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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2년 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서울연희대전'이란 이름의 한 공연이 있었다. 제1회 '장구대전'이란 부제가 붙어있고, 입장권 전석이 판매 되어 화제가 되었다. 무대에서 오직 '장구'만을 가지고 나와 6개 유파별 6인이 개인놀이(설장구)를 무대화하여 한 판을 벌인 것이다. 당시 출연자들은 관객들의 폭발적 호응으로 무대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신명나는 공연을 보여 주었다. 관객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지난 해에는 2차 연희대전이 열렸는데, '북'이 부제였다. 1회 때보다 출연자도 더 많아졌고, 북 공연만으로 북의 다양하고 독특한 맛을 보여주어 큰 센세이션을 선사했다. 이런 이색 기획으로 새로운 바람을 몰고 가는 공연기획에 주목하여, (주)국악신문 이동식 대기자가 '더원아트코리아' 기획사의 최재학 대표를 만나서 공연예술의 새바람에 대한 기대와 포부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 공연예술에 새바람을 불어 오셨다던데요. A. 네, 최근 기획한 공연 모두 티켓 판매가 매진되었습니다. 장구만으로 장구만의 멋과 다양한 얼굴을 새롭게 펼쳐보자는 것이었는데 모두 판매만으로 매진되었으니까요. 그래서 2회에는 '북'을 가지고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공연으로 키워 보았는데 이것도 '인서울'하기가 좋았습니다. 전통예술도 이렇게 형식을 다시 설정하면 우리 젊은 분들에게 끌릴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서로 공감하게 된 것이지요. 올해는 세번째로 '벅수'만을 가지고 판을 짜보려고 합니다. 저는 원래 '꽹과리'를 배운 국악인입니다. 제가 익히고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이런 풍물연희가 이 시대에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했고, 시대의 요구에 어떻게 하면 함꼐 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죠. 풍물 고유의 색채는 살리되, 형식을 좀 비틀어보자, 그렇게 우리 젊은 현대인들이 좋아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 보자고 기획을 해 본 것인데 1회 때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명인보다는 중견 연희자들이 나와서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으면서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많은 무대를 주고 싶습니다. 장구대전 6인, 6개의 유파는 김병섭류 호남우도농악의 이동욱, 최상근류 호남좌도농악 설장구의 염창수, 김동언류 호남우도농악 설장구의 임재태, 박염류 영남농악 설장구의 김한준,김형순류 호남우도농악 설장구의 박현승,김기복류 안성남사당놀이 웃다리농악 설장구의 하현조이다. Q.서울연희대전이라고 이름이 거창해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했더니 결국에는 풍물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새롭게 펼치는 것이군요, 기존의 공연을 벗어난 노력이 보이던데... A.최근 우리 공연계를 살펴보면, 우선 창작을 해야한다는 관념이 우선적으로 앞서다 보니...... 낯선 창작공연이 많은데 이게 호응이 쉽지 않습니다. 풍물 악기, 혹은 풍물 자체의 형식도 각각이 갖고 있고, 연희자는 저마다의 특장(特長)이 분명히 있는데, 이런 공연들은 관객들의 반응을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식 공연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파묻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연주하는 악기 각각의 맛과 연희자의 특장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현대인들에게는 보다 친근하고 은근하고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으면 더 좋아하고 끌려 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Q.그동안 공연한 것을 보니까 'ㅊ ㅊ-하다'라는 제목의 페스티벌을 1년에 한번씩 열었더라고요. 이거 무슨 뜻이고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ㅊㅊ-하다 ' 공연 A.하하, 죄송합니다. 저는 청년들이 무언가 일을 해내고 있다, 그것을 청춘들이 이해하고 사랑해줄 수 있다는 뜻에서 "청춘이 청하다" 혹은 "청년이 채우다"란 뜻을 요즘 유행하는 두음(頭音)만으로 표기하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인데 사실 그냥 '치읓 치읓하다 '로 읽어도 됩니다. 이것도 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찾다가 생각해낸 것인데, 대기자님에게 처럼 궁금증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Q. 하하 그렇군요. 그동안 3년 연속으로 이 'ㅊ ㅊ- 하다'를 해왔는데 어떻든가요? A.예, 처음에는 우선 무용만으로 공연 전판을 꾸며 보았습니다, 거기에 2회 째에는 무용에다가 '기악'이 더 들어갔고요, 세 번째에는 무용, 기악에다가 성악이 더 들어갔고요. 지난해 4회 째에는 여기다가 연희까지 들어갔습니다. 말하자면 무용에서 기악, 성악, 연희까지 들어가는 큰 잔치판으로 점점 확대해 나간 것이지요. 그만큼 판이 커지고 다채로와지니, 관객들은 지루해 하지 않고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전통예술도 이제 젊은 분들에게 더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젊은 청춘들이 좋아하는 것을 청춘 예술가들이 만들어가서 청춘들의 판을 만들어나가자는 의도가 일단 시작부터 좋은 반응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Q.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 중에는 '사물놀이의 명품화' 뭐 이런 것을 추진한다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물놀이는 시간이 지나면 좀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던데 A.사물놀이는 한국 전통타악의 대표적인 브랜드로서 대중화가 되었습니다만 과거 원형의 모습이 가지고 있는 음악성이 많이 엷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요. 어느 큰 공연에 끼어들어가는 형식이 아니라 사물놀이 자체만으로도 독립적인 무대가 되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사물놀이의 명품화를 꾸준히 추진, 지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타악연희 그룹 '도리'의 지원입니다.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도리'팀이 사물놀이가 가진 고유의 음악성을 복원하여 관객들에게 사물놀이의 고품격 감동을 선사하는 것인데, 바로 그 사물놀이 명품화 프로젝트 ‘세 개의 사물’로 2019년에는 수도권 5군데, 2021년에는 전국 8개 도시 투어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바 있습니다. ‘세 개의 사물’은 말 그대로 세 편의 각기 다른 사물놀이 ‘영남농악’, ‘우도굿’, ‘웃다리풍물’을 의미합니다. 사물놀이의 고급화와 명품화를 지향하는 이 그룹이 벌써 창단 10주년을 맞아 올 연말에는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을 열기 위해 목하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물놀이만이 아니라 비나리, 설장고, 판굿 등이 합쳐져서 더 큰 재미를 선사하려고 합니다. Q.여러가지 많은 활동이 있군요. 이 더원아트코리아(theoneartkorea) 라는 공연 기획사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A. 저의 목표는 "문화예술의 생태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전통공연예술활동을 하다보니 참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공연을 하면서 티켓은 거의 초대 혹은 유료를 가장한 초대, 또는 강매? 그리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관련 직장을 들어가지 않는다면 레슨, 그 레슨생들과 가족들은 그들 공연의 관객이 되고요, 창작공연도 그렇습니다. 창작공연을 하려면 지원사업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주객이 전도가 되는 느낌입니다. 창작작업을 하기위해 지원사업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고, 지원사업에 맞춰서 창작을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생님들, 또 선정 권한을 가진 분들과의 인맥이 형성되지 않으면 공연하기도 힘든... 이런 상황을 깨기 위해서는 좀 판을 흔들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새로 판을 짜고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 이뤄지면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따라 오고, 그것으로 생태계가 커지고 하는... 이런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것입니다. Q.공연예술분야의 안정적인 공연환경이 중요한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A.문화예술분야에서도 사회적 기업의 역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연 풍토는 국가의 육성에 의존해오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 공연 생태계를 죽이는 역할도 하고 있지요. 정부가 지원을 줄이면 어떤 것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가 되는... 그러기에 다른 분야에서처럼 공연생태계에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 기업이 나와야 하고요... 대부분의 문화예술사회적 기업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 사회적기업의 제도에 들어왔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공연예술가들이 그들의 활동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거나 혹은 그들의 예술활동에 있어 집중이 가능하도록 서포터 하는 역할을 하고 그런 산업을 정착시키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어렵지만 전통공연 쪽에서도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공연 매니지멘트 제도도 펴 나가고 싶고요. Q.말하자면 전통예술시장의 규모가 더 커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냐요? A.사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시장이라는 것은 상호작용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회사가 공연 매니지먼트 상품을 내놓아도 공연자들은 거기에 돈을 쓰는 것에 인색해요. 공연을 어떻게 매니지먼트 하는가에 따라 소비자들이 움직일 수 있고, 그러한 활동 성과가 결국은 본인을 키울 수 있는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데 기본적으로 대부분 전통예술가들은 본인을 위한 투자를 손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강하고, 그런 인식을 바꿔내는 것도 우리의 목표입니다. 실제 우리의 매니지먼트를 받아서 공연해 본 사람들은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고, 출력되는 결과물들에 만족해 하면서 힘을 얻고 있기도 하지요. Q.결국에는 작품이 잘 나와야 하는군요. 젊은이들이 흥미를 느끼고 접근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랄까 공연 각 종목의 화제성, 혹은 끌림 이런 것들을 잘 버무려내야한다는...? A.그렇지요. 작품이 매력이 있고 아티스트들도 매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 매력을 저희가 직접 기획하거나 제작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 방면의 의뢰자를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연도 점차 컬리티를 높여서 명품화 하고 완성된 작품으로 사랑을 받는 판이 만들어지겠지요 아이구, 저희가 감사를 해야지요. 앞으로 국악신문과도 여러 가지 기획을 함께 고민하고 많은 공연단체나 국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마음을 합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동시대성을 읽어가고 있는 최대표가 우리에게 국악의 센세이션을 선사한 '장구대전'에 이어 '북대전' 그리고 '벅구대전'의 무대화에 대한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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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은 말한다"625 전쟁의 총성과 포화가 멈춘지 12년이 지난 1965년 가을 밤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초급 육군장교가 된 청년은 북한 땅이 내려다 보이는 휴전선 GP에서 근무하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 밑의 골짜기와 저 앞 산등성이는 전쟁 막바지에 가장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곳. 서로가 고지를 뺏느라 남북 양측의 청년들이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을 뚫고 산비탈을 기어오르던 곳이 아닌가? 여기저기 터지는 포탄에 바위가 깨져 흙이 되고 그 흙 속에 젊은이들의 피가 흐르고 배어들었던 곳이었는데 밤이 되니 교교한 달빛 속에 저 아래 흐르는 냇물 옆에 작은 노루 한 마리가 물을 마시러 나왔구나. 노루는 여전히 남북의 군사들이 경계근무를 하며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도 여기서 죽어간 그 많은 영령들의 비명과 눈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물만 마시고 있구나. 그 옆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무심히 피어있고 벌나비들은 그 꽃 동산에서 인간들의 슬픈 욕망과 고통과 비탄을 비웃듯이 평화롭게 날아다니고 있구나. 밤하늘에는 청춘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슬픈 눈망울이 가득 차 있는 듯하구나. 낮에 병사들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따라 금성천변의 능선 자락을 순찰하였는데 거기에 다 썩어가는 나무 푯대 하나가 나딩굴고 있었지. 그 옆에는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고. 12년 전 전쟁 막바지 때 옆의 전우가 갑자기 쓰러지자 차마 그냥 두고 나올 수가 없어서 야전삽으로 대충 땅을 파고 주위의 흙을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푯대 하나를 꽂아놓았던 것 같구나. 그 전우의 이름도 새기지 못했는데, 무덤 밑의 전우는 이미 흙이 되어버렸구나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비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해마다 6월이 되어 이 땅을 지키다 숨진 영령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그 노래 ‘비목’의 노랫말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 때 그 아픔을 노랫말로 써 낸 분이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국악인 한명희 씨다. 군대를 나온 후 방송국에 들어가 피디를 하면서도 마음에 새겨진 그 비탄과 아픔은 없어지지를 않아 한 편의 시로 살아남았고 그것이 장일남 씨의 곡을 받아 불멸의 노래로 태어난 것이다. 이름하여 ‘비목’인 것이다. 이 노래만큼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노래가 또 있을까? 이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민족의 비극, 젊은이들의 한숨과 눈물, 그 유족들의 아픔, 아직도 계속되는 분단과 대치의 암울한 현실이 우리들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도록 하고 눈가를 축축하게 한다. 우리 마음 속의 거문고 줄이 저절로 울려 슬픈 소리를 내며 우는 것 같다. 한명희 님은 작사가도 작곡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노래말을 토해냈을까? 대학 초년생이던1960년 당시 서울음대 학장이며 작곡가였던 현제명 선생이 돌아가셔서 영결식이 거행될 때 누군가가 고인의 작품인 '고향생각'이란 노래를 조가(弔歌)로 부르자 장중이 울음바다로 변했다는데, 그 때 충격과 감동이 그에게 평생 멋진 노랫말을 하나 만들어놓겠다는 결심으로 맺어졌다고 한다. 우리들이 영원히 기억할 노래는 그 순간의 감동이 불을 당긴 것이다. 한명희 님의 그 때의 감동의 기억은 서울시립대학 교수, 국립국악원장을 거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부원장을 거치는 긴 세월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악인으로서 빛나는 활동을 하면서도 더 진해져서,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작업에 평생 심혈을 기울이도록 했다. 국악인 한명희 님에게 DMZ는 그런 비목이 남아있던 곳이었고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아픔의 상징이자 그 아픔을 극복해야 할 공간이었다. 이 DMZ가 비목으로 대변된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고 남북이 평화로운 하나로 되어 대한민국의 국운의 창성의 현장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는 염원이 계속 살아서 알알이 영글어왔다. 새들의 낙원 DMZ에 녹음이 짙어지면 날짐승들 편편 날아 장기자랑 펼치는데 고향소식 전갈하는 산까치에 산제비들 호국원혼 달래주는 쑥국새에 두견새라 머루랑 다래 익는 벽산이 온통 법석일세 ............ 3편 「상좌다툼」 애당초 부질없는 짓들이랑 하지 말자고 금단의 줄 철조망은 미리 말을 했지요 하지만 몽매한 저 자들이 알 리 있나요 산하의 한 허리가 두 동강 난 후에야 피 묻은 후회만이 허공에 나부낌을 ..........9편 「녹슨 철조망」 한명희 소위가 휴전선 DMZ에서 그러한 귀한 경험을 함으로써 민족의 가슴에 불을 당긴 지도 내년이면 60년이다. 한명희 님은 그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슴 속에 담고 키워온 감동과 감상과 염원을 14편의 시로 다시 걸르고 응축해서 토해 내었다. 전쟁 이후 아무도 훼방하지 않은 순수한 자연, 금단의 땅이 된 DMZ가 여전히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를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러한 마음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를 회상할 때마다 원로 미술가인 이동표 님이 얽히고 꼬인 수 많은 감성을 추려서 펜으로 붓으로 그려내었다. 전쟁의 아픔을 상징하는 어두운 색이 배경이 되었다가 새로운 생명의 색이 나타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상념들이 없어지지 않는 가운데 나뭇꾼이 내려오던 곳, 궁노루가 물가를 찾던 곳, 녹슨 철조망이 다시 되살아나고 땅에 묻힌 백골들이 자신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기도 한다. DMZ의 흙 한줌 나무 하나에 그런 아픔과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 땅이 이제는 세계인들에게도 교훈의 장이 되고 있다. 우리들은 그 아픔을 이기고 당당히 세계 속으로 일어서 떨쳐나갔다. 그러기에 이런 우리만의 경험을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보라고 영어와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을 해서 같이 실었다. 국제 시화집인 것이다. 625 전쟁, 우리 땅에서 벌어진 동족끼리의 전장(戰場)에서 60년을 넘게 이어져 오며 세계에 그 아픔을 전하는 불멸의 노래인 '비목(碑木)', 그 속에 담겨진 민족의 아픔과 극복의 연작시집의 이름은 이랬다: 'DMZ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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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나의 역사전쟁'동국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윤명철 교수는 행동하는 역사가이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 직접 몸으로 답사해서 그곳에서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발굴하는 방식이다. 윤명철 교수가 지난 해부터는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맡으며 중앙아시아 역사에 한국사를 접목하는 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침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윤명철 교수를 (주)국악신문 이동식 대기자가 만나보았다. Q. 오랫만입니다. 최근 근황이 궁금합니다. A. 지난해 7월부터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 있는 국립대학교 고고학과 초청 정식 교수로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과목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여러나라의 문화연관성이고요 가을 학기부터는 중앙아시아의 고대 종교, 신화 등을 강의할 예정입니다. Q. 벌써 30년 전인가요, 윤 교수님은 젊을 때 똇목을 타고 동아시아 바다를 직접 건너간 것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의 중요 지역을 답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동안 어느 지역을 다니셨습니까? A. 아이구! 