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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25)제14장 작사 배경, 한영서원 입학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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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25)제14장 작사 배경, 한영서원 입학생을 위해

  • 특집부
  • 등록 2023.11.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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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창가집사건 보고서에 첨부된  ‘구주전란’ 부분(국사편찬위원회 소장).png


국가(國歌) 애국가는 동·서·남해의 바다와 백두대간을 ‘무궁화 삼천리 우리나라’로 규정하고 충성을 다하자는 기원으로 시작한다. 가을하늘 밝은 달과 같은 불변의 기상으로 충성을 다 하자자고 맹세한다. 어떤 애국가보다 참신한 가사로 애국심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1907년 작사이니 116년간이나 ‘찬미가’ 10장 등과 길항(拮抗)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과연 이 역사적인 전승을 가능케 한 이 노래의 작사 배경은 무엇일까?

 

 

제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제2절
남산 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제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제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이 애국가의 원본(原本)은 1908년 출판사 광학서포에서 발행한 1908년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이다. ‘Patriotic Hymn’(애국적 찬미가) 전 4절은 다음과 같다.

 

Patriotic Hymn 뎨十四

Auld Lang Syne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그런데 이 가사가 실제 작사된 것은 ‘찬미가’에 발표에 앞선 1907년 작사했다는 문건이 존재한다. 이를 주목한 사실이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 1919~1985/1949년 월북)의 1948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故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박은용의 이 주장 근거는 바로 1945년 9월 윤치호가 작고 직전에 가족의 요청으로 남긴 ‘자필 가사지(自筆 歌詞紙)’의 확인이다. 이에 따르면 4절 가사와 그 끝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기록하였다.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룬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을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야

괴로우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윤치호의 막내 딸 문희가 "개성 부친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찬미가’를 옆에 높고 달라진 부분은 고쳐 직접 쓴 것”이다. 1945년에 썼지만 작사 년대는 1907년임으로 ‘作’이라 하였다. 서법상 "一九0七年 尹致昊 書”로 썼다면 위작이지만 옳은 표기이다. 이로서 ‘찬미가’에는 번역 찬송가 12편과 자신이 작사한 3편을 포함하여 일부 譯(번역)과 일부 述(지음)이란 의미로 ‘譯述’이라 했지만, 이 가사지에서는 제14장의 가사 4절만을 기록하여 ‘作’(작사)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또한 가사지의 철자에 대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미 1908년 재판 ‘찬미가’에도 동일하게 썼음으로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윤치호는 이미 한글 철자에 대해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즉, 1896년 1월호 「Korean Repository」에 필명 T. H. Y로 ‘점 찍기’와 ‘띄어쓰기’를 주장했고, 최근 필자가 확인 한 독립신문 1897년 5월 27일자는 ‘아래 아자’ 폐지를 주장한 기록에 확인이 되기도 했다.

 

이상에서 확인하였듯이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윤치호가 작사하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제 윤치호가 어떤 배경에서 작사했는지를 살피기로 한다. 앞서 제시한 1907년 전후의 윤치호 상황을 전제로 정리하기로 한다.

 

"내가 모은 돈 200달러를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이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

 

이 간절한 요청은 윤치호가 1893년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상해 모교 ‘중서서원’ 교수로 떠나면서 캔들러 교수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이다. 이미 이 시기에 학교설립을 계획했음을 알게 하는데, 어려운 유학 여건에서 모은 200달러를 학교 설립 기금으로 내고 캔들러 학장의 협조를 청한 것이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위한 이 계획이 당신의 뜻이라면 오! 하나님이시여. 어떤 것도 이 계획이 성공을 방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응답으로부터 13년만인 1906년 초, 캔들러 학장은 남부 감리교 감독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이 때 윤치호와의 약속을 실천하게 되었다. 결국 윤치호의 염원이 미국 남부 감리교 계열 미션 스쿨의 지원으로 ‘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Korean School)의 개교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당연히 초대교장은 윤치호가 맡게 되고, 첫 해 14명의 학생을 맞아 개교하였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 교가(校歌) 곡조에 윤치호가 작사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동포사랑은···”로 시작하는 교가를 준비하고, 이상춘과 김동성(金東成) 등의 교사와 함께 개교 하였다. 개성 송악산 산지현에 초가지붕을 얹은 뜸집(띠나 따위로 지붕을 이어 간단하게 지은 집)의 학교 개교식은 10월 3일 개최했다.

