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3 (월)

[추모사] 선생님, 이일주 선생님, 난석(蘭石) 이일주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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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선생님, 이일주 선생님, 난석(蘭石) 이일주 선생님

유영대(전 국악방송 사장)

  • 특집부
  • 등록 2023.06.06 10:30
  • 조회수 17,133

 

선생님을 뵈올 때나, 전화를 드리면 선생님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는데, 이제 ‘선생님’하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가족들, 친구들, 제자들을 이 자리에 남겨두신 채, 그 따뜻한 모습만 남겨두시고 먼 길을 가셨습니다. 왜 더 찾아뵙지 못했던가 후회가 됩니다. 선생님과 함께 해묵은 소리에 대한 선생님의 기억들을 찾아 기록했어야 했는데, 이제 이렇게 훌쩍 떠나시니 아쉬움만 가득합니다. 오랜 시간 병고에 시달리셨기에 언제든 선생님을 뵐 수 있으려니 미루다가,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신 선생님과 만나게 되는 제 자신이 속절없이 미워집니다. 선생님은 지금 아드님과 가족들, 소리의 기둥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고아로 남아버린 제자들이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선생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당대의 명창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충청도에서 출생하여 전라도에 터를 잡아 동초제 2대 전수자로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2호 심청가 보유자로 계셨습니다. 그리고 전라북도를 동초제 판소리의 성지로 끌어올린 주역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부터는 전라북도립국악원 창악교수로 초빙되어, 2001년까지 만 여명의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평생의 직장이셨지요. 선생님이 배출하신 제자들 수십 명이 전국대회 대통령상을 받는 경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이면서 사랑하는 가족 송재영·장문희 선생이 선생님의 뒤를 이어 심청가로 전라북도 문화재 보유자가 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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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대(전 국악방송 사장)

 

선생님은 사설이 이면에 맞고 분명한 판소리 다섯바탕을 오정숙 선생님으로부터 올곧게 배우셨고, 이날치로 상징되는 집안의 소리전통을 이어받으셔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높은 소리세계를 성취셨습니다.선생님은 수리성이 고음에서 빛을 발하며, 애원성이 특히 좋아 사람을 울리는데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셨습니다. 대 명창들을 사사하며 목을 단련시켰기 때문에, 다양한 발성기법을 구사하며, 서슬 있는 소리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기량 높은 명창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동초바디만으로 다섯바탕을 모두, 한마디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음반으로 만들어내는 대 위업을 달성하셨습니다. 오바탕 가운데서 <적벽가>를 마지막으로 닦으시고 음반을 만드신 다음, 차복순 선생을 통해 저에게 보내주시면서, 뭐라고 평을 해달라는 말씀을 해 주셨지요. 선생님은 귀한 소리 <적벽가>를 일흔이 넘은 나이에 오정숙 명창에게 닦기 위하여 대둔산 동초각으로 들어가셔서 배우시고, 몇 달 동안 익히신 다음 비로소 음원으로 만드셨지요. 일흔이 넘어 이루어낸 선생님의 <적벽가>를 들어가면서 그 소리 한마디 한마디, 장단마다, 그리고 한 대목 한 대목 꼭꼭 담아낸 정성과 기백이 고스란히 감동으로 제게 전해졌습니다. 선생님의 소리는 최고입니다.


선생님이 일흔이 넘어셔서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서 완창을 하셨을 때의 기억이 저는 정말 새롭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한 대목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그림을 펼쳐놓듯 소리판을 구현하셔서 관객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내용을 멋지게 노래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의 벽이 있어서 간혹 다음 대목이 쉽게 떠오르지 않으면, 아주 당연스레 다리막 옆에 숨어있는 제자를 향해 "다음은 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잘 들리지 않으면 "뭣이라고야?”라고 재차 묻는데, 이 대목에서 관객들이 아주 열광하고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아주 귀엽고 소박한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정감있게 물어보는 태도가, 마치 공연의 한부분으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숨어있던 제자도 자신있게 큰 목소리로 다음 대목을 대놓고 던져줬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빼어난 공력으로 슬픈 대목을 슬프게, 해학적인 대목을 해학적으로 구사하여 관객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그 완창무대에서 보여주신 모든 대목에서 선생님의 소리공력을 느낄 수 있게 하셨죠.

 

선생님은 스승을 깍듯이 모셨고, 제자사랑이 특히 각별하신 분이셨습니다. 스승인 오정숙 명창을 신주모시듯 받들었고, 그런 소리에 대한 존중을 제자들에게 모두 베푸신 분이셨습니다. 제자를 가르치는 현장에서는 냉정하리만치 차갑게 야단치시면서 회초리를 드셨지만, 여느 자리에서는 더 이상 자애로울 수 없이 무한 사랑을 제자들에게 한없이 베푼 분이셨죠. 선생님은 제자들을 밥먹고 살 수 있게 악착같이 밀어주신 분입니다. 제자가 대회에 출전할 때면 언제나 그 언저리에 계시면서 조바심을 보내신 분이셨죠. 제자가 잘 했는데도 1등을 받지 못하면 일차원적으로 대응하시면서 제자들의 기를 살려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지금 머리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비는, 선생님과 만나는 마지막 자리에 서 있습니다. 판소리에 대한 높은 경지, 넓은 식견, 우아한 품격을 고루 갖추신 우리시대의 명창. 제자들의 소리에 대한 열망을 격려하고 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참 스승. 외로움을 많이 타셨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제자를 아들로 삼아서 품어주시고 스스로 그 외로움을 떨치며 따뜻하면서도 유머의 정신을 가지셨던 분.


이제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마지막 자리에서, 길거리의 풀들과 함부로 핀 꽃들이 너무 기운이 찬 여름날입니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구절, "봄이 가고 여름이 오니 녹음방초 호시절”이라는 이 계절에 선생님을 배웅합니다. 선생님은 소리 속에서 올곧게 사시다가 끝끝내 소리로 신선이 되신 분이십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길에 선생님의 이름을 다시 부르면서 선생님을 그리워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일주 선생님

 

2023년 6월 7일

유영대(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