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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호국보훈의달 6월 8일 윤봉길기념관서 보훈페스티벌서울 서초구(구청장 전성수)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국가보훈대상자를 예우하기 위해 호국보훈의 달인 6월 8일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광장에서 '2024 서초보훈페스티벌'을 개최한다고 30일 밝혔다. 행사는 '당신의 희생과 헌신, 행복 서초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주제 아래 1부 호국보훈의 달 기념식, 2부 축하 음악회로 구성된다. 1부 기념식은 지역 청년예술단체인 '하랑스트링콰르텟'의 클래식 공연과 52사단 군악대의 연주, 백석예술대 연기과의 호국보훈 연극, 6·25전쟁 참전 유공자 무공훈장 전수, 보훈단체 유공 회원 표창 수여 순으로 진행된다. 2부 음악회에서는 '불타는 트롯맨'에서 최종 순위 톱2에 선정된 트로트 가수 신성과 4인조 팝페라팀 '볼라레', 역사어린이합창단과 백세합창단 등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가 무대를 선보인다. 보훈 예우 수당은 월 7만원에서 10만원으로, 참전유공자 위문금은 연 45만원에서 84만원으로 인상했다. 사망 참전유공자 배우자 복지수당도 2021년 서울시 최초로 신설해 월 7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다음 달 25일 구 보훈회관에서는 지역 내 보훈대상자와 주민을 대상으로 '보훈가족 힐링 아카데미'를 연다. 전성수 서초구청장은 "호국 영웅들께서 나라를 위해 바친 희생과 헌신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보훈 문화가 일상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보훈 정책을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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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술원 41대 회장에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은 23일 정기 총회에서 차기 회장과 부회장으로 각각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와 손진책 극단미추 대표를 선출했다. 임기는 다음 달부터 2025년 12월까지 2년이다. 신 차기 회장은 서울대 음대와 빈 국립 음악예술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69년 최연소로 서울대 교수에 임용됐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서울·도쿄·홍콩 등에서 독주회를 개최하고, 한국방송(KBS)·서울시향·런던필·NHK 등 다수 오케스트라와 협업하는 등 연주 활동을 꾸준히 병행했다. 다양한 결실을 거둬 옥관문화훈장(1995), 독일 정부 일등십자훈장(2011), 한양백남상 음악상(2023) 등을 수훈했다. 예술원 회원으로는 2009년부터 활동한다. 손 차기 부회장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74년 '서울말뚝이'로 연극계에 데뷔했다. 마당극 '허생전', 창극 '윤봉길 의사' 등 많은 작품을 연출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 총감독, 예술의전당 이사, 국립극단 예술감독 등으로도 일했다. 다양한 업적을 남겨 이해랑 연극상(2003), 국민훈장 목련장(2010) 등을 수훈했다. 올해도 오페라 '투란도트'를 연출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예술원 회원으로는 2017년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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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테마활동 '미디어속 독립역사를 찾아서'시립동대문청소년센터(관장 박지성)는 국가보훈부가 주최한 ‘2023년 국가보훈부 보훈테마활동 공모사업’에 선정된 ‘미디어속 독립역사를 찾아서’ 프로그램을 2023년 6월부터 10월까지 성황리에 진행했다고 밝혔다. ‘미디어속 독립역사를 찾아서’는 서울특별시 초·중학생 연령의 청소년 20명과 총 10회에 걸쳐 미디어 속에서 다루고 있는 독립 영웅과 독립 역사에 대해 주제를 선정하고, 조 편성을 통해 영상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모든 세대의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순국 선열에 대한 사회적인 추모와 존경의 문화 조성 등을 목표로 기획된 국가보훈 프로그램이다.시립동대문청소년센터는 각 조별로 ‘윤봉길’, ‘3.1운동’, ‘안중근’, ‘유관순’ 주제를 선정해 자료 수집을 위한 독립 역사 강의와 역사지 탐방을 진행하며 청소년들의 올바른 독립 역사를 알 수 있도록 도왔다.이어 수집된 자료로 전문가와 함께 대본을 작성하고 영상 제작을 진행하며 다양한 촬영 기법과 편집 기술을 통한 진로 체험을 했다.제작된 영상은 시립동대문청소년센터 유튜브에 업로드됐으며, 10월 21일(토) 동대문구 ‘텐페스타’ 축제 홍보 부스를 통해 영상 이벤트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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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소리극 ‘구국의병장 허위’에서 의병정신 기린다."피고, 허위! 죄인이 감히, 대일본제국에게 저지른 불경한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겠다. 1896년 의병을 모아 대일본제국을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7년부터 ‘연합의병창의군’이라는 불순단체를 결성해 대일본제국에 총과 칼을 겨누어 많은 죄를 저지른 대역죄인이다 피고,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입니까?"(일본 재판관)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한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왕산 허위) 대일항쟁기 구미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의병장의 뜨거운 의병운동이 소리극으로 부활된다. 그가 돌아와서 의병들과 함께 '의병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서울로 진격한다. 진격!! 1일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회장 임규익) 주최 주관으로 개최되는 제15회 구미의병아리랑제가 구미문화예술회관에서 오후 2시에 개최된다. 배경숙 예술감독의 연출로 소리극 ‘구국의병장 허위’가 무대에 오른다. 1부에서는 '저항의 노래', 2부에서는 '승리의 노래'로 구성되어, 의병정신이 발현되는 과정과 영남인의 심성이 담긴 영남전래민요집에서 채록된 영남의 민요와 아리랑이 극의 단막과 어울어져 허위장군의 붉은 애국심을 펼친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하여 서울 진격작전을 지휘했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는 서대문형무소 첫 번째 사형수로 1908년 10월 21일 정오, 경성감옥의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왕산의 나이 54세였다. 교수대에서 일본 헌병사령관도 그의 당당한 기개에 고개를 숙였다고 알려졌다. 소리극에서 허위 장군의 13년 의병투쟁을 구미의병아리랑에 담아서 허위장군의 의병정신을 기린다. 왕산의병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어얼싸 아라리야(후렴) 1. 여봐라 우리네 대장군나셨다 13도 창의대진 군사장이시다 2. 노래하라 외쳐라 우리네 의병장 기린다 우리는 왕산허위대장군 3. 나시니 구미땅 임은동이요 서시니 경술년 30조 호령이다 4. 오얏꽃 날리는 3월이 오면 밤새도록 노래하라 그립다하여라 5. 역사는 기린다 왕산허위장군 산하가 외친다 너는 아냐고 6. 13도 넘어서 이역 만주 땅까지 창의하여 거병하니 세상이 들썩 극중 등장인물은 허위, 허훈, 허경, 이기찬, 아카시(일본 헌병사령관) 5인과 보존회 30여 명이 민중들로 나와서 구미의병아리랑, 구미아리랑, 영남민요 10여 곡을 소리극으로 올린다. 한편 올해 왕산 허위 선생 115주년 추모제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5일 광복절에는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가 서울 왕산로, 남인사마당, 광화문,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아리랑버스킹' 공연에서 왕산허위 장군을 기리는 '왕산의병아리랑'을 널리 알렸다. 임규익 회장은 내년에도 왕산로와 광화문 광장에서 왕산의병아리랑을 알리겠다고 전했다. 특히 사할린 동포 인무학 교수(모스크바 대학)에 의하면 "왕산 허위 손자 허진 선생은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극작가로 일하면서, 허위 장군의 의병활동을 고려인들에게도 널리 알렸다. 당시 많은 의병들이 서울 진격 작전을 실패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했다."라고 전한다. 당시 유관순 의사,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허위 의병장은 구미에서만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와 자손들이 국외로 이주하여서, 의병활동 중에 이름도 없이 산화한 의병들의 존재 기록이 아직도 파악이 안되고 있다. 의병운동의 자취를 발굴하고 복원시키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본다. 구미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얼씨구 노다가세 노다가(후렴) 금오산 참꽃은 다시 또 피련마는/나를 버리고 가신님은 언제나 오려나 왕산의 충절과 용맹의 기상은/내 고향 구미의 자랑이라 2005년 배경숙의 '구미아리랑' 발표 후 창립한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는 2009년부터 경상북도과 구미시 후원으로 매년 구미아리랑제 개최, 2018년 이후는 허위의병장을 기리는 구미미의병아리랑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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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예산군, 윤봉길체육관에서 정전 70주년 기념 호국음악회충남 예산군은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위대한 헌신, 영웅의 자부심'을 주제로 15일 오후 5시부터 윤봉길체육관에서 호국음악회를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이번 음악회는 충남서부호훈지청 주관으로 우리 고장의 호국영웅인 정긍모 제독, 김풍익 중령, 이장원 중위를 비롯한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마련됐다.