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운학 이동안 선생. 한 때 전국을 떠돌며 온갖 기예로 명성을 떨친 재인이다.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안 선생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이동안 선생의 집안이었지만, 선생의 아버지인 이재학은 이동안 선생에게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게 하는 대신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선생은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급기야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결국 선생은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간다.
14세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했다. 선생이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아버지 이재학이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이끌려 화성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한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는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이 눈 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 나온다.
선생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광무대에 취직 이곳에서 재인청의 춤 선생인 . 김인호선생으로부터 팔박기본무.태평무.진쇠춤.엇중몰이신칼대신무등 30여 종 춤을 배웠다.
발탈로 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 인정을 받은 선생에게는 춤을 배우는 제자들이 그리 몰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한스런 일이다. 발탈의 맥이 끊기지 않기 위해 받은 것이지만. ”(이동안)
나는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재인청 춤의 정수인 태평무를 전수받았다. 이동안 선생은 정주미에게 ‘태평무 이수증’을 수여하고 재인청 본류의 장단이 담긴 ‘태평무’음악을 연주녹음하여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의 본류를 지키도록 전수를 해주셨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토속민요의 힘, ‘일노래, 삶의 노래’
- 2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
- 3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일노래, 삶의 노래' 오는 23일부터
- 4(34) <br> 노동은의 ‘잘못된 조건’ 둘, ‘교묘한 조작’
- 5유인촌 문체부 장관, '국제문화정책 추진전략' 발표
- 6'새 국악진흥법' 시행령·시행규칙 공청회 31일 개최
- 7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4)<br>북해도아리랑
- 8문화체육관광부, 지역 예술단체 22개 선정
- 9김연자 "노래 좋아 달려온 50년…88 폐막식 하늘 지금도 생각나"
- 10스페인의 꽃, '파두&플라멩코' 부산에서 만나다, 선착순 200명 예약
- 11도자의 여로 (146)<br> 분청귀얄문잔편
- 12전란 속에 피어난 춤, 김동민 일가의 춤4代가 이어준 '오래된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