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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춤꾼 이동안, 나의 스승 이동안

정주미/재인청춤전승보존회장

특집부
기사입력 2023.06.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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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학 이동안 선생. 한 때 전국을 떠돌며 온갖 기예로 명성을 떨친 재인이다.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안 명인은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 내린 세기의 광대로 김인호의 제자다. 명창 이동백과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의 증언에 따르면 김인호는 구한말 순종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놀았던 광대 중의 광대였던 인물이다.

    이동안 선생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이동안 선생의 집안이었지만, 선생의 아버지인 이재학은 이동안 선생에게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게 하는 대신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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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학(雲鶴) 이동안(1906~1995)

     

    하지만 선생은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급기야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결국 선생은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간다.


    14세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했다. 선생이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아버지 이재학이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이끌려 화성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한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는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이 눈 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 나온다. 


    선생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광무대에 취직 이곳에서 재인청의 춤 선생인 . 김인호선생으로부터  팔박기본무.태평무.진쇠춤.엇중몰이신칼대신무등 30여 종 춤을 배웠다.


    발탈로 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 인정을 받은 선생에게는 춤을 배우는 제자들이 그리 몰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한스런 일이다. 발탈의 맥이 끊기지 않기 위해 받은 것이지만. ”(이동안)


    나는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재인청 춤의 정수인 태평무를 전수받았다. 이동안 선생은 정주미에게 ‘태평무 이수증’을 수여하고 재인청 본류의 장단이 담긴 ‘태평무’음악을 연주녹음하여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의 본류를 지키도록 전수를 해주셨다.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정주미)


    사진=재인청춤전승보존회 제공
    정주미(국가무형문화재 27호 승무/경남무형문화재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을 이수자) (사진=재인청춤전승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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