또한 군민에게 보훈 정신을 알리고자 공연, 제복의 영웅들 퍼포먼스, 판문점 입체퍼즐만들기, DMZ 소원종 등의 다채로운 체험이 진행될 예정이다.군 관계자는 "6·25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을 앞두고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 호국보훈의 정신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군민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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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 순례 (3)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읍 갈평리 마을 입구 삼거리는 이강년 의병장 전적지로, 1907년 10일~11일 양일간에 있었던 갈평전투 전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갈평리 주민들과 이강년을 추모하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경모각(景慕閣)을 세웠고, 1979년 관에서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1907년 9월 9일 저녁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이 상초곡에 주둔하고 있는 이강년 의진(義陣)을 찾아와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의병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며 저녁밥을 지어 왔다. 이강년은 주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모두 배불리 먹고 하룻밤을 이곳에서 지냈다. 9월 10일 새벽 일찍 하초곡을 거쳐 요성으로 부대를 옮겨 주둔하고 있을 때 갈평 쪽에서 포성이 울려왔다. 척후병의 급보에 의하면 어젯밤 갈평리로 들어간 조동교, 김현규 부대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의병이 대패하였으며 흐르는 시냇물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인명 피해가 크며 갈평마을은 왜군이 불러 질러 화염이 치솟고 있다고 하였다. 급히 진군계획을 세우면서 현지 정세를 살펴보니 수백 명의 일본군이 있었으나 달아난 의병을 추격하거나 마을에 숨어 있는 의병을 수색하기 위해 흩어져 있고 갈평 냇가에는 본진 50여 명, 1개소대 병력만 남아 있는데 지금 점심 취사 준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후기 의병의 주된 전술은 치고 빠지는 유격전이 대세였다. 운강 이강년은 기습작전을 펴기로 하고 제장(諸將)을 불러 사방으로 분산, 적의 주둔지 가까이 까지 은밀히 접근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내가 총을 쏘면서 깃발을 흔드는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사방에서 기습당한 일본군은 당황하여 일부는 총을 들고 저항했지만, 대다수는 도망가기 바빴다. 이렇게 하여 조동교, 김현규 의병부대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약탈을 일삼던 일본군 본진 1개 소대를 궤멸시키고(적 8명을 생포 및 사살) 일본군이 소지했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한 갈평전투는 의병 전투사에 빛나는 큰 성과였다. 이어서 9월 14일 적성전투에서 신태원 후군장 등 아군이 전사하는 피해를 당한 후 예천 명봉사에 머물다가 일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단양을 거쳐 영춘으로 향했다. 9월 25일 영춘전투에서 승리하고, 10월 12일 괴산 연풍전투에서 일본 수송대를 급습하였으며, 10월 22일 원주 유치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11월 2일부터 11월 15일까지 4차에 걸친 죽령전투에서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 및 격퇴하였다. 이어서 소백산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세 불리로 단양 영춘으로 퇴각한 뒤 신돌석부대와 합진하여 순흥을 공격하여 일본군 퇴각시켰다. 다시 11월 26부터 12월 25일까지 충북 단양 일대에서 유치전투, 백자동전투, 영춘궁동전투, 복상동전투, 월계동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며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전투를 계속하다가 12월 말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춘천 쪽으로 이동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신식무기와 탄약을 가진 정예 군인 3천 명이 합류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1만여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1908년 1월 일으킨 한성 탈환 작전이다. 총대장으로 경기도 여주 출신이며 문경으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해 오다 거의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진공 작전에 돌입했으나, 효(孝)란 절대 가치를 가진 유림으로서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경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이인영을 이어 총대장 역할을 맡은 창의군 군사장(軍師長)인 선산 출신 왕산 허위(許蔿)는 동대문 밖 30리(현재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일대)까지 진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다. 비록 실패한 작전이었지만, 서울진공작전은 흩어져 있던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켜 일제에 대항,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때 운강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여하였다. 운강 이강년은 해가 바뀐 1908년에도 변함없이 항전하였는데, 1월 6일 경기도 동북부 낭천전투를 비롯해서 3월 28일까지 가평 건천전투와 용소동전투, 대청동전투, 포천 청계전투에 임했으며, 4월 6일부터 5월 3일까지는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 강릉 하사동전투와 사동전투, 홍천 북면전투, 양양 백사장전투를 계속하였다. 5월 16일에는 경북 북부 봉화 서벽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대승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다시 6월 4일 봉화 내성전투, 6월 10일 봉화 재산전투, 6월 21일 제천 오미리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렇게 많은 전투 중에 ‘봉화 서벽전투’에서 이강년이 대승한 것을 기리기 위해 봉화군민들이 뜻을 모아1984년 12월 봉화군 춘양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항일의거기념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아! 슬프도다! 하늘도 무심하지! 강원도·충청도·경북 일대에서 종횡무진 활동하셨던 운강 이강년 선생의 13년(1896년∼1908년)간의 의병 투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1908년 7월 2일(음력 6월 4일) 청풍군 금수산 ‘작성산(鵲城山)전투’에서 발목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셨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상처를 치료해 주려는 일본군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들이 주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때 한탄하기를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또 옥중에서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라는 시를 남겼다. 의병장 이강년은 왕손으로서, 선비로서, 의병장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죽겠다며 면회 온 아들에게 구차하게 "살려 달라 하지 말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의연함을 보였다고 한다. 한평생 나라와 민족을 위해 투쟁하신 이강년 선생은 마침내 1908년 10월 13일(음력 1908. 9. 19)51세를 일기로 의기에 찬 일생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시니 하늘도 산천도 슬피 울었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역에 출빈(出殯-임시 운구 안치)되었다가 나중에(12월 13일) 제천 두학동 장치미로 반장(返葬) 후 다시(1944년)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강년 선생의 순국 후에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중앙홀에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호국 인물인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최영, 강감찬, 이순신, 김종서, 권율, 곽재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22분과 함께 흉상으로 모셔져 있다. 이번 ‘운강 이강년 의병 진군로순례’ 중에 ‘애국과 의병정신’이란 주제를 두고 대비되는 두 인물이 있어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내용을 소개하면, 문경시 가은읍 ‘운강이강년기념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선유구곡 제9곡 옥석대(玉蕮臺)에 학천정(鶴泉亭)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 鶴泉(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글의 옆에는 글의 주인인 듯한 이름으로 李完用(이완용)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강년과 이완용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강년과 이완용은 1858년생 동갑이다. 