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3 (월)

[단독] 6월 1일 ‘의병의 날’, “反義兵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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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6월 1일 ‘의병의 날’, “反義兵을 아십니까?”

1908년 춘천 정미의병, 반의병 자료
춘천 부내면 수비대 장악의 역설
부내면 면장 외 11개 이장들의 청원
‘춘천의병아리랑’ 연구과정, 춘천에서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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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서의 부내면 면장 백낙성과 11개 이장 외 10명의 연명 부분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의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로 2010년 행정안전부가 제정하였다.


의병(義兵)이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자위군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民軍)이다. 의병의 창의는 향토와 동족의 방어를 위한 것이며, 나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민족 감정의 발로였다. 결국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의병의 창의다. 그래서 승패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전투하는 것을 본분이라 여겼다. 박은식(朴殷植)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둔 의병전투는 한말 의병으로, 1895∼1896년의 제1차 의병전쟁(을미의병)과 1905∼1910년의 제2차 의병전쟁(을사의병과 丁정미의병)이다. 이 중 제2차 의병전은 다시 의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나누는데, 정미의병은 역사상 마지막 의병전쟁이란 점과 강원도 춘천의병이 중심이란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의병운동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인 1908년을 예로 들면, 강원의병은 전국 13도 의병 중 참여 의병수·순국자·빼앗긴 총수·일본군 사상자 수 등 의병활동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 지표에서 전국 순위를 기록했다.(대동공보, 1909년 3월 14일)


춘천 정미의병은 1907년 7월 태동하여 확산되고, 1908년 들어 가장 강력했고, 1909년 들어 퇴조했다. 이 춘천 정미의병에 대해서 일제는 이런 대응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1907년 6월경 강원도관찰부를 방비하고 춘천의병의 재봉기를 막고자 춘천에 경무고문부 춘천지점을 설치하여 경시(警視-경찰서장급)1명, 경부(警部)5명, 고문의(顧問醫)5명, 순사 101명을 배치하였다.”(만세보, ‘경무고문부 춘천지점’, 1907년 6월 12일)


고종퇴위ㆍ정미조약ㆍ군대해산과 같은 일제침략에 반발한 춘천민의 항일의식의 폭발과 국권수호를 위해 분투중인 고종세력의 의병추동 활동이었다. 1907년 8-9월 두 달간 지속된 춘천 정미의병의 확산기에는 유생 신분으로 농사를 업으로 삼던 인찬옥은 1907년 7월 서울에서 내려온 고종세력의 수하 김제현의 창의활동에 고무되어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춘천 사내면에서 창의하여 소모활동을 펼치다가 7월 말경 춘천경무고문 지부에 포착되어 황기운(黃奇雲)·한병이(韓炳伊)와 함께 춘천군 경무서에 수감되었다. 인찬옥의 수감 이후 보름 정도 지난 8월 중순경부터 춘천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본격화되었다.(1908년 8월 1일, 황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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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2월 춘천 부내면 면장과 11개 리 이장등의 연명 수비대 청원서

 

1907년 9월 한 달간 춘천의병은 춘천읍을 에워싸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강원도관찰부로의 진격을 시도했다. 특히 의병들이 춘천읍내로의 진격을 성언한 것은 9월 20일 전후였다. 그 당시 화천에 집결한 의병들이 홍천군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후 일부는 화천으로 퇴각하고 일부는 타처에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춘천을 포위 습격한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강원도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점차 춘천으로 모여들어 춘천을 포위하려는 형국을 이루자 춘천수비대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나아가 정미 춘천의병 중 2-300백 명의 포군을 포함하여 군사수가 700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부대를 이룬 의병진도 춘천읍을 습격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 의진은 모두 상하의 흑색의 복장을 갖춰 입고 배낭을 메고 일본군을 만나면 교전하지 않고 의병을 규합할 뿐이며, 척후를 사방에 보내 일본군의 기습을 방비하고, 행진 때나 유진 때에 군율이 엄격하였다. 이를 보면 이 의진은 춘천 정미의병진 중에서 군사수나 규율과 훈련이 가장 엄하고 장비가 가장 우수했던 부대로 보이는데, 이러한 부대의 최종 목표는 춘천읍을 습격하는 것이었다.(대한매일신보, ‘의병소식’, 1908년 9월 20일)


춘천 정미의병은 1907년 7월 일어나 약 1년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춘천 의병활동의 특징은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가 발표한 논문 ‘춘천지역의 정미의병운동’(의암학연구 제19집)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1907년 7월 고종퇴위ㆍ군대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이는 단발령 이후 춘천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다른 지역 의병에 비해 늦게 일어났지만 짧고 굵게 활동하였다. 둘째, 다른 지역 의병들처럼 서울의 근왕세력과 춘천의 재야세력 들의 연합으로 일어났다.


셋째, 신분의 벽을 극복한 의병이었다. 유홍석ㆍ최천유ㆍ박선명ㆍ지용기ㆍ인찬옥ㆍ김정삼 등이다. 이중 유와 인을 빼면, 모두 양반이 아니었다. 이들은 평민층의 의병참여를 촉진하여 의병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넷째, 춘천의병은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일본의 군대와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또 이들은 친일파와 일본인들을 죽이고, 시설을 파괴하고, 관청을 습격하였다. 이는 일본의 한국통치를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춘천의병을 강하게 진압하였다.


다섯째, 춘천의병은 강원관찰부 점령을 최종목표로 삼았다. 춘천의병은 1907년 9월 한 달간 춘천을 사방에서 포위하였다. 이 시기 상황은 1907년 9월 24일 의병선유사에게 순종이 ”지방이 불온한 가운데 강원도가 가장 심하다 하니 속히 출발하여 가가호호 설유하여 일반 적자(赤子)들로 하여금 생업을 안돈하도록 하라.”는 칙교를 내릴 정도였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정미의병전에서 춘천의병은 뚜렸한 목표를 갖고 강력하게 항전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만큼 일제의 거센 무력동원이 있게 되었다.