 

한영서원 학칙에 의하면, 한영서원은 인문교육 및 실업교육을 하는 곳으로 학과는 소학과 4년, 영어전수과 2년, 고등과 3년, 반공과(半工科) 3년 등의 과정이 있었다. 소학과에서는 수신,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산술, 이과, 도화, 창가, 체조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고, 고등과에서는 도덕, 국어, 한문, 역사, 일어, 수학, 영어, 음악, 체조, 지리, 도화, 작문, 과학을 가르쳤다. 반공과는 고등과에다 실업과목을 더해서 가르쳤고, 일주 27시간의 수업을 하였다. 학생은 15세 이상의 남자로 신체건강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보통 국한문에 통달한 자로 하였다.

 

이 학교는 특이하게도 지원, 즉 분교도 운영하였다. ‘한영지서원(韓英支書院)’인데, 경기도 포천에 두고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본교와 같이 실업 교육 중시, 근로정신 고취, 노동 천시 폐습 타파 등을 통해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설립 목적이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 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하였음으로, 포천 지역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사용 금지령을 내렸던 ‘초등본국역사’를 교육하는 한편 ‘영웅의 모범’이라는 애국창가집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개성 한영서원 애국창가집사전 보고서.jpg

 

이런 교육목표와 실제 수업은 1910년 이후 총독부의 감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교식 당시는 입학생이 14명이었으나, 1908년에는 225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해에 9월에는 대지 12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웅장한 현대식 석조 건물로 교사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런 학교의 확대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1911년 초대교장 윤치호를 105인 사건으로 투옥시키고 교장을 교체시켰다. 1913년 2월 10일 크램(W.G. Cram)으로, 3대 교장으로 1914년 9월 1일 왓슨(A.W. Wasson)을 취임시켰다. 윤치호의 활동상을 최대한 압박한 것이다.

 

"윤치호는 고(故) 남작 윤웅렬(尹雄烈)의 장남으로 어려서 도쿄(東京)에 유학가고, 그 후 상해에 가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에 도항(渡航)하여 그곳에서 유학한 지 5년 후 귀국하여 의정부참의(議政府參議),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고 그 다음 외부협판(外部協辦)으로 전임하여 제1차 한일협약(1904) 성립의 결과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등에서 원장 및 교장을 맡고 있으면서, 위의 협약(한일협약, 1904) 체결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11년 ‘신민회 105인 사건’의 윤치호 판결문의 일부이다. 윤치호의 주요 이력 중에 한영서원 원장과 대성학교 교장 엮임을 주목하였음이 확인 된다. 이런 처지에서 한영서원은 이후에도 일제의 감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로 ‘애국창가 사건’도 적발되었다.

 

"당시 이경중 목사가 동간도에서 수집, 보관하고 있던 창가를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 이상춘이 제공받은 다음,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포함하여 2권의 창가집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제1권은 1914년 8월 25일 40부를 인쇄하여 한영서원 및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반포했고, 이어 제2권은 1915년 9월 90책을 인쇄·반포 하였다.”

 

1916년에 발생한 ‘애국창가집사건’에 대한 경기도 경무부 보고 ‘불온자 발견처분 건’ 보고서의 일부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개성경찰서 순사가 한영 서원에서 불온창가를 출판, 반포한다는 정보를 입수, 조사한 결과, 1915년 8월 15일 해당 출판물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비롯되었다. 국가 흥망성쇠의 열쇠가 곧 국민정신에 있다고 인식하고, 국민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조국을 생각하는 노래, 독립군가, 애국가를 모아 창가집을 만들었다. 내용에는 ‘영웅의 모범’, ‘선죽교’, ‘구주전란’ 등 다양하였으나 그 중에는 일본의 황제나 황가에게 모욕적인 내용을 담은 곡이나 역대 영웅적인 인물의 반일사상을 표현한 곡들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사인 외 6명은 창가의 편찬에 관여한 혐의, 전 교사 유봉은 그 재료를 제공한 혐의, 음악교사와 생도들은 창가를 연주한 행위, 신공량은 타인에게 창가집을 증여하고, 오립아·오연거는 창가집을 호수돈여학교 생도에게 발매·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신영순·백남혁은 징역 1년 6개월, 정사인·오진세·이경중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한영서원 교사·교직원·졸업생·재학생 등 23명이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애국창가집사건’으로 탄압 받은 첫 사례이다. 그런데 이 중에 핵심 애국창가는 바로 애국가였다. 조서에 언급되었듯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로부터 ‘애국 창가’를 모아 노래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윤치호’, ‘한영서원’, ‘애국가’, ‘창가사건’은 결국 윤치호의 애국가로부터 발단 된 것임을 알게 한다.

   

이상에서 살핀 바에 의하면 관직을 떠나 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 1905년으로부터 1911년까지의 5년은 결국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대성학교 교장직을 겸하는 과정이 가장 큰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한 것은 바로 학생들, 구체적으로는 1906년 10월 입학한 한영서원 학생들을 위해 새로운 애국적 찬미가 14장을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