이강년은 22세에 무과(고종 17년-1880년)에 급제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고난의 삶을 살다 중년인 51세(1858∼1908)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전기한 바와 같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전쟁기념관 호국인물 흉상’으로 우리 곁에 계시며 만인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역사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이완용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처신으로 부귀영화와 노년인 69세(1858∼1926)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을사오적,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최악의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는 인물로 남게 되었는데 학생 여러분은 누가 참삶을 산 인간 승리자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였다. 문경에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84인이 계신다. 그래서 문경은 ‘의병과 독립운동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문경 출신 역사 인물 중에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다 생을 마치신 분이 많이 계신 반면에,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한일합방에 찬성하는 등 친일 매국을 하고 조국의 젊은 청년들을 희생물로 하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제물이 되도록 하여‘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문경인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자도 있다. 이번 3박 4일 일정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맺음말로, 우리가 이번에 걷는 순례길에는 이강년 의병대장 외에 이름이 알려진 의병은 물론이고, 이름 없이 사라진 의병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그 혼이 살아 있는 길을 걸었다. 우리가 이 힘든 산악길을 걷는 의미는 고난의 세월을 살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의병들을 기리며, 세계 유일 분단국가로서 북한의 핵 위협과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 언제든지 또 다른 위기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다 같이 의병 정신으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참여자 모두 마음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지난 2018년 6월 1일 ‘의병의 날’을 맞아 문경에서 개최된 행정안전부 주최 ‘제8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행사’에서 필자가 자작시인 ‘호국의 등불, 의로운 별들이여’란 추모 헌시를 낭독하였는데, 그때를 회상하며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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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임시정부 시절 김구나 안창호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를 비난하거나 매도하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려했다는 점을 지난 회에서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더 강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필자는 2015년 12월 31자 통신사 뉴시스 ‘윤치호 애국가 작사 확정 조직적 방해세력 누구’에서 1947년 발행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저자 표기 문제나 내용상의 가필 흔적 등을 들어 애국가 언급 부분의 신뢰성을 지적한 바가 있다. 특히 ‘상해시대편’의 수정 문제와 작사자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아예 편집 과정에서 가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그리고 진난 4회에서 대답하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유로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제시했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 문제는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보아 이번에 다시 살피기로 한다.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를 ‘50년 전 한 대한 애국지사’라고 표현하였다. 안창호는 당신이 지었지요라고 묻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의 표현에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가 배어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고 윤치호다라고 답하게 되면 묻는 이의 의도대로 어떤 형태로든 윤치호의 부정적인 행적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행적은 당연히 개인뿐만 아니라 애국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즉, 1948년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 1949년 월북)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애국가考’에서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구구함을 피하기 위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니, 분명 배려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배려의 배경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이광수와 윤치호 간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이광수가 안창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영숙과 임정을 떠나 귀국하여 쓴 글 중에 1927년 대중잡지‘동광(東光)’ 제10호에 쓴 ‘規模의 人-尹致昊 氏’가 주목을 끈다. 여기서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와 깊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밝혔다. "안창호 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둘째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1911년 105인 사건 전후 안창호와 뜻을 같이하는 사이라는 것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이어갔다.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명망과 재능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서도 일신의 안락(安樂)에만 탐(耽)하여 세사를 잊어버린 사람이라 씨를 비난하였다.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다가 기미년 간에 내가 상해에 유랑을 할 때 씨의 예전 동지이던 안 씨(안창호-필자)를 만나 ‘윤 씨는 전전긍긍(戰戰兢兢)한 수성(守成)의 인물일지언정 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지(志)와 성(誠)을 나는 굳게 믿노라’라고 누누이 역설(力說)함을 듣고 나와 및 나와 같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씨에 대하여 존경과 정중(鄭重)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광수가 윤치호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임시정부 초기 안창호가 윤치호에 대해 힘주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라고 했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윤치호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고 본다. 또한 적어도 1920년부터 이 글을 쓴 1927년까지는 이광수가 견지한 윤치호관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으로서도 이광수와 상호 배려의 관계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치호 일기’에는 이 시기 이후의 관계에서도 유지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기 1932년 4월 30일조를 보면, 29일 상해에서 안창호가 윤봉길 의사 사건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코 연루되었다고 믿지 않는다.”고 애통하였다. 그리고 서울 송치 19일 후인 6월 22일 수요일 밤 9시 30분에 경무국 경시(警視) 미와(二輪; 안창호 취조 담당 형사)가 자신을 찾아와 유치장에서 한 사람을 치과 치료차 병원에 데려갔다 함께 왔다고 했다. 함께 온 이가 바로 안창호였다고 썼다. "유치장 생활로 너무 변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오랜만의 만남이 있은 10일 후의 일기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7월 11일 이광수가 찾아와 안창호가 사법 당국에 인계되면 상당 기간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여 건강이 크게 우려된다는 것으로 책임자인 다나카 경무과장을 만나 달라는 부탁에 약속을 했다. 7월 12일 화요일 아침 8시, 다나카 경무국장을 만났다. 