르는 등 곡의 정서를 충실히 전했다. 이번 무대에서도 민속악단 명창들의 농익은 소리로 관객들의 김정을 흔들어 놓을 예정이다. 당시 통속민요가 서양음악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노랫말을 만나 탄생한 '신민요' 장르도 모아 무대에 올린다. 신민요를 통해 작곡과 작사의 개념이 등장하고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의 반주가 어우러지며 큰 인기를 모은 '신민요'는 당대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시대의 장르이기도 했다. 이번 무대에서도 그 시절의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손풍금(아코디언)을 추가해 소리의 맛을 더했다. 판에 박힌 소리, 판밖으로 꺼내 우리 소리의 예술적 새로움 발견해 보기를 유지숙 민속악단 예술감독은 "K팝이 세계의 대표적인 대중음악이 되어버린 이 시대 관객들에게 100여 년 전 유행가의 중심에 섰던 전통 성악의 대표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소리의 대중성을 다시 발견하고 예술적인 새로움을 다시 추구해보고자 이번 공연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기획공연 '경셩유행가'는 오는 9월 6일(수)과 7일(목) 저녁 7시 30분, 풍류사랑방에서 진행하며 국립국악원 누리집(www.gugak.go.kr) 또는 전화(02-580-3300)으로 예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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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국창 전도성·이화중선 제6회 임실전국국악경연대회(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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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유성기음반 궁중음악, 함께 들어볼까요?국립국악원 (재)아름지기, ‘유성기집, 우리 소리를 보다’ 전시 개최해 한국 전통 음악을 지켜온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과 우리 문화의 가치와 미감을 전하는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가 만나 유성기음반을 주제로 한 전시 ‘유성기집, 우리 소리를 보다 House of Records, See the Sound’를 오는 5월 26일(금)부터 6월 30일(금)까지 아름지기 통의동 사옥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그간 국립국악원 아카이브가 수집과 기증 등을 통해 보유한 유성기음반의 음원을 복각해 유성기음반을 소비했던 당시의 공간을 꾸며 관련 자료의 전시와 함께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마련했다. 유성기(Gramophone)는 소리가 녹음된 원반(SP, Standard Play)을 재생하는 장치로, 19세기 전후 조선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유성기가 있는 집에 삼삼오오 모여 소리를 듣던 곳을 ‘유성기 처소’라고 불렀던 기록이 남아있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전시공간의 이름을 ‘유성기집’이라 정하고, 실제 ‘유성기 처소’가 많았던 종로구 통의동 인근의 전통문화 전시공간인 아름지기에서 이번 전시를 진행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국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성기음반 중 대중들이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음반과 명인 명창들의 인기 음반 약 30여 점의 61개 음원을 당시의 사진과 홍보물 등 관련 자료와 함께 소개하고, 국립국악원 아카이브 누리집(arichive.gugak.go.kr)을 통해서는 그동안 복각했던 50여 점의 유성기음반에 수록된 100여 개 음원을 모두 공개한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궁중음악 음반 ‘조선아악’, 이화중선, 임방울, 김소희 등 당대 명창이 부른 ‘춘향가’ 비교해 들어볼 수 있어 이번 전시는 총 3층으로 구분된 공간에서 유성기음반 관련 자료의 전시와 함께 음원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1층 ‘소리를 기록하다’에서는 국내에 유성기가 소개되고 음반 산업이 시작된 역사와 음반에 담긴 음악과 인물을 소개한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궁중음악 음반이자 대중들에게 궁중음악을 널리 알리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조선아악朝鮮雅樂(1928)’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화중선, 임방울, 김창룡, 박녹주, 김소희 명창 등의 음반을 신문 광고, 노래 가사지, 사진 등의 자료를 통해 유성기음반이 대중문화와 예술에 끼친 영향과 음악의 문화 변화를 읽어볼 수 있다. 빅터 레코드가 제작한 ‘조선아악’은 궁중음악의 첫 녹음이다.국립국악원의 전신이자 조선조 장악원의 음악을 이어온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 음악을 녹음한 것. 조선조 궁중에서 연행되는 제례악과 연례악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2층은 한옥 풍류방과 오디오룸으로 구분해 한옥 공간에서는 당시 ‘유성기 처소’에서 들었던 유성기음반을 유성기로 직접 들어볼 수 있게 꾸몄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전시를 위해 1925년 제작된 크레덴자(Credenza) 유성기를 구해 전시 기간 중 오후 2시 30분부터 20분간 1930년대와 50년대의 민요 관련 음반을 들려줄 예정이다. 오디오룸에서는 국립국악원이 디지털로 복각한 61개 유성기음반의 음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다. 3층 공간에서는 옛 소리를 활용한 예술가의 음악을 소개한다. 국립국악원 소장 음원을 활용해 제작한 한국관광공사의 ‘강강술래(by 우원재)’를 비롯한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와 국립국악원의 영상 및 전통 음악인 이희문의 작업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와 관련한 연계행사 또한 다양하다. 6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는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장 배연형, JTBC ‘풍류대장’ 프로듀서인 황교진, 국악음반박물관장 노재명의 강연과 소리꾼 이희문의 토크콘서트를 진행한다. 오후 2시에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들의 ‘가야금산조’, ‘대금산조’, ‘경기잡가’, ‘판소리’ 공연도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 관람은 무료이고, 전시 연계행사는 아름지기의 네이버 예약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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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6) <br> 이동안 명인의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 춤사위이동안류 태평무 격조와 품격의 아름다움이 절도 있게 드러나는 춤이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구름 위를 걷듯 출렁이면서 살얼음을 깨뜨리지 않는 사뿐한 디딤은 압권이다. 여기에 긴 한삼자락을 펼치고 뿌려 거둬들이는 팔사위와 의식을 거행하는 제관(祭官) 같은 위엄이 깃든, 그러면서도 무심한 듯한 표정은 절제의 멋을 더해 준다. 장단으로는 긴 호흡을 가다듬는 춤의 첫 장면에서는 ‘길군악’ 음악을 뒤집어 ‘낙궁’이라 부르는 장단으로 시작한다. 구음이 들어가는 행차 걸음으로 의식무로서의 분위기를 잡는다. 부정놀이 장면에서는 24박을 한 장단으로 엮어 제관의 의식처럼 사방을 다니며 인사로 예를 다하는 춤을 춘다. 반서림(터벌림)에서는 5박 x 5박을 한 장단으로 하여 홑박의 묘미인 밝고 경쾌함이 나타나며 ‘흥’의 감정으로 리드미컬한 발동작과 팔사위로 짜임새를 만든다. 엇모리로 넘어오면서 타악기로만 반주하는 음악이 10박을 한 장단으로 하여 기악과 구음이 들어와 떠들썩하게 흥청거리고 비틀거리고 고뇌하며, 서민적인 정서를 엮어 고뇌가 깃들어 있는 관과 민을 아우르는 마음이 드러난다. 갑자기 번개치는 올림채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장구와 꽹과리 음악으로 몰아치며 춤이 잘게 쪼개어지고 급박한 다이나믹함으로 숨 막히게도 하지만 결코 위엄을 잃지 않는 속도감 있는 역전의 분위기를 만든다. 잦은몰이 일환인 경상도 엇굿거리, 넘김채, 겹마치기장단이 이어질 땐 급하면서도 질서와 규범이 있는 발동작이 이어지는데, 땅을 꾹꾹 디디는 발놀림이 화려하다. 열정과 신명이 솟는가 하면 넉넉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생기 있고 발랄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하늘을 향하여 한껏 펼쳐지는 한삼은 땅과 하늘이 하나 되듯 연출되며 태평성대를 느끼게 한다. 위의 요소들은 여느 태평무와는 다르게 이동안 선생의 태평무만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이동안 태평무는 민속무의 대표적 두 줄기인 승무와 살풀이춤 못지않은 극적 요소를 갖춘 춤으로 인정받는다. 이동안 이동안 선생은 전통 무용가이며 재인청의 춤꾼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인으로, 화성 재인청 마지막 도대방(수장)이었다. 재인청은 조선시대 직업적인 예능인들의 연예 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하고 교육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예술인총연합(예총) 격인데, 예로부터 전해오던 모든 춤을 다듬고 창안하며 전승시킨 위대한 춤꾼 김인호 선생이 재인청 출신이다. 이동안 선생은 재인청의 수장이 되어 우리 전통춤과 장단 그리고 당대 최고의 명인들로부터 배운 기예와 전통 예술을 지키고 보존하며 전통 예술과 예맥의 전승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자 했다. 당대의 춤 명인이던 김인호 선생은 이동안 선생의 뛰어난 춤 실력을 인정하고 그를 유일한 제자로 삼아 10여 년에 걸쳐 살풀이, 태평무, 승무, 진쇠춤, 검무, 희극무, 북춤, 소고춤 등 30여 종의 전통무용과 장단을 전수해주었다. 이동안 선생은 국극전용극장인 광무대를 시작으로 원각사, 문락정 등 극장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재인청 춤을 공연하였다. 또한 우리 전통춤의 맥을 잇고자 부산대, 동아대, 부산교대, 선화예고, 리틀엔젤스 어린이무용단과 전통예술고 등에서 우리 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여성농악단을 조직하고 무용연구소를 열어 내로라하는 춤꾼들을 길러내고 전통문화의 기틀을 세우는 데 공헌했다. 김인호 선생의 전통을 잇는 이동안 선생의 태평무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발탈과 함께 198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조사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동안 선생이 가지고 있는 기예인 ‘발탈’을 독특한 종목이라 판단한 심사위원들은 ‘발탈’을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결정하였다. 80년 춤 인생을 인정받지 못한 이동안 선생은 "내가 안 하면 끊긴다고 해서 발탈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사실 나는 춤꾼이지 재주꾼이 아니다”라며 크게 낙심하였다. 기회는 다시 왔다. 1988년 태평무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심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심사과정에서 발탈로 인간문화재가 된 이동안 선생을 춤꾼으로, 그의 춤을 무형문화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시선에 갇히고 말았다. 결국 전통 그대로의 바지춤을 고수하며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온 이동안류 태평무는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해 무형문화재에서 탈락하였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김인호와 이동안의 태평무는 전통을 지켜왔음에도 비주류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고 말았다.(재인청춤보존회장 정주미) 이동안(1906-1995) 1920 광무대 생활 시작. 태평무, 진쇠춤 등 공연 1927 일본 전역 순회공연 (태평무, 진쇠춤) 1929 대동가극단의 임방울, 이화중선 함께 중국 순회공연 1983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로 지정 1992 한국명인전 (엇중몰이신칼대신무) 1994 이동안 전통무용 발표회 (태평무, 진쇠춤, 엇중몰이신칼대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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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월정·김초향·박록주 전설의 '3여류 명창' 무대 재현조선 첫 여성 중심 공연으로 기록된 박월정, 김초향, 박록주 세 여성 명창의 공연무대를 약 100년 만에 2030세대 소리꾼들이 재연한다. 경서도소리포럼은 한국문화재재단 2022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오는 10월 15일 오후 5시 한국문화의 집 코우스에서 ‘삼여류명창공연대회’ 시연회를 연다고 밝혔다. 조선 국악계는 조선 고유의 음률과 음악을 향상한다는 취지로 1930년 조선음률협회를 결성한다. 그 후 당대 최고의 여성 소리꾼 김초향, 박월정, 박록주를 전면에 내세워 삼여류명창공연대회를 개최한다. 당시 조선 음률협회는 이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서울 상공에 헬기를 띄워 공연 전단을 뿌렸으며, 3년 동안 개성, 대전, 사리원, 서울 등지에서 전국 투어를 진행했다. 90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연회에서는 실험적인 방식이 선보인다. 당시 공연에 참여한 소리꾼 중 서도소리와 판소리에 두루 능통했던 박월정의 판소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판소리 전공 소리꾼과 서도소리 전공 소리꾼이 각각 출연해 박월정의 판소리를 재현한다. 박월정의 춘향가 중 '기생점고'와 '몽중가'는 판소리 명창 이효덕 씨가, 춘향가 중 '어사출도' 대목과 창작 판소리 '항우와 우희'는 서도소리 명창 이나라 씨가 각각 재연한다. 특히 '어사출도' 대목과 '항우와 우희'에는 서도목으로 부르는 시창이 들어 있는데, 판소리 대목 안에서 서도목과 판소리목을 함께 들을 수 있다는 게 이번 시연회의 특징이다. 한편 전설적인 소리꾼 이화중선과 쌍벽을 이뤘던 대구 출신 김초향 명창의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대목과 '어사 장모 상봉' 대목은 이화여대에 재학 중인 박지수 소리꾼이 무대를 꾸민다. 또한 판소리사에서 가장 뛰어난 소리꾼으로 평가받는 박록주 명창의 심청가 중 '심청하직' 대목과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대목은 중앙대에 재학 중인 전지원 소리꾼이 선보인다. 고수는 송만갑 고수대회 명고부 장원을 차지한 김민서, 최재명 씨가 맡는다. 시연회에 앞서 경인 교대 김혜정 교수는 삼여류명창공연대회가 가지는 의의와 세 소리꾼의 판소리 특징을 설명한다. 시연이 끝난 후에는 관객과 시연자들이 함께 세 소리꾼의 소리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시연회를 기획한 경서도소리포럼 김문성 대표는 "‘중고조-우조 판소리’가 지닌 독특한 멋을 계면조 판소리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시연함으로써 판소리의 다양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고 공연 취지를 설명한 후 "특히 SP 시대의 인물로 머물러 있는 김초향이나 판소리사에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박월정의 창조적 작업과 업적이 재조명되기를 바라며, 중견 명창들을 통해 90년 전에 개최된 대공연의 완벽한 재연이 최종적인 목표”라고 강조했다. 이날 시연회는 전석 무료이나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사전 예약해야 관람할 수 있다. 한편 직접 관람이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 유튜브(문화유산 TV)를 통해 스트리밍 서비스를 할 예정이다. 공연 문의 및 예약은 이메일(kimdica@naver.com)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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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80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1990년대는 복각음반의 전성기였다. 1993년에 서울음반이 일본 요코하마창고에 잠자고 있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빅터사의 금속 원반을 인수하여 복각사업을 시작하자, 국내에서는 일제강점기의 한국음악 출반의 양대 산맥인 일본 콜럼비아사의 원반에 주목하게 된다. 콜럼비아사의 원반 음원은 1987년에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KBS에서 테이프로 복사해온 바 있다. 1995년에 LG그룹의 LG미디어가 복각사업을 전제로 일본 콜럼비아사로부터 유성기음반 원반의 음원을 인수하여 복각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LG미디어는 1995년 6월에 첫 음반으로 콜럼비아유성기원반(1)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2CD)을 선보인 이래 1996년 9월 콜럼비아유성기원반(14) <판소리의 전설 5명창>까지 총 14집을 출반하였다. 창극이란 중국의 경극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공연 형태로 판소리에 나타난 인물을 소리꾼이 나누어 배역을 맡고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창극 춘향전’ 음반은 1934년에 일본에서 녹음되었으며, 김창룡 명창이 도창을 맡고 이화중선, 오비취, 권금주 명창이 참여하였으며 북은 한성준 명고가 맡았다. 모두 조선성악연구소에서 활동한 명창들로 당시의 창극 모습을 조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이 음반은 18장(36면)으로 ‘연애편’, ‘이별편’, ‘재봉편’, 각각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번에 걸쳐 순차적으로 출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은 <콜럼비아판 춘향전>으로 많이 불리고 있다. 