뗏목 탐험은 정말 젊을 때 일이고요, 몇년 전에는 경주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투르키에의 이스탄불까지 육로로 자동차 탐험을 한 적이 있고요, 배를 타고 유럽 쪽 북해를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를 잇는 트핸스 시베리아 열차 탐사를 24일 동안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Q. 왜 그렇게 많이 다니시는 것입니까? A.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지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유라시아 대륙인 만큼 거기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역사의 풍부한 원형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아득한 시원의 시간동안 민족의 형성과 이동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의 생존 조건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역사와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파악해서 우리 역사를 재구성해내기 위함입니다. 먼저 현장을 가야 공간의 범주를 알 수 있고, 생태환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요. 특히 만주 일대는 현장에 가지 않으면 모릅니다. 저는 고조선을 원조선이라고 부르는데, 원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알려면 만주지역을 알고 생태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생태환경이 다르면 생산양식이 달라지고, 생산도구가 달라져요. 생산도구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생활양식이 달라지고, 또 민속,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철학이 달라지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시스템, 정치가 달라지는 것이죠. 그러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먹고 살았고 어떻게 적과 싸웠으며 그들의 신앙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역사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게 되죠.. Q. 중앙 아시아에서 강의를 하시려면 언어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설마 현지어를 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고? A. 아, 물론 제가 현지어를 능숙하게 하는 것은 아니고요, 다행히 한국에서 오랫 머물었던 유능한 현지인이 통역을 해주셔서 가능합니다. Q. 여전히 궁금한 것은, 아직 긴 기간은 아니지만 타국에 가 계시면 힘들텐데요? 윤: 네 그렇지요. 다행히 집사람이 같이 가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우리 70년대처럼 정말 친절하고 정이 많아서 집사람이 아주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기회가 돠면 와서 살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그 나라에서 우리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어떻습니까? 윤: 관심이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한국은 자유시장 경제로 성공한 사례인데, 그 나라는 소련이 무너진 뒤에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인 만큼 한국의 경험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또 의외로 한국을 다녀온 노동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수도 같은 데서는 스무 명 중 한 명 꼴로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신 분들이 있는 곳도 있어요. 이곳 분들이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한국에서도 좋아했고요, 돌아와서도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저희를 환영하고 뭐라도 도와주시려고 해서 고맙습니다. Q. 사마르칸드라고 하면 아프라시압의 벽화무덤 속에 있는 한반도의 무사 그림이 유명한데,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인인가, 신라인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A. 아프라시압은 6~7세기 그 일대의 수도로서 번성하다가 사마르칸드로 중심무대가 옮겨진 곳인데, 당시 상황으로 보면 고구려인이라고 봐야지요. 고구려의 전성기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이후라고 본다면 5~7세기인데 당시 중앙아시아의 주인공은 소그드인들이고 이들이 초원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유럽과 동아시아, 중국 당나라를 잇는 핵심 교량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와도 그때부터 교류가 있었고요. Q. 그렇다면 단순히 돈이나 물자만 오고갔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A. 그렇습니다. 당나라 역사에 소그드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유명한 이태백의 시에도 이들이 추는 춤인 호선무(胡旋舞)가 등장할 정도인데, 그들을 통해서 음악, 악기, 춤, 서커스, 그리고 음식재료와 조리방법 등 삶의 곳곳에서 교류가 이뤄졌다고 보여집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고구려도 이런 문화의 유입이 많았고요, 고구려 벽화 고분을 보면 그런 장면들이 많이 있지요. 저는 그런 교류의 역사도 현지에서 더 새롭게 발견하고 규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우리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서쪽 문화가 들어오고 중국에서는 비단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더 북쪽 아닌가요? A. 근세 유럽인들이 실크로드를 답사하면서 사막 남로와 북로를 개념화했습니다만 저는 그 문물의 이동과 교류의 핵심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길을 통해 이뤄졌다고 보고 '오아시스로드'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자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막이건 초원이건 오아시스가 없으면 길이 열리지 않으니까 이제는 넓은 시각의 오아시스 로드라는 측면에서 이 지역 역사를 다시 들여다 보고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업을 제가 하고 있고요. Q. 우즈베키스탄에서 TV출연 등을 많이 하신다고 하던데 A. 네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문명의 길목의 주인공이었던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나서서 알려드리고 있고요. 이들을 통해 우리와도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말하지요. 나아가서는 그 옆에 투르키예인들의 나라와 역사가 있었고 이들 역시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많이 연결돼 있어서, 그들의 후예인 투르키에 인들이 우리를 형제나라라고 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한 역사와 문화의 교류를 새롭게 찾아내고 의미를 알리는 일입니다. Q. 하실 일이 엄청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해 초에는 미국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신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A. 네 지난 2월 예일대 특강 때에 역사에 대한 저의 지론인 ‘ 행동학’을 강조해서, 참석자분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우리 역사를 잘 모릅니다. 그들에게 "우리 민족은 역동적인 노마드 문화와 농경 정착문화가 복합된 모스테빌리티(Mostability)형 문화”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또 만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고구려 시기 중만주까지는 직접 통치하고, 그 너머의 지역은 해당 지역 사람을 통해 영향을 행사하는, 그러니까 여진족, 말갈족들이 용병으로 동원되었죠. 하지만 그 북쪽인 서북 만주 같은 경우는 간접 영향권일 뿐이에요. 이들 북방민족이 중국으로 건너가 요, 금, 원, 청과 같은 정복국가를 세웠지만 우리는 요동과 한반도를 고수했어요. 우리가 힘이 있지만 그 쪽을 굳이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홍익인간’의 개념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21세기 인류가 지향하는 문명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이 고대부터 만주와 한반도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진출한 해륙국가라는 ‘동아시아 지중해 모델’에 대해 설명을 했고 거기에 참석자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떤 분은 ‘아시아의 바이킹’으로 불렸던 발해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해양문화의 특성은 보존되지 않는 것인데, 발해의 조선술에 관해서도 그 점을 지적하면서 발해의 배는 바이킹의 배와 비슷했을 것이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Q. 밖에 나가계시면서 국내활동도 하신 것 같던데, 김지하 선생을 추모하신다고요? A. 추모를 넘어서서 그를 사상가로서 재조명하는 작업입니다. 지난 5월 초 1주기를 맞아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대한 학술포럼을 연 바 있습니다. 김지하 씨는 민주화운동가, 혁명가, 시인, 사상가 등 다양한 명칭으로 한국 현대사에 큰 위상을 남겼고 평생을 인권, 자유, 양심, 민족, 문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했으며, ‘생명사상’이라는 자기의 논리와 사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김지하씨는 이제 사상가로서 다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그의 특정 발언이나 행위, 선택에 대해 굴레를 씌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지하 씨는 소년 시절부터 말년 혹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관된 삶을 살았다. 진실을 찾으려 했고,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 소명감이 강했습니다. 지금 한국인에게는 끝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실현시키는 실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김지하의 사상과 문학, 사회적 삶은 미래 세대의 모델로서 필요하고요, 지금 우리 한국 상황은 비정상적이고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를 극복할 ‘사상’과 이를 이끌어 갈 사상가로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Q.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면 강의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여러 행사를 진행하신다고요 A. 네 한국에서 근무했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초청해서 친목을 다지자는 목적으로 '코리안 데이’를 준비해서 10월19일에 사마르칸트시에서 엽니다. 사람과 음식, 음악, 풍습 등을 교류하는 자라입니다. 또 한국에서 발칸반도 99일간 99개국을 찾아가는 '유라시아 플로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플로우(flow)는 흘러가다라는 뜻이 있죠. 바로 우리 민족의 풍류 사상을 유라시아 플로우라고 바꾼 겁니다. 그래야 서양인에게 설명이 가능하니까요. 신라 대학자 최치원이 "우리 민족에게 유‧불‧도(儒佛道)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현묘지도(玄妙之道)가 있다”라고 했던 바로 그 풍류입니다. 당연히 풍류는 홍익인간 사상이죠.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름이잖아요. 물류죠. 그리고 플로우는 종횡무진을 뜻합니다. 그동안 실크로드, 초원의 길이라고 하나의 길, 횡단 길이라고 보았지만 아닙니다. 문명은 종단로도 있었어요. 그런 네트워크를 찾아가는 작업니다. Q. 윤 교수님은 천산 알타이 등 중앙아시아 지역 탐사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제가 중앙아시아를 중요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는 중앙아시아가 우리의 21세기 생존전략의 주무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원의 보고이고요 무한한 시장이 열릴 곳이기도 하고요. 그것보다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의 원형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문명 이전 인류문명의 모델로서 천산과 파미르 고원일대의 삶의 조건과 거기서 펼쳐지고 지켜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 살려보는 것입니다. 제가 추진하는 '유라시아 플로우'도 그 일환입니다. 단순히 탐방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사람들과 만나고 하나가 되는 페스티벌도 열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역사의 시발인 원조선을 다시 보고 중앙아시아의 흥먕성쇠가 우리 역사와 어덯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고 이들과 우리의 인연을 현재로 이어주는 것입니다. Q. 아, 말씀이 끝이 없습니다. 나중에 또 듣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우리민족에 대해 어떻게 보시고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열어가면 좋은지 듣고 싶습니다. A. 옆 동네인 키르키즈스탄에서는 K-팝 경연대회를 일 년 마다 열고 있는데 참가팀이 100팀이 넘고 수준도 놀랄 정도입니다. 이렇듯 우리 문화의 힘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힘은 역동성과 다양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고구려문화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문화는 단순히 연결 시켜주는 브릿지, 혹은 교량이 아니라 다시 가공하고 키워내는 교차로 입니다. 최근의 우리 한류가 그걸 말해주고 있지요. 우리 문화는 이제 중앙아시아를 바로 가로 질러 유럽까지 이어지는 문화오아시스로드의 동쪽 기점이자 샘입니다. 이제야말로 문명사적으로 말하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는 것이지요. 이제 이러한 지정학적인 문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폐쇄적이지 않은, 개방적인 생각으로 전 세계를 담아 새로운 문화로 다시 키워내야하는 시대입니다. 좁은 국내, 정치의 잘못된 연못에서 나와서 세계에 맑은 물을 집어넣어주는 문화창조의 중심지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마음을 넓히고 눈을 멀리 두어야할 것입니다. Q. 역사학자로서 밖에 나가서 느끼는 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A. 역사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역사학자들이 학문적 사대주의와 연구방법론에 대한 교조적인 자세에서 탈피하고, 개방적이고 자신있는 태도로 현실과 역사에 책임감을 지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일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역사학과 역사학의 본령(本領), 또 우리가 지향하는 역사학이 다른데 우리는 일본이 가르쳐준 것이 역사학의 본령이라고 오해했던 측면이 많습니다. 주체적인 동아시아 역사상을 확립해야하고, 지구문명사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한국적인 견해와 해석도 자신있게 펼칠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즉 ‘동아시아 담론’ ‘지구담론’을 펼쳐야 하며, 특히 고대사연구를 통해서 민족문화의 원형과 인류의 발전모델로 찾아내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Q. 좋은 말씀 많이 잘 들었습니다. 긴 시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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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 퇴계의 생각은?안개 걷힌 봄 산이 비단처럼 밝은데 진기한 새들은 서로 화답하며 온갖 소리로 우네 그윽한 곳 요즘은 찾는 손님이 없다보니 푸른 풀이 뜰 안에 마음껏 났구나 霧捲春山錦繡明 珍禽相和百般鳴 幽居更喜無來客 碧草中庭滿意生 1565년 봄 퇴계 이황은 4년 전 완공된 서당에서 봄을 맞으며 서당 앞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신이 머물며 수양과 교육에 진력할 좋은 땅을 구해 5년 여 공사기간 끝에 마련한 도산서당의 앞 뜰에 봄이 왔음을 시(詩)로 표현해 본 것이다. 퇴계는 봄날의 아침 풍경에 이어 한 낮을 묘사하는 시도 지었다. 뜨락에는 비 갠 뒤에 고운 볕이 더딘데 꽃향기는 물씬물씬 옷자락에 스미누나 어찌하여 네 제자가 모두 제 뜻 말하는데 시 읊고 돌아옴을 성인이 감탄했나 庭宇新晴麗景遲 花香拍拍襲人衣 如何四子俱言志 聖發咨嗟獨詠歸 아침이 한 낮으로 바뀌면서 살짝 비가 온 마당에 햇빛이 서서히 들고 있고, 비에 씻긴 풀과 꽃 향기가 옷자락에 스며든다는 것이다. 앞 두 줄은 그런 뜻인데 뒤의 두 줄은 무슨 뜻일까? 네 명의 제자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중에 유독 시 읊고 돌아온다는 말에 대해 성인(공자)가 감탄을 했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내용의 시다. 무언가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퇴계가 무심코 이런 귀절을 넣어 시를 지을 분이 아니다. 무슨 뜻일까? 알아보니 귀절의 배경에는 공자가 네 제자와 나는 대화가 있었다. 공자는 어느 날 자로(子路)와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네 제자에게 차례로 각자의 포부를 말해보라고 하니 자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차 천 대의 군비를 갖춘 제후의 나라가 강국 사이에 끼어 군대의 침략으로 인한 전쟁으로 피폐하여 기근이 덮쳐 곤궁에 쳐했다면 제가 그 정치를 맡아 3년 만에 다시 활기를 되찾게 하고, 도의를 존중하는 나라로 키워보고 싶습니다. 염유(冉有)가 대답했다. 사방 6, 7십리 또는 5, 6십리 쯤 되는 지역의 정치를 제가 맡아 3년 만에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보이고 싶습니다. 공서화(公西華)가 대답했다. 저는 꼭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희망을 말씀드리면 종묘의 조상 제사와 빈객이 모이는 회동(會同)의 제사 때에 단(端)의 예복을 입고 장보(章甫)의 관을 쓰고 의례를 보좌하는 소상(小相)의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증점(曾點)은 그때까지 슬(瑟)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튕기고 있다가 퉁하고 내려놓더니 자세를 고쳐 대답했다. 춘삼월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나가서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올까 합니다. 말하자면 자로는 강병(强兵)의 나라, 염유는 부민(富民)의 나라, 공서화는 예악(禮樂)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고 증점(曾點)은 기수라는 데서 물놀이하다가 바람 쐬고 놀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공자가 다른 제자들 말에는 빙긋이 웃기만 하다가 증점의 말은 그것을 인정하고 허락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퇴계는 갑자기 그의 시에 왜 이 구절을 집어 넣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주희(주자)는 다른 제자들이 섣불리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만 증점은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가치관과 자세에 대해 올바르게 천명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다른 제자들이 남을 부리고자 하는 의욕을 이야기했지만 증점은 자기를 다스리고 싶은 그 마음이 표현한 것이며, 그것을 공자가 높이 인정한 것은 증점이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그 속에서 자신이 취할 태도를 정해 자기완성의 길로 가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어서 그것이 곧 올바른 군자의 길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퇴계가 봄날의 시에다 이런 뜻을 담은 것은 퇴계가 고향인 안동 도산에 내려와 서당을 열고 생활할 때의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퇴계는 친형님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목숨을 잃자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완전히 굳혀 1561년에 서당 건물을 완성했고, 서당 주변에는 집 옆의 샘을 살리고 연못부터 울타리, 화단까지 직접 디자인했고, 집 앞 오솔길의 입구와 낙동강 변의 천연대와 천광운영대까지를 찾아 다듬어놓음으로써 서당 일대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정리해놓았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학문과 수양과 교육을 시작했다. 