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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7)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

특집부
기사입력 2023.08.04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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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 자한편에는 공자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사람이 하루 세끼 식사를 하려면 숟가락과 젓가락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들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모르면 몰라도 인간이 수렵시대를 접고 농경문화를 통해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숟가락과 젓가락의 용도는 변하지 않고 있다. 이런 것을 두고 과학적 용어로는 완전한 발명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세월과 상관없이 숟가락은 음식을 떠먹는데 젓가락은 반찬 등을 집어먹는 도구로서 그 기능을 상실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외형의 변형은 다소 있을 수 있자만 그 본래의 의미나 용도에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을 과학적으로는 완전한 발명품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완전한 발명품 중의 하나인 숟가락과 젓가락이 왜 도자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도자기로 만든 사발과 대접 등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에 준하는 정도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도자기로 만든 숟가락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청자에서도 보이고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선생 기증품 중에도 다섯 점 한 세트의 백자로 만든 숟가락도 보인다. 하지만 절대적 빈곤이라고나 할까.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아주 귀하고도 귀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동원 선생 기증품인 다섯 점의 일괄 백자 숟가락은 일반적으로 흔히 보이는 모양이 아니라 흡사 서양의 수프를 떠먹는 스푼처럼 작은 주걱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근래 내가 구입한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도 바로 그런 형태의 것이어서 주목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분원리산인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현재 손잡이 부분이 결실되고 몸체만 남아 있다. 유색은 맑고 깨끗한 청백색인데 밑 부분은 유약을 훑어내고 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U자형으로 깊게 패인 내저에는 색감도 고운 청화로 봉황문을 그려 넣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2006년 8월에 펴낸 '광주 분원리 백자요지'를 보면 여기에도 백자청화숟가락편이 한 점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아쉽게도 몸체는 없고 가운데가 U자형으로 얕게 패인 손잡이 부분만 남아 있다. 따라서 이것과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을 대조하면 완벽한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삼촌이 없는 대신 고모가 여섯 분이나 된다. 6.25때 전사한 아버지를 생각해서인지 나는 고모님들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런 고모 여섯 분 중 넷째 고모까지가 고향집에서 차일을 치고 혼례를 전통 방식으로 치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넷째 고모 때뿐이다. 뜬금없이 고모 결혼식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혼례식에서 본 숟가락이 바로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과 같은 모양으로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가운데가 U자형으로 깊게 팬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 같은 백자 숟가락은 밥 등을 떠먹기에는 불편한 구조다. 오히려 국물 같은 것을 떠먹기에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생활에서보다는 결혼식 같은 데서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청화로 그려진 봉황문이 그런 추론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봉황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용과 더불어 상서롭게 인식되던 대표적인 상상 속의 동물이 아니던가.

     

    107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jpg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편고재 소장) 입지름(가로x세로)x굽지름(가로x세로)x높이 4.5x8.5x2.5x6.6x1.5Cm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지인에게서 지인 가게로 넘어 가 있던 것을 근래 구입한 것이다. 원 주인인 지인의 이야기로는 분원리 인근의 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설명이 아니더라도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19세기 분원리 산이 분명하다. 태토며 유약이며 청화의 그림 솜씨 등 어느 것 하나 분원리 전성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유물인 것이다. 사실 이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다가 근래에 와서야 구입을 한 것이다. 도편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만큼 흔치 않은 물건이어서 충분히 이야기 거리가 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도자기 특히 조선 후기 백자청화에서 봉황문은 생각보다 그리 귀한 문양은 아니다. 봉충이라고 해서 특히 항아리에서 많이 보이는데 이처럼 선조들이 봉황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용과 더불어 행운을 가져다주는 새 중의 왕으로 숭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도 그렇듯이 봉황도 상상의 동물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생김새도 특이하다. 봉황의 형상은 기러기의 앞모습에 기린의 뒷모습, 뱀의 목에 물고기 꼬리, 황새의 이마에 원앙의 뺨, 용의 무늬와 호랑이의 등, 제비의 아래턱과 닭의 부리, 그리고 오색의 깃털을 갖추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새들의 특징을 한 몸에 모아놓은 복잡한 구도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진 새들 중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백자에서 봉황은 흔히 볼 수 있는 문양이라고 했지만 모든 기종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백자 숟가락에 청화로 봉황이 들어간 것은 나로서는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이 남성을 상징한다면 봉황은 여성적인 면이 강하다. 이런 여성의 이미지는 진시황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시황은 궁중의 비빈들에게 봉황 비녀를 꽂고 봉황 머리 모양의 신발을 신도록 했다고 하니 여성 이미지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논어> 자한(子罕)편에는 공자가 ‘봉황도 날아오지 않고 황하의 그림도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끝인가 보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봉황의 상서로운 길조로서의 남다른 의미는 여기서도 강하게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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