콜롬비아 금속 원반은 현재 일본 오사카 국립민족박물관에 해외자료로 대만음반, 상해음반, 조선음반(2,846면)으로 구분되어 보관되어 있다. 유성기 복각음반은 유성기음반에서 직접 음원을 녹음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음질이 매우 열악하다. 혹자는 기찻길 옆에서 음악을 듣는, 소나기가 오는 가운데 음악을 듣는 격으로 비교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콜럼비아유성기원반 시리즈는 금속원반에서 직접 음원을 발췌하였기 때문에 그 깨끗하고 선명한 소리에 놀라기도 한다. 지금의 녹음기술로 출반된 음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이 시리즈의 해설서는 관련된 많은 자료와 사진, 곡 설명과 주석을 단 가사를 수록하여, 일반인들은 그 음원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료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콜럼비아유성기음반은 디지털음원으로 국내에 들어왔으나 상당한 양이 복각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콜럼비아원반시리즈는 지금도 중고음반사이트에서 만날 수 있다. 보이면 무조건 구해 놓아야 할 명반이다. * 본 글은 이전에 소개한 글을 수정하여 실었으면 지지난 주에 소개한 콜럼비아유성기원반(7) <정악의 원류를 찾아서)(기악편)와 같이 참고하시기 바람. . *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LGM-AK001(K001)*&page=1 * 국악음반의 자세한 내용은 ‘정창관의 국악CD음반세계’(www.gugakcd.kr)를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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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66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1992년 봄, 당시 (주)서울음반(현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일본 협력사인 빅터회사에서 그들의 요코하마창고를 정리하던 중 다량의 한국음악 금속원반(Master 혹은 Mother Disc)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때 서울음반은 필자에게 이 원반의 가치를 문의해 왔으며, 필자는 한국고음반연구회 이보형 회장의 말을 빌려 "빅터 유성기원반은 우리의 문화재다. 이 원반을 인수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것이다.”라고 자문하였다. 이에 서울음반은 직접 일본으로 가서 실물을 확인한 후 발견된 전량을 인수하기로 하고, 1992년 8월에 588장(SP레코드 294장 분량)의 원반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빅터축음기주식회사(이하 빅터사)는 일본 콜럼비아사와 더불어 유성기(SP)음반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한국의 음반산업을 주도하였고 방대한 분량과 우수한 음질로 그 가치가 뛰어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유성기음반의 원반은 2차 대전의 혼란기에 음반회사의 관리공백으로 인한 분실과 공습으로 인하여 거의 소실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콜럼비아사의 원반은 오사카에 있는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빅터사의 원반은 이렇게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무렵 서울음반은 복각전문 부서를 신설하여 체계적으로 빅터 유성기원반의 복각사업을 추진하였으며, 필자의 듀얼 78회전 턴테이블을 차용하고 유성기음반 전용 카트리지로 원반을 재생하여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를 LP와 CD로 제작하게 된다. 그 첫 번째로 출반한 음반이 1993년 봄에 선보인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 1 <춘향전 전집>(3CD)이다. 전집물로는 판소리사에 가장 손꼽히는 음반으로, 원래 유성기음반 19매 38면이나 본 전집에는 농부가 2면이 빠져 36면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음원은 1937년 빅터사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으며 소리꾼으로는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 박록주, 김소희 명창이 참여하였고, 북은 한성준 명인이 잡았다. 이 전집에는 여태까지의 판소리 녹음에 따른 경험이 집약되어 있고, 녹음기술 또한 다른 전집에 비해 훌륭하다. 소리배역을 적절히 설정하고 극적 구성도 치밀하다. 당시의 유성기복각음반은 유성기음반에서 음원을 녹음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음질이 열악하였지만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는 원반에서 음원을 녹음하였기 때문에 그 깨끗하고 선명한 소리가 놀랍다. 해설서에는 많은 자료와 사진, 곡 설명과 주석을 달은 가사를 수록하여, 빅터 춘향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글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소리 그 자체도 훌륭하지만, SP복각반으로 음질도 우수하며 자세한 해설서가 더해지니 과연 국악명반이다. 일본은 이 귀중한 유성기원반을 선뜻 인계해줄 나라가 아니다. 당시 빅터사의 국제부에 근무하였던 지한파 인사인 요시히사 혼다 부장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겐 고마운 분이다. 빅터 유성기원반은 2012년에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그 해 필자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로엔엔터테인먼트로부터 국립민속박물관에 577매가 기증되었다. 일본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에 콜럼비아원반이 있다면 우리나라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빅터원반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현재 이 원반을 디지털음원으로 복각하는 작업을 고려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음반에서는 총 588 매 중 387 매, 66% 정도 LP와 CD로 복각되었다. 어렵게 보존되어 일본에서 돌아온 빅터 유성기원반은 경사스러운 전통음악 사료의 발굴이며, 국악음반사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빅터유성기원반시리즈 1 <춘향전전집>(3CD)이다. 지금은 출반된 지 오래되어 구하기 힘들지만, 중고음반시장에서는 간혹 볼 수 있다. 보면 무조건 구해야 할 국악명반이다.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SRCD-1087&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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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명창 김초향과 재회…미공개 판소리 시연일제강점기 시절 명창으로 꼽히는 김초향의 판소리와 재회한다.경서도 소리 포럼은 오는 13일 오후 4시에 서울 강남구 한국문화의 집 코우스에서 '초향'을 공연한다고 10일 밝혔다. '잊혀진 전설 김초향 명창의 판소리 재현 프로젝트-초향' 공연은 대구 출신으로 조선성악연구회 설립 기틀을 마련하는 등 일제강점기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명창 김초향(1900~1983)의 1950~60년대 판소리를 재현한다. 김초향은 일제강점기에 판소리사상 최고의 여류 명창으로 꼽히는 이화중선(1899~1943)과 쌍벽을 이뤘으며,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록주(1905~1979)가 손꼽은 소리꾼이었다. 그는 한창 활동할 40대 중반에 소리를 그만둬, 1940년 이후 판소리 관련 대외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하지만 최근 1950~60년대 대전 지역에서 김초향에게 판소리를 배우거나 문화재관리국의 판소리 사전 조사 때 녹음된 자료 일부가 드러나면서 그의 광복 후 족적도 함께 확인됐다. 이날 공연에서는 그가 제자들을 통해 남긴 판소리 자료 등이 공개된다. 먼저 김초향의 삶과 시연회 개최 과정이 영상을 통해 간략히 소개되고, 김경희 총괄 연구원(전 부산국립국악원장)이 시연회가 가지는 의미와 김초향의 판소리 세계를 해설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 박은정 명창은 김초향의 '심청가' 중 '심봉사 자탄 대목', '심청이 선인 따라가는 대목', '범피중류 대목'을 시연한다. 이어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7호 동초제 '춘향가' 이수자 송혜원 명창이 김초향의 '춘향가' 중 '박석틔'부터 '어사 장모 상봉 대목'까지 시연한다. 또 현재 이화여대 재학 중으로 판소리 신동으로 불렸던 박지수 소리꾼이 김초향의 '춘향가' 중 '이별가 대목'과 단가 '운담풍경'을 시연한다. 이 밖에 김초향의 1950~60년대 음원은 시연 실황과 함께 연구용 자료로서 음반으로 제작·배포될 예정이다.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 후원을 받아 인류무형문화유산 지원 사업 일환으로 열리는 이번 시연회는 백신 접종을 완료한 일반 시민만 사전 이메일(osu687@hanmail.net) 접수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시연회 영상은 유튜브 무형 유산TV 등을 통해 이달 말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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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 명반유람 62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만정 김소희 명창(순옥:1917~1995년)은 박초월, 박록주 명창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최고의 판소리를 풍미했던 여류 판소리꾼이다. 1917년 10월 17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풍류스런 분위기에서 자랐다. 전북 고창 지역은 여류 명창 중에서 손꼽는 진채선, 허금파, 김여란 명창 등을 배출한 예향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명창은 타고난 재질, 빼어난 미모와 맑은 음색으로 한 시대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13세에 당시 최고의 여류명창인 이화중선이 가설극장에서 부르는 심청가의 ‘추월만정’ 소리에 매료되어 소리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1930년대에 명창 송만갑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정정렬, 박동실 명창에게 소리를 배워, 1964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신이 내린 목소리’로 평가 받으며, 판소리뿐만 아니라 정가, 가야금, 거문고, 춤과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최고의 여류 명인이다. 서예는 1966년부터 3년을 국전에 입선하였을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1991년에 출반된 음반, 첫 곡인 ‘구음’은 일품이다. 김덕수패 사물놀이의 반주로 시작된 ‘구음’은 기악반주가 더해져 절정을 이룬다. 안숙선 명창이 후렴자로 참여한 ‘뱃노래’는 시원하게 쭉쭉 뻗는 김소희 명창의 소리에 어깨춤이 절로 나는 최고의 뱃노래이다. 메나리제 ‘상주아리랑’은 상주아리랑의 처음으로 명창이 짠 아리랑이다. ‘방아타령’은 소리와 기악반주, 후렴자의 합창이 어우러져 멋들어진다. 김소희 명창이 길을 열어주면 후렴 자들이 이끌어 가는 ‘새타령’을 듣다보면 이 이상의 ‘새타령’은 없을 것 같다. 이 음반은 김소희 명창의 소리와 기량이 출중한 반주자(거문고: 김무길, 아쟁: 최종관, 대금: 이생강, 가야금: 안옥선 등)와 후렴자(박윤조, 이명희, 안숙선 등)가 참여한 명반 중의 명반이다. 해설서에는 가사만 있지만, 머리를 만지고 있는 김소희 명창의 음반표지 흑백사진도 눈여겨봐야 할 즐거움이다. 1991년에 출반된 성음의 음반은 1989년 3월 성음스튜디오 녹음으로 지금은 중고시장에서 제일 비싸게 거래되는 국악CD음반이다. 이 음반은 2009년에 김소희 명창의 후손들과 전출반사인 ㈜성음의 양해로 로엔엔터테인먼트(주)에서 김소희 <온고지신>이라는 이름으로 재 출반되었다. 해설서 내용은 동일하다. 이 음반도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다.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 시인은 "만정 그대의 노래 소리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 만 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라고 명창의 기념비 뒤에 설파하였다. * 성음 음반의 사인은 필자가 무더위가 한창인 1992년 8월 1일 종로구 소격동 김소희 명창의 집에서 인터뷰 후 받은 것으로 보물같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DS-019(CDS)*&page=1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L-100003772&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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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상] 국창 전도성·이화중선 추모 제4회 임실전국국악경연대회 10월 9일■ 대회 취지 전도성 국창이 탄생하고, 이화중선 국창이 묻힌 임실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고, 우리 전통예술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 ■ 대회 목적 경연 실시를 통하여 전통국악을 계승·발전시키고 이를 활성화하고 국악인구의 저변확대와 우리 전통예술성을 널리 알리며 유능한 국악예술인을 발굴함을 목적으로 함. ■ 일 자 : 2021년 10월 9일(토) (임실N치즈축제 기간) ■ 주최/주관 : (사)국창 전도성·이화중선전통예술진흥회 ■ 후 원 : 전라북도, 전라북도의회,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임실군, 임실군의회, 임실문화원 ■ 경연종목 ▪ 판소리 : 신인부(단심제 - 개인 및 단체), 일반부(예선·본선) ▪ 무 용 : 신인부(단심제 - 개인 및 단체), 일반부(예선·본선) ▪ 민 요 : 신인부(단심제 - 개인 및 단체), 일반부(예선·본선) ■ 경연요령 및 시간 경연종목 예 선 본 선 비 고 판소리 신인부 : 판소리 5마당 중 5분이내 일반부 : 판소리 5마당 중 7분이내 일반부 : 판소리 5마당 중 7분이내 신인부 : 단심제 동영상1개제출 일반부 : 예선/본선 동영상2개 제출 민요 신인부 : 5분이내 일반부 : 6분이내 일반부 : 7분이내 신인부 : 단심제 동영상1개제출 일반부 : 예선/본선 동영상2개 제출 무용 신인부 : 5분이내 일반부 : 7분이내 일반부 : 7분이내 신인부 : 단심제 동영상1개제출 일반부 : 예선/본선 동영상1개 제출 ▪ 판소리부문 : 일반부는 예선 곡목을 본선에서 다시 부를 수 없음 ▪ 민요부문 : 일반부는 예선 곡목을 본선에서 다시 부를 수 없음 ▪ 무용부문 : 한국 전통 무용 중 자유선택 ※ 경연시간은 대회 진행상 조정할 수 있음 ■ 경연일정 : 2021년 10월 9일(토) (임실N치즈축제 기간) - 예선은 참가신청서 접수순서로 한다. - 본선은 예선의 경연순서 (사정에 따라 변경 될수 있음) - 수상자에 대한 시상식은 코로나19로 인해 진행하지 않으며 상장은 - 대회 종료 후 참가신청서에 기재한 주소로 등기우편 발송 (정확한 주소기재) ■ 참가자격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참가 할 수 있음 ▪ 신인부 : 만19세 이상의 남녀 ▪ 일반부 : 만19세 이상의 남녀(대학생도 포함) ■ 참가신청 ▪ 신청기간 : 2021년 9월 6일(월) ~ 10월 4일(화) 18:00 ▪ 신청방법 : E-mail 접수만 함 ▪ 제출서류 : 참가신청서(사진 부착 필수 3x5cm), 경연영상 ※ 단체참가시 참가자 전체명단 제출(인적사항 전체동일) ▪ 접수처 : (사)국창 전도성·이화중선 전통예술진흥회 - 주소전북 임실군 임실읍 감천로 8 [우:55928] - E-mail: keju2394@hanmail.net - 전화 : 063)643-2394, 010-4549-2394 - 팩스 : 063)643-2395 ※ 메일제목과 동영상 파일명은 경연부문, 참가자 성명, 일반부는(예선, 본선) 구분 할 것 예) 판소리 일반부 – 홍길동 (예선, 본선 명시) ※ 메일제출 후 접수처로 확인 전화 필수 ▪ 참가비 : 없음 ■ 심사방법 ▪ 심사위원 : 국악종사자와 사계 권위자로 대회장이 위촉하여 대회 당일 발표함 ▪ 심사항목 및 심사기준 판소리 공력 30% 박자 30% 성음 15% 가사 15% 발림 10% 민요 공력 30% 장단 25% 성음 15% 가사 20% 발림 10% 무 용 기능 50% 내용 20% 의상 10% 음악 10% 자세 10% 1) 각 부문의 예선 심사점수는 최저 90점, 최고 99점의 범위 내에서 부여한다. 2) 각 부문의 본선 심사점수는 최저 95점, 최고 99점의 범위 내에서 부여한다. 3) 종합결선은 각 부문별 심사위원 전원으로 구성. 각 부문 최고득점자간 종합경연을 심사하고 점수는 1등~3등으로 기입하여 결정한다. 4) 판소리 일반부는 예선에서 부른 곡을 본선에서 다시 부를 수 없다. 5) 민요 일반부는 예선에서 부른 곡을 본선에서 다시 부를 수 없다. 6) 경연시간은 각 종목별 대회요강에 따라 진행하며, 대회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하여 심사위원의 합의로 경연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7) "스승 및 8촌 이내 심사위원 회피”로 인한 경연자의 점수는 채점한 심사위원의 평 균점수를 회피한 심사위원 만큼 더하여 합계점수를 산출한다. ▪ 수상자 결정 방법 1) 심사위원이 5명 이하일 경우는 전체 점수에 대한 총점제 방식을 적용한다. 2) 채점결과 동점일 경우에는 연장자 순으로 하고, 신인부 경우 개인⦁단체 동점시 개인우선, 단체팀 동점시 다수 출전 팀 우선 3) 심사위원은 구성된 심사항목 및 배점에 맞게 공정한 채점을 하고 경연자 별 심사평을 채점표에 간략하게 기록하며 경연 시간 내에 채점을 완료하여야 한다. 부문별 경연이 끝난 후 명확한 실수가 아닌 경우 점수를 조정할 수 없다, ▪ 직접 스승 및 8촌 이내 친인척 심사회피제도 참가자는 직접 스승이나 8촌 이내 친인척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할 때에는 해당심사위원의 심사회피를 신청해야 한다. 만약 심사회피를 신청하지 않고, 수상을 한 후 회피신청 사유가 있었음이 발견 될 시에는 본회는 수상취소를 결정할 수 있고 수상자는 해당상장,상금을 반환해야한다. 