퇴계는 그렇게 도산서당을 세워 거기에서 증점이 말하고 공자가 인정한 학문의 방법론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한 것이라 하겠다. 증점의 일화는 세상을 자기가 다스리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것보다는 먼저 자기부터 갖추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퇴계는 선비들이 ‘도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다(明道救世)’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은 반드시 관료의 삶을 사는데 있지 않고, 자기 수양을 해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인용한다. 그것이 도산서당으로 들어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려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참된 수양과 학문과 교육으로 진정한 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자는, 이른바 ‘물러섬(身退)의 학문’이 퇴계의 속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학자들도 모두가 논어를 읽고 주희를 공부했기에 공자가 증점에 대해 평가한 이 부분을 다 공부하고 주희가 말한 이런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인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은일적 삶을 항상 즐기면서 산다는 것은 때론 관료적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기에 세속에서의 성공과 명성의 유혹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러나 퇴계는 겉으로만 물러가는 척하는 풍토를 아쉬워하며 진정으로 자연으로 돌아와 공자의 속 뜻, 공자가 말한 요순의 세상을 위한 방편을 몸으로 체현하자는 것이며, 그 말을 봄에 대한 시의 두 번째 연(聯)에서 말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하루가 지나는 과정을 쓴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와 수양의 길을 제시하고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퇴계는 학문과 덕행을 힘쓴 옛 성현들의 삶을 시 속에 녹여 그들의 길을 함께 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퇴계가 도산에 들어온 이유이자 까닭이라고 생각하고 필자의 최근 저서 『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은』에서 밝혀 보았다. 많은 분들이 학문을 하고 있지만 세상은 왜 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운가?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라면, 학문을 하신 분들은 진실해야 하는데 왜 온갖 요설과 사설이 난무하고 세상이 어지러워도 학자들이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학문을 하는 분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고,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하다는 퇴계의 생각을 이 멋진 봄에 다시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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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칠십 서예전을 기대한다.중진 서예가이며 왕성한 활동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서예가 중 한 분인 한얼 이종선씨가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서예전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전시공간 코트(Kote)에서 11월 17일부터 연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매주 한편 씩 2년이 넘게 발표하면서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과 아취를 널리 확산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회를 앞두고 이동식 문화대기자가 이종선 씨를 미리 만나보았다. Q. 오랜만입니다. 일년 만이군요. 지난해 이맘 때 [우리음악사설] 전 이후.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요? A. 네, 쑥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올해 칠순 고희(古稀)입니다. 나이가 요즘 말로 7학년으로 접어들게 되었기에 그동안 제가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가를 저 자신도 돌아보고 또 서예를 좋아하시는 분들과도 함께 보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칠십이이’라는 표현은 ‘칠십이구나’ 혹은 ‘칠십일뿐이다’ 등으로 풀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이제 고희, 칠십인데 어느새 칠십이지만 다만 이제 칠십일뿐이네’ 라는 뜻도 들어가 있습니다. Q. 그럼 어떤 작품들이 선보이는가요? A. 전시되는 작품이 150여 점이 되니 조금 많지요? 저로서는 저의 서예세계의 현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저의 서예 역정과, 그리고 서예의 이상향을 찾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앞으로의 갈 길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전시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서예작품의 모든 분야, 여기에는 한글작품과 한문작품 국한문 혼서작품 및 사설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Q. 이 선생님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625 전쟁이 막 끝나기 전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어릴 때 필재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가 한창 인생을 시작하던 청년기에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서예를 만나서 시작했으니 조금 많이 늦었지요. 늦게 시작했지만 여러 선생님들, 특히 소헌 정도준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전에서 초대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서예의 본원이랄까 뿌리랄까, 또 한국인으로서의 서예의 뿌리를 생각하다 보니, 한글의 뿌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자형, 흔히 판본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 있다는 자각이 들어 한글서예 작업에 매진하게 되어,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다만 판본체는 각이 진 엄격한 고딕체인데 이런 정형적인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조형, 새로운 장법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 좋다고 하신 분도, 나쁘다고 하신 분도 있지만 그쪽으로 저는 끊임없이 천착을 하다 보니 지금 같이 저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었지요. 저로서는 이것이 저만의 특징적 예술세계라 하고 싶습니다. Q. 최근 쓰신 "뒷동산 도라지꽃"으로 시작되는 '횡성아리랑' 이란 작품을 보니까 맨 위에는 한글 판본체와 광개토대왕체가 섞여 있으면서 마치 도라지꽃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기대어 피어있는 형상의 느낌이 오고, 그 밑의 사설에는 행서로 간 궁체가 받쳐주고 있어서 변화가 있는데 한글서체도 일정하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A. 저의 한글서예는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은 궁체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여 나온 민체흘림이고요, 훈민정음 원래의 정격 고체, 이것을 제가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시 쓴 판본류가 있습니다. 궁체는 여성적인 곡선과 우아함이 특징인데, 저는 여기에 꾸미지 않는 강직한 세로획을 첨가하여 강건함을 표현합니다. 근래의 궁체가 부드러운 곡선에 집착하여 획력이 부족해지는 면을 보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민체흘림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한 후에 한글의 자모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대입시켜 만든 새로운 획과 조형입니다. 저는 한글서예를 하지만 한문서예, 그 중에서도 안진경의 해서와 행서를 좋아해서 이를 저의 한글서예에 녹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진경은 강직한 분으로 그의 일생도 등락을 거듭했는데,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꿔놓아 사람들이 그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요소들을 한글민체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바탕위에 대소, 강약의 변화와 판본류인 한문고체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법을 적용해 한글흘림의 영역을 확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체라고 부르는 판본체의 글씨 영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엄격한 형태를 많이 연습을 했고, 특히 한글고체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호태왕비, 즉 광개토대왕비를 제가 좋아했기에, 그러한 질박미(質朴美)와 호방함을 나름 구현해냈습니다. Q. 한글서예의 표현세계가 엄청 넓어졌다는 말이군요 A. 네, 저는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의미전달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자(漢字)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 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고 있지요. 다만 이러한 서체에의 도전은 획들의 사용으로 인해 장력이 충돌이 생길 수 있는데, 위에서 흔들린 것은 밑에서 잡아주고, 좌에서 넘어진 것은 우에서 받쳐주고 있고, 위에서 커진 것은 아래에서 작아지며 전체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Q. 한자 한문을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한글 서예의 의미가 더 커지고 있군요. 그런 분들도 한글의 조형세계가 넓어진 것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A. 최근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개인의 취미를 살리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후에 서예를 찾는 분들이 많아져서 저희는 기쁩니다. 그런 젊은 분들중에는 굳이 어려운 한자 아니라도 한글 서예로 여러 가지 많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Q. 한글 서예는 외국인들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A. 그동안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그래도 한자서예가 모든 서예의 바탕 아닙니까? 또 기본으로도 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A. 물론입니다.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만큼 표현 세계가 깊고 넓은 만큼 공부하는 맛이 나지요. 특히 서예는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 문장 전체를 통해서 서예를 하는 사람의 인격과 격조와 삶의 자세 같은 것을 느끼게 하니 그만큼 멋진 예술이지요. 한자 서예를 오래 연마하면 글씨와 사람이 하나가 되지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꼭 이런 저런 것을 쓴다는 느낌도 넘어서야 진정한 서예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하여금 붓을 잊게 하고, 손으로 하여금 글씨를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면 글씨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진다.” Q. 지난 번에도 궁금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만? A. 단순히 글자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서예는 그것이 아니지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예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이 선생님의 한자서예 세계도 워낙 다양하고 광대하다는 평이 있어서, 이번 전시회에 어떤 작품이 보여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A. 네 지난 시간 저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해서 이룬 것도 없지는 않지만 서예라는것은 끝이 없는 길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 가야할 길이 많고도 길다는 뜻입니다. 고희라고 하지만 서예는 더 많은 변화와 신 개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칠십일 뿐이다’라는 뜻의 전시회 제목을 사실, ‘이제 겨우 칠십일 뿐이다’ 라는 말로 바꿔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전환점으로 삼고 싶어서 저의 서예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Q. 이번 전시회에 동문, 후배들의 작품도 나온다고 하지요? A. 제가 소헌 정도준 선생께 배웠고 저와 같이 동문 수학하면서 동고동락한 친구 겸 후배들이 ‘오거서루(五車書樓)’ 회를 만들어 같이 또는 개별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 하고요, 그동안 서로 방문 교류를 해 온 중국 소흥(紹興, 샤오싱)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 5명이 축하의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쨌든 고희전인데 마침 이분들도 전시장에 오셔서 고희연을 열어주신다고 하니 저로서야 영광이지요. Q. 이번에 전시하는 곳이 코트라는 곳인데 좀 생소한 장소군요? A. 인사동의 남쪽 입구인데 서울이 재개발로 옛모습을 다 잃어가는 상황에서 여기는 서울 종로의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여기 젊은 여사장님이 이런 역사적인 공간을 예술의 메카로 지켜내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고요. 그래서 이곳 넓은 공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와 보시면 아니 서울에 이런 공간이 남아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넓은 공간에서 서예의 역사를 함께 보는 것이지요. 전시는 17일에 시작해서 25일까지입니다. 많이 와 보시길 바랍니다. Q. 다시 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회의 성공을 빌겠습니다. A. 네 감사합니다. 꼭 와서 보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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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사람은 만나야!"노래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사랑을 받는 가수들에게는 목소리가 가장 큰 매력일 것이고 그런 사람을 수식하는 말로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가인, 노래손님이라는 가객, 노래왕이라는 가왕 등의 애칭이 있는데, 그런 등급을 떠나서 진정으로 가수에게 붙여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은 소리꾼이 아닌가 한다. 원래는 판소리를 하는 분들에게 붙이는 호칭인데, 대중가수에도 이런 호칭을 붙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넘치는 분이 있다면 나는 단연코 장사익 씨를 들고 있다. 아마 여기에 시비를 걸 분들은 많지 않을 듯하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 외롭고 슬프고 힘들 때를 족집게처럼 집어내어 노래로 위로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소리꾼 장사익, 해마다 전국을 돌며 노래로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던 장사익 씨가 코로나19 사태로 몇 년 동안 우리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10월 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를 연다고 한다. 4년만의 음악회다. 장사익이 벌일 소리판의 타이틀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였다. 타이틀을 접하는 순간 문득 간절하게 장사익 님, 사람 장사익을 만나고 싶어졌다. 장 선생과는 사람과 사람으로 몇 번 만난 귀한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국악신문에 그 분 만나서 4년만의 음악회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제의하고는 다짜고짜 연락을 취해 장 선생 집을 찾았다. 원래는 아무리 전직이라고 하더라도 기자들에게 집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마침 세검정 근처에 있는 집으로 바로 오란다. 비탈을 깎아서 조성된 주택가를 땀을 흘리며 걸어 올라가니 미리 나와 있다가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신다. "좋아하는 시인 마종기의 시 중에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는 구절이 있어요.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 그 싯구절을 읽듯이 외우듯이 그냥 입으로 중얼거리고 흥얼거리곤 했는데, 그동안 여러 분들을 직접 만나지를 못했으니 이 구절처럼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졌지요. 물길이 트이면 마음도 통하고 그러면 친구도 되고 슬픔도 나눌 수 있잖아요? 그리고 행복해지고요. 제가 흥얼거리는 것이 노래가 되기는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른 지 30년인데, 원래 제 노래가 그런 것이니 이런 노래도 들려드리고 싶고, 그렇게 모두가 사람으로 만나 마음의 물길을 트게 하고 싶어서 준비를 했는데, 다행히 코로나도 마침 많이 물러가네요. 오늘 아침 맑은 가을 하늘처럼 말이지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좋아하는 노래에 꽂히는 사연이 있다. KBS초대 북경 특파원을 하고 돌아온 1996년에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장사익 공연을 객석 맨 뒤에서 본 순간 나는 이 걸쭉한 목소리, 우리의 북을 반주로 하는 그의 긴 호흡의 영창(詠唱)에 빠져들고 말았다. 힘든 삶을 살다가 4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게 된 그의 삶의 족적도 노래의 감동을 더해주었다. 곧 CD를 사서 매일 밤 10시 회사 일이 끝나고 집까지 가는 동안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로 차 안에서 듣고 또 들었다. 찔레꽃, 국밥집에서, 꽃, 섬, 그리고 하늘 가는 길 등등. 특히나 하늘 가는 길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으로 나는 몸과 마음을 풀면서 소리꾼 장사익의 영원한 팬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저는 시인들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데요, 이번에도 마종기 시인뿐 아니라 서정춘 시인의 "11월처럼”, 허형만 시인의 "구두”, 한상호 시인의 "뒷짐”을 노래로 만들어 부릅니다. 모두 우리들 삶 구석 풍경을 그린 멋진 시들입니다. 우리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면 시인들은 시가 곧 노래지요. 그런 시인들의 시를 보면 시인들이 가수고, 저는 목소리를 빌려 그 시를 전해주는 역할이지요. 시인들의 시에는 기가 막힌 시어(詩語)들이 있잖습니까? 그 격조 있고 의미 있는 세계를 노래로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처럼 노래를 좀 못해도(웃음), 좋은 시는 그 자체로도 먹고 들어가잖아요.” 아름다운 시로 장 선생은 미당 서정주의 ‘황혼길’을 예로 든다. 이제 나이가 들어 삶을 마감하는 것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이제 잠이나 들까”라고 해서, 우리의 삶과 죽음을 그렇게 깔끔하고 진하게 갈음해 줄 수 없단다. 그런 시인들이 온 힘으로 찾아낸 시어들을 노래로 들려주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하늘 가는 길’이란 노래도 바로 그런 경지일 것이다. 그의 노래에는 고된 삶이 있고 그 삶을 넘어선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은 힘들고 외로운 삶의 연장이겠지만, 그것을 노래로 넘어서서 모두에게 해원(解寃)의 평화로운 세계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에게는 한이 많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우리들은 한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그것을 부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진도 사람들의 흥타령 같은 것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삶의 모든 힘든 것을 풀어버립니다. 