친지를 대표하여 조건부 석방이 가능한지 물었다. 7월 15일 4시 반 이광수의 요청으로 안창호를 면회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39일간 취조를 받고, 1932년 7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는 상황이다. 이 기록에서 이광수의 역할이 확인되는데, 윤치호에 대한 신뢰가 묻어있다. 그런데 윤치호의 이러한 안창호에 대한 배려는 이광수와 말도 하지 않는 유억겸․신흥우․김활란 등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내가 안창호와 이광수 같은 서북파 지도자들과 진솔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대해 기분이 상한 것 같다. 그러나 사적인 우정과 정치적 당파심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후에 밝혀졌지만 이 사건의 안창호 보석금은 윤치호가 댔다. 그리고 1938년 전후의 치료비도 여러 차례 내주었다. 이런 사실은 흥사단 기관지 ‘기러기’에 마지막 병상을 지킨 이갑(李甲)의 딸 이정희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인사를 접촉하는 과정에서 안창호가 윤치호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는 증언 등에서 확인된다. 결국 안창호의 말년까지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은 이렇다. 이상과 같은 도움이 있었다고 해서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가 양보했거나 이 때문에 윤치호가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둘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단지 인간적인 신뢰가 굳건하였으므로 그 과정에서 상호 배려가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애국가와 그 작사자에 대한 경의(敬意)가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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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 개최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이 오는 29일 개최된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 이날 나치만 서울지방보훈청장,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기념식은 국민의례와 약전봉독, 기념 식사 및 기념사, 유시봉독, 축하공연, 유족대표 인사, 윤봉길의사 노래,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1908년 충남 예산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1931년 중국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이후 1932년 4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리자 윤 의사는 오전 11시 40분경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이 사망했고 노무라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그해 5월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25세 나이로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해 1946년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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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한국 독립운동사 20선' 7월말까지 전시전북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이 독립기념관과 함께 '사진으로 보는 한국 독립운동사 20선 전시회'를 다음달 1일 개막한다.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이하 기념관)은 오는 7월 30일까지 독립기념관 순회전시 '사진으로 보는 한국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 20선'展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오는 7월 3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사건을 20점의 사진을 중심으로 소개함으로써 독립운동사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 주제는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에서 진행한 국민투표에 의해 선정된 것으로 ‘국민과 함께 만드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자료는 ▲의병 활동 ▲오산학교 ▲안중근 의사 의거 ▲2.8 독립선언 ▲학생비밀단체 ▲윤봉길 의사 의거 ▲조선어학회 등 일제강점기 주요 항쟁과 관련 인물 사진으로 구성되며 상세한 설명도 덧붙였다. 또 기념관 내에는 태극기 만들기, 태극기 전달하기, 만세운동 전파하기, 독립군 기념촬영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체험교육 공간을 조성해 운영된다. 기념관 관계자는 "역사적인 장면과 중요 자료가 담긴 사진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면서 "앞으로도 나라를 지키고자 노력한 선조의 행적을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해 기념관을 호국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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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창극단 2023년 특별공연 '판소리 감상회'인류무형유산 '판소리'를 집중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무대가 기획된다. ‘판소리 감상회’가 한달에 한 차례씩 모두 8차례 공연을 개최한다. 광주시립창극단이 2023년 특별공연으로 기획한 '판소리 감상회'의 두 번째 무대가 오는 26일 오후 3시에 국립광주박물관 대강당에서 펼쳐진다.광주시립창극단이 지난해에 이어 마련한 '판소리 감상회'는 지난달 26일을 시작으로 11월까지 총 8차례 진행될 예정이다.26일 공연에서는 양은주 명창의 소리와 김규형 명고의 북장단에 맞춰 창작 판소리 '열사가' 무대가 선보인다. '열사가'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배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이준, 안중근, 윤봉길 열사의 삶과 투쟁 일대기를 판소리로 창작한 작품이다. 광주시립창극단 김규형 예술감독은 "판소리 감상회 공연을 통해 한국적인 예술적 가치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판소리가 여러분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광주시립창극단 특별공연 '판소리 감상회'는 윤중강 국악평론가의 해설과 함께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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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크 '일제강점기' 표현 안된다.......'대일항쟁기'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국내 포털사이트에 일제 강점기를 대일 항쟁기로 바꾸는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한다.14일 반크는 "일제 강점기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의 관점에서 일제가 주체가 되어 서술된 표현이며, 일제에 의해 침략당했을 때 저항했던 한국인의 관점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내에서 영향력이 큰 포털 사이트에 일제 강점기란 표현이 방치돼 한국인과 세계인에게 각인되고 인식된다면 한국인은 수동적이며, 일제는 적극적인 인식이 고착화할 것"이라고 밝혔다."현재 일본은 여전히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국제사회에 테러리스트로 홍보하며, 과거 제국주의 침략역사를 부정하며 전 세계 교과서, 백과사전, 포탈 사이트 등에 왜곡된 역사를 홍보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 한국인 스스로가 한국역사를 서술할 때 한국인이 관점에서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주어가 돼 서술된 일제 강점기란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14일 주장했다.반크는 이날 이번 캠페인을 위해 대일항쟁기를 증명하는 독립운동가로 윤봉길, 최재형, 호머 헐버트, 유관순을 선정해 포스터를 제작하고 온라인에 공개했다. 포스터에는 이들의 대일 항쟁 활동을 보여주는 내용과 이들이 홍보모델이 되어 '일제 강점기를 대일 항쟁기로 바꿉시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반크는 대국민 정책청원 사이트 울림에도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청원 글을 올렸다.반크는 "한국인 한명 한명이 윤봉길, 최재형, 호머 헐버트, 유관순 독립운동가처럼 이번 캠페인의 홍보모델이 되어 포스터를 적극적으로 SNS에 배포하고, 정책 청원에 함께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며 "네이버, 다음 포털사이트에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일제 강점기를 대일 항쟁기로 명칭이 변경될 수 있도록 활동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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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삼일절 기념 김구 선생 친필휘호 전달식 진행스타벅스 코리아가 104주년 삼일절을 기념하여 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함께 우리나라 독립문화유산 유물 전달식을 진행했다고 28일 밝혔다.지난 27일 스타벅스는 덕수궁 중명전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인 ‘유지필성(有志必成,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룬다)’ 유물 전달식과 함께 유지필성 문구가 들어간 기념 텀블러 300개를 제작하여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했다.