 

바로 이 춘천 정미의병전이 일제의 강한 통제 하에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료가 발굴되었다. (사)아리랑연합회가 ‘의병아리랑’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1908년 2월 춘천 부내면에서 산출된 ‘수비대 잔유 청원서’이다. 이때 수비대는 1907년 9월에 강원관찰부에 파병되어 5개월 만에 철수 하게 된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기간은 유생 신분으로 농사를 업으로 삼던 인찬옥이 1907년 7월 서울에서 내려온 고종세력의 수하 김제현의 창의활동에 고무되어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사내면에서 창의하여 소모활동을 펼치다가 7월 말경 춘천 경무 지부에 포착되어 황기운(黃奇雲)·한병이(韓炳伊)와 함께 춘천군 경무서에 수감되었다. 인찬옥의 수감 이후 보름 정도 지난 8월 중순경부터 춘천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본격화 되었다.(대한매일신보, 의병소식, 1908년 8월 1일)


이 때 부내면 면장은 물론 11개 리 이장들이 수비대장에게 철수하지 말고 더 머물러 달라는 청원을 한 것이다. 이 자료가 춘천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아 실제 수비대에 전달, 접수되었는지 여부는 단정할 수가 없으나, 의병에 반하는 활동임으로 ‘반의병’자료인 것이다.


‘반의병’에 대한 정의는 없지만 대략 이런 정도로 볼 수 있다. 즉, 선유조칙 낭독, 의병 해산과 귀순 권유, 고시문 게시, 자위단 창설 지원, 의병 동태 파악 보고, 기득권 유지를 위한 상하 갈등 조장, 등을 말 한다. 이 중 면장과 이장 연명의 수비대 잔유 청원 행위는 이들 행위보다는 더 적극적인 반의병 활동이다.


춘천군의 부내면은 강원관찰부가 소재한 곳으로 이후 춘천면→ 춘천읍→ 춘천부→춘천시로 변천한 중심부이다. 당시 서명과 수결한 11개 리(里)는 허문리 사창리 대판리 가연리 위동리 낙사원 보안리 후평리 수동리 전평리 죽전리이다. 이들 이장 11명 외 10명이 연명하여 청원하였다. 청원서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수비대(守備隊)의 중대장(中隊長) 공과 소대장(小隊長)공과 특무정교(特務正校)공 세 분께 청원합니다. 이곳에 부임한 이후로 폭도가 그치고 백성들이 편안히 쉬오며, 기율(紀律)을 더욱 엄히 하여 털끝만큼도 침범함이 없었습니다.

통역하는 권응두씨도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주와 재능이 뛰어나 역관의 소임을 이리저리 고심하여 안심시키기를 옛날과 같이 하였습니다. 이에 도내(道內) 생민들이 의지하기를 장성(長城)같이 하였는데, 이번에 거두어 돌아간다는 경우(境遇)에 이르렀사오니, 슬프고 허전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일제히 호소하오니 민정을 굽어 살피셔서 계속하여 머물러서 촌마을이 평온하고 폭도가 없어지게 하심을 엎드려 바랍니다. 1908년 2월 9일 수비대대장 각하”


약 7개월 동안 주재한 수비대에게 "폭도가 그치고 백성들이 편안히 쉬오며, 기율(紀律)을 더욱 엄히 하여 털끝만큼도 침범함이” 없었으니 철수를 하지 말고 "도내(道內) 생민들이 의지하기를 장성(長城)” 같으니 계속 지켜 달라는 청원이다. 물론 이런 투는 유가적(儒家的)인 겸사(謙辭)일 뿐이라고 쳐도 "일제히 호소하오니 민정을 굽어 살피셔서 계속하여 머물러 ” 달라는 것은 귀와 눈을 감고하는 반의병 활동의 극치이다. 이는 그만큼 수비대가 철저하고 완벽하게 장악한 반증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청원의 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춘천의병 연구 논문 등에 부내면 상황은 "의병의 습격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였다며 서·남·북 세 방면에서 강원도관찰부를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기는 했지만 끝내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1907년 8월 강원도관찰부에는 수비대 1개 소대, 경찰관리 17명이 배치되어 있어서 무력이 약한 의병이 직접 공격하여 관찰부를 점령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 자료에 의하면 수비대의 일본인은 ‘춘천수비대의 켄다(謙田 또는 가마다) 대위’, ‘시마다(島田) 경시’, ‘수비대 이와모토(岩本) 소위’, ‘후지이(藤井) 소위’, ‘가와이(河合) 소위’가 보이나 청원서의 구체적인 중대장, 소대장, 특무정교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춘천수비대”의 켄다(謙田) 대위와 "보좌관 시마다(島田) 경시는 춘천수비대장과 협력하여 부하를 지휘해 순사 24명과 경무관 총순, 순검 등 15명을 주야로 근무하게 하고~”(위의 논문)라는 기록으로 또 가장 많은 출현 빈도를 보이는 가와이(河合) 소위가 세 직위 중의 인물들로 추측된다.


이 자료를 공개한 (사)아리랑연합회는 "이런 자료를 통해 일제의 병탄이 얼마나 철저하게 진행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는 차원에서 연구 자료로 제공하려 한다.”고 밝혔다.


()아리랑연합회는 춘천의병아리랑, 문경의병아리랑, 구미의병아리랑 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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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리랑연합회는 춘천의병아리랑, 문경의병아리랑, 구미의병아리랑 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있다.