참가자는 이 조항을 수락하고 참가하는 것에 동의하여야 한다. ■ 동영상 및 기타 유의 사항 - 동영상은 타 대회 경연 동영상은 불가하며 본 대회용으로 촬영한 영상으로 제출 - 촬영해상도 1920×1080FHD, mp4파일로 설정 (영상, 편집 및 사운드 조절 등 2차 가공 절대 불가 ) - 첫 화면은 A4용지에 참가 대회명과 ○○부문 명시 (예시–국창전도성· 이화중선추모 제4회임실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일반부 예선(본선) - 동영상 촬영 시간엄수. - 참가자 의상은 한복을 착용하고 고수(반주자는) 영상안에 안나오도록 촬영 - 단체 참가자는 전원이 나오도록 촬영 - 촬영장소 및 장비는 제한없음 - 제출한 영상은 반환되지 않음 ■ 시상내역 부 문 구 분 상 격 인원 시상금 비고 판소리/ 민요/무용 일반부 종합대상 국회의장상 1명 2,000,000 대상 전라북도지사상 2명 각 500,000 최우수상 임실군수상 3명 각 200,000 우수상 전라북도의회 의장상 3명 각 100,000 장려상 대회장상 3명 각 50,000 판소리/ 민요/무용 신인부 (단심제) 대상 임실군수상 3명 각 300,000 최우수상 임실군의회 의장상 3명 각 200,000 우수상 임실문화원장상 3명 각 100,000 장려상 대회장상 3명 각 50,000 지도자상 전라북도지사상 1명 - ※ 시상내역은 변경될 수 있음 ※ 125.000원 이상 시상금은 소득세법 제21조·제84조·제127조·제129조에 의해 원천징수 합니다 ※ 21-08-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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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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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 100년 그들의 증언] 진도군 편: 강송대, 남도잡가의 '명창'흥타령 등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34호 '남도 잡가'의 기예능보유자. 남도잡가는 보렴, 화초사거리, 육자배기, 흥타령, 성주풀이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 말기 번창하다 서양풍 노래에 밀려난 조선조 마지막 서민들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강송대는 창에 소질이 있어 어머니 이근녀 선생에게 육자배기를 배웠다. 어머니에서 강송대 그리고 손녀까지 이어지는 4대 국악 집안이다. 어머니 이근녀는 일제강점기 명창인 이화중선의 제자였을 정도로 소리에 뛰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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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5정범태가 밝힌 사진 설명 정범태 선생이 남긴 국악계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지난 회에 이어서 이번에도 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한다. 다음은 만정 김소희 선생의 등장에 대한 것으로 12세 때의 일이다. 승주군 낙안면 송만갑 선생 댁에서 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 "순천에 협률사가 들어왔다. 당시 협률사에는 정정렬, 이화중선, 박록주 등이 있었는데 순천에서 노래로 낙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 이화중선이 송만갑 선생에게 인사를 왔다. 이때 송만갑 얼굴에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회색이 만면했다. 그래서 이화중선이 궁금해서 무슨 말이라고 붙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요즘 좋은 일이 있다. 보물이 하나 들어왔어’ 송만갑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무슨 좋은 일인데요?’ 이화중선이 선생의 앞에 가서 조바심을 냈다. 송만갑은 말을 할 듯 말 듯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화중선은 선생이 그러면 그럴수록 궁금증이 더했다. 이튿날 이화중선이 다 선생에게 물었다. ‘보여주면 달라고 하지 마라.’라고 했고, 이화중선은 ‘절대로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라고 했다. 선생이 옆방에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모깃소리로 예라고 답하며 나왔다. 볼이 발그레한 소녀였다. ‘아가 단가를 하나 해 봐라’ 아가가 단가를 뽑았다. 이화중선을 몇 소절을 지나지 않아 타고남 목이란 것을 알았다. 이화중선이 말했다. ‘선생님 아까 그 약속 못 지킬라요. 내가 데리고 갈라요. 저 주세요.’ 이렇게 하여 이화중선이 데리고 서울로 와 지도를 하게 된 애기가 바로 김송희였다.” 이렇게 이화중선의 눈으로 명창의 재목으로 선발된 김소희는 정정렬의 문하를 거쳐 한갑득, 한애순, 박동실 명인 명창을 거쳐 판소리를 취입하여 명창으로 섰다. 목이 좋은 제자를 두는 것이 얼마나 뜻있는 일인가를 알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김소희는 스승들의 소리 중에서 장점만을 자기 것으로 삼아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로써 그의 이런 특징을 ‘섞어제’라고도 하고 ‘만정제’라고도 한다. 제자로는 안숙선, 신영희, 박윤초, 박계향, 성창순, 오정혜 등이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동기(童伎)가 머리를 올리는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평양기생 영산홍의 사연이 있는데, 1930년 조흥은행 평양지점 민 두취(전무)가 영산홍의 머리 올린 값을 하기 위해 은행 지점을 냈다는 얘기다. 정 선생은 일반적인 머리 올리는 값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일제 때 동기의 머리를 올리는 사람은 대개 큰 부호나 토호, 유지, 조정의 친일파 대감, 도, 평의원 정도는 되어야 머리를 올린다. 동기는 권번에서 머리를 올려 줄 동기를 찾아야 한다. 서방을 얻으면 한 재산을 받는데 이때 그동안 빚진 것을 갚기도 한다. 동기는 서방을 정하고 요리집에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없지만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동기가 머리를 올리는 것은 다 이런 경우였으니 기생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1930, 40년대 동기가 있어 많은 에피소드를 낳은 요정은 남원의 명문장, 진주의 봉황각, 목포의 청수장, 나주의 영산관, 진주의 서울관이 알려진 곳이고 서울의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 천양각을 꼽았다. 1930년대 초 진주 촉석루에서 명창들이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장소와 시기 정도만 알려졌을 뿐 그 면면을 밝히지 못하고 전해졌다. 1930년대 진주는 한 집 건너 기생집이 많아 명창들이 모여들었다는 얘기의 배경으로, 또한 어떤 유명한 명창이 이 사진 중에 들어 있을 것이란 정도로만 설명되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정범태 선생이 바로 이 사진의 중요 면면들을 밝혀냈다. 조상선(창극), 송만갑(명창), 한성준(고수), 김창룡(명창), 이동백(명창), 오태석(가야금), 정정렬(명창) 등이 함께 찍었다. 이 사진 설명은 1998년 지상을 통해 알렸는데, 정 선생이 이 사진을 소장했던 명창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이 렇게 정확하게 밝힌 것은 전공을 살린 업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국악인들과의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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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薄色, 소리는 絶色 -귀명창의 연인 李花中仙일제시대의 판소리는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기는 하였으나 이전 황금기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시대의 판소리는 5명창으로 알려진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이들의 뒤를 이어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김여란. 김연수 등이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이화중선의 소개로 송만갑을 만나 국창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심청가 한 대목을 듣고는 온통 혼을 빼앗겼다고 고백할정도로 당시 이화중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화중선은 명창 박녹주와 달리 그녀의 탄생과 죽음 대목이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고향만 해도 부산 동래, 전남 보성 벌교, 전남 남원 등 설이 분분한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부산 동래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화중선 1898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했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李鳳鶴이었으며 아주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가 전설의 새인 봉황과 학처럼 오래 살라고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99년 「영남음악사연구」란 논문집을 펴 낸 향토음악사 연구가 손태룡씨는 "이화중선은 다섯살때 동래에서 전남 보성군 벌교면으로 이사갔고, 전남 남원군 수지면 호곡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 ,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서의 삶을 보내던 중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협률사 공연에 반해 시집을 뛰쳐나와 소리꾼이 됐다”고 주장했는데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1918년, 송만갑의 협률사가 들어와 흠실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협률사의 국창과 여류 명창들을 구경하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화중선도 그 틈에 끼어서 구경을 하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판소리와 창극 춘향전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날 밤 화중선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상하게도 어쩐지 자신의 길은 촌부생활이 아닌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3일간 계속된 협률사 공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경하는 동안에 마음의 동요는 더하였다. 그곳에서 받은 감동과 충격으로 인하여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화중선의 소리에 대한 열정을 일깨웠으며, 자기도 판소리를 배워서 여류명창으로 입신양명해 보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난 것이다. 화중선은 밤마다 번민에 사로잡혀 미칠 것만 같은 심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화중선은 남편도 가문도 체면도 저버리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화중선은 덮어놓고 남원으로 달려왔으나 판소리를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울 것인지 목표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남원거리를 방황하다가 어느 노파의 안내로 들어 간 것이 무당집이었다. 화중선은 그 집에 있으면서 무당이 가르쳐 주는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무당은 화중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주색가에게 몸을 팔도록 끈덕지게 졸라대어 할 수없이 그 집을 나오게 된다. 그 당시 남원에 거주한 장득주(장재백의 조카)는 명창은 못되어도, 본래 명창의 문하에서 이수하였던 만큼 조격이 높고 남원에서는 일류라는 평판이있었다. 화중선은 소문을 듣고 장득주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였으나 하인들이 문전박대를 하고 들여보내 주질 않았다. 어떻게 하든 소리를 배우고 싶었던 화중선은 장득주의 동생이 아직 총각이며 술독에 빠져 지내느라 장가를 들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장득주의 동생과 혼인하는 것이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는 장득주의 동생 장혁주와 맞선을 보고 결국 혼인을 했다. 장득주는 자신이 소리를 할 때마다 화중선이 문밖에서 한창동안 기웃거리다 들어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또 부엌에서 몰래 숨죽이며 소리하는 모습도 보았다. 장득주는 동생의 아내가 소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 함께 그녀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차렸다. 음악성이 높고 배우려고 하는 열정이 남다른 것을 높이 샀으며, 장차 명창이 될 큰 재목감이라는 것을 알고는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화중선은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운지 몇년만에 <춘향가>,<심청가>,<흥보가> 세 마당을 완전히 습득했다. 그 후 화중선은 장혁주와 이혼하고 어느 부자 모씨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5백석의 재산을 얻게 된다. 더이상 물질에 어려움이 없게 된 화중선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선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남편과 가정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朝鮮券番에 妓籍을 두고 공부를 하는 한편,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창극단인 협률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화중선의 소리를 들은 송만갑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소리란 본래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명창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법인데, 화중선은 스무살이 넘어서야 소리를 배웠어도 그렇듯 곱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도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 타고난 소리꾼이 틀림다는 것을 알아챈 까닭이었다. 화중선의 얼굴은 박색이었으나 그 성음만은 월등하게 아름답고 샘물 솟듯이 막힌 데가 없었다. 소리를 조작하지 않고 나오는대로, 부르는대로 하여도 규범에 틀림없이 유창하게 잘 불렀다. 그러한 그녀의 청아하고 감정이 어린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화중선의 이같은 타고난 소리는 다른 명창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그녀만의 특징이었다.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대회」가 열렸다. 그녀도 서울에 올라와 그런 큰 무대에 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당시 판소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배설향도 참가해서 긴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심청의 마음을 애끊는 가락으로 불러 명창대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일등으로 뽑힌 화중선은 당시 '소리의 왕'이라고 불리던 박기홍으로부터 '화중선'이란 예명을 받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배설향이 여왕이라면 이봉학은 가히 꽃중의 선녀로세. 내 자네를 위해 이름을 하나 지어주겠네. '꽃중의 선녀'라는 뜻으로 '화중선'이라 함은 어떨까? 지금부터 이봉학이란 이름 대신에 '이화중선'이란 이름을 사용하려무나" 이때부터 이봉학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화중선이라는 예명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명창이 되어서 서울의 창극 무대에 서기 위해 세 번씩이나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온갖 고생을 다했던 화중선은 그 보답으로 송만갑의 협률사에서 활동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화중선이 잠을 설치며 꿈꿔왔던 명창의 길로 드디어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위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중선은 인기와는 반대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삶을 고민하여 살았다고 전해진다.1935년 장안사, 연흥사와 같은 창극 전문 극장이 일제의 치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활동사진의 보급으로 인한 경영난이 겹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 창극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협률사에서 더 이상 소리를 못할 걸 안 화중선은 정식 남편으로 알려진 林完元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들어가 판소리와 창극을 계속했다. 대동가극단에는 강남중, 임방울 등의 명창과 박초선, 박초홍 등이 가담해 판소리 창극의 토막극, 남도민요, 줄타기 등을 펼치며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1943년에는 일본의 한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레코드를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동가극단의 단원 모두를 초청해서 일본 순회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청이 아니라 위문단이란 이름의 반강제적인 공연이었으며 출연료도 주지 않고 여비와 숙식비 정도로만 지불하려는 일제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일제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건 예술인이건 적당한 명목을 만들어 마구 부려 먹고 있었다. 대동가극단 단원들은 억울함을 속으로 삼키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공연을 떠나게 되었다.