이번 유물 기증은 백범 김구 선생의 ‘존심양성’(2015), ‘광복조국’(2016),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약욕개조사회 선자개조아궁’(2019), 백범 김구 선생의 ‘천하위공’(2021), 만해 한용운 선사의 ‘전대법륜’(2022)에 이어 스타벅스의 통상 여섯 번째 기증 유물이다.유지필성은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를 기념하여 1949년 4월29일 74세가 되던 해에 휘호했다. 이는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6일 서거하기 두 달 전에 작성한 마지막 대표 휘호로 알려졌다.이와 함께 스타벅스는 104주년 삼일절을 기념해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를 주제로 디자인한 머그 및 텀블러를 선보이고 상품 판매 수익금 일부를 독립문화유산 보호기금으로 조성해 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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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전통예술단 창단 공연, 우리춤소리극 ‘상춘무’ 첫 공연다음달 1일 오후 5시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에서 우리춤소리극 ‘상춘무(賞春舞)’ 공연이 개최된다. 3·1절 104주년을 기념해 남산전통예술단(대표 배철성)이 주최, 주관하는 첫 번째 무대다. 이번 공연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투사, 순국선열을 기억하면서 민족의 자주를 뛰어넘어 인류 평등을 지향하는 3·1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됐다. 우리춤소리극 상춘무는 제1장 연극 ‘혼·불·꽃’을 통해 김구,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등 대표적 독립운동가들의 목소리로 3·1 정신을 들려준다. 이들의 목소리는 ‘천상의 춤’으로 형상화되며, 희생된 호국영령을 기리는 제2장 ‘넋의 위로춤’과 산 자들을 위한 춤인 제3장 ‘삶의 춤’으로 전개된다. 이어 모든 인류가 기쁨과 평화 속에서 어우러지는 태평성대를 형상화한 제4장 ‘미래 희망 태평춤’을 추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2023년 창단한 남산전통예술단은 우리 고유의 가·무·악을 바탕으로 전통을 널리 알릴 다양한 공연과 교육 활동을 펼치고자 한다. 이번 상춘무 공연은 극과 소리, 춤과 음악을 결합해 선보이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 형식이자 창단 기념 공연으로, 앞으로 브랜드화를 거쳐 세계 각지에서 펼쳐질 연례 공연의 쇼케이스다. 이번 공연은 사전 예약제로 운영한다. 입장권 가격은 R석 5만원 S석 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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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창극단 특별공연.... ‘판소리 감상회’2023년 광주시립창극단 특별공연 ‘판소리 감상회’가 오는 26일 오후 3시와 3월26일 오후 3시에 국립광주박물관 대강당에서 펼쳐진다.‘판소리 감상회’는 2022년 새롭게 선보인 레퍼토리 공연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판소리를 온 가족이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기획한 공연이다.‘판소리’는 창자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 너름새로 구연해 우리나라의 시대적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예술로서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오는 26일 공연에는 광주시립창극단 창악부 박운종 상임단원의 소리와 김준영 상임단원의 북장단에 맞춰 판소리 ‘적벽가’를 감상할 수 있다. 판소리 적벽가는 중국 소설인 삼국지연의 내용 중 적벽대전 장면을 중심으로 차용해 만들어진 소리이다. 힘차고 구성진 고음과 무게감 있게 내려놓는 저음의 대조가 돋보이는 소리로 장단을 넘나들면서 변화하는 기교와 뛰어난 감정 표현으로 청중들을 사로잡는다.3월26일 공연에는 양은주 명창의 소리와 김규형 명고의 북장단에 맞춰 창작 판소리 ‘열사가’ 무대가 펼쳐진다. 열사가는 1945년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항일운동의 상징적 영웅인 ‘이준, 안중근, 윤봉길’ 열사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판소리로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항일에 대한 영웅적 삶의 한 국면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세 명의 열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해 들을 수 있다.김규형 광주시립창극단 예술감독은 "판소리를 통해 전통문화예술의 역사적 가치와 정서를 고스란히 느끼실 수 있는 공연을 마련했다. 특히, 광주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국립광주박물관과 함께 판소리의 역사적 가치 보존과 계승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고 말했다.윤중강 국악평론가의 사회로 진행되는 광주시립창극단 특별공연 ‘판소리 감상회’는 전체 관람가로 전석 무료이며 광주문화예술회관과 티켓링크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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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제90주기 추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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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제49회 윤봉길평화축제' 19일까지예산군이 '제49회 윤봉길평화축제'를 오는 6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의 일정으로 덕산면 충의사 일원에서 개최한다고 13일 밝혔다.특히 이번 행사의 메인 프로그램인 '윤봉길의사 상해 의거 90주년 기념식'은 오는 18일 오전 10시 덕산면 도중도에서 열리며, 황선봉 예산군수를 비롯해 10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으로 유공자 포상, 영상 메시지, 상해 의거 90주년 기념 퍼포먼스 등이 진행된다.올해로 49회를 맞는 '윤봉길평화축제'는 당초 윤봉길의사 상해 의거일인 4월 29일에 맞춰 온·오프라인 축제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 확산방지를 위해 6월 17일로 연기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에 따른 대면 중심의 프로그램을 재편성했다.올해 축제는 윤봉길의사 상해의거 9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로 국민과 함께 축하하는 경축행사로 꾸미되 '청년 윤봉길의 꿈,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다'라는 주제로 1932년 25살의 청년 윤봉길의 꿈과 평화가 이 시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행사를 준비했다.축제는 17일 저녁 7시 상해의거 90주년을 경축하고 축제의 개막을 축하하는 초대가수 '인순이'의 무대를 시작으로 뮤지컬 갈라쇼 '드림걸즈', '정건영과 친구들'의 클래식 타악공연, '소프라노 배수진과 테너 윤석'의 주옥같은 성악공연 등 다채로운 내용의 윤봉길평화콘서트가 화려한 불꽃쇼와 함께 펼쳐질 예정이다.또한 18일 오전 9시 윤봉길의사 상해의거 90주년 및 탄신 114주년 기념행사인 '영정모시기 거리 퍼레이드'를 시작해 공식 기념식이 도중도 주 무대에서 펼쳐지며, 1932년 4월 29일 상해의거를 실제 상황처럼 체험할 수 있는 재현체험 프로그램이 같은 날 오전과 오후 3회에 걸쳐 저한당에서 진행된다.아울러 18일 낮 시간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댄스 버스킹 '청년 윤봉길 춤추다'와 '뽀로로 우리들이 말하는 평화'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며, 저녁에는 윤봉길의사의 꿈인 동북아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번영을 염원하는 동북아 평화 페스티벌 공연이 한국과 중국, 일본, 몽골 등 동북아 4개국의 대표 문화 예술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마련되고 한국 대표로 트롯 가수 '신성'과 국악 부문 '이광수' 사물놀이 공연이 펼쳐진다.마지막 날인 19일에는 윤봉길의사가 꿈꾼 1932년 고향장터의 모습을 담은 문화공연인 '다시보는 1932' 공연이 전국씨름장사 한마당 대회와 함께 농·특산물 특판전이 난장공연 형태로 펼쳐지며, 저녁 폐막식에는 '기억하라 1932' 라는 주제로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대동놀이 한마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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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코로나 봉쇄로 윤봉길 의거 현지 기념식 취소중국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상하이를 봉쇄한 가운데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를 기념하는 현지 행사가 취소됐다.국가보훈처는 28일 "당초 중국 상하이 루쉰공원에서 29일 현지시간 오전 10시 개최하기로 한 기념식은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돼 온라인으로 기념행사를 연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기념식은 한국에서만 열린다. 보훈처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서초구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야외 광장에서 '상하이 의거 90주년 기념식'을 연다.기념식은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 김부겸 국무총리,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윤주경 의원 등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300여명이 참석한다.