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6) 대성학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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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연구] (16) 대성학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김연갑(전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분과위원장)

  • 특집부
  • 등록 2023.08.21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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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서 한영서원과 애국가와 관련 사항을 살펴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밝혔다. 이번에는 역시 같은 시기 민족교육 학교인 안창호 설립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애국가 상황을 통해 작사자 문제를 짚어 보기로 한다.


대성학교는 1908926일 개교하여 1912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 평양에 세워진 학교이다. 설립자는 안창호(安昌浩)이다.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로 가능했다. 교육 방침은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첫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이후 민족사학으로 알려져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대성학교 시절 수학교사로 재직시 안창호로부터 "애국가 작사는 윤치호”라고 들었다는 증언을 한 채필근 목사

 

교장에 윤치호,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09년 이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본 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을 전개한 것이 사건이 되어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곤란한 처지가 오게 되자 19104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였다. 학교는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고 폐교를 맞았다.


이 학교는 윤치호가 초대 교장으로 안창호가 대변 교장이란 사실이 주목된다. 이 사실은 이광수의 기록에서도 확인 된다. 1927년 대중잡지東光10호에 쓴 規模-尹致昊 氏라는 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 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지기상통하여 대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신민회의 대표로 활동하여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형을 살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결국 작사자 논란의 두 주역 윤치호와 안창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는 지기상통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안창호는 학교 운영상 명성이 높은 윤치호를 교장으로 모셔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상의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해외 활동에 대비한 것이다. 개교식에 윤치호는 개교 환영사를 했고, 3여년을 재직하였다.


 

1955년에는 "안창호 작사는 신화”라고 했다가 8년 후에는 "안창호가 지어 윤치호 명의로 발표했다”고 왜곡한 주요한

 

 

그런데 이 대성학교와 애국가의 관계도 주목이 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계기로 드러난 사항이다. 먼저 1910년 대성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재직했던 채필근(蔡弼近/1885~1973) 목사의 증언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로교 목사이며 신학자이다. 보기 드문 동경제대 출신의 엘리트 목회자로, ‘12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채필근은 평안남도 중화(中和)출신으로 1905년 숭실학교를 마치고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인 1910년부터 대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기간에 안창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1955, 4월 기독교 전문지 신앙생활에 발표한 글이다.


"내가 25세 때에 대성학교(안창호 운영)에서 수학을 가르쳤지요. 그때 내가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는 본교 명예교장 윤치호 선생이 작사했습니다.’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황실가(皇室歌)와 태극가(太極歌) 등 옛 노래들을 평양서 해방 후까지 보존했는데 황실가와 애국가는 전혀 다릅니다. 내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씨 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김인서 목사가 한국전쟁 중 들었던 것을 자신이 발행하는 종교전문지에 소개하여 알려진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작업을 벌여 대척 관계가 된 당사자인 안창호는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윤치호의 1906~1907년 작사1910년 국민회의 국민가채택국민회의 애국가로 사용1940년 임시정부, 국민회 안익태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19459월의 자필<가사지> 존재라는 맥락적인 흐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다음은 안창호의 생애와 흥사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증언이다. 주요한은 '흥사단 맨'이다. 1920514일 흥사단 입단식에서 이광수는 입단 번호 104, 주요한은 105번을 받았다. 그리고 원동지역 회원으로 이광수가 1, 주요한이 2호로 입단하였다. 임시정부 초기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함께 했고, 해방 후에 흥사단을 재건하고 방대한 안창호에 대한 전기를 저술했다. 1963년 발행된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대성학교 시절의 일부이다.

 "대성학교 대리 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이다. 허술한 짜임새의 주장인데다 명의를 바꾸었다는 것은 오늘이나 당시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대성학교 설립과 '역술 찬미가' 발행 시점에서 오류임이 드러난다. , 흥사단이 밝힌 대성학교 개교는 19089월이다. 그러나 애국가인 애국적 찬미가 14을 수록한 찬미가가 발행된 1908625일이다. 더욱이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함에서 위의 '도산전서' 기록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의외인 것은 주요한이 정 반대의 주장을 한 바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주장을 하기 8년 전인 1955419일자 경향신문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주장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런 주요한의 입장 변화는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후세인들이 어느 하나만 보고 편견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결과적으로 첫 주장은 순수한 개인적 소신 표명일 것이나 후에 흥사단 업무를 맡으면서 압력에 의해 번복을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의 증언을 통해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 작사라는 말을 하였다라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6월에 발행되었는데, 2개월 후 대성학교에서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의 명의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은 주요한의 왜곡이다. 결론은 "대성학교에서도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