이화중선은 전국 각지와 일본 등지를 여행하며 맑고 청아한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한없이 밀려드는 고독감과 잔병치레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허약해져가기만 했으며,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 극단 생활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화중선은 본래 약한 체질인데다가 너무 무리하여 유랑 극단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건강상태가 최악의 상태로 나빠졌다. 화중선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알고는 큰 슬픔에 잠겨있었다. 동료 명창들이 힘들어 하는 화중선을 위로하기도 했지만, 이미 깊은 병마와 싸워 지쳐버린 화중선에게 별로 큰 용기를 주질 못했다. 화중선의 입에선 죽음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 규슈에서 세도 나이카이를 항해 중이던 여객선에 가극단 일행은 지친 몸으로 올랐다. 화중선은 항해중인 배의 갑판에 올라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화중선의 몸이 힘없이 나풀거리며 바다에 떨어졌다. 그렇게 억새풀같이 한 많은 화중선의 예술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시신은 사가현 앞바다에서 인양 됐는데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때 화중선의 나이 46세였다. 참으로 극적인 소리인생을 살았던 화중선은 20여년간의 예술혼을 불태워 국악사의 전설적인 여류 명창으로 남겨지게 되었다.이화중선의 삶은 가끔 아편을 즐겼고, 혈육을 남기지 않고 이승을 떴다는 측면에서 박녹주의 삶과 비슷했다. 하지만 소리의 질감은 박녹주와 확연히 달랐다. 박녹주는 동편제 판소리의 정통을 따랐지만 이화중선은 판소리를 대중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의 소리는 일반인들한테는 듣기에 더없이 좋았다. 자연 레코드회사들이 그녀를 붙잡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화중선은 당대 여류명창 중에서 가장 많은 205장의 유성음반을 남겼다. 한때 달성권번 측에서 대구로 내려와 후학 지도를 권했지만 그녀는 소리하는 사람은 공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지도는 하지 않는 것이라며 전국순회공연에 청춘을 바쳤다. 그녀의 친동생 李中仙(1901∼32)도 명창이었다. 중선은 언니의 유명세에 가려 명창임에도 대중적 인기를 별로 얻지 못했다. 언니가 ‘추월만정 ’ ‘사랑가’(‘춘향가’의 한 대목) 등으로 사람들의 얼을 빼앗을 때, 중선은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으로 서민들의 한을 달래주었다. 먹고살기가 너무도 힘겨웠던 일제시대를 살아야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이들 자매는 큰 위안이며, 힘이 되어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남보다 늦은 20세가 되어서야 소리의 인생을 시작한 화중선이었지만, 타계하던 그날까지 귀명창들의 연인으로 존재하면서 김초향과 더불어 여류 창악계의 쌍벽으로 화려한 명성을 남기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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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외길 60여 년, 국악계 마지막 자존심, 김소희1979년 5월 전북 고창 청년회의소는 이 고장 출신 여류 명창 ‘만정(晚汀) 김소희 여사 명창 기념비’를 그의 고향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 세웠다. 김소희 씨는 인물 많기로 유명한 고창에서 이곳 사람들이 선뜻 내세우는 ‘자존심’ 중의 하나. 고창 출신 미당 서정주 시인은 명창 기념비 뒷면에 다음과 같이 읊어 새겼다. 만정 그대의 노래 소리에는 고창 흥덕의 옛날 못물에 몇 만 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만정은 김소희(金素姬 1917년 10월 17일생) 씨의 아호. 국악계에선 ‘만정 선생’으로 통한다. 5척 단구의 여자 몸이지만 그만큼 처신이 당당하고 매사를 맺고 끊는 맛이 분명하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소리꾼으로 인간문화재(제5호, 1964년 1월)로 지정되었다. 유명세도 높아 그녀의 일생에 관한 부분도 웬만한 사람은 알 만큼 알고 있다. 그러나 국악계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통하는 만정의 가슴 속 쇳덩이 같은 응어리는 아직도 녹을 줄 모르고 오히려 커 가고 있다. 소리를 한답시고 배움을 뒤로 미뤄 놓은 평생의 철부지 회한, 여자의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대중 인기인의 길, 창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 정도로 알며 하시당하고 살아 온 세월······. 이 모든 것들이 예인의 길에 새로 입문하려는 후학들에겐 금과옥조 같은 스승의 가르침으로 남는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평범한 아낙으로 요조숙녀의 길을 가지, 가시밭길 같은 국악인의 길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50여 평 대지의 2층 한옥이 김씨의 집이다. 평생 모은 재산을 국악계에 희사한다는 ‘낭보’에 접할 때마다 김씨의 가슴은 뜨끔하다고 했다. 재복이 안 따라서인지 자신은 60여 년의 국악 일생에 남은 거라곤 집 한 채 뿐이기 때문이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시절(13세) 당대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를 가설 무대서 듣고 공부를 작파해 버린 김씨는 광주에 내려와 소리를 가르치던 동편제 소리 대가 송만갑(宋萬甲) 선생 문하에 들어가 심청가를 전수받으며 평생 명창의 길에 들어선다. 고창은 창악계 여류 명창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진채선(陳彩仙, 동리 신재효 제자) 허금파(許錦波, 1920년 원각사 시절 월매 역)를 배출시킨 곳이다. 김씨 또한 전라도 풍류 대가였던 부친(피리ㆍ단소의 대가)의 ‘끼’를 받아 언뜻 듣기만 해도 훌륭히 모창해 냈다. 6개월 학습 결과는 남원명창대회(14세) 1등으로 나타났다. 그 때 특상은 군산의 나이 많은 손채옥(孫菜玉), 2등은 이름도 낯익은 신숙 씨였다. 이후 전주의 정성린(鄭成麟) 씨를 찾아가 승무 살풀이를 배운 뒤(14세) 이듬해 겨울 ‘영신환’ 가방 하나 들고 상경 길에 오른다. 당시 연극 배우였던 복혜숙(卜惠淑, 작고) 씨와 친구였던 이모 김남수(金南洙) 씨가 명고수ㆍ명무 한성준(韓誠俊) 씨를 소개해 주며 ‘오늘의 김소희’로 일어서게 된다. 김소희(동편제) 창은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삐뚤어진 시각 때문에 천대받고 살면서도 국악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예인이었다. 김씨 눈을 보며 "사목(뱀눈)이라 재주 있겠구먼.” 하던 감격과 충격을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이 때부터 조선성악연구회를 드나들며 창악계를 주름 잡던 송만갑, 정정렬(丁貞烈, 춘향가)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만난 인연치고 스승 복이 많다고 지금껏 자랑하고 있다. 이 때 이모는 아명 옥희(玉姬), 호적명 순옥(順玉)을 버리고 ‘소희’라 지어 주며 "기왕 들어선 길, 오기로 버려 내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22세에는 명창 박동실(朴東實, 납북) 씨를 화순 동복으로 찾아가 수궁가와 적벽가를 보탠 이후 김계문(金桂文, 향제 가곡), 유순석(양금), 이승환(거문고), 강태홍(姜太弘)ㆍ김윤덕(金允德) 씨(가야금) 등 그야말로 스승 복이 줄줄이 이어진다. 김씨가 아껴 사용하는 아호 만정(晚汀)은 19세 때 김종일(金鍾益, 우석대 설립자) 선생이 즐겨 찾던 ‘관상장이’한테 부탁해 지어 준 것이다. 그 때 관상장이는 "싫으나 좋으나 80까지는 소리를 해야 되겠다.”고 ‘악담’을 했다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의 춘향가 취입, 빅터ㆍ오케이 레코드 양사의 김소희 쟁탈전, 쌀 한 가마 3원 50전 할 때 2백 원씩 받던 월급, 창극단 조선창극좌에서 민족 의식 고취시킨다며 왜경에게 쫓기고 유치장에서 밤새우던 일 등이 해방 전 교차된 만정의 영욕이다. 여성국악동호회(이사장 박녹주) 햇님달님의 인기, 혈육보다 더 애정이 진한 박귀희(朴貴姬, 가야금 병창)와 피난 시절 부산에서 하던 식당, 국악예술 고등학교 전신인 민속예술학원 설립, 대만과 공산권만 빼놓고 거의 다닌 세계 순회 공연, 그의 후반의 일생은 이렇게 요약된다. 심청가 5장 전집ㆍ춘향가 6장 전집 취입, 국민훈장 동백장(197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음악 부문 상(1984년) 수상 등의 행적이 빛나건만 사는 게 고달프고 여인의 길이 서러워 수 차례 죽을 결심도 굳혔었다고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우전 신호열(雨田 辛鎬烈) 선생한테 배운 안진경(顔眞卿) 체로 1967~70년 내리 3년을 국전 서예에 입선했다. 병든 어머니를 입원시키고 아들 교복 사줄 돈이 없어 가락지 빼어 팔 때 만정은 붓을 들어 고약한 팔자에 대한 분노를 삭였다고 했다. 붓끝에 떨어지는 묵정(墨精)의 흔적 속에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체휼하고 삼계(三界)잡념을 떨쳐 버린단다. 최근엔 월하(月荷, 여창 가곡)의 권유로 3년 전 입교했던 원불교에 새삼 애착을 갖고 있다. 이렇게 살아 온 만정의 예술속은 장영찬(張永瓚, 명창, 장판개의 아들)ㆍ안향연ㆍ김동애(이상 작고) 씨와 딸 박윤초(朴倫初, 판소리ㆍ기악ㆍ춤) 씨를 비롯 성창순(成昌順, 인간문화재 5호)ㆍ남해성(南海星, 준문화재)ㆍ박양덕(朴良德, 국악인 김무길 씨 부인)ㆍ신영희(申英姬, 조교)ㆍ유수정(劉秀正, 국립창극단)ㆍ한정하(韓正廈, 전수생)ㆍ이명희(李明姬, 1990년 전주대사습 대통령상) 씨 등이 잇고 있다. 주부로는 박정숙(朴貞淑)ㆍ한인환(韓仁煥)ㆍ김경애(金敬愛) 씨 등이 마음이 가고, 민속예술학원ㆍ국악고 등을 통해 그녀의 창맥을 잇는 제자는 1000명도 족히 넘는다. 가성을 안쓰며 상ㆍ중ㆍ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아직도 정동편(正東便) 소리를 한배 채워 부르는 김소희 여사. 그런 그녀가 살풀이 덧뵈기춤(즉흥춤)을 출 때는 소리꾼인지 춤꾼인지 구별 못 한다는 전문가들의 탄성이다. 서울올림픽 개ㆍ폐회식 때 ‘떠나가는 배’의 뒤풀이 소리로 세계를 숙연케 하고 전율시켰던 김소희. 그에게 첫결혼은 언제 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왜 묻느냐.”고 정색을 했다. • 김소희 동편제 명창 계보(번호는 배운 순서)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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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Pansori epic chant) 의 역사 ( Video :English subtitles)판소리의 발생 판소리의 발생에 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와있다.어진 화랑제도에서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화랑제도가 과거제도로 바뀌면서 예능에 능통한 일부 화랑들은 남사당을 조직하여 유랑하기도 하였고, ‘광대’란 말 역시 화랑의 방언이기에,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의 화랑에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한편, 전라도 무속을 배경으로 한 무가에서 판소리가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문화적 풍신이 전라도 무속과 유사하고, 초기 소리 광대들의 출신이 거의 무당이었으며, 무당들 중에는 전라도 지방출신이 많았다는 점 등에서 판소리의 기원을 전라도 지방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본래, 18세기 일반 서민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뒷받침 되어 독립하고 발전한 예술 장르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양반들은 사설의 윤색과 개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19세기 후반, 고창의 신재효(1812∼1884)는 구전(口傳)으로 전수되던 판소리 사설 가운데 여섯 바탕을 직접 문자로 정리하는 업적을 세웠다. 또 중인으로서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판소리 제자를 배출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판소리를 생성시킨 주도 세력 또한 한강 이남의 시나위권,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격(巫覡)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에도 시나위권의 단골(丹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연행 형태, 장단, 음조 등에서 판소리와 유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혼돈과 격변의 시간을 거쳐 급격히 확대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했다. 전승 정보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영조 30년(1754년),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晩華集)> 의 <춘향가> 한시(漢詩) 사설 200구(句)이다. 또 문헌 자료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에 12종의 판소리 바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와 재인(才人)들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는데, 정조 때의 가난한 선비였던 송만재(宋晩載)는 잔치를 베풀 수 없었다. 그래서 <관우희(觀優戱)> 라는 글로 이를 대신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판소리 12 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우희(觀優戱)에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왈자타령>(↔무숙이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숙영낭자전) 등 12바탕 판소리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당대에 성행했던 판소리의 규모와 내용 등을 익히 짐작하게 한다. 예능보유자 숙종 말 이후 영,정조 때에는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과 같은 명창이 있었다. 또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의 명창이 있었는데, 이 중 여덟을 골라 '전기 8명창(前期 八名唱)'이라 한다. 이때는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권삼득의 설렁제, 모흥갑의 강산제(→東강산제), 염계달·고수관의 경드름과 추천목, 김제철·신만엽의 석화제 등 독특한 음악적 더늠이 나온 시기다. 그 밖에 동편제의 시조(始祖)인 남원 운봉의 송흥록, 중고제의 시조(始祖)인 경기도 여주 염계달의 활약도 두드러지며,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던 서편제의 시조(始祖) 박유전 역시 판소리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송흥록은 진양 장단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철종 무렵에는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그리고 김정근, 한송학 등이 활약하였는데, 그 중 여덟을 골라 '후기 팔명창(後期 八名唱)'이라 한다. 전기 팔명창 시대가 판소리를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동편, 서편, 중고제 등의 유파로 분화시켰던 시기였다면, 후기 팔명창 시대는 이러한 유파적 특성과 음악적 특색이 정착되고 더욱 심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후기 팔명창 중에서 박만순·송우룡·장자백·김찬업은 동편제를 이었고, 이날치·정창업은 서편제를, 김정근·한송학은 중고제를 각각 계승하여 널리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후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 1930년대까지는 '오명창 시대(五名唱 時代)'라 일컬어진다. 이 때 활약했던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박기홍, 유성준, 김채만, 전도성 등의 명창 중 다섯을 골라 '오명창(五名唱)'이라 부르곤 하는데,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 게 일반적이다. 판소리 명창은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영조 말기 정조 초기에 하한담·최선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황해천·송흥록·송광록·모흥갑·염계달·김제철·신만엽·방만춘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또 고종 초까지는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박기홍·전도성·김창환·이동백·김창룡·김채만·정정렬 등이 활동했다. 판소리는 점차 무대화되다가 여성국극단에 의해 여성창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오늘날 판소리 예능보유자로는 춘향가에 김여란·김연수·김소희(본명 김순옥(金順玉)), 심청가에 정권진, 흥보가에 박녹주·강도근, 수궁가에 정광수(본명 정용훈(丁榕薰))·박초월, 적벽가에 박동진·박봉술·한승호(본명 한갑주(韓甲珠))가 인정되었으며 이후 춘향가에 오정숙, 심청가에 성창순·조상현이 인정되었다. 또한 춘향가에 성우향(본명 판례), 흥보가에 박송희(본명 정자), 적벽가에 송순섭이 새로 인정되었다.(2006년 상황) 현대로 넘어온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이 나타나, 각기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며 널리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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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박녹주의 예술과 비운의 사랑박녹주의 本名은 命伊, 雅號는 春眉, 藝名은 錄珠이다. 흔히 판소리하면 호남을 떠올리게 된다. 판소리가 거기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는 그 사정이 달랐다. 1920년대부터 4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남은 그야말로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金秋月:1896∼1933), 김녹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그리고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 고장으로 만든 주역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박녹주의 은퇴공연이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이날 무대에서 박녹주는 "여러분들을 이 자리서 보고 언제 다시 뵐지 이제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무대생활은 마지막입니다. 