기념사업회는 윤봉길 의사 의거 90주년을 맞은 올해 사진 전시회와 학술회의, 시 낭송대회, 사적지 탐방, 서예작품 전시회, 기념음악회 등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외국에서는 순국지 학생 역사 탐방, 중국 거주 학생 한글 백일장, 추모식 등이 열린다.윤봉길 의사의 출생지인 충남 예산에서는 29일 오전 10시 충의사(덕산면 소재)에서 예산군 주관으로 추모 다례가 열린다. 황선봉 예산군수, 홍경화 충남서부보훈지청장 등 각계 인사와 월진회원,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다. 월진회는 일제강점기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충남 예산군에 세운 사회운동단체다. 이 단체는 문맹 퇴치와 농촌 부흥, 애국심 고취 등 활동을 했다.윤 의사는 1932년 4월29일 일왕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에서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 단장이 사망했다. 노무라 중장, 시게미쓰 공사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 의거는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황기철 보훈처장은 "윤봉길 의사님께서 단행하신 상하이 의거는 당시 일제의 폭압에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을 향한 희망을 되살린 횃불이었다"며 "올해 의사님의 의거 90주년 기념식을 비롯한 다양한 기념행사가 우리 국민들이 그 고귀한 독립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계승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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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기념 태극기 거리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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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9주기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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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필' 김충현, '일중의 집 보현재', 전시장으로 개관옆에는 보현봉(普賢峯)이, 앞에는 북악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이곳을 서예가 김충현(1921~2006)은 '보현재'로 이름을 지었다. 1995년부터 2006년 타계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가옥이 전시공간으로 변신한다.일중선생기념사업회는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평창동 ‘일중의 집-보현재(普賢齋)’를 단장해 오는 16일 전시장으로 개관한다고 10일 밝혔다. "작가가 직접 마련한 말년의 거처인 만큼 보현재는 그가 평생을 두고 완상했던 애장품들과 작가의 대표작이 함께 머무는 서화예술의 아늑한 거처가 되고자 한다"는 취지다.◆일중 김충현은?일중 김충현은 우리나라 근현대 서예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명필, 이른바 '국필'로 꼽힌다. 한글서예와 한문서예를 넘나들며 조형적인 완벽함을 추구했던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구한말 한일합병에 항거하여 자결한 오천(悟泉) 김석진(1843~1910)의 증손이다.7세 때 안진경체를 쓰기 시작,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 초서까지 한문 5체를 모두 섭렵한 서예가였다. 일제 강점기 엄혹한 시절에 한글 서예의 교본을 완성할 정도로 우리글의 보급에 앞장섰다. 특히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등 옛 판본체를 모범으로 한 고체(古體)의 보급은 기존 궁체 위주의 한글서예의 폭을 크게 넓혔다.전국의 묘비의 비문과 동상의 이름이 대부분 그의 글씨다. '4·19의거 희생자 묘비' '권도원수 행주대첩비명' '이충무공 한산도제승당비' '예산 윤봉길의사 기념비' '백범 김구선생 묘비' '사육신묘비' '의암 손병희 선생 묘비' 뿐만 아니라 1965년 9월22일 창간한 中央日報(중앙일보)의 제호도 그의 글씨다.김충현 호 일중(一中) 은 마음(心)에 하나(一)의 중심(中)이 서면 충(忠)이 된다는 뜻이 담겼다. ◆보현재, 일중 안목과 취향이 깃든 공간보현재는 총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작가의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보존하여 생전 그가 완상하던 소품과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2층은 김충현의 대표작들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이다.1층에는 월전 장우성(1912~2005)의 '월매도(月梅圖)', 고희동(1886~1965)의 '괴석도(塊石圖)', 청나라 주당(1806~1876)의 '석지도(石芝圖)', 조선시대 유한지(1760~1834)의 예서 등 근현대작품과 고서화가 한데 어우러져 작가의 안목과 취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2층에는 김충현이 보현재에 오기 전 살던 시엽산방(柿葉山房)에서 쓴 시조 '시엽산방팔영'을 비롯해 신위(1769~1845)의 한시를 6미터가 넘는 스케일로 쓴 '한예 10수'등 그의 대표작 10여점이 전시된다.◆서화예술에 스민 사계의 운치김충현은 1997년 병환이 심해져 절필했기 때문에 보현재에서 작품을 제작한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하지만 보현재는 작품의 소재가 되었던 수석과 수목, 화초를 그대로 옮겨와 작가가 직접 조성한 공간인 만큼 그가 심취했던 취향과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백일홍, 가을에는 들국화가 피어 마당을 수놓고 겨울에는 사철나무가 곧은 절개를 뽐낸다.일중선생기념사업회는 "보현재에서 서화예술에 자연스럽게 스민 계절의 운치와 풍류를 경험해보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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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고향 충남 예산군, 올해 독립유공자 최다 배출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윤봉길 의사 고향인 충남 예산군을 찾아 독립유공자 포상 전수식을 개최한다고 30일 밝혔다.예산군은 올해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포상된 독립유공자 247명 중 가장 많은 인원인 38명을 배출한 지방자치단체다. 건국훈장 4명(애국장 1명, 애족장 3명), 대통령표창 34명이다.예산군은 충남에서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이다. 홍주의병을 이끈 수당 이남규(예산 대술면 출신), 상해 의거 윤봉길(예산 덕산면 출신), 광복회 김한종(예산 광시면 출신), 면암 최익현(묘소 예산 광시면) 등 의병, 의열투쟁, 항일결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됐다.포상 전수식은 오는 31일 오후 4시 예산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황선봉 예산군수 등을 비롯해 이번에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 유족(손자녀) 6명이 참석한다.포상 받는 독립유공자는 6명이다. 고(故) 박동복 선생(대통령표창), 고 신매손 선생(대통령표창), 고 윤칠영 선생(대통령표창), 고 정계호 선생(대통령표창), 고 정대홍 선생(대통령 표창), 고 정창희 선생(대통령표창)이다.보훈처는 "앞으로도 지방자치단체 등 유관기관과 독립운동 발굴 관련 협업체계를 공고히 해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포상 받지 못하는 억울한 사례가 없도록 적극적인 발굴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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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온라인 추모공간에 추모객 5만7256회 접속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 ‘보훈처’)는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18일(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면서 마무리했고, 유해봉환을 통해 장군의 독립정신을 잇고 국민통합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이번 유해봉환 이후 카자흐스탄 홍범도 장군 묘역이 있던 장소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장소로 지속 보존·관리하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비롯해 국외에 안장된 독립유공자의 유해봉환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다할 계획이다.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대통령 특별사절단(이하 ‘특사단’) 출발부터 유해 안장식까지 이어진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은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추모의 열기 속에 서거 78년, 봉오동 전투 101주년 만에 고국 품에 안긴 것으로 많은 의미와 성과를 남겼다.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의 주요 과정으로 황기철 보훈처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통령 특사단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묻힌 장군의 유해를 광복절인 15일에 국내로 봉환해 왔다.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되었으나 난항을 겪다가 27년 만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2019년 4월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때 문재인 대통령이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유해봉환을 요청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봉오동 전승 100주년이던 지난해 한․카자흐스탄 양국이 유해 봉환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1년여 미뤄졌고 이번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8.16.