민요는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이 맺히면 원(寃)이 되는데, 이 원을 풀어주는 것이지요. 그게 곧 해원(解寃)입니다. 우리들의 노래에는 이러한 힘이 있지요. 저도 그런 삶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지난 6월 세계적인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 군이 인터뷰에서 우륵의 가야금 소리에서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경지를 언급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청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을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지만 사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란 시에 짙게 담겨있는 이런 정서처럼, 슬프더라도 드러내 슬퍼하지 않는 경지가 곧 우리 민족정서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장사익의 노래에서 바로 그런 정서를 공감하게 한다고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인의 노래일 터이다. 장 선생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창밖으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바탕 소나기가 온다. 멋지게 마련한 창 밖 수반(水盤) 위로 수많은 물방울 들이 떨어져 수 십대의 팀퍼니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갑자기 눈 앞의 먼지를 다 씻어가고는 곧 햇살이 나온다. 2004년부터 2006년 미국 순회공연에서 우리 동포들의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게 한 것은 유명하다. 어떤 분이 와서 실컷 울고 나서 속이 시원해졌다며 사이다를 한 박스 마신 것 같았다고 하더란다. 우리 말을 모르는 미국 음악계에서도 "당신 노래의 뜻은 모르겠지만 당신 노래를 들으니 바로 한국의 노래임을 알겠습니다.”라는 반응을 얻어낸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장사익의 노래에서 블루스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는데, 거기에 덧붙여 텁텁한 그의 목소리가 막걸리를 닮았다는 말에 ‘막걸리 블루스’가 아니냐고 했더니 장 선생이 펄쩍 뛴다. "저는 술 담배를 전혀 못합니다. 아니 안합니다. 그러니 막걸리 블루스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요. 그냥 우리 한국인들이 편하게 부르던 우리들 식의 노래를 할 뿐입니다” 우리 한국의 노래는 중국이나 일본과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바로 막걸리로 대표 되는 술, 그리고 된장으로 대표 되는 식재료와 식습관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된장과 마늘과 고추를 즐겨 먹는 한국 사람들, 그들이 나고 자라고 죽으며 보고 듣고 느끼고 함께 사는 이 땅, 그것이 바로 한국의 노래인 것이리라. 그러기에 우리 전통음악에는 징이 있고 북이 있고 꽹과리가 있고 꺾음과 풀림과 추임새가 있다. 그것들이 바로 한국의 음악이자 한국의 노래이다. 장사익은 대중가수라고 하지만 그의 노래에는 전통의 모든 요소들이 들어있고 녹아있어 대중음악이니 국악이니 하는 구분이 의미가 없다. 그런 그의 소리는 때로는 가슴을 후비고, 슬픔과 즐거움, 그리고 간절함 그 자체다. 어린 시절 동네 뒷산 공동묘지에서 하루 30분씩 소리를 질러 목이 트인 데다가 마흔다섯 데뷔 전까지 전자회사·가구점·독서실·카센터 등을 전전하면서 힘들게 살아온 삶의 경험이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소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소리로 인정받는 것이리라. 사실 우리들이 의식을 잘 하지 못하지만 장사익의 노래는 박자가 잘 안 맞는다. 스승으로 모셨던 타악기의 명인 흑우 김대환 선생이 이에 대해 "박자 없는 노래”라고 한 이유이다. 가끔씩 박자가 늘어지고 음정이 덜 올라가기도 한다. ‘찔레꽃’ 노래가 그랬고 ‘섬’이란 노래도 그렇다. 그것은 그의 노래가 자연발생적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원래 우리들의 민요가 그렇게 생겨난 것 아닌가? 기분에 따라서 흥얼거리다가 거기에 음정이 생기고 박자가 생기는 것이고, 부르다 힘이 들면 잠시 쉬며 가는 것이고... 그런 게 우리 노래다. 엄격한 박자와 음정을 지키는 서양음악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그 자신이 마시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막걸리의 특성 그대로다. 그런 소리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이번 공연에 트럼펫을 하는 원로 음악인 최선배 씨가 나온다. 그 얘기를 하니 눈이 반짝이신다. "우리의 1세대 재즈음악가로 유명한 분이지요. 제가 어려울 때 삶을 이끌어주시고 음악에 눈 뜨게 해주신 분 중 한 분입니다. 1970년대 종로구 공간사랑에서 고 김대환선생과 한국적 프리재즈를 실험했고 그 무렵 김덕수 사물놀이, 공옥진의 병신춤이 그를 이어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공연예술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홍대 앞 지하 공연장에서 연주도 오래 하셨고요. 선배 음악인들이 먼저 가셨지만 아직 현역의 소리를 내주신다고 해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 장 선생으로서는 이번 공연이 부활의 날개짓이라 할 수 있다. 젊을 때와 달리 잦은 공연과 연습으로 성대가 붇다가 굳어져 좁아지는 등 소리를 내기 힘든 상태가 되어 3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최근 코로나 사태로 쉬면서 목도 자연스럽게 되살아나 이제 다시 옛날의 소리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단다. 다만 높은 고음은 예전처럼 올라가지 않지만 이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조금은 편하게 노래를 하겠다고 한다. "우리네 삶이 그렇지요. 쉬어가라는 것이지요. 목이 갈라지는 것도 천천히 가라는 것 아니겠어요? 그동안 너무 목을 많이 썼기에 그런 것인데, 마침 코로나로 목을 충분히 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장사익 씨는 공연도 공연이지만 그의 노래를 듣고 싶은 자리라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찾아가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분 중에 자신의 장례식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신다는 말을 듣고는 기왕이면 돌아가시기 전에 들려드리겠다고 곧바로 달려가 노래로 행복하게 돌아가시게 해 드렸다고 귀띔을 한다. 바로 그의 노래 ‘하늘 가는 길’이 일찍 열어 보인 대로 죽음은 삶의 연장이고 그 죽음을 담담히 아름답게 맞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라면 장사익 씨의 노래가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서로 마음의 물길을 트겠다는 이번 공연은 서울을 시발로 전국을 돌 게 될 것이다. 이제 코로나로 거리두기, 집합 금지 등의 제한이 풀어지면서 야외에서 서로 입을 가리지 않고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 부대끼며 슬픔과 기쁨, 용기와 믿음을 나누는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었기에 장사익의 소리, 노래가 듣고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사는 세상다운 세상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장이 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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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ef Reporter Interview] Chair professor Park Beom-hun, ‘Finding New Terrain in Korean Music’In March of next year, the Department of Korean Music will begin their courses In the middle of August, a man located in his professor’s office is thinking hard about something and thus unable to pay attention to the changing weather outside his window. This man is a musician of Korean traditional music. But also a composer, a music conductor, a Korean traditional music scholar, a university president, an educational and cultural policymaker, and once again returning as a Korean traditional music scholar while looking after his professor’s office, chair professor Park Beom-hun. Recently, Park Beom-hun has been busy with the preparations for the opening of the ‘Department of Korean Music’ at Dongguk University Seoul Campus, deciding on the full-time professors and chair professors, an administration, and so forth. Chief reporter Lee Dong-sik looked for Park Beom-hun, someone he regards as a close acquaintance since the time that Lee was a reporter at KBS. During the 80-minute interview, it became clear that the topic of conversation was the promotion of Buddhist music as new terrain in Korean music by the religious university. From this point onwards, let us listen to his thoughts. This article was translated by Linda Pauw (intern reporter) Q. Chief reporter Lee Dong-sik – Instead of going on vacation what are you doing in this hot weather? A. Chair professor Park Beom-hun – A pleasure to see you. This fall semester we are checking various matters, such as whether the received applications of students for the opening of the college of arts Korean Music Department are going according to plan. Opening a new department is a lot of work. Our department will accept all new students via rolling admissions and there is exactly one month left for this. Creating the content and means of education of the subjects that fit the new department’s vision and purpose of establishment, the confirmation of professors, but also deciding the factors of the screening process, and becoming acquainted with the defined evaluation criteria et cetera are all tasks that need to be confirmed and examined one by one. Q. Lee – Dongkuk University originally hosted their Korean Music Department on their Gyeongju Campus but the news that a new department is being created in Seoul is unexpected. A. It is a bit embarrassing to admit but if art-related departments are not operated in places where associated artists come together, inevitably, problems such as the securing of a faculty or students’ classes will arise. Also, our university is a religious university established by the Jogye Order of Buddhism but when the department was still located in Gyeongju, there was an inadequacy regarding the element of promotion of Buddhist music. Therefore, the university authorities should research and teach the foundations of Buddhist music more in-depth for a new terrain of Korean music to open, this can be achieved by suggesting the establishment of a Department of Korean Music in the middle of Seoul as a way for outstanding artists to be more involved as teachers. As you are well aware, the number of universities in the metropolitan area cannot be increased. Thus, by developing the then slightly lacking research and cultivation of Buddhist music in an era in which the world welcomes Hallyu, our university, as a religious university, thought hard about the viewpoint in which we have to bring up the talents of Korean music that our country is demanding, and decided to create a Korean music department in Seoul by turning around the existing capacity of employees. Q. Earlier, you mentioned that we can cultivate our music through Buddhist music, but the Buddhist music that we know is charged with a specific religious undertone, for instance, Buddhist hymns and chants, Buddhist prayers, and the song ‘Hoesimgok’ that became famous through the singing of Kim Yeong-im and so on. Would it not be difficult to look at this as mainstream traditional music? A. The foundation of Korean music is Buddhism. As it entered the Three Kingdoms period, it has been Buddhism that has lived with our people for more than 1500 years. The remaining melodies, the stories told in the middle of songs, the beats, and such that were made engraved the three elements of traditional music, song, dance, and appreciation, inside of us before we knew it and are manifesting this without us realizing even in modern times. It is a situation of which we are not aware. It was through Buddhist scriptures that we learned about the concept of music, not only Buddhist prayers or chants but also Yeongsan Hoesang, Hoesimgok, Binari, Tapdori, Sanyeombul, and more folk songs among Korean traditional music that is performed are all considered to be Buddhist music. So in fact, it has already deeply penetrated our music. I propose that it is important to precisely know these things, to research what we can take and disregard, and to then rekindle this with our artistic talents of this era. As there are 15 applications to our department we cannot say that this suffices, but our goal is to produce the best talent through the direct training of excellent professors, if at all possible. Q. Then, has it been confirmed who will be part of the teaching faculty? A. We can boast that all musicians representing this era are included in the faculty. Kim Deok-su and An Suk-seon who you know are involved, as well as Kim Yeong-jae, Kim Seong-nyeo, Park Ae-ri, Lee Chun-hui, Kim Hae-suk, and more. We gathered the most outstanding experts in the fields of vocal music, instrumental music, dance, and composition. This September, students can enroll and in March next year, we will open the doors of our new department. Q. I think there might be concerns about whether the world of traditional Korean music’s demand for manpower is not saturated as there are traditional music departments or Korean music departments at the top universities of our country. A. Recently, our country is trying to develop the fields of semiconductors and nuclear energy, there is absolutely no manpower discharge structure so would there not be a situation in which you cannot handle the manpower? The current state of our music is filled with anticipation due to the phenomenon of Hallyu, to keep up with this trend more new manpower, and more new talent needs to emerge. These talents, while performing that of the past, have to create new music that surpasses the level of imitation. If you look closely, our traditional music has always been creative music. That is what has been passed down to the next generation. In this era, we are already making and delivering music that appeals to people over the world beyond our own country, to do this it is absolutely essential to find the strength in our traditional music and reinvent this. Recently, a research that stated that Psy’s song ‘Gangnam Style’ worked well for people around the world because the music was based on a hwimori-rhythm can be regarded as an example of this. To establish this, performing is of course important, but education in composition that maximizes the ability to create new music in each field is absolutely necessary. Our school makes sure that the faculty members can provide personalized one-on-one education to our students. Because the National Theater is nearby, by always seeing, hearing, and learning on site we focus on developing the capability for traditional music to be reborn as the music of this era. Q. Some are concerned that this era will not last long, as in some areas the current popularity of our idols or the Korean Wave has not been universally recognized. A. The thing that we are overlooking is that Western music has also derived from religious music. Because Christianity (Catholicism) gave birth to Western music culture, we can say that Western music’s roots are Christianity. Likewise, the roots of East Asian music can be found in Buddhism. Western music incorporated ethnic and regional music from this background. Ethnic music from Hungary, Finland, Russia, Spain, and other Western countries has