소리가 잘못되더라도 허물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략한 인사말과 함께 단가 <백발가>와 흥보가 중 <박타령>을 불렀다. 박녹주는 울먹이며 간신히 <백발가>를 마쳤다. 객석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 은퇴 공연은 부산, 대구, 대전으로 이어졌다. 박녹주는 1905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박중근, 모친은 권순이이며 박녹주 밑으로 남동생 태술, 만호, 만술이 있었다. 박록주의 어릴 적 이름은 모친의 이자를 딴 命伊였다. 박녹주의 부친은 한량으로 집안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냈고, 그리하여 박녹주는 10살 때부터 모친을 도와 농사짓고 소를 몰며 물레도 돌리며 억세게 자라났다.박녹주는 그녀의 아버지가 박수무당으로 소리선생도 겸했던 터라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접하면서 자랐는데 1916년 그녀가 12세 때, 그녀가 살던 선산에 협률사 공연이 있었다. 협률사는 소리, 춤, 줄타기, 등의 갖가지 재주를 보여주는 순회 공연단체인데, 박녹주의 부친이 이 공연의 판소리를 보고 크게 감동하여 평소 목소리가 우렁찬 박녹주를 명창으로 길러내 그녀가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노름과 술값으로 쓰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부친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박기홍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때 그녀의 부친은 딸에게 명창이 되라며 命伊라는 이름 대신 錄珠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박녹주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약 20시간 동안 꼬박 소리를 질러가며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웠다. 그러나 소리할 때의 자세가 매우 엄했고 사설은 거의 한문 투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음식은 참기름만 먹었고 고된 연습으로 목에선 피가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지옥훈련 같았던 박기홍의 가르침으로 판소리의 기틀을 확고하게 갖춘 그녀는 그때부터 경상도 곳곳에 초청되어 다니며 소리를 하기 시작했으나 사례비가 생기는 족족 그의 부친이 술값으로 써버렸다. 그러던 그녀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김창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김창환은 좀처럼 소리를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듣고 그저 따라하도록 지시할 뿐이었다. 박녹주는 김창환이 무대에서 부르는 <제비노정기>를 유심히 듣고 모르는 것을 물어보며 한 구절씩 익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택에 김창환의 <제비노정기>가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박녹주의 세 번째 스승인 강창호는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실력이 대단했고, <심청가>에 장기가 있었다. 그녀는 수궁가 중 <고고천변>을 두 달 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 소리를 배운 뒤 그녀는 다시 부친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가서 억지로 기생 수업을 받게 된다. 그녀의 부친은 박녹주를 당시 달성권번의 행수기생이던 鸚鵡에게 3년동안 양딸로 맡기는 대신 2백원을 받았고 박녹주는 행수기생의 소유가 되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앵무는 너그러운 품격의 소유자였고, 재주가 뛰어난 박녹주를 아꼈다. 박녹주는 앵무를 통해 기생수업을 받으면서 춤, 시조, 소리 등을 연습했으며 예의바른 행동거지를 배워나갔다. 그러던 중 그녀 나이 15세 때 李某라는 한량이 박녹주의 딱한 처지를 듣고 2백원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박녹주였지만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의 손에 끌려 대구로 갔다. 역시 기생수업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때 그녀는 김점룡, 임준옥, 조진영에게 남도민요 <육자백이>와 <화초 사거리>를 배우게 된다. 당시 그녀는 김초향 다음 가는 소녀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하룻밤 초청되어 가면 10원을 받았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가 50전 할 때의 일이니 그 명성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무렵 충청도의 갑부 변씨가 그녀에게 화초머리를 얹어주고 세간을 사주었다.1922년, 박녹주는 서울로 가서 송만갑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춘향가 중 <사랑가>부터 <십장가>까지를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1923년 그녀는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 눈부신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전성기를 보내던 1928년 봄 그녀는 조선 극장에서 열린 8도 명창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이 그녀를 찾아가는 데 한 명은 전 부통령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영감이었고 다른 한 명은 김유정이었다.김유정의 박녹주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은 그녀가 평생 사랑의 고달픈 행로를 걸어야 했던 전주곡의 시작과도 같았다. 원래 김유정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지주였고,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었지만 서울에도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을 관리하던 큰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린나이에 부모 모두를 잃고 외롭게 성장기를 보냈던 그는 늘 어머니 사진을 품고 다니며 연상의 여성에 대한 원초적인 그리움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초였다.박녹주에게 첫눈에 반한 유정은 그날 이후 심한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다. 유정을 매일 밤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모의 마음을 글로 옮겨 보냈다. 편지를 받고 무척이나 당황했던 녹주는 편지를 다시 하숙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번엔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자신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적힌 편지가 전해져 왔다. 하루가 멀다 오는 편지를 보며 근심하게 된 녹주는 행랑어멈을 시켜 유정을 오게 한 뒤 학생은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지 딴 생각을 하면 아니 된다하고 자신은 기생의 신분임을 내세워 조용히 타일러 보았지만 이미 유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녹주의 동생 태술이 유정을 달래어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날로 태술과 친해진 유정은 친구 태술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녹주의 집을 찾아갔고, 태술을 통해 편지를 직접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녹주의 마음은 요지부동으로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협박과 공갈 등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음은 박녹주가 「한국일보」에 38회 연재(1974. 1. 5~ 2. 28)된 「나의 이력서」에 고백한 내용이다. 우리는 그 자료를 통해 유정이 박녹주에게 한 말의 내용과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살펴 볼 수 있게 되고 유정의 슬픈 집착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김유정이 나한테 죽이겠다고 협박편지를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도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하루는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검은 그림자가 인력거를 향해 돌진해왔다. 직감적으로 김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력거꾼에게 정거하지 말고 빨리 앞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쳤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였다. 그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불뿜는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 나로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내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천한 여자가 될 것만 같았다....."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이 정도의 협박편지가 들어온 것은 그해 즉 1928년 겨울쯤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를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나는 몸이 오싹해졌다. 편지는 잉크로 쓴 게 아니라 혈서였다.이렇듯 유정의 감정은 병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박녹주는 직업상 사람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일상은 활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늘 어디론가 가서 소리를 하는 그녀를 문 밖에서 기다리며 나올 시간만 기다렸지만 끝내 나오지 않으면 온갖 상상을 일삼으며 그녀를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박녹주는 유정이 구애하는 동안 매년 그를 피해 피서를 가는데 1928년에 한 달, 그리고 1929년에는 두 달동안 원산에 있는 삼방 저수지에 머물며 창 공부를 한다. 그녀가 종적을 감춘 동안 매일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며 초조해하던 유정은 감정이 한층 더 격해진다. 후에는 그의 감정이 연모의 감정인지 혹은 복수의 감정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 이 때 그의 음주량은 그의 몸 상태에 비해 과도했으며, 늑막염을 앓고 있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상태였다. 혈서를 쓰고, 협박을 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의 행동은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을 뿐이었다. 박녹주가 자신은 소리하는 사람이므로 학생과 연애할 수 없다고 하자, 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미 남의 소실이었던 박녹주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는데, 부친 문제 등으로 인생을 비관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던 박녹주가 일주일여만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바로 유정이었다. 그는 "당신 장례를 치루려고 기다렸다” 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을 보면, 유정 그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아주 서툴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정은 박녹주와의 사랑을 이룰 수 없음에 큰 상처를 입어 학교도 그만두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간 1930년 여름부터 그가 타계하는 1937년 봄까지 약 7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쓰지만 유정의 가슴앓이는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이어져 결국 나이 서른에 눈을 감는다. 이때의 작품 중 「생의 반려」와 「두꺼비」는 그와 박녹주의 관계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룰 수없는 사랑에 대한 유정의 恨은 그렇게 작품 속으로 용해되고 승화되어 갔던 것이다.김유정과 같은 시기에 알게 되었던 김경중은 박녹주의 소리일생에 지대한 영향과 주게 된다. 김경중은 8도 명창대회에서 박녹주의 모습에 반하여 그녀에게 집을 한 채 선사하는 등 아낌없이 그녀에게 베품을 주었다. 그 뒤에도 김경중은 박녹주를 귀애하며 그녀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가혹해 먹고사는 것이 힘든 사정이었고, 박녹주는 한량인 아버지에 의해 착취당하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경제력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생수업을 받고 2백원에 팔려 다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15세 때는 임준옥과 사랑에 빠졌다가 부친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고, 17세 되던 1921년에 열린 원산 명창대회에서 남백우와 만나 이내 혼인하였으나, 그녀는 첩이었고, 그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수많은 역경을 통해 그녀는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경험했었고, 누구보다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으므로 낭만적이고 현실감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김유정과의 사랑을 받아드리기에는 그녀의 굴곡많은 삶이 허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김경중은 1929년에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에게 박녹주가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어 21일동안 김정문에게 흥보가 중 초입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까지를 배우게 된다. 이 때 배운 소리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 데>는 흥보가 중에서 박녹주가 가장 즐겨 불렀던 대목이다. 박녹주는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온 1929년 3월, 부친에 대한 원망과 복잡한 가정사를 비관하여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을 기도하게 되는데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다.자살 소동 이후 몸을 회복하게 된 박녹주는 1930년, 다시 김경중의 권유에 따라 김정문에게 <심청가>를 배우기 위해 남원으로 가서 열흘 동안 심청가 전 바탕을 익히게 된다. 김정문은 송만갑이 "제자가 무섭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 명창이었다. 김경중의 후원이 없었다면 김정문의 <심청가>의 전승이 끊어질 뻔했는데, 다행이 박녹주를 통해 전승되어 온 것이다. 남백우의 첩으로 사는 데 회의를 느낀 박녹주는 이별을 결심하고 申某의 사랑 고백을 받아들여 함께 살다가 1931년에 김종익과 재혼하게 된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갑을 위해 조선성악연구회의 사무실로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159번지에 있던 9천 5백원짜리 건물을 사주었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양반 등 상류계층이 몰락하게 되자 전통음악인들은 돈 많은 한량과 서민을 상대로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그런 장소에 음악인들을 공급하는 구실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박녹주는 생활을 했고, 송만갑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박녹주는 김여란, 이기권과 함께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숙영낭자전>을 배웠는데, <숙영낭자전>은 전승이 끊어진 판소리로서 정정렬이 창작해서 불렀고 그것을 박녹주가 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성준에게서 <수궁가>를 익혔다. 1935년,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창극을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이 때 박녹주가 춘향 역할을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춘향을 직접 보려는 관중으로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40년 박녹주의 부친이 타계했다. 박녹주는 한평생 부친을 원망하며 살았으나, 막상 그가 타계하자 며칠 동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박녹주에게 있어 예술과 사랑의 길 모두가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훗날 그녀는 아편흡입과 아편소지 매매 등의 죄명으로 공판에 회부되고 철창에서 탄식하는 절망의 날들을 맞기도 했으니 말이다.박녹주는 여류명창이면서도 매우 남성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데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가 투박하고 꿋꿋한 소리제를 구사했던 것은 그가 남자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웠던 데 가장 큰 이유가 있겠고, 또 그가 타고난 성음 자체가 강한 인상을 주며 그의 고난에 찬 인생살이가 그를 강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박녹주의 제자인 이옥천은 박녹주의 소리를 가리켜서 "통이 크고 박력이 있으며, 부드럽기 보다는 꿋꿋하며, 맺고 끊음이 무섭다.”