~17.)을 계기로 장군의 소원대로 독립을 이룬 조국으로 모시게 되었다. 특히, 이번 유해봉환 과정은 국권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한 독립 영웅을 잊지 않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한다는 보훈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4일 황기철 보훈처장 등 대통령 특사단이 카자흐스탄 현지에 파견되어 광복절에 공군 특별수송기로 장군의 유해를 모셨다. 특별수송기가 우리 영공에 진입할 때에는 공군 전투기 6대가 조국으로 귀환하는 장군을 호위했다. 이번 안장식에는 고려인을 대표해 카자흐스탄에서 영주 귀국한 최재형 선생과 김경천 장군의 후손도 참석해 장군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 했다. 국외 안장 독립유공자 유해봉환 사업은 1946년 윤봉길·이봉창· 백정기 의사 유해를 시작으로 이번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까지 총 144위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왔다. 보훈처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비롯해 국외에 안장된 독립유공자의 유해봉환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 등을 통해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마지막 예우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보훈처는 이번 유해봉환 이후에 카자흐스탄 홍범도 장군 묘역이 현지 고려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갖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상징적인 장소로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보존·관리 노력을 기울여 나갈 계획이다. 17일, 청와대 한·카자흐스탄 정상회담에서 보훈처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주(州) 정부는 홍범도 묘역의 보존·관리를 내용으로 하는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업무협약(MOU) 내용은 홍범도 기념단지(memorial complex)의 안전한 관리와 상호합의 하에 홍범도 기념비 설립 및 거리 조성 협력, 관리를 위한 재정적 지원 등이다. 이에 앞서 14일, 크즐오르다 주 청사에서 가진 압드칼리코바 주지사와의 면담에서 보훈처장은 "유해가 봉환된 이후에도 홍범도 장군의 기념물이 보존될 수 있도록 지원을 지속”할 것임을 약속한 바 있다. 이를 통해 크즐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묘역에 대한 관리를 강화함에 따라 봉오동 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한․카자흐스탄 양국의 우정이 더욱 깊어지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카자흐스탄은 80여 년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을 카자흐스탄 국민으로 따뜻하게 품어 주었고, 2019년 계봉우․황운정 지사 부부의 유해를 봉환한 데 이어 이번 홍범도 장군의 유해까지 한․카 양국은 독립 영웅에 대한 유해봉환에 대해 긴밀히 협력해 왔다. 이에 대해 황기철 특사단장은 14일 크즐오르다 주지사와의 면담에서 "홍 장군님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도록 지지와 각별한 관심을 보여준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주에 감사하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정부와 크즐오르다 주 정부는 특사단 환영부터 추모식, 유해봉송까지 유해봉환 전 과정에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독립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고려인을 통해 한․카자흐스탄 양국의 우정은 더욱 굳건하게 유지될 전망이다. 보훈처는 내년 한·카자흐스탄 양국 30주년을 맞아 홍범도 장군 묘역에 대한 정비․관리와 고려인 초청행사 등 양국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보훈처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지난 15일부터 보훈처 누리집에 추모 공간(추모페이지)을 마련하여 ‘국민추모’ 기간을 운영했다. 18일 오후 6시 기준으로 추모 공간(추모페이지)에 접속 횟수는 총 57,256회이며, 이중 홍범도 장군에게 6,406건의 감사와 추모의 글을 남겼다. 감사와 추모의 글에는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장군님의 귀환에 눈물이 나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장군님의 숭고하고 고귀한 헌신에 감사하며 기억하겠습니다’, ‘장군님의 애국정신을 잊지 않고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남기기도 했다. 특히, 유튜브 등 보훈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홍범도 장군의 영상과 사진의 조회 수가 100만 회에 도달했으며, 15일 밤 11시경 자녀를 동반한 시민 두 가정이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유해를 먼발치에서 참배했는데, 두 가정이 보여준 영웅을 대하는 마음이 온라인 추모에 참여한 국민의 마음을 대변하였다. 또한, 참배를 원하는 국민들을 위해 제한적으로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국립대전현충원에 ‘국민분향소’를 운영하여 직접 참배와 승차 참배(드라이브 스루)를 진행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철저한 방역 점검 속에서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진행된 국민분향소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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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일본의 심장을 쏘다, 창작판소리 <안중근> 초연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창작판소리 <안중근>이 6월 5일(토), 6일(일)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만고의 영웅 대한국인 안중근의사의 일대기를 판소리로 엮은 작품으로 창작판소리연구원의 예술총감독 임진택 명창이 안중근의사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를 기본으로 사설을 집필하고 소리를 붙여 작창하였다. 안중근은 누구인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경, 중국의 하얼빈 역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아시아 전체가 치를 떠는 공공의 적을 저격하는 순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자 대한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쓰러져 곧 숨을 거두었다.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 안중근의사는 뤼순감옥에 수감되어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모두 여섯 번의 공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항소를 거부하고 그해 3월 26일(향년 31세)에 순국하였다. 안중근의사는 왜 이토를 쏘았을까?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살아 있는 한 동양평화는 계속 어지러울 것이고 대한제국과 일본은 서로 증오할 것이기에, 대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의사 의거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는 단순히 이토의 제거가 아닌 일본이 계획하는 침략전쟁을 막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다시 조명되는 안중근의 사상 사형 집행을 앞두고 미완성인 채 후대에 남긴 ‘동양평화론’ 속에 담긴 안중근의사의 선구적인 발상은 오늘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라는 시대적 화두로 다시 이어지고 있다. 침략 가해자였던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사죄와 반성은 커녕 역사를 왜곡하고 자기네 평화헌법마저 부정하면서 극도로 우경화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군국주의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다시금 내비치고 있다. 안중근의사의 사상을 되짚어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창작판소리 <안중근> 줄거리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안중근의사가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안응칠로 태어나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고 결국 조국이 사라진 시대에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고 하얼빈 의거를 결행에 옮기기까지의 삶의 궤적과 전쟁포로로서 국제법을 따르는 재판의 요구는 묵살된 채 끝내 일본의 짜인 각본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에 오늘날까지도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유언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소리로 지었다. 임진택 명창은 왜 판소리 <안중근>을 창작하였는가? 안중근의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소리를 이끄는 도창으로 직접 실연하는 임진택 명창은 "해방 직후 박동실 명창이 이준, 안중근, 윤봉길 세 분의 의거를 담은 ‘열사가’라는 판소리를 창작한 바 있다. 허나 명창이 6.25 때 월북함으로써 그가 남긴 열사가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으며, 또한 열사가 안에 안중근 대목은 불과 20분 정도 분량으로 온전한 한 바탕의 소리로서는 부족함이 있기도 하다. 