risen to the mainstream of Western music since the mid-19th century and is currently dominating the world. Asia’s music is based on Buddhist music, and I think it is time for Asian ethnic music to rise as world music. These elements should now be raised as modern music and world music. Q. However, the question that always torments us is to what extent is this still our music… A. Ah, right. Whether we are talking about culture or music, anything new is essentially bibimbap. Think about our bibimbap. As garnish we throw in various vegetables, we add sesame oil, and lastly, we add red pepper paste and mix it all in, this is essential to bibimbap. There might be a difference in the amount of red pepper paste added, but once that red pepper paste goes into our music it really becomes our music. Then we can ask what that red pepper paste represents exactly. Element-wise, for example, it could represent the form of a beat or song, the problem of music intervals, the method of vocal usage, movement, and other different elements like these. The problem is how do we blend these elements? And if we do this correctly, would that not result in the best version of our music? We have to identify these factors and share them. Q. I think we talked a lot about the new department. As you know too, professor, our gugak industry and our traditional music industry have suffered a lot under the corona pandemic and dealt with problems such as the cancelation of performances and a decrease in its audience although it is slightly getting better lately. How should we look at this? Is there any solution to this? A. Haha. Us Koreans who see through music or folklore are truly wise people. Don’t we have the wisdom to define objects that bring harm or annoy us as byeolsin or evil spirits, and send them away through a gut (exorcism)? Corona does make our lives difficult, but should even our spirits have a hard time because of this? Just as we overcome our saddest times by singing, we should banish this crisis by holding a byeolsingut (exorcising ritual). This is our humor and positive mind. Q. A concern that we have is that Western instruments’ expressiveness is powerful by nature whereas there is an aspect to our instruments that makes this expressiveness difficult to follow. How do you look at this problem? A. Isn’t distinguishing Western instruments from our instruments defining the limits of our music in advance? Previously, I held a North and South Korean concert in Pyongyang, at this concert the cello players who performed wore hanbok, and Western instruments and traditional Korean instruments were able to coexist. A conductor named Seiji Ozawa is a world-famous conductor of Western music. After that yangban came to China, he fell in love with the charm of the erhu and after inviting a Chinese performer to Boston to open a concert together with the Boston Orchestra, the erhu gained worldwide recognition. Now, we need to have the wisdom to exceed the distinction between instruments and styles and open a world of music. In foreign countries, the world of music is already expanding in that direction. I think this starts with us not being bound by instruments or a certain music form but us ‘submitting’ to our music. To be honest, this is a North Korean way of talking though… Even in our own three Asian countries, each presents its specific national characteristics. I think it is important that we draw from this source when needed and discard it when there is an excess to make a more universal style of music. Q. However, we still have nationalistic feelings toward Japan and lately, some voices are proposing that the roots of Japanese enka music are Korean. A. It seems true that, historically, our music moved to Japan during the Three Kingdom period. And that is how it became their music, but are we also not creating music in our own style by adopting Chinese and Western music? Regarding the origin of Japanese enka, there are records of Koga Masao, who is referred to as the founder of enka, having lived in Incheon and lately, a theory has come out that he is Korean, but because the basic vocal register for enka music does not exist in our country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ey have copied what is ours. This is something for researchers to reveal, but it would be sensible to think about how we can embrace this or that element as our own instead of sinking into nationalist sentiments about who is the original or where did someone copy something. In the past, there was a project in which musicians from Korea, Japan, and China worked together. If they looked at the sheet music, they could not express the meaning of the music but when they all held hands, started practicing, and sang, they all related to each other and the music came out wonderfully. Absorbing the strengths of each country and reviving this in the current age, that is the task that is given to us. Q. I think the time for me to ask other questions that I’m curious about has run out. You are leading the foundation of this Korean Music Department, I hope that through more compositions or the training of our younger generation our music can proudly spread abroad. A. Yes, as we were in a hurry I have spoken in rambles, but our music is always the beginning. What is clear is that we should not cling to the past and with new music should not just create gugak but also a wide range of Korean music. The answer lies in the fact that nowadays almost all university departments choose the name Korean Music Department. Now we have to find and create Korean music, and we are confident that the foundation of our Dongkuk University’s Korean Music Department under the best leaders of our time creates the opportunity to meet this desire and expectation. Thank you. English translation: Linda Pauw (Intern reporter) Linda Pauw is a Dutch student of Korean Studies and Critical Heritage Studies. Pauw came to Korea after finishing her Master's program at Leiden University to attend Yonsei University's Korean Studies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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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훈 석좌교수, '한국음악의 새길 찾다'8월의 한가운데, 창밖의 일기 변화에 눈을 두지 않고 연구실에서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분. 국악인. 작곡가, 지휘자, 국악학자, 대학총장, 교육문화정책가, 다시 국악학자로 돌아와 연구실을 지키는 박범훈 석좌교수. 최근 동국대 서울캠퍼스에 ‘한국음악학과’ 개강 준비와 전임교수, 석좌교수 내정 등으로 분망(奔忙)한 틈에 KBS기자 시절부터 친분을 가진 이동식 대기자가 찾았다. 80분 간의 인터뷰에서 그의 화두가 종립대학(宗立大學)으로써의 불교음악 진흥이 곧 우리 음악 새길 찾기임을 확인했다. 이제 그의 공안(公案)을 함께 하기로 한다. Q. 이동식 대기자- 이 염천에 피서 안가시고 무얼 하십니까? A. 박범훈 석좌교수- 반갑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학생들을 모집하는 예술대학 한국음악과의 개설에 차질이 없도록 제반 사항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학과 개설은 일이 많지요. 우리 학과는 다 수시모집으로 신입생 모집이 이뤄지는데 그게 딱 한 달 남았거든요. 새 학과의 비전과 설립목적에 맞는 교과목의 교육내용과 방법, 교수확보, 또 전형방법의 확정과 구체적 평가기준의 숙지 등등 하나하나가 다 확인하고 점검해야할 일이니까요. Q. 이- 동국대학교는 원래 경주캠퍼스에 한국음악과가 있었는데 서울 한복판에 새로 학과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의외입니다만. A.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예술관련 학과는 관계되는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운영되지 않으면 교수진 확보나 학생들 수업 등에 문제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학이 불교 조계종이 설립한 종립대학인데 그동안 지역(경주캠퍼스)에 있으면서 불교음악의 진흥이라는 차원에서는 미흡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당국이 기왕이면 불교음악의 바탕을 더욱 심도있게 연구하고 가르쳐 한국음악의 새 길을 열기 위해서는 뛰어난 예술인들이 선생님으로 좀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서울 한복판에 한국음악과를 신설하자고 해서 성사된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수도권에는 대학의 정원이 늘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대학으로서는 종립대학으로서 그동안 조금 미진했던 불교음악의 연구와 연마를 배양해서 이 시대 세계가 환영하는 한류, 우리나라가 요구하는 한국음악의 인재들을 키워내야 할 시점이라는 고심을 한 끝에 기존의 정원을 돌려서 서울에 한국음악과를 만들기로 한 것이지요. Q. 방금 불교음악을 통해 우리 음악을 키운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아는 불교음악은 이를테면 찬불가라던가 범패, 염불, 또는 김영임이 불러 유명해진 회심곡 등등 특정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음악의 주류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요? A. 한국음악의 바탕은 곧 불교 음악입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민족과 1500년 이상 같이 살아온 불교이기에 거기에서 만들어지고 남아있는 가락과 사설과 장단 등 전통음악의 요소인 가, 무, 악 3요소가 모두가 어느 새 우리 속으로 파고 들어와 있고 그것이 현대에서도 알게 모르게 발현되고 있는데, 우리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우리가 음악이란 개념을 접한 것도 불교경전을 통해서였고, 염불이나 범패뿐 아니라 국악에서 연주하는 영산회상, 회심곡, 비나리, 탑돌이, 산염불 등 민요가 다 불교음악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이미 우리음악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 시대 우리들의 예술적인 재능으로 다시 피워내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모집인원이 15명이라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왕이면 우수한 교수진들과의 직접 교육을 통해 최고의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목표입니다. Q. 그럼 교수진들은 다 확정이 되었나요? A. 나름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인들이 다 망라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김덕수 안숙선을 비롯해 김영재, 김성녀, 박애리, 이춘희, 김해숙 등등 성악, 기악, 무용, 작곡 부문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다음 오는 9월에 학생들을 모집해서 내년 3월에 학과의 문을 열게 됩니다. Q. 우리나라 유수의 대학에 국악과 혹은 한국음악과가 있어 국악계의 인력수요가 포화상태가 아니냐는 걱정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최근 우리나라가 반도체나 원자력 분야를 키워나가려고 보니까 절대 인력의 배출구조가 없어서 인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음악의 현주소는 한류라는 현상으로 기대에 차 있는데, 이런 추세에 맞추려면 새로운 인력, 인재들이 더 많이 나와야지요. 그 인재들은, 과거의 것을 연주하는, 말하자면 답습의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 내야하는 것이고요. 잘 보시면 우리 전통음악은 언제나 창작음악이었습니다. 그것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대 우리들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음악들을 이미 만들어서 전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려면 우리 전통의 힘을 찾아내어 이를 다시 재창조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최근 사이의 곡 '강남스타일'이 휘몰이장단을 바탕으로 했기에 세계인들에게 먹혀들었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 그 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주는 물론이지만 각 분야에서 새 음악을 만드는 역량을 극대화하는 작곡 교육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 학교는 교수진들이 학생들에게 1 대 1 맞춤형 수업을 제공하도록 합니다. 거기에 국립극장이 가까이 있으니 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배움으로서 이 시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량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Q. 일각에서는 현재의 우리 아이돌의 인기나 한류가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해서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을 하기도 하던데요 A. 우리가 지나치고 있는 것으로, 서양음악도 그 모체는 종교음악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천주교)가 서양의 음악문화를 탄생시켰기에 서양음악의 모체는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음악은 불교가 그 모체이지요. 서양음악은 그런 바탕에서 민족적인, 지역적인 음악을 흡수했지요. 헝가리, 핀란드, 러시아, 스페인 등의 민족음악들이 19세기 중반 이후에 서양음악의 본류로 올라가서 현재 세계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음악은 불교가 그 바탕에 있는 것이고, 이제는 아시아의 민족음악들이 세계음악으로 올라갈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이제 현대음악, 세계의 음악으로 끌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Q. 그런데 어디까지가 우리 음악이냐 하는 문제가 늘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만···. A. 아, 그거요, 음악이건 문화건, 새로운 것은 본질적으로 비빔밥입니다. 우리 비빔밥을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에 고명으로 나물을 갖가지 넣고 참기름도 넣고서 마지막에 고추장을 넣어 비비는데, 그게 핵심이지요. 그 고추장을 얼마나 넣느냐의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우리 음악의 고추장이 들어가면 그게 곧 우리 음악이지요. 그럼 그 고추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고 또 물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요소별로, 즉 장단이나 곡의 형식, 음계문제, 소리를 내는 방법, 몸짓에 따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을 잘 하면 그게 최고의 우리 음악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요소들을 우리가 알아내고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Q. 너무 학과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 아시다시피 코로나로 우리 국악계, 전통음악계가 공연 취소, 관객 감소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는데 최근에는 조금씩 회복되긴 하지만, 이거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해결 방법이 있나요? A. 하하. 음악이나 민속을 통해서 보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귀찮게 하는 대상을 우리는 별신, 잡신으로 규정하고 이를 굿으로 보내는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까지 힘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가장 슬플 때에 노래로 이겨내듯이 우리는 이 위기를 별신굿을 해서 추방해야 하죠. 그것은 해학이자 우리들의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Q. 우리들이 안고 있는 고민은 서양악기가 워낙 표현력이 강해서 우리 악기가 따라가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A. 서양악기와 우리 악기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우리 음악의 한계를 미리 규정짓는 일이 아닐까요? 전에 남북한 음악회를 평양에서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첼로 연주자가 한복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서양악기와 전통악기가 공존하고 있더라구요. 오자와 세이지라고 하는 지휘자, 세계적인 서양음악의 지휘자이지요. 그 양반이 중국에 왔다가 얼후(二胡)의 매력에 푹 빠져 중국 연주자를 보스턴에 초청해 보스턴 오케스트러와 협연을 열어준 일이 있고, 그 이후 얼후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제는 악기나 양식의 구분을 넘어서서 원하는 음악세계를 열어가는 지혜가 있어야하지요. 이미 외국에서는 그런 쪽으로 많이 음악세계가 넓어지고 있고요. 그것은 악기나 형식에 우리가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우리의 음악에 '복종'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사실 이 말은 북한식 어법이기는 하지만···. 