고 평했다. 박녹주는 대체로 전바탕 공연보다는 토막소리 위주로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아니리는 극히 짧으며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멋이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전라도 지역이라서 전라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산에서 태어난 박녹주는 경상도 방언으로 아니리를 구사하기 때문에 매우 특이하다. 남성을 능가할 정도의 통성을 위주로 해서 소리를 끌고 나가며 소리 맺음에 있어서 군더더기가 없고 분명하다. 이런 박녹주소리의 특징이 「?조선 창극사」?에는 모지락스럽게 맺고 끊는다고 적혀 있다. 성음은 엄성이 많이 쓰이고 정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각 대목마다 상황에 맞게 성음, 장단, 선율에 변화를 주어 이면을 살려내는 기량이 출중하다. 또 서편제의 더늠을 부르더라도 동편제의 특성을 가미해서 소리가 매우 진중하다. 이러한 박녹주의 소리는 별로 힘 안들이고 쉽게 부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엄청난 공력을 내보인다. 또한 박녹주는 발림이 요란하지 않았다. 발림보다는 성음과 선율에 변화를 주어 목소리만으로 각 대목의 상황을 적절히 묘사해냈던 것이다.1940년대 후반에 박녹주는 국악계가 남자들 편의 위주로 운영되는 것에 불만을 갖고 김소희, 박귀희 등을 이끌며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판소리계에서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고집한 박 녹주가 남긴 음반은 명물로 꼽히며, 40년대에 김소희.박귀희 등과 함께 결성한 여성국악동호회는 남성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판소리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6. 25 발발 후에는 월북을 강요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 6. 25때 그녀는 오태석, 김세준, 박춘홍, 조농옥, 이용배등 30여명과 함께 방위대에 입대하여 군인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이러한 박녹주는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였고 인간문화재로 소리판을 지켜냈다. 박녹주의 콜럼비아에서 나온 음반이 인기를 끌자 여러 음반회사에서 앞다투어 그녀의 음반을 제작했다. 박녹주는 음반 취입, 무대 공연, 잔칫집 초청 공연 등으로 돈을 벌어 월수입이 무려 5-6백원이나 되어 자가용차를 전세내어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축하는 성품이 아니어서 돈이 생기면 모두 써버리곤 하여 말년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박녹주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서 50대 전반기였던 1955년~1960년에 가장 좋은 소리가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가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어 대다수의 국민이 음악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에 음반 제작이 활발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6. 25 이후부터는 유랑극단 생활을 통해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녀는 1960년 초에 급성 폐렴을 얻어 경찰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때 그녀의 유랑생활은 끝이 났다. 그녀는 젊을 때 벌어놓은 돈을 저축해 놓지 않아, 6. 25 이후에는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어렵게 삶을 꾸려나가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1965년 박녹주는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 정광수, 박초월과 함께 <춘향가>로 중요 무형 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다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대상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확대되면서 그녀는 <흥보가>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박녹주의 은퇴공연을 하고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1970년대에 집에서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운영했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이옥천, 한농선, 박송희, 정성숙, 조순애, 정의진 등이 그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1978년 박녹주는 고향인 선산에서 공연을 했다. 이 무대에서 그녀는 <백발가>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소리를 하면 할수록 폐가 붓는 지경으로 몸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녀가 74세의 병든 몸을 이끌고 고별무대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생각하면 징그럽도록 사연도 많고 한도 많았던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단가 <백발가>를 목놓아 부르자 객석은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1979년 5월26일 오후 1시, 시대의 명창 박녹주는 셋방을 전전하다가 면목동의 단칸방에서 혈육한 점 없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그에게는 오직 양아들로 맞아들인 조상현이 있을 뿐이었다.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 화강석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인간문화재 제5호 박녹주(朴綠珠:1905∼79)여사 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1981년 세워진 이 비석의 주인공 박녹주는 젊어서는 대구 달성권번, 서울 한남권번의 名妓로 이름을 날렸고, 늙어서는 동편제의 거목으로 판소리<춘향가>, <흥보가> 분야 인간문화재로 예우를 받았지만, 삶 자체는 판소리 서편제처럼 너무나도 서글펐다. 조상현, 박송희, 신영희 등 그의 뜻을 기리려는 후학 들은 매년 그녀가 타계한 5월26일, 비석 앞에서 판소리 한마당으로 기제사를 올린다. 지금은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되어 추모사업회가 구성되었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전국국악대회도 2001년부터 매년 10월 열리고 있다.(출처:한국컨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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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쭉한 재담과 해학 뛰어난 국악계 괴짜, 박동진여덟 살까지 서당 다니며 얄궂게 살아 온 박씨는 외가가 있는 대전으로 이사하게 된다. 꿔다 논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않는다는 처가살이를 아버지가 하게 된 것이다. 회덕의 송씨 씨족 마을에서 천대받고 설움당하며 산 일은 아직도 못 잊는다고 한다. 소학교(5년)를 월반해 3년에 마치고 대전중학에 들어가면서 사연은 벌어진다. 대전극장에 진을 친 협률사 공연에서 이화중선(李花中仙)ㆍ중선(中仙)자매, 장판개(張判介), 조기옥 명창 들을 만난 것. 그들이 누구인가. "사람인가 선녀인가 했소. 저들도 밥 먹고 똥싸는가 싶을 정도로 눈깔이 홀랑 뒤집힌 거야······. 내 저 짓을 꼭 배워 악마구리떼 같은 가난을 짓이겨 버리겠다고 작심한 거요.”다짜고짜 장판개(1885~1937, 전남 곡성 옥과 태생으로 적벽가에 능했음) 명창을 찾아가 소리꾼이 되겠다니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며 충남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에 사는 손병두(孫炳斗) 씨를 소개해 주더라는 것."그 때 형편으로 두루마기 몇 벌과 버선 몇 죽, 용채돈이라도 다소 있었으면 저승문까지라도 데리고 다녔을 겁니다.”학교를 그만두고 소리를 배우겠다니 아버지는 "비록 없이 살아도 뼈대있는 집 자식이 천인광대를 하다니 웬 변고나.”며 절연을 선언해 버렸다. 이 때가 팔팔한 나이 열 여덟. 박옹은 오늘날까지도 "다시 집에 와 살겠지······.”하고 나선 길이 홀로서기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고 회고한다.1년 반 동안을 상머슴 살며 만고강산 춘하추동 등 토막소리를 배웠다. 손씨는 충서 지역을 주름잡던 상쇠꾼(꽹과리)으로 토막잡가를 잘했던 지방 명창이었다. 더 큰 선생을 만나겠다고 새경 없는 머슴살이를 청산, 대전으로 걸어오다 유성에서 난장을 만났다.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이 세 과시를 위해 튼 난장판이었다. 여기서 자청한 토막소리가 4~5창을 받으며 김천 진양옥(선술집) 여주인의 눈에 띈다. 동가식 서가숙하던 처지에 무조건 따라나서 술집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허허 참 기맥힌 일이지······. 학생이 선생 노룻 헌 거여. 여기서 한 3년 있다 대구성악연구회로 갔지. 거기서 박지홍(朴枝洪) 선생을 만나 흥부가를 배웠어요.”28세에는 경주 권번에 가 소리 선생 노릇하며 유성준 선생을 만나 수궁가를 떼받고 최윤(崔潤) 씨한테는 거문고를 배웠다. 예기였던 조계향(曹桂香, 남원 출신)한테는 북 장단을 배우고, 이 시절 조학진(曹學珍)ㆍ김창진(金昌鎭) 씨를 만나 적벽가ㆍ흥부가를 전수받았다. 당대 명창 정정열 선생한테 춘향가를 배운 건 서울 조선성악연구회서다."젊은 놈이 기생 선생 하자니 말도 많았어요. 한시인들 그냥 놔 둬야 말이지······. 대구 고등계 형사 주임(다카마쓰) 조카딸 유키코(당시 와세다 대학생)와의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파요. 권력과 위세에 꺾인 사랑이었어······. 그놈이 나를 개패듯 하면서 대구를 떠나도록 각서까지 쓰게 했으니까.”해방 후 잠시 조선가무단에도 몸담지만 별 재미 못 보고 62년 국립국악원(4급 을류)에 시험쳐 들어오는 집념을 보인다. 1968년 9월 30일 남산 국악고등학교 강당은 웅성거렸다. ‘시덥잖은 명창 박동진’이 흥부가를 쉬지 않고 5시간 동안 완창한대서였다. 그러나 박옹은 거뜬히 해냈다. 이것은 우리 현대 국악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이후 완창 판소리 붐이 일기 시작한다.이 당시 고수들은 이정업(李正業), 한일섭(韓一燮), 김명환(金明煥), 김득수(金得洙), 김동준(金東俊) 씨 등 5인의 명고수. 이후에도 박옹은 춘향가(8시간 40분), 심청가(7시간), 적벽가(8시간), 변강쇠타령(5시간), 숙영낭자전(5시간), 배비장타령(6시간), 옹고집타령(4시간), 장끼타령(3시간), 무수리타령(5시간) 등을 연속 열창해 내 판소리계를 경악시키고 그의 건재를 확인시키고 있다. 1973년 인간문화재 5호(적벽가)로 지정된 박옹의 기능은 강정자(姜貞子, 국립창극단 단원), 박종엽(朴鍾燁, 극단 ‘미추’ 동인), 이정(李正), 허정임(許貞妊, 추계예대), 정영재(鄭榮宰, 경북대 국악과 2년), 여창선(呂昌善, 경북대 국악과2년) 씨 등이 잇고 있다. 은관문화훈장(1981년), 전국국악대상(1982년), 서울시문화상(1983년)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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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와 김초향1933년 판소리 명창들이 중심이 되어 산조명인(散調名人)·경서도소리명창·민속무용의 명인들을 규합하여 판소리·남도잡가·창극·산조·민속무용·경서도소리 등 한국전통음악의 공연 및 전수를 목적으로 모인 단체이다. 1933년 5월 10일에 당시 여류명창 김초향(金楚香)의 발의로 서울 관훈동에 있던 김초향의 집에 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 등 판소리명창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속악인들이 모여 창립하였다. 연구회는 만들었으나 사무실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1935년 서울 익선동에 있던 당시 여류명창 박녹주(朴綠珠)의 집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박녹주의 주선으로 전라남도 순천의 독지가 김종익(金鍾益)의 후원을 받아 그 해에 익선동에 큰 한옥을 마련하여 사무실을 차렸다. 당시 참가한 명인·명창들을 보면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김연수(金演洙)·정광수(丁珖秀)·김준섭(金俊燮)·김초향·박녹주·김여란(金如蘭)·임소향(林少香)·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등이었고, 김재선(金在先)·정원섭(丁元燮)과 같은 명고수(名鼓手),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한주환(韓周煥)·박상근(朴相根)·신쾌동(申快童)·정남희(丁南希) 등의 산조명인, 오태석(吳太石) 등 가야금병창명인, 한성준·박소군(朴素君)과 같은 무용명인(舞踊名人), 김연승(金演承)과 같은 경서도소리명창 등이다. 연구회는 여러 가지 공연에 참가하였고, 1935년에는 창극단체를 조직하여 그 해 봄에 정정렬 편곡으로 창극 「춘향전」을 창립기념작품으로 서울동양극장(東洋劇場)에서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조선성악연구회 창극단은 대구·부산·진주·광주·전주·함흥·평양·마산·충무·여수·목포·대전·청진·사리원·개성 등지의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김초향(金楚香, 1900-1983)은 경북 대구(현재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 명창이다. 성명을 김초향(金初香)이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 12세(1911)부터 대구에서 가곡을 배웠고, 14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창환(金昌煥, 1855-1937), 정정렬(丁貞烈, 1876-1938), 송만갑(宋萬甲, 1865-1939) 등에게 소리를 배웠다. 14세에 장안사의 전속기생으로 들어가 판소리 몇 대목을 배우고, 바로 극장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공연으로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던 그는 당시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기획 기사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소개되기도 했다. 30대 초반까지 무대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고 레코드에서 음반을 취입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32세 때, 조선음률협회에서 박록주(朴綠珠, 1909-1979)·박월정(朴月庭)·김초향의 특별공연으로 기획한 삼대여류명창회(三代女流名唱會)에서 단가 〈장부한〉과 〈소상팔경〉, 〈춘향가〉 중 '사랑가', 〈흥보가〉 중 '흥보 집터 잡는 대목', 〈심청가〉 중 '화초타령' 등을 불렀다. 34세에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그의 익선동 자택에서 조선성악연구회가 발족했으며, 창립 초기에는 그곳이 연구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결혼 후 국악계를 떠나 은거했다. 단가 〈운담풍경〉(Okeh 12100 短歌 雲淡風景 金楚香 鼓韓成俊), 〈춘향가〉 중 '박석티'(Victor 빅타-大衆盤 KJ1075 春香傳 박石틔(上) 金楚香 伴奏빅타-朝鮮樂團), 〈심청가〉 중 '범피중류'(Columbia 40081-A·B 沈淸傳 泛彼中流(上)·(下) 金楚香), 〈흥보가〉 중 '흥보 집터 잡는 대목'(Okeh 12107 興甫傳 興甫집터닥는데(上)·(下) 金楚香 鼓韓成俊), 〈적벽가〉 중 '삼고초려'(Regal C174-A·B 三國誌 三顧草廬 (一)·(二) 金楚香 鼓韓成俊·Regal C175-A·B 三國誌 三顧草廬(三)·(四) 金楚香 鼓韓成俊) 등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성음의 억양이 지나치고, 일구 일절에 편벽의 힘을 쏟아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평이 있었다.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과 대비되는 창법을 구사했다고 하는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창법보다는 격정적으로 질러내는 창법을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춘향가〉 중 '사랑가'도 잘 불렀다. 강태홍(姜太弘, 1894-1957)과 함께 〈운담풍경〉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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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소설가 김유정이 연모한 여인 단아한 체격으로 명품 동편제를 뽑아내던 박녹주朴綠珠(1905.2.15~1979.5. 26)는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이 꿈에도 잊지 못하며 석달 간 연서를 보낸 주인공이다. 연희전문에 다니던 4살 연하의 강원도 실레마을 출신 엘리트 소설가의 연모가 이미 소리명창의 영예를 얻고 있던 당대 스타 박녹주의 삶에 파고들지는 못했다. 경북 선산(현재 구미) 고아에서 1905년 2월 15일(음력 1월 25일)에 태어난 박 녹주의 본명은 명이命伊, 호는 춘미春眉이고, 녹주는 예명이다. 박녹주는 호 적상 박재보朴在普와 박순이의 자녀로 태어난 걸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박중근과 권순이의 3녀로 태어났다. 다소 강한 억척같은 성격에 쟁쟁한 목소리를 내던 박녹주는 12살 되던 해(1916년)에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고 싶다는 아버지 손에 끌려 선산 도리사 사하촌에 머물고 있던 가신歌神 박기홍朴基洪 앞에 섰다. 동편제 「적벽가」에 능한 박기홍은 박녹주에게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이상 소리를 배우도록 했다. 소리하는 자세부터 엄하게 한 박기홍은 무릎을 세우고,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운 자세로 쉼없이 소리를 하 라고 가르쳤다. 점심 때를 제하고는 새벽녘 개밥바라기별이 뜰 때까지 「춘 향가」를 가르쳤다. 박녹주는 불과 두 달만에 「춘향가」전 바탕과 「심청 가」일부를 익혔다. 이때 예명을 녹주로 지었다. 어린 박녹주는 권력으로 위협해도 목숨걸고 이도령과의 순수한 사랑을 이뤄내는 「춘향가」중 옥중가와 몽중가가 맘에 들었다. 