새로운 안중근 판소리의 필요성과 작금의 급박한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세로 불 때 안중근이 자칫 과거의 인물로만 박제 되어서는 안 될 터이며, 따라서 이를 뛰어넘는 창조적 예술정신이 요구된다.”면서 "창궐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열강의 야합에 맞서 싸우는 안중근이라는 대한국인을 우리시대의 새로운 의사(義士)로 부활시키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이번 작품의 각오를 밝혔다. 의사의 서거 111년이 지난 오늘은 기필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대로 그의 유해를 대한의 조국으로 모셔오고 그가 바라는 진정한 독립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창작판소리 <안중근>에 구사된 기법과 미학 창작판소리 <안중근> 공연은 1인 다역을 하는 한 사람의 광대와 한 사람의 고수가 등장하는 판소리 전통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다수의 소리꾼이 어머니 조마리아, 빌렘신부, 채가구 역장, 일제 검찰관 등의 여러 배역을 맡아 안중근의사와 함께 시대의 증인으로 무대에 서는 입체창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이는 전통판소리의 미적 특징을 고수하면서 중립적으로 관찰되어 객관화된 사건의 분위기와 인물의 신분, 성격에 따르는 이면(裏面)의 효과를 높이는 장치이다. 판소리 <안중근>의 눈대목(절정)은 이토의 북만주 시찰 정보를 듣고 하얼빈 역에서 저격하는 1909년 10월 21에서 26일까지 안중근의사의 행적이다. 거사 결정과 작전수립, 동지들과 블라디보스톡에서 하얼빈으로 이동 그리고 계획의 변경, 역에서의 기다림과 이토의 저격이 이루어지는 엿새간의 장면이 아니리(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줄거리를 설명하는 부분) 없이 소리 장단으로만 비장함, 긴박감, 긴장감, 통쾌함, 의연함이 20여 분간 그려지는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이 표현된다. 창작판소리와 그림 영상의 만남 이번 공연에는 화가 박불똥이 미술감독을 맡아 작화에 나섰다. 일반적으로 판소리 무대의 배경으로 쓰이는 병풍 대신에 화가의 포토꼴라주 작품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안응칠 역사’를 자신만의 리얼리즘으로 포착한 시각 이미지들을 분해 조립하고 유기적으로 엮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특히 정지된 하나의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가 중첩되고 반복과 복제되는 작업은 동영상을 보는 듯한 율동감마저 자아낸다. 무심하게 숨어 있는 작은 이미지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안응칠 역사’는 작은 힘들이 모여 하나의 큰 역사를 이루어 낸 우리 민중들의 삶 하나하나의 역사인 셈이다. 나오는 사람들 ‘우리시대의 광대’ 임진택은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명창 정권진(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이른바 ‘비가비광대’이며 1970년대 이후 마당극 운동을 주도한 연출가이자 문화운동가이다. 특히, 전통판소리의 박제화를 극복한 ‘살아있는 판소리꾼’으로서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을 넘어 새로운 ‘창작판소리12바탕’ 완성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백범 김구>(2010년)를 시작으로 <남한산성>, <다산 정약용>, <오월광주, 윤상원가>, <세계인 장보고>, <전태일>에 이은 <안중근>은 그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어머니 조마리아 역을 맡은 중견 소리꾼 남궁성례는 정권진 명창과 김소희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에게 사사하고 현재 유튜브 ‘풍류당 보라사부’ 채널에서 판소리 남도창을 강의하고 있다. 소리꾼 강응민(안중근 역)은 현재 안양국악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청년 국악인으로서 지역의 전통예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으며 지난 2019년 <수궁가>를 완창 바 있다. 소리꾼 최민종은 단국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하고 소리패 ‘낭만판소리’를 꾸려 판소리의 대중화에 노력하고 있으며 제12회 인천국악대전 판소리부 일반부 최우수상(2012년)을 수상했다. 소리꾼 배재정은 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장 출신으로 임진택 명창으로부터 창작판소리를 사사하고 있으며 2020년 창작판소리 <전태일>에 출연하며 제2의 인생을 소리꾼으로서 시작했다. 북채를 잡는 박명언 고수는 박봉술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의 손자로서 소리와 고법을 모두 익혀 ‘소리할 줄 아는’ 고수로 이름이 높으며 나주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고법 일반부 대상(2008년)과 완도전국국악경연대회 판소리 일반부 최우수상(2010년)을 수상한 재원이다. 이번 창작판소리 <안중근>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0년도 원로예술인공연지원 사업 기금과 기아(주) 노사합동 사회공헌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되었다. 공연은 전석초대, 무료이며 예약은 전화(010-3675-1518), 홈페이지(www.pansorilab.com)로 날짜와 관람인원을 남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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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제89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 오늘 8일(금) 오전 11시, 효창공원(서울 용산구, 삼 의사 묘역)에서 열렸다. 기념식은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 주관으로 진행되고,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외부인사 초청 없이 기념사업회 관계자만 참석하는 자체 행사로 헌화 및 분향, 묵념의 순으로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동경(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조국의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렸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침체된 항일운동을 되살리는 도화선이 됐다. 1932년 9월 30일 이 의사는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봉창 의사(1901.8.10~1932.10.10)는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1931년 1월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김구 단장을 만나 일왕 폭살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1년여의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실행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 출국하여 12월 말 동경에 도착하였다.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을 거사 일로 결정해 상해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이 의사는 거사 일인 1932년 1월 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일왕이 나타나자 그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지는데 그쳐, 일왕 폭살 계획은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날 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같은 해 9월 30일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일왕 폭살에는 실패하였지만, 그의 의거는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 투쟁의 선봉으로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운동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루쉰공원)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악화되었던 한ㆍ중 간 감정 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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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서 김홍일 장군 서거 제40주기 추도식 개최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호국, 민주를 아우르는 큰 업적을 남긴 ‘일서 김홍일 장군 서거 제40주기 추도식’이 오늘 오전 11시, 전쟁기념관(뮤지엄웨딩홀)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평안북도 중앙도민회(회장 허덕길)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추도식은 일제강점기에 폭탄 제조를 통해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지원하고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등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수호와 근대화·민주화에도 큰 업적을 남긴 김홍일 장군을 기억·계승하기 위해 개최된다. 행사는 코로나19로 규모를 축소한 가운데 박삼득 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독립유공자 유족 등 주요 관계자만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인사말씀, 추모사, 헌화 순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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