우리 동양 3국만 해도 각각의 민족적인 특징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것들을 필요하면 끌어 쓰고 넘치면 버리고 해서 보다 보편적인 음악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Q. 그래도 우리들은 아직 일본에 대해서는 민족적인 감정이 있고, 요즈음에는 일본 엔카(演歌)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데요. A.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 우리 음악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인 것 같고. 그렇게 그들의 음악으로 되었는데 우리도 중국 음악이나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면서 또 우리 식의 음악으로 발전하고 있지 않아요? 일본 엔카의 원류에 대해서는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인천에서 살았다는 전력이 있고 최근에는 한국인이라는 설까지 나오기는 하지만, 엔카의 기본 음계는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것이기에 우리 것을 베꼈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소리도 있지요. 그것은 연구가들이 밝힐 일이지만 누가 원조니 어디가 어디를 베꼈니 하는 민족적인 감정에 함몰되기 보다는 그런 저런 요소들을 우리가 다 어떻게 우리 것으로 수용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중일 세 나라 음악인들이 함께 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악보로 보면 음악의 표현이 살지 못하는데 함께 손잡고 연습하고 부르고 하면 다들 마음이 통하고 음악이 멋지게 나오더라고요. 각 나라의 장점을 흡수하고 이를 현대에 다시 살리는 작업, 그게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이지요. Q. 이런 저런 궁금한 점을 묻다 보니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이번 한국음악과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일을 하고 계시는데, 더 많은 창작이나 후진 양성으로 우리 음악이 당당히 세계에 퍼지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A. 네 급한 김에 저도 두서없는 말을 했습니다만, 우리 음악은 언제나 늘 시작입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새 음악으로 국악만이 아니라 넓은 한국음악을 만들어내는 일이지요. 요즈음 대학의 학과가 거의 다 한국음악과라는 이름을 택하는 데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음악을 찾고 만들어가야 하고, 우리 동국대의 한국음악과 창설이 당대 최고의 지도자들에 의해 그런 희망과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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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기의 변신 어디까지?우리 국악기의 과거 고민과 미래비전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전시회가 국립국악원에 마련됐다. 2022년 4월 19일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막된 "국립국악원, 변화와 확장의 꿈"이란 전시회가 그 현장이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팔꽃이 핀 해금이다. 줄이 매어져 있지 않지만 나무 울림통에서 나는 소리가 나팔꽃을 통해 크게 활짝 피어나도록 올림통을 개량해본 것이다. 해금의 소리가 더 크게 맑아지기에 해금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보자는 고민의 산물이다. 맑은 소리를 내는 관악기인 태평소에는 서양악기에서 쓰는 키가 달렸다. 태평소 소리의 특성이자 우리 악기들의 특징이 음 간의 유연한 넘어감이지만 필요에 따라 일정한 음정을 낼 수 있는 방안으로 서양의 금관악기가 쓰는 키를 붙여 소리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하얗고 누런 아주 큰 소라 고둥 두 마리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서 보니 재질이 FRP, 곧 유리강화플리스틱으로 만든 고둥이다. 나각이란 악기인데 원래 이 악기에 쓰이는 나팔고둥은 국내에서 이만한 크기를 구할 수가 없으니 그 대체재로 FRP를 써서 만들어본 것인데 소리가 거의 똑같이 난다고 한다. 개량 아쟁은 울림을 주는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차례로 뚫려있다. 소리를 강하게 내기 위해 줄을 더욱 당기는 장치를 별도로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아쟁은 약간은 가라앉은 음색이 특징이지만 이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없을 까 하는 관점에서 개량해 본 것이다. 19일 개막된 이 전시회는 '변화와 확장의 꿈'이란 제목 그대로 구한말 이후 크게 변화해온 새로운 음악환경에 따라 우리 악기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그 음악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지난 60년 동안 우리 음악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자리이다. 우리 전통음악은 궁중음악의 경우는 야외에서 공연을 하지만 다른 개인 악기들은 사랑방에서의 연주와 감상을 상정해서 음색과 성량이 결정되어 왔기에 현대에 무대에 오르는 음악환경에서는 아쉬움이 지적돼 왔다. 따라서 소리를 키우고 음역을 확장하는 작업이 불가피해졌다. *가야금, 거문고 등 현악기의 몸체인 울림통을 키우고 소리를 밖으로 내보내는 공명혈 위치를 바꾸거나 개수를 늘리는 등 변화를 꾀했다. *현도 명주실이 아닌 철현으로 바꾸고, 반음씩 올릴 수 있는 변환장치를 달기도 했다. *나팔관 모양의 공명 장치로 음량을 키운 개량 해금, *실내에서도 연주할 수 있도록 음량을 감소시킨 실내악용 태평소, *조롱목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개량 장구 등 40여점의 전시물들은 악기 별로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없음을 느낄 수 있고 그만큼 우리 음악인들이 애를 썼음을 확인하는 실물의 기록역사이다. 국립국악원은 국악기를 현대화하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1963년 10월 국악기 개량위원회를 발족하고 악기 개량을 위한 첫 발을 내딛였다.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고 이후 여러 국악관현악단이 생겨나면서 다양한 음역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또 한옥 사랑방이나 야외 등 제한된 곳에서 규모가 있는 공연장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공간도 변하면서 음량의 확대도 필요했다. 서양 오케스트라 악기 구성을 도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전통 국악기의 저음역대 표현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졌다. 국악기개량위원회가 발족한 지 햇수로 만 60년, 국악원은 1964년부터 1989년까지 총 네 차례의 악기 개량 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 과정에서 31종 228개의 국악기가 개량·개발됐다.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를 한 자리에서 비교하고 앞으로의 방향도 모색해 보기 위해 마련된 자리이다. 국악기 본래의 정서와 특징을 살리면서 악기의 음역을 넓히고 음량 조절이 가능한 형태로 국악기를 개량한 역사이다. 전시에서는 25현 가야금(전통은 12현)과 9현 아쟁(전통은 7현), 저음역을 확대한 대피리와 중·저음 태평소, 저음 나발 등을 선보인다. 타악기에서도 대취타 등에서 연주하는 운라를 개량한 17개·24개(전통은 10개 운라편) 운라와 3가지 음정을 내는 징을 전시했다. 보급형 국악기 등 대량생산을 위한 작업과 환경 변화로 점차 사라져가는 자연 재료를 대체하기 위한 연구도 볼 수 있다. 천연 대나무 재료로만 제작했던 단소, 소금, 대금, 피리 등 관악기는 각각 PVC(폴리염화비닐)와 철재, 일반 목재 등을 활용한 악기로 만날 수 있다. 희귀한 쌍골죽으로 만들어지던 대금은 대나무의 여러 조각을 합해 만든 합죽으로 제작해 대중적으로 보급할 수 있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즐기도록 하는 악기들도 개발되었다. 실로폰, 트라이앵글, 탬버린 등 초등학교 시절 접했던 서양 악기들을 국악기로 만든 코너도 있어 직접 소리를 내볼 수 있다. 독일의 음악가 칼 오르프가 창안했던 교육 시스템이기도 한데, 우리의 환경에 맞춰 자라나는 세대들을 국악의 세계로 이끌 악기들이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우리 국각이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국악기의 저음 부분을 보완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국악관현악단 연주에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국악기의 저음을 보완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외국인들에게 설명하겠는가? 중저음부를 담당할 (국악기의) 현악기 개발이 시급하다"며 "개량 사업은 악기가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개발 과정부터 지휘자, 연주자들과 함께 논의하고 의미있는 성과가 도출된다면 실제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신임 김영운 국악원장이 의욕적으로 마련한 이 기획전시 '변화와 확장의 꿈'은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5월15일까지 계속되는데, 개량 악기 40여점을 통해 이들 악기들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그 의견을 수렴하는 드문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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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사진전] 가인 '장사익의 눈'은 무엇을 보았나?"마음은 머리가 모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가인(歌人) 장사익 씨가 인사동에서 연 사진전시장을 들어서면서 왜 이 말이 생각나는 것일까? 시인 김성옥씨가 그의 세 번째 시집 <사람의 가을> 첫 머리에 쓴 이 말처럼 우리는 노래를 하는 장 선생이 그렇게 머리가 모르는 마음의 눈을 가졌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장 선생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그 눈은, ‘장사익의 눈’이란 전시회의 부제처럼, 곧 마음만이 볼 수 있는 눈이 아닌가? 그는 우리들이 오랫동안 가꾸고 키워온 우리 민족의 정서와 감정과 느낌과 신명을 소리로 대변해온 한 가인이다. 그런 그가 이런 마음의 눈을 갖고 있다니 ‘놀랄 노’ 자(字)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로 그의 노래를 기다리던 많은 팬들과 넘어갈 수 없는 담이 생기고 열리지 않는 벽이 눈 앞에 드리웠던 것이 그에게 그런 눈을 뜨게 한 것이리라. 벽 속에 갇힌 소리의 영혼이 그 벽을 깨기 위해 앞으로 나가려다 보니 그 벽 속에 우주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푸른 하늘이 있었고 구름이 있었고 비바람이 있었고 비에 젖어 흘러내리는 흙탕물이 있었다. 가인의 눈에 우리가 보지 못한 다른 우주가 들어온 것이다. 80년대 중반 우리 한국 화단을 휘몰았던 수묵 추상의 세계가 거기 있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의 사람을 받는 유영국 님의 기운과 정신과 선만 남은 산과 구름이 있었고 꺼먼 타르의 진한 생명력이 캔버스 위를 뒤덮는 윤형근이 있었고 류경채의 데포름이 있었고 남관의 문자 추상처럼 획과 선이 면이 되고 면이 다시 중첩되어 일어나는 그런 세계가 있었다. 마치 현대 우리 화단의 주요한 추상화가 하나 또는 섞여서 그 사진 속에 있구나. 그것을 화가도 아니고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가인이 자연 속에서 눈으로 보아 찾아 드러냈단 말인가? 누구는 장 선생이 일찍이 수많은 이 시대 대가들과 교류하며 그림을 보고 생각하고, 화랑을 하면서 직접 만지고 다루기도 한 경력과 무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날 장 선생이 노래하는 무대 밑에서 요즈음 유행하는 막걸리의 맨 마지막 찌꺼기까지가 뻑뻑하게 담겨 있는 사발 잔을 죽 들이키는 듯한 감동을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묘한 맛은 남의 것을 보아서만 가능한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장 선생에게 그런 마음의 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자신 표현대로 원래 자발이 없는 사람이어서 남이 걸어간 길, 남이 열어놓은 길만을 따라가지 않고, 남이 가르쳐 준 박자나 장단에 얽매이지 않고 엇박자로 내는 그의 노래에 담긴 마음이 그러한 새로운 눈을 열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다른 시인은 인생이 우리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들에게 뿌듯한 만족을 오랫동안 주지 못했기에 우리들의 삶은 들인 밑천을 생각하면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가다가 길을 멈추게 된다. 공연히 서글프고 외롭고 힘들고, 그래서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때에 장 선생은 작은 핸드폰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가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벽에서 새로운 질서를 발견한 것이고, 그 무생물, 무채색의 세계에서 그들의 춤과 노래를 발견해 낸 것이다. 우리는 안다. 장사익이란 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46살의 나이에도 일정한 직업이 없이 태평소를 불며 사물놀이패를 따라다니던 1994년 6월 잠실 5단지 옆을 지나는데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찌르더란다. 당시 아파트 담장에는 장미가 많이 심어져 있었기에 당연히 장미꽃이겠거니 하고 냄새를 따라가 보니 장미에서는 전혀 냄새가 없고 어느 잘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 하얀 찔레꽃이 피어있는데 거기서 그렇게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보고 울컥했단다. "야! 아무도 안 보는 이 보잘것 없는 찔레꽃에서 이런 좋은 향기가 나다니. 그래. 출세해서 고대광실에 번쩍거리는 승용차를 자랑하며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 서민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니겠나? 속으로 진한 향기를 담고 각자 자기의 삶을 사는 ....” 그래서 만든 것이 '찔레꽃'이란 노래이고 그것은 곧 장사익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것으로서 그의 삶은 찔레꽃의 향기를 우리들에게 선사했다. 40대 후반에 시작한 노래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지만. 그만큼 그때까지 눈물 속에 지냈음을 우리는 안다. 직업을 열다섯 번이나 바꾸었고, 맨 마지막 직장인 카센터에서 그때 한참 잘나가는 가수의 막 새로 나온 그랜져 승용차에 광택을 입혀준다고 나섰다가 생채기를 내고 한 달 동안이나 봐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장사익. 그러다가 어느 날 노래의 문이 기적처럼 덜컹 열리자 그동안 인생에서 쌓아놓았던 모든 감정과 응어리와 한이 목 안에서부터 가래에 담겨 튀어나간 듯, 그의 노래는 우리들의 가슴을 건드리고 눈물샘을 터지게 했음을....... 박자도 안 맞고 가락도 늘어지기 일쑤고 반주가 힘들어 손으로 박자를 따라서 쳐볼 양이면 영락없이 어긋나서 손바닥이 무안해지는 그런 노래들로 우리들의 쓰린 가슴을 풀어주었음을...... 그의 노래는 굳이 말하자면 국악인지 가요인지 재즈인지.... 뭐 이런 것 중의 하나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고 다 아닐 수도 있고 또는 다 합친 것일 수도 있다는데, 이번에 보여준 장사익의 사진들도 바로 그렇게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먹그림인지, 유화인지, 그래픽인지 혹은 치덕치덕 물감을 바른 것인지...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것들인데도 자세히 보는 사진은 맞는 것 같되, 사람들에게 감탄을 하게 만들고 아! 이렇게 하는 것도 예술이 되는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을 열어주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은 예술이란 것은 형식의 문제, 매체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으면 늘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음을 이 가인을 통해서. 그것도 소리 예술이 아닌 시각예술의 형태로 알게 되다니.... 참으로 세상은 아름답구나. 요즈음 노래하는 분들, 연기하는 분들이 그림을 그려 이름을 내는 분들이 있지만, 장사익 씨가 마음의 눈으로 본 세계는 그것과는 달리 벽을 넘고 그 속과 너머에 있는 무심한 자연의 리듬을 그만의 눈으로 파헤쳤다는 데서 그 놀라움과 감동이 당분간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과의 거래에서 타산이 맞지 않는 길을 걸어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타산이 맞지 않으니 새로운 타산이 생기는 것이고 그것이 곧 창조의 기쁨이고 창작의 즐거움이라면 우리 삶에서 전혀 예상 못한 즐거움과 기쁨을 가인 장사익의 사진전이 열리는 인사동 인사아트플라자 갤러리 전시장에서 보는 것이다. 그의 전시는 다음 주 월요일인 3월21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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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이어령 장관님! 기어코 가십니까?몇 년 전 암 선고를 받고도 남들 다 하는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를 하지 않으시고 담담히 암과 더불어 살아오시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더 많은 삶의 생각과 이야기를 해주시며 의연한 지성의 길을 보여주시기에 그래도 한참을 우리 곁에 더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황망히 우리 곁은 떠나십니까?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을 때도 또 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꽃이 보인다”라고 하시면서 왜 곧 피는 꽃을 마다하시고 먼 길을 떠나시는 것입니까? 청천벽력의 소식에 장관님이 아껴주시던 이태행 전 새천년준비위원회 기획운영본부장과 작곡가 김수철 씨, 그리고 제가 빈소에 달려가 "어서들 오세요!”라고 해주시는 장관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장관님은 국화꽃 뒤에서 말없이 내려다보시며 반갑다는 웃음만 보이시는군요. 해가 바뀌고 처음인 만큼 세배하는 기분으로 털썩 엎드려 절을 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 귀의하신 분이시라 국화꽃 한 송이로 저희는 마음을 전하면서 3년 전 봄에 장관님이 우리 3명에게 맛있는 점심과 함께 격려해 주신 다음 곧 다시 모시겠다고 한 약조를 지키지 못한 불민함에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우리 앞에 생과 사를 가르는 강이 흐르고 장관님은 그 강을 건너 점점 멀리 가시려 하는군요.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뵈면서 참으로 학자이며 교수란 분이 문화행정도 이렇게 잘 할 수 있구나 하며 감탄을 하고 많이 배웠지만 사실 그 전 60년대부터 장관님은 당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 방황하던 우리 한국인들에게 자신을 바로 보고 그 속에서 미래를 열어갈 정신적인 자부심과 힘을 찾으라고 말씀해 주심으로서 우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큰 감동과 힘을 주셨지요. 이미 20대 청년 시절에 벌써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 황톳길 속에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천 년을 살아온 지혜와 의지를 찾아내고 그 흙과 바람 속에서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을 읽으신 것은 참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캄캄한 어둠 속의 한 줄기 밝은 빛이었습니다. 저 어두운 역사, 부조리한 사회구조, 외세에 짓밟히고 권력자에게 시달리고 가난에 쪼들리며 살아온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고통과 서러움과 원한들을 한숨으로 풀고, 노래로 풀고, 어깨춤으로 풀어낸 지혜를 드러내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문화부를 맡으셨을 때에 장관님은 우리 민족의 흥과 신명을 크게 키워주심으로서 마침내 경제를 일으키고 문화와 예술, 그 가운데 음악, 무용, 민속 등에서 우리가 21세기를 뒤흔드는 신명의 민족으로 자라도록 일찍 그 싹을 틔워 주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 벌판에 집을 세우러 가는 목수이다. 목수가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사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문화부의 네 기둥을 다 세워놓고 나는 떠난다. 그때 정말 이 집 주인이 올 것이다." 라고 하신 취임사 그대로 당신은 문화부의 각 부문의 예산을 크게 확충하여 창작예술인들의 지원을 대폭 늘렸고 국립국어연구원을 받아서 어문 정책을 교육이 아닌 생활 문화 차원에서 접근하도록 했습니다. 어려운 한자어나 외래어 투의 어휘들을 쉬운 우리말을 절묘하게 바꾸어주었으며 예술종합학교 설립을 준비해 퇴임하는 날 국무회의에 전격적으로 올려 통과되도록 해서 오늘날 우리 예술의 수준이 크게 올랐습니다. 그러기에 역대 문화부 출입 기자들이나 전직 공무원들이 항상 장관님을 최고의 멋진 문화부 장관으로 꼽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지요.