천지 삼켜 사랑나고, 사람생겨 글내일제 뜻정자 이별별자를 어이허여 내였든고. 뜻정자를 내였거 든 이별별자를 내지를 말거나 이 두 글자 내던 사람은 날로두고 지였던가. 도 련님이 떠나실 적에 지어주고 가신 가사 한창허니 가성열은 동창의 슬픔이요, 수다에 몽불성은 정부사의 설움이라... 어려운 가사를 외다가 잘못 외면 박기홍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회초리 로 때렸다. 목에서는 피가 났다. 도리사 부근에 머물던 박기홍은 「춘향가」 외에 「심청가」를 조금 더 가르친 뒤 선산을 떠나갔다. 소리를 다 배우기도 전에 박기홍 명창은 떠나고,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녹주가 소리를 한다는 소문이 벌써 꽤 났다. 선산은 물론 김천, 왜관, 상주 등지 에서도 초청이 왔다. 이때 벌써 과연 소리는 녹주야 라는 평가를 들었다. 앳된 박녹주가 우렁찬 소리로 「춘향가」 일절을 부르면, 좌중이 다 놀랐다. 14살 되던 해(1918년)에는 노대가 김창환金昌煥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흥보가」중 제비노정기 를 전수받았다. 제비노정기는 박녹주가 가장 애창하던 대목이다. 어린 소녀가 설움을 받아가며 김창환의 소리를 전수받은 덕에 대부분 소리꾼들이 박녹주의 제비노정기를 이어받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박녹주의 세 번째 선생은 대구 강창호였다. 앞산 절에 머물던 강창호는 예순이 다 된 노인이었으나 소리가 쩡쩡했다. 별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리를 퍽 잘하는 편이었다. 강창호에게 박녹주는 초입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 지는데까지, 「수궁가」중 고고천변을 두 달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심청가」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권번 에서 기생수업을 받게 했다. 소리를 배우는 것조차 꺼려하던 어머니와는 달리 박녹주의 아버지는 3년간 딸을 맡기고 돈 2백원을 받아갔다. 대구 달성공 원 앞 달성권번이었다. 달성권번에서 행수기생 앵모의 양딸이 되었다. 당시 행수기생 앵모라면 우리나라 한량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백명의 기생을 거느리고 있었고, 젊었을 때는 미녀 기생으로 명성을 날렸다. 박녹주가 15 살 되던 해에 행수기생 앵모는 환갑을 맞이했는데 이때 서울 한성권번과 조선 권번 기생을 필두로 부산, 동래, 광주, 원산 강경 기생들이 몰려왔다. 1천여명이 넘는 기생들은 대구 방천 옆에 2개의 가설극장을 세우고 앵모 환갑기념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앵모 밑에서 소리 춤 시조를 배우던 박녹주는 단박에 두각을 드러냈다. 앵모는 녹주, 너는 장래 크게 될 거다 면서 격려를 해주었지만 어린 나이에 기생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 지가 받은 돈 2백원을 갚은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는 1919년으로 한 창 기미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1919년 4 월 서울로 갔다가 소득없이 다시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서 여름을 고향에서 보내고, 박녹주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왔다. 아버지 친구집에 머물면서 권번에 드나들었다. 이미 대구에서 김초향 다음가는 소녀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열다섯살 박녹주는 달성권번에서 알려진 김점룡, 음준옥, 조진영 등으로 부터 육자배기를 배웠다. 육자배기는 판소리와 똑같은 소리이나 명창들은 천 박하다고 부르기를 꺼려했다. 조진영에게 배운「화초사거리」는 민요 중에 서도 가장 어려운 것으로 박녹주의 마음에 쏙 들었다. 1920년, 16살이 된 박녹주는 키도 훌쑥 자라 156cm가 되었다. 하룻밤 초청되 어가면 그때 돈 10원을 받던 박녹주는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동기童妓였다. 당시 풍습으로는 기생이라면 화초머리를 얹어야 더 인기를 끌었다. 화초머리 란 낭군을 맞지는 않고, 그저 머리만 얹는 풍습이다. 머리를 얹어주는 사람은 명사이거나 부자양반이었다. 서로 바라는 것 없이 동기가 커서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보답을 하는 식이었다. 박녹주에게 화초머리를 얹은 사람은 변씨라는 충청도 부자였다. 박녹주가 16살 되던 가을에 댕기를 가져간 변씨는 그때 풍습대로 세간 등 모든 것을 그저 사주었다. 변덕스럽던 박녹주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초머리를 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변씨로부터 얻은 세간을 모두 팔아서 딸을 고향으로 데려갔다. 설을 쇠고, 다시 대구로 딸을 데리고 나간 박녹주의 아버지는 이번에는 강릉 에서 대구 부자 박참봉의 돈으로 권번을 차리자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까지 걸어가며 마을마다 명창대회를 열어 많은 돈을 벌었다. 국창이 될 사람 국창이 될 사람 원산 명창대회는 박녹주의 창에 반한 앙콜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명창대회 라고 해서 지금의 명창 대회같은 공인받은 것은 아니고, 조금 규모가 큰 감상 회 정도였다. 공연 다음날, 박녹주는 원산 부자인 남백우로부터 초청을 받고 소리를 했다. 여기에서 22살 연상 남백우를 만났다. 보성전문을 졸업한 남백 우는 한창 때라 풍채도 좋고 인자한 편이었다. 남백우는 반세기를 소리로 물 들일 명창을 대번에 알아봤다. 녹주, 자네는 우리나라 국창이 될 사람이야. 내가 소홀히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원하는가? 고 물었다. 박녹주는 늘 고생하던 어머니가 이곳 선산에 살지 말고, 멀리 이사가서 사는 게 내 소원이야 하던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원산에 모셔다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박녹주의 바램대로 남백우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원산 중리의 큰 기와집을 세 얻어주고 이사비용을 댔다. 남백우는 박녹주의 첫 남편이다. 18살 되던 1922년에는 서울에서 송만갑宋萬甲(1865~1939)을 만났다. 송만갑은 우미관優美館 명창대회에 출연하고 있었다. 송만갑은 단가 「진국명산」 을 불렀다. 앞이마와 뒷머리가 툭 튀어나와 재주가 넘쳐 흐르는 송만갑은 천생 예술가였다. 몸집이 작아서 성량은 크지 않았으나 높고 강한 철성鐵聲이어서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였다. 당시 한성권번에 선생으로 다니던 송만갑을 따라 한성권번에 가서 1923년부터 「진국명산」과 「춘향가」를 배웠다. 헌종 때 가왕으로 불렸던 국창 송흥록이 큰할아버지인 송만갑은 이미 10살에 명창의 칭호를 들었다. 박녹주는 송만갑으로부터 「춘향가」 중 사랑가로부터 십장가까지 배웠다. 24살 되던 1928년에는 조선극장에서 팔도명창대회가 열렸다. 지금 종로세무서 위편에 있던 조선극장은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3대 극장으로 손꼽혔다. 전국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다시피한 이 공연에서 재창 삼창 앙콜을 받은 박녹주에게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사람은 고려대 설립자이자 전 부통령인 인촌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또 한 사람은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대학생 김유정金裕貞이었다. 김경중은 일국의 명창이 관철동 전셋집이 웬말이냐며 수운동에 3천원 짜리 집을 사주었다. 뿐만 아니라 박녹주가 1929년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 金正文에게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주고, 매달 1백원이나 되는 비용도 대주었다. 소리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었다. 박녹주가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까지 배웠기에 오늘날까지 동편제 「흥보가」가 온전히 전승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데 는 박녹주가 즐겨 부른 대목이고, 심청가 전 바탕도 김정문으로부터 전수받았다. 박녹주의 홍보가는 김소희를 통해 소리판의 맥을 잇고 있다.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는 「수궁가」일부를 배웠다. 「봄봄」, 「동백꽃」 의 작가 김유정金裕貞은 뛰어난 예술성의 박녹주에게서 어릴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만 짝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는 조선극장서 선생이 소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기를 끄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당신을 연모합니다. 나는 22살의 연전 학생이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오. 그로부터 김유정은 석달 동안 매일 편지를 보냈다. 정말 밤에 본 당신은 아름답더이다. , 나는 그 길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연상의 남편 있는 명창 박녹주를 사랑하는 김유 정의 연모는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혈서로 때로는 납치극으로 변했다. 한번 만이라도 사랑을 받아달라고 애원하던 김유정은 피묻은 편지도 보냈다. 애끓는 마음을 혈서에 담아보냈지만, 박녹주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김유정의 사랑고백은 온 천지로 퍼져나가 원산의 남편 남백우나 김경중까지 다 알게 되었다. 때로는 박녹주에게 너무 매정하다는 비난이 되돌아오기도 했다. 1929년 김유정은 「소낙비」란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 로 중앙일보에 동시에 당선됐다.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은 지 금도 강원도 실레마을에 있는 김유정문학관의 유품으로 남아있다. 결국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제어하기 힘든 일방적인 사랑으로 박녹주 바보가 되어버린 김유정은 1937년 늑막염에 폐결핵이 더해져서 유명을 달리했다. 소설가로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나 30살, 젊음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타계한 것이다. 과한 연모가 엘리트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김유정의 생명까지 앗아간 것일까? 너무 짧고 그래서 더 애틋한 김유정의 삶은 서른 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때 박녹주는 33살이었다. 김유정은 바로 네가 죽였지!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박녹주가 연희전문 학생 신분이던 젊은 소설가의 열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김유정의 죽음을 그렇게 안타까워했다. 12살부터 소리길을 닦아온 박녹주는 20대에 벌써 대명창들과 교제하였고, 여류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28년에는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심청가」를 취입했고, 연이어 빅터 태평양 레코드에서 판소리 네 바탕을 모두 출반하여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1930년에는 관훈동 '성악연구회'에 자주 나가며 평탄하게 지나갔다. 이 성악연구회란 당시 우리나라의 명창인 송 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이 주동이 된 국악인 모임이었다. 1931년 봄, 박녹주는 두 번째 남편 우석友石 김종익金鐘翊을 만났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 갑을 위해 익선동에 성악연구회 사무실로 9천 5백원짜리 집을 사줬다. 그럴듯한 집을 가진 성악연구회는 정식 총회를 갖고 이동백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다. 마음이 넓은 둘째 남편 김종익은 늘 너의 몸은 네 것이지만 소리는 세상 사람들 것이니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방송에 나가는 것, 레코드 취입하는 것, 성악연구회에서 창극하는 것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소리는 세상사람들에게 돌려줘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박녹주는 1935년 동양극 장에서 처음 공연을 가진 「춘향가」(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정정렬 연출)에 서 춘향역을 맡았다. 인물이 곱거나 연극을 잘해서가 아니라 소리 하나만으로 춘향역을 맡은 것이다. 그해 봄 동양극장을 1주일간 인파로 가득 메운 「춘향 가」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장장 5시간에 걸친 긴 창극으로 명사 치고 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국창은 모두 출연했던 이 공연은 아침 10시에서 오후 3시, 오후 7 시에서 자정까지 두 차례 열렸다. 서로 떠밀고 들어오느라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이 부서지는 대소동 가운데도 「춘향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 도령 역은 정남희(6·25때 납북), 방자 역은 오태석, 변사또 역은 5대 명창으로 손꼽히는 김창룡, 곡성 원님 역은 송만갑, 임실 현감 역은 정정렬이 했다. 당대 60대 대명창이 조연을 맡을 정도였으니 「춘향가」는 공전의 히트를 쳤 다. 명창들은 요샛말로 애드립도 잘했다. 대사에 없는 말로 관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한 예로 잔치 도중 운봉역을 맡은 이동백이 송만갑을 보고 여보게 곡성영감. 당신은 어디가서 못 크고 그렇게 작은가 하곤 농을 거는 게 대표적이다. 원래 키가 작은 송만갑을 놀린 것이다. 그러면 송만갑은 운 봉영감은 뭘 먹고 그리 컸소. 좀 알려주소 하고 응수를 했다. 박녹주는 성악 연구회의 창극에서 늘 주연을 했는데 34세부터 춘향역을 내놓았다. 그러나 몸 이 작고 제격이라고 해서 심청역은 39세까지 했다. 성악연구회에서의 창극생 활은 39세까지 계속됐다. 1938년 가을에는 「숙영낭자전」을 동양극장서 초연初演했다. 전통적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같이 깊고 해학이 짙은 맛은 없었지만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박녹주는 숙영낭 자역도 맡았다. 「숙영낭자전」은 현진이란 백白진사의 외동아들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녀 숙영낭 자와 사랑 끝에 결혼한다는 줄거리이다. 숙영낭자역을 맡은 박녹 주는 극 중 남편 백현진의 어머니 역을 맡은 임소향林小香에게 절을 해야했다. 임소향은 박녹주보다 열 살 넘게 어렸다. 큰언니로 모시던 박녹주의 절을 받는 게 미안해서 임소향은 어쩔줄 몰라했 다. 그러면 박녹주는 작은 소리로 때려 죽일 년, 절 받아라 하면서 절을 했다고 전한다. 대부분 창극에서 주역을 했으나 37세가 된 1941년에 공연한 「수궁가水宮歌」에서는 단역인 자라 어머니 역을 맡았다. 그런데 창극중에서는 이 「수궁가」가 가장 히트를 했다. 그러나 소도구가 하도 많아 지방공연을 갖지 못했다. 「수궁가」의 주역인 자라 는 임방울이, 토끼는 김연수가 맡았고 수궁용왕은 조상선이 분했다. 천생의 뛰어난 목소리를 가진 임방울은 허풍좋고 우직한 자라역을 잘도 해냈는데, 사실 임방울과 어머니역을 맡은 박녹주는 고생을 엄청했다. 딱딱한 자라옷을 등에 쓰고 엉금엉금 기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공연한 때가 여름이면 땀이 온 몸을 적셨다. 둘째 남편인 김종익이 1941년 봄, 이질로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타계하기 전, 박녹주는 이화중선李花中仙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김종익은 이달에 벌면 다음달에 저축을 하라고 했으나 한귀로 흘렸다. 만년에 생활고를 겪으면서 박녹주는 남편 김종익의 충고를 고깝게 여기고 이재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해방을 맞고 처음 한 일이 여성국악동호회 결성이다. 그때 까지 국극사 조선 창극단 등 남자들이 이끄는 예술단체가 있었지만 모든게 남성 위주였다. 여성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1945년 봄 박귀희, 김소희, 임춘앵, 정유색, 임유앵, 김경희 등 30여 명의 여성으로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본격적인 여성국 악운동의 시작을 예고한 것이다. 한국전쟁시 정남희 등이 월북을 강요했으나 잘 모면했으며 명창 30여명과 함께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1952년까지 군을 돌며 「열녀화」를 공연하였다. 1952년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였고, 대구에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하였다. 1960년부터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64년 12 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귀희는 송만갑, 김창환,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등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다 남자 명창들의 맥이 거의 끊어져버린 인간문화재 시대에 김여란과 함께 쇠퇴하는 소리판을 굳건히 지켜낸 국악계의 어머니이다. 대구의 국악인 박기환씨는 박녹주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국악인이었다며 국립국악원을 만들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1971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활약 하였고, 그의 소리는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등이 이어받았다. 늑대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여성국악인으로서 다소 거칠다 싶은 목소리를 지녀 단단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 명창 박녹주는 대구·경북보다 중앙무대에서 더 큰 활동을 펼쳤다. 타계 일년전인 1978년 고향 선산에서 열린 제자들과 마지막 고별공연에서 백발가를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박녹주는 동편제 창법의 국보적 존재로「흥보가」명창이 자 판소리계에 우먼파워를 심은 인간 문화재이다. 평생을 소리로 보낸 박녹주에게 이 이상의 영광은 없을 것이다. 