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앞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호수 같은 느낌이다. 팔당댐을 막은 후 강물이 가득 차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호수처럼 변해 버린 분원리 앞강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내가 권하고 싶은 곳은 아무래도 분원초등학교 자리가 아닐까 싶다. 이곳 운동장에 서서 보면 호수 같이 질펀하게 차오른 앞강을 품어 안으며 좌로부터 검단산 팔당댐 예봉산 그리고 우측으로 다산의 생가가 있는 마현과 저 멀리 운길산 및 두물머리가 파노라마처럼 가득히 펼쳐진다. 아름답다 못해 가슴마저 펑 뚫려 오는듯한 시원함마저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풍경들이다. 거기다 앞강에 자욱한 물안개라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날이면 풍경은 차라리 몽환적인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분원초등학교가 지금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5년 이른 바 을축년
대홍수로 전국이 물난리를 겪을 때 분원초등학교(당시 공립학교)도 예외는 아니어 물에 침수 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산을 깍아 부지를 만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분원리 백자가마터들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1883년 사옹원의 분원인 관요가 폐지된 후 1884년 민영화가 되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백자가마터들이 이 시기에 이르러 끝내 임종을 고하고야 만 것이다. 분원리 앞강을 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게 바라 볼 수 있는 분원초등학교 자리에는 이런 역사의 아픔과 안타까움도 함께 묻혀 있는 것이다.
분원이 민영화 된 후 전통을 고수하는 데는 아마도 한계가 있었던 듯싶다. 구주(九州)의 쿠다니(九谷)로부터 도자기 기술자가 들어온 적도 있으며, 이효순이라는 사람이 역시 규수의 아리타 지방으로부터 성형공과 화공을 데려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 기술자들은 석고형을 사용하는 대량 생산 기법과 아리타 등지에서 들여온 값싼 코발트 안료 사용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민영화 이후 도자기에서 관요 시절과는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자 현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민영화 이후 도자기에서 눈에 뜨이는 것 중 하나가 굽에 청화로 분(汾)자가 들어간 것이 있다는 점이다. 이 것이 들어가 있는 항아리들은 대개 청화와 녹색으로 발색되는 크롬을 함께 사용한 모란문이 들어 있어 누가 보아도 민영화 이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분(汾)자는 일종의 분원리산임을 증명하는 표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분원(汾院)의 분자가 나눌 분(分)이 아니라 클 분(汾)자를 쓰고 있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도 없거니와 현재로서는 알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오늘 분원리 관요의 폐지와 민영화 이후에 보이는 분(汾)자 등에 대해 내 나름의 관심을 피력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것은 근래 구입한 백자양각포도문주전자편 때문이다. 뚜껑의 손잡이 일부는 떨어져 나가고 주전자 몸체의 손잡이는 아예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며 주구는 일부 달아나 버리고 없다. 말하자면 몸체만 동그마니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색감만은 일품이다. 짙은 물색을 연상시키는 청백의 유약이 곱게 입혀져 있으며 양각의 포도문이 전면을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다. 관요 시절의 청화에서 보이는 포도문과는 달리 포도알은 보이지 않고 줄기와 잎만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청백의 유약도 양각의 포도문도 아니다. 굽 없이 굽 안쪽을 파낸 자리에 음각으로 분원(汾院)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분원명도 처음이거니와 청화가 아닌 음각명도 못 보던 것이어서 이채롭다. 이 분원명으로 인해 백자양각포도문주전자편은 민영화 이후의 분원리산임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확실한 민영화 이후의 도자기를 어디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것은 단순히 민영화 이후의 도자기 연구뿐이 아니라 20세기 초의 우리 도자기를 알아보는데 있어서도 더 없이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자양각포도문주전자편의 가치는 크고도 무거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분원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앞강과 그 앞강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검단산과 팔당댐과 예봉산 그리고 다산의 마현과 운길산과 두물머리를 아득히 바라보며 몽환적인 감상에 젖어 보았던 적도 오래 전 일인 것 같다. 세월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이제는 추억을 만드는 일보다 추억을 더듬어 보는 일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허전해 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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