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이어령은 네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대엔 '저항의 문학'으로 한국 문단을, 30대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한국인을, 40대엔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일본인을, 50대엔 '서울올림픽 문화 기획자'로 세계인을" 이 말에서 기억납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에 그 큰 운동장 한 쪽에서 여섯 살 소년이 굴렁쇠를 돌리며 나타나 운동장을 다 접수하는 장면, 그것은 곧 그때까지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한국과 한국인의 미학과 정신세계를 세계에 알린 쾌거였고 그 창조적 발상이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으로 이어진 것은 전설이 되었고요. 장관님은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이시고 평론가이고 언론인이고 교수이면서 서울올림픽과 월드컵 문화 축제, 새천년 준비위원장, 그리고 문화부 장관에 이르는 이 과정에서 놀라운 것은 매 영역에서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장관님 글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을 뒤집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장관님은 컴퓨터에서부터 인터넷, 홀로그램, 첨단 영상, AI, 알고리즘 등등 우리가 개념도 모르는 문명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도 먼저 공부하시고 그 응용을 보여주셨습니다.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 씨를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문명 예언가' 차원에서 그 의미를 일찍 파악하고 그 앞길을 열어 보이셨고. 현대를 앞서가기 위한 많은 정신적인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백남준 씨를 위한 문화재단의 설립과 운영에도 많은 조언을 해주셨고 백남준 씨의 창조력을 살려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디지털만을 앞세운 정보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 상생하는 디지로그 사회, 곧 ‘어금니로 씹는 디지털’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주장은 이후 본격 출시된 닌텐도와 아이폰의 성공, 한국에서의 먹방 콘텐츠의 흥행몰이로 여실히 증명된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처럼 장관님이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먼저 실험하고 보여주신 그 창조력이 21세기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연 장관님은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한 자랑스러운 한국의 거인, 한국과 세계의 지성이십니다. 그러한 장관님이 왜 이리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나려 하십니까? 장관님은 젊으실 때에 쓴 책(『떠도는 者의 우편번호』)에서 흔히들 죽음을 생의 끝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생과 동시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고, 죽음은 잘못된 삶을 깨우쳐주고 반성케 하는 좋은 교사라고 하셨는데, 당신께서는 우리의 삶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것인가요? 장관님은 이 시대를 이끌어 온 경제 패러다임 중에서, 산업자본주의가 가진 병폐는 이미 오래전부터 드러나고 있었고 미국을 필두로 하는 금융자본주의 역시 2000년대 후반을 강타한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그 그늘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셨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경제 이념은 돈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상생을 위한 생명의 자본주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돈의 굴레에 빠진 현대사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생명을 생각하는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싶은 것인가요? 말씀하시려는 뜻은 알지만 그렇다고 요즘 백 세 시대에 우리 곁에서 깜깜함에 갇혀 지성도 지혜도 없는 우리들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셔야지, 그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장관님이 떠나시기 하신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땀 흘려서 산업주의 만들고, 피 흘려서 민주화를 했는데, 이제는 공감의 눈물을 흘리세요. 3대 액체 중에 가장 고결한, 남과 공감하는 눈물을 창조하세요. 한 사람의 힘이 참 크다는 것. 국가나,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나 혼자 하는, 당당한 나의 힘을 믿으세요. 그것이 80년을 살아 온 선배로서,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입니다. 나 자신을 믿고 남이 아니라 나부터 바꿔가세요.” 그렇습니다. 장관님이 하늘나라에서 먼저 간 이민아 목사를 보고 싶으신 게죠? 그렇다면 말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장관님이 그렇게 가시니 당신이 알려주신 길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당신의 지성으로 이 시대의 부조리를 이겨내겠습니다. 당신이 붙여준 불씨를 키워 21세기 우리 한국인들의 길을 밝히겠습니다.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넓고 푸른 바다가 보인다. 미래에 태어날 우리의 아들 우리의 손자들을 위하여 이 바다로 가는 튼튼한 배를 만들어주자. 외로운 산길을 걷던 소금장수여! 이제는 저 넓은 바다에 길을 만들거라. 밤길을 걷던 그 용기로 저 사막과 낯 선 도시의 등불을 찾아가거라.. .....『한국인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 이어령 장관님 고맙습니다. 가시더라도 아주 우리를 잊지는 말아주십시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영감을 주시고 지성을 깨우쳐주십시오. 언제까지나 우리 한국인들의 등불이 되어주소서 2022년 2월 28일 이동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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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를 맞아 서예가 이종선을 만나다시조 시인으로 알려진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 분천으로 내려와 어부가를 시조 형식으로 만들어 퇴계 이황과 그 형 온계 이해를 배 위로 불러서 관객으로 하고는 노래로 불렀다. 아쉽게도 그 노랫가락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노랫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고쳐 만들어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부르고 즐겼던 시조나 가곡을 직접 들을 수 없는 현대에 이 노래들을 붓으로 들려주는 서예가가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지낸 중진 서예가 이종선(67) 씨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을 2년 이상 발표하며 글씨로 눈으로 우리 선인들의 노래를 들려주어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2일 전시회를 준비하는 이종선 서예가를 이동식 국악신문 대기자가 천도교 수운회관에 있는 서실에서 만났다. Q. 전시회를 하신다고요? A. 네. 지난해부터 음악이 담긴 우리 말, 시조, 한시 등 사설을 한글로 써서 국악신문에 발표해왔는데요, 그동안의 작업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작품을 오프라인으로 시민들도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12월 9일에 인사동의 서예 전문 화랑인 백악미술관에서 한 열흘 엽니다. Q.그동안 신문에 쭉 올려주시는 서예 작품들은 아주 보기에 편하고 다양하고 또 정말로 노래를 읽어서 듣는 듯한 흥취를 느낍니다. 그런 것들이 한글로 써서 그런 것이겠지요? A. 우리 조상들은 생활에서의 생각, 사상, 감회 이런 것들을 시조나 시로 만들어 발표해왔고 또 노랫말로도 전하고 있는데, 우리말로 된 이런 것은 굳이 한문으로 표현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다 보니 한글서예로 표현하는 게 본래의 언어의 특성과도 맞아서 편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Q.선생님은 그동안 한글서예 운동을 주도하셨지요? A. 서예의 뿌리는 한자이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고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니 서예도 우리 나름대로 추구해야 할 길이 있는데, 한자서예는 중국인들이 개척한 서예 세계를 자칫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칠 우려가 있습니다. 서예라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을 글씨로 담아내는 것이라면 우리 한국인들은 우리 글인 한글로 쓰는 것이 맞고 그것이 예술로 승화되면 더없이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한글서예는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1425년에 세종 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셨지만,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다 한문을 쓰고 궁 안에서나 일상 서민들 생활의 보조 수단으로 한글이 사용되었기에 문자 조형, 곧 서예로서의 한글은 사실 근세 이후에 한글이 전용되면서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역사는 아직 백 년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이를 확대 개발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지요. Q. 그런가요? 한글서예가 한자처럼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A. 그렇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한 장르로 대중에 등장한 것이 1920년대 초로, 윤백영이란 여성이 궁녀들이 쓰던 글씨체인 궁체를 처음으로 전시작품으로 출품을 했고, 그 무렵부터 여러분들이 궁체로 한글서예를 태동시켰습니다만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일중 김충현 씨가 지금 우리들이 많이 쓰는 정자체의 한글서예, 거기다가 훈민정음 판본에서 따온 고체까지를 발표함으로써 한글서예의 시대가 본격화되었지요. 그 뒤 남궁억, 장지연, 이철경 등 문인들에 의해 그 세계가 넓어졌는데 다만 그것이 엄격한 틀에 갇혀 있던 편이었다가 최근 20년 이래에 한글서예도 조형미를 새롭게 추구하는 현대 서예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Q. 그런데 서예 작품들을 보면 순수 한글만이 아니라 한문과 혼용해 쓴 경우도 있던데... A. 사실 우리가 한글날을 맞으면 꼭 나오는 것이 한글전용이라는 말인데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말에는 상당히 많은 한자어가 들어가 있고 그것들은 한글로만 표기하면은 뜻이 명확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서예라는 것도 어차피 종이 위에 글자를 쓰는 것이기에 그 뜻을 명확히 해야만 정신과 예술성이 높아지는 것이기에 한글로 쓰지만 필요한 경우엔 한자를 써서 그 뜻을 보다 명확히 하는 작업입니다. Q.한국서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셨지요? 그때 문경에서 아리랑 노랫말을 모아서 한글서예로 표현한 큰일을 하셨는데.... A. 제가 한국서학회 이사장으로 있을 때 마침 문경시가 전국의 우리 아리랑 가락과 사설을 모으자는 운동을 시작해 저희가 문경시와 MOU를 맺고 2년 동안 갖은 애를 써서 아리랑 가사들을 거의 망라해서 서예로 담아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붓으로 부른 아리랑이라고 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 120여 회원들이 각기 10점에서 30점까지, 1만 수를 자신의 필체와 필법, 철학으로 썼기에 그 아리랑 서예를 통해서 노래로만 있던 아리랑이 유형의 시각예술로 태어났고요, 이 작업으로 우리나라 현대 한글서예의 다양한 표현 세계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집약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구나 이 작업을 하면서 문경에서 만들어진 전통 한지를 썼는데, 이게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순수 천연재료만으로 만들었기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한지 중에 가장 좋더라고요. 비단은 오백 년이고 종이는 천년을 간다는데, 이번에 한지장 김삼식 씨가 만든 전통 한지들로 쓴 아리랑 작품들은 정말로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문경시에서 한 아리랑 서예 작품화는 아리랑 가사와 사설을 처음 모은 것도 그렇지만, 한글서예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획을 긋는 작업이었습니다. Q.그런데 한국서학회는 외국에서도 한글 서예전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서예가 외국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쳤는지가 궁금합니다. A. 저희는 이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한글을 아는 분들이라면 한글서예도 당연히 관심이 있고 또 새로운 예술표현에 대한 탐구심도 있습니다. 전에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그런데 한자가 뜻글자인 데 비해 한글은 소리글자라서 서예의 조형성이나 예술성 측면에서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것 아닌가요? A. 서예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해서 이름이 다르고요, 사실 중국 서예인들이야 한자를 쓰는데. 일본 서예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표음문자인 가나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자신들의 글을 많이 쓰지요. 어찌 보면 한자만의 서예를 그들의 상황에 맞게 조형적으로 확대 개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한자(漢字)이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Q.한자나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이 많아지면서 서예도 큰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 같은데요? A. 서예의 본질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예술의 표현대상이 갖고 있는 생명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인데, 거기에는 또 글 자체의 인격이랄까 품격에다가 서예가의 인품도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약허(若虛) 곽사(郭思)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높지 않을 수 없고 기운이 높으면 생동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높은 인품을 담아 한자와 한글이 같이 쓰이면 그 효과가 더 좋아질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인들에게 서예는 한글이 들어감으로써 우리 서예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최근 서예 인구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년과 노령인구가 많아지고 또 지역사회에서 취미 개발을 위해 각종 강좌가 많아지면서 서예를 배우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서 서예인들로서는 이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문제는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 서예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어려서 서예를 가르치지 않은 때문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예는 다른 예술 장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수양 수단이기에 전인교육을 위해서도 초등학교에서 어느 정도는 서예를 배우도록 하는 것을 저희 서예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Q.‘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지요? 글씨가 곧 그 사람이란 말인데, 이 선생님 취월당(醉月堂)이란 호가 재미있어 보입니다. 어떤 연유가 있습니까? A.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젊었을 때 술을 자주 했는데, 제 스승인 능허(凌虛) 스님이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에 나오듯이 술에 취하지 말고 달에 취하라는 뜻으로 호를 주셔서 감사하게 쓰고 있습니다. Q.12월 9일이지요? 그런 작업들이 이번 전시회에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A. 네. 시간 되시면 인사동에 나오셔서 백악미술관을 찾아주셔서 우리 한글서예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디로 갈 것인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생님,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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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오는 11월 8일이 배호 50주기다.#오는 11월 8일이 배호 50주기다. 그의 대표적인 음원은 주로 병상에서 녹음한 것. 그 덕에 음색이 더 애절해졌다고 한다. 1970년 강원 양구의 한 다방에서 총을 든 어떤 남자가 인질극을 벌였다. 그의 요구사항은 두 가지였다. 담배 한 보루와 배호의 음반. 여자 넷을 인질로 붙잡아 둔 그는 배호 노래를 듣고 또 들었고 때로는 따라 부르다가 이튿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최악의 선택을 했는지 결국 알려지지 않았지만 배호의 노래는 그만큼 사람들을 위로하는 힘이 있었다. 1969년 병세가 악화되어 1971년 숨지면서 마지막 노래 음원이 발매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노래 제목이 ‘마지막 잎새’다. 배호 팬클럽만 40여 개가 되고,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 모임’은 16개 시도에 지부가 있다. 미국에도 6개 지부, 중국 일본 호주 칠레에도 팬클럽 지부가 있다. 음원은 영원하다. 음원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고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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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박서보 ‘금관 문화훈장’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금관 문화훈장을 받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1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 총 35명을 선정, 어제 발표했다. 금관 문화훈장은 이 전장관과 함께 박서보 화백이 수훈한다. 문체부 관계자는 이 명예교수는 작가로서 소설·시·평론 분야에서 활발하게 저작 활동하여 시대 변화에 따른 문학적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교수로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해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박서보 화백은 단색화의 선구자로 한국 미술의 추상화를 세계에 알렸으며, 행정가이자 교육가로 한국 미술 발전에 공헌한 점을 수훈 사유로 들었다.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는 금관·은관·보관 등 문화훈장 수훈자 17명,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5명,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8명,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 5명이다. 100세 넘는 나이에 현역으로 활동하는 김병기 화백,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 보유자인 안숙선 명창 등이 은관 문화훈장을 받는다. ‘로보트 태권 브이(V)’ 등 애니메이션 50여 편을 제작한 김청기 감독, ‘앞으로’를 비롯해 동요 500여 곡을 쓴 고(故) 이수인 작곡가 등은 보관 문화훈장을 받는다. 문체부는 1969년부터 매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를 선정해 포상하고 있다. 