박녹주에게 소리를 배운 사람은 상당히 많다. 박녹주는 박귀희에게 송만갑제가 그대로 살아 있는 「흥보가」를, 정의진에게 박녹주제 「흥보가」를 전수했다. 판소리 기본인 다섯마당 말고도 정정렬이 유일하게 부른 「숙영낭자전」 을 배웠다. 「숙영낭자전」은 김여란과 이기권이 같이 배웠으나 이기권은 일찍 죽고 김여란은 많이 잊어버려 유일하게 박녹주만 알던 것을 박초선, 한농선, 조상현, 조순애, 박송 희 등에게 전수했다. 서편제가 호남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동편제는 영남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고 그 중심에 박녹주가 있다.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명창 박녹주 노래비는 경북 구미 노상동에 세워져 있다 [경북여성 인물사] 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 (저자:최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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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4: 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김소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명창 김소희가 순옥順玉이라는 아명의 길이 아니고 그의 이모가 지어 주었다는 소희素姬라는 명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숙명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혜성과 같이 군림하던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에 매료될 기회가 있었다든가, 광주로 취학을 한 덕분에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쉽게 들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었다든가 하는, 긴 인생 여로에서 만남의 우연성도 손꼽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도 김소희는 날 때부터 명창으로 대성할 남다른 소질을 타고난 게 사실인 것 같으니, 이는 곧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정 김소희는 1917년 12월 1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풍류스런 분위기를 흠뻑 마시며 자라난 셈이다. 전라도 하면 자타가 인정하는 예향인데다 고창 지방은 특히 명창의 고을이랄 만큼 수다한 소리꾼을 배출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라도 우선 이 나라 여류 명창 중에서 내로라하던 인물인 채선彩仙, 허금파許錦波, 김여란金如蘭 등이 모두 이 고을의 정기를 타고난 낯익은 이름들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한학에 조예가 깊어 판소리 음악의 사설을 정립하고 스스로 많은 단가를 지어낸 판소리계의 은인 동리桐里 신재효 선생 역시 이 고장에서 평생을 보낸 분이 아니던가. 게다가 만정 김소희의 부친은 단소였든가 피리였든가를 잘 불며 꽤나 풍류를 즐기던 분이었다고 한다. 김소희의 어린 감정은 자연히 이 같은 풍류스런 색깔로 물들어가게 마련이었고, 바로 이 같은 감성의 색깔은 그녀의 타고난 재분才分을 한결 실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에 타고난 재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김소희는 확실히 남다른 예술적 재질을 타고났음이 분명한데, 이 같은 심증은 그녀의 몇몇 삽화적인 이력을 일별해 보더라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거문고에 달통한 사람은 세사世事에도 달통할 수 있다는 말처럼, 하나의 예능에 능통하면 자연히 그 방계의 예능에 수완을 보이는 수가 많다. 김소희의 경우에도 그 폭과 깊이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국악을 아는 사람은 이해하는 얘기지만, 판소리를 익히면서 정악 거문고를 배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형세가 아니었는데도 김소희는 소리 외에 거문고도 익혔다. 그의 판소리 음악에 깊이 있는 품도를 싣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에게는 고전무용을 전수받아 수준급의 정통성을 보여 주고도 있다. 특히 그가 서화에도 능해서 붓글씨로는 국전에 세 번이나 입선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일이다. 또한 이와 같은 예능적 특기 외에도 김소희는 문학에 꽤나 미련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언젠가 만정과의 대담에서도 미당未堂 서정주 씨의 시를 즐겨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는 아주 광이었고, 어떤 때는 앉은 자리에서 세 번까지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소리로 입신해서 이것저것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도 늘 공부 타령을 하니까, 한번은 어떤 선배 어른이 통신 강의록을 보라고 해서 그 강의록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글공부에 대한 김소희의 집념도 대단한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소리보다는 뭣 좀 써 보는 글공부를 택하겠다고도 했다. 이 같은 만정 김소희고 보면 확실히 그에게는 음악적 재분 외에 문학적 기질도 많았던 것 같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만정은 타고난 재질에다 열성과 집념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흥덕리 구석의 단발머리 순옥이가 당대의 여류 명창 김소희로 대성할 수 있었던 숨은 내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흔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예인의 길이란 노력에 앞서 천부적 재능도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양자를 겸비한 김소희도 이 사실은 강조한다. 숱한 제자들을 가르쳐 봤지만 소질이 없으면 영 늘지를 않고 또 소질 있는 아이치고 열심히 하는 놈 드물다고 한다. 이래저래 특출난 예술가란 백에 하나 나기도 어렵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김소희 예술의 비결은 노력과 소질이 함께 조화를 이룬 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영롱한 불빛 속에도 슬픈 전설이 서려 있듯이 뭇사람이 환호하는 예인의 길이라고 해서 한결같이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더욱이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와야 했던 명창의 길에 있어서랴. 만정 김소희는 그 숱한 공연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장면들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64년 동경 올림픽 때였는데 나는 그곳 교포들 앞에서 노래를 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잖겠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폐부를 찌르는 소리를 듣는다며 이화중선 이후 처음으로 긴소리다운 긴소리를 들어본다고 그럽디다. 그때 그 일이 감명 깊었던 것은 뭐 우쭐한 칭찬을 들어서가 아니라, 과연 한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속속들이 감격시킬 수 있을까 하는 노래의 고마움에서였지요. 소리하는 보람을 새삼 느낄 것 같더군요. 물론 무대 공연을 치르다 보면 별의별 감격도 많았습니다. 창극단을 따라서 전국을 누비던 때의 일, 62년 파리 공연 이래 구주와 미주 순회 공연 등. 그런데 참 이상합디다. 우리나라에선 괄시받던 판소리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니까 그렇게 인기가 있습디다. 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할 때 도중에 기립박수까지 받고는 얼마나 어리둥절했는지 몰라요.” 이런 얘기들만 듣다 보면 명창의 길이란 화려한 동경의 대상일 것만 같으나 역시 영고榮枯가 반반임은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에 만정은 10여 년 넘게 전국을 누비며 창극을 하다 보니 어찌나 소리하기가 지겹던지 북만 봐도 소름이 끼치더라고 했고, 그밖의 갖가지 설움과 역겨운 사연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책이 돼도 몇 권은 된다고 했다. 한편 김소희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듬어 보면 한마디로 깔끔하고 정갈한 성품의 예인藝人이다. 그녀 스스로 "성격이 차지요. 내성적이구.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까 성격이 변하데요”라고 실토할 만큼 그녀의 성격은 깔끔한 데가 있다. 그녀의 외모 역시 본인의 평대로 차분하고 단정하며 개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상이다. 본인은 극구 못생겼다고 하지만 결코 미운 얼굴은 아니다. 곱다는 말보다는 인상적이라는 말이 걸맞으며, 무언가 이성 간에 느낌직한 매력이 연상되기도 하는 독특한 분위기도 풍긴다. 바로 이와 같은 김소희의 인상이 그대로 소리로 연결되어, 그토록 우리를 사로잡고 마는 그의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그의 음악 속에는 그녀의 개성과 숱한 감성의 경륜이 배어난다. 옹골차고도 세련된 그의 성음 하나하나에는 눈꼴신 것을 못 참는 만정의 꼿꼿한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고 찰떡같이 끈끈한 서정으로 청중의 혼을 사로잡고 마는 그녀의 윤기 있는 소리결 속에는 굴곡 있는 인생 역정과 기구한 역사적 시대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이 분명타고 하겠다. 옥색 모시 치마저고리와 옥비녀에 붉은 댕기로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단장으로 차분히 무대에 나와 그가 좋아하는 ‘범파중류’나 ‘옥중가’를 부를 때의 그 기막힌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라. 그러면 이내 우리는 그 이지적이면서도 촉촉한 감성이 봇물처럼 흐르는 그의 예술세계를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확실히 김소희는 뛰어난 명창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개성이 그렇고 그녀의 음색이 그러하며 호소력 있는 악상의 표출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그녀의 소리 앞에서는 누구나 단번에 하나가 된다. 시름을 잊고 걱정을 잊고 현실을 잊으며, 망아忘我의 세계, 피안彼岸의 세계, 몽환夢幻의 세계로 몰입되어 너와 내가 금세 하나가 된다. 모두가 하나 되어 마음껏 예술의 법열경法悅境을 유영遊泳하다가 문득 우리는 현실로 되돌아와서, 다시금 김소희 소리의 위대함을 확신하게 된다. 풍부한 감성과 음악성이 본질적으로 우수적인 성색과 어우러지며, 천변만화의 예술미는 물론 우리 시대의 서민적 애환을 대변해 온 만정 김소희는 분명 ‘일세기에 한 번쯤 나옴직한 명창’이자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가슴속에 심어 둘 동시대의 보배이자 판소리 음악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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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가락으로 승화시킨 서른 살 망부의 한, 안비취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경기민요에는 12잡가가 있다. ①유산가(遊山歌) ②적벽가(赤壁歌) ③제비가(燕子歌) ④소춘향가(小春香歌) ⑤집장가(執杖歌. 집장 사령) ⑥형장가(刑杖歌) ⑦평양가(平孃歌) ⑧선유가(船遊歌) ⑨ 출인가(出引歌) ⑩십장가(十杖歌) ⑪방물가(房物歌) ⑫달거리(月齢歌)가 그것이다. 이들 12잡가의 음악의 특징은 4분의 6박자인 도드리 장단이 대부분이며, 형식은 약간 불투명한 유절(마루) 형식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직설적 표현이 많다. 서울ㆍ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 북부와 강원 일부 지역까지 애창돼 중부 지방 민요로도 불린다.12잡가는 세 사람의 인간문화재로 나뉘어 지정ㆍ보호받고 있다. 이중 안비취(安翡翠, 1926년 3월 21일생) 씨가 유산가ㆍ제비가ㆍ소춘향가ㆍ십장가를, 묵계월 씨가 적벽가ㆍ출인가ㆍ선유가ㆍ방물가를 부르며, 이은주 씨는 집장가ㆍ평양가ㆍ형장가ㆍ달거리로 지정돼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매년 설날이나 추석 등 경축 무대에 ‘안비취와 그 제자들’로 소개되며, 기골 장대한 체구가 대중을 압도해 버리는 안비취 여사.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바로 옆의 이춘희(李春羲, 89년 준문화재 지정), 김혜란(본명은 숙근, 전수자), 이호연(본명 연화, 전수자) 씨 등도 TV 화면을 통해 낯익은 얼굴들이다."4남1녀의 외동딸로 태어났지요. 위로 언니가 일찍 죽자 명이 길라는 뜻에서 ‘복식(福植)’이란 남자 이름으로 지었답니다. ‘비취’란 예명은 12잡가를 떼 주신 최정식(崔貞植)선생이 제가 16세 때 방송에 첫 출연하게 되자 지어 주신 겁니다. 흔히 비취 반지로 알고 있지만 중국 문헌 속에 나오는 새 이름이라고 들었어요.”서울 종로구 효자동 대궐 가까운 곳에서 나고 자란 안씨는 순흥 안씨 보성군파로 당시 부친은 효자동에서 제일 큰 잡화상을 운영했다. 부잣집에다 절에 가 빌어서 난 딸로 애시당초 부족함이나 어려움 같은 건 남의 일이었다고 한다.손으로 태엽 감으며 아버지가 듣던 ‘빅타’ 유성기가 좋아 보여 늘 곁에서 참견했다는 것. 이 때 들은 ‘기막힌 소리’들이 이화중선(李花中仙), 김소희(金素姬), 백운선, 장학선 명창 들의 애절한 판소리. 소학교에 들어갔으나 머리는 좋았는데 공부는 못했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등 소리 가사는 듣기만 해도 줄줄 외워 댔지만 특히 산수는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했다고 한다.안씨의 ‘팔자’는 열 세 살 때의 대담한 가출로 판가름난다. 세 살 위의 이웃집 민향심(閔香心)과 무단 가출, 하규일(河圭一) 씨가 운영하던 정악 교습소에 들어갔다. 그 때 하씨는 이왕직 아악부에 나가면서 별도 교습소를 차려 놓고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안씨는 궁중정재(춤)와 4검무, 연하대무, 무산향 등을 익히고 이병성 씨한테 가곡을 정식으로 전수받았다. 뒤늦게 안 어머니의 지원으로 2년 뒤에는 한성준(韓成俊) 씨를 만나 민속춤(승무)을, 최정식(崔貞植) 씨한테는 경기12잡가를 배우기에 이른다. 이래서 가무에 능한 오늘의 안비취로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최정식 씨는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작사ㆍ작곡한 장구 명인으로 그의 문하에서 세 명의 인간문화재가 배출됐다. 하규일 씨는 일제 때 조선 권번을 움직인 당대 가무의 대가였다."정악에서 민속악 쪽으로 나오니 창법이 달랐습니다. 특히 상성(고음)이 가곡보다 힘들어 적응하기가 힘들었지요.” 안비취 씨는 정악만을 끝까지 지켜 내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어려서부터 시집은 정말 가기 싫었고 소리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사 뜻대로만 됩니까. 19세에 강기준(姜基準) 씨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 분은 내 나이 서른에 딸만 둘 남겨 놓고 훌쩍 떠나 버렸지요.”시집살이하는 동안 ‘여편네가 살림은 안 하고 소리질만 해 댄다’ 하여 가정 불화가 잦았다. 안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술 없이는 못 살겠다는 황소고집이었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천추의 한은 춤사위와 소리 가락으로 승화 됐고 결혼식에 참석조차 않은 친정 아버지 가슴을 녹이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6ㆍ25 때 부산 피난지에서의 공연과 1959년(34세) 박귀희(朴貴姬)ㆍ임춘앵ㆍ복혜숙(영화 배우)ㆍ최용자(무용가)ㆍ임유앵(임춘앵 언니) 씨와의 일본 순회 공연이 잊혀지지 않는단다. 일본 첫 공연은 최상덕(연출가), 박진(연출가), 이서구(李瑞求) 씨를 중심으로 ‘대춘향가’를 선보여 교포들을 울렸다. 자유당 말기에는 박초월(木初月), 김소희(金素姬), 박귀희 씨와 함께 당시 오재경(吳在璟) 공보처장관을 설득, 오늘의 국악협회를 인가 받아 창립하는 등 국악 발전에도 앞장섰다. 한때는 골프에 심취,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실내 연습장을 만들기도 했으나 첫 사업은 보기좋게 실패했다.서울 중구 남산동의 안비취 후계양성소에는 대학을 나온 장학생들도 적지 않다. 50명이 넘는 제자 중 최영숙(35)ㆍ이금미(30, 본명 생길, 국립국악원)ㆍ전숙희(44) 씨는 전수자로 등록됐고, 남궁랑(35)ㆍ이유라(34)ㆍ전영희(39) 씨 등은 장학생.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준문화재로 지정(1989년)된 이춘희(서울 출생) 씨도 중학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민요만 부른다며 체육 선생한테 매맞은 소리 솜씨다. 이창배 민요학원에서 배우다 1971년 안씨를 만나 본격 학습에 들어간 뒤 1975년 안씨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수석 전수생으로 등록됐다. 한때는 김부해 음악학원에서 배운 숨은 솜씨로 가수 황금심 씨 노래를 구분 못 하게 잘했으며 최근에는 롯데월드에서 민요 부르기 강좌(매주 화요일)를 맡고 있다. 안비취 선생은 경기민요에 놀이가 끼지 않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판소리에는 고수와의 대화(아니리)가 있고, 굿에는 리듬ㆍ의상ㆍ소리ㆍ재담까지 포함된 바라지가 신바람을 내 주는데 12잡가는 단조로움의 연속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이지산 스님(재미)이 귀국하면 제자 김혜란 씨에게 바라지 가락을 배우게 해 경기민요와 굿장단의 만남도 시도해 볼 계획이다. 중대, 추계예술대, 서울예전에 나가 강의하면서도 이런 변신 가능성을 여러 번 토의해 보았다고 한다. "한생애 예인의 길을 걷느라 여자로서 잃은 것도 많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쌍계사(雙磎寺) 국사암과 서울 근교 절을 자주 찾으며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를 생각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건지······. 경기민요에 담긴 내용들도 부의 허망함과 헛된 욕심을 나무라는 내용이 많지요.” • 안비취 경기민요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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