올해 시상식은 22일 오후 2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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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리를 다듬고 가꾼 40년, 악기장 박성기국악신문 혁신 재창간 1주년 기념으로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국악기 제작사 중 고품질에 가격 대중화를 이룬 궁중국악기 창업자 박성기 명인과 국악에 관한 저서를 갖고 있는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와의 대담이다. ‘언제나 떳떳하게 언제든 당당하게 양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악기사’를 표방하는 박성기 명인은 2003년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을 수상한 대명장이다. 전분야 국악기 개량의 최고 권위자로 트랜드를 형성해왔다. 하남시 궁중국악기사에서 국악기 90%를 개량하게 된 배경과 성공담, 그리고 우리 국악기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대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는 정문교 전(前)신나라 사장도 함께 하였다. 대담 이동식(국악신문 대기자, 전(前)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우리나라의 거문고나 가야금 등 현악기들은 일찍이 담헌 홍대용이 말한 것처럼 먼지와 티끌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어두운 생각과 우울한 기분을 풀어버리는데 그 효과가 시(詩)나 술보다도 나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흔히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말하는 거문고, 그와 같이 비유되는 가야금의 소리는 중국과 다르고 일본과는 사뭇 차이가 큰데, 이러한 우리 악기의 소리는 누가 내는 것이고 그 소리는 누가 만드는 것인가? 여기에 소리를 잘 내는 악기의 중요성의 핵심이 있다고 한다면 현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현금 악기들을 만드는 악기장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리 국악기 중 현악기들을 만드는 곳이 전국에 수십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받는 곳이 ‘궁중국악기사’라는 곳이다. 이 악기사의 대표는 40년 동안 우리나라 현대 국악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 오늘날 우리 국악이 이처럼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사랑을 받는 비밀이 아름다운 소리에 있다면,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도 하남시 천현산 자락에 있는 궁중국악기사의 박성기 대표를 찾아갔다. 박성기 명인=."현악기의 소리의 비밀은 당연히 나무에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나무를 쓰느냐에 달려 있고요. 좋은 나무를 어떻게 잘 말려서 좋은 소리가 나게 하느냐에 있지요. 저 같은 경우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와 근처 남원 임실 일원에 오동나무가 많았어요. 그것은 60년대에 나라에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오동나무를 심으라고 권장한 데 따라 고향 일대에 밭이나 야산에 많은 오동나무들이 잘 자랐는데, 30년 이상 잘 자란 그 오동나무들을 일찍 악기용으로 확보를 해서 충분히 말린 것이 좋은 악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된 것이지요. 저희 고향에는 지금도 20~30년 잘 건조된 오동나무 편만 수천 장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Q.예순을 넘긴 나이지만 정력적이랄까 활력에 여전히 가득 차 있는 박 대표, 그런데 나무만 있다고 좋은 악기나 나오는 것일까? A."그렇지 않고요. 일단 나무가 있더라도 거기에 줄을 매야 하고, 울림통을 받칠 몇 가지 덧붙임이 있어야 하고, 줄도 좋아야지요. 그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야 좋은 악기가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가야금의 경우에도 예전부터 전해오는 제작법에 따르면 악기의 줄을 맨 후에 자꾸 줄이 늘어나는 현상이 생겨 이 음들의 높이를 유지하고 조율하는 일이 무척 번거로운 일이기에 제가 줄 매는 쪽 뒤편에 조리개를 고안해서 이것으로 쉽게 줄을 맞출 수 있게 한 것이 많은 분들에게 저의 악기가 사랑을 받게 된 것 같아요.” Q.그런 말씀은 말하자면 전통악기를 개량한 것이라 하겠는데 12줄인 가야금을 22현으로, 25현으로 개량한 것이 박 대표라는 말이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 A."제가 정식으로 이 악기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이 1986년입니다. 사실 악기 만드는 것은 전수가 쉽지가 않습니다. 악기를 만들 때에 제대로 못하면 아까운 나무도 버리고 악기가 못 쓰게 되지요. 그래서 악기장들이 제자에게 전해주시지를 않아요. 이 때문에 악기 만드는 것을 배우고 터득하기 위해 사실 무척 노력을 많이 했고 숱한 시행착오도 겪었지요. 지금이니까 좋은 추억으로 회상하지만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실패를 하면 왜 실패를 했는지를 찾아내는 과정이 엄청 길고 힘들더라고요” Q.의욕이 강했기에 밤잠을 안 자고 연구를 하던 청년 박성기는 국악기의 주재료인 오동나무를 건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어떤 화학약품을 쓰면 쉽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먼저 적은 양으로 실험을 했었어야 했는데 금방 만들고 싶어서 고향집 마당에 많은 양을 쌓아놓고 한꺼번에 작업했는데, 이때 마을은 온통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찼고 그 작업도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나무를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말려서 악기를 만들었던 조상의 슬기를 몰랐던 것이다. 그와 같은 실패가 있었기에 더욱 노력을 해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말이다. A."그렇게 해서 악기를 만들다 보니까 우선 줄이 문제인 것입니다. 당시까지 줄은 명주실로 촘촘히 꽈서 만드는 것인데 이게 자주 끊어지고 늘어나고 했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초에 줄을 새로운 소재인 나일론을 줄로 매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리가 훨씬 탄력도 늘어 좋고, 또 질겨서 일정한 소리를 낼 수 있어요. 맨 처음에 어른들이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지만, 가곡 하는 조순자 님과 가야금 하는 황병기님이 좋다고 추천을 해주셨기에 점차 사람들도 쓰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줄을 개량한 것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게 되자 가야금 12줄을 17줄로 늘이는 악기를 개발했고 다시 박범훈 선생님이 기왕이면 음색과 표현력을 넓히기 위해 22현으로 해보자고 말씀하셔서 1996년에 22현 가야금을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고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 해에 북도 모듬북으로 만들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요, 그 가야금이 나중에 김일륜 선생님의 제안으로 25현으로 확대되었고요” Q. 박 대표에 따르면 이러한 실용신안 혹은 특허는 수도 없이 많다. 1998년에 대금 제조 방법에 특허, 2000년에는 해금과 가야금의 음량을 조절하는 방법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 2002년 현악기 제조 방법, 2003년 양금 등이 실용신안이 되었다. 실용신안이 15개나 된다. 드디어는 이러한 작업 중에 전기가야금도 태어났다. A."양악기 가운데에는 기타가 음량이 작아 결국엔 마이크의 도움을 받다가 아예 전기 기타가 나와 서양 대중음악을 휘어잡았는데, 국악기의 경우에도 전기를 쓰는 것이 대세는 아니지만 새로운 영역으로 뚫고 나가야 할 것이기에 전기나 전자의 힘을 어떻게 쓰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전자가야금은 처음에는 가야금의 울림통 안에 마이크로폰을 달아서 연결하는 방법이었는데, 이게 각 줄의 음량 차이가 생기고 음이 제대로 잡히지 않지요. 그래서 각 줄마다 센서를 달아서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음이 울리는 문제도 해결되었고요.” Q. 국악이든 양악이든 예전처럼 방안에서 몇 사람만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가 있고 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서 악기의 성량이 큰 문제가 되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처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악기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었단다. 박 대표는 아쟁을 기존보다 20% 정도 키워 대아쟁을 만들어 보았는데 이렇게 되니 너무 커서 운반이 문제가 되더란다. 그래서 아쟁에 현침(絃枕), 곧 줄을 묶는 베개를 개발해서 응용을 했고 모든 줄에 조리개를 붙여 음을 맞추는 문제를 해결했다. 또 장식용으로만 있는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어 악기 무게를 줄였다. 이런 식으로 박 대표는 우리 국악기의 90% 이상을 현대적으로 개량해내었다. 그것으로 해서 우리 국악의 음의 표현력이 엄청나게 넓어졌고 대형 무대에서 많은 청중들을 상대로 하는 현대의 연주회의 특성에 따라 음량도 커져서 많은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각 악기의 대가들이 자문해주셔서 가능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국악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악기를 만들고 그것을 개량하는 일에 뛰어들었을까? 원래부터 악기를 만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인가요? A."그렇지 않습니다 전북 장수의 평범한 농촌 가정이었습니다. 다만 고향의 아는 형님이 민속 국악기 제작사를 하고 있어서 거기 들렀다가 가야금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다녀왔는데 제가 원래 손재주가 있는 편이어서 가야금 만드는 데서 2년이 안 되게 있으면서 눈으로 보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제 방식대로 직접 제작해보고 싶어서 제 몫으로 집에 있는 논을 팔아서 가건물을 하나 마련해 거기서 죽으라고 연구를 했지요. 세월 가는 것도 몰랐고요. 수많은 악기를 만들었다가 실패해서 깨어버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악기에 대해 원리를 터득하게 된 것이고요.” Q.이처럼 악기에 대한 물리가 터져서 여러 악기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그것들을 현대에 맞게 개량해내자 점차 국악계에서 그의 악기를 선택하는 연주가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의 악기에 대한 평가는 곧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 수상(2003년) 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사랑을 받으면서 회사는 가야금과 거문고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국악기를 만들어내었고 그 악기들은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아 많이 쓰이게 되었다. 사업이 늘어가면서 돈도 벌게 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국악 행사에 지원을 해왔다. 중요 공연만이 아니라 국악을 배우고 알리는 많은 기획이나 행사도 궁중 국악기사의 후원을 받았다. 궁금했다. 사람들은 상을 많이 받는다고 악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역시 소리에 있는 게 아닐까요? A."악기에 쓰는 나무들은 결국엔 잘 말라야 하는 거지요. 잘 마르면 무게가 가벼워져서 아주 맑고 상쾌한 소리가 납니다. 반면에 덜 마르거나 재질이 좋지 않으면 둔하고 탁한 쪽의 소리가 나는 등 소리가 죽습니다. 가야금의 몸체를 한 번 들어보세요. 요즈음엔 이렇게 가볍습니다. 그만큼 잘 말랐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그렇게 잘 마르지 못한 악기들이 많아서 소리가 일정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요즈음 악기들이 소리가 더 좋습니다. 다만 우리 악기들은 재질이 단단한 나무가 아니어서 서양의 현악기들처럼 수백 년을 가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그런 명품 악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소나무 등 다른 목재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리가 못 따라 오더라고요. 우리 음악의 전통과 특성을 따라서 악기도 나오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요” Q.최근 우리 음악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국악을 좋아하고 배우려는 젊은이들도 많지만 국악기들이 생각보다는 값이 만만치 않아서 국악 확산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가요? A."네, 국악을 배우려는 분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고 또 국악도 점점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어서 악기도 종류가 많아지고 있어요. 아시겠지만 가야금만 해도 정악가야금과 산조 가야금, 18현, 25현 가야금 등 종류가 많고 저음에서부터 중음, 고음 등 영역이 세분화되다 보니 전공하시는 분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유통되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 이 가격 부분에서 부담을 덜 수 있는 방법으로 국악기를 만들고 유통하시는 분들로부터 큰 전환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최근 국악 보급이 늘어나면서 악기 수요도 많아졌는데, 저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용자와 수용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제작 판매량이 적은 분들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에 획일적으로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보다 많은 분들이 악기를 옆에 두고 늘 그 소리를 듣고 자라야 이 국악이 이 시대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 Q. 악기를 보급하는 입장에서는 더 많은 국악인들이 나오고 그래서 국악의 저변이 확산되는 것을 바랄 텐데, 그런 점에서 북한 국악의 현주소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 남북 간의 협력이 이뤄지면 국악 발전이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A."물론 남북 간 협력이 이뤄지면 더욱 좋겠지요. 그래서 예전에 통일음악회 등으로 남북 간의 교류 행사도 있었고요. 북한의 경우 국악기의 현대화가 많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에는 남북이 음악 부문에서도 교류가 있어서 서로 악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했는데, 북한의 악기 개량은 무대 위에서 신곡 연주를 위해 성량을 키우고 미세한 음까지 필요로 하다 보니 줄에 철사 등을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북한을 다녀온 박범훈 전 총장의 말로는 북쪽이 현대화에 관한 한 한 20년은 앞서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줄을 보면 우선 철사를 넣고 명주실로 둘러싸는 식으로 만들곤 하는데, 그게 음색이 많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 쪽에서는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고요. 나무도 우리만큼 좋은 것은 쓰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형식은 앞서 가지만 내용이나 품질 면에서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남북교류가 끊어졌으니 많이 아쉽지만, 어쨌든 교류를 하고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진정으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국악으로 같이 발전하는 방안을 찾아야 되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으로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현대인들과 함께 호흡하고 숨 쉬고 함께 위안을 받는 음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국악도 진정한 우리의 음악이라는 영역으로 더 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아무래도 악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도 말이 나왔지만 그 기술이 전해지지 않는 풍토가 있다고 했는데, 앞으로 이 문제가 걱정이 됩니다만? A."다행히 제가 평생을 바쳐 걸어온 이 악기의 세계를 따라오는 아들이 있어 저로서는 덜 걱정입니다. 아들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대금을 전공했는데 악기 연주를 넘어서서 저처럼 악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과거 저의 젊을 때처럼 10년 이상 밤잠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은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예전 제가 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미흡하지요. 이 일은 죽을힘을 다해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리를 담아 놓은 악기를 저렴하게 많이 보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매번 악기를 개량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서양의 클래식이건 대중음악이건 강력한 소리와 요란한 박자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우리는 물론 우리 음악의 특색과 장점을 잘 지켜야 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악기 분야에서 더 개량하고 개선할 점이 있는지를 찾아서 본인이 터득해야 합니다.” Q.가을은 음악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박 대표가 만든 악기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책임이 더 막중하게 느껴지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국악 발전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A."아, 물론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새로 개량하고 개발할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국악을 정말로 부담 없이 사랑하는 날까지, 집집마다 가야금과 거문고 등 국악기 하나씩은 다 갖고 사랑할 때까지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누구나 믿고 사랑해주는 악기를 위해 남은 시간도 소중히 하겠습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종식되어 많은 공연장에서 우리 국민들이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우리 악기를 통해서 접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후에는 국악의 역사를 알리고 국악기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박물관이랄까 누구나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공연도 볼 수 있고, 할 수 있고, 같이 배우고 즐기고 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설을 갖추고 그것이 자생적으로 운영되도록 준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궁중국악기사 주요 연혁 2010's 2017년 해금특허 출원 제10-2017-0120407 2017년 12현 저음대아쟁 개발 2015년 모든 악기 품질개발 악기 가격 현실화 2013년 한국문화재단 명인인증 2012년 12현 대아쟁 개발 2000's 2009년 음픽업장치를 구비한 전자 현악기 특허 제10-1003336호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2호 이수 2003년 개량북 개발 2003년 한국예술문화대상 2003년 가야금 실용신안 0326244호 2003년 양금 실용신안 0326243호 2003년 장영실과학 문화상 국악기술 대상 2002년 세계문화예술상 2002년 해금 주화 특허 0038137호 2002년 장식용현악기 제조방법 실용신안 0015989호 2000년 음량조절 해금 실용신안 027763호 2000년 음량조절 가야금 실용신안 0207762호 1980's ~ 1990's 1998년 대금제조방법 특허 0298678호 1997년 10현 중아쟁 개발 1996년 모듬북 실용신안 24649호(조율기 부착) 1996년 거문고9현 -이형환(당시 동국대교수), 9현대아쟁(정계종 국립국악원) 1996년 중앙대 김일륜교수(국립극장 단장)님과 22현 개발 1995년 소금, 중금, 대금, 피리 - 신용춘선생 1995년 고음해금, 저음, 고음가야금 1993년 17현 실용신안 077038호(고 황병주선생 공동) 1993년 가야금줄 실용신안 077038호 1993년 대아쟁 2중 현침 및 조율기 개발 1992년 대금 옷칠 및 자개 장구통, 해금 통 최초 1992년 로구로 기계 도입 해금 통 최초 1991년 개량줄, 키타조율기 17현가야금(황병주) 1989년 저음해금 국